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부위별 고기 명칭 - 아롱사태의 그 은밀한 맛 한국인처럼 쇠고기를 맛깔스럽게 양념하여 불에 구워 먹는 민족도 드물 게다. 쇠고기는 어느 한 부위도 버릴 곳이 없어 우리는 육류가운데서 최상으로 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조상들은 각 부위별로 맛맛을 감별하고 거기에 맞는 독특한 명칭과 조리법을 개발해 놓았다. 이는 우리 민족이 수렵 생활에서부터 농경 생활을 거치면서 스스로 터득한 식문화 전통이다.육규 가운데 "불고기"라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음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생활 환경에 따라 입맛도 변하는지 "너비아니"라 일컫던 쇠고기 구이도 갈비에게 자리를 내주고 얼마 안 있어 갈비 역시 양념을 안 한 생갈비나 안심, 등심과 같이 좀 더 세분화된 부위의 독특한 맛에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현대는 전문화시대여서 쇠고기라도 다 쇠고기가 아니고 갈비라도 다 갈비가 아니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인간의 간사란 혀가 부위별로 다른 그 고유한 맛을 감지해 낸 결과라고나 할까. "갈매기살"이라는 고기가 있다. 처음 이 명칭을 대했을 때 필자는 바다에 사는 갈매기를 구운 것이라 오해했다. "제비추리"도 마찬가지여서 "초리(추리)"가 꼬리를 뜻하는 옛말이니 요새 사람들은 갈매기뿐 아니라 제비의 꼬리까지 먹는 줄로만 알았다. 하긴 중국 요리에서는 까치집이나 상어 지느러미도 훌륭한 요리감이 되니 말이다. "도가니탕"도 오인하기에 좋은 이름이다. 흔히 쇠붙이를 녹여 내는 "도가니"에 넣고 끓인 고깃국이 도가니탕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가니는 사실 "무릎도가니"의 준말로서 소의 무릎에 붙은 종지뼈와 그것을 싸고 있는 살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종지뼈의 형태가 마치 도가니의 그 우묵한 그릇 모양을 닮았기에 속된 표현이기는 해도 종지뼈 대신 도가니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갈매기살은 돼지고기의 가로막을 이루는 살 이름이다. 안창고기라고도 부르는 이 부위는 가로막았다는 "가로막살"이 줄어 갈매기살이 된 것이다. 앞서 제비추리의 추리는 꼬리의 옛말이라고 했는데, 쇠고기에서는 이 부위가 양지머리의 배꼽아래에 붙은 살코기를 가리킨다.쇠고기명을 떠나서 "제비초리"라 하면 사람의 뒤꼭지에 뾰족이 내민 머리털을 칭하는 말인데, 이 말이 묘하게도 모양이 흡사한 쇠고기 부위명으로 옮아갔다는 게 흥미롭다. 이처럼 고기의 부위별 명칭은 우리 고유어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아름다움과 운치라는 맛을 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고기를 다루던 백정이나 푸줏간 주인의 안목에 감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뼈다귀 해장국"이라는 식당 간판이 거부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뼈다귀를 "뼉다구"라고 쓰면 또 어떤가. 그것이 고유어기 때문에 결코 싫지 않게 느껴진다. 쇠고기는 맛의 차이에 따라 대략 세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 이를테면 안심과 등심은 상육으로, 갈비, 쇠악지, 업진, 대접삭, 양지, 채끝살, 우둔 등은 중육으로, 사태, 홍두깨살, 도가니, 꼬리, 중치, 살, 족 등은 하육으로 친다. 내장으로는 염통을 비롯하여 간, 처녑, 양, 콩팥, 허파, 곱창, 딸창, 곤자소니, 지라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선지, 쇠모리, 혀, 골, 등골, 주라통 따위를 들 수가 있는데,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거의가 소박한 고유어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옛날 천시를 받으며 살았던 백정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등심이나 안심이라는 말도 고유어로 보아야 한다. 사전에는 "심"을 한자"심"으로 적고 있으나 여기서 심은 힘(력)과 동일어로서 근육을 지칭하는 우리말인 것이다. 심은 심장이나 마음 또는 중심을 뜻하는 한자말인데, 안심은 몰라도 등심의 경우 소의 등에 심장이나 마음이 있을 리 만무하다. 힘은 추상어만이 아닌 구체어로서 근육을 뜻한다. 문헌에도 근을 "힘 근"으로 지칭한 만큼 안심은 "안쪽 힘살"을, 등심은 "등의 힘살"을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쇠악지, 업진, 채끝살, 딸창, 곤자소니 따위의 이름도 소박한 우리말이긴 하나 "아롱사태"나 "뭉치사태"의 멋진 표현에는 미치지 못한다. "사태"는 두 다리 사이를 지칭하는 "삿(삳)다리(샅타리)"가 줄어든 말이다. 씨름에서 사타구니에 매는 샅바를 상기헤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샅은 원래 사이(간)의 옛말인 "삿"에서 나온 말로 짐승에서 사태는 주로 국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뭉치사태나 아롱사태는 무엇을 뜻하는가? 뭉치의 경우는 이 부위의 살코기가 뭉쳐겨 있다는 뜻일 텐데 아롱사태의 "아롱"이라는 말이 좀 애매하기는 하다. 그러나 아리송할 것 같은 이 말은 "아롱무늬"라는 말에서 본래의 뜻을 내보인다. 특히 그것이 점이나 무늬가 고르게 총총한 형상을 일러 아롱아롱 또는 아롱다롱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암소의 그 은밀한 부위에 아롱아롱 아름다운 무늬가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참나무 숯불로 쇠고기를 구울 때 지글지글 타는 연기 속에 밴 고기맛은 단연 일품이다. 갈비나 등심의 맛도 더할 나위가 없지만 아롱사태를 구워 먹는 그 맛은 또 어떠한가. 연한 고기맛도 맛이려니와 그것이 오묘한 부위라는 점에서 분명히 한 맛이 더한 것 같다. 아롱사태나 제비초리는 실로 고기맛보다는 고운 이름으로 하여 더 맛깔스럽다고 하겠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식기 용어 - 뚝배기보다는 장맛 사람의 생각을 담아 전하는 그릇을 일러 언어라 한다. 언어라는 그릇은 사고의 내용이나 크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거창하게 떠벌릴 수도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식기)도 이와 다를 바 없으니 먹을 거리의 내용에 따라 크기나 모양새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대인들은 하루 세 번 밥상을 대하면서 거기 놓인 그릇의 고유한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느 민족에게나 오랜 세월 숙성되어 온 식문화의 전통이 있다. 그릇의 이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저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요, 국을 담으면 국그릇, 반찬을 담으면 찬그릇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곤란하다. 철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그릇도 격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마시는 경우만 보더라도 맥주는 "컵"에, 와인은 "글라스"에, 소주는 "고뿌"에, 막걸리는 "사발"에 따라서 들이켜야 제격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돈끼리 시골 장터에서 소주 한 고뿌(copo)를 마시거나 막걸리집에서 대포 한잔으로 회포를 풀 수 있다. 이들이 호프집에서 치킨 안주에 생맥주를 마신다고 하면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맥주나 포도주 같은 양주를 고뿌나 사발에 따라 마신다면 전혀 격에 맞지 않는다. 음료수도 국적에 따라,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용어로 불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식사를 위해 식탁에 펼쳐 놓는 식기의 표준 세트를 반상기라 한다. 접시 일색인 서양이 식탁과는 달리 우리 반상기에는 밥그릇, 곧 "바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그릇이 격에 맞게 배열된다. "바리"는 고유어도 한자어도 아닌, 인도에서 건너온 말이다. 불제자의 밥그릇을 뜻하는 이 말은 범어 "바다라"가 발다라라는 한자호 차음되고 다시 이를 줄여 발로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릇을 지칭하는 한자어 발우는 인도의 범어와 중국 한자어의 합작품인 셈이다. 바리는 요즘에 와서는 스님들이나 여성들이 쓰는 그릇에만 국한되어 쓰인다. 바리, 발은 재료나 크기에 따라 그 이름도 세분된다. 놋쇠로 만들면 주발이고 사기로 만들면 사발이며, 크기에 따라 중발이나 종발로 나뉘고, 모양새에 따라 연잎 모양을 하고 있으면 연엽주발이고 속이 우묵하게 생겼으면 우먹(우멍) 주발이다. 우리 전통의 식기가 국그릇을 빼고는 모두 뚜껑을 갖추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바리만은 뚜껑 위에 손잡이용 꼭지까지 달려 있어 그것이 반성의 주인임을 알려 준다. 또한 놋쇠로 만든 주발은 보온을 위해 겨울철에 주로 사용되는 반면 사기로 만든 사발은 더운 여름철에 사용된다. 값싼 사발이 서민용이라는 주장은 이런 실용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치나 깍두기 같은 반찬류를 담는 작은 사발을 "보시기"라 하고, 이와 비슷하지만 아구니가 좀 더 벌어진(바라진) 사발을 말 그대로 "바라기"라 부른다. 보시기도 첫 글자만 따서 "보"로도 쓰이는데 조치(국물을 바특하게 잘 끓은 찌개나 찜)를 담으면 "조칫보"요, 찜을 담으면 "찜보"가 된다. 바느질이나 조리 용어에서 보듯 이들 생활 용어는 여성들에 의해서 고유어가 잘 보존되어 왔으나 단지 그릇명에서 만은 예외가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여성의 몫이지만 이 음식을 맛보고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일은 남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보시기란 말은 표기될 때 보아로, 바라기도 바라라는 한자로 대신한다. 뿐만 아니라 "쟁개비"란 고유어도 일본어 나베에서 유래한 냄비에 밀리고, 전골틀을 일컫던 "벙거짓골"도 훗날 신선로로 대체되었으며, 음식을 덜어 먹던 "빈그릇"이란 말마저도 한자어 공기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식용어 가운데 우리 식의 한자말이 있다면 "시, 지, 주"로 발음되는 접미어 "자"일 것이다. 이를테면 접자는 "접시"로, 종자는 "종지"로, 분자는 "푼주"로 불리는 예가 그것이다. 접은 넓고 팽팽함을 뜻하는 한자어로서 크기에 따라 대접, 중접, 소접으로 나뉜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을 크기로만 나눈다면 사발(대접), 중발(중접), 종발(소접), 종기 순이 될 것이다. 접시와 함께 뒤늦게 들어온 식기명에 쟁반이란 게 있다. 비록 한자말이긴 해도 소리를 본뜬 감각어여서 호감을 준다. 쟁반의 쟁자는 "쇳소리 쟁그렁 울릴 쟁"이라 하여 자전에 긴 훈을 달고 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쇳소리를 닮은 "쟁"인데, 위세가 당당할 때도 "쟁쟁"이며 누구에게나 "쨍하고 해뜰 날"이 있기에 그래서 "쨍"이다. 번철이라는 말도 서구어 "프라이팬"에 밀려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동이, 자배기, 버치, 방구리, 쟁첩 등도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들이다. 다만 "뚝배기"만은 아직도 사랑받고 있기에 그나마 위로가 된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는 속담에서처럼 볼품 없는 겉보기에 비해 그 속에 담긴 옛멋이나 인정은 아직도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뚝배기의 참맛은 역시 "알뚝배기"가 으뜸이다. 오가리라고 불리는 이 새끼뚝배기는 거기에 달걀을 쪄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그야말로 인정의 진수를 담은 우리 그릇이었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여성용 의상어 - 아얌과 배꼽티 귀엽게 보이려고 일부러 지어 보이는 교태를 일러 "아양"이라 한다. 작위적인 행위여서 "아양을 떤다, 아양을 부린다, 아양을 피운다"라고 표현된다. 아양을 떤다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꼬리를 친다"는 말과 동의어로 쓸 수 있다. 때로 남자에게도 이 말이 쓰이지만 본래 여성의 의상에서 나온 말이기에 여성세계에서 쓰여야 자연스럽다. 아양은 "아얌"에서 나온 말이다. 아얌은 옛날 여인들의 겨울철 나들이에서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쓰던, 일종의 모자였다. 남성용 모자와 차이가 있다면 위가 트였고 좌우에 있는 포근한 털끝에 아얌드림이라 하여 비단으로 만든 댕기를 길게 늘였다는 점이다. 옛 여인들의 의상에서 일종의 호사라고 할까. 현란한 무늬의 아얌드림은 걸을 때마다 흔들리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멋을 부리고 싶은 여성, 특히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면 이를 더 심하게 출렁거리며 거리를 활보했으리라. 동물 세계에서도 암컷은 수컷을 호리기 위해 꼬리를 친다고 하지 않는가. 아얌은 고유어처럼 보이지만 액엄이라는 한자말에서 유래하였다. 액엄이란 이마를 가린다는 뜻인데, 남녀가 유별하던 그 시절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장신구였다. 액엄과 비슷한 장신구로 이엄이란 것도 있었다. 이마가 아니라 귀를 가리는 장신구로서 이는 남성들의 관복에서 사모 밑에 받쳐 쓰는, 모피로 만든 일종의 방한구였다. 옛 여인들은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신체 전부를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화류계 여성일지라도 발을 내보이는 것을 수치로 알았기에 한여름에도 버선을 벗지 않았다. 그러나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흐르는 법, 이런 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내보이거나 혹은 은밀한 애정표현이 없을 수는 없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얼굴을 가린 채 아양을 떨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겠지만, 어떻든 옛 여인의 교태는 이처럼 은밀하고 품위가 있었다고나 할까. [아얌] 지금은 한복을 입는 경우에도 버선은 신지 않고 대게 서양 버선, 곧 양말을 신게 마련이다. 베로 만든 우리 고유의 신발(고어로 "보션")인 버선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까. 님이 오실 때 버선발로 달려나가던 모습도, 버선코의 그 날렵한 선도, 버선볼을 좁게 만든 "외씨버선"의 그 멋도 이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효도버선"의 아름다운 풍습이 사라진 게 못내 아쉽다. 시집 간 딸이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 갈 때 문중 어른들에게 바치던 예물을 효도버선이라 한다. 친정 부모들은 그 효도버선을 신을 때마다 출가한 딸의 애틋한 심정을 되새겼으리라. 효도버선은 여느 버선과는 모양부터가 다르다. 짝이 서로 섞이지 않게 켤레마다 가운데 실을 떠서 묶는데, 거기에는 오래 사시라는 뜻에서 붉은 실로 80이란 숫자를 새겼다. 시댁으로 올 때도 똑같은 선물을 드리는데, 이 때 웃어른들이 "효도 봤다"는 인사말로 치하한 데서 효도버선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중동의 회교권 여성들은 "차도르"라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는데, 신체를 가린다는 점에서는 한국 여성도 이에 못잖다. 중동 지역 여인들의 차도르에 해당하는 의상이 우리의 너울이나 장옷이 될 것이다. 장옷은 두루마기를 소매 옷고름까지 그대로 달아서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 쓴 것이고, 너울은 하녀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검정 주머니 같은 천으로 몸 전체를 감싸던 겉옷이다. 뿐만 아니라 볼 게, 남바위, 풍채, 만선두리, 조바위, 친의, 가리마, 쓰개수건 등도 신체를 감추는 데 쓰인 의상들이다. 한편 여성의 속옷에 이르면 우리 의상은 자폐성은 정도가 더 심해진다. 속곳이라면 무조건 감추기만 하고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렸던 것 같다. 단속곳, 다리속곳, 고쟁이, 말기 등은 남에게 내보이는 것조차 수치로 알았다. 말기는 가슴을 동여매는 브래지어에 해당하고, 다리속곳이라 통칭되는 서답이나 개짐(월시)은 오늘날의 생리대에 해당한다. 부끄러움에 떨며 그나마 남아 있던 고유어도 서구어를 만나 기꺼이(?) 자리를 내 주고 자신은 꽁꽁 숨고 말았다. 속속곳이라 부르는 속잠방이는 팬티 또는 팬츠로, 치마 속이나 바지 위에 덧입는 단속곳은 슈미즈로, 이 밖에 고쟁이에 해당하는 것들은 각각 거들, 코르셋, 스타킹으로 세분해서 불린다. 단속곳과 속속곳으로 나뉘는 속곳 또는 속것(각종 내의류)의 고유이름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새롭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외래어에 비해 고쟁이, 꼬장주, 꼬장바지라고 하면 웬지 꼬장꼬장 때라도 묻어 무슨 고약한 냄새라도 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외래어의 힘을 빌려 고유어의 그 부끄러웅을 떨쳐 버리려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젊은 여성들은 허벅지나 발은 물론 배꼽까지 드러낸 채 당당히 대로를 활보한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그 마지막 보루인 배꼽까지 내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잃어버린 고유어와 함께 그 옛날 "모시 적삼 안섶 안에 연적 같은 그 무엇..."하던 그 은은한 멋과 매력은 이제 옛말이 되고 만 것 같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바느질 용어 - 깁고, 박고, 호고, 공그르고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조침문"을 읽으면서 거기 인용된 잡다한 바느질 용어를 외우느라 고심한 적이 있다. 바늘에 실을 꿰어 그저 깁는다고 하면 될 것을 "깁다"외에도 박고, 호고, 누비고, 공그르고, 시치고, 감치고, 뜨고, 사뜨고, 휘갑치다와 같이 다양한 용어를 동원해 표현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꿰매는 일 한 가지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결코 한결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어릴 적 바느질하시는 어머니에게 바늘을 꿰어 드린 경험밖에 없던 나로서는, 이 용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침문"뿐만 아니라 "규중칠우쟁론기"와 같은, 안방 여인들의 글에서 받은 느낌도 대체로 비슷했다. 대수롭지 않은 내용을 두고 공연히 침소봉대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 지극히 섬세한 표현법에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바느질 용어만 하더라도 여성이 아니고서는 지어낼 수 없는 특수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 생활 용어가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옛 여성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안방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둔 가보를 대하는 기분이랄까. 어줍잖은 문자 지식으로 툭하면 한자말로 대체시키며 선비연하는 남성들에 비해 우리말의 순수성은 오히려 여성들에 의해 보존, 계승되었으니 말이다. 익히다, 끓이다, 삶다, 달이다, 고다, 찌다, 데우다, 데치다, 졸이다, 굽다, 볶다, 지지다, 튀기다, 저미다, 무치다, 절이다, 버무리다, 덖다 등에서 보듯이 다양한 조리 용어도 그렇다. 음식 만들기도 여성 고유의 일이고 보면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이처럼 순수한 고유어로 남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느질 용어로는 앞서 언급한 동사 이외에도 "땀"이나 "솔기" 또는 마름질, 매듭, 뜨개질, 시접, 박이옷, 누비이불, 가름솔, 곱솔, 쌈솔, 뒤웅솔, 반짇고리 등에 이르기까지 주옥 같은 고유어가 생생히 살아있다. 만약 남성들이 바느질이나 조리일에 관계했다면 이러한 고유어의 순수성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는 말처럼 가장 작은 것으로 비유되는 바느질이지만 바늘이 하는 일은 결코 작지 않다. 바늘이 하는 일, 곧 바느질은 이 헝겊과 저 헝겊, 비약시킨다면 남과 나를 이어 주고 맺어 주고 꿰매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듯이 너와 내가 이어져 우리가 되고, 때로는 부부가 되기도 하며, 아픈 이웃의 상처를 꿰매 주는 일이 바로 바늘의 역할이 아닌가. 옷고름이나 넥타이만 매는 게 아닐 것이다. 언약을 맺고 사랑을 맺고... 이렇게 맺는 일은 인간 관계의 출발점이면서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일처럼 삶의 귀착점이 될 수도 있다.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이르는 "마무리"는 "마무르다"에서 온 말이다. 마무르다의 또다른 명사형도 있으나 옷을 입을 때 옷깃을 여미고 끈을 매는 뒷단속을 "매무시"라 하고, 매무시의 나중 모양새를 일러 "매무새"또는 "맵시"라 한다. 형용사로 쓰이는 "맵자하다"라는 말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이는 모양이 꼭 째여 앙증스럽고도 귀엽다는 뜻이니 말 그대로 얼마나 "맵자한"말 인가. 꿰매는 일을 표현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촘촘히 꿰맬 때는 "박음질"이며, 성기게 꿰맬 때는 "홈질"이라 한다. 맞대어 듬성듬성 홀 경우 "시침질"이 되고, 그 사이에 솜을 넣어 죽죽 줄이 지게 박을 경우에는 "누빈다"고 한다. 또한 실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술적으로 "공그르기"를 할 수 있고, 때로 "사뜨기"나 "휘갑치기"를 하기도 한다. 꿰매는 일도 이처럼 기술적으로 세분하여 표현법을 달리한 것이다. "감치다"도 참으로 감칠맛 나는 표현이다. 두 헝겊의 가장자리를 맞대어 감아 꿰매는 기술을 감친다고 한다. 이 말은 바느질 기술에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곧 늘 잊혀지지 않고 가슴속에 감돌고 있음을 뜻하는 추상어가 되기도 하니 우리말의 감칠맛을 이런 표현에서도 발견한다. 바느질 용어의 확산은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총총히 눌러 꿰맨다는 뜻의 "박다"의 경우만 해도 용례가 무궁하다. 사진도 박고, 책도 박아 펴낸다고 한다. 다시는 뒷말이 없게 휘갑을 친다고 하고, 부족한 원고 내용을 좀더 기울 수도 있다. 누비옷이나 누비이불만 누비는 게 아니다. "누비라"라는 차종도 있는 걸 보면 밤거리의 뒷골목에서부터 온 천지사방을 누비고 다닐 수도 있다. 뿐인가, 백결 선생의 옷도 그랬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도승 성철 스님도 누더기나 다름없는 누비옷을 입고 평생을 정진하셨다. 그러나 누군들 이분들의 모습을 추하다고 여길까?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깁는 문화"라 규정한 분도 있다. 그 깁는 일도 단순한 땜질이 아니라 고도의 미학적 경지에 이른 땜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대에 이르러 바느질 문화도 사라지려 한다. 이제 바느질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의 모습도, 다듬이질의 규칙적인 음률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바느질은 사라진다 해도 그 감칠맛 나는 바느질 용어만은 그대로 간직했으면 좋겠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생사용어 - 삶과 죽음의 언어 숨지다, 숨이 끊어지다는 말이 죽음을 상징하듯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숨을 쉬고 있음을 뜻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흙으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새 생명을 창조하셨다지 않는가. 사람은 젊거나 건강할 때는 배로 숨을 쉬고 나이가 들어 허약해지면 그 숨이 점차 가슴으로 올라오고 최종적으로 목에까지 차 오르면 생의 종말을 맞는다. 임종하는 이의 숨결을 보노라면 인간의 생명을 왜 "목숨"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숨쉬기가 지속되는 기간을 일러 "살아 있다"고 한다. 산다는 말의 "살-"은 본래부터 움직임을 뜻하는 동사로서 어떤 동작이 반복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삶과 죽음은 동사인 "살다"와 "죽다"의 명사형이다. 인간의 생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어서 이처럼 처음부터 동사로만 존재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림살이를 산다"는 말 속에는 "살-"이 네 번 반복된다. 삶이란 말도 그렇지만 움직임을 뜻하는 "살-"은 이처럼 많은 파생어를 만들고 있다. 삶과 죽음은 윤회성사라 하여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 이 둘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두 말에서 느끼는 정서나 어감부터 차이가 느껴진다. "살다"라는 말은 우선 "ㅏ"라는 양성모음에 "ㄹ"과 같이 흐르는(구르는) 듯한 소리받침(류음)을 가졌다. 바람이 솔솔 불고, 물이 졸졸 흐르며, 돌이 돌돌 구르는, 말하자면 항상 유전하여 영원히 지속되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음상이다. 반면 "죽다"라는 말은 어떠한가. "ㅜ"라는 어둡고 무거운 음성모음에 닫히고 막히는 소리인 폐쇄음 받침이 우선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오로지 적막과 부패만이 존재하는 정지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까. 생의 단절을 뜻하는, 이런 죽음의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놀랍게도 우리 민족은 삶보다 죽음을 앞세운다. 생사란 한자말을 우리는 "죽사리"라 하고,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도 '죽기 아니면 살기"라 하여 죽음을 앞세운다. 삶보다 죽음을 앞세울 만큼 한국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그 해답은 우리말에서 죽음이 진짜 사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죽고 못산다"는 말의 속뜻을 생각해 보자. 이는 "좋아 죽겠다"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뜻이 아닌가. "죽자 사자"라는 말이나 "죽여준다"는 속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조카를 보고 "너 죽어!"라면서 무서운 표정을 짓더라도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니 말이다.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듯이 죽음이라는 말도 늘 우리 가까이 있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억지로 가까이 두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일러 "죽었다 깨도"못한다고 한다. "죽은 목숨, 죽을 상, 죽을 고생, 죽어 지내다, 죽는 소리"등등의 극단적인 표현도 기껏해야 기를 펴지 못한다는, 엄살이 반쯤 섞인 죽는 소리일 뿐이다. 우리말에서 죽음이 진정한 사멸이 아니라는 것은 사물에 대한 표현에서도 잘 들어난다. "시계가 죽었다, 돌던 팽이가 죽었다, 타던 불이 죽었다"면 단순히 사물의 죽음이요, '풀이 죽었다, 사기가 죽었다, 끝말이 죽었다"고 하면 이는 기분이나 감정의 죽음이다. 어찌 고귀한 인간에게 이처럼 감히 죽었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있을까? 인간 생명의 종식은 우리말에서 좀더 은유적이고 철학적으로 표현된다.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의해 이승을 떠날 따름이다. 숨을 거두고 눈을 감는 것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새로운 몸짓일 분으로 "돌아가시다"라는 죽음의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영어의 "go"나 "gone"과는 의미나 격이 다르다. 우리말에서 돌아가심은 인간 본래의 고향으로 귀의함을 뜻하므로 영어의 "리턴(return)"에 해당한다고 할까. 이처럼 인간의 죽음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말에도 죽음을 "가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골로 가다, 고택골 가다, 북망산 가다, 망우리 가다"등이 그런 예인데, 이런 속어도 영어의 "go"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골"은 시신을 담는 나무 관을 이르고, 고택골이나 북망산, 망우리는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골로 가다"라는 말은 "칠성판지다"와 같이 관 속에 들어가 무덤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한 저속한 표현으로 "올림대를 놓다"거나 "사자밥 떠 놓았다"라는 은어도 있다. 사자밥은 저승사자를 대접하기 위해 떠 놓는 세 그릇의 밥을 말하고, 올림대는 심메마니(산삼을 캐는 사람)의 은어로서 숟가락을 지칭한다. 이 말은 흔히 말하는 "밥 숟갈 놓았다"는 속언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죽음에 대한 표현은 대체로 사망, 별세, 기세, 운명, 타계, 작고, 서거, 유명을 달리하다 등등 한자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든 이들은 한결 점잖은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유어 "돌아가심"보다는 못한 것 같다. 저승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할, 인간의 고향, 단지 먼저 간다는 것뿐 그렇게 슬퍼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죽도록 사랑하며 멋지게 살겠습니다." 인간의 삶이 윤회를 거듭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죽음은 단지 이런 한 순간의 삶을 더 멋지고 알차게 꾸려 가기 위해 순간순간 결의를 다지는 언어일 따름이다.
과메기 경북 남부 해안지방에서는 겨울철 별미로 과메기를 즐겨 먹는다. 추운 겨울에 날꽁치를 얼렸다 말렸다 하면서 만든 과메기는 이제 전국 각지로 팔려나가 유명해졌다. 포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어르신들의 말로, 과메기는 본디 청어로 만들었는데, 청어가 귀해져서 꽁치로 만든다고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과메기’를 경북지방 사투리로서 ‘꽁치를 차게 말린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관목’(貫目)은 ‘말린 청어’라는 풀이와 함께 모든 사전에 올려놨다. 여기서 포항 고장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의 실마리가 잡힌다. ‘과메기’는 ‘관목’이 변한 말로 짚어볼 수 있다. ‘관목’에 접미사 ‘-이’가 붙어서 ‘관목이’가 되고 다시 [ㄴ]이 떨어져 ‘과목이’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뒷모음 [ㅣ]가 앞모음에 영향(ㅣ모음역행동화)을 주어 ‘과뫼기’가 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말에서 자주 나타난다. ‘남비’가 ‘냄비’로 되는 따위의 음운현상이다. 그 다음 ‘과메기’로 형태가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때 이 말의 본고장인 포항에서조차 ‘과메기’냐, ‘과매기’냐 하는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다. 귀로 이 두 발음을 골라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관목’에서 추적하면 쉽게 해결된다. 산(山)의 우리말은 ‘뫼’였다. 이것이 오늘날 ‘메’로 바뀌었다. 멧돼지·멧새 등에서 보기를 찾을 수 있다. ‘뫼’가 ‘메’ 바뀌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과뫼기’는 ‘과매기’가 아니라 ‘과메기’로 되어야 할 것이다. 우재욱/우리말 순화인·작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질병용어 - 든 병, 난 병, 걸린 병 연거푸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동작을 일러 "들락날락, 들랑날랑" 또는 "들락대다, 들락거린다"고 한다. 도 드나들다란 말도 있어서 드나들면서 하는 고용살이를 "드난살이"라 한다. 이와 반대로 날랑들랑, 나락들락, 나들살이라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들어옴(입)이 먼저요 나감(출)이 나중인 것으로 안 모양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모든 동작은 움츠린 데서, 그리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차에서도 승객이 내린 다음에 타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 한자어 출입도 고유어로 "나들이"라 하고, 외출할 때 입는 옷을 난벌, 집안에서 입는 평상복을 든벌, 그리고 이 둘을 겸하는 옷을 든난벌이 아니라 "난든벌"이라 한다. 이는 책상이나 장롱 따위의 서랍을 열고 닫는다하여 "여닫이", 빼고 닫는다 하여 "빼닫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출입을 뜻하는 나다(출)와 들다(입)가 이처럼 상반된 뜻이기는 해도 경우에 따라 비슷한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병이 나다"와 "병이 들다"라는 발병의 경우도 그런 예이다. 발병을 우리말로는 "병이 나다, 병이 들다, 병에 걸리다, 병을 얻다"등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동일한 뜻으로 보이는 이 말들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얼마간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말의 뛰어난 감각성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나 할까. 우선 병이 나다와 얻다를 하나의 의미군으로 묶고, 병이 들다와 걸리다를 따로 묶어 이 두 표현의 차이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이런 표현은 어떤가? "몸살이 걸렸다, 감기가 났다, 골병에 걸렸다, 성병이 났다, 에이즈가 들었다..." 큰 잘못이라 할 수는 없지만 웬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몸살은 발병 요인이 신체 내부에 있기 때문에 "몸살이 났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골병도 그렇지만 고독이란 병, 누군가를 지독하게 짝사랑한 데서 비롯된 상사병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감기나 성병 또는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은 요인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걸렸다, 들었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된다. 그러고 보면 병이란 본래 나는 것이 들거나 걸리는 것보다 먼저인 모양이다. 몸살이란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신체의 군형이 깨어진 상태라서 이때 외부에서 병균이 침입하면 그만 병이 들고 만다. 감기가 들거나 감기에 걸리는 것도 같은 상황이다. 또한 각종 전염병이나 외부에서 심한 자극을 받아 골병이 든 경우도 마찬가지다. 병이 드는 경우는 그럴 수 있다지만 병에 걸리는 경우는 좀 성질이 다르다. "성병에 걸렸다, 에이즈에 걸렸다"에서 보듯 "재수 없게 걸린 것"만은 아닌,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럴 때는 "걸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달리 말하면 난 병은 과로에서 비롯된 것이요, 든 병은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병은 물론 한자말이기는 해도 그 병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질과 함께 우리말 속에 뿌리 내린 지 오래다. 우리말에서는 아마도 "앓다"나 "몸져눕다"라는 동사가 이를 대신하지 않았나 싶다. 앓다에 "ㅡ브다"라는 접미사가 연결되면 "아프다"라는 형용사가 된다. 이는 곯다에서 고프다, 낮다에서 나쁘다, 싫다에서 슬프다가 파생된 것과 같은 유형이다. 한자말인 병이나 질도 본래 "병하다", "질하다"로 쓰인 것을 보면 병이나 질은 원래부터 동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에서도 질을 훈하여 "병할 질"로 적고 있다. 또한 "이 염병할 놈아!"라는 욕설에서 보듯 병은 "하다"란 접미사가 붙어 동사로 쓰였다. 이 "병하다"라는 말은 "치른다"라는 말로 발전한다. 옛날에는 일단 병이 걸리면 이와 싸워 이겨낼 수 밖에 없었으니 "앓다"라는 말보다 "치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 특히 한 번씩은 꼭 앓아야 했던 홍역 같은 병은 더욱 그러하다. 이울러 응당 치러야 할 병을 이겨낸 이들에게 과분한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벼슬"이란 말이 바로 그것인데, 홍역을 치른 아이들에게 "큰 벼슬했구나!"하면서 위로함을 잊지 않았다. 그것을 치러내는 과정이 그토록 어려웠기에 "나도 큰 마마, 작은 마마다 치른 놈이라고!"하면서 자신의 경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마마"란 천연두와 같은 역병을 두려워하여 붙인 말로서 이 두 가지를 이겨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벼슬을 한 셈이다. 인간의 병은 크게 보아 전염병과 성인병으로 나뉜다고 한다. 현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염병이 아니라 성인병이라고 하니, 곧 든 병이 아니라 난 병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정신계통의 신경성이 많다고 하는데, 요는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만이 난병을 치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해야 나는 병은 물론 들거나 걸리는 병까지도 막을 수 있다. 병이 난다는 말보다 병을 얻는다는 말이 더 높임말 같으나 병이란 본래 달갑지 않은 것이기에 아예 주지도, 얻지도 말아야 할 대상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혼사용어 - 풀보기, 자리보기, 댕기풀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련의 행사를 뭉뚱그려 결혼 또는 혼례라 한다. 영어의 "웨딩(Wedding)"이나 한자어의 혼인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합일의 의미로써 남녀 공히 쓰이지만 우리말에는 이처럼 남녀가 각기 달리 표현된다. 장가를 드는 일은 그 옛날 모계사회의 유습으로서 성년이 된 남자가 장인과 장모가 있는 집, 곧 장가로 들었기에 생긴 말이다. 옛날에 신랑은 일정 기간 처가에 머물렀다가 첫아이를 낳으면 비로서 독립하거나 본가로 되돌아온다. 우리말에서 장가든다는 말은 통해도 "시집든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자가 드는 장가에 반해 시집가는 일만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여자는 일단 시집이란 데를 가면 다시는 친정에 되돌아오지 못한다. 시집이란 말은 "새(신)집"이라는 뜻이다. "새"가 변한 말 "시"를 한자로는 시로 적는데, 이는 우리가 만든 고유 한자이다. 새집에서 맞는 새 부모(시부모)는 특별히 신경 써서 모셔야 한다는 뜻으로 "계집 녀"자에 "생각 사"를 붙여 놓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에는 말 그래도 시집가고 장가드는 청춘 남녀는 매우 드물게 되었다. 대개는 분가하여 따로 살기 때문에 "독립한다"는 말이 결혼에 더 가깝다고 할까. 전통적인 혼사는 중매쟁이에 의해 남녀가 맞선을 보는 데서 시작된다. "선본다"는 말의"선"은 먼저 본다는 뜻에서 "선"일 수도 있고 우선 대략을 본다는 뜻에서 "선"일 수도 있다. 중매는 고유어로 "새들다", 중매쟁이는 "새들꾼"이라 하는데 이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이런 과정을 생략해 버리는 부부가 있는데, 혼례를 치르지 않고 그대로 동거해 버리는 "뜨게부부"가 그런 경우이다. "뜨게"라는 말은 "본을 뜨다"와 마찬가지로 흉내낸다는 뜻인데, 정식 부부도 아닌 남녀가 부부 행세를 하는 일종의 예비 부부를 지칭한다. "두더지 혼인"도 이와 유사하다. 정식 혼인이기는 하나 남몰래 하는 것이어서 떳떳하지는 못한 그런 혼사를 이름이다. 옛날 두더지 처녀가 더 멋진 신랑을 택하고자 온갖 부류의 동물을 전전했으나 결국 동족인 두더지 총각에게 가고 말더라는 우화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혼사를 치를 때 분수에 맞는 상대를 택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보쟁이다"라는 말도 부정한 혼례를 칭하는 고유어이다. 부부가 아닌 남녀가 야합하여 은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이른바 내연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예전 같으면 "보쟁이하다" 들킨 연놈은 "멍석말이"를 통해 뭇사람의 응징을 받아야 했다. 기혼 남녀를 일컬어 유부남, 유부녀라고 하는데 이 한자말은 웬지 꺼림칙한 여운이 있다. "유부녀가 어찌했다"면 남녀관계에 어떤 흑막이라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니 말이다. 이런 경우 "핫아비, 핫어미"라는 고유어로 불러 줌이 좋을 듯하다. 여기서 "핫"은 "홑(홀)"과 상반되는 말로서 핫바지와 홑바지의 차이와 같은 말로 쓰인다. 다시 말해 배우자가 있을 때는 핫아비요, 배우자 없이 혼자 살 때는 "홑아비, 홀아비"가 되는 것이다. 독신 생활을 "홀앗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홀아비, 홀어미도 다시 짝을 구하여 새 생활을 꾸릴 수가 있다. 재혼 또는 재취가 바로 그것인데, 이를 일러 "속현"이라는 멋진 표현을 쓴다. 거문고와 비파의 끊어진 현은 다시 잇는다는 뜻이니 머잖아 아름다운 선율이 집안에 가득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금실(금슬)이 좋았다면 모르겠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차선일지라도 다시 이어진 이 현이 절대 끊기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최근 결혼식에서는 신랑 앞에 서는 "기럭아비"나 "꼭지도둑"도 없어지고, 신부를 따르는 "열두하님"이나 "쪽두리하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식이 끝난 뒤 시부모를 뵙는 "풀보기"라는 의식도, 친척이나 친구를 불러 한턱 단단히 내는 "자리보기"라는 풍습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풀보기란 거추장스러운 혼례의장을 풀어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어른을 뵙는 일이요, 자리보기는 이웃 사람들이 첫날밤을 지낸 신랑 신부의 잠자리를 구경하는 일을 이름이다. 자리보기를 "댕기풀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신혼부부가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접대하고 한바탕 노는 것과 같은 행사다. 댕기풀이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대게 예쁘게 꾸민 침실을 기웃거리며 부부 생활을 빗댄 짓궂은 농담으로 신혼부부를 놀려댄다. 본래 신방은 사람의 눈으로 보아주지 않으면 귀신이 먼저 엿본다는 속신이 있다. 첫날밤에 그토록 극성스레 신방의 방문을 뚫어 대던 풍습도 이런 악귀의 침범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신혼여행지까지 따라 갈 수도 없고 또 침구멍을 낼 창호지문도 없어서 이런 장난을 칠 수 없게 되었다. 생활 환경이 변하고 풍습이 달라져서 그렇다 해도 이런 풀보기, 자리보기, 댕기풀이 같은 미풍의 용어만은 그대로 살렸으면 좋겠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부모 호칭어 - 엄마, 아빠에서 "어이 어이"까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무엇일까? 생전 처음 입 밖으로 내뱉는 이 최초의 말이 죽으면서도 남기는 인류 최후의 언어가 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문에 대해 희랍의 사가 헤로도투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옛날 이집트의 한 왕이 새로 태어나는 자신의 아이를 대상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무슨 말을 내뱉는가를 관찰하게 했다. 전혀 언어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이 아이가 스스로 지어내서 하는 말이 인류 최초의 언어, 곧 조어일 것으로 가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베코스"라는 제일성을 듣게 되었고, 이 말이 소아시아의 한 지방 언어인 프리지안 어(phrysian)로서 빵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저 흥미있는 일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언어가 다름 아닌 빵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서양인의 구호가 생각난다. 이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이나 한국인에게는 "밥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에 해당되는 말이다. 빵이나 밥은 먹을 것을 가리키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행위는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그런데 이 본능적 욕구, 즉 먹을 것을 요구하는 외침이 친족 호칭어의 기본인 부모 호칭어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더욱이 이런 현상이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언어에 공통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한국의 아이들도 태어나면서 "맘마, 밥바"를 외치면서 부모를 찾고 먹을 것을 요구한다. 맘마, 밥바에서 첫소리 자음 "ㅁ" 과 "ㅂ"이 떨어져 나가면 "엄(암)마, 압바(아빠)"가 되고, 이것이 바로 부모를 부르는 말의 기원어가 된다. 부모 호칭에서도 어머니를 칭하는 말의 첫음이 "ㅁ(m음소)"이며, 아버지를 칭하는 말의 첫음이 "ㅂ(f, v)"임도 역시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우리말의 어미, 아비, 어머니, 아버지 등이 모두 부모 호칭의 기원형인 "엄" 이나 "압"에서 분화, 파생된 어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 할비, 할미는 이 기원형에 크다는 뜻의 "한"이 접두하여 발음하기 쉽게"할"로 바뀐 것이다. TV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의 세자 양녕대군이 할아버지인 태조를 향해 "할바마마"라고 무르고 있음을 본다. 오빠 및 올케라는 호칭도 아버지의 기원형 "압"에서 분화된 파생어이다. "오라비"는 아비에 "올"이 접두한 어형이고, 올케도 "오라비겨집"이 줄어든 말이다. "올"은 올벼, 올감자 등의 예에서 보듯 어려서 아직 익지 않은 과일을 지칭하므로 올아비 역시 어린 아버지란 뜻이다. 자기보다 항렬이 낮은 아우라는 호칭은 본래 "아시"에서 "ㅅ"이 탈락한 형태로 지금도 동생을 낳을 때 경상도에서는 "아시본다"는 말을 쓴다. 아시는 작다, 어리다는 뜻인데, "아시아비"가 줄어 아재비로, "아시어미"가 줄어 아재미 또는 아주머니라는 파생어를 만든다. 말하자면 부모 항렬이긴 하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저씨나 아주머니의 어원을 유별나게 보려는 사람도 있다. 곧 아저씨는 "아기의 씨"를 가진 남자이고,아주머니는 "아기의 주머니"를 가진 여자라는 것이다. 이는 우연히 어형이 유사한 것으로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를 지칭하는 지아비, 지어미 역시 부모칭의 압, 엄에서 짓는다(작)라 할 때의 "짓"이 접두한 말이다. 농경사회에서 부부를 생산자로 여겨 그렇게 부른 것이다. 말 그대로 부부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집을 짓고,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자식을 짓는(자식 농사란 말이 있다)일에 종사하는, "짓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후레자식"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흔히 아비 없이 자란 아들을 그렇게 말하는데, 이는 "홀어미 자식"을 이르는 말로 지아비가 없다 보니 제대로 자식을 짓지 못하여(교육을 시키지 못하여) 버르장머리없는 자식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말의 친족 호칭어도 여느 어사처럼 극심하게 한자저의 침투를 입었다. 친근한 고유어를 버리고 한자어를 쓰게 된 것은 맹목적인 한자 숭상의 사대풍조와 함께 한자어가 가지는편리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서는 외숙모를 가리켜 "어미오라비겨집"이라 하고, 이모부를 가리켜 "어미겨집동생의 남진"이라는 긴 이름으로 적고 있다. 이처럼 우리말이 촌수에 비례하여 길어지는 단점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가까운 피붙이의 호칭이 이보다 더 정겨울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부모칭 외의 아들, 딸, 언니, 누이, 며느리 등도 이에 해당하 한자어가 있기는 하나 고유어의 당당한 기세에 눌려 비집고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우리말이 지닌 그 피붙이(혈연)와도 같은 친근감을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위기를 맞았을 때 서양인들은 "오 마이 갓!" 하며 하느님을 찾지만 우리는 "엄마야!" 하며 부지불식간에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나, 어마나, 에그머니나, 오매" 등도 모두 같은 유형이다. 통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어이 어이"하면서 슬프게 곡을 하는데, 이때 "어이"는 단순히 울음의 의성어가 아니라 어버이를 부르는 말이다. 어떤 이는 "어이"가 부모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를 가리키므로 "어이 어이"하는 곡성은 모태회귀 본능의 발로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떻든 부모칭은 태어나 맨 처음 배우는 말인 동시에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되뇌는 삶의 최종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모칭이 먹을 것을 찾는 본능적 의사 표시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 "엄마, 아빠는 우리의 밥이다."라는 말도 가능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의 이런 노골적 표현이 일견 고약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들은 어차피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하기에 그리 잘못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생활 속의 우리말 유아의 언어 습득 말문은 저절로 트인다 보통 아이들은 난 지 1~2년이 지나면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옹알이부터 시작된 언어 학습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내게 된다. 초기에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몇몇 단어를 반복하는데 그치지만, 이런 시행 착오기를 거치면 어느 날 갑자기 제대로 된 문장을 봇물 터지듯 쏟아낸다.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미숙하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표현하려 애쓴다. 이런 시기를 가리켜 옛 어른들은 "말문이 트인다"고 했다. 말문만 트이는 게 아니라 글문도 트인다고 말한다. 글을 능숙하게 읽을 줄 알고 또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는 단계를 일컬어 문리(문리)가 트인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트이다"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트이다는 "트다"의 피동형으로 "싹이 트다. 동이 트다. 움이 트다"에서 보듯 어떤 결과가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저절로, 또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을 이름이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그것도 우연히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그런 결과를 가져올 어떤 싹(원인)이 내재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태어나 두세 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리고, 그 이후 글방에 다니면서 열심히 글을 읽으면 어느 순간 저절로 글문(문리)이 열려 자연스럽게 글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필연적 현상을 두고 "트인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린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헤엄치기나 자전거 타기처럼 오로지 학습에 따른 결과라고만 믿어왔다. 다시 말하면 말하기에 관한 한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여 언어 현상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숱한 시행 착오나 반복 훈련을 거쳐 비로소 자유롭게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최근에 와서 뒤바뀌게 되었다. "트인다"는 표현을 고려한다면 어린이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어떤 싹, 즉 유전인자가 있었음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트인다"가 본래 내재했던 인자가 저절로 드러나는 현상이라면 인간은 본래 언어 능력을 가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언어, 특히 생후 최초로 습득하는 모어에 관한 한 "배운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물고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헤엄을 칠 수 있고, 또 새는 알에서 깨어나면서부터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 날 수는 없으니 새가 날 수 았고 물고기가 헤엄칠 수 있는 이유는 후천적 학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천적인 자질이기 때문이다. 언어 습득도 이와 같으니 말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의 선천적인 자질에 속한다.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생득설이니 합리주의 이론이니 하는 것도 이를 두고 이름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면서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려해보면 이 생득설이 언어 습득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이론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 나라 학생들은 가장 지능이 발달한 시기, 곧 중학교 때부터 영어룰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까지 약 10여 년을 지속한다. 그것도 무질서하게 배우는 게 아니라 가장 체계적인 방법으로, 또 좋은 환경에서 수학하게 되므로 그 정도면 영어 하나는 충분히 구사할 법도 한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린이의 모어 학습의 경우는 어떠한가? 지능 계발도 덜 된 시기에, 그나마 가르치는 사람이 반드시 우수하지도 않으며 가르치는 내용도 체계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여건하에서도 모든 어린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모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어가 일반적인 지적 능력과 경험만으로 습득되는 것이라면 어린이의 지능 지수나 소질, 환경 등의 차이에 따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열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어린이에게는 환경적 여건이나 일반적 지능에 제한을 받지 않는 어떤 천부적인 언어 학습 능력, 또는 언어 구조에 대한 해석 능력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는 언어 구조에 대한 선험적 지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마치 건축 설계의 청사진과도 같은 그것의 모습을 우리가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 청사진의 참모습을 밝히는 일이 언어학의 궁극적 목표가 되겠는데,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언어학의 분야뿐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해명에도 크게 공헌하리라 믿는다. 언어 학습 과정에서 유난히 말을 빨리 배우는 어린이가 있다. 이럴 때 부모는 똑똑한 자식이 태어났다고 좋아들 하지만 사실 일찍 말문이 트인다 하여 꼭 지능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재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늦게 말을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남들이 말을 배울 때 자신은 상대성 원리를 구상했노라 했다. 말하자면 그 나이에 아인슈타인은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말을 안 한 것이다. 말은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문이 트여서 행하게 되는 것이니 아인슈타인은 단지 시간적으로 말문이 늦게 트인 경우에 불과하다고 할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아 길렀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나았냐고 물으면 사람은 생기는 족족 저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온다고 답하곤 했다.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갖고 나오는 그것, 그 재산 목록 가운데 가장 귀한 보물이 바로 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