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망나니 호칭 - 지존이 무상하다 얼마 전 "지존파"라는 이름의 폭력 단체가 끔찍한 일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보다는 그들 망나니 패거리를 불러주는 호칭이 너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과, 또 이를 당연시 불러 주는 언론 매체의 무신경에 있다. 지존이 무슨 뜻인가? 그네들이 이 지존의 말뜻을 알고 조직명을 삼았는지는 모르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결같이 지존파, 지존파하고 불러주는 통에 일반인들은 "지극히 나쁜 놈들" 정도로 알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더할 나위 없이 지극히 존귀한 분, 옛날로 치면 임금님이나 존경하는 스승 또는 조상을 공경하여 부르던 호칭이 바로 지존이 아니던가. 게다가 지존에 붙는 접미사 "파"는 또 무엇인가. "파"는 본래 물이 나뉘어 흐르는 갈래에서 유래한 한자로서 실학파니 낭만파니 보수파니 하는, 사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계통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런 돼먹지 않은 불한당들에게 이렇게 고상한 말을 붙이다니, 그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하다. 기껏해야 깡패라든가 패거리라고 할 때의 그 "패"나 한자어의 무리를 뜻하는 "배"라도 붙여 주면 고작이 아닐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무리가 어디 지존파뿐일까. 자식에게는 지존이라 할 수 있는 부모를 살해한 박 아무개, 여자 승객을 납치하여 살해한 택시 운전사, 법정 증언을 문제 삼아 잔인한 복수극을 벌인 어느 망나니 등 요즘 우리 사회는 온갖 망나니들의 행패로 어수선하다. 우리말에서 악인을 칭하는 용어는 한자어가 대부분이다. 선과 상반되는 악은 본디 모질고(불선), 더럽고(추), 나쁘기(불량) 때문에 미움(증)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고유어로는 "나쁜 놈" 정도가 되겠는데, "나쁘다"라는 말도 본래 악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준이 낮다(저)는 정도로 "덜된 놈"과 비슷한 말이다. 악인에 대한 한자어 가운데 불한당은 좀 유별나다. 땀을 흘리지 않는 자, 곧 노력하지는 않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화적떼를 지칭한다. 고유어처럼 보이는 깡패, 도둑, 건달 등도 한자어에서 유래했다. "깡패"의 "깡"의 어원을 영어의 "갱(gang)"으로 보는 분도 있으나 이는 한자어 강에서 찾는 편이 옳을 듯하다. 매나니로 억지스럽다는 뜻의 "깡부리다"를 비롯하여 "깡다구, 깡그리, 깡으로" 따위의 어휘도 모두 강이 경음화한 것이다. 따라서 깡패는 깡부리는 패거리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악인을 지칭하는 고유어는 앞서 말한 대로 나쁜 놈이나 못된 놈, 덜된 놈 또는 망나니나 개차반 정도가 고작이다. 용어의 가짓수도 적을 뿐더러 뜻도 한자의 악이나 영어의 bad와는 격을 달리한다. 우리는 인간을 보기를 이미 "되어 있는 존재(being)"가 아니라 장차 "되어지는 존재(becoming)"로 인식한다. 못된 놈, 덜된 놈은 인간으로서의 됨됨이를 미처 갖추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망나니는 옛날에 사형을 집행할 때 죄인의 목을 베는 짓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으로 "마구 낳은 이"의 준말이다. "마구(줄어서 "막")"는 아직 길들이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상태를 이름이니 "막국수, 막걸리, 막두부, 막소주, 막과자" 등이 그런 예이다. 또한 마구 운다, 마구 쏟다에서 보듯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해댄대는 뜻도 있다. 함부로 내뱉는 말을 막말이라 하고 닥치는 대로 해내는 일을 막일, 막노동, 막벌이, 마구잡이라 한다. "함부로"라는 뜻 외에도 "막"은 "마지막"의 준말로 쓰이기도 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을 "막판"이라 하고,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막가"라 이름한다. 여기서 말하는 "막가파 언어"는 바로 그런 상태의 언어를 지칭한 것이다. 망나니는 앞서 말한 대로 "마구 낳은 이"의 준말인데, 이는 아무렇게나 짜서 품질이 좋지 않은 무명, 곧 "막낳이"가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 붙여 쓰이게 된 것이다. 자식을 되는 대로 마구 낳기만 했지 제대로 길들이고 순화시키는 교육을 등한시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돼먹지 않은 망나니들도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됨됨이를 갖춘 인간이 될 수 있다. 나쁜 놈이라 일컫는 이들의 인품이 아직 낮기 때문에(본래말이 "낮브다") 수양으로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악인을 칭하는 고유어의 유래에서 보듯 비록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을 보는 우리 조상들의 눈은 그토록 관대하였다. 이젠 제발 더 이상 막다른 길로 내달리는,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막살하는(끝낸다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망나니는 없어져야겠다. "지존무상"은 그저 영화 제목일 뿐 지존은 지존 그대로 영원히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겠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형벌 관련 욕설 - 오라질 년과 경칠 놈 "도무지 어쩔 수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우리는 흔히 "도무지"라는 부사를 앞세운다. 불가능을 일컫는 단순한 말 같지만 속뜻은 그리 가볍지 않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언급된 이 말의 어원풀이가 맞는다면 결코 함부로 쓸 말이 아닌 것 같다. "도무(모)지"는 옛날 엄한 가정에서 자식이 잘못했을 때 아비가 눈물을 머금고 자식에게 비밀리에 내렸던 사형의 일종이라 한다. 도모지, 곧 한자어 도모지는 글자 그대로 얼굴에 종이를 바른다는 뜻이다. 꼼짝 못하게 결박한 자식의 면상에 물이 먹은 창호지를 겹겹이 발라 놓으면 그 종이가 마르면서 자식이 서서히 질식해 죽는다는 것이다.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인 부왕도 있었다지만 과연 아비가 자식에게 이런 끔찍한 형벌을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그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지금처럼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고 구타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홍명희의 "임꺽정"을 보면 형벌에 관련된 걸쭉한 욕설이 쏟아진다. "이 난장 맞을 년, 이 오라질 년, 주리를 틀 놈, 경을 칠 녀석" 등이 그런 예인데, "난장"이나 "오라', "주리", "경"도 결코 예사로운 벌이 아니다. 난장은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마구 쳐대는 곤장을 이름이다. 곤장의 크기도, 맞을 대수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뭇 사람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그래서 맞다가 죽을 수도 있는 형벌이다. 여기서 난장 맞을(난장 칠)이란 말이 나왔고, "네 난장을 맞을"이 줄어 "넨장맞을"이 되고, "제기 난장을 맞을"이 줄어 지금처럼 "젠장맞을"이 되었다. 주리를 틀 놈도 난장 맞을 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주리는 주뢰가 본말로 죄인이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대를 끼워 엇비슷이 비틀어 대는 형구틀의 이름이다. 오라질의 "오라"는 죄인을 결박하던 홍줄의 이름이다. "오라를 지다"의 준말이 "오라질"인데, 여기서 지다는 맞잡거나 포개어 손 위에 얹는다는 뜻으로 오랏줄에 묶인, 요즘말로 하자면 수갑에 채인 몸을 가리킨다. "우라질"은 오라질의 모음교체에 불과하다. "경치고 포도청 간다"는 말이 있다. 단단히 욕을 보고도 구속될 처지라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말하는 "경을" 경으로 알고 그 벌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순라꾼이 도둑을 잡아 순청(지금의 파출소 같은 곳)에 가두었다가 5경이 지나서야 풀어 주었으므로 "경을 치렀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 경은 더 무서운 경으로 소급된다. 경이라 하면 죄인의 얼굴이나 몸에 살의 일부를 떼내어 홈을 파고 그 속에 먹물로 죄명을 찍는, 이를테면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은 지독한 형벌이었다. 경을 자자 또는 묵형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형벌 욕설의 최상급은 "오살할(오사랄)" 또는 "육시랄" 놈이다. 오살이나 육시는 반역을 꾀한 이들에게나 내리는 극형으로서 보통 사람과는 무관한 벌이었다. 오살은 죄인의 머리를 찍어 죽인 뒤에 시신을 다섯 토막으로 갈랐으며, 육시는 죄인의 사지를 소나 말에 묶은 채 사방으로 달리게 하여 머리, 몸통, 사지를 찢어 죽게 하는, 그야말로 가공할 형벌이었다. 요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회초리(흔히 교편이라 불리는)조차 잡지 못하게 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옛 형벌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새삼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이들 형벌 관련 용어가 대부분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이런 극형이 먼저 중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정 많기로 소문난 우리 조상들이 그런 지독한 형벌을 만들어냈을 리 만무하다. 기껏해야 곤장이나 치고 오라나 지우는 정도에 그쳤을 터이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짜증이 날 때, 또는 남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무심코 이와 유사한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나 그 어원을 따져 보면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에 대한 꾸지람이나 경멸 또는 몹시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일을 통틀어 욕이라 한다. 욕을 달리 칭하여 욕설이라고도 하지만 욕어나 욕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본래부터 욕으로 생성된 언어는 없었다는 이야긴데, 말은 쓰기에 따라 칭찬도 되고 욕설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상도 방언에서는 수고했다는 인사말 대신 항용 "욕 봤다"는 말을 즐겨 쓴다. 이 말은 강간이나 치욕의 뜻이 아니라 그저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는 격려의 인사다. 우리 조상의 고운 심성이 그대로 반영된 예라 하겠는데, 어떻든 자신의 수향을 위해서라도 욕이나 욕설은 자제해야겠다. 욕설에 대한 막심 고리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되새겨 볼 만하다. "욕설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욕을 전하는 사람. 여기서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욕설을 뱉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된소리 현상 - 꿍따리 싸바라 빠빠빠 어찌 들으면 태국어나 아랍어 같은, 또는 고약한 욕설과도 같은 이 노래가 한때 유행한적이 있었다. 현란한 조명과 화려한 율동을 동반한 이 요란스런 노래에 젊은 세대는 물론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꿍따리 싸바라 - 우리말을 공부하는 필자로서 세간에 풍미하는 이 노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 노래말은 별 의미 없이 그저 "해 보는 소리"라고. 그렇다면 심심해서 내지르는 헛소리를 그토록 목청 돋우어 따라하고 온 몸을 뒤흔들어 대는 이런 풍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말이든 비록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그 말이 유행하는 연유나 배경은 있을 것이다. "얼러리 껄러리"도 비슷한 유형으로 보인다. 한 아이를 "왕따"시킬 때 노래로 불러대는 이 말은 굳이 따진다면 남녀관계를 뜻하는 "얼다(통정하다)"가 어원이다. 앞에 놓이는 "누구누구는 누구누구와 뭐뭐 했대요"라는 미지칭 대명사의 반복이 이를 대변해준다. 여기서 "껄러리"는 별 의미 없이 "얼러리"에 짝을 맞추는 뒷가지에 불과하다. "싸바라"의 경우도 "꿍따리"에 달라붙는 뒷가지로 본다면 꿍따리의 의미 파악이 핵심이 된다. 우선 비슷한 어형을 찾아보기로 한다. "궁따다"란 말이 있다.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딴소리 할 때 쓰는 말인데, 꿍따리와는 무관한 것 같다. 궁상을 떠는 짓을 일러 "궁떨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거리가 멀어 보인다. 궁둥이를 지역에 따라 궁딩이 또는 궁뎅이라 하고, 구멍을 옛말로 궁기라 한다. 꿍따리 싸바라가 궁둥이로 무엇을 싼다는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꿍따리는 "딴따라"와 같은 의성어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옛말에 풍각쟁이라 부르던 딴따라는 "탄타라 타"라는 북소리를 흉내낸 소리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꿍따리도 반주에서의 악기 소리, 곧 꿍꽝, 쿵쾅 따위를 흉내낸 말은 아닐는지. 꿍따리와 짝하는 "싸바라"는 더 모호하다. 대소변을 마구 배설한다는 "싸다"에서 온 말인지, 아니면 "싹수머리"가 없다는 "싸가지" 또는 이곳저곳을 배회한다는 "싸다니다", "싸지르다"에서 온 말인지 도시 종잡을 수가 없다. 결국 이런 결론에 미친다. 숨가쁜 템포의 반주음에 맞춘 현란한 조명과 발작에 가까운 율동, 그 속에서 현대인들은 목까지 차오른 불안과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이라고.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용인 노래에 제대로 된 의미가 담길 필요는 없다. 이런 노래말에는 된소리(경음)나 거센소리(탁음)가 제격일 터이니 문제는 된소리의 연속음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된소리, 거센소리가 현대인의 감정과 영합된 지는 이미 오래다. 사랑도 싸랑이요, 작은 것도 짝은 것이며, 사모님도 싸모님이라 해야 요즘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다. "끄 쌔끼 떵친 짝아도 썽깔은 꽤 싸납던데..." "쐬주를 깡쑬로 들이켰더니 속이 알딸딸하고 간뗑이가 찡한데..." "쯩도 없고 껀도 없어 못 나가고 그저 집꾸석 틀어박혀 쩜 천짜리 고스톱이나 쳤지 뭐냐." 된소리가 안 들어가면 말이 안 될 정도로 온통 경음 일색이다. 뿐인가. 골때린다, 쪽 팔린다, 쪽을 못쓴다, 빼도박도 못한다, 찍싸다, 야리꾸리하다, 뽕을 뺀다, 똥줄이 탄다, 뿅갔다, 띨띨하다, 싹쓸이하다, 찍소리 못한다, 똥창이 맞다, 똥줄이 탄다 등등 된소리투성이의 예를 다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종류의 말을 뱉을 때 현대인들은 정신적 쾌감을 느끼는지 모르지만 그 통에 우리말은 너무 살벌해지고 말았다. 본래 예사소리(평음)뿐이었던 한국어의 말소리는 전쟁을 비롯한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점차 된소리나 거센소리로 거칠게 변해 왔다. 그런데 요즘처럼 전쟁도, 가난도 없는 세상에서 말소리만은 왜 이렇게 고약하게 되었을까? 이는 아마도 상대적 빈곤감이나 복잡한 사회생활로 인한 갈등이나 불안 등의 심리 요인에서 기인한 것 같다. 좋은 것도 "좋아 죽겠다"고 하고 기분이 좋은 것도 "기분 째진다"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 뿐인가. "기가 막히게" 좋다에서 기똥차다, 죽여 준다, 끝내 준다에 이르러 그 표현법은 더 이상 갈 곳을 잃는다. 언어 도단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이른 게 아닌가 한다. 말도 안 되는, 곧 언어의 길이 끊어진 상태 말이다. 무의미한 언사 "꿍따리 싸바라"가 유행하는 현상이 바로 이런 단계에 이른 것이라 진단하고 싶다. 무질서, 과소비, 퇴폐 풍조, 폭력 사태로 얼룩지는 사회 병리 현상은 이런 거친 언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어 순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기 위해서도, 고운 우리말을 되살리기 위해서도 우선 된소리부터 자제해야겠다. "꿍따리 싸바라"라는 말은 제발 "꿍따리는 사라지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보은단 홍순언은 이조 중엽의 역관으로 공에 의해 당룡군까지 봉한 분이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 남자의 호기로 기관엘 들렸는데 대파의 말이 신기하다. "귀한 댁 출신의 처녀가 있는데 하루 저녁 해우채가 자그마치 천냥이요 하루 저녁 모신 뒤로는 일생을 받들겠다 합니다" 일종의 객기랄까 남자다운 성격의 그는 성큼 천금을 던지고 그 여성을 만났다. 그러나 너무나 성숙하고 나긋나긋하여 손 한 번 안 만지고 내력을 물으니 아버지를 고향으로 반장해 모실 비용이 없어 몸을 팔아 감당하겠노라는 끔찍한 얘기다. 효심에 감동되어 그냥 돌쳐서려니 여인은 울며 아버지로 모시겠노라고 하여 부녀로서의 인연을 맺고 헤어져왔다. 그 뒤 홍수언은 공금 포탈로 옥에 갇혔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시 사신을 따라 중국엘 들어갔는데 그의 딸이 병부상서 석성의 후취부인으로 들어앉아 있지 않은가? 석성도 그를 장인으로 대하고 극진히 굴었다. 그리고 구원병 파견에 대하여도 남달리 주선하여 이여송의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성 부인은 재생의 은혜를 잊지 못해 보은 두자를 무늬로 넣어 손수 비단을 짜서 선물로 하였으며 이것은 이조 오백 년에 가장 인정미있는 얘깃거리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홍순언이 서울 복판의 다방골에 살았고 그의 동네를 '보은단 미담'의 고장이라 하여 '보은단골' 또는 담을 곱게 꾸미고 살았다고 하여 '고운담골'이라고 하였다. 한 때 정객들의 사교장이던 비장그릴은 이 '고운담골'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가족 호칭어 - 며느리와 새아기 아들의 아내를 자부라 하고 우리말로는 "며느리"라 부른다. 시부모가 며느리를 다정스런 목소리로 "이애, 며늘아가!" 하고 부른다면 언뜻 생각하기에 매우 좋은 호칭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며느리라는 말의 본뜻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특히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권운동가라면 며느리 호칭 추방에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며느리 밥풀"이라는 꽃이름에 얽힌 사연에서 며느리란 말의 어원을 풀어 나가기로 한다. 옛날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하던 어느 며느리가 너무나 배가 고파 몰래 밥풀을 훔쳐 먹었단다. 이를 알아차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혹독하게 다스린다. 견디다 못해 며느리는 "제가 먹은 것은 밥이 아니라 이런 밥풀이에요."라며 삼키지 못한 밥풀을 혀 끝에 내보이면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이렇게 죽은 며느리는 밥풀나무로 환생하게 되었는데, 죽어서도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서만 피게 되었다고 한다. 며느리밥풀은 종류도 다양하여 새며느리밥풀, 수염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등으로 나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며느리주머니"나 "며느리발톱"도 있고, 심지어 "며느리밑씻개"라는 고약한 풀이름도 있다. 식물명에만 있는게 아니라 "쥐며느리"라는 동물명도 있고, "며느리고금"이라는 학질을 뜻하는 병명도 있다. "며느리바퀴"라면 쳇불을 메는 데 쓰이는 두 개의 좁은 테를 지칭하고, "며느리서까래"라는 서까래 이름도 있다. 며느리서까래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다. 옛날 대궐을 짓던 어느 목수가 마름질을 잘못하여 서까래를 너무 짧게 자르고 말았다. 짧은 서까래를 걸어 놓고 보니 집이 제대로 설 수 없는지라 목수는 큰 벌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사정을 안 며느리가 "아버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모난 서까래를 잇달아 걸고 짧은 것은 집모양을 내느라 일부러 멋을 부렸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라는 멋진 제안을 내놓아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다. 중벌을 받을 줄 알았던 목수는 오히려 임금님에게 큰 상을 받고 명장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본서까래에 덧붙이는 작은 것을 며느리서까래라 부르게 되었다던가. 이쯤 되면 "며느리"의 본뜻이 저절로 밝혀진다. 이 말의 본래 형태인 "마늘, 미늘, 며늘"은 하나의 주된 것에 덧붙어 기생한다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며늘아이"의 준말인 며느리는 내 아이(아들)에게 더부살이로 기생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조카며느리는 조카에게 딸린, 손자 며느리는 손자에게 딸린 지어미라는 뜻으로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호칭어임이 자명해진다. 짐승이나 조류에도 "며느리 발톱" 이란 게 있는데, 이 명칭을 통해보면 며느리의 본 뜻이 더 분명해진다. 소의 발톱 가운데 평소 땅을 디디는데 소용되는 것은 앞쪽의 두 발톱이요, 뒤쪽에 있는 두 개는 그저 여벌로 달려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며느리"란 유사시에나 쓰일 뿐 퇴화하여 쓸모없게 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이는 지나친 남성 중심의 사고가 언어에도 반영된 흔적이다. 내 집에 살러 온 며느리가 여벌의 존재이다 보니 가족들, 특히 시어머니나 시누이에게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속담에 "배 썩은 것은 딸을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고 했고, "며느리 아이 낳는 것은 보아도 딸이 낳는 것은 못 본다"고 했다. 게다가 "며느리 시앗은 열도 귀엽고 자기 시앗은 하나도 밉다"고 했다. 시앗이란 첩을 지칭하는 말인데, 아들은 첩이 많을수록 좋고 자기 남편의 첩은 하나도 용납할수 없다는 이야기다. 며느리를 얼마나 밉게 보았으면 이런 지독한 속담이 생겼을까. 고유어 며느리에 해당하는 한자 부도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부는 "겨집 녀"자에 "비 추"자가 합친 글자로서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형상이다. 아내를 뜻하는 처 자도 이와 같은 구조의 글자로서 그저 집안에서 청소나 하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지금 종래의 부부 호칭에서 안과 밖(내외,집사람)의 개념은 없어져야겠고, 며느리도 여벌로 딸린 존재가 아닌 꼭 필요한 동반자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남녀 평등을 원한다면 "며늘아가"라는 호칭에서 "며늘"을 다른 말로 교체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자주 쓰이는 "새아가"란 말이 산뜻한 인상을 준다. "새아기"도 좋고 "새아이", "새사람"도 무난할 것이다. 내 자식, 곧 내 아이에 대해서 새로 들어온 (생긴) 또 하나의 자식이란 뜻이다. 새아기도 나이를 먹어 또 다른 새아기가 생기면(시부모에게 손자가 생기면) 그때는 "어멈"이나 "에미, 어미"라고 부르면 족할터이다. 이 말에는 새아기에게도 자식이 생겼으니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하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애, 며늘아가!"라는 부름에서 "이애, 새아가!" 또는 "이애, 어멈아!"하는 부름으로 자연스레 옮겨갔으면 한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음식 이름 - 족발, 주물럭, 닭도리탕 "청와대 음식이 왜 칼국수입니까?" 김영삼 정권 시절 청와대를 방문한 젊은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대통령은 그것이 서민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가볍게 던진 질문이지만 정작 그 이름이 왜 칼국수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칼국수는 기계로 뽑아 내는 "틀국수"와는 구분된다. 또한 칼국수는 크기나 모양에서 수제비와도 다르다. 제조 과정에 칼을 사용하기는 하나 기계가 아닌 사람 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손국수"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먹는 음식에 "칼"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는 이유도 덧붙일수 있다. 서민적인 음식이 비단 칼국수만은 아닐텐데 "왜 하필이면 칼국수냐"는 질문에는 다분히 복선이 깔려 있다. 당시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사정의 칼날이 매서운 때라 이를 의식한 질문으로 보인다. 사정의 칼이든 칼로 만든 국수든, 칼국수는 어쨌든 좋은 이름은 못된다. 아구탕 또는 아구찜도 잘못된 이름이다. 아구가 아니라 "아귀"가 맞는 말이다. 입(구)을 속되게 말할 때 아가리 또는 아구통이라 한다. 아귀가 유독 입이 크다보니 아구로 변질되었나 보다. 못생겨서 미안하고 그래서 출세한 코메디언도 있다지만, 이 아귀 역시 지독히 못생긴 형상에다 아구탕이라는 폭력적인 이름으로 더 유명해지지 않았나 싶다. 잘못되기는 "족발"도 매한가지다. 족이라 하면 발의 한자말로 소를 비롯한 돼지, 개 , 양등 가축의 무릎 아랫부분이 식용으로 쓰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그런데 족이면 족이고 발이면 발이지 족발은 또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 따르면 "죽여서 각을 뜬 돼지의 발"로 족발을 규정하고 있다. 족발은 손발(수족)에서 유추되었거나 아니면 역전 앞, 처갓집과 같이 한자어에 고유어가 빈대붙어 이루어진 말인데, 이를 굳이 돼지의 발에만 한정 시킬수는 없다고 본다. 소발도 있고, 닭발, 개발도 있을 수 있으니 정확히 말한다면 "돼지발"이나 "돈족"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육류중에 "주물럭"이라는 이름이 보편화 된 지도 오래다. 아직 사전에는 등재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이 고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포에 있는 어느 식당의 여주인이 칼을 잃어버린 나머지 급한 김에 손으로 고기를 뜯었던 데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충무에서 출어하는 선원들에게 김밥을 만들어 주던 할머니가 어느 날 급한 나머지 김밥속에 속반찬을 넣지 못하고 대신 김치만 따로 담아 준 데서 비롯한 "충무김밥"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주물럭은 손으로 만진다는 "주무르다" 또는 "주물럭거리다"에서 온 말이다. 동사가 직접 명사로 쓰인다는 점도 그렇지만 의미마저 야릇한이 말을 이름으로 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 그 이유는 젊은 남성들이 이 고기를 씹으면서 입가에 흘리는 야릇한 미소에서 찾아야 할 것만 같다. 또 "닭도리탕"이라는 아주 고약한 이름의 음식이 있다. 음식이 고약한 게 아니라 이름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닭고기를 토막 쳐서 양념을 하여 볶은 것을 "닭볶음"이라 한다. 이런 닭볶음을 왜 닭도리탕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도리다"라는 동사는 둥글게 빙 돌려서 베어낸다는 뜻이다. 닭도리의 "도리"가 우리말 도리가 아니라면 일본어의 "도리(새를 뜻함)"를 말함인가? 일본어 도리는 우리말 닭에서 건너갔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닭도리는 말도 안되는 이름이다. 개고기를 뜻하는 사철탕, 보신탕도 좋은 이름은 아닌 것 같다. 구육, 곧 개고기를 고아 끓인 구장을 우리말로는 개장국이라 부른다. 개의 옛말이 "가히"였으므로 "가히국" 또는 "가히탕" 정도로 불렸을 것이다. 이 개장국이 언제부턴가 보신탕 또는 사철탕이라고 하는, 약간 포괄적이고 애매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몸 보신하는 게 어디 개고기 뿐일까마는 "개-" 라는 접두어가 주는 좋지 못한 인상에 애완동물을 먹는다는 외부의 따가운 질책을 의식해서인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만 결과이다. 보신탕, 사철탕이 널리 알려지면서 다시 "멍멍탕, 영양탕, 왕왕탕,"에서부터 "탕있음", "여전히 계속함", "개시했음"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으로 추상화 또는 암호화하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별칭이 많다는 것은 당당하지 않고 무언가 꺼린다는 증거다. 사람과 가장 친숙한 동물을 잡아먹는 다는 비인간적인 면, 거기에 살생을 금하는 불가의 계율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탓일게다. 개고기를 먹는 것이 우리 식문화의 오랜 전통이고, 또 지금도 그 고기를 좋아한다면 굳이 숨어서 구차스러운 모습을 보일 이유는 없다. 북한에서는 개고기를 "단고기"라 하여 평양 네거리에 버젓이 "단고기료리집"이라는 간판까지 내 걸고 있다. 개를 소주처럼 고았다고 하여 "개소주"라는 약용 음식도 있지 않은가. 식품으로 공식 인정을 받고 이름도 되찾아 떳떳이 이 고기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먹을수 있는 식품을 일러 옛말에는 "머구리"라 하였다. 현재의 용어로 말하면 "먹을거리"가 되겠는데, 보통 "먹거리"라 부르고 있다. 먹을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의 구분은 오랜 식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와 관습의 소산이다. 지역에 따라, 생활 습관에 따라 저마다 고유한 식문화 전통을 가졌으니 이를 두고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먹거리의 이름하나 붙이는 것도 결코 소홀히 넘길 수는 없으니 좀 더 정확하고 적절한 이름, 이왕이면 구미가 당기는 이름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노름 용어 - 고스톱 왕국은 피바가지 우리네처럼 놀이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 것 같다. 전국 곳곳이 노래방이요, 가는 곳마다 고스톱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 오락이라는 고스톱은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심지어 고스톱판에 끼지 못하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억지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사실 노는 일처럼 편하고 즐거운 것도 없다. 다만 놀아도 노래나 놀이에 그쳐야지 오로지 "놀고 먹고", "놀아날" 지경에 이르면 곤란하다. 놀이 또한 여가 선용에 그쳐야지 돈과 연관되어 그 일에 얽매이는 "노름"에 이르면 더더욱 곤란하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서 놀이방과 노름방, 놀이꾼과 노름꾼, 놀이판과 노름판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돈이나 재물을 걸고 노는 노름에도 시대에 따라 유행이 있다. 예전에는 골패나 주사위 또는 마작이나 투전놀이 같이 기물을 이용한 놀이가 대종을 이루었으나 최근에 와서 점차 카드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의 카드라면 꽃그림이 그려진 화투인데, 이 화투장의 그림은 인물 중심의 서양 트럼프와는 대조가 된다. 1년 열두 달에 걸쳐 나무와 꽃이 그려진 화투장을 보면서 못내 유감스러운 그림이 있다.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진 12월의 "비"가 바로 그것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버드나무 가지에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의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화가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 그림을 왜 바꾸지 못하는가. 꼭 그렇게 화투의 국적이 일본임을 밝혀야 하는지 그것을 묻고 싶다. 화투를 이용하는 놀이도 예전의 "나이롱 삥(뽕)"이나 "섰다"에서 "짓고 땡"으로 유행이 바뀌더니 지금은 "고스톱"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그 변화를 보면 놀이의 내용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명칭은 고유어에서 외래어로 교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스톱은 한때 "고도리(새 다섯 마리라는 뜻)"라는 일본어가 쓰였으나 이내 영어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뻥"이나 "뽕", "섰다"나 "짓고 땡"이란 명칭은 유치하기는 하나 그런대로 재미있는 우리말이다. "뻥이야!"라면 허풍이나 거짓말을 뜻하고 "뽕이 났다"면 비밀이 탄로났음을 나타낸다.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호시탐탐 노렸던 어떤 수를 터뜨린다는 의미로 이런 명칭이 생겼을 것이다. "땅(또는 땡)"은 땡땡구리의 준말로 본래 두 패가 서로 같다는 뜻의 동이라는 한자음에서 유래한다. "땡잡았다"면 두 패가 같이 나왔다는 뜻으로 그 끗수의 크기에 따라 1(삥땅)에서 10(장땡)까지 이어진다. "삥땅치다", "장땡이다"는 흔히 들을수 있는 말이다. 노름 용어이기는 하나 일반어로도 어느정도 대접을 받는다. 언제부턴가 장땡 위에 38광땡까지 설정했으나 그것은 노름판의 사정이고 일상어로서는 어디까지나 장땡(최고)이 최상이다. 땡과 함께 임의로 설정한 족보 다음으로 끗수가 9인 "가보"에서부터 1인 "따라지"와 0인 "망통"에 이르기까지 끗수의 크기에 따라 노름판의 승패는 결정된다. 따라서 따라지와 망통은 노름판에서는 가장 천대받는 패지만 일반어로서는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꼴지에게 갈채를"이라는 책 제목도 있듯이 약자에게 보내는 연민의 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한국전쟁 전후 월남민을 일러 "3,8따라지"라 부른것이라든가 "따라지 산조"같은 말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로 자리 잡았다. 더욱 한심한 끗수 "망통"을 예전에는 "황"이라고 했다. 황은 골패놀이에서 짝이 맞지 않는 골패짝을 이른 말인데, 이번 놀이는 사라졌으나 그 용어만은 아직도 살아 있다. "황잡다", "황그리다"에서 "말짱황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았을 터이다. 큰 낭패를 보거나 아무것도 손에 넣을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탄사이다. 노름판의 특수 용어가 일반화된 것 가운데 "살"이라는 말이 있다. 노름판에서 한판에 거는 일정액의 몫에 덧태우는 금액을 살이라 한다. "살을 댄다" 또는 "살을 자른다"는 말이 그것인데, 여기서 살을 두 곱, 세 곱으로 대는, 이른바 "곱살을 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일에 공연히 끼여드는 "꼽싸리 끼는" 사람과 공짜만 좋아하는 "꼽싸리꾼"도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고스톱판의 재미는 뭐니뭐니 해도 상대가 설사를 했거나 ("쌌다"고도함), "바가지를 썼을 때" 또는 "따블, 따따블"이라 하여 이중 삼중의 벌금을 과중시켜 이른바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이다. "바가지(줄여서"박")쓰다"는 옛날 개화기 이후에 크게 유행했던 십인계라는 노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놀이는 1에서 10까지 숫자가 적힌 바가지를 엎어 놓고 물주가 어떤 수를 대면 그 수가 적힌 바가지에 돈을 댄 사람이 못 맞힌 사람의 돈을 모두 가지고 손님이 못 맞힐때는 물주가 이를 가지는 그런 게임이다. 바가지 중에도 가장 흔한 바가지가 피바가지(피박)일거다. 남들은 알곡을 거둘 때 자신은 껍데기에 불가한 피(본래 말은 돌피)도 제대로 수확하지 못한 데 대한 벌칙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피는 "피보다"의 "피(혈)"가 아니라 돌피의 피임을 알아야 한다. 노름판이 워낙 살벌한 곳이다 보니 "광박, 됫박, 싸다, 트다, 싹쓸이"등 그 용어인들 점잖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나가레, 쇼당, 고도리" 따위의 용어는 아무리 노름판이지만 재고해 봐야 할 것들이다. 유희로서의 놀이는 단지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놀이가 노름으로 이어질때는 그야말로 피바가지를 쓰거나 피(혈)를 볼 수 밖에 없다. 고스톱 왕국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칭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허망한 언사들 2 - 구호가 없는 사회 "레미콘에 물을 타면(가수) 부실 공사 원인 된다" 최근 도로를 질주하는 레미콘 트럭에 적혀있는 표어다. 별로 새로울 것도, 또 일반인들이 알아서 소용될 것도 없는 이런 문구를 붙이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당사자들만 명심하고 평소에 잘 지키면 될 일이 아니던가. 금년처럼 "부실 공사 추방"을 소리 높여 외쳐댄 적도 없었다. 공사 현장 어딜가도 "추방 원년"이라는 표지판을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수 대교나 삼풍 백화점 붕괴는 지난 일이라고 접어 두더라도 경부 고속철도 공사가 어떻고 인천공항 공사가 어떻게 하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이런 구호가 새삼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지금도 간혹 영업용 택시에서 "친절히 모시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럴싸한 말 같지만 되씹어보면 고약한 구석이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택시가 손님을 친절히 모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동안 손님을 어떻게 모셨기에 이런 표어를 붙이게 되었을까. 자가용 승용차에도 이와 유사한 스티커를 붙인 적이 있다. 이른바 "내 탓이요"라는 다소 특이한 구호가 그것인 바, 어떤 종교 단체가 벌이는 사회운동 차원의 표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스티커를 붙인 차량이 마구 교통위반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그래, 그렇게 달리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분명 네 탓이다 이놈아!" 하고 욕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초보 운전자가 붙이는 스티커 문안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간혹 "당신도 한때 초보였다"라든가 "형님들 좀 봐 주시오"라는 다분히 시비조의 문구를 붙인 차량을 보게 되는데, 이런 문구가 무슨 효과가 있을까? "긁어부스럼"이라는 말처럼 다른 차량의 협조는커녕 반감을 사서 오히려 곤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북한의 평양 거리에 나붙은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대형 간판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들이 실제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모르지만 들려오는 이야기가 한결같이 굶어 죽고, 탈북자가 속출한다는 우울한 소식이고 보면 "행복하다"는 표어가 더 허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목표가 행복이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행복하다"는 직설적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행복이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지는 것, 곧 천운이라 생각한다. 행복이란 곧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궂은 일이 뒤따른다는 호사다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내 복에 무슨..." 행복이 깨지는 순간 으레 이런 체념 섞인 독백이 터져 나오는 것도 그런 인식 때문이다. "지놈이 복에 겨워서..." ,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놈" 복이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를 자기 것인 양 즐기는 이들에게 위와 같이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아임 해피(I am happy)"를 연발하는 서구인들을 보며 우리는 적잖은 거부감을 느낀다. 행복이란 추구의 대상이지 도달할수 있는 목표가 아니기에 마치 그것에 도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 줄 때도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대게 행운이란 말을 쓴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기에 편지글 말미에서도 "행복을 빕니다"가 아닌 "행운을 빕니다" 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표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아빠 사랑합니다, 엄마 사랑해요"는 최근 어디서나 들을수 있는 흔해빠진 인사말이다. 어린자식이 엄마, 아빠의 볼에 입을 맞추며 이런 말을 했다면 그런 대로 귀여운 맛이나 있다. 그러나 어른들 세계에서 그랬다면 아무래도 어색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사랑 표현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아이 러브 유"는 어디까지나 서구인의 입에 발린 상투어요, 우리네 부모님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평생을 해로했다. 눈빛이나 표정 따위의 몸짓 언어로, 아니면 화롯불같은 은근한 마음 하나로 이혼하지 않고 평생을 같이 살아 온 것이다. 부모 자식같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하자. "엄마 날 사랑하셔요?" , "그럼, 난 너를 무척이나 사랑한단다. 이만큼씩이나..." 어떤가? 혹시 의붓어미와 의 사이에서 생소한 애정을 확인하려는 대화라 생각되지 않는가?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이는 분명 우리 정서와는 거리가 먼 외국 작품을 번역한 것이리라. 표어나 구호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어디선가 "우리 단결합시다!"를 외친다면 이는 분명 그 단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구호나 표어가 없는 편이 낫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랄 수 없고, 단지 있다면 그 격을 좀 높일 필요가 있다. 외국의 어느 극장에서 모자를 벗으라는 표어 대신 "노파는 모자를 써도 좋습니다"라는 문안을 썼더니 팔십이 넘은 노파가 슬그머니 모자를 벗더라는 이야기가 참고할 만하다. 아직도 뒷골목에는 "소변금지"라는 조잡한 글씨와 함께 가위 그림까지 곁들인 낙서를 볼 수 있다. 이곳은 "당신은 문화인(혹은 "신사")입니다"라는 표어를 붙이거나 아니면 깨끗한 화장실을 지어 놓는다면 그런 식의 허망한 표어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