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요람기의 용어 어화둥둥 금자둥아, 얼싸둥둥 은자둥아 왕후장상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태어난다"는 말 자체가 모체의 "태"에서 세상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태어난 날, 곧 생일을 달리 일컬어 "귀 빠진 날"이라 말하기도 한다. 모체에서 분리될 때 태아의 귀가 보이면 출산이 완료된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정확한 출생 시간은 바로 귀가 빠진 그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귀 빠진 날에 대해 "코 생긴 날"을 생일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인간이 생겨난 날, 곧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최초로 형체가 만들어진 때(잉태)를 지칭한 것인데, 흔히 말하는 비조라는 말은 여기서 비록된 것이다. 또한 생일을 "고고성일"이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고고지성을 울린 날이라는 뜻이다. 고고성은 앞서 말한 대로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응애"하고 우는 첫 울음을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출현을 알리는 최초의 인간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배내짓"이라 하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를 보인다. 이를테면 자면서도 방긋 웃는다거나 눈이나 코, 입을 찡긋거리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배내"란 말은 "배 안에 있을 때부터"라는 뜻이다. 예컨대 태어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누는 똥을 배내똥이라 한다. 이 밖에도 배냇병신, 배냇니, 배냇머리, 배내옷 등은 여기서 파생된 말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어나 처음 싸는 똥뿐만 아니라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누는 똥도 역시 배내똥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용어가 같을 뿐 아니라 그것의 성분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니 세상만사가 시작과 끝, 곧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가 보다. 갓난쟁이가 입술을 털며 투투거리는"투레질"도 일종의 배냇짓에 속한다. 투레질뿐 아니라 입으로 풀무질처럼 바람을 불어대는 "풀무질"이나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죄암질(쥐엄질)",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대는 "쉬야질", 잠들기 전이나 깬 후에 부리는 "잠투세"등도 역시 배냇짓의 일종이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운다. "얼뚱아기"란 말도 그런 것인데, 둥둥 얼러 주고 싶은 재롱스런 아기를 두고 이름이다. 아무리 밉둥을 피워도 세상의 모든 아기는 부모들에게 "이쁘둥이"일 수 밖에 없다.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벌리고 새근새근 나비잠을 자는 모습이며, 팔다리를 휘저으며 "당싯거릴"때도 기쁘기 한량없다. 뿐인가, 문짓문짓 배를 바닥에 문지르고 기어가며 "배밀")하는 모습도, "아우타는 짓"이라 하여 먹을 것만 찾는 "밥빼기"를 할 때도, 공연히 트집을 잡아 "아망그릴"때도 그 모든 행위가 부모들에게는 오로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런 자식을 두고 부모들은 여러 방법으로 얼러준다. "가동질"이 그렇고 "부라질"이나 "시장질"이 모두 아이를 얼러 주는 방식을 이르는 말이다. 아이의 겨드랑이를 치켜들고 오르내리면 아이는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는데, 이런 동작을 가동질이라 한다. 부라질은 아이를 곧추 세워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리게 하는 동작이며, 두 손을 잡고 앞뒤로 밀고 당기는 동작을 시장질이라 한다. 이때 "부라부라" 또는 "시장시장"이란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생겼다. 아이가 도담도담 잘 자라 옴포동이처럼 토실토실 살이 오르면 부모는 더욱 자식 키우는 재미를 느낀다. 새순처럼 너무 연약하기에 더욱 귀엽고 앙징스럽고,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거기에 알맞은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젖먹이가 일어나서 처음 떼놓는 걸음마를 "밟다"라 하고, 뒤뚱뒤뚱 어설픈 걸음발이 앙증스러워 "조작거리다", "자칫거리다" 또는 "아칫거리다"라는 표현을 쓴다. 자식이 똘똘이가 아니여도 좋고 지독한 똥싸개라도 아무 상관없다. 세상 부모들에게 모든 자식은 공히 "어화둥둥 금자둥이며, 얼싸둥둥 은자둥이"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들도 손뼉을 짝짝 맞추는 "짝짜꿍"에서 도리도리"도리질"이나 곤지곤지 잼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쁜짓"을 연출한다. 부모들도 이들을 손 위에 곤두곤두 "곤두세우기"나 따로따로 혼자 "따로 서기"를 시키며 즐거워 마지않는다. 그러나 아기가 언제나 귀여운 것만은 아닌가 보다. 때로 "곽쥐"나 "먼지털음"을 할 때도 있다. 곽쥐란 아이가 쭐래둥이여서 간혹 칭얼거리며 보챌 때 이를 위협하여 달래는 방식을 이름이요, 어쩔 수 없이 한 대 쥐어박는 경우를 "먼지털음"이라 한다. 어린 것에게 어디 때릴데가 있겠는가. 엄포용으로 기껏해야 옷에 묻은 먼지나 털어준다는 뜻으로 이런 예쁜 말을 지어냈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자식이 귀할수록 매는 아끼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너무 오냐오냐하고 키우면 응석 받이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지지다"하고 소리치면서 만져서는 안 될 것은 못 만지게 하고, "애비다"라며 해서는 안 될 일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크는 과정에서 으레 치러야 할 역질 따위를 "제구실"이라 이른 것을 보면 옛 어버이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현명했던 것 같다. 어렵고 힘들지만 이런 과정을 이겨내야만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때로는 따끔한 매가 진정한 의미의 사랑 표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임신, 출산 용어 삼신 할머니는 노여움을 푸소서 "앉아서 천리 보고 서서 만리 보는 삼신 할머니, 섭섭한 일일랑 제발 무릎 밑에 접어 두고 이 어린 것 치들고 받들어서 먹고 자고 놀고 오로지 남의 눈에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하소서. 입을 복과 먹을 복을 갖춰 주시고 짧은 명은 길게, 긴 명은 쟁반 위에 서리서리 얹어 주시고 명일랑은 동방삭을 닮고 복일랑은 석승을 닮게 점지하여 주소서." 어린 시절 아시 볼 때(동생을 맞을 때)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방 윗목에 삼신메를 차려 놓고 손바닥을 싹싹 소리 나게 비비면서 이처럼 "삼신풀이"라는 주문을 외우셨다. 삼신 할머니는 예로부터 임신과 출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산모에게 해산 기미가 보일 즈음이면 모든 가정에서는 애오라지 이 삼신 할머니에게 매달린다. 정화수 한 그릇과 흰 쌀밥, 한 그릇 또는 세 그릇의 미역국을 올린 삼신상이 차려진다. 이 때 산모가 며느리일 때는 안방 윗목에, 해산을 위해 친정에 온 딸일 경우에는 대개 방문 가에 차리는 것이 상례였다. 삼신상은 출산일뿐만 아니라 해산 후 첫 이렛날과 두 이렛날, 삼칠일이라 부르는 세 이렛날에서 일곱 이렛날까지 차려지고, 그때마다 이와 유사한 주문이 외워진다. 이 기원은 아이가 자라 일곱 살이 되어 칠성신에게 인계될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정성은 아이의 성장은 물론 산모의 잉태와 출산, 그리고 그 이후 젖이 모자라 "젖 비는"일에서 "개암든다"는 산후 후더침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오로지 삼신 할머니의 손에 달렸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잉태를 고유어로 "몸가지다" 또는 "아이 선다"고 한다. 아기를 가진 산모는 "입덧"이라는 첫 시련기를 거치면 배가 점점 불러지면서 둥덩산 같은 "배재기"에 이르게 되고, 이때쯤이면 아기가 맷속에서 놀기 시작하는 자위뜸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과정 모두가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을까마는 아무래도 그 절정은 출산 순간이 될 것이다. 막달에 이르러 아이가 "비릊는" 과정에서 문잡아 산문이 열리고, 이윽고 핏덩이의 귀가 빠지는 순간이야말로 뼈마디가 녹아 내리는 고통의 정점이라고 한다. 세상에 나온 새 아기의 첫 울음, 이른바 고고성은 그래서 환상의 소리라 할 만하다. 아이에게는 최초의 언어이자 모체에서부터 분리된 독립 선언일 것이며, 산모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안간힘이며 새 생명 탄생의 선언적 환호가 될 것이다. 삼신이라는 말은 "살다"에서 유래하여 사람이나 삷, 또는 숨과도 말뿌리를 같이한다. 고고성은 바로 인간의 호흡기 개통식이므로 그때부터 시작된 숨쉬기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고유어 "삼신"을 한자어 삼신이나 산신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삼신은 태고적 우리나라를 세웠다는 세 신, 곧 환인,환웅,환검(단군)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곰처녀와 관계를 맺어 단군을 낳았다는, 그 단군신화를 기조로 하여 삼신 할머니를 한민족 생성의 국조 신화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삼신의 손"이라는 말에서 한민족이 세 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의식은 후일 아이를 낳는다는 모성적 의미가 확대되고, 무속신화와 민속신앙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삼신 할머니가 생명 창조를 점지하는 신령으로 변신하여 추앙 받게 되었다는 이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젊은 엄마들은 이런 삼신 할머니의 존재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 입덧이 나면 남편이나 부모들을 채근하고,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언제든지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몸을 맡긴다. 젖이 모자라도 젖비는 일이 없어지고, 출산 날짜는 물론 심하면 신의 영역이라는 아들, 딸의 성별까지 선택하여 낳을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유 권한을 빼앗긴 삼신 할머니가 노여워할 수밖에. 현대인들은 금줄에 무엇을 다는지도 잘 모른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출산 풍습들, 이를테면 산모는 상주나 상가에 다녀온 사람과 대면하지 말아야 하며, 집안에 빨래를 널지 않고, 질그릇을 다루지 않으며, 고기를 굽거나 먹지도 않는다는 따위의 금기 사항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진 만큼 이런 풍습은 몰라도 좋고 또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하더라도 태아의 성감별이나 아기를 지우는 따위의 삼신 할머니의 고유 영역만은 제발 침범하지 말아야겠다. 최근 산아 제한법마저 철폐되고 태아의 성감별을 엄격히 규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이나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한 이런 조처만으로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생명의 신비, 그 신의 영역만은 더 이상 넘보지 말았으면 한다. 삼신 할머니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마땅하다'는 고유어에 한자어가 붙어서 생긴 말 '마땅하다'는 "잘 어울리다, 알맞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따위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있고, 또 그 어감이 꼭 우리 고유어인 것처럼 생각 되어서, 이 단어에 한자가 있다고 한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마'가 한자일까? '땅'이 한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말과 그 표기법이 큰 변화를 겪어 왔기 때문에 수긍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예들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시면 수긍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하다'는 원래 '맛당하다'로 또는 '맛당하다'로 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맞다'의 어간 '맞-'에다가 이 '맞다'와 같은 뜻을 가진 한자 '당(마땅 당)'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우리 고유어에다가 같은 뜻을 가진 한자를 붙여서 만든 단어이지요. 이처럼 우리 고유어에 한자가 붙어서 된 단어는 꽤나 있습니다. '굳건하다, 튼실하다, 익숙하다'등이 그러한 예들입니다. '굳건하다'는 고유어인 '굳다'의 어간 '굳-'에 한자 '건'(굳셀 건)이 합쳐진 단어이고요, '튼실하다'는 '튼튼하다'의 '튼'에 한자 '실'(열매 실)이 합쳐 져서 된 말이지요. 그리고 '익숙하다'도 '익다'의 '익-'에 한자 '숙'(익을 숙)이 합쳐진 말입니다. 이렇게 고유어에 고유어가 뜻을 같이 하는 한자가 붙어서 된 단어를 우리는 동의 중복으로 된 복합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한자어와 고유어를 합쳐서 쓰는 말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우리가 보통 드는 예는 '처가집, 역전앞, 무궁화꽃'등 정도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 이상입니다. 그 예가 무척 많음에 놀라실 것입니다. 다음에 그 일례들만 들어 보이도록 할 테니까, 하나하나 잘 분석해 보세요. 같은 뜻을 가진 한자와 고유어가 어떻게 섞여 있는지를요. 담장 바람벽 어떤 일미인 두견접동 장림숲 학두루미 옷칠 모래사장 손수건 속내의 새신랑 긴 장대 큰 대문 어린 소녀 젊은 청년 늙은 노인 빈 공간 넓은 광장 같은 동갑 허연 백발 누런 황금 배우는 학도 둘로 양분하다 미리 예습하다 다시 재혼하다 서로 상의하다 스스로 자각하다 배에 승선하다 자리에 착석하다 분가루 일전 한푼 자식새끼 외가집 면도칼 고목나무 진화되다 소급해 올라가다 유언을 남기다 상용하여 써 온다 피해를 입는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