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허망한 언사들 1 - 별 볼일 있는 말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말의 힘은 참으로 무섭다. 몇해 전인가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인기를 끌자 전국이 온통 "뭐길래" 선풍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사랑이 뭐길래"라는 말은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사랑의 열정이나 그 힘을 강조한 것이지만 자칫하면 반의어로 쓰일 위험성도 없지 않다. "뭐길래 선풍"은 그 대상이 사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미인이 뭐길래, 친구가 뭐길래, 성적이 뭐길래, 정치가 뭐길래"로 확산되고, 이는 다시 구체적인 단체나 인물로 옮아 간다. 기존의 질서나 권위는 물론 윤리, 도덕이나 미풍양속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효과는 겉잡을수 없게 된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교수가 뭐길래" 라면서 그들의 스승을 구타했다. 어떤 망나니는 "부모가 뭐길래"하면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뿐인가, 위계질서가 생명인 군에서는 "상관이 뭐길래"하면서 장교를 폭행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지휘관이 부하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며느리가 시부모를 길들이는 세태, 곧 세상이 거꾸로 가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질서없는 사회에서 언어라고 온전할 리 만무하다. "우습다"는 말은 그 반대말인 "우습지도 않다"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 일이 우습다거나 그가 웃긴다고 할 때 이와 상반되는 그 일이 "우습지도 않다"와 그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과 실제 표현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엉터리나 변명이라는 말도 본뜻이 전도되었다. 본래 어떤 일의 개략적 내용이나 윤곽을 일러 엉터리라고 한다. "엉터리가 없다", "엉터리를 잘 모른다"고 해야 이치에 맞지 않는다거나 윤곽을 파악할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현재 쓰이는 엉터리는 그 자체로 허위를 뜻하는, 참으로 엉터리 같은 말로 변질되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죄가 없음을 밝힌다는 변명도 예외는 아니다. "변명하지 마라, 이건 변명이 아닙니다"에서 보듯 변명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나 엉터리가 없다는 뜻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참으로 그 신세가 우습지도 않게 변해버린 말이라고 할까. 한자어 별 역시 본래의 뜻을 버리고 그야말로 "별 볼일 없게"되었다. 별은 분명 보통과 다름을 나타내는 말로서 "별 볼일 없다, 별수 없다, 별게 아니다"에서 보듯 "별"에 부정을 뜻하는 어사가 연결되어야 보통이란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현실어에서는 어디 그런가, "별놈 다있네, 별일 다 본다, 참 별꼴이야"등의 예문에서 보면 앞서 말한 "뭐길래"와 마찬가지로 언급되는 대상의 특별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지랄같은 성질이 "지성"이요 개같은 성격이 "개성"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왜 이 지경까지 뒤틀리게 되었을까? "별것"과 함께 "어차피 다 그런 것, 주제에" 따위도 부정적이면서 체념적인 이미지를 내비치는 좋지 않은 어사들이다. "어차피 한번 죽은 몸인데, 어차피 맺지 못한 인연인데"에서 보듯 어차피는 필연적으로 어쩔수 없다는 체념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다 그런거지 뭐"도 이런 숙명 의식을 깔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의식은 속담에서도 잘 드러난다. 벼룩도 뛰어봐야 지척이요, 손오공도 날아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며, 도토리는 키를 재봐야 그렇다는 자조성 짙은 속담이 그런것들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왕이면 긍정적인 표현이 좋다. 해봐야 별수 없다는 말은 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식의 표현으로바뀌어야 한다. 위의 속담도 그 내용을 뒤집어 보면 벼룩은 자기 몸의 수백 배를 뛸 수 있고, 손오공은 슈퍼맨처럼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엽전이 무얼 하겠느냐"는 자조에서 우리도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뀐 지도 오래며, 질서는 좋은 것이고 편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언어의 타락에도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된다. 한번 의미가 나빠지고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이는 끝간 데 없이 구르다가 결국 허탈과 공허 속으로 매몰된다. 이처럼 언어가 나빠지면 사회의 기존 질서나 미풍양속, 또는 그 바탕이 되는 윤리 도덕의 타락까지도 동반한다. 우리가 국어 순화를 외치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가 본래의 뜻을 되찾지 못하는 한 기존 질서나 권위의 회복은 요원하다. 세계화, 국제화를 부르짖는 요즘 "그것이 뭐길래"라는 자세로 임한다면 그 말 역시 별 볼일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우리말의 애매성 - 너무나 인간적인 언어 한국어에는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단수, 복수의 구분이나 성의 구분,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 구분도 그리 철저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표현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별로 불편이나 곤란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대화 현장에서 이런 불투명성을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눈치, 코치가 보완해 주기 때문일까? "시원섭섭하다"라는 말이 그 사람이 떠나서 후련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몹시 아쉽다는 표현인지 분명치 않다. 시큼달큼, 들락날락, 붉으락푸르락, 오락가락 등의 표현도 비빔밥처럼 맛(의미)의 본뜻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우리말의 "예, 아니오"의 답변을 비롯하여 "그래요"라든가 "그렇지 뭐"라는 긍정적 의사 표시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집에 갈래?" 라는 물음과 "집에 안갈래?" 라는 물음이 실제에 있어 동의어일 수 있다. 이처럼 물음 자체가 애매한 만큼 답변 또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마는..." , "백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 "좋기야 좋지만..." 이런 답변에는 말미에 붙는 "-마는(만)"에 무게의 중심이 놓인다 우리말에서 "글쎄요, 생각 좀 해봅시다"라면서 수염을 쓰다듬거나 콧등을 어루만진다면 이는 분명 거절을 뜻한다. 오랜 세월 농경 문화에 길들여져 온 우리는 이웃과의 화합을 고려하여 거절이나 반대의 뜻을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는다. 남의 불행에 대해서도 "참 안됐습니다만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라고 위로한다. "불행중 다행"이라든가 "그만하면 됐다"는 표현도 비슷한 유형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지우고 싶은 사건, 곧 12, 12 사태의 해석도 이런 유형이 아닐까. 이 사건이 하필이면 왜 12월 12일에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태생부터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 십이와 동음인 시비는 옳고 그름만을 지칭하지 않고 그 잘잘못을 따지는 다툼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특히 "시비"라는 말의 중첩어인 "시시비비"는 가타부타나 왈가왈부, 시야비야와 함께 시비가 지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12, 12사태의 규정으로 말하면 초기 "불가피한"사태에서부터 출발하여 "군사 쿠데타적 사건"을 거쳐 최종적으로 군사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쿠데타에 붙는 "적"이라는 꼬리표와 반란이라는 용어다. 그 반란이란 것이 한 때 기소 유예 판정을 받았기에 그것이 반란이 아니냐는 또다른 시비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말에 끼어든 한자어 가운데 이 "적"만큼 활용도가 높은 글자도 드물 듯 하다. 이 애매한 용어가 그만큼 우리 정서에 맞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이 말은 모호한 입장이나 불완전한 식견을 도배질하는 데 단골로 사용된다. "그는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가능해도 "그는 사람적이다"는 말은 불가능하듯이 "적"은 반드시 한자어 뒤에만 붙는다. 그런데 쿠데타라는 서구어(불어)에도 이 접미어를 붙일수 있는지 의문이다. 뿐인가, "귀족적"이라고 하면 실지 귀족은 아니면서 겉으로 귀족 행세를 하는 사람을 빗댄 말이다. 그렇다면 쿠데타적 사건을 실제 쿠데타는 아니면서 이와 유사한, 또는 이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글쎄요..." 라면서 콧등이나 쓰다듬으며 고개가 갸웃거려질 대목이다. 굳이 말한다면 적은 영어의 틱(-tic)에 해당하므로 쿠데타적이 아니라 "쿠데타틱"이라 해야 어울리지 않을까? 로맨틱이란 말은 있어도 "로맨스적"이란 말은 없기 때문이다. 한자말 "적"이나 영어의 "틱"에 해당하는 우리말에 "척하다"의 "척"이나 티를 낸다는 "티"가 있다. 그런데 "티, 틱, 적, 척"등은 묘하게도 언어의 국경을 초월하여 의미 뿐 아니라 어형까지도 닮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한자어 적이 우리말에 들어와 이처럼 마구 쓰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말은 좋게 말하여 완곡 어법이 발달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완곡 어법이란 일종의 회색적 표현법으로 본의를 흐려 놓는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표현법은 못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히 밝히기는 꺼리는,이러한 언어의 자폐증은 불투명한 표현을 낳는다. "예스냐 노우냐" 또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결단은 서양인의 것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글쎄요, 생각 좀 해봅시다."식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견지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어는 "너무나 인간적인 언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흑백 논리로 소란스러운 것도 이런 관습이나 고유 정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인간적인 것까지는 좋으나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현대와 같은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런 인간적인 표현법은 "글쎄요, 생각 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4 - 신토불이와 토사구팽 신토불이라는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외국 농산물의 전면 수입과 함께 달라진 게 있다면 이 낯선 구호의 출현이 아닌가 한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 대한 선전 구호에는 못 미치겠지만 어떻든 같은 제목의 대중 가요까지 유행하다 보니 이제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신토불이는 몸과 흙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곧 우리 몸에는 우리 농산물이 제일이라는 뜻일텐데, 이 대단한 유행어는 국어 사전에도 등재된 바가 없다. 쉬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숙어를 써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또 남이 모르는 말을 구사함으로써 은연중에 으스대고자 하는 심성이 있다. 좋게 말하면 변화의 추구, 즉 통상어의 진부성을 탈피하려는 일반적인 추세요, 나쁘게 말하면 유식한 척하려는 일종의 자기 과시라 할까. "하자"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경우도 이와 다름이 없다. 하자는 공히 옥의 티, 곧 흠집을 뜻하는 한자로서 여간 어려운 용어가 아니다. "하자 담보" 또는 "하자 있는 의사 표시" 등에서처럼 어려운 말을 써야 그 권위를 인정받는(?) 법률 용어에서나 쓰이는 말이 어찌하여 생활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셋집 계약은 물론 문방구에서 볼펜 하나를 사도 이제는 "하자"라는 말을 들먹이곤 한다. 어느 구 정치인이 남긴 토사구팽이라는 숙어도 결코 쉬운 말은 아니다. 구워 삶는다는 팽자도 정확히 쓰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든가, 필요 없으면 헌신짝처럼 내팽개침을 당한다든가, 어떻든 쉬운 말로 썼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썼다 하여 유식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선거철 유세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의정 단상에서도 우리 정치인들이 내뱉는 말은 그리 수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퇴역하는 일부 정객은 가끔 묘한 말을 남기곤 한다.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아리송한 말을 남기는 게 무슨 유행럼 되었다. 언젠가 어떤 피의자가 법정에서 남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멋져 보여서 그랬을까? 노견이라는 말도 그런 예에 속한다. 얼마 전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곳곳에 한글로 쓴 "노견 주행금지" 또는 "노견주의"란 경고판을 볼 수 있었다. 고유어 길섶에 해당하는 이 말은 한자어에서도 노변이나 노방이란 말은 있어도 노견이란 말은 찾아볼수 없다. 교통 표지판 가운데 "사고다발 지점"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다발"이란 무슨 똣인가? 다발이란 무다발이니 꽃다발이니 하여 한묶음을 뜻하는 말이니 이 지점에서는 사고가 다발로 났다는 이야긴가? 게다가 그 표지판에는 보기에도 으스스한 해골바가지까지 그려놨다.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그림을 본 운전자가 오히려 겁에 질려 사고를 다발로 내지 않을까 걱정된다. 다발은 노견은 마찬가지로 어설픈 신조어에 지나지 않는다. 노견을 길섶이나 갓길이라는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사고다발 지점은 그저 "사고 많은 곳", "위험 지역" 또는 "운전조심"이라는 경고만으로 충분하다. 길이 갑자기 좁아지는 지역을 병목 지점이라 하고 그로 인해 혼잡해지는 현상을 병목 현상이라 한다. 교통 표지판이라는게 보는 사람 누구나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면 족하지않은가. 어려운 한자어를 좋아하는 부류로 법조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법조인들이 누리는 특권이나 권위가 높은 탓인지 이들은 법률 용어도 어려운 한자어만 사용한다. 우선 법조인을 일컫는 "율사"라는 호칭부터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율이 율법이나 학자에 적용된다면 율사나 율사가 될 것이요, 음률에 정통한 가객이라면 율객이라 칭할 것이다. 법조계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스승이나 학자는 아니다. 이들은 또한 조선조 형률의 실무자였던 율객도 아니며 자장 율사와 같은 고승도, 유태교의 바리새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죄와 벌 또는 원고와 피고 사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조율사란 말인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 "상기 부녀자는 유아를 척추 상반부에 적재하고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어린애를 등에 업은 아낙네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사건의 전말을 경찰 조서에서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지금의 법률 용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벌과금, 범칙금, 벌금, 과태료, 과료등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것부터 궁금하다. 아리송한 말이 유행어로 쓰이기는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가씨도 아니고 아주머니도 아닌, 처녀처럼 보이는 신세대 주부를 일러 "미시"라 한다. 그런데 "미시"라는 신조 영어는 일시적인 유행어라쳐도 앞서 언급한 신토불이만큼은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농산물을 권장하는 구호라면 당연히 이 땅에서 생성된 토박이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3 - 개화와 세계화 개화라는 용어가 유행하던 시가가 있었다. 고유 한복을 벗어 던지고 개화복인 양복으로 갈아 입었으며, 그 위에 개화모와 개화경까지 곁들여 모양을 내곤 했다. 호주머니를 개화주머니라 부르고 멀쩡한 지팡이도 짧게 하여 개화장이라 부르며 이를 휘두르고 다녔다. 당시 좀 배운 사람이라면 저마다 개화인임을 자처하며 개화꾼이라는 이웃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화의 말뜻을 되새겨 보고 이 용어의 사용이 타당한지를 생각해 본다. 사전에 따르면 개화란 "사람이 깨고 지식이 발달하여 사상, 풍속, 문화 등이 진보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화기 이전, 말하자면 서구 문화가 유입되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깨지도 못했고 지식도 발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원시, 야만의 미개국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만년 문화 민족에게 그런 용어를 써도 좋은지 모르겠다. 물론 일제 식민통치의 정책적 소산이겠지만 그보다 당시 풍조가 거의 맹목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용어의 타당성을 고려해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조선조를 "이씨왕조"라 고치고 초등학교(소학교)를 "국민학교"라 칭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의도적으로 개화란 용어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 스스로가 이 시기를 개화기라 부른다면, 이는 분명 자기부정이며 또다른 사대사상의 발로라 생각된다. 모화라 하여 중국을 섬겼던 데서 새로이 서구 열강 쪽으로 그 대상을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최근의 형세를 보면 구한말 개화를 외치던 그때와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국어 교육을 강조하기에 앞서 영어의 조기 교육을 주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영어의 공용어화에 열을 올린다. 더욱 놀라운 일은 영어의 공용어 채택을 완강히 거부하던 인사들까지 일본이 선수를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개화기라는 용어를 전환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언어 현실로 말한다면 한자어 시대에서 영어시대로 바뀐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런 가정의 질문도 가능하다. 장차 미국의 시대가 가고 중국이나 일본의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우리의 공용어를 또다시 중국어나 일본어로 전환해야 할 것인가라는. 최근 언어 현실에서 영어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일상어에서도 고유도 대신 영어를 쓰는 것이 언어 분야의 세계화라 규정하고 현 수준을 감안하여 이 분야에서만은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속된말대로 호박에 줄친다고 수박이 되는 건 아니다. 몇몇 용어를 그대로 흉내낸다고 하여 언어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려면 우리말을 철저히 교육시킨뒤에 그 바탕 위에서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의 공용화가 거론되더라도 그것은 상거래를 비롯한 일부 특정 분야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많이 나오더라도 일상어에서만은 우리말을 애용해야 할 것이다. 또다른 전환기를 맞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우리말을 갈고 닦아 이를 애용하는 길밖에 없다. 적절한 용어가 없다면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이전에 사용했던 말이 있으면 이를 되살려 써야 한다. 또 이왕 쓰고 있는 말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탁마하지 않으면 좋은 보석을 얻을수 없듯이 언어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아름다운 말을 가질수 없는 것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 우리말을 갈고 닦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아파트 현관문에 밖을 내다볼수 있는 작은 구멍을 가리키는 적절한 우리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로 "더치 홀(dutch hole)"이라 부르는 이 구멍을 그저 "문구멍"이라든지 "빠꼼이"라 부를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와는 아무 감정도 없는 화란인(dutch-man)을 나쁘게 말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다. 이 점잖치 못한 구멍을 일러 "솔옹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소나무에 박힌 옹이는 예로부터 뒷간 같은 은밀한 곳에서 몰래 밖을 훔쳐보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이 옹이 구멍은 인위적으로 뚫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어서 더 호감이 느껴진다. 널리 쓰이는 말이지만 "이쑤시개"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다. "쑤시다"는 말 자체가 찌르다, 아프다, 버르집다와 같이 좋지 않은 뜻을 가졌다. 그렇다고 치아 청소기, 이빨 소제기라면 너무 길고 거창하니 그렇다면 좀 더 짧고 단순하게 "말끔이"라면 어떨까? 일본말 "요지"는 그것이 본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것의 재료가 버드나무가 아닌 플라스틱일지라도 이름은 언제나 요지일 것이다. 앞서 말한 솔옹이도 같은 경우다. 아파트의 현관문이 목재가 아닌 철제로 변한다 해도 거기에 뚫린 구멍은 언제나 "솔옹이 구멍"으로 남아 있으면 족하다. 한자어나 외래어만이 꼭 새롭고 멋진 말은 아닐것이니, 이처럼 우리말도 다듬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2 - 부끄러움이 자랑스러움으로 오래전 읽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이어령님의 수필이 생각난다. 우리말을 공부하면서 이 제목이 바로 우리말의 생성과 발전을 한마디로 지적한 것 같아 언제나 되새기곤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 중에도 흙, 바람, 땅, 고향, 어머니 같은 단어는 항상 새로운 맛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태어나 자랐고 그 속에서 살다가 장차 묻힐 곳이기 때문에 그 정은 더욱 애틋하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일평생 살아 온 사람을 토박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말문이 트일 때 처음 배워 죽을 때까지 쓰는 토박이 말(native language)을 고유어 또는 모어(mother language)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유아기의 일정 기간에 걸쳐 모어를 습득하고 사춘기에 이르러 모어에 의해 사고의 틀에 형성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모어의 습득하고 사춘기에 이르러 모어의 습득이나 언어 활동은 민족성의 보존이나 계승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동일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집단이 살고 있는 땅이라는 공간에서 생성되고 그 위에 바람이라는 시간에 의해 변화를 거듭한다.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한국어도 이 땅의 흙속에 , 저 세찬 바람속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산물이다. 흔히 말하는 언어의 풍토설이나 언어 민족설도 이를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시킨 것이다. 우주의 호흡이라는 바람은 잠시라도 그칠 새가 없다. 이 땅에도 항시 크고 작은 "말의 바람", 곧 언어의 변화를 겪었다. 이른 시기에 불어닥친 대륙의 모랫바람(흔히 황사라 부름)은 작은 한반도를 온통 누렇게 물들여 놓았다. 중국에서 유입된 한자 및 한자말이 우리 토박이말위에 쏟아져 우리말을 몰아낸 것이다. 가까운 시기에는 동해에서 "곤색바람"이 몰랴왔다. 일제 식민 통치하에 강요된 일본어의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전의 한자, 한문이 우리말속에 스며들었다면 총칼의 위협 아래 강요된 일본어, 일어식 한자어는 그 위에 덧씌움을 했다고나 할까. 토박이말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대륙의 황사나 섬나라의 곤색바람보다도 더 게센 "오렌지 바람"이 태평양을 건너와 이 땅에 소용돌이치고 있다. 일본어의 잔재를 미처 씻어내기도 전에 또다시 영어를 위시한 서구계어의 풍랑을 맞이 된 것이다. "국어사랑 나라사랑"이라는 표어가 이제 "영어사랑 세계사랑"으로 뒤바뀔만큼 영어의 기세는 등등하다. 국제화에 적응한다는 명분아래 우리 어린이들은 영어조기 교육의 장으로 내몰리고 대학생들은 영어로 된 교과서를 가지고 영어로 강의를 듣고 있다. 또한 사회 분위기는 어떠한가? 모 신문사가 벌이는 환경정화운동을 "그린스카우트"라 하고, 모 자동차 회사가 벌이는 승용차 함께 타기 운동을 "고객사랑 카 풀" 이라 광고한다. 뿐인가. LG, SK 등 대기업의 이름으로부터 최근 속출하고 있는 벤처기업은 처음부터 영어로 이름을 지어야 되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개인의 이름도 예외는 아니다. 모 그룹에 다니는 김모과장의 외국 이름은 "키스 김"인데 영어 이니셜이 "KS"인 점에 착안하여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이름을 지었다고 자랑한다. 영어식 이름뿐만이 아니다. 멕시코에 파견된 상사 주재원은 "로베르또", 러시아에 파견된 이는 "소냐, 타냐, 블라디미르" 등등 별별 희한한 이름을 짓고 있다. 개 이름 정도나 유별난 연예인 쯤 되어야 외국어 이름을 가지는 줄 알았더니 세계화를 부르짖는 요즘은 그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수년 전 서울이 정도 6백년을 맞았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남산 자락에 "타임 캡슐"을 묻었다. 4백년 후, 곧 1천 주년이었을 때 후손들이 이를 열어보라는 의도에서다. 이 시대의 문화 유산을 그때의 후손들은 어떤 느낌으로 보게 될지 궁금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용기에 적힌 "타임캡슐"이라는 표기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이고, 이를 봄으로써 4백년 전에도 우리말이 외래어에 오염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용기속에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최신의 산물과 가장 정확한 역사 기록물을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우리의 정신적 문화 유산인 고유어는 빼먹지 않았나 싶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 시대의 정신문화는 그 시대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 용기속에 고유어를 쓰지 않았다는 건 이런 정신 문화의 핵을 빠뜨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한국 사람으로 "아리랑"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리랑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는 외국인의 질문에 자신있게 답변해 줄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잘 모르는 말이 어디 아리랑뿐일까마는 어떻든 우리는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의 그 말뜻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필자 역시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국어학을 전공하면서, 게다가 어원에 관심을 두면서도 그 말뜻을 모른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1994년에 펴낸 "부끄러운 아리랑"(현암사 간)은 이런 사실을 고백하는 글을 모은 책이다. 우리 것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줄 알고, 또 우리말에 전보다 더한 관심과 애착을 보일때만 이 부끄러움이 머잖아 자랑스러움으로 변하리라 믿는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 사랑 1 - 손때의 의미 필자에게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만년필을 들 수 있겠다.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잘 모른다. 허리부분에 금이 가 테이프로 감아 놓은 이 고물 만년필은 20여 년 전에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그동안 수차례 잃어버린 적도 있으나 용케도 되돌아온, 그래서 나와는 전생에 무슨 연이라도 있는 듯한 물건이다. 만신창이가 된 이 만년필은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과 네 권의 저서를 비롯하여 여러 잡문을 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이 만년필이 아니고는 어떤 글도 쓸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해도 이름 그대로 만년까지 간직할 참이다. 내가 아끼는 것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만년필도 있다. 필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가 만년까지 아껴야 할 정신적인 유산, 바로 우리말, 우리글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말, 우리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오다 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이처럼 소중한 재산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년필에 나의 손때가 묻어 있기에 소중한 것처럼 말이나 글에는 우리 민족의 손때, 곧 생각이나 정서, 얼이나 정신이 응고되어 있기에 영원토록 간직하고 다듬어야 할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국어, 외래어의 홍수속에서 우리말을 천시하는 풍조하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항이다. 우리말에는 한가지 뜻의 말이라 해도 고유어와 한자어, 서구계 외래어 사이에 위상의 대립이 있다. 말하자면 토박이 고유어보다는 한자말이 더 점잖고 고상하며, 한자말보다는 외래어가 더 참신하고 유식해 보인다는 그런 인식 말이다. 과연 그럴까. 흔한 예로 호텔이나 고급식당에서 우유 한잔을 시켰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 밀크 한잔 주세요."라거나 "여기 우유 한잔 주세요"는 그런대로 무난한 주문이다. 그런데 "여기 쇠젖 한잔 주세요"라고 했다면 어떨까? 웬 이런 무식한 촌놈이 있느냐는 듯이 종업원의 표정이 달라질 것이다. 고급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점잖은 자리일수록 고유어나 한자어보다는 서구계 외래어를 써야 격에 맞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마당에 이런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천년 동안 써 온, 조상의 손때가 묻은 우리말은 어떻게 되는가? 온 세상이 하나의 마을(지구촌)이 되었다 하여 영어 하나로 온 세계인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어떤말이든 자국어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외국어인 영어를 잘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말에 능숙해야만 다른 외국어도 잘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인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잘못된 고정 관념을 버린다면 토박이 고유어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말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자가용 운전자를 "오너드라이버"라 하는데, 이보다는 "자가운전"이, 자가운전보다는 "손수운전"이나 "몸소운전"이 더 곱고도 정겨운 말로 인식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기로 한다. "도투락"이라는 식품명을 본 일이 있다. 도투락은 도투락댕기의 준말로 행운을 상징하는 돼지꼬리를 지칭하는 옛말이다. 옛날 여자 어린이가 명절에 머리 끝에 드리는 댕기를 가리키는 말을 식품 이름에 끌어다 쓴 점에 호감이 간다. 가죽신을 지었던 이들을 "갖바치"라 불렀는데 이 말을 피혁 제품의 상표로 끌어다 쓴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단 상품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식당에서 여럿이 식사하고 다같이 추렴하여 요금을 내는 방식을 "도리기" 또는 "도르리"라고 한다. 이런 좋은 우리말을 두고 "더치페이"라는 어려운 외국어를 써서 우리와는 아무 유감이 없는 화란 사람들을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상 용어에서도 나들이 옷을 "난벌", 평상복을 "든벌", 이 두가지를 겸하는 옷을 "난든벌"이라 하고 소매가 없는 옷을 "민소매"라 한다. 이런 좋은 우리 말을 두고 굳이 캐주얼이니 소대나시니 하는 외국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흔히 사투리라고 하는 방언도 꼭 버릴 것만은 아니다. 경상도 말에서 "새첩다"는 참으로 새첩은 말이며, "하머"는 정말 정감 어린 표현이다. "술 한잔 살 거야?" "하머" 두말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멋진 답변이다. "욕봤다"는 치욕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이며, "야 이 문둥아!" 라는 호칭은 실제 나병환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상도 문둥이들은 잘 알고 있다. 흔히 하는 말에 "때 빼고 광낸다"는 속언이 있다. 구두에서는 때를 빼고 광을 낼 수 있으므로 이 말은 서양인들에게나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짚새기나 고무신에서는 때는 빼도 광은 낼 수가 없다. 때는 세월이요, 전통의 이끼라 할 수 있으나, 이럴 경우 오히려 광을 빼고 때를 묻히는 편이 효과적일 터이다. 손때는 우리의 체온이자 기억의 언어이며 세월과 정이 괴어 있는 늪이다. 조강지처는 그런 때(정)이 묻어 있기에 결코 버리지 못한다. 오래 간직한 지갑이나 만년필을 잃어버렸을 때 그 속에 든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겉에 묻은 손 때가 아까워서 우리는 아쉬워한다. 이런 대화는 어떨까? "어때, 우리말이 더 새첩고 좋제?" "하머!"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3 - 언어와 민족, 그리고 문화 세계화를 지상의 화두로 삼는 현금에 이르러 영어 학습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영어에 능통해야만 남보다 앞설수 있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여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려되는 점은 우리말을 더 천시하게 되고, 또 영어가 한국어보다 훨씬 우수한 언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영어 사용권 국가들이 대부분 강대국이므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는 우리보다 못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의 언어보다 우수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여 결코 그렇지 않다. 언어학자들은 한 지역의 문화의 발전도는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고 지적한다. 미개인들의 언어도 고도 문명사회의 언어만큼 얼마든지 추상적이고 복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문명사회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미개 사회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있고, 미개 사회의 언어로 표현 할수 없는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문명 사회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어떤 황홀한 정경을 보았을 때 아프리카 시인은 서구의 보통 사람보다 얼마든지 더 멋진 표현을 할 수 있다. 이들 언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이 많아서 그것이 적은 언어보다 문법이 더 정제되었거나 전문적인 학술용어가 많을수 있다는 것뿐이다. 이런 외형적인 차이만으로 언어의 수준이 높고 낮음을 평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언어의 차이는 그 언어가 쓰이는 지역의 기후나 풍토 등과 같은 지리적 여건이나 언어 사용자들의 생활 풍습등 문화적인 차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열대 내륙지역의 언어에서 눈, 얼음, 바다, 조개 따위의 어휘가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눈(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우리말의 눈은 중국어의 설, 영어의 snow와 같이 하나의 어휘만을 가진다. 그런데 눈 속에서 생활하는 이누크족(흔히 에스키모라 부름)의 말에는 내리는 눈, 쌓인 눈, 집을 짓는 데 쓰이는 눈 등 몇 개의 어휘가 공존하여 쓰인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 환경에서 눈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른 언어보다 개념이 더 세분화된 결과이다. 우리말에서는 모, 벼, 쌀, 밥등으로 세분화하여 구분되는 어휘가 영어에서는 rice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와 빵을 주식으로 하는 서구인의 식문화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영어는 추상능력이 있는 언어이고,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개별 언어들이 수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이들 언어사이의 번역상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아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완벽한 번역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문학 작품, 특히 상징성이 짙은 운문(시)의 경우에서 쉽게 발견된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김소월의 시를 영어로 옮겼을 때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를 것이다. 어휘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를테면 비젼(vision), 멜랑콜리(melanncholy), 델리커시(delicacy) 같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기에 부적잘한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맛이 달짝지근하다, 시금털털하다도 그렇지만 시원섭섭하다, 삼삼하다에 이르면 더 난감해지지 않겠는가. 언어는 또한 어느 특정한 종족과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는 한국인만이 할 수 있고 중국어는 중국인 만이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모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를테면 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왔지만 그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다. 이는 서양 선교사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라면서 한국인과 똑같은 우리말을 잘할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언어와 종족사이에 필연성이 없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언어와 특정한 문화 사이에도 불가분리의 연관성은 없다. 언어가 다르면 문화가 반드시 다르다든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회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번역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지만 완전한 번역이 존재할수 없는 이유는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있는 어휘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없거나, 또 있다 하더라도 그 개념이 한결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특정언어와 종족과의 관계 또는 특정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 문화의 발전도와 언어 수준의 차이, 언어와 사고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등을 언급해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개별 언어의 특수성, 언어와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과대 평가하고 그것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전세계의 언어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의 보편적 특질에 대해서는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개별 언어에 대한 이해는 언어 일반의 보편적 특질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또 개별 언어에 관한 연구는 일반 언어의 보편적 특질을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2 - 낮은 목소리, 짧은 표현 한국인은 본래 웅변보다는 침묵에 더 가치를 두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우리의 언어 의식은 의사 표시에 그대로 드러난다. 즉 소리내서 말하기보다 그저 기침이나 눈빛으로, 또는 안면이나 온몸으로 넌지시 드러내는 표정언어, 몸짓언어에 더 능통해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글로는 자기 표현에 능숙하면서도 말로 하라면 공연히 거드름을 피우거나 심하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을 닫는 경우가 예사였다. 사람을 평할 때도 말수가 적은 사람을 가리켜 점잖고 으젓하고 무게 있다고 말한다. 반면 말 잘하는 사람이라면 대게 약장수나 전도사, 변호사나 정치꾼 정도로 생각한다. 자고로 선비라면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내면서 어쩌다가 잔기침이나 수염을 쓰다듬는 정도의 자기 표현이 고작인, 과묵한 사람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런 한국 선비의 눈에는 쉴새없이 조잘대는 서구인들의 모습은 가볍다 못해 경망스럽게 보일 것이다.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스크린에 비치는 대화 장면이 우리와는 크게 다름을 느낀다. 그들의 대화에는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을뿐더러 대화 당사자의 얼굴은 불안스러울 정도로 근접되어 있다. 말의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손짓, 발짓 은 물론 어깻짓까지 동원된다. 우리네 같으면 "어디서 누구에게 감히 말대꾸냐!" 하는 호통과 함께 따귀라도 한 대 얻어맞았을 법한 장면들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서양의 TV프로 중에 대화나 토론 위주의 "토크쇼 (talk show)"가 단연 인기라고 들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식으로 마이크를 들이대면 "그런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손부터 내젓거나, 반대로 한 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내 놓을줄 모르는 우리네의 태도와는 사정이 판이하다. 이런 프로에 얼굴이 내비쳐지고 무슨 말이든 발설되면 그것 자체가 점잖치 못한 짓, 속된 말로 하면 "쪽팔리는" 행위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는 서양 속담이 오히려 우리의 언어 의식을 그대로 대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식사 형태에서도 이런 언어 의식은 그대로 반영된다. 한국인에게 식사 시간은 어디까지나 먹는 시간이지 대화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식사하는 장소부터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독상 위주의 밥상은 가계 서열에 따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배열된다. 게다가 식사중에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한 규율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은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저작운동에만 몰두한다. 서구인이 우리의 이런 식사 풍경을 엿본다면 아마도 침묵속에서 되새김질하는 소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식사중의 대화는 경박한 짓이며 이는 복을 쫓는 행위로 치부했던 것 같다. 어쩌다 어른이 무언가를 지시하면 아랫 사람은 그저 "네"라는 짧은 대답만 허용될 뿐 그 하명에 어떤 이의도 용납되지 않는다.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예로부터 한국인에게 만성위장병 환가자 많은 것도 이런 식사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온가족이 상하구별 없는 원탁에 둘러 앉아 이건 밥을 먹는 건지 말 시합(speech contest)이라도 하는 건지 모를, 그런 서양인들의 식사 풍경을 우리 조상들이 보셨다면 뭐라 말씀하셨을까? 우리에게 토론은 곧 언쟁의 뜻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 자체를 윗사람들은 말대꾸 내지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한국의 민주화가 늦어진 이유도 이와 같은 미숙한 대화술, 토론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서구화의 영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은 놀랍게 달라지고 있다. 개인은 개인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저마다 목청을 높여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기에 열을 올린다. 반장 선거에 나선 초등학교 어린이도 똑똑 부러질 정도로 자기 소견을 발표한다. 쭈뼛거리며 멋쩍게 뒤통수나 긁던 지난 날의 어린이와는 판이한 모습이다. 거리에서 교통 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논리나 정당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되든 안되든 소리부터 크게 질러 놓고 보자는 심보들이다. 말하는 데도 무슨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어린이가 말문이 트일 때처럼 그렇게 봇물 터지듯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토해놓는다. 말 못하고 살아 온 백성이 그동안 맺힌 한을 한꺼번에 풀어 내려는 형세다. "말 못하고 죽은 귀신은 없다"고 하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는 속담에 부응이라도 하듯 요즘 세상은 "나도 말 좀 하고 삽시다"의 풍조가 도래한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자유뒤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 무심코 내뱉은 말에 무서운 책임과 제약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말은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일컬어 믿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리도 이제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다만 말하기 전에 한걸음 물러나 그 말을 되새겨 보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조상들이 고수해 온 침묵의 언어가 단지 침묵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태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말하기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자세와 훈련을 통해 낮은 목소리, 짧은 표현이 큰 목소리, 긴 표현을 이기게 될 것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모어에 대한 인식 1 - 말 속에 담긴 것 "생각은 무엇으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또한 "언어가 없다면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을 수도 있다. 이는 언어와 사고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 언어가 분명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간단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 할때 여러 가지 색깔로 분류된다. 무지개가 바로 그것인데, 무지개 색깔의 수를 물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게 일곱가지라고 답한다. 그런데 프랑스 어린이들은 아홉가지라 하고, 로데지아 어린이들은 세 가지라 답한다. 똑같은 무지개를 두고 수를 달리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색깔을 나타내는 그 나라 말의 어휘수와 관련되는 문제로서 한국에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가지로 배워왔고 불란서에서는 아홉가지로, 로데지아에서는 세 가지로 배워 왔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색깔을 실제로 세어 본 사람은 없을 터이고, 또 셀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경계가 그어진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얼굴에서 뺨과 턱의 분명한 경계를 지을 수도 없으니 뺨과 턱을 하나로 묶어 지칭할 수도 있고, 또 더 세분하여 다른 명칭을 부여할 수도 있다. 한 부모아래 태어난 동기간의 호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동기간을 형,제(아우),자(누나,언니),매(누이,동생)의 넷으로 나눈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영어에서는 "brother"와 "sister"의 두 가지로, 말레이시아 어에서는 "sudara"라는 단 한가지 호칭만으로 통용된다. 한국인은 사고 할때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적인 사고 방식에 따라 행동 유형도 결정된다.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한국인이 영어로 무엇을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할 리 만무하다. 한참 영어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이 전날 밤에 영어로 꿈을 꾸었다고 한다면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어의 언어구조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사상이나 정서는 물론 한국의 고유한 냄새까지 배어 있다. 음식으로 말한다면 숭늉이나 막걸리, 김치나 된장에서 풍기는 그런 냄새가 한국어 속에 스며 있다. 이 한국적 냄새는 중국어가 풍기는 자장면 냄새나 일본어가 풍기는 단무지 냄새, 서구어가 풍기는 버트나 치즈 냄새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언어가 풍기는 이런 개성적 색채는 흔히 말하는 언어의 풍토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개별 언어가 가지는 이런 고유한 색채를 좀 더 비근한 예로 설명해 본다. 비교적 콧소리(비음)을 많이 내는 불어에서는 포도주에서 맛 볼수 있는 그런 정감,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할까. 그래서 연인과 사랑을 속삭일 때는 불어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에 반해 남과 싸울 때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장사꾼과 상담을 할 때는 영어를, 친구와 우정을 나눌때는 이태리어를, 신을 찬양할 때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라는 그럴싸한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스페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테지만 전혀 터무니 없지는 않다. 사실 똑같은 구애의 표현이라도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라는 발음을 위해 침을 튀기는 것보다는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우리말도 지역에 따라 말투에서 느끼는 정감은 사뭇 다르다. 방언이라 일컫는, 언어에서의 지방색이 강하게 작용하는 탓이다. 남과 싸울 때는 경상도 말을 쓰는 대신 여자는 나긋나긋한 서울말을 쓰는 편이 이상적일 터이다. 사업이야기는 서울말로, 남을 설득시킬 때는 전라도말로 하고 달 밝은 밤 한가로이 산책할 때는 "차암 달도 밝구만이라우..."하는 식의 충청도 말이 제격일 것이다. 독일의 학자 훔볼트(Humbolt)는 일찍이 언어구조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민족성 사이에 불가분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독일어에는 게르만 민족의 민족성이 배어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는 한민족의 정신과 얼이 녹아 있다. 우리말은 우리의 피부색과 흡사한 흙 속에서, 우리의 운명과도 같은 저 바람 속에서 오랜 세월 숙성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속에는 분명 한국인의 원형(archetype)이 보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언어를 지키는 일은 민족과 국가를 지키는 일과 직결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한국어를 갈고 닦아 순화시켜야만 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우리말을 잊지 않았다면 그는 한국인이라 할수 있으나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한국인이라 말하기 어렵다. 오래 전 일로 기억한다. 공산권 국가와 교류가 없던 시절 체코에 살던 한 한국 여인이 40년만에 고국땅을 밟았다. 기구한 운명으로 체코까지 가게 된 그 여인은 현지에서 체코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 수십년을 살면서 전혀 한국어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의 인터뷰에서 유창한 우리말을 쓰는 그녀를 보고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말을 잊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머릿속에서 항상 한국어로 생각하고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홀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어가 가진 위대한 힘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두어주일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공항에서부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영어식 말투를 내뱉는, 그런 얼치기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 주어야 할까?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글의 어원 - "긋다"에서 그리움까지 외상을 질 때 흔히 "긋는다" 또는 "달아놓는다"고 말한다. 단골 술집이라면 이런 말도 필요없이 그저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대각선으로 쭉 긋는 시늉만 해 보여도 족하다. 맞돈일 때는 셈을 치른다고 하면서 외상인 경우에는 긋는다거나 달아놓는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긋는다"는 "쓰다" 이전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기록 방식이다. 무언가 새겨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를테면 날짜를 기억하거나 사냥한 짐승의 수를 표시하고자 할 때 대게는 어떤 뾰족한 도구로 벽이나 기둥 같은 곳에 선을 그어 표시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상술을 마셨을 때 낫으로 기둥에 금을 긋거나 새끼 마디에 도토리를 매달아 이를 표적으로 삼곤 했다. 기억하는 일을 달리 말하여 마음에 새겨 둔다고 한다. 명심 또는 각심이라는 한자말이 여기 해당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마음에 선을 긋는 일이다.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마음에 새긴 금만큼 확실한 표적도 없을 듯하다. "제발 이 일만은 마음에 두지 말게"라는 당부는 흔히 듣는 말이지만 마음에 새긴 금을 쉽게 지울수가 없다. 살을 쪼아 먹물을 들이는 애흔 수술이나 돌이나 쇠에 새긴 금석명은 지울수 있으나 마음에 새긴 것만은 지우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금은 긋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 또는 글을 쓰는 일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긋고 그리고 쓰는 일은 백지 상태의 흰 바탕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금, 글 , 그림, 그리움이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가 내 마음의 벽에 금을 그려 놓은 그림자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 사람의 모습을 자꾸 그리고 싶다거나, 새겨진 그 모습이 새록새록 생각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 상대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그와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겨진 금은 많아질 것이고 금의 깊이도 더해만 갈 것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그립다"는 말 자체가 "그리고 싶다"이기에 이 말은 하면 할수록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그리다, 그리워하다, 그립다"는 말의 본뜻을 절묘하게 살린 예를 우리는 김소월의 "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찾는다. 마음 속에 새겨진 무형의 흔적이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은 당장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그림자 일 것이다. 대중 가요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이라는 가사도 있지만 그리움이란 역시 대상이 눈 앞에 없는 경우에 쓰일 수 있다. 보고 싶은 님은 당장 그곳에 없어도 그 님의 그림자만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생명이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은 또한 태양을 등진 어두움의 그늘이다. 그것은 밝고 맑은 분위기가 아니라 우울하고 슬픈 이미지를 나타낸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라는 고려가요 "정과정"에서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바람 센 오늘은 너 더욱 그리워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 있나니..." 하는 청마 유치환의 시에서 보듯 그리움은 대체로 울음을 동반하여 얼굴을 내민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그리움이라 한다면 눈으로 불 수 있게 손으로 그려 내는 그림을 글(서,문)이라 할수 있겠다. 글은 새기는 사람에 따라 그의 개성이 배어 있으므로, 이를 일러 글씨라 일컫는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그리움의 흔적, 곧 글을 쓰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고 있음을 본다. 기둥이나 벽에 금을 긋던 원시적 방법은 이내 붓 끝에 먹물을 찍어 긋는 방식으로 바뀐다. 다시 먹물 대신 잉크가, 붓 대신 철핀(펜)이 나와 이를 대신하는 듯 싶더니 곧이어 만년필이나 볼펜이 등장하여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자기나 컴퓨터가 등장하여 쓰는 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이처럼 기록 방식은 긋거나 긁는 데서 치거나 두드려 찍는 식으로 변했는데, 이렇게 찍혀 나오는 글씨에서는 무언가 잃은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컴퓨터에서 찍혀 나오는 글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든 이의 정성과 손때가 묻어 있는 수제품에서 느껴지는, 그런 맛을 맛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괴발개발 함부로 쓴 악필일망정 글씨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과 마음의 흔적이 배어 있다. 지문이 묻어 있는 자신의 육향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 날씨로 치면 희끄무레하니 흐린날의 이미지를 가졌지만 그리움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사랑이란 우리 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의 것을 향하여 갖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바람 부는 오늘같은 날에는 어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