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죽령(竹嶺)과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간 봄 그리워 하니 모든 것이 시름일세 아담한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니 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 뵙도록 겨를 지으니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오고 가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득오의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竹旨郞)은 어떤 사람일까. 그렇게도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이었던가. 우거진 쑥대밭일망정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별밤의 평안함을 누리고 싶어 하다니. 화랑 사이에 느끼는 믿음과 애틋함이 이러할진대 그 마음으로 무슨 일인들 힘써 보지 않았을까. 때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시절. 술종공(述宗公)이란 이가 춘천지방 - 당시에는 삭주(朔州)의 도독이란 벼슬을 하게 되어 길을 떠났다. 삼한의 난리가 어지러워 수행하는 군사 3천을 데리고 부임을 하러 가고 있었다. 일종의 정복군과 비슷한 큰 세력일 것이다. 그것도 말을 탄 군사가 3천이라면 웬만한 고장은 휩쓸어 버릴 만하지 않은가. 이제 일행이 죽지령(竹旨嶺) 지금의 죽령쯤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도사를 만나게 된다. 첫 눈에 마음이 통하여 술종공과 도사는 아주 가깝게 느꼈다. 삭주도독이 되어 일한 지 한 달쯤 되는 때 홀연 공(公)은 꿈에 그 반가운 도사를 만나게 된다. 그의 아내 또한 같은 꿈을 꾸게 되니 정성이 지극해서 무언가 어떤 오고 감이 있었음인가. 이상하게 여긴 공은 사람을 보내 알아본즉, 꿈 속에 도사는 꿈을 꾸던 무렵에 저승으로 갔다는 얘기. 다시 사람을 보내 산의 북쪽에 무덤을 만들고 미륵불상을 그 앞에 세워 주게 된다. 술종공은 생각하였다. 틀림 없이 도사가 되살아 우리집에 태어 날 것이라고. 마침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의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죽지령 혹은 죽령에서 만났던 그 도사를 떠올리면서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화랑이 된 죽지랑은 뒤에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큰 일을 하게 된다. 해서 지덕 태종 문무 신문왕에 걸쳐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죽령 고개만큼이나 삼국통일의 길은 험하고 멀었다. 죽령재는 마한 진한 변한의 국경으로 뒤에 신라와 고구려가 나라의 경계 싸움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뺏고 빼앗기는 천연의 군사요새가 바로 죽령재였다. 저 유명한 온달장군도 결국은 죽령 싸움에서 최후를 마치게 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서라도 죽령재를 넘어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삼국통일을 할까 하는 게 신라 사람들의 꿈이요, 희망사항이었으니 말이다. 대동지지를 보면 죽령(竹嶺)은 단양의 동남 30리쯤에 있어 순흥과 경계가 된다는 풀이다. 경상좌도로 가는 큰 길목으로 갈림길의 뿌리가 되는 곳이었다. 옛부터 전해 오는 죽령재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阿達羅)왕 때의 일이다. 왕이 일을 한 지 5년 되던 해 죽죽(竹竹)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길을 내었다는 것. 이 때부터 죽령이 되었다고 한다. 고개 서쪽에 죽죽 사당이 있어 제사를 올리고 그를 기념하였다. 옛 적의 성터가 있던 것을 신라가 다시 쌓아 썼다는 사연이 있다. 죽죽(竹竹)과 죽령과 죽지. 물론 사람의 이름이요, 고개 이름이기도 하지만 고개를 넘어 삼국통일을 하려는 흐름을 스스롭게 심은 것은 아닌가 한다. 하면 그러한 소리상징의 질서는 어떠한 것인가. 양주동(1972.고가연구)에서는 '죽지'를 '다ㅂ마루'로 풀이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마을 사람 나라의 걸림을 보이는 '사이'를 밑뜻으로 보고자 한다. 미루어 보건대, '죽죽 - 죽지'는 '숫(ㄱ) - 숙 - 쑥'으로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삼국시대의 전반기에는 소리의 낱내로서 터짐갈이 소리 - 파찰음(ㅈ ㅊ ㅉ)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하면 파찰음은 모두 마찰음(ㅅ ㅆ)으로 읽어야 한다는 풀이가 된다. 그러니까 '죽죽 - 숙숙 / 죽지 - 숙시'의 맞걸림이 일어 난다. '숙'에 머리글자인 시옷(ㅅ)만을 따서 쓰게 되니 결국 '숙숙 숫(ㄱ)'의 어울림을 찾아 낼 수 있다. 죽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지 숙시'가 되어 숙시를 이두식으로 반절해서 읽으면 '숫(ㄱ)'이 된다. 땅이름에는 쑥(쑥고개 숫고개)이 들어가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 산골에 쑥이나 숯뿐일까. '숫(ㄱ)'은 사이를 뜻하는 '슷(間<훈몽자회>)'계열의 낱말로서 받침의 소리가 같은 계열로 바뀌어 '숫 - 숟 - 술 / 슷 - 슬 / 삿 - 살 - 삳'의 낱말겨레가 생긴다(필자1991.우리말의 상상력). 술종공의 '술'도 소리로만 보면 '숫'과 같은 바탕 뜻을 드러내는 말로 보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쑥 또한 그러하다. 겉 보기로는 대나무 비슷하고 풀도 나무도 아니다. 그 '사이'쯤 되는 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북방정책을 잘 해서 삼국통일을 하려는 믿음이 짙게 깔린 것은 아닌가 한다. 이를 뒷 받침하는 건 길 닦던 도사와의 만남이다. 상징으로라면 길닦이는 삼국통일의 길이요, 올바른 벼슬살이의 대도(大道)라 할 것이다. 꿈에 도사가 나타난 것은 물론이지만 꿈이란 잠재의식을 통하여 도사와의 영적교감이 일어 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죽지(竹旨)란 아들을 얻게 되고 도사의 무덤에 돌로 만든 미륵부처를 세운다는 것. 이는 호국불교의 대승(大乘)정신으로서 자신이 통일의 주역이라는 통과제의 같다면 어떨까. 본시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이 세상의 중생들을 다 극락으로 보낸 뒤에 나중에 극락으로 간다는 신념에 찬 멀고 큰 그리움을 지닌 부처. 술종공이 먼저 길을 닦고 죽지(竹旨)가 큰 일을 이룬다는 북방정책의 이상을 실현 하는 정신적인 흙으로서 미륵불이 작용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상징동물로서 용을 떠 올린다. 이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소백산 서쪽에 용못이 있다. 달리 3층담(三層潭)으로도 불리워 진다. 미루어 보면 용은 신앙이요, 큰 힘이며 3층담의 3은 삼국이 아닌가 한다. 원뜻은 삼국통일의 그리움을 심고 기르는 줄기찬 국민정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사의 무덤 앞에 미륵불을 세운 건 자기 암시요 스스롭게 그러한 지향성을 나그네들에게 높이 들리워 보인 것이리라. 물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배달겨레로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놓은 가슴 아픈 일이긴 했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지게 마련. '죽지 - 죽죽 - 죽령'의 '사이(숫 - 슷)'가 되비쳐 된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슷'이 사이요, '응'은 접미사인 바, 스승이란 본디 제사장 - 교황을 뜻하는 말이다. 도사가 그러하고 술종공이나 죽지랑 모두가 인간과 인간의 사이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다스리는 다리와 디딤돌의 구실을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참 스승이 아닌가. 같은 소백산 줄기에서 큰 재로 불리우는 문경새재 - 조령(鳥領)이, 소백산의 봉화를 올렸다는 소이산(所伊山)이, 계두산(鷄頭山) - 일명 작성(鵲城) 금의곡(錦衣谷 - 쇠골), 적성(赤城)이 그러한 보기들이라고 할 것이다. 소리꼴은 모두 '사이'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섬김으로 다스린다 죽지랑이 이끄는 화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는 이가 있었다. 날마다 화랑으로서의 길을 닦으러 나오더니 갑자기 열흘이 넘도록 나오지를 않는다. 득오의 어머니는 당전이란 군대의 벼슬을 하는 익선(益宣)이란 사람이 득오를 급하게 불러 가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삼았다고 했다. 나라의 일로 갔으니 그 또한 찾아 가 격려해야 할 일로 생각한 죽지랑은 일백여명의 낭도와 함께 술 한 병, 떡 한그릇을 갖고 득오를 찾아 갔다. 이를테면 부대에 면회를 간 셈이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득오는 익선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사로운 일에 화랑이 될 사람을 부리다니(...). 죽지랑은 득오에게 쉴 틈을 주도록 익선에게 청하였으나 헛수고였다. 마침 밀양(당시는 추화(推火))에서 오는 군량미 30석을 빌어 익선에게 주면서 화랑의 일을 돕도록 청하였으나 마찬가지로 거절. 벼슬이 17등급이 있는데 죽지랑은 13등급에 해당하였든지 그가 쓰던 말 안장을 내 놓으니 그제서 득오에게 말미를 주었다. 익선은 직권을 이용한 뇌물을 받았으니 분명 사정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사연을 알게 된 화랑의 총책임자가 익선을 잡아 가두기로 했다. 이를 안 익선은 숨어 버리게 되니 그의 맏 아들이 대신 붙잡혔다. 엄동설한 추위에 연못에 들어 가 목욕을 시키니 곧 얼어 죽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동태가 될 수밖에. 이를 알게 된 효소왕은 명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들은 모두 벼슬을 주지 않을뿐더러 있던 사람도 다 뺏아 버렸다. 통일을 하자매 몸과 마음으로 홀로 서기를 해야 할 화랑에게 함부로 했다는 죄목일 시 분명하다. 승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익선이 살던 모량리 출신의 사람들은 정식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 버렸다. 당시 승려는 지식인이요, 나라의 큰 지도자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왕자들도 승려가 되는 형편이었으니 더 풀이를 할 필요가 없다. 이름이 높았던 당시의 원측법사(圓測法師)도 모량리 사람이었기에 전혀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 이르자매 연좌제를 적용하여 연대책임을 물은 것이다. 득오는 죽지랑의 마음을 잘 아는 화랑으로 죽지랑의 걱정이 곧 자신의 고뇌가 된다고 믿었기에 그러한 충정으로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로 부른 것이다. 그 사연과 마디가락이 걸맞아 많은 화랑은 물론이요, 사람들이 즐겨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터. 그 정성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다. 죽령을 넘어 더 큰 나라 세움의 통일을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자매 아리랑 고개를 하나의 운명이듯 사랑을 가지고 넘을 일이다. 기다림으로 우린 겨레의 고지를 기어이 올라야 한다. 겨레의 하나됨을 위하여.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 중에서) 외롭고 추운 계절을 피는 매화꽃에 어울리게 흰 말을 타고 거침 없이 광야를 달리던 선구자. 이름하여 초인이라 했다. 진정 우리의 삶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겨레의 운명을 돌려 놓을은 흰 말을 탄 선구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선구자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겨레의 일을 함께 염려해야 한다. 백마(白馬)는 늘 상서로운 상징으로서 우리의 지나온 역사 속에서 떠오르곤 하였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시대는 백마의 울음소리로 시작하였으니 예사롭지가 아니하다. 겨레의 지나온 자취를 거슬러 오르면 황량하고 끝 없이 푸른 벌판을 말 타고 누비던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역사의 새벽은 트고 시베리아의 곰신앙을 지닌 북극의 정서로부터 한민족의 강물은 비롯된다. 흔히 배달겨레를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말은 육지의 배요, 싸움터에서는 전차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을 모는 옛 한아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거칠 게 없다.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산맥을 넘어 중국의 동북쪽으로 민족의 이동을 한 게 기원전 이천여년 전. 초원의 빛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 넋은 겨레의 맥박속에 깃들여 숨 쉬고 있다. 겨레의 전통 풍악 가운데 하나인 북 장구 소리도 듣기에 따라서는 말이 달리는 리듬이요, 소리상징이라는 풀이도 있다. 있음직한 풀이다. 언어의 계통으로 보아 한국 몽고 토이기 퉁그스 말은 원시 알타이 공통어에서 갈라져 나온 갈래들이다. 중국의 북부, 시베리아의 남부, 만주전역에 걸쳐 사는 사람들을 이르러 몽고족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흉노(Hun)족도 몽고족이다. 이 겨레들이 우리와 다름 아닌 한 줄기의 겨레붙이들이지를 않는가. 몽고족이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으며 게르만의 대이동이 일어나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말이 용의 자손인가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혜영의 '선구자'에서) 말과 선구자. 본디 선구자란 말 자체가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겨레붙이를 이끄는 사람이 선구자가 아닌가. 거룩한 분이 태어 나면 좋은 말이 생겨 나는 법. 말을 타지 않은 영웅이나 무사(武士)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임금의 상징을 '말뚝'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른바 마립간의 마립(麻立)이 그러하다. 말뚝은 '말'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어로 원관념은 바로 타고 다니는 말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타는 말과 그 수는 신하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다. 마리 - 말은 제일 높은 곳, 높은 부분을 이른다. 원래 짐승으로서 말은 머리 부분 갈기로서 상징되기도 하니깐. 우리말로는 말(馬)이고 토이기말에서는 모린(morin)이라 한다. 만주말에서도 모린(morin)이요, 퉁그스말에서는 무린(murin), 독일말에서는 마레(mahre), 영국말에서도 매어(mare)임은 모두가 우리말의 말과 서로 걸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의 영조 무렵 이서(李署)의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상) 에는 말의 내력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말의 부모에 대하여 동계(東溪)가 물었다. 하니 곡천(曲川)선생이 이르기를 물론 말도 조상이 있다. 용의 아들이요(龍之生也), 개벽의 시기에 처음 동해바다에 두 용이 있었으니 산을 폈다 놓았다 해서 그 이름을 굴강(屈强)과 굴여자(屈女子)라 하였다. 다시 굴여자는 나는 토끼를 낳았으며 나는 토끼는 기린을 낳았다. 이어 기린이 말을 낳았는데 천황의 이름도 용구(龍駒)라 했음을 보면 임금과 용과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긴 용은 바로 힘의 상징이며 물불을 다스리는 통치기능의 이정표가 아니었던가. 말은 바로 먹거리 싸움에서, 또는 말의 고기와 젖을 이용하였고, 밭갈이의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래 저래 말의 쓸모란 엄청난 것이었다. 좋은 말을 가졌음은 오늘날의 날쌘 전차부대를 가진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마경언해로 이어 보자. 뒤에 말이 사람을 물고 뜯어 먹음으로 말미암아 동중선이란 이가 말의 쓸개즙을 따버린 후에는 물고 차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이름하여 말이라 하였다는 것. 왕의 이름을 용과 말로 드러냄은 적어도 당시에 용이나 말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나를 엿보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 말이 땅이름에는 어떻게 되비쳐졌을까. 먼저 마한(馬韓)의 경우를 떠 올릴 수 있다.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말마(馬)의 뜻과 무슨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말이 주요한 값을 지닌 것처럼, 으뜸 가는 짐승이듯이, 마한도 제일 가는 '머리에 값하는 한(韓)'이라 하면 어떨는지. 기실 삼한 가운데 가장 먹고 살 게 넉넉 하게 나는 곳이 마한이었음은 널리 아는 사실이다. 고을마다 말무덤과 걸림이 있는 경우도 있거니와 마산리(馬山里)란 동네 이름을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경남의 마산(馬山)임은 물론이다. 부족의 왕이 있었던 곳을 금마(金馬)라 해서 말과의 상관을 보여 주는 데는 오늘날 전북의 익산이다. 본디는 금마(今馬) - 금마(金馬)라 했으며 그 영현에 셋이 있었는데 옥야(沃野)란 데가 있다. 충청도 옥천도 마찬가지지만 '옥(沃) - 성(聖) - 마(馬 摩)'의 대응을 보여 준다. 뜻으로 읽어 '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도개걸의 걸이나 같은 뜻이다. 거룩한 사람, 건 땅이 모두 말과 무관하지가 않다. 익산의 읍이름을 마주(馬州)라고도 하나니 왕궁터가 있다. 익산에는 마용지(馬龍池), 용화산(龍華山)이 있어 말과 용의 상징이 곧 임금으로 이어진다. 일억년이나 지구를 뒤흔들던 공룡의 변종으로서 말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하였든 용이 하지 못할 게 없는 물체이듯 말의 위력 또한 그러하며 임금의 권위도 같은 선상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 때문에 일어난 싸움 말은 가려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놋네 석양(夕陽)은 재를 넘고 갈길은 천리(千里)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말 때문에 일어난 싸움으로는 말 생산으로 이름 난 제주도를 들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충렬왕 때의 일이다. 왕3년에 원나라는 제주도를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는데 왕20년에 간청하여 탐라도(지금의 제주)를 되돌려 받는다. 왕26년에는 다시 원의 왕비가 말을 놓을 목마장으로 삼는다. 그 뒤 왕21년엔 원의 비서 유원경으로 말을 가려 원의 궁중에 보내는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를 삼아 제주에 보냈는데 제주 사람들이 어마사와 목사를 죽였다. 이 난을 평정한 이가 저 유명한 최영 장군이었으며 우왕 때 이르러서는 제주만호(萬戶) 김중광이 마침내 원나라 관리의 목을 치는 일이 일어 난다. 조선 왕조 때에 궁중에서 필요한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관청이 사복시(司僕侍)였다. 사복시의 말을 사복마라 했으니 오늘날 교통체신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서울역의 역(驛)도 '말을 갈아 탄다'는 뜻이요, 공무 수행으로 다니는 말을 파발마라 하여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사이에 곳곳에 역을 두었다. 말잡이를 마정(馬丁)으로, 말먹이통을 말구시, 말의 병 고치는 이를 마의(馬醫), 콩이나 겨로 여물을 섞어 쑤어 주던 죽을 말죽(지금의 말죽거리가 그 보기임), 역마를 관리하기 위한 전답을 마전(馬田)등으로 썼던 기록자료들이 있다. 하기야 말이 기관차 곧 쇠말로 바뀌었을 뿐 본 바탕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암행어사의 징표로서 쓰는 패에는 반드시 말이 그려져 있으니 말은 곧 군사작전의 상징으로 쓰이었다. 길고 짧은 점만 뺀다면, 입으로 하는 말(言)이나 타는 말(馬)이 구실로 보면 같다.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로 옮기는 게 말이요, 짐이나 사람을 태워 옮기는 짐승이 말(馬)이다. 말이 없으면 사람이 올바른 사회생활을 할 길이 없다. 타는 말에도 좋은 말(良馬)이 있고, 못쓸 말(駑馬)사람을 해치는 말(凶馬)이 있다고 했다(이서<마경초집언해>). 우리 입으로 하는 말도 그러하다. 나와 다른 이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말, 아름다운 정서가 담기는 말, 겨레의 얼이 담기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올바른 말이 받아들여 지는 세상이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아니하다. 겉다르고 속이 다름을 마각(馬脚)이라 하거니와 우리 모두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힘 - 마력(馬力)을 길러야 한다. 이제 타는 말이 권위의 상징인 때는 갔고, 모두가 함께 입으로 하는 말은 하루도 끊임 없이 한다. 말은 슬기요, 인간의 정신이다. 해서 모든 종교의 경전이 말로 적힌다. 큰 뜻을 위해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얼을 키워 갈 일이다. 평화를 이끄는 말이 열매를 맺도록 말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치악의 말미암음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빛과 그림자의 순환이란 덧 없음 그 자체이다. 힘 없이 사라져 간 고려왕조에 대한 씁쓸한 그리움을 읊고 있다. 여말의 충신이었던 운곡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노래. 망한 왕조의 유신으로 산에 들어가 숨어 사는 삶을 누린다. 이조 태종이 친히 찾아가서 함께 일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내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동지지≫에 따르자면 치악산(雉岳山)은 다른 이름으로 적악(赤岳)이라고도 한다. 동쪽으로 25리쯤에 높고 큰 바위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샘물이나 바위 또한 정갈하였다. 이조의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던 첫 해에 고려 진사 원천석을 운곡에서 친히 방문하였다. 때에 사람들은 임금의 행차가 머물렀던 바위를 일러 태종대(太宗台)라고 하였다. 산의 동쪽에는 또 각림사(覺林寺)가 있는데 뒤에 태종이 된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이 곳에서 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횡성에서 무예를 닦을 때에도 이 절에서 머물렀다는 얘기. 산의 높이는 1288미터로 원주 영월 횡성 제천의 경계가 된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毘盧峯)이다. 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자애로움이 넘친다. 연화장 누리에 살면서 어두운 세상을 두루 비추는 부처가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적는 한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로봉이란 산봉우리가 상당수에 이른다. 금강산을 비롯한 묘향산 속리산 치악산 팔공산 지리산 등의 비로봉은 늘 자애로운 몸짓으로 온 누리에 환한 빛을 던지는 것일까. 불가에서는 비로자나부처의 상징으로 그 의미를 부여했는데 소리 상징은 어떠한 것인가. 본디 비로자나불은 바이로자나(vairocana)였으나 우리말로 뿌리를 내리는 길목에서 '비로'로 소리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소리상징으로라면 '비로'는 '빌'이며 빌은 별의 또 다른 꼴 곧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별의 사투리를 보면 길게 소리가 나는 '빌:'이 경상 충청권은 물론이요, 강원도의 삼척 통천 고성 양양 주문진 영월 평창 원주 횡성 흥천 인제 평강의 지역에서 쓰인다. 이르자면 북두칠성과 같은 별에 빌어서 자신은 말할 것 없고 겨레의 안녕과 번영을 꾀하였던 전통신앙을 드러낸 걸로 보인다. 따지자면 '빌다'는 움직임말로 별의 변이형인 '빌'에 동사화 접미사 '다'를 붙여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대상에 빈다는 건 기원적으로 별신앙에서 말미암았다고나 할까. 그 낱말의 겨레를 들어 보면 '빌 - ㅂ - 빗 - 빛'의 형태가 있다. 별도 마찬가지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별에서 받침소리가 같은 줄기로 바뀌면 '별 - ㅂ - 볕 - 볏 - ㅂ'이 된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현재 쓰이지 않는 형태들도 있으니 일종의 죽은 말이라고 하겠다. 별은 광명이요, 태양의 밝은 빛을 그 밑으로 한다. 이르러 광명사상이며 태양숭배의 믿음에 터를 삼고 있다고나 할까. 그럼 별신앙과 불가의 광명불 신앙은 어떻게 고리 지을 수 있을까. 믿음이 움 터온 차례를 보면 우리 배달겨레의 경우 별 신앙이 먼저요 비로자나불 신앙은 뒤이다. 하면 믿음의 대상이 별에서 부처로 바뀌었을 뿐 밝음지향의 속내는 같다. 소리상징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빌 - 비로'는 음절짜임이 앞의 것은 초중종성이 한 소리마디를 이루는 폐음절이요, 뒤의 것은 그렇지 않은 열린 소리마디의 짜임이 다를 뿐이다. '비로'에서 소리마디의 끝소리를 빼면 '빌'이 됨을 알겠다. 이러한 적기들은 향가를 적는 과정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어렵지 아니하다(길(道尸)쓸(掃尸)<혜성가> 등). 원주는 치악(雉岳)에서 비로봉을 꼭대기로 하는 치악산은 강원도 감영이 있어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원주(原州)의 보금자리이다. 같은 자료(대동지지)를 보면 본래는 치악성에서 평원군(平原郡)으로, 신라 경덕왕 16년에 북원경으로 고쳐졌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원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 충렬왕에 이르면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되었는데 이는 몽고의 하란(哈丹)을 물리친 공적에 터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하란은 충렬왕 17년에 치악성 아래 진을 치고 북원성을 여러 차례 손아귀에 넣었다. 때에 향리의 진사이며 원주별초에 속해 있던 원충갑(元沖甲)이 지역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하란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앞뒤로 10여회에 걸쳐 무찌르니 이로부터 하란군대의 예봉은 꺾이어 여러 성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되었던 일. 몽고군대의 침략은 고려 고종 때에도 원주를 빼놓지 않았다. 고종 4년에 거란의 군대가 원주에 쳐들어 왔는데 지역 사람들이 힘써 싸워 물리친 적이 있다(力戰却之). 한데 거란군은 횡성쪽으로 물러나 있다가 다시 침략, 원주성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고종 40년에도 몽고병은 원주에 침입했고 이내 풀고 되돌아 갔다(解圍去). 어디 그뿐인가. 역사가 흐르는 전환점에서 얼룩진 일들이 천연의 요새였던 치악산을 둘러 싸고 일어났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가 양길을 도와 원주성에서 일어난 것이나 고려왕조가 끝날 무렵 공양왕이 도망하여 숨은 곳이 원주가 아니던가(遜于原州). 이조에 들어 와서 임진왜란 때 일이다. 선조 25년 왜장 길성중륭(吉盛重隆)이 철령에서부터 나누어 관동의 여러 읍을 짓밟았을 적, 신라 신문왕 때 쌓은 치악산의 남성인 영원산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은 성을 지키지 못하고 패하자 그의 처자식과 함께 순절하고 말았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한다. 원주(原州)의 언덕(原)은 치악성을 이름이요, 싸움에서 말하는 요새인 것이다. 이름하여 원주의 진산(鎭山), 바람막이 구실을 해 주는 중요한 성채라 하겠다. 원주와 술샘[酒泉] 산속에 오랜 나무의 세월을 누가 알리오 벼랑위에 한가로운 듯 핀 꽃은 이름조차 알 길 없어라 (山中老木誰知歲 岸上閑花不記名) 삶은 짧으나 그들이 남긴 예술은 길다. 모두가 다 역사의 수레와 함께 사라져 갔지만 남겨놓은 기록은 세월을 넘어 전해오는 법. 삶의 무상함을 읊은 강효문(康孝文)의 글을 풀어 옮겨 보았다. 원주성의 오래된 고읍으로 주천(酒泉)이 있었다. 지금은 영월의 행정구역이 되기는 했지만 원주의 동쪽 80여리쯤에 주천 마을이 있었는데 본래는 신라땅으로 주연술모(酒淵述慕)였다. 이어 현으로 삼아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면 주천(酒泉)으로 바뀐다. 뒤에 내성군(영월)의 현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 현종때 원주의 행정구역인 속현이 된다. 또 달리는 학성(鶴城)이라 하였는데 지금도 원주에는 학성동(鶴城洞)이 그 발자취를 보이고 있었다. 간단하지만 주천에 얽힌 바위 이야기가 전해 온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르러 주천석(酒泉石)이라 한다. 주천현의 남쪽길 옆에 소구유의 모양을 한 반쯤 깨뜨러진 주천석이 있었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본래 술샘 바위가 서천가에 있었다 한다. 술샘 바위에 가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다. 읍의 한 관리가 바위에 오가는 게 귀찮아서 읍쪽으로 옮겨다 두려고 해서 많은 사람을 시켜 이 술샘 바위를 옮겨 놓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갑자기 하늘의 우뢰가 일어 바윗돌을 셋으로 쪼개 버렸다. 하나는 연못 속에, 하나는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없고, 하나는 지금 남아 있는 바위가 된다. 강희맹의 글에 하였으되, "별신(星君)께서 술로써 하늘 땅에 이름을 삼았고, 신령스러운 술이 이 샘에 흐르니 세상에 찌든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의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으랴"는 한시가 전해 온다. 대동지지 에 주천을 주연술모(酒淵述慕)라 함은 어떠한 내용인가. 보기에 따라서 다른 풀이가 있겠으나 술모(述慕)는 바로 '주연'의 풀이말로 보인다. 술주, 못연이니까 한자의 뜻으로 읽는 훈독(訓讀)의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하면 주연, 주천은 한자의 소리로 읽는 술못이 된다는 줄거리로 간추려 진다. 치악은 사이산 치악산을 달리 적악(赤岳)이라고도 하였고 옛 마을이 주천(酒泉)이요, 다른 이름으로는 학성(鶴城)이라 하였다. 이들 이름을 함께 고리 지을 수 있는 언어표상의 질서는 없을까. 먼저 치악의 '치(雉)'와 학성의 '학(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은 꿩이요, 뒤는 할미새 계의 새다. 둘 다 새의 한 무리로 묶이기는 같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같은 소리상징인 '새'의 적기에 따른 땅이름이라고 본다. 훈몽자회 아래 편을 보면 날아다니는 모든 조류를 통틀어 '새조(鳥)'의 '새'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당시는 두 개의 홀소리로 읽었으니까 '새 - 사이'로 해야 옳다. 그럼 새(鳥)와 오늘날의 사이(間)와 무슨 걸림은 없을까. 같은 소리이면서 다른 뜻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걸림이 있을 수가 있다. 일러서 유연성(有緣性)이라 하는데 사이 - 새의 경우는 어떠한가. 날아다니는 새는 하늘과 땅의 '사이'를 날아 오르고 내린다. 또한 길 짐승과 네발 짐승의 사이쯤 되는 동물이기도 하질 않는가. 학성의 학(鶴)과 치악의 치(雉)는 그렇다 치고 주천 주연의 주(酒)와는 무슨 고리로 걸림을 풀이한단 말인가. 자료에 따라서는 술이 수블(禾醱)로 적히기도 한다(계림유사). 하지만 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손목(孫穆)이란 외국인이 듣기를 바탕으로 적은 것이며 지금 우리가 '술병 속 세계'(이광수의 <흙>)라 할 때 술과 큰 차이가 있지 않다고 본다. 한 마디로 술도 '사이'와 깊은 걸림이 있다. 아주 날 것도 아니면서 썩은 물질도 아니다. 일종의 발효식품으로서 음식의 맛을 가다루는 구실을 한다. 음식에 넣어 먹는 식초가 그 바로 좋은 보기라고 할 것이다. 마시는 것도 술이지만 밥 한 술의 '술'도 술로, 같은 소리로 쓰인다. 다시 숟가락의 '숟'도 같은 말이다. 끝소리가 바뀌어 이루어 지는 말들을 함께 떠올리면 '술 - 숟 - 숫 - 숯'이 된다. 가령 '숯'의 경우, 재도 아니고 멀쩡한 땔감도 아니면서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가연물질이 숯으로 숫에서 끝소리가 터짐갈이 소리로 되면서 생겨 난 형태로 본다. 그럼 숫은 어떠한가. 숟 - 숫에서 흔히 끝소리규칙이라 하여 시옷과 디귿은 끝소리에서 같은 소리 디귿으로 난다. 보통은 말음법칙으로 풀이하지만 암수의 '수(ㅎ)'가 바뀌어 '숫'으로 되었는데 주로 남자의 성(性)이 밖으로 튀어 나온다. 대개는 근육 조직의 '사이'에서 솟아나게 마련이다. 이제 숟 - 술의 풀이를 할 차례이다. 말할 것 없이 이는 디귿이 리을(ㄹ)로 바뀌는 흘림소리되기에 따른 소리의 달라짐이다. 치악산 남쪽 기슭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영원성의 '영'도 사이를 드러내는 치(雉)의 또 다른 적기로 보아 큰 무리는 아니다. 돌로 성 쌓기를 3749자나 하였으며 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요, 샘이 5개나 된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숭람). 삼국의 역사를 보면 후고구려의 궁예가 북원의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으며 양길은 궁예에게 이 곳을 맡겨 장수로 삼아 동쪽의 지역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치악산 석남사(石南寺)에서 기거하면서 주천 내성 등지의 습격을 행하여 영토를 넓힌 일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양길의 군대가 영원성을 거점으로 했다 하며 뒤에 원충갑(元沖甲)이 여기서 거란의 군대를 무찔렀다는 거다. 아울러 치악 - 적악(赤岳)의 경우를 더듬어 보면, 치악의 '치'가 '새(사이)'라 하였는데 적악의 적(赤)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새는 방위로 동쪽이며 인지상으로는 두 곳의 사이, 두 물체의 사이를 이른다. 날이 새다에서와 같이 '적 - 붉다 - 새다'로 그 뜻이 하나의 동아리로 묶일 수 있다. 새벽이 옛글에서는 새배(훈몽자회상1)이며 사투리말로는 새박 새벽 새북이라 한다. 자연물로 보아 새는 '태양'이요, 배(벽 북 박)는 '밝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벽을 뜻하는 벽성과 같은 별이름도 있기는 하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적(赤)을 '치'라 읽기도 한다(달로화치 - 達魯花赤). 하면 치(雉)의 또 다른 표기 이상으로 볼 수 없는 줄거리가 되기도 한다. 까치와 구렁이,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이야기로 치악산은 널리 잘 아는 전설의 산이다. 그럴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땅이름과 걸림을 둘 때에는 새와 치악산의 '치(雉 鶴)'와의 어울림을 머리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새처럼 드높이 솟아있는 치악영봉에 대한 믿음을 생생하게 그린 잠재의식의 드러냄인 것이다. 비로봉이 하늘 땅 사이에 높이 솟아 있듯 치악은 여러 지역에 걸치는 사이 - 경계 공간이 된다. 마치 이정표라도 되듯이 말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새로움과 관동(關東) 산수간에 병이 깊어 초야에 살았더니 관동 팔백리에 다스림을 맡고 보매 거룩한 임의 고마움이 갈수록 끝이 없네 강산이 우리 삶의 젖줄이요, 뿌리됨에 예와 오늘이 다르랴. 윗 글은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의 첫 머리이다. 관동 하면 강과 산이 떠 올라 그 어떤 가능성에의 그윽한 정서가 어린다. 파도처럼 몰밀리는 산맥들의 어두움과 밝음의 가락인 양 빛과 그림자의 뒤안길에서 오랜 시련에 견디어 온 겨레들에게 큰 격려와 용기로서 인내로 다가서는 봉우리와 힘차게 뻗어내린 산줄기들. 옛글에 하였으되 관동이란 중국의 경우 역대의 왕권이 못 미치는 산해관 이북을 이르며 우리의 경우, 흔히 대관령의 동쪽 지방을 일컫는다. 태백산맥의 허리 대관령의 동녁과 서녁을 통틀어 부르는 고장이다. 강원도의 또 다른 부름말을 관동이라고도 했다(대동지지). 본디 예와 맥의 땅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나누어 사이하여 다스리던 고장. 신라가 한 나라를 이루매 가즈런한 모습을 갖추게 된 곳이 바로 강원도다. 한 때는 동주도(東洲道)라 하여 큰 산 태백의 동북방을 이르지 않았는가. 다시 북쪽으로는 삭방도요, 동쪽으로는 바다에 잇닿은 강릉도로 갈라졌다. 조선조의 태조 4년에 둘을 어울러 강원도라 하였다. 쪼가름과 어우름의 긴 동굴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한데 웬 일인가. 뜻하지 않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강산은 다시금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게 되다니. 날이 좋으면 통일전망대에서 꿈속의 금강이 눈 앞에 보인다. 고지가, 금강이 바로 저긴데 나눔과 뒤틀림의 시련을 우리는 뛰어 넘어야 한다. 속성으로 보아 말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는다. 사회와 역사는 삶의 발자취요 문화의 텃밭이 된다. 해서 말은 문화를 되비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일러 언어의 문화투영이라 한다. 사회성과 역사성을 드러내는 소리상징으로서 가장 오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땅이름이다. 해서 땅이름을 문화의 화석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말이 곧 무형문화라 하거니와 그 가운데에서도 땅이름은 보수성이 가장 강하다. 앞에서 강원도의 땅이름을 풀이했다. 이 가운데에서 '동쪽'의 뜻을 이르는 말이 나오는데 본래의 이름이었던 예맥은 물론이요. 가장 핵심적인 뜻으로 쓰인 '동쪽'의 낱말바탕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땅이름의 분포와 그 영향관계는 어떠한가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예(濊)와 사이 강원도는 본시 예맥의 고장이라 했는데 '예'의 본 바탕은 무엇인가. 강릉대도호부가 만들어진 내력을 보면 강릉은 본래 '예'나라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쇠철자 철국(鐵國)이라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와 걸림이 있는 강릉의 다른 부름말로는 동원(東原) 동온(東溫)이 있음을 알겠다. 단적으로 '예'는 동쪽을 이르는 말이요 그 소리를 향찰식으로 읽으면 '새(쇠)'가 된다. 쇠붙이를 모두 일컬어 '쇠'라 하거니와 이 말과 걸림을 보이는 사투리말을 보면 어떠한가 .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쇠(쐬)'가 쓰이지만 경상 전라도의 고장에서는 새(쌔) 더러는 세(쎄)(전라 경상)가 더러는 씨(김천 고령 합천)와 쉬(쒸)(포항 칠곡 청도 상주 군위)가 쓰이기도 한다. 이와 함께 한자음 동(東)이 우리말로는 주로 '새'로 쓰인다. 가령 동쪽의 바람을 동풍이라 하지만 흔히 사투리 말에서 새파람(양구 화천 춘천 춘성 횡성 정선 평창 영월 원주)으로, 더러는 들바람(고성 속초 양양 강릉)이라 하며 삼척에서는 새풍이라고 한다. 사투리로 보면 쇠를 '새'라 하고 동풍의 동도 새라 하니 같은 '새'의 소리로 풀이할 수 있다. 새는 지금이니까 단모음 새로 읽지만 오백년전 중세기 한국어에서는 두 개의 소리값을 지닌 복모음 [사이]로 읽었던 것이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쇠나 새나 모두가 '사이'의 뜻을 드러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사이의 말뿌리는 무엇일까. 한 집안에 내력은 족보로 알듯이 말 또한 그 내력이 있으며 말이 바뀌는 질서를 따라서 그 소리와 모습이 달라진다. 달라지는 말의 모습이 곧 족보에 값한다면 어떠할지. 삿자리 ,삿갓, 삿기라 할 때의 '삿'이 곧 사이의 바탕말이요, 뿌리가 된다. '삿'에 접미사 '-이'가 달라 붙어 사시 - 사 - 사이 - 새로 바뀌어 오늘에 쓰이고 있다. 흔히 사이는 장소와 장소, 사물과 사물의 거리, 시간과 시간의 동안, 사람의 관계나 정분으로 뜻매김을 한다. 쇠붙이와 동쪽과 관련하여 사이는 어떠한 걸림으로 풀이되는가. 쇠붙이는 사물과 사물의 사이요, 동풍 또는 새파람의 '새'는 장소와 장소의 사이로 그 걸림을 살필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쇠붙이의 경우, 과학사에 따르면 인류문명에서 쇠붙이의 쓰임은 근대 과학사에서 우라늄의 발견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무와 흙, 돌을 가지고 자연에 적응하던 사람들에게 쇠붙이란 실로 엄청난 변혁을 가져 왔다.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농경생활에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과 외적으로부터의 수비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 영토확장의 가능성을 늘려 놓았으니. 짐작컨대 돌과 나무의 사이쯤 되는 물체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뒤의 경우 새 - 동(東)은 하늘과 땅 사이에 밝은 태양이 솟는 공간에서 말미암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엿새 닷새에서의 '-새'는 태양을 뜻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태양 곧 새(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떠 올라 다시 그 사이로 져 간다. 해서 밤과 낮의 가락이 일어나 삶의 무늬를 짜낸다. 그러니까 '새-동'은 해와 관련해서 해가 뜨는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터를 대일 수 있다. '예(濊)'로 돌아가서 그 뜻이 '사이'라 했는데 분명 오늘날의 한자로는 '예'이다. 하면 말의 본 바탕은 소리인데 '사이 - 예'의 걸림을 한자음으로는 풀이할 수 없을까. 세월이 가면 사람도 바뀌고 강산도 그 모습을 달리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중문대사전에서는 '예'를 세우(歲羽)에서 바뀐 말로 적고 있는데 반절식으로 읽으면 '수 - 쉬 - 셰'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기록을 단계적으로 재구성하면 예(濊)는 [셰 - 훼 - 예]로 바뀌어 오늘날의 한자음 '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소리상징으로 보아 '예 - 사이'를 떠올리자면 마한과 변한의 사이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사이로 '예'는 값매김을 할 수 있다. 안으로는 태백산과 철령(鐵嶺)을 사이로 하여 동과 서, 동과 북에 자리 잡은 삶의 고장이 바로 관동이며 본래의 '예'란 말이 되지 않았는지. 쇠붙이로 열쇠와 빗장을 만들어 쓴다. 관동은 역사적으로 열쇠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겨레가 하나됨에 있어 열쇠의 구실이 이 고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의 정신은 갈라진 동과 서, 남과 북을 한 몸이게 하는 새로움의 발판이요, 요람인 것을. 하면 '사이'를 드러내는 땅이름과 관동의 걸림은 어떠한지를 살펴 보자. 관동은 쇠재[鐵嶺]에서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관동은 강원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고 흔히 대관령을 중심으로 산줄기의 동쪽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옛 글을 보고 그 뿌리를 찾아 보면 철령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시조는 백사 이항복 선생이 유배길에 철령을 넘으면서 지은 글. 그럼 먼저 철령의 내력을 더듬어 본다. 강원도와 함경도가 나누이는 분수령이 곧 철령이다. 본디 회양 땅의 북쪽에 자리를 하였는 바 지금도 돌로 쌓은 석성의 자리가 남아 있다고 전해 온다. 고려 고종 9년 무렵 철령에 성을 쌓고 드나드는 사람을 다스리는 관문을 설치하였으니 '철령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좌우의 산과 잇대어 굳게 지은 관문은 요새의 상징임을 잘 드러낸다. 이곳은 예로부터 북방으로 통하는 인후부 - 목과 같은 부분이라 거란과 여진의 군사들이 한반도로 쳐들어 오는 동북방의 외길목이었다고나 할까. 거의 편할 날이 없어 잠시도 경계를 소홀할 수가 없는 요새였다. 이곡(李穀)선생의 기록을 따르면 철령은 나라 동녘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要害)이란 것이다. 해서 한 사람만 관문을 단단히 막으면 만 사람이 와도 열지 못한다는 것. 이로 말미암아 이 고개의 동쪽 강릉을 둘러 싼 여러 고을을 관동으로 불렀다는 거다(故嶺印江陵諸州謂之關東). 외적이 침입하면 처음 공격 대상인 함흥을 공략한다. 함흥이 무너지면 안변을 거쳐 하루 아침에 대나무가 쪼개지듯 바로 철령에 이른다. 만일 철령을 지키지 못하면 이는 마치 전쟁에서 촉나라가 칼을 둔 병기고를 잃은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했으니 철령관의 구실이 예사롭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관문을 막으면 산허리가 바다에까지 이르렀으니 여기에 나무숲을 잘 기르면 남과 북이 완전하게 가리워져 자연의 요새가 이루어지는 법. 감히 외적의 무리가 범접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게다. 이를테면 철령은 동북을 지키는 결정적인 성채가 된다고나 할까. 앞서 풀이한 바와 같이 강원도는 삭방도(朔方道)라 하여 화주(和州-영흥) 등주(登州-안변) 교주(交州-회양) 춘주(春州-춘천) 명주(溟州-강릉)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통틀어 일렀다. 행정구역이 바뀌는 과정에서 먼저 회양(교주) 동주(철원) 춘주(춘천)를 쪼개었으니 한 때는 이들 지역을 동주 혹은 교주 또는 춘주라 하였다. 결국 함경남도 일원의 땅을 쪼개어 내서 강릉과 춘천 원주 회양 철원 중심의 구역으로 조정한 셈이다. 그러니까 삭방도로 있을 때는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의 분수령이 철령(鐵嶺)이 된다. 철령, 그 이름의 뒤안길 고려사 의 기록을 보면 철령이야말로 주요한 영토 싸움의 경계선이었다. 우왕 14년(1388)에 명나라는 철령이북이 원래 원나라의 것이니 다시 요동에 되돌리라는 생떼를 쓴다. 이에 우왕은 박의중(朴宜中)을 시켜 보낸 글에서 황제의 넓은 도량으로써 몇 안 되는 주의 땅을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과 최영을 앞 세운 대요동정벌의 싸움이 일어난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의 푸른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참으로 사연이 많은 고개요 빼앗기고 빼앗는 싸움의 갈래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자의 대응관계로 보아 우리말로는 철령을 '쇠재'혹은'쇠고개(새고개)'로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 강릉 - 철국 - 동주에서 철 - 동이 모두 '새(쇠)[사이(소이)]'로 읽혔음은 앞에서도 이른 바 있다. 이같은 예를 보이는 것으로는 철원의 보기를 들 수 있다. 고구려 때에는 철원(鐵圓), 신라 경덕왕 때에는 철성(鐵城), 고려 태조 때에는 동주(東州)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철 - 동 - 새(쇠)'의 맞걸림이 어렵지 않다. 이씨조선 세종16년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된 철원들은 강원 경기의 사이에서 풍부한 농업생산을 가져다준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강원도 지리지에서는 철원들이 가장 넓은 것으로 나타난다. 철 - 동 - 새의 새(쇠)를 떠올릴 수 있음은 철원의 봉화대 중의 하나가 소이산(所伊山)의 경우이다. 그 한자의 소리를 따서 읽으면, '소이(쇠)'가 드러남이니 동으로는 진촌산의 봉화가, 남으로는 적골산의 봉화가 맥을 잇고 있다. 글자는 다르지만 철 - 새(쇠)가 맞걸릴 가능성을 보이는 근거로는 통천의 땅이름을 들 수 있다. 본시 고구려 때의 이름은 휴양(休壤)이었는데 또 달리는 금뇌(金惱)로 적고 있으며 또 다른 부름말로는 금양 금란(金壤 金蘭)으로 부른다(대동지지). 여기서 금 - 새(쇠)와 뇌 - 나와의 걸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결국 철령의 '철'은 사이요, 새로움이며 무쇠와 같이 굳건한 철옹성이란 뜻이 된다. 예로부터 강원도 사람은 감자바위로 이름이 나 있다. 산이 좋고 물이 좋아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좋은 사람이 살면 그 곳이 바로 명당이란 옛글이 있다. 너무 모나게 사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일게다. 때는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남과 북이 하나로 홀로 서기를 할 상황이다. 한 뿌리에서 많은 가지들과 잎새들이 살아 숨 쉬고 꽃과 열매로 숲을 이루듯 철령의 관문처럼 곧고 굳은 인간관계를 세워 나가야 한다. 한반도에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되는 고장. 뒤얽힌 겨레의 삶을 사이 좋게 풀어가야 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우리 역사의 어려운 물음을 풀이할 수 있는 열쇠가, 인재가 만들어 지는 겨레의 고장. 관동의 정신은 새로움을 여는 피어남의 지향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마니산과 하늘신 만길이나 높은 단에 밤기운이 오히려 맑네 출렁이는 파도는 세상 시름을 떠난듯 하이 임께 절하여 바치오니 태평세월을 주소서 (참성단 시에서) 마니산의 꼭대기에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믿음의 자리, 그게 바로 참성단이다. 위는 네모가 나고 아래는 둥글어 하늘과 땅의 어울림이 깃들어 있는 듯. 옛부터 전해 오기로는 단군임금께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던 곳이라 한다. 조선왕조에 들어 와서도 앞 서의 별제사를 이어 지내게 되었으니 겨레의 앞날을 비는 정성은 변함이 없던 터. 조선왕조의 태종이 세자 시절에 임금을 대신하여 이 곳에서 자면서 재를 올린 일이 있다. 이같이 옛부터 하늘을 제사하던 기록들이 보이는데 하늘 제사의 대상은 별, 곧 불이요, 불의 원천은 해였으니 이르러 태양이 아니던가. 글자 풀이로 보면 가장 큰 불덩이가 태양인 셈. 태양은 그 엄청난 빛과 열을 발함으로써 온 누리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며 섭리의 공간을 이루어 간다. 빛 또한 불의 다른 말일 뿐 밑뜻은 같은 말이다. 태양을 신(神)으로 믿고 바라던 자취는 여러 가지다. 땅이름으로 신라지역의 '벌(불)'이며 백제지역의 '부리(비리)'계는 물론이요, 한자어계열의'양(陽)' 또한 예외가 아니다. 소리마디의 틀은 'ㅂ- 모음 - ㄹ- (모음)'으로 개음절이냐 폐음절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짐작하건대, 벌판은 하늘의 빛살이 퍼지듯이 시야가 탁 트인 곳을 이른다. 민속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흔히 솟대라 하는바, 농어촌의 풍년을 빈다든지, 과거급제를 한 사람을 축복하기 위하여 동네 어귀에 높은 장대 끝에 새를 올려 놓음은 일종의 태양숭배라 할 것이다. 머리를 동으로 하는 동침제(東寢制)이며, 빗살무늬의 즐문토기, 고인돌 등은 모두가 태양신 숭배의 흔적이라 할 것이다. 특히 땅이름 가운데에는 '해(새)'와 걸림을 보이는 분포가 눈에 뜨인다(新 赤 昌 金 東 鳥 草 雉 鷄 등). 이제 마니산의 마니를 마(摩)와 니(尼)로 나누어 살펴 보도록 한다. '마(摩)'는 거룩함을 드러낸다. 땅이름(馬 - 沃 - 代 - 會)의 대응으로 봐서 '마'는 말과 걸림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말은 거룩함의 걸(聖 沃 代)과 걸림을 드러낸다. 하늘의 태양신을 믿고 잘 따르면 풍년이 든다. 특히 땅이름 중 회(會)는 그 뜻이 '모을 - 몰 - 말'과의 걸림이 있기에, 또 말은 모여 떼로 살아 가기에 훈독 - 뜻을 따서 한자로 쓰는 쪽을 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代)의 경우, 타고 간 말이 일정한 곳에 이르면 말을 갈아야 한다. 기실 따져 보면 기차역의 '역'도 말(馬)과 갈아 탐[驛]을 어우른 말이라 할 때 '대(代) - 갈아 탐'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하면 여기 '갈(걸)'이 타는 말을 뜻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 의설화 중 혁거세는 가장 신비한 정보를 옮겨주는 구실을 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흰말이 혁거세의 탄생을 울음으로 알려 준다는 사실이다. 말은 귀중한 교통수단이자 전쟁의 승리를 가져 왔던 짐승이다. 농경문화 적에는 논밭갈이의 주요한 동력을 제공하였지를 않았던가. 어느 마력(馬力)이라니. 아직도 자동차나 큰 기관의 힘을 마력이라 함은 단적으로 말의 쓰임새를 드러내는 보기라고 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따라 붙는 말이 있었다. 그것도 흰말이 대부분이다. 우리말의 '희다(하얗다)'는 '해'에서 비롯한 낱말의 떼들이다. 이 또한 태양숭배를 전제하는 광명사상의 한 가지로 보아 좋을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語)의 경우, ㅁ(馬) - 말과 같이 표기상 서로 다를 뿐이지 소리상징은 아주 비슷하다. 경우에 따라서 마경(馬經) 과 같은 글에서는 말의 조상을 용으로 보아 하늘과 땅을 휩쓸고, 불과 물을 다스리는 신격을 부여하는 일도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언령설의 경우, 말은 신이 사람에게, 사람이 신께로 옮기는 주요한 접신(接神)의 통로라고 믿었으니 말이다. 땅이름을 보노라면 말 혹은 마(馬)의 분포가 많이 보인다. 말과 사람의 삶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나를 알기에 족하다(馬西良 金馬 馬川 馬山 馬項 馬岩 馬次 馬峴 五馬 馬首 馬場 馬田 馬津 馬韓). 하긴 임금의 표시로 말 매어 두는 말(말뚝) 또한 이와 멀지 않음이니 말을 중시하고 거룩한 짐승으로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하면 마니산의 마(摩)는 '거룩하다'는 뜻이요, 토템으로 보면 본디의 주체는 말(馬)이다. 이는 또 엄마, 마마의 '∼마'와 같이 경칭 접미사로도 쓰인다. '니(尼)'는 태양이라 마니산의 '니(尼)'는 '리'이며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해야 옳다는 주장도 있다. 기록으로 보아 고려조 이후 이전이 그러하고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마니산으로 정착이 되었으나 소리는 여전히 마리산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럼 신라조의 초기에 니사금의 '니'나 옥천의 마니, 강원도 평강 땅의 마니령도 모두 마리로 했단 말인가. 글 쓰는 이의 생각으로는 읽는 소리야 '리'로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본디의 형태는 우리 자료로 보나 비교언어적인 바탕으로 보아 '니'로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日谿 - 泥兮(熱也) 尼山 - 熱也 摩尼 - 陽山 / 日本(nihon) 尼公(nigou) ningu(上 頭)<만주> / 尼師今). 이야기로 보아도 단군신화의 '단군왕검'이나 연오랑세오녀, <고사기>의 여인과 해이야기가 그러하다. 특히 왕검의 왕(王)은 '니마(님 임)'로 읽어야 되는바, 여기 '니'는 태양신이요, '마'는 존경의 뜻을 보이는 씨끝이 된다. 행여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땅이름의 니(尼) -노(魯)의 불일치를 의심해 볼 수도 있다(尼山 - 熱也山 - 魯城). 땅이름을 고칠 적에 저어한 글자 가령 공자의 이름이나 자를 따다 쓴 것 등은 피하여 고치려는 경향이 있었다(大丘 - 大邱 加害 - 嘉善 坡害坪 - 坡平 尼山 - 魯城). 결국 니산 - 노성도 공자의 자인 니(尼)를 피하여 씀으로 해 노성(魯城)이 되기에 이른다. 조금 양보를 한다면 읽기로 보아 '마니 - 마리'로 읽는 건 가능하다. 모음 사이에서 이러한 흘림소리되기는 왕왕 일어나기 때문이다(아늠 - 아름 아나가야 - 아라가야 서나벌 - 서라벌 허낙 - 허락 등). 그렇다고 해서 태양을 뜻하는 '니'가 근본적으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니사금 또는 님금(임금)은 제정일치 시대에 태양신을 제사하는 제사장이요, 교황이었다. 같은 계열의 부름말로 니사금을 달리 자충(慈充)이라 한다. 고대 한자음으로 자충은 '즈증'이었고, 이 때 우리말에 파찰음소가 자리 잡지 못하였음을 떠 올리면 '즈증 - 스승'의 맞걸림이 가능하다. 스승은 더 작게 쪼갈라 보아 '사이'를 뜻하는 '슷'에 씨끝 '응'이 녹아 붙은 말이다. 사이라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행정의 머리구실을 하던 지도자가 '스승'이란 말이 된다. 지금도 함경도 지역의 말에서는 무당을 스승이라 일컬음을 보면 믿음을 더 해 주는 보기라고 하겠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신(神)은 다름 아닌 '태양신'일지니 '니 - 태양신'이란 대응을 미덥게 한다. 마니산은 마리산이 아니며 '거룩한 태양신을 제사하는 장소'의 뜻을 드러 내는 겨레문화의 상징이자, 표상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기상으로 배달의 삶을 가꾸어야 할 일이로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조선의 소리 보람 언제나 그리는 임 배달 겨레 삶의 햇살 어둠을 불사르고 살아 타는 생명의 신(神) 겨레는 해님을 바라 목숨됨을 기린다. - ('배달의 노래'에서) 하늘의 해는 언제나처럼 불 타오르며 제 몸을 살라 누리를 밝혀 든다. 얼어붙는 엄동의 눈보라 속 검은 구름 사이로 내려 오는 한 줄기 빛을 생각해 보라. 해로부터 받는 혜택이랄까. 충족감은 더할 수 없는 고마움으로 맞아 들이게 된다. 윗글은 글쓴이의 서사시조집의 한 마디 글이다. 우리의 한아비들은 존경의 대상으로 모든 힘의 뿌리로 해를 생각하였다. 지역에 따른 사투리말에서 힘을 '심'이라고 한다. 말의 됨됨이로 보아 '심'은 '시다'에서, 시다는 '세다'에서 말미암는다. 세다의 세는 '세(새) 헤(해)'와 같은 맞걸림을 보인다. 마침내 힘은 그 소리의 상징이 태양에서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를 일러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일컫는다. 어두운 새벽의 시간과 공간의 사이를 뚫고 태양이 솟아 오른다. 우리 겨레도 마찬가지다 . 태양숭배의 알타이말 계통의 겨레와 곰신앙을 하던 겨레 사이의 어둠을 헤치고 단군조선을 일으킨 것이다. 하늘의 나라를 일구어 태양신과 곰신을, 특히 곰신을 조상신으로 받들어 모셔 아사달 터에 나라를 세웠음이요, 거룩한 제단 - 소도(蘇塗)에 나아가 정성스러운 제의를 갖추었다. 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하늘의 겨레들이요, 신의 백성들이었다. 이름하여 배달겨레. 배달이란 밝음의 터전, 하늘의 땅으로 바꿈질 된다. 거꾸로 밝음 지향의 겨레들이 살았으니 땅이름 또한 아사달이요, 배달이라 한 것이다. 박달 또는 배달은 뜻으로 볼 때,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다. 이제 옛부터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나라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하면 조선과 태양의 걸림은 어떠한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옛 기록들이 더러 보인다. 황하의 북동쪽에 퍼져 살았던 북방의 여러 겨레를 이르는 것(관자 전국책), 요동반도 중심의 땅을 가리킨다는 설(상서대전 산해경), 서북한 지역이나 하북성 또는 요녕성 지방으로 뒤섞인 뜻이란 자료(사기), 서기 82년 경에 쓰여진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에서는 한반도의 서북쪽 정도로 자리매김을 해야 된다는 설들이 있다. 실로 다양하다. 나라의 힘이 약해 지고, 겨레정신이 움츠려 들면 자기들에게 좋은 대로, 입맛대로 적어 버리면 그 뿐. 한편 우리의 자료 몇 군데를 살펴 본다. 먼저 동국여지승람의 경우, 조선은 동쪽에서 해가 뜨는 모습(居東表日出)과 걸림이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 에서는 조(朝) - 동방, 선(鮮) - 선비산이라 하여 '선비산 동쪽의 나라'로 풀이해야 옳다는 거다. 다시 근대사로 와서 육당 최남선은 '첫 새벽'으로, 이병도는 '해가 뜨는 곳'으로 풀이한다. 조선에 대한 글 가운데에서 상당한 길잡이가 되는 것은 강길운(1990.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에서다. 조선은 나라의 이름이기보다는 기원적으로 겨레의 이름이라는 풀이. 조선을 화북성 지역으로, 요녕성 지역으로, 서북한으로 이르는 것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이기때문. 땅의 이름이라면 하나의 이름으로 여러 군데를 이름은 변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니까 지역에 관계 없이 동아리 지어 중국의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이 조선이란 겨레들로 본 것이다. 그러다가 부족국가 사회로 되면서 조선이란 겨레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럴 듯하다. 이를테면 원시 씨족공동체 사회에서는 짐승을 조상신으로 하는 이름들이 나라 이름 그대로 쓰이는 일이 종종 있다. 예맥의 '맥'이 그러하고, 고구려 고려를 '고마'로 읽는 것은 '곰'겨레가 다시 나라의 이름으로 된 보기 따위이다. 흔히 고조선의 형성기반을 예맥에서 찾는다. 이 때 맥 또한 곰의 내용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 진다. 만주말로 조선이 주선(jusen), 여진말로는 죠션(zyocyen)으로 맞걸린다. 변한국의 주선국(州鮮國)과 더불어 같은 말의 소리를 썼을 것인데 겨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조선은 솟음이요,태양이다. 강길운(1990)에서 또 이르기를 기왕에 소리를 따다 쓸 바에는 태양숭배와 겨레들의 앞날이 아침과 같이 환하게 되기를 비는 것으로 적었을 거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한편 조선은 숙신(肅愼)과 같은 말이며 겨레의 이름으로 보인다고 풀이. 글자 그대로를 살피자면 '정숙하고 삼가함'이 있는 겨레란 뜻이다. 삼가함은 여기서 경건하게 제사를 모시고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종교적인 의식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곰토템의 투영이라고 할 자료에서도 곰에 대한 경건하고 삼가함이 드러난다(고마熊고마敬 고마欽(신증유합)juketehen jukten sukji<만주어>). 보인 비교자료(sukji)에서 '숙신 - 제단'의 대응은 상당한 암시를 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아사달에 제단을 모신 거룩한 장소를 소도(蘇塗)라 하였으니 '소도'와 숙신, 그리고 조선은 같은 뜻바탕을 갖는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이두식으로 읽으면 'ㅅ(솟) - 숫'이 되고 조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당시만해도 이른바 터짐 갈이소리 - 파찰음이 아직 발달하지 않고 뜻의 변별이 어려우므로 '조선 소선 솟(숫)'으로 읽게 된다. 하면 '소도'와 조선은 다를 바가 없다. 민속 가운데 솟대는 지금도 강원도와 전라 경상도의 일부 바닷가에서 행하여 진다. 강한 전통과 신앙, 초월성을 지닌 마을의 신앙으로 떠올려 '짐대서낭님 짐대당산 별신대 용대 추악대'등으로 불려진다. '솟아 있는 대'로 풀이되는 솟대는 장대와 새로 이루어지는 복합물이다. 여기 장대는 소도의 큰 나무로서 우주의 나무 또는 세계수(world tree) 상징을 드러낸다. 우주나무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나 길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새는 하늘의 새 혹은 천둥새로 보는 이도 있다. 대략 새의 모양은 기러기 오리 모양이며 이 밖에도 까마귀 따오기 갈매기 원앙새 등의 모습이 종을 이룬다. 굿판에 가 보면 무당들이 '대'를 잡는다. 그 대로 신이 내린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솟대로 신이 내리고 소도는 솟대가 있는 제의 공간으로 거룩한 장소였다. 이 곳에 들어 가면 사람 죽인 이라도 우선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결국 '조선 - 소선 - 솟'으로 간추릴 수 있다. '솟'은 '솟 - ㅅ(솥) - 솔 / 섯 - 섣 - 설 / 숫 - 숟 - 술 / 싯 - 싣 - 실'의 낱말겨레를 이루어 낱말의 밭을 만든다. 뿌리가 되는 뜻은 '사이(間)'이다. 아침 동산에 하늘과 땅 사이로 솟아 오르는 게 무엇인가. 해 바로 태양이다. 태양은 하늘을 대표하는 신이요, 거룩하게 모셔 받들 위대한 자연물 이상의 그 무엇이다. 신에게 빌고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을 스승(巫)이라 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무당을 스승이라 한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때의 임금을 삼국사기 에서 김대문은 자충(慈充)이라 풀이한다. 자충도 마찰음으로 바꾸면 자충 - 스승이 된다. 스승은 '사이(間)'를 뜻하는 '슷'에 접미사'응'이 녹아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로서 인간과 신의 걸림을 풀어 나아 갔던 이가 스승이었다. 지금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이르지만. 옛말에 해는 '새(쇄)'였다. 이르자면 <박통사>의 닷쇄(五日)의 '쇄(日)'도 해를 가리키며 지역에 따라서 '새.쇄.쌔.씨.세'라 한다. 여기서 시옷(ㅅ)과 히읗(ㅎ)이 같은 마찰음으로 시옷이 약해지면 히읗이 되는 법. '새'는 중세말로 복모음이었으니까 '사이[sai]'라 읽는다. 사이는 '삿'에서 비롯한 것으로 '삿-솟-섯-슷-싯'계열의 낱말들이 같은 뜻을 드러낸다. '새(해)'는 쇠문화와 걸림을 보이기도 한다. 쇠그릇을 쓰게 된 이후 돌그릇을 쓰던 석기문화를 혁신한 문명의 태양과 같은 것이 '쇠'였다. 쇠도 말하는 지역에 따라서는 '새(쌔) 쐬 씨'였으니 같은 소리 다른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쇠'란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그 사이쯤 되는 물체이니까 말이다. 우리말은 계통으로 보아 알타이(Altai)말이다. '알타이'도 만주말로는 아이신(Aisin)이라 하는데 이는 쇠(金)를 뜻한다. 결국 '새(해) - 쇠(청동기)'가 맞물려 소리상징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선은 태양신 숭배, 태양신을 이른다. 우리겨레는 태양을 위로 하고 곰신을 아래로 하는 그 사이에서 말미암은 거룩한 하늘의 백성이다. 그 거룩한 초원의 빛을 되찾아 가기에는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가야만 한다. 고지가 바로 저기이니까. 아사달과 쇠그릇 문화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의 시대를 청동기 문화 곧 쇠그릇 문화의 시기로 추정한다. 쇠의 나타남은 과학사에서 제3의 불을 일으키는 우라늄의 발견에 비유된다. 주로 돌을 쓰던 석기시대에 한 바탕의 큰 변화가 몰아닥친 것이다. 청동기를 비롯한 쇠그릇으로 말미암아 떠돌이 채집생활에서 보다 많은 생산이 보장되는 여름지이가 비롯된다. 차츰 적과 사나운 짐승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손 쉬워 지고 일상의 삶이 큰 안정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유엠부찐1982.고조선103면 참조). 우리 겨레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격인 곰토템의 '고마'겨레와 태양숭배를 하던 '니마'겨레의 대통합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니, 새로운 나라가 일어난 셈이 아닌가. 말이 문화를 되비친다고 하였다. 하면 앞에서 풀이한 단군조선의 문화적인 특징이 나라 세움의 상징이었던 터 - 아사달과는 어떠한 걸림이 있을까. 역사학계는 물론이요, 국어학계에서 이미 아사달에 대한 상당한 살핌들이 있어 왔다. 이병도(1959, 한국사 고대편)에서는 '아사달 - 아침(朝)'의 맞걸림으로 풀이하였다. 이에 대하여 강길운(1990,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에서는 '아사 - 아ㅊ'의 소리가 서로 걸맞지 않고 땅이름의 보편성이 없다 하였다. 논의의 바탕은 비교언어학에 따른 외적 재구였으며 특히 '아시 - 아ㅈ 아ㅊ'과 같은 소리의 발달이 국어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땅이름의 대응과 알타이말과의 견줌으로 보아 '아사달 - 궁전이 있는 산'이란 풀이를 하였다. 한편 이병선(1988, 한국고대국명지명 연구)에서는 '아사달 - 큰 읍 왕읍 모읍(母邑)'으로 상정한 바 있다. 아사달을 아사(阿斯)와 달(達)로 갈라서 '아사 왕(王)대(大)모(母) / 달 읍(邑)'으로 그 뜻을 동아리 지었다. 천소영(1990, 고대국어의 어휘연구)에서도 '아사달'을 우리말의 한자 차음 표기로 보고 '아사 / 달'로 나누어 '모성(母城)'혹은 '대읍(大邑)'을 드러내는 보통명사의 땅이름으로 상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또한 '아사'와 맞걸림을 두어 한자로 뒤친 것으로 보았다. 자료의 대응관계나 재구성의 방법을 통하여 본 것이니만큼 그 나름의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크게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①아침 ②궁전이 있는 산 ③대읍(大邑) 모읍(母邑) 왕읍(王邑) ④쇠산(金山) 등으로 가설을 갈래 지을 수 있다. 짐작하건대 첫 시작을 한 도읍터인지라, 시간으로 보면 첫 새벽(①)일 것이요, 제정일치 시대이니 마땅히 부족의 지도자가 있는 곳에 제단을 모신 궁전이 있어야 마땅하다(②). 왕이 사니 왕읍이요, 자연부락의 크기로 보매 스스롭게 가장 큰 대읍(大邑)이 될 밖에. 이로부터 모든 종족의 번영이 비롯했으니 모읍(母邑)이 되어야만 한다(③). 이 시기가 바로 청동기 문화가 말미암았으니 쇠를 중시하는 쇠문화 상징이 됨도 있음직하다(④). 하면 모두가 다 옳다면 참값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아니하다. 유연성으로 보면 모든 가설들이 다 그럴싸 하다. 문제는 무엇이 중심의미가 되며 다른 것이 주변적인 상징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한 마디로 쇠문화를 드러내는 '쇠(金)'상징의 이야기가 중심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마침내 '쇠(새 세 ㅅ 쌔 씨 셰<방언>)'와 같은 뜻을 보이는 '아침'도 중심의미 '쇠(金)'를 뒷받침해 주는 큰 바탕이 된다. '아침'을 중세어에서 '새박(원각경 서46) 새배(두시 초7.14)새볘(첩해신어6.16)'라 한다.‘닷새(五日)(구급간이방 6.77).닷쐐(번역소학8.35)엿새(두창경험방)엿쇄(내훈 서5)'에서 '새(쇄 쐐 쌔)-해(日)'의 맞걸림은 '새'의 본질이 '태양[日]'임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강길운(1990-56)에서는 '아시 - 아ㅈ 아ㅊ'과 같은 / ㅅ ㅈ(ㅊ) /의 발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조선 지역에서 '아ㅊ(아침)'계가 쓰이지 않았다고 상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소리가 발달하는 것은 아주 스스로운 일이다(이병선1988-44 참조).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발달) (1) 比自火郡一云比斯伐(삼국사기지리1) 完山一云比斯伐一云比自火(삼국사기지리4) 嘉壽縣本加主火縣(삼국사기지리1) / 自[즈](Karlgren) 斯[스](Karlgren) / 적 - (少) suko(일본) 잣(城) sasi(일본) 져(彼) so (其)(일본) 좁 - (狹) seba (일본) (2) 낯이[나시] 빚이[비시] 꽃이[꼬시] 빛이[비시] 젖이[저시] (3) 東 - higasi(hi - 日 / gasi - 東) 곰(굼 검 금) - 홈(훔 험 흠) - 옴(움 엄 음) / - gon > - hon > - on / 가시(gasi) - 하시(初) - 아시(東 金 朝) * asi - 쇠(金) / aisin(金)<만주> alta(금)<몽고> altin(금) <터키> / 益城郡本高句麗母城郡今金城郡(삼국사기 지리2) 阿沙 아샤卽今利城縣也(용가 7.23) / 錢 - asi(일본)(*益 - aisi(만주) asig(몽고)) 위의 자료로 보아 마찰음(ㅅ)과 파찰음(ㅈ ㅊ)이 넘나들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음방법을 떠올리면 공기의 갈림이 큰 마찰음에서 차츰 조음공간이 좁아져 닿았다가 순간적으로 터지면 파찰음이 된다. 파찰음은 파열성과 마찰성이 합하여 소리의 특징을 이룬 것이니 마찰음에서 파찰음이 비롯했다함은 자연스러운 바 있다. 자료(2)를 살펴 보면, 오늘날에도 쓰기는 파찰음(ㅈ ㅊ)으로 적지만 읽기는 모두 마찰음(ㅅ)으로 읽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발달한 산 증거라 해서 좋을 것이다. 아울러 자료(3)에서 동쪽은 가시(gasi)라 하였는데 말머리에서 기역의 약화탈락으로 '가시 - 하시 - 아시'가 되었고, 비교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 - 쇠(金)'의 맞걸림을 알게 된다. 이제 청동기 문화 상징의 '쇠'와 알타이, 그리고 태양숭배의 샤머니즘에서 '태양 - 새(세 쇠 쇄 쐐 쌔 ㅅ > ㅎ(해))'를 어떤 걸림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아사는 쇠요, 문명의 씨앗 돌그릇 문화에서 청동기의 나타남은 문화의 혁신을 뜻한다. 어둠 속의 빛에 비유하여 지나침이 없다. 석기 시대가 밤이라면 청동기 시대는 새벽이요, 아침이며 새로운 삶의 어머니에 걸맞는 상징이 되었다. 마침내 쇠(새 - 해金)가 '니마'의 '니-'계를 밀치고 태양을 뜻하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쇠(새 - 해)는 모두 '사이'란 뜻을 바탕으로 한다. 쇠는 나무와 돌의 중간 쯤으로 보았음이요, 해(새)는 하늘과 땅의 '사이' 쯤으로 그 유연성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청동구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굳기 정도에서도 그러하며 빛깔도 붉은 해(새)와 같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단군왕검의 단군이 제사장으로 '스승'이라 했다. 스승은 '사이'를 가리키는 '슷(間훈몽자회)'에 접미사 '-응'이 엉겨 붙어 '슷 + 응 > 스승' 으로 굳어진 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예족과 맥족을 통합해서 누리를 다스려 간 제정일치 때의 종교직능자가 바로 스승이다. 새로운 청동기 문화 시대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서 배달의 겨레를 이끌어 간 것이다. 나머지는 아사달의 '달(達) 산(山)읍(邑 梁 珍 靈 突)고(高)' 등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이 산이든 읍이든 문제는 제일 먼저 새롭게 도읍을 한 새로운 땅이요, 신시의 터전이라 할 것이다. 청동기 문화와 태양숭배를 함께 드러내는 '아사(아시 아스)'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드러낸다고 했다. 처음이자 생명의 말미암음으로 풀이할 '아사(아시 아스)'는 폐음절이 되면서 '앗'의 형태가 된다(아시벌 논김 매기 아이 논매기의 '아시 - 처음(初)). 말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면서 그 모양이나 뜻이 갈라져 이른바 말의 겨레 곧 단어족을 이루어 간다. 하면 '아사(앗)'의 경우는 어떠할까. '앗(아사)'의 의미 특징은 위에서 보인 쇠(金) 처음 아침 어머니 크다 왕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다. '앗'은 받침에서 같은 계열의 소리로 바뀌어 더 많은 낱말로 늘어나고, 모음이 바뀌어 '엇-'계의 말로 번져 간다. 먼저 '앗-'계의 경우를 보자. ('앗-'계의 낱말 겨레) (4) (앗-) 앗(아우) (내훈3.21) 아 (앗+이>아시>아 >아이(애)) (훈몽자회 하12) / (ㅇ-) 아ㅈ마님(석상6.1)아ㅈ(노걸대 상23) 아ㅈ(아침)(송강가사1.18)아조(신증유합 하61)아지(새끼)(훈몽자회 상18) / (ㅇ-) ㅇ(까닭)(금삼2.8)ㅇ다(적다)(내훈1.33)아침(처음)(여사서언해3.9) (5) (ㅇ-) 아ㄷ(훈몽자회 상31)아득ㅎ다(석봉천자문 26)아듭다(두시 중14.4) (6)(알-) 알(석상3.10)알등(알같이 생긴 등)(해동가요116) 결국 말의 끝소리에서 'ㅅ(ㅈ ㅊ) - ㄷ- ㄹ'로 된 셈이다. 예서 다시 모음이 바뀌면 [엇-]계가 드러난다. '앗'과 함께 낱말의 갈래를 알아 보자. ('엇-'계의 낱말 겨레) (7) (엇-) 어시(짐승의 어미<함경방언>)어이 없다(터무니가 없다), 어이아들(母子) / 엇막다(용가44)엇먹다(청구영언)어슬음(역어 유 해 보1) (8) (얻-) 얻다(찾다 결혼하다)(원각경언해 서46)얻니다(삼강행실도 효24)어듭다(용가30)어두이다(능엄경해4.118) (9) (얼-) 어렵다(얼이 없다)(두시 초22.47)어론(해동가요)어론님(청구영언)어리다(능엄경2.16)어름(용가30)얼다(얻다)(두시초1.36)얼다(교배하다)(박통사 초상34) 얼운(두시 초21.6) '앗- 엇-'계는 홀소리가 바뀌어 갈라진 모음교체에 따른 낱말의 겨레들로 보인다. '엇-'계는 음성모음에 따른 형태들인데 생산을 드러내는 것과 방어를 드러내는 경우(7)가 있다. 이를테면 청동기로 된 쇠문화의 보급은 엄청난 농업생산을 가져 왔을 뿐 아니라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쇠 금(金)의 상징성은 아주 복합적이다. 이두식으로 읽어 그 뜻(訓)은 '쇠'이지만 소리(音)는 '금'으로 고마(곰)의 표기적인 변이형인 '검(감 굼 금)'과 같다. 본 바탕은 곰토템의 신앙이로되 거기에 청동기 문화를 지닌 태양숭배의 샤머니즘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益城 - 母城 - 金城 - 也次(어시)<삼국사기>). '엇'이 어머니라면 거기서 비롯한 것이 '앗'이다 '앗(ㅇ)'은 비롯됨이요, 말미암음이니 어버이에서 나온 알이며 아기이다. '얼 - 알'에서 얼이 알의 생명이라면 알은 그 얼이 담긴 드러남이다. 기원적으로 '아시(asi altai)'가 쇠붙이임을 떠올리면 청동기 문화를 가진 예족과 맥족(곰 겨레)의 어울림이 고조선 형성의 큰 흐름이었음을 가늠하게 한다(濊 - 歲羽切(슈-쇠-새)). '얻다'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결혼하다 찾아내다'의 뜻으로 쓰임은 생산과 어울림에 바탕을 둔다. 하면 '알'은 어떠한가. '앗 - ㅇ - 알'과 같이 끝소리가 바뀌어 일어난 말로서, '얼'과 맞걸림이 있다. 김알지, 석탈해, 박혁거세, 김수로의 이야기가 모두 알에서 비롯한다. 알을 낳는 어미는 대략 '새'라 일컫는다(飛禽總名새됴(鳥)<훈몽자회 하2>). 방언형으로 보면 새는 '세(새 씨 쇠 사이)'로 쇠와 서로 어울림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알-'계에 드는 말겨레에는 '알 알나리 알뚝배기 알땅'등이 있고 이에 맞먹는 한자어를 합하면 더 많아짐은 물론이다. 알과 아이(아시初)는 시작이며 생명이 자라는 몸집이다. 기본적인 뜻 바탕은 쇠붙이인 동시에 태양을 원관념으로 한다. 태양이 환하며 둥글고 주황색인 것처럼 알 또한 예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간추리건대, 아사달은 곰토템과 청동기 문화를 지닌 태양 숭배를 하던 겨레들이 어울려 '새롭게 일으킨 쇠문화의 터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옛 조선의 맥, 춘천 소양강 나린 물이 어디로 흐른단 말인가. 외로운 신하 서울을 떠나고자 하니 흰 머리칼이 많기도 하여라. ('관동별곡' 중에서) 강은 말 없이 흐른다. 세월 따라서 사람을 따라서 높낮이를 달리 하여 산을 휘감고, 때로는 그 도도한 모습으로 들판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소양강은 흘러서 서울로 다시 황해로 든다. 마음은 임금의 곁에 있는데 몸은 멀리 떨어져 강원도 시골로 왔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머리의 글은 조선왕조의 선조 무렵 정철이 지은 송강가사의 한 대목이다. 참말로 강원도는 그리도 험한 산골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던가. 더욱이 춘천을 포함해서 말이다. 짐승에게도 족보가 있는 법, 춘천의 역사를 알고 보면 옛적 예맥(濊貊)나라, 특히 맥나라의 본고장이요, 그 서울이 춘천이 아니었던가. 하긴 송강이 춘천의 속내 깊음을 알았더라도 별 관심은 없었을 것이다. 사라진 옛 문명의 보금자리였으니까. 맥(貊)이란 무엇인가. 맥은 나라의 이름이자, 겨레의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이름의 맥은 상고시대에 강원도 춘천지역을 이름은 물론이고, 요하(遼河)부근에도 있었던 나라요, 겨레였다. 예와는 늘 가까이 있어 마침내 예와 맥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하면 두 개의 맥나라가 있었을까. 지금이니까 중국의 요하이지 당시에는 우리의 옛적 한아비들이 살았던 고조선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본다. 유엠부찐(1990.고조선)은 예와 맥이 어우러 고조선을 이루었다고 상정한다. 근거는 유적 유물에 따른 실증사학적인 풀이에다 두고 있다.비교적 소련의 살핌들은 믿음을 주는 것들이었다. 본디 요하 중심의 맥과 예를 뿌리로 볼 수 있다. 중국 동북부 지역을 주름 잡던 이들은 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고 했다. 뒤로 오면서 자연환경에 살아 남고 중국 사람들의 끈질긴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추운 지역의 수렵생활에서 벗어 나려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반도에 정착을 했던 게 아닌가 한다. 마침 뒤 늦게 나라를 세운 위만 기자 조선은 말할 것 없고, 고구려에 떠밀려 권세가 줄어져 맥은 춘천 중심에서, 예는 강릉을 중심으로하여 나라를 이끌어 갔다면 그 설명이 어떨까. 맥(貊)은 시경(詩經)에 겨레의 이름으로 나온다. 험윤족(族)에게 침입을 받아 산서성으로 옮겼고 다시 요하지방으로 이동 한다. 사기(史記) 에서는 팽나라와 오나라가 예맥을 덮쳐 조선을 없애고 그 자리에 창해군(蒼海郡)을 두었다고 했다. 일본말로 맥족을 '파쿠하쿠'라 한다. 이 말은 백제의 음과 서로 걸린다(도변광민1991). 백제는 '맥의 땅'이란 말로 뒤칠 수 있으며 뒤에 '구다라'로 불렀다. 중국말로는 곰웅(熊)을 '큐 - 쿠 - 다이 - 나이'라고도 하는데 다르게는 '우(優)'또는 '구(久)'로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기도 했다. 구다라의 '다라'는 터어키 말에서 강 혹은 나루의 뜻으로 쓰였음을 생각하면 마침내 [구다라 - 웅진(熊津)]이란 맞걸림이 가능하다. 금강만 해도 그렇다. 본디는 웅천하(熊川河)인데 곰나루 또는 금강으로 바뀌어 불린다. 곰은 한자로 웅(熊) 또는 맥(貊)으로 적힌다. 물론 금강의 '금'은 한자의 소리를 빌어 적은 음독에 값한다. 백제와 관련, 맥에서 가진 돼지시(豕)를 빼어 버리면 백(百)이 남는다. 결국 백제는 맥족이 세운 고조선의 대통이란 풀이가 가능하다. 흔히 백제는 많은(百) 부족국가가 어우러져 이룬 나라라고 하지만 곰신앙을 갖고 있는 맥족이 세운 영토라는 말이 된다. 고구려만 해도 그렇다. 달리 고려(高麗)라고도 적히는데 지금도 일본에서는 '고마'로 읽는 것을 보면 적어도 고구려 백제는 언어적 맥락에 터하여 곰신앙을 드러낸 소리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글자 풀이로도 '맥 - 곰'의 걸림이 상정된다. 맥(貊)은 맥(莫)과 서로 같은 속뜻으로 쓰인다. 쇠를 먹으며 곰과 비슷한 게 뒤의 맥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맥의 겉모습은 곰, 코는 코끼리, 눈은 물소, 꼬리는 소, 발은 범과 흡사하다고 전해 온다. 아울러 맥은 나쁜 꿈을 먹어치운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문학기의 시문학 동인지로서 맥(貊)이 있음도 큰 지향성은 같다고나 할까. 간추리건대 춘천이 맥나라의 터전이라 함은 고조선의 곰신앙을 가졌던 우리 겨레의 보금자리, 그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겨레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한다. 문헌자료에서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나 삼국사기 가운데 나오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에 춘천이 맥나라의 서울이었음이 드러난다. 앞의 자료에서는 지금의 춘천 북쪽 13리쯤에 맥의 서울이 있었다는 것이요, 뒤의 자료에서는 고구려의 동남쪽이며 예의 서녘인 맥의 옛 땅이라 하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춘천을 일러 호반의 도시라 한다.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서북쪽으로는 춘천호, 서쪽으로는 의암호, 동북쪽으로는 소양호로 세면이 아름다운 꿈을 꾸는 호반으로 둘러 싸였으니 말이다. 춘천이 맥나라의 서울이었으니 겨레들이 많이 살았던 터다. 해서 의암호 가운데의 호수섬에서 무문토기와 같은 쇠그릇 문화시대의 흔적이 80년대 중앙박물관의 조사에 따라 밝혀졌음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강이름과 같이 땅이름들은 아주 보수적이다. 행여 춘천의 땅이름에는 이들 곰신앙과 같은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소리상징은 없는 것일까. 오근내(烏根乃)와 삶의 뿌리 자료에 따르면 옛적 춘천은 오근내(烏根乃)였다(대동지지).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말의 안으로 굽은 '옥다'에 '내(乃-川)'가 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풀 수 있다. 강 사이에 끼었으니 '오그라진 물' 이라고 할 법하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오근내가 강의 모습을 그려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지만 나라이름 맥(貊), 그러니까 곰신앙이 원관념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한다. 오근(烏根)의 오(烏)를 뜻으로 읽으면 '검'이 된다. 단군왕검의 '검'이 곰신앙을 나타내듯이 오(烏) - 검(곰)의 맞걸림이 된다고 본다. 이르자면 '검내(곰내)'가 된다. 한자의 뜻을 따다 이른 강이름이 웅진, 웅천(熊川)이요, 소리를 따다 이르는게 금강, 금호, 금천, 감내(甘川-甲川) 계열의 냇물 이름이다. 곰은 여기서 짐승으로서보다는 땅과 물의 신이요 조상신이 된다. 방위로는 북쪽지향을 지닌다. 춘천 평야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남으로 흐르니 곰내 곧 북천이 된다. 두고 온 고향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고, 겨레의 뿌리인 조상신으로서의 곰신앙은 더 없이 존귀하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된다. 농경문화에서 땅과 물은 숭배의 대상이듯 더 없이 큰 몫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수렵생활의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옮겨져 '곰에서 땅과 물'로 경배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하면, '오근내'의 근(根)은 무엇인가. 앞서 풀이하였듯 '오근'의 '근'을 적은 것이며, 또 하나는 곰신앙의 '곰(검 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곰과 뿌리는 무슨 걸림이 있단 말인가. 구멍을 사투리 말로 '궁기'라고도 한다. '공글다(궁글다)'도 기역(ㄱ)이 끼어들어 말이 이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심다'를 '심구다'로 할 때 기역이 덧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곰(고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곰은 어머니, 굴(구멍), 북두칠성의 상징이며, 땅과 물의 신상징이라 했는바, 여기 굴 - 구멍(구무 - 구멍 / 굼(곰))이 바로 기역(ㄱ)이 덧붙는 특수곡용이 된다. 두가지 풀이는 같은 상징으로 보인다. '옥다'와 '곰'을 함께 떠올리면 춘천평야를 서북쪽으로 싸안아 돌아 흐르는 냇물이요, 우두(牛頭)벌의 삶터를 기름지게 하는 젖줄이 바로 '오근내(烏根乃)'인 것이다. 우두(牛頭)는 소슬뫼 대동지지에 따르자면 우두벌판에는 옛부터 성(城)이 있었으니 춘천에서 북으로 13리쯤에 있으며 이는 맥 나라 때의 성으로 전해 온다. 소양강과 신연(新淵)내 사이에 발달한 것이 우두벌판이다. 강에 잇대어 큰 바위가 있었고, 바위 아래에는 강이요, 강 밖에는 산이 있었다해서 산골짜기로 동서남북이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탁 트여 상쾌한 바가 있다. 바람은 잔잔한 듯 맑으며 평야는 넓고 기름져 가히 사람이 살 만하더라. 흐르는 강에 배를놓아 물과 뭍으로의 교통이 아주 뛰어 났다. 우두(牛頭) 마을의 북쪽 15리쯤에 외로운 섬인듯 고산(孤山)이 솟아 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으나 글쓴이는 한글학회의 땅이름 사전 의 '솟을 뫼'가 여기 고산이라고 본다. '솟을 뫼'는 '소슬마루'로도 불리워진다. 산마루의 마루가 바로 '머리'요 그 본질은 뫼(山)가 된다. 따지고 보면 '뫼'도 '모리'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상정된다. 홀소리 사이에서 리을이 떨어지면 '모리 모이 뫼'가 되지 않는가. 경상도에서는 산봉우리를 '마랭이 말랭이'로, 전라도에서는 '몰랭이'로, 충남(연기)에서는 '마루'라 한다. 그럼 소슬마루(머리산) - 우두(牛頭 牛首)의 걸림은 어떻게 고리지을 수 있을까. 땅의 모습을 따르자매 우두산(牛頭山)이 소머리와 같아서인가. 아니면 '소슬뫼'의 '솟음'의식이 문제인가. 솟음은 종교의식으로 맞걸리며 하늘과 땅신에게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곰 - 맥'의 풀이를 하였는데 '곰 - 소'의 걸림은 어떠한가. 토템신앙의 바뀜으로 보면 수렵생활을 하던 곰 중심의 믿음이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소'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다 원형적인 문화의 밑바탕으로라면 이는 힌두교의 소신앙이 접합되는 외래문화의 받아들임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벼농사가 인도쪽에서 들어 온 것이고 보면 힌두교와 소의 관계는 물과 고기의 어울림이라고나 할지. 다음으로는 소우(牛)의 '소'가 그 소리상징으로 보아 '사이'를 뜻하는 '쇠 수 새 세 시'의 또 다른 소리 적기일 수도 있다. 이르자면 소양강과 신연(新淵)내의 사이에 새로이 생겨난 퇴적평야쯤으로 새길 수도 있다. 한양(漢陽)의 양이 한강의 북쪽 땅인 것처럼 소양강도 소(昭-牛)란 냇물의 북쪽에 이루어진 땅을 흐르는 가람. 두 강이 흐르는 곳에 퇴적평야를 이루고 삶의 본거지를 이루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밀양만해도 그렇다. 본시 밀양강은 해양강(海陽江)이라 하는데 남해 바다로 흐르는 북쪽의 강이란 말이요, 그 강의 북쪽에 발달한 땅이 밀양이란 것이다. 물의 북쪽을 흔히 볕양의 양이라 한다(水之北曰陽). 시대의 흐름을 짚어 생각하면 돌그릇문화기에 쇠그릇을 쓰는 맥족이 새롭게 들어와 농경문화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단기 1천년대를 전후한 때로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쇠그릇의 '쇠'는 사투리말로 '새 세 시 쇠 사'요 짐승으로서 '소'는 사투리로 '소 쇠 쉐 세'로 쓰였으니 소리상징이 아주 비슷하다. 고구려 때에는 춘천의 옛적 보금자리였던 석달(昔達)이 있었다. 뒤에 난산현(蘭山縣)으로 바뀌었지만. 석달의 석도 <집운(集韻)>이란 중국소리사전을 보면 '시(hsi思積切)로 나온다. 가령 석달을 '시달'로 읽었다고 하면 '사이'의 사투리말 가운데 '시'가 있음을 금새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수약'은 서울 춘천의 또 다른 이름들로는 우수(牛首 - 牛頭) 혹은 수약(首若 首次若)을 들 수 있다. 우수 - 우두는 같은 소머리(소슬뫼牛頭山)로 풀이되지만 수약 수차약(若)은 그 풀이가 어떤가. 수약의 약(若)을 빼면 '수 - 수차'의 등식이 이루어진다. 간추려 보건대 '수 - 수(ㅎ) - 슷'의 낱말겨레로 볼 때 '사이'란 뜻이 된다. 그럼 약(若)은 무엇일까. 땅이름이 고쳐지는 과정에서 맞걸림을 보이는 예가 있는데 약(若)은 '마을.읍'등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滿若縣 - 兮 - 滿卿 -滿鄕.유창균(1991)삼국시대의 한자음). 머리수(首)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수 - 머리 / 약 - 마을'이니까 수약(首若)은 '으뜸 가는 마을' 즉 서울이란 말이 된다. 모든 마을은 서울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뭐 하나 큰 예외가 없다. 뒤에 '우수(우두 수약)'가 삭주(朔州)로 바뀐다. 먼저 삭(朔)은 초하루 삭의 으뜸 고을이란 말이요, 이는 중국의 소리사전에서도 소리의 같음이 '수'로 드러난다(朔 - 色角切<집운>). 반절식으로 '수약'을 읽으면 '샥 삭'의 소리꼴이 나옴은 흥미로운 일이다. 달리 수춘(壽春)이라고도 했으니 오늘날의 춘천은 수춘의 춘(春)을 따고 주(州)를 붙여 춘주 - 춘천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봄춘이라, 새싹이 트고 죽었던 목숨살이에 생명의 물결이 너울댄다. 네 계절 중의 으뜸이요, 시작인 것을. 춘천을 달리 광해(光海)로도 불렀다. 빛의 바다, 그 빛의 뿌리는 태양 - 해이며 온 힘의 말미암음이다. 해를 사투리말로 새(엿새 닷새의 '새')라고 하거니와 이들의 문화적 원형은 쇠그릇 문화를 지닌 태양숭배의 배달겨레가 그 마지막 빛을 남긴 곳이 춘천이라 해도 지나칠까. 하나될 겨레의 홀로 설 빛어린 힘이 그립다. 늘 푸른 소양강은 겨레의 뿌리샘이요, 젖줄이니까.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스승은 거룩한 교황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라.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참된 스승을 그리워 함은 예나 오늘 없이 매양 한가지이다. 인류의 역사에 빛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이 거룩한 스승, 영혼의 스승들이었다. 참과 거짓이 무엇이며 앎과 삶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이. 쌓아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 유산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옮겨 주는 이.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 삶의 스승인 것이다. 말은 삶의 양식 곧 문화를 되비친다고 했다. 문화가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며, 말이 있는 곳에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만나 넉넉한 사회생활을 이루어 가게 마련. 옛적으로 거슬러 오르면 문화의 모습은 단순해진다. 수렵과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제의문화 사회가 그 중심을 이룬다. 제의문화란 무엇인가. 종교와 정치가 둘 아닌 하나의 형태로 한 지도자에 따라서 다스려 진다. 하면 '스승'이란 말의 내력으로 보아 과연 하늘신과 땅신에 제사하는 제의문화와는 어떤 걸림이 있는걸까. 세월이 흐르면 삶도 죽음도 많은 변화를 입게 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스승'의 경우도 예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지금도 일부 방언에서 스승은 선생 또는 무당의 뜻으로 쓰인다. 그럼 중세어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시언해 와 같은 자료들을 보면 '승려 왕 무당 선생'등의 여러가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신라 초기로 가면 '스승'은 왕(王)의 뜻으로 쓰인다. 가령 삼국사기 의 '자충(慈充)'이 그러한 보기이다. 당시의 한자음으로는 자충이 즈증(즈중)이었으며, 당시 우리말에는 ㅈ- ㅊ(ㅉ)같은 터짐갈이소리(파찰음)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찰음 ㅅ- ㅆ으로 소리가 난다. 결국 '즈증'은 스승으로 소리가 나게 된다. 삼국유사 의 단군조선 시기에는 비, 구름, 바람스승이 있었으니 이들이야말로 행정과 종교를 함께 이끌어간 이들이었다. 유럽으로 치자면 로마의 교황에 맞먹는 그러한 구실을 했다. 참고로 삼국사기(권1) 의 경우를 들어 보자. 남해 차차웅 혹은 자충에 대하여 김대문(金大問)은 풀이하기를, 자충이란 당시 한국말로 '무당'의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 곧 자충을 통하여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어 모셨다. 해서 자충을 두려워 했으며 마침내 사람들은 존귀한 어른을 '자충'이라 하였다. 신라 22대 지증왕 이전에는 왕에 대한 부름말을 '니사금 - 마립간 - 거서간 - 스승'이라 불렀다 했다. 스승은 '사이(間)'를 뜻하는 슷(훈몽자회)에 접미사 '-응'이 녹아붙어 쓰이는 말로 보인다(슷 + -응 > 스승). 이렇게 스승이 '사이'에서 말미암았다면 무슨 사이에서 종교와 행정의 지도자 구실을 하였단 말인가. 제정일치 시대였으니 부족의 머리이자 종교직능자로서 스승은 종족의 번영과 안녕을 신에게 빌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스승의 구실이 이루어졌음을 무리 없이 미루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종족과 종족은 물론이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라 안팎으로 사제의 일을 풀어 나아갔다. 결국 인간과 신 사이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다스리는 몫을 해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징검다리의 구실을 한 중간자 - 사이였다고나 할까. 마침내 거룩한 영혼의 스승들은 하늘의 태양신과 땅의 지모신으로부터 다스림의 권능을 얻어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마치 태양이 비치는 누리에서는 태양이 가장 센 존재로 영향력을 휘두르듯이 말이다. 그럼 비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하였는가.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를 보면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환웅이요, 어머니신은 곰이었다. 이르자면 환웅(桓雄)은 환인으로 이어지는 하늘님이요, 곰 - 웅녀(熊女)는 물이요, 땅 혹은 굴(구멍)이라 할 지모신이라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요, 물과 불의 어우름이 아닌가. 배달겨레는 단군의 아들딸이니까 우린 하늘의 백성이요, 거룩한 스승의 제자들이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깨어지고 넘어져 도저히 넓고 큰 기맥을 펴지 못하고 살아 온 쭈글스런 나날들. 말이 안된다. 긴 여행의 길목에서 정녕 시련의 큰 고비를 오르고 내렸으니 지금도 시련은 멈추지 않고 있다. 고조선은 스승문화 사이와 관련하여 고조선의 짜임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유엠부찐이 지은 고조선 (1990)에 따르면 우수리강에서 내몽고 황하의 동북방에 이르는 지역에 예(濊)족과 맥(貊)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두 종족이 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영역이 이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마찬가지로 환웅은 환인 - 단군의 사이에서 신성(神聖)과 인성(人性)을 함께 갖춘 통치자였고 단군은 환웅 - 웅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세상살이란 게 본시 인간관계 속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 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사이란 말은 흔히 시간과 공간을 함께 안는 관계의 속내로 풀이된다. 관계라 함은 사물과 사물의 상호작용이 아니던가. 이러한 서로의 상호작용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없는 법. 우리 사람의 인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둘레의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따른 객관의 주관화요, 정신활동으로 말미암는 되만듦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이'가 어우러져 녹으면 '새'가 된다. '새'와 같은 소리로 나는 동음이의어를 사투리말에서 찾아 보면 하늘나는 새, 쇠붙이, 새로움, 풀, 날짜를 헤아릴 때의 새 따위가 있다. 새, 쇠, 세는 모두 중세국어에서 겹소리 사이로 읽어야 한다. 행여 이들 말들은 함께 갖고 있는 뜻은 없을까. 먼저 날짜를 헤아릴 때의 경우 흔히 닷새(쌔)엿새라 한다. 분명 태양 곧 해를 이른다. 옛적에는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뜨고 진다고 보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기로는 해가 떴다 지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럼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인가. 쇠붙이는 어떠한가. 쇠 또한 나무와 돌 사이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인류문화에 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졌으므로. 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본디 혀는 방언에서 '세(쎄 쌔)'라 한다. 짐작하건대 윗턱과 아래턱 사이에 만들어진 근육조직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시옷(ㅅ)이 시옷과 히읗으로 나누어져 동음이의어로서의 맞부딪힘을 피해 간 것으로 보인다. 실로 공간이나 시간의 바탕이 없다면 무엇으로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겠는가. 이 모두가 '사이'의 뜻 얼개에 드는 큰 갈래들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따지고 보면 스승은 신과 사람의 사이에서 예언하는 구실과 푸닥거리 곧 사람 사이에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맺힘을 풀고 닦는 구실을 하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풀고 닦는 기능을 한 겨레의 꿈이요, 이정표였다. 달리 영험하고 거룩한 대제사장이었던 것을 누가 부인하리오. 제정일치 사회에서 스승들은 모두가 위대한 선구자들이었으니 단군이나 환웅이 모두 이러한 둘레에 든다 하겠다. 단군도 기실 무당을 드러내는 말로 쓰인다. 전라도말에서는 당골 단골레미 당굴과 같이 쓰이니 함경도 지역에서 무당을 스승이라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환웅(桓雄)은 어떠한가. 환웅의 웅(雄)은 스승의 슷과 상당한 걸림을 보여준다. 문헌에 따라서는 수웅(雄)이라 해 '수(ㅎ) - 숫 - 슷'이 어울려 한 겨레의 말임을 알 수 있다. 하면 환웅의 환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한겨레의 소리상징이요, 꾸미는 말로라면 크고 위대하다는 뜻풀이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환웅이란 '위대한 스승'이요, 한민족의 머리란 말이 된다. 스승문화의 그리움은 홍익인간 한민족의 역사는 스승문화에서 말미암는다. 우리네 한아비들은 일찌기 사람의 사이를 소중하게 여겨 개인과 개인, 부족과 부족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뒤틀린 갈등을 풀어냈던 슬기를 지녔다. 아울러 신과의 오고감을 도맡아 다스렸으니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빛과 그림자를 따라 모든 것은 바뀌어 간다. 바람에 구름이 몰리듯이, 파도가 일듯이 말이다. 한데 지금의 우리 정황은 어떠한가. 역사의 능선을 타고 뒤로 올수록 쪼갈라지고 줄어만 들어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뒤엉킨 난기류가 있으매 이를 당장 어찌 한단 말인가. 참으로 뼈저림이요, 절통한 일이다. 밖에서 몰려 드는 많은 세력에 배달겨레의 스승문화는 마침내 깨어져 동강이 나고 말았다. 어찌됐든 우리 것을 잃어 버리고 석가모니 공자 예수의 가르침을 둘러싼 스승들이 판을 쳤으니. 그러나 어찌할거나. 우리 혼자서만 사는 세상이 아닌 바에 밖에서 들어 온 문화를 되새김질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육법에도 드러났듯이 우리 한겨레는 스승문화의 그리움을 홍익인간(弘益人間)에 두었다. 잃어버린 옛 문화의 영토를 되살려 오늘을 사는 새롭고 힘 있는 스승문화를 일으켜야 한다. 참스승이란 어떤 것일까. 참과 거짓, 선과 악, 더럽고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가늠을 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겨레의 홀로섬에 슬기 있고 용감하게 앞 서가는 사람들이다. 임의 노래는 언제나 우리 곁에 들리지만 그 느껴움은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마음의 문을 닫으면 하늘의 소리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거룩한 영혼의 스승의 시대가 그립다. 위대한 겨레의 스승되기를 우린 모두 힘 써야 한다. 적은 수의 사람일지라도 참을 사랑하는 이들은 외롭지 않다. 신이 진실을 보는 까닭에서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임과 해우러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정이 들어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 하는 사람을 '임'이라고 한다. 임을 향한 그리움은 늘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봄의 향내음 같은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이 그러하듯 임은 종교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론 참다운 가치의 표상, 잃어버린 조국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의 '임'은 서로 다른 이성간에 가리킴말로 쓰인다. 중세국어의 자료인 훈몽자회 에서는 '님'으로 적혀 있어 머리의 소리를 제한하는 두음현상을 벗어나고 있다. 주로 임금.주인의 뜻으로 적힌다. 하면 님 - 임금의 맞걸림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님'은 '니마'에서 비롯되었으며 소리마디가 줄어 '니마 님'으로 된 게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왕이란 부름말을 쓰기 이전에는 왕이 아니고 '니사금 거서간 자충(慈充)'이란 부름말이 쓰였다. 이들은 하나 같이 행정의 머리이자 종교지도자를 겸한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예컨대 자충은 스승이요, 무당이라 했다(慈充 方言謂巫也). 조선왕조 때만 하더라도 왕이 정치의 머리였음은 물론이요, 종묘제악을 다스리던 종교적 행위를 하던 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받들어 모시던 제의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상정하건대, 불신이자 하늘의 신인 태양신이 그 처음이며 물신이자 땅의 신이라 할 태음신 곧 곰신이 그 다음이 아닌가 한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제사를 봄 가을로 모셨으니, 그 때를 상달이라 하며 그 곳을 소도(蘇塗)라 하지 않았던가. 소리 상징으로 드러낼 때 하늘신은 '니마(님)'로, 땅신은 '고마(곰)'로 나타난다. 앞의 것은 천부신의 믿음이라면, 뒤의 것은 지모신의 믿음이라고 하겠다. 기원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하늘과 땅을 떠나선 그 의미를 잃고 말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 대한 두려움이 많던 그 때에 태양과 땅 물이 크낙한 신의.. 의미로 떠 올랐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긴 모든 종교란 발생학적으로 경배하며 두려워 하는 외경(畏敬)에서 비롯하였으니까 말이다. 태양신을 우러르는 믿음은 이곳저곳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환인 중심의 이야기나 연오랑, 세오녀. 이 밖에도 남방계의 신라건국이나 가야 건국에 나오는 새의 알 또는 하늘의 말 이야기 등이 천신계의 하늘숭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빗살무늬'의 빗살이 아닐까. 이는 다름 아닌 태양빛이요 원관념은 태양 곧 하늘인 것이다. 고조선 적의 고인돌 동쪽으로 머리를 삼아 장례하는 동침제 솟대 신앙이 그런 보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양신의 부름말이자 가리킴말이 '니마(님)'라 하였다. 하면 태양신과 왕(임금)이 같다는 말이 된다. 그 걸림은 어떻게 풀이해야 되는가. 말은 쓰이는 시간과 공간을 따라서 뜻도 바뀌고 형태도 바뀐다. 예를 들면 영감(令監)의 경우, 조선왕조 때에는 종4품 이상의 벼슬하는 사대부를 통틀어 이른 호칭이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어떤가. 잘 쓰이지 않음은 물론이요, 욕설에까지 쓰인다(저 놈의 영감텡이, 이 놈의 영감 등). 마누라만해도 그러하다. 신라 백제 때에는 왕비요, 조선조에 이르면 사대부의 아내로, 지금은 그냥 쓰이거나 임의로운 부름말로 쓰이지를 않는가(마누라 나 좀 봅시다. 마누라쟁이 등). 태양신을 가리키는 '니마(님)'의 경우도 같은 얼안에 드는 것으로 본다. 처음에는 '니마(님)'가 절대신인 태양을 가리키다가 뒤로 오면서 종교직능자인 군왕의 가리킴말 '임금'으로 바뀌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이를 간추리면 '니마 태양신 군왕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이 된다. 이를테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뜻으로 바뀌어졌다고나 할까. 홍익인간이란 게 그 뿌리는 하늘신에 닿아 있음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늘 - 태양신의 권위에 힘 입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이었으니 군왕의 권력은 곧 하늘이 주었다는 왕권신수의 논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 '니마(님)'가 태양신 곧 하늘신을 드러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그 언어적인 질서는 어떠한 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니'는 태양이다. 님(임)은 '니마'에서 소리마디가 줄어짐에 따라서 굳어진 말이다. 말의 됨됨이로 보아 니마는 '니(日)'에 존경을 드러내는 경칭접미사 '-마'가 녹아 붙어 이루어 진다.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한자의 맞걸림을 보면 '니'가 태양임을 떠 올릴 수 있다.(日 - 熱 - 泥 - 尼). 이는 일본어나 만주말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日(니 히) - 日本 尼公(니고우) 丹色(니이로) / 닝구<만주>닌(영웅)<퉁그스>). 해마다 전국체전 때가 되면 하늘 제사를 모시고 불 곧 성화를 가져 오는 마니산의 경우도 '니 - 태양'을 뜻하는 좋은 보기라 할 것이다. 마니산은 강화도는 물론이요, 충청도 옥천에도 강원도 회양에도 있다.옥천의 경우, 마니산의 영향을 받아 이름 붙여진 방사형을 고려하면 마니산의 '마'는 '걸'로 읽어야 옳다고 본다(摩 : 聖 : 沃 : 馬<대동지지>). 하면 '마니-거룩한 태양신'의 뜻풀이가 가능하다. 니마의 '마'도 '거룩하다'의 뜻을 보이는 말이 제 뜻을 잃고 경칭접미사로 쓰이게 된 걸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니'는 태양이란 말이 된다. 세월이 가면 모든 게 바뀐다. 말 또한 그러하다. 태양을 뜻하던 '니'는 시간을 따라서 어떤 갈래들로 퍼져 나아갔을까. 낱말변화의 보람으로 보아 '니'는 기역 또는 히읗이 끝소리로 달라 붙는 특수변화를 하는 말이다. 이로 말미암은 '니'의 낱말겨레로는 '닉다 니기다 닛다 닐다 익다 이기다 잇다 일다'를 들겠다. ' 니'의 낱말겨레는 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성모음계인 '니'에서 모음이 양성과 음성으로 바뀌면서 더 많은 말의 겨레들이 생겨 나 쓰이게 된다. 양성모음계열의 것으로는 '낫 - 낮 - 낯 낟(日) - 낱다(現) - 날'등으로 대표되고, 음성모음 계열로는 '녀다(行) - 닛다 - 닐다 / 니마(임) 님자(임자)'와 같은 말들이 쓰인다. 간추리건대, 임은 태양신을 가리킴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다시 군왕의 뜻으로 바뀌어 쓰이며, 뒤로 와서는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부모님, 스승님의 '님'은 말의 내력으로 보아 '당신은 나의 태양이요, 임금이다'라는 뜻으로 새겨 진다. 상대를 부를 때에 아무개 씨보다는 아무개 님으로 불러 줌이 우리의 정서상 어떨까 한다. 상대편에서 나를 대접하기에 앞서 서로가 먼저 다른 이를 섬기는 생활이 우리의 한 아비들의 문화전통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서로를 태양신으로 섬기는 누리라면 이는 참다운 홍익인간에의 발돋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임은 바로 우리 마음에, 곁에 있는 가도 모를 일이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팔공산은 믿음의 터 임을 온전하게 아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넋은 가고 없되 삼으온 벼슬일랑 받으시구려 바람을 알리라 그대 두 공신이여 오래도록 곧은 자취 나타내오시라 (예종의 "도이장가") 어느 일을 정진함에 있어 목숨을 거는 것보다 더함이 있을까. 동화사 싸움에서 죽음의 자리에 놓인 왕건(王建)을 대신하여 싸우다 돌아 간 신숭겸과 김락 장군. 두 장군의 덕업을 노래한 고려 16대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절절하다. 장절공 신숭겸은 특히 왕건의 모습과 비슷하여 견훤의 군대가 보기로는 얼굴도 비슷하고 차린 옷이며 행동거지가 틀림 없는 왕건이었다. 베임을 당한 신숭겸의 목은 없어졌지만 이미 왕건은 달아나 피하고 없었다. 명산(明山)이라고 부르는 지금의 안심(安心)에서 겨우 정신을 차려 군사를 다시 거느리고 재진격,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는 것. 이 때 왕건이 싸움에서 피하도록 강력하게 권한 사람이 신숭겸이다. 숱한 안개와 구름을 거느리고 조국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듯, 하늘 닿을 듯이 솟아 오른 팔공산은 막 날아 오를 용이요, 웅크린 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참담했던 전쟁터로 그 증인으로서 예나 오늘이나 의연하게 서 있다. 옛부터 전해 오는 산의 본디 이름은 공산(公山)이었다. 해안(解顔)고현의 북쪽 17리쯤에 있고 대구부에서는 35리 쯤에 놓여 있다. 대구 인동 신령 하양의 경계를 이루는 터전이 된다. 산봉우리는 연이어 기세 당당하다(대동지지 참조). 고려의 건국초기에 동화사 싸움에서 빛을 남기고 죽은 신숭겸 김락 전의갑 등의 8공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덟 팔을 덧붙여 8공산이 된 것이다. 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동수산(桐藪山)이라고도 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럼 옛부터 전해 왔다는 산이름 공산(公山)은 어떤 소리상징을 보이고 있을까. 무엇이 그리도 귀한 산이란 말인가. 앞서 일러 둘 것은 금호강(琴湖江)의 이름과 어떤 걸림이 있지 않나 한다. 미.루어 보건대 공산의 '공'과 금호의 '금'이 다 같이 땅과 물을 다스린다는 지모신(地母神)과 걸림을 둔 이름으로 미루어 잡는다. 충청도 공주(公州)의 보기를 먼저 들어 보기로 한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공주는 '고마나루(熊津)'가 본 이름이었다. 고마(곰)내는 웅천하(熊川河)로 다시 금강(錦江)으로 바뀌었고 웅진(熊津)은 달리 공주(公州)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러 쓰인다. 이를 간추리면 '곰 - 웅(熊) - 금 - 공'의 맞걸림이 드러난다. 하면 원천적으로 곰 - 공(公)의 걸림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한자로 곰이란 글자는 없으니까 공으로 쓴 것이다. 고마(곰)에 대한 속성은 '경건한 흠모의 대상'으로 떠 오른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신증유합)). 여기 고마(곰)는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나타나는 단군신화에 그 뿌리가 벋어 있다. 곰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지만 조상신이라는 토템의 대상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러한 곰신앙 - 곰토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전역에 주로 북쪽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곰(고마)은 어머니 신이요,조상신이 된다. 그러니 귀하게 받들어 모실 밖에. 게다가 고마(곰)는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의 정착을 따라 물신과 땅신의 상징 곧 지모신(地母神)의 믿음으로 바뀐다. 한편 동물상징도 물이나 뭍에서 사는 거북이로 곰이 바뀌게 된다. 본시 거북은 '검(거ㅁ)'이었으니 단군왕검의 '검'이 곰 거북(검)의 소리상징과 비슷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면 어쨌든 곰(검 금 감 굼)이 얼마나 드높은 존재인가. 그러면 이제 '곰 - 공(公)'은 소리의 질서로 어떻게 풀이 되는가. 곰(굼)은 아래 조사가 붙을 때 기역(ㄱ)이 끼어들어 변하는 형태상의 특징이 있다(곪기다 공글다 궁기다 등의 기역(ㄱ)). 마침내 미음(ㅁ)앞에 기역(ㄱ)이 자음접변의 소리 .닮음에 따라 공(公 孔)이 될 수 있다. 정말 거북의 옛말이 '검(굼 금)'이었을까. 흔히 사방에 4신(神)의 그림을 그릴 때 북쪽에 거북과 뱀을 형상한다. 거북을 현무(玄武)로 적는다. 이두식으로 읽으면 현무는 검(玄)에 무(武)를 붙여 쓰는 것으로 '무(武)'는 앞의 글자 현(玄)을 뜻 - 검으로 읽으라는 끝소리 가리킴이라 할 수 있다. 땅이름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은 보인다. '검(거북)'은 색깔로 보아 검은 색이며 방위로는 북쪽지향을 드러낸다. 가령 함안(咸安)의 현무(玄武)에서 함(咸)의 옛소리가 감이니까 '감 - 현무(玄武 - 검)'의 걸림을 보이는 경우가 그런 보기이다. 칠곡의 거무산(巨武山)이 그러하며 구미(龜尾)의 금오산(金烏山)에서 '굼 - 금'도 같은 계열의 보기들이다. 박지홍(1957.구지가연구)에서는 양산지방의 민요 가운데 '왕거미' 노래가 있는데 이 때 '거미 - 거북'이라는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神검(신자전)). '검 - 거북'의 걸림을 고리 짓기란 어렵지 않다. 거북의 옛말은 거붑(두시언해(초)8-58)이었다. 그러니까 '검다'에 명사형(음)이 붙으면 거믐 - 거뭄이 되고 둘째 음절에서 미음(ㅁ)이 파열음(ㅂ)으로 되고 끝소리가 기역(ㄱ)으로 자음이화가 일어나면 '거뭄 - 거붑 - 거북'이 되니 말이다. 곰산과 금호강 대구부의 남쪽 3리쯤에 연구산(連龜山)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대구가 처음으로 마을이 생길 때 돌로 거북을 만들어 이 산자락에 묻었다는 거다.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를 북으로 해서 묻었는데 거북의 기운이 산전체에 통하게 하고자했던 까닭에서다. 해서 연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 당시만 해도 신천(新川)이 굽이돌아 흘러 연구산 자락으로 지나 물의 북쪽이 된다. 마찬가지로 금호강은 대구의 서북쪽으로 흐르며 금호의 북쪽에 있어 대구를 지키는 터산이 곧 팔공산-공산(公山)이 되지 않는가. 곰이 단군의 어머니신이라고 했는데 금호강 또한 금호평야의 어머니요, 대구평야야말로 금호강이 낳은 자식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대동지지 를 따르면 금호강의 뿌리샘은 모자산(母子山) 일명 보현산에서 말미암았다고 하니 금호강이 대구평야의 어머니가 됨은 너무도 당연하다. '금 - 모(어머니)'의 걸림은 '금'의 기역(ㄱ)소리가 약해져서 떨어지면 음(옴 엄 암)이 된다(金泉 - 今勿 - 禦侮 - 金城(대동지지)). 한 맺힌 고모령의 사연도 공산 - 금호와 걸림에 있을 것으로 본다. 고모령(顧母嶺)이라, 말 그대로 풀이하면 '어머니를 돌아 보며 생각하는 고개'란 뜻. 언제나 생각해도 어머니의 품은 따사롭다. 이두식으로 다시 보면 '고모 - 곰(고마)'의 걸림으로 풀이가 된다. 우리말로 곰고개 혹은 곰치가 된다. 이와 같이 물과 땅을 다스리는 지모신에의 그리움은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살아 가는 공간에 되비쳐 드리운다. 공산의 머리맡에 솟은 비로봉(1192미터) 또한 이러한 믿음의 상징이 어려 있다. 불가에서는 광명의 부처를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말로는 별을 방언에 따라 '빌'이라고 하는데 이 '빌'에 말조각이 더 붙어 '비로봉 - 별봉우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북방에 가장 뚜렷한 것은 북극성 모든 별이 이 별을 중심으로 해 동그라미를 그리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르자면 비로봉은 별신 - 곰신에게 제사와 정성을 드리는 상징으로 저리 높게 드리워 있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 별 중에도 큰 곰자리 별이 으뜸으로 가는 게 아니던가. 별이 쏟아져 빛나는 금호강은 나날이 죽어 간다. 우리들이 빚어낸 숨 막히는 공기와 물로 말이다. 우린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