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돌아 간 누이를 위한 노래, 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어 두려웠는지 나는 가네 말도 못 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고도 간 곳을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 볼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사의 '제망매가') 태어 났으매 살아 가는 것이고 하여 다시 죽음에 이른다. 내가 있으므로 해서 다시 사라져 가는 게 스스로운 대자연의 질서요, 길인 것이다. 호머의 글에서처럼 우리는 나무의 잎새처럼 봄·여름을 살다 가을이 되면 대지의 품으로 돌아 간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란 언덕에 서서 만나고 헤어지는 아픔은 언제나 강물같은 서러움으로 얼룩져 영혼을 적시우고 어느 새 허허로운 벌판을 가는 나그네가 되곤 한다. 불도에 넓고 깊게 나아 간 월명(月明)스님도 그러하거늘 우리네 먹고 마시는 일에 빠진 이들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일찌기 저승으로 간 누이 동생을 위하여 월명 스님은 정성스레 재를 올리고 다짐 깊은 인간적 고뇌와 불제자로서의 마음을 노래로써 부처님 앞에 이바지한다. 스산하게 부는 가을 바람에 지는 잎새가 뒹구는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속세의 남매된 인연에 목메여 울먹이면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작별 인사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저 살아 있는 오빠의 애끊는 마음일 뿐. 한 가지는 같은 부모요, 핏줄이다. 잎새 또한 같은 가지에서 피어 나고 짐이니 삶의 덧 없음은 물론이요, 형제간의 걸림을 드러낸 부분이다. '잎'은 입(口)에서 받침이 파열성을 더하면서 갈라진 말이다. 보통 입이라면 먹거리를 먹고 숨살이를 이어 가는 첫 관문이요, 말을 하는 언어적 존재의 표상이 되는 조직이다.중세어로는 닙(염불보권문32)인데 이는 앞을 뜻하는 '님'에서 비롯한다. 지금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말·임'이라 하는바 중세기로 치면 모두 니말·님이 됨으로서다. 그러니까 먹거리로 보면 제일 앞에 있는 신체조직이요, 주요한 목거지가 된다. 먹는 것만큼 좋은 것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기원적으로 '님'은 '니' 혹은 '니마'에서 오는데 여기 '니'는 태양을 뜻하는 기초어휘에서 비롯되며 태양숭배의 제의문화 시대에는 부족의 머리가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렸던 것(필자,1990, '님'의 형태와 의미). 세월이 흐르고 삶의 모습이 달라지면 같은 말이라도 그 뜻이 달라진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서 '니마(님)-닙-닢'으로 펴 나아갔는데 뜻이 태양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태양이 모든 만물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빛과 열의 샘이고 입이 먹거리를 대는, 탄소동화작용을 일으키는 부분이란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하고 있긴 하다. 입(口)으로 사람의 수를 헤아릴 적에 인구(人口)란 말을 쓴다. 입이 몇 개냐는 말이 된다. 나무의 잎도 태양의 에너지-힘을 받아 광합성을 이루는 부분이고 보니 잎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따라 나무나 풀의 삶이 좌우된다. 뿌리가 튼튼하면 잎이 무성하다(根固葉茂)함은 잎이 무성해야 뿌리가 튼튼하다는 말도 되므로 그러하다.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노래 이바지를 한 월명 스님은 어떤 분인가.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한번은 큰 길을 지나면서 피리를 부니 달님은 스님을 위하여 그 자리에 멈추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는 얘기. 이로부터 법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돌아간 누이를 위하여 법당에서 재를 올렸으니, 없는 종이돈을 마련하여 노래와 함께 이바지를 하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 종이돈은 서쪽으로 날아 가고 없어지게 됐다. 극락-미타찰로 가는 길에도 돈이 필요했음인가. 아니면 돈 따위는 필요 없어 바람에 날렸음인가. 이 노래는 불가에서 이르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제(四諦)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짜임을 보인다.(이어령, 1985, 고전을 읽는 법 참조). 사제란 영원히 변함이 없는 불교의 법리 중의 하나다. 나고 죽고 병들어 늙음이 모두 괴로운 인생 길이라 이르러 고제(苦諦)요, 이들 괴로움의 뿌리가 소유라든가 애정욕과 같은 고제의 말미암음이 되나니 이가 곧 집제(集諦)이다. 한편 이러한 괴로움을 훌훌 벗어 던져 버린 상태가 멸제(滅諦)인데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를 이른다. 나머지 도성제(道聖諦)는 무엇인가. 이는 열반에 이르는 수행과정을 뜻하는데 바르게 보고 생각하는 등의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석가세존이 진리를 깨친 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에게 풀이해 준 그 길이 도성제다. 흔히 말하는 무소유의 소유가 아닐런지. 없음과 있음이 하나 되는 논리 이전의, 소유 이전의 자연의 세계라 해서 좋을 것이다. 노래 속에는 4제를 깨우치고 힘 써 길을 닦노라면 극락에 들 날이 온다는 기다림의 미학(美學)이 배어 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때로는 실망스럽고 지루한 것이나 본디 기다리다는 '집으로 돌아 온다'는 뜻이다. 그 것도 영원한 우리들의 천국으로. 중세기말에서는 기다리다가 '기들오다'(두시언해 등)로서 이를 가르면 긷(家보금자리)에 오다가 덧붙어 이루어진 말로 미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기다림. 그건 우리 모두의 안식이며 꿈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조금은 기다리면서 살 일인 것을.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나릿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삼국유사'에서) 기파랑은 누구였을까. 구름에 달이 가듯 아주 스스로운 사람. 하얀 모래와 조약돌이 달빛에 어리는 일오천 냇가에 외로이 서 있는 듯. 추운 서리 내리는 늦가을 들판에 잣나무처럼 그렇게 찬양받아 마땅한 사람. 무엇이 기파랑으로 하여금 그리도 우러르게 했을지. 기파랑은 화랑이라는 풀이가 중심을 이룬다. 단적으로 화랑의 '랑(郞)'자가 붙어 있음으로 해서 그리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록에 오를 만한 사람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화랑에게만 붙여지는 씨끝은 아니다. 처용랑이라든가 문무왕을 도와 당의 군사를 물리친 명랑(明郞),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延烏郞),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은 비형랑, 동명왕 때의 천왕랑(天王郞)의 보기가 모두 화랑이 아닌 게 분명하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바, 병을 고치는 의원이자 충신이며 불도인 기파(耆婆Jiva)가 아닌가 한다. 기파는 어떤 사람이고 경덕왕의 어떤 일로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기파는 인도의 토쿠사시라 나라의 사람으로 성은 아다일러요, 이름은 힝카라는 스승에게 의술을 배웠다. 7년 배움 끝에 마갈타 나라의 왕사성(王舍城)으로 돌아 와서 여러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마침내 왕의 병을 고치는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고치기 어려운 왕의 병을 다스려 이름 높은 의원이 된 이. 특별히 눈에 뜨이는 건 아버지인 왕을 죽인 천하의 불효 아도세왕의 고질병을 고쳐 준 나머지 끝내 아도세왕을 불도에 귀의하도록 한다. 석가세존까지도 기파를 찬양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다. 경덕왕의 아들 얻기 당대의 충신이요, 덕망이 높은 충담스님은 저 이름 난 기파의 의술과 덕망을 기림으로써 경덕왕의 성적인 불구를 고쳐 아들을 원하는 염원을 노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기파의 덕을 찬양하면서 부처님께 경덕왕의 소원 성취를 빌었던 것은 아닐까. 경덕왕의 성(性)은 길이가 8치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자식이 없었다. 해서 사량부인(沙梁夫人)을 폐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삼았다. 이가 뒤에 경수태후가 된다. 어느 날 임금은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하늘의 상제(上帝)께 빌어 아들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표훈스님이 상제께 알아 보니 딸은 얻을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임금은 다시 청하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로 바꿔 달라고 한다. 하늘 상제는 말하였다. 딸이 아들로 되면 나라가 어렵게 된다고. 임금은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 얻기를 바랐으니 큰 일이 아닌가. 마침 만월 왕비에게 애기가 들어 서니 임금은 기뻐하였으며 아들을 얻기에 이른다. 한데 이게 웬 일. 왕자가 8살 때에 임금이 죽고 임금 자리에 나아가니 이가 곧 혜공왕이다. 혜공 임금은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될 때까지 여자의 놀이를 했고, 도사(道士)들을 가까이 했다. 급기야 김양상과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하니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아들은 얻지 못하더라도 겨레와 나라가 평안해야 옳은 법. 이를 위해 표훈 스님으로 기파랑을 찬양하여 노래 공양을 하다니. 나라 이름이며 벼슬 이름, 땅 이름도 모두 당나라식으로 만들어 놓더니 그예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 뉘우칠 줄을 몰랐으니 이거야 원 참. 말이 되는가. 멍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빌었더라면 얼마나 높아 보였을까 말이다. 잣가지는 성 상징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에서 잣가지의 '잣'은 남성의 성(性)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모양이 툭 솟은 게 마치 남자들의 뿌리와 비슷하다. 짐작하건대 경덕왕의 성은 물건만 쓸데 없이 컸지 힘이 없어 애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잣'이란 잣나무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같은 소리로서 '잣'은 고개를 가리킨다(훈몽자회 중8). 모두가 '사이'를 밑뜻으로 한다고 상정된다. 모음이 바뀌면 '잣-젓-좃'이 되는데 고대국어에서는 파찰음소(ㅈ ㅉ ㅊ)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으니 마찰음(ㅅ)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잣 - 삿'이 되니 여기 '삿'은 바로 사이(間 <내훈 1.3>)가 된다. '삿'에서 갈라져 나온 말 가운데에는 싹 새끼 등이 있음을 보면 노래말의 '잣'은 그 자체가 열매이기도 하지만 낱말 겨레와 음소들의 기원으로 보더라도 성 상징이 짙음을 가늠하게 된다. 어쩌면 잣을 많이 들게 하여 임금의 뿌리를 힘 있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 종족 보존이나 생명 보존의 본능은 예나 지금없이 같은 것. 임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본능이 없다면 말이 안된다. 솟대 혹은 솔대나무의 솟(솔)이 태양을 향한 발돋움이요, 믿음이지만 남자의 뿌리를 숭배하는, 그러면서도 청동기(쇠) 문화의 상징이듯이 '잣' 또한 이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조직의 자리로 보아 두 다리 사이에 솟아 있음은 잣나무의 모양과 뭐 그리 다른가. '사이'란 개념은 스승과 바로 이어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임금이 신과 인간의 사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음은 크게 뉘우쳐 깨달을 일이었다. 표훈 스님 뒤로는 그 이만한 대사가 없었다 함은 일연(一然)의 반도교적인 불제자의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스로가 바로 기면서 말야. '아아(阿耶)'의 드높은 경지 말이란 사물이나 사실 자체가 아님은 잘 아는 일. 그 밑 뿌리는 소리 상징이다. 아무리 더럽거나 나쁜 것일지라도 입말 특히 글로 할 때 그것은 추상화되고 미화되기도 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 중간세계란 결국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특정한 대상 사이를 넘나드는 소리 안의 인식 공간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구름에 가리운 달이 새파란 강물이 출렁이는 강가 모래밭을 걷고 있는 기파랑의 모습을 비춘다. 다시 둘레를 보면 잣가지 높은 나무 숲들이 생명의 바다를 이루고 있음에. 할 말은 다 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노래의 말미암음은 경덕왕의 병을 고쳐 아들 얻게 하는 것이지만 '아아(阿耶)'하는 감탄의 경지에 이르면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 푸른 강물은 이미 충담의 영혼이 어린 불심이 되고 서녁으로 가는 극락의 사자 달님은 영혼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르자면 달의 빛과 강물의 물이 어우러져 새로운 영혼의 움을 틔우는, 거듭나는 삶의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고나 할런지. 거기 무슨 긴 드러냄말이 있을까. 그건 해탈 - 벗어남이며 삶 본래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발돋움이 어린 것이다. 마침내 광기(狂氣) 어린 느낌말 '아아'가 있을 뿐. 흐름으로 보아 무슨 잣나무라든가 화판이라든가 함은 정녕 뱀그림에 다리요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있는 걸 없다고 할 수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어우러짐. 성(性)의 같고 다름이 하나 되는 법열(法悅)이요, 암수가 어우러짐의 숨 가쁜 녹아 흐름일 것이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인도 불교의 경전인 베다경에 나오는 옴(om)과 같은 거룩한 말이 '아아'라는 거다(이재선, 1972. 신라향가의 어법과 수사). '아(阿)'라는 옴은 산스크리트 글자의 처음이기도 하지만 모든 산스크리트 소리는 '아'를 바탕으로 소리마디를 이룬다. 상징적으로 보아 '아'는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바로 떠 올린다. '아'는 우주의 진리이라, 갈고 닦음에 따라 덧없는 삶을 누리는 인간이 무한광대한 절대자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해서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라 했을 지 모르겠다(조형호, 1993. 찬기파랑가의 미학적 우주론 참조). 말이 없는 말 -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진솔한 표현이 '아아'였을까. 결국 그 절대자의 자리에서 병 잘고치는 기파(耆婆Jiva)를 불러 경덕왕의 병을 고치고 더 나아가서는 병든 나라 사람들의 고침을 기원하였다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절대자의 참된 경지를 말로 할 수 없어 겨우 감탄에 그친 것뿐. 불가에서는 이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이라 한다. 과분(果分)은, 현상세계인 인분(因分)과 짝을 이루는데 절대 진리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 고침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경덕왕을 위하여 절대 자비한 부처의 힘을 입은 기파에게 빌었던 일. 이게 사실일진대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나 보다. 그 거리를 좁힘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니. 충담의 기원을 넘어 달은 지고 강물은 흘렀을 것이며 삶의 생로병사를 벗고자 뭇 사람들은 다시 떠 오르는 해나 밝은 달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묻혀진 옛날은 그립고 아쉬워서인가.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땅 겨레들의 스승이요, 어버이임을 길이 새겨야 한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도솔가의 뒤안 오늘 여기에서 꽃이바지 노래 불러 뿌린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으로 받자오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 맞으라 ('삼국유사'에서) 정성이 지극한 노래는 하늘과 땅의 귀신도 감동시킨다. 일연(一然)스님은 신라의 향가가 특히 그러하다고 했다. 누구를 위해 부르는 노래이며 무엇 때문에 그리도 간절하게 부르는가. 말이 노래이지 실은 부처님을 향한 기도요 염원이며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노래말이다. 때는 신라 35대 경덕왕 19년(760) 사월 초하루 한꺼번에 해 둘이 하늘에 떠서는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二日竝現). 당황한 임금은 날씨를 보는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인연이 닿은 중으로 하여금 꽃을 뿌리며 하늘에 정성을 드리면 재앙이 물러 갈 거라고 일관이 일러 준다. 제사를 모시는 조원전 (朝元殿)에 깨끗하게 단을 차려 놓고 왕이 몸소 청양루(靑陽樓)란 곳에 나아가 인연이 먼저 닿는 중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월명(月明) 스님이 밭두둑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인연이 먼저 닿을 밖에. 스님을 모셔서 하늘의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글을 짓도록 하였으나 향가는 좀 알 뿐 다른 인도의 범패는 모른다고 사양하질 않는가. 임금은 좋다고 승락하니 월명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 게 바로 도솔가. 일관의 말대로 하늘의 재앙이 없어지고 해는 다시 하나로 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는다. 임금은 고맙다는 정표로써 차 한 봉지와 수정으로 만든 염주 108개를 주었다. 이상한 일은 어린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 차와 수정염주를 챙겨 가지고는 이내 내원탑 안으로 숨어 버린다. 뒤에 보니 차와 수정염주는 내원탑 남쪽의 벽화에 그린 미륵상 앞에 놓여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일이로다. 월명 스님의 간절한 기도가 받아 들여져 미륵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소식은 퍼져 서라벌 장안의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고 민심은 다시 수습되고 오히려 임금의 덕화를 존경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 '도솔(兜率)'은 덮어줌이라 도솔가의 '도솔'은 무엇을 이르는가. 불가에서는 욕계육천(慾界六天)의 넷째 하늘을 도솔천이라 하니 미륵부처가 사는 극락정토(極樂淨土)라 한다. 땅에서부터 33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으며 어리석은 세상 사람 모두를 건져 주는 부처가 미륵불이라는 것. 두개의 해가 열흘 동안 떠서는 지지 않으니 이를 풀기 위한 임금과 사람들을 위하여 월명 스님이 대신 미륵부처님께 빌려고 부른 노래가 도솔가이다. 어떤 일을 이루려고 마음을 긴장되게 가지는걸 '도스르다'고 한다. 여기서 갈라져 나아가 어떤 물건이나 일을 추스를 양으로 감싸다. 혹은 덮다 정도의 뜻으로 쓰인다. 이르자면 도시락도 '도스르다'에서 갈라져나온 갈래말이다. 음식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보자기나 끈으로 만든 망태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놓아 두는 게 도시락이 아닌가. 짐작하건대, 왜군이 쳐들어 와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들의 불안과 초조함이 온 나라에 가득한 때 흐트러진 민심을 모음은 왜군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주요한 몫을 했을테니 이상향으로서 도솔천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을 법하다. 거기에는 빛과 평화가 영원히 있을테니까 말이다. 부스럭대고 좀 야단스러운 상태를 '두스럭 피운다'고 함도 같은 말에 뿌리를 둔다고 하겠다. 간추리면 우리말 '도스르다·두스럭 핀다'와 도솔가의 '도솔'은 같은 뜻을 드러내는 낱말겨레에 든다. 이같은 낱말겨레의 기본은 '돗'으로 '돗-돋-돌/둣-ㄷ-둘'의 자음교체와 모음이 바뀜으로써 더 많은 말의 겨레들을 거느린다. 지금도 '도르다·두르다'는 말이 어떠한 사물을 감싼다는 뜻으로 쓰임을 보면 도솔(두솔)의 '돗(둣)과 상당한 유연성이 있지 않나 한다. 예부터 신라에서는 입추(立秋)가 지난 뒤 진일(辰日)에 별제사를 지낸다. 문열(文熱)이란 숲에서는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妙寺) 남쪽에서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方)에 별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사람의 일을 별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 보려던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겠다. 별은 기원적으로 빛이며 불이라 할 수 있다. 그 낱말의 겨레를 보면'별-볕-볏/빌-빛-빗/불-붇-붙-붓'의 형태로 간추려 진다. 혜성가에서도 별이 문제가 된다. 갑자기 길쓸별이 나타나 참으로 위험한 나라의 정황을 드러낸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길쓸별이. 어두운 나라의 재난을 밝게 쓸어 주는 횃불이 될 수도 있는 것. 두 해에 대한 풀이는 여러가지이다. 해 하나는 개혁세력과의 싸움으로 보는 이(김승찬, 1986, 향가문학론), 하나의 해는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보는 이(최철, 1983, 향가의 본질과 시적 상상력), 풍년을 빌기 위하여 해에다가 활을 쏘는 사양제의(射陽祭儀)로 보는 이(현용준, 1977, 월명사 도솔가의 배경설화고) 등 실로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다. 비유와 상징으로 보아 혜성가와 도솔가의 배경설화에 드러난 구조를 비교분석한 논의(장진호, 1989, 신라향가의 주원성 연구)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두 노래가 모두 하늘의 해와 별을 향해 비는 노래요, 지은이는 다 불교 승려이면서 나라의 번영을 걱정하는 화랑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미륵좌주(彌勒座主)만 해도 그렇다.하늘의 저승에 있는 미래의 부처가 아니고 미륵선화(仙花) 곧 화랑으로 드러내 보인 현실의 부처인 것이다. 이일병현(二日竝現)에서 일본군의 일(日)과 하늘의 해를 가리키는 상징을 바탕으로 월명스님이 노래한 두 해는 사라지고 미륵좌주가 어린 아이의 몸을 입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융천스님이 지은 혜성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래를 부르자 문제의 꼬리별-혜성이 없어지고 끝내는 일본군대가 물러나 되돌아 가는 두 일을 두 해로 나타낸 경우니 도솔가나 혜성가가 같은 맥락으로 풀 수 있다. 시련을 딛고 불국토(佛國土)에 대한 그리움을 펴 보자 하였으니 모두 다 거룩하고 영검있는 노래들이다. 땅에서 매인 매듭을 하늘에서 풀고 하늘에서의 문제를 땅의 노래로 한 셈이라고나 할까. 임금도 스님도 위대한 스승들의 대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스승이란 사이를 뜻하는 '슷(間<훈몽자회>)'에 접미사 '∼응'이 어우러져 된 말이다. 여기 사이라면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신이요, 인간과 인간의 사이가 된다. 기(氣)의 논리로 보면 스님의 염력(念力) 곧 생각의 기가 하늘의 기와 동기감응(同氣感應)을 일으킨 셈. 두 스님의 노래를 통한 사람의 기가 하늘의 그것에 미쳤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해괴한 일을 풀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거룩한 성자(聖者)들이 물위를 걷는 것이나 산에서 산으로 날아 다님은 모두 기(氣)의 말미암음으로 일어나는 열매들이다. 어느 날 누구인가 우리 겨레의 하나됨을 이룸에 있어 동기감응을 일으킬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는 남과 북의 겨레들이 갖는, 하나됨을 향한 꿈으로부터 피어 나는 영혼의 기가 맞부딛침으로써 가능한 경지가 될 일. 공동체의 문제를 풀이하기 위한 우리들의 기가 약한 탓이다. 오늘날의 월명이나 융천스님이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스승의 마음으로 돌아 갈 때 매듭이 하나 둘씩 풀릴 걸 가지고.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길 쓸 별의 노래 옛날 동쪽 물가에 건달파(乾達婆)의 논 성으로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불 사른 모양이야 세 화랑이 산구경한다는 말 듣고 달도 바삐 불 켜는 터에 길쓸 별 바라보고 혜성이야 말한 이가 있다. 아아 길잡이 하러 떠갔더라 이에 벗들 궂히는 빗자락 별이 있을고 ('삼국유사'에서)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 나라 일본. 왜군이 쳐 들어 옴을 노래로써 경계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혜성을 길쓸이별이라 하고 세 화랑이 산구경하러 감은 무슨 뜻인가. 그 중요한 때에 산구경이라니. 또 건달파가 노래와 춤을 추던 사람인데 왜군이 침입했는데 무슨 건달파가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를 아니한가. 해를 초점으로 하여 타원으로 돌아 가는 별이 혜성이다. 흔히 살별, 꼬리별이라 하며 오늘날 가끔 64년만에 찾아 온다는 헬리 혜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행여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면 그 건 곧 이 땅의 끝이 나고 만다는 엄청난 사실인바, 왜적을 이에 비유하다니. 그 제나 이 적이나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힘겨운 사람들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빗자루처럼 보이니까 빗자루 별로 불러서 이상할 건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비로 쓴다면 길을 가로막는 왜군을 쓸어 버린단 말인가. 그렇다. 왜군의 앗음을 물리침으로 평화를 되찾고 우리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정황. 융천스님은 마침내 '길을 쓸어 내기를 별에게 기도했던' 것은 아닐런지. 옛부터 별님에게 행복을 빌었음은 우리 민속에서도 드러난다. 혼인할 때 초례청에 든다고 하는데, 여기 초례의 초(醮)가 별을 보고 점을 치고 복을 빈다는 뜻이니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도 같은 뜻으로 쓰인 경우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뿐만이 아니고 군인의 길, 학도의 길, 물길, 불길과 같이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길이란 '긷-깃'에서 갈라져 나온 말로서 보금자리로, 일터로 통하는 공간을 이른다. 새가 깃 들인다에서 '깃'은 집이요, 보금자리이니까 말이다. 한데, 왜군이 우리들의 길을 막았으니 그 집안이며 나라가 편할 턱이 있을까. 길이 막혔는데 세 화랑인들 어떻게 산구경을 갈 수가. 또 무슨 놈의 산구경이라니. 이거야 말이 되질 않는다. (허.참). 하필이면 또 셋일까. 하늘, 땅, 사람일까. 아니면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일까. 아니면 신(神)과 인간, 그리고 대자연일까. 상황으로 보아 왜군과 싸우려는 우리 모든 이들일게다. 거기에 임금이, 신하가, 백성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혜성 곧 왜군이 쳐들어 옴을 횃불로 알렸던 것이다. 정신 없이 건달파의 노래와 춤을 즐기는 이들을 향해서. 횃불로 잘 안되니까 밝은 달에게 알려 달라는 기원을 겸하여서, 달은 극락으로 오가는 석가세존의 사자이니까 부처님의 법력(法力)을 빌어 보려는 애씀은 아니었을까. 산구경의 본 바탕은 무엇일까. 흔히 사냥이라고 하지만 기실 헤치고 보면 전쟁 훈련을 하기 위한 산행(山行)이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 에서는 임금이 직접 산행하였음을 예로 보이거니와 소리가 바뀌는 과정에서 '산행-사냥'이 된 걸로 보인다. 이르자면 짐승을 적으로 보고 전술을 갈고 닦는 싸움마당이 곧 사냥터란 말이다. 이제 화랑이 군사를 이끌고 전쟁 훈련을 하려는데 느닷없이 혜성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왜군이 갑자기 쳐 들어 온 것이다. 싸움을 알리는 횃불도 필요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달을 횃불 삼아서 바쁘게 싸움터로 나아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 길잡이는 곧 화랑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막느냐 못 막느냐 하는 기로에서 길잡이란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주요한 구실을 한다.목숨을 걸고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건달파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평안을 안겨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이 노래에 담겨 있다고 본다. 길쓸별의 별은 소리 상징으로 보아 '불'이 된다. 역사로 보면 광명을 숭배하는 태양숭배요, 어두운 밤을 밝히는 하늘에 비친 또 하나의 횃불일 수도 있다. 위험신호임과 아울러 어려움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은 아주 상징적이요, 암시하는 바가 크다. 나라와 겨레의 평안을 비는 융천 스님의 절절한 소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높고 빛난다. 노래의 가락과 함께.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원왕생(願往生)의 그리움 달님 이시어 이제 서쪽 나라로 가시나이까 무량수 부처님 앞에 두 손 모아 맹세하나이다 원왕생 원왕생 그리워 하는 이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몸 버려 두고 48원을 이루실까 한평생 살아가는 게 너무 짧아서인가. 아니면 세상살이가 더럽고 욕되어 그러함인가. 누구에게나 살아서나 죽어서 그리는 누리가 있는 법. 어찌 광덕의 아내만 그럴 수가 있을까. 원왕생(願往生)은 원왕생극락의 준말로서 '극락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 노래는 사연 깊은 옛적으로 거슬러 오른다.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때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이들이 함께 불도를 닦고 있었다. 둘 사이는 서로 친하여 약속하기를 '먼저 극락세계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알리도록 하자(先歸安養者須告之)'고 했다. 광덕은 아내와 함께 분황사 서리에서 신을 삼아 팔아서 살았고, 엄장은 남산의 한 암자에서 나무를 베고 밭갈이를 힘 쓰면서 살았던 터. 어느 날인가 해 어스름에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드리워 졌는데 창밖에서 '나는 이미 서녘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라(某已西往矣惟君好住速從我來)'고 하여 엄장이 창을 열고 내어다 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노래 소리가 나면서 밝은 빛이 땅에까지 비추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나머지 광덕을 찾아 가 보니 과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장사를 지내고는 광덕의 아내에게 함께 살자고 제의를 하니 그러자고 하였다. 잠자리를 함께 하여 엄장은 친구의 아내에게 한 몸이 되고자 하였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광덕의 아내는, "스님께서 극락에 가고자 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 가서 물고기를 찾는 것이나 같습니다."고 하면서 크게 나무랐다. 엄장은 기가 막혀 '광덕도 함께 살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거늘 이게 무슨 큰 일인가.'고 다그쳐 물었다. 여인이 이르기를 '남편은 나와 함께 10년을 살았지만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질 않았는데 음란한 짓을 했겠습니까.' 눈에는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 또 '남편은 밤마다 단정한 모습으로 염불을 하고 진리를 얻고자 하였으며 달 밝은 밤이면 부처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정성이 이같으니 극락으로 안 가고 어디로 갔겠습니까. 이제 보니 스님께서는 극락왕생하기는 싹수가 노랗습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뒤로 엄장은 크게 뉘우치고 몸을 깨끗이 하면서 원효법사에게 깨달음을 구했다. 마침내 도(道)를 얻고 극락으로 든다. 엄장(嚴莊)은 스님의 이름으로서 그 속에 담긴 불교적 그리움이 짙게 드리워 있다.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을 보면 '장엄'이 나온다. 하면 '엄장-장엄'으로 바뀌어 쓰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엄'이란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향이나 꽃으로 장식하거나 나쁜 일로부터 자기의 몸을 삼가하여 공덕을 쌓는 것'으로 풀이된다. 있는 이들에게 소외 당하고 억눌려 사는 삶에서 누구든지 불도를 닦아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미륵불의 극락정토 신앙은 당시의 보통사람들에게는 큰 꿈이요, 희망이었으니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노래에 은은히 배어 있음은 아닐까. 그 단적인 표현이 '원왕생극락'이요, 현실에서는 도달할 길 없는 저승의 언덕이니 원왕생이야말로 황홀 장엄한 곳에 대한 몸짓이며 바람이다. 죽살이를 통틀어 그리는 극락(極樂)은 '달'로 드러난다. 우리들에게 달이란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리운 영혼이요, 위안임을 느끼면서 살아 간다. 초승달과 보름달에서 얻는 정서가 다를 때도 많다. 조지훈의 <승무>에서 오동나무 잎새로 지는 달빛이며, <사미인곡>에서의 달 또한 임의 영상이 담긴 상징으로 떠 오른다. <원왕생가>에서는 극락으로 가는 길잡이가 아닌가. <정읍사>에서는 어떠한가. 멀리 간 임의 둘레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우리들 의식 밑바탕에서 늘 우리의 영혼에 등불이 되어 잊혀지질 않는다. '달'이란 땅덩어리란 뜻도 되며 높고 크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지구의 또 다른 모습이며 해의 되비침판이 되기도 한다. 기실 따져 보면 달은 지구에 달린 한 별덩이일 뿐인데. 벽에 물체를 '달다(懸)'의 '달'은 하늘에 뜬 달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엄장-장엄'을 풀이하였거니와 <원왕생가>의 지은이는 광덕이나 그의 처가 아니라 엄장(嚴莊)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바, 무애가를 지은 원효, 무량수불이 된 박박(朴朴)의 경우는 하나 같이 뒤에 깨달은 이가 앞에 깨달은 의상(義湘)이나 부득(夫得)보다 뉘우치면서 절실하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결국<원왕생가>의 지은이는 엄장이란 유추가 가능하다. 하면 광덕(廣德)에 드리우는 뜻은 무얼까. 덕을 널리 베풀라고 풀이하면 어떠할런지. 나막신이든 짚신이든 신이나 만들어 팔면서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부처님의 길을 지극정성으로 닦아 극락으로 갔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신발이 없고 자기보다도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먹거리나 입을 거리를 나누면서, 부처님의 진리를 행함에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먼저 그의 가족사항을 보면 아이를 낳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살이를 하지 않은 점이다. 타고난 저마다의 본능이 다 있는데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삼가하고 정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원초적인 본능을 삼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끝 없이 먹고 마시며 성적인 충동에 이끌리어 가고자 하는 충동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광덕의 거룩한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선 이가 바로 그의 아내였으니 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가 아닌가. '베풀다'는 우리말은 엄청난 속내를 갖고 있다. '베를 풀다'가 굳어진 말이다. 여기 '베'란 무엇인가. 말할 것 없이 입을 옷이며 먹거리가 됨이 아니던가.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이른바 덕(德)을 베푸는 것이다. 목 마른 이에게 물 한모금, 배 고픈 이에게 한 그릇의 밥이 갖는 의미는 괜찮게 사는 이들에겐 하찮은 일일 수도 있다. 그건 그렇지 않다. 피가 모자라 죽어 가는 이들에게 피 한 방울은 꺼져 가는 등불의 기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살기에 바빠서 관심이 무관심일 뿐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란 한정되어 있기 마련. 그래서 신(神)은 누구에게나 빛을 던져 주신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저 푸른 하늘에 해님과 달님은, 별님은 정답게 살라 한다. 나누며 함께 서라고 하신다. 광덕이면 엄장이니까.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마음의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대숲에 바람이 일 때면 도림사(道林寺)의 뒤뜰에서 들리는 소리다. 무슨 일이 있기로서니 대나무 밭에서 사람의 소리가 난다는 말인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48대 경문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진 것이다. 마치 나귀의 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임금의 머리를 만지는 이만이 현장을 보았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기어이 살아 남을 수가 없음을 눈치 챈 복두장은 속으로만 끙끙거리다가 나이 들어 죽기 전에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의 비밀을 털어 놓은 것이다. 흔히 일러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충동에서 말을 아니 하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일어난 일.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마침내 대나무를 다 베어 내었다.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더니 소리가 달라졌다. '임금님의 귀는 길다'고. 말을 하는 존재로서의 상징적인 부분이 입과 귀이다. 입으로는 말을 하고 귀로는 말을 듣는다. 행동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말은 대용자극이요, 대용반응이어서 행동을 불러 일으키는 행위 개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리상징으로 볼 때 '귀'란 무엇일까. 중세 문헌에서 '귀'는 복모음이었기에 '구이'로 발음이 된다. 구이는 '굿이→구시→구이'의 과정을 거쳐서 쓰이게 된다. 말의 짜임새로 보아 '굿이'는 구덩이나 굴을 뜻하는 '굿'(증수무원록1.42)에 사물이나 사실을 드러 내는 접미사 '이'가 어우러져 된 말이다. 하면 귀란 무슨 굴이며 구멍이라면 어떤 구멍인가. 다름 아닌 소리가 담기는 구멍이란 뜻이다.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담기는 구멍. 아무 것도 아니면서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불알과 귀바퀴, 귓구멍이 합하여 귀라 이른다. 우리 몸에는 많은 구멍이 있다. 땀구멍에서부터 코구멍, 눈구멍, 목구멍, 똥구멍 등 실로 많은 구멍이 있어 이를 통하여 드나드는 물질이 있으므로 우리의 목숨살이가 가능하지 않은가. 고려수지침술학에서는 우리 몸에 바늘을 꽂는 구멍을 경혈이라 해서 360여의 구멍을 보기로 모임 들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자전하는 횟수와 다르지 않음도 우연한 일이 결코 아니다. 일러 환경결정론이라 하여 환경과 사람의 걸림을 중시하기도 한다. 지구 위에서 사니까 돌아 가는 지구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의 몸은 숨을 쉬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소리가 담기는 소리 구멍. 그래서 바른 말을 떳떳하게 하면서 살 수 있는 누리. 하면 자유와 평화가 꽃피는 홍익인간의 마을이 될 것이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될 것이구먼. 파우스트는 눈이 멀고 귀가 멀면서부터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고 하늘의 빛을 보게 된다. 어버이에게서 자연의 귀를 물려 받았는데 이제 하늘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우리는 갖도록 해야 한다. 같은 소리이면 같은 뜻으로 받아 들을 수 있는 한 겨레의 듣기 훈련을 갈고 닦아야 한다. 저 높은 곳에의 바람과 믿음을 가지고 귀를 열자. 열린 누리를 만들어 봅시다. 처용의 노래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서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구나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해이지만 빼앗아 감을 어찌 하리오 (처용가)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세상에 그래 어느 사내가 눈 앞에서 제 여편네가 다른 이에게 능욕 당하는 꼴을 보면서 한탄만 하고 있담. 그것도 노래를 부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쯧쯧). 마음이 착한 탓에 끝 없이 용서하기 때문만은 아닐 터. 왜 그랬을까. 그럼 안 되는 줄 알면서. 얘기인즉슨 이러하다. 산과 땅의 신(神)이 장차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어 망할 걸 미리 알고 이를 춤으로써 왕에게 알리었으나 사람들은 이에 별로 마음씀이 없었다. 오히려 깨닫기는커녕 이는 아주 좋은 징조라 하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에만 빠졌으므로 드디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라 한다. 시대는 달라도 연극의 겉모양이 조금씩 다른듯이 보인다. 옛적에는 노래와 춤, 문학이 한테 어울려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었다. 하면, 처용이 추었던 춤은 당시의 어지럽고 힘든 상황들을 노래에 담긴 가락으로 그리 하면 안된다는 속내로, 미쳐 날뛰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 선 것은 아닐까.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에 갔을 때, 산신과 땅신은 물론이요, 용이 나타났다. 용은 곧 바다의 신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옛말로 용은 '미르·미르기'(훈몽자회)로 불리워진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이들을 일컬어서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적고 있음을 보아 용은 물을 다스리는 위대한 지배자였다. 이렇게 용에 대한 숭배는 농경문화에서 물이 아주 중요한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점치는 일관(日官)의 예언 산신과 땅신은, 바다의 신은 춤을 추는데 왜 사람들은 보도 알도 못하고 점치는 일관만이 춤을 보면서 그 뜻을 알아차렸을까.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거니와(視而不見) 신이 주는 계시를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눈이 먼 이가 앞을 볼 수 없듯이 향락에만 빠진 이들이 앞으로 다가올 겨레와 나라의 어려움에 관심이 없을 건 뻔한 일이요, 무얼 들어도 들릴 까닭이 없다(聽而不聞). 헌강왕은 몹시 애가 탔다. 동해의 용신이며 땅신, 산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으나 힘이 미치지 않았다. 단 몇 사람의 옳은 생각과 움직임이 없어 나라가 기울어진 것은 동서고금에 왕왕이 있던 일. 이 어찌 헌강의 시대뿐이었겠는가. 왕은 생각했다. 이다지도 나라가 어지럽고 왜적의 군침 넘김이 심한 것은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이윽고 왕은 오늘의 대학에 맞먹는 국학(國學)에 나아가서 박사들에게 경전 풀이를 들으며 함께 토론하기도 한다. 관심의 주요 대상은 올바른 나라 다스림의 길이었을 게 뻔하다.한편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나라의 안녕과 겨레의 번영을 위하는 믿음으로 황룡사에 나아가 불경을 듣기도 하였다.때로는 만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멀리까지 시골 나들이를 하였으니 울산 개운포(開雲浦)에 간 것도 흩어진 사람들의 민심을 모으고 무엇인가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더러는 농사철을 맞이하여 여름지이를 북돋우기 위하여 여러가지 민속놀이에 자리를 함께 하여 관심을 보이는 헌강왕. 어느 신하 아뢰기를 '백성들이 먹고 입을 게 족한 것이 모두 임금님의 덕'이라고 한다. 왕은 이에 대하여 '그건 당신들의 덕이지 어찌 내 덕이겠소'라 한다. 기울어진 나라의 흐름을 되살리기에 있어 헌강의 정성과 힘이 채 미치지를 못하였다.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나라의 꼴이란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요, 십여 걸음의 앞을 못 보고 사냥꾼 쪽으로 달려가는 코뿔소들의 행진 바로 그것이었다. 처용이 춤을 춘 것이나 왕이 몸소 땅과 바다신에게 제사를 올린 건 모두가 나라와 겨레의 평안함을 빌었던 일. 그러니까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해서(樂神) 복을 받고자 하였다(장진호, 1989, 신라가요의 주원성 연구 참조). 인구어에서도 페스티발(festival)은 '신을 즐겁게 한다'는 데에서 말의 뿌리를 찾는다. 어찌 노래와 춤뿐이리오. 때로는 꽃다운 처자가 이바지의 속내가 되기에 이른다. 이바지를 드릴 때는 반드시 주술적인 말을 한다. 말 속에는 신과 서로 통하는 거룩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으며 마구 바꾸기도 어렵게 된다. 이르러 말은 곧 영혼-언령설(言靈說)이라 한다. 그러니 홍수가 난 뒤에 가래로 보를 막아 보니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 예고된 시련 헌강왕이 개운포에 갔을 때 동해 용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가. 동해의 용은 구름과 안개를 일으켜 헌강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이 게 헌강이 겪어야 할 시련의 징조가 아니던가. 한편 춤과 노래로서 산신(山神)들이 예언한다. 마치 맥베스의 세 마녀처럼 말이다.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고. 슬기로운 이들은 있으나 다 도망치고 없으므로 나라는 마침내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는 얘기다. 굿판에 구경 간 사람이 굿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눈독 드린다고 산신의 춤과 노래에만 정신이 팔려 사람들은 흥겹기만 했다. 망할려면 무슨 일이 없겠는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하는 처용(處容)은 얼굴을 숨기기가 일쑤였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진정한 지도자가 안 보이는 일이 종종 있다. 처용은 어찌 보면 신과 교통하는 일종의 무당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이에 미치지 못함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물질만능이라. 덮어 놓고 돈만 생기면 그 무슨 짓거리라도 다 하려는 세상 아닌가. 가야 할 사람의 길을 벗어나 오로지 저 하나만 먹고 살겠다고 눈이 뒤짚힌 세월이 되고 말았다. 벼슬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돈 받아 챙기고 심지어는 나라의 국방이 걸려 있는 무기까지도 속임수가 끼어 들어선 검은 손들과 짜고 온갖 더러운 돈벌이를 하는 터. 이러고서야 무슨 통일을 한다고 사설을 풀어 댄단 말인가. 마음이 없으면 올바른 부처의, 예수의, 공자의 말씀이 제대로 들어 올 까닭이 없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일렀으나 문제는 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바르지 못한 곳에 그 무슨 더불어 사는 홍익인간의 꿈이 이루어질까. 우리 겨레는 운명지워진 한 핏줄의 목숨살이들이다. 홍익인간이란 멀고 큰 그리움을 위하여 함께 서는 길밖에.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금란굴과 지모신(地母神) 금란굴 돌아 들어 총석정에 오르니 백옥루의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 있구나. 공수의 솜씨인가 귀신이 만들었을까. 알 수 없는 육면상은 무엇을 형상했나.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빼어난 통천(通川)의 금란굴이며 총석정을 그리고 있다. 이쯤의 경치이고 보면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송강 정철이 관동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관동별곡'의 한 마디이다. 금란(金欄)이라,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치마 저고리를 걸친 하늘 나라의 선녀들이 사는 데라고나 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통천 부분을 보면 금란굴에 관한 안축(安軸)의 글이 소개되어 있다. "통주(통천)의 남쪽에 민둥산 봉우리가 하늘의 모습처럼 둥글게 드리웠구나.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봉우리의 절벽엔 한 굴이 있다. 넓이는 가히 칠팔척이 되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구나(深不可測). 안개가 어린 듯하여 늘 어둡도다. 바람이 불면 놀란 듯 파도는 일어 진실로 가까이 갈 길이 없어라." 이야말로 관음보살이 사시는 곳이 아닌가. 지성으로 빌면 관음의 진면목이 나타나 벽면에 삼삼하고 푸른 새는 날아 신령하기 그지 없어라.(작은 배로 다행히도 굴속에 이르러 보니) 바위에 그려진 모습들이 황금색이어서 마치 가사장삼을 금으로 만들어 입은 관음보살이 웃는 듯 앉아 있나니 연화대가 예가 아닌가. 그렇다. 이는 진실로 부처님의 나타나심이니 존귀하게 받들어 마땅하도다(尊敬則可矣). 마침 내가 굴에 갔을 적 푸른 새가 굴속으로 나명들명 하였다. 뱃사람이 이르기를 이는 바다새라 하였으나 이는 필시 관세음이 응하신 드러냄이라. 굴도 굴이려니와 푸른 새가 내 마음을 흔드는구나. 세상 사람들이 벼랑의 무늬를 아름답다 하여 이를 관음의 모습이라 함은 잘못된 의혹에 빠졌음이라. 어떤 이는 글로 하였으되 바닷가 절벽에는 굴이 깊어 사람들은 이 굴이 관세음의 나타남이라. 나르는 푸른 새의 깃은 비단(錦)과 같다. 게다가 보일 듯 안 보일 듯한 바위 색은 금빛이어라. 이를 보는 이들은 다 관음이 나타남이라고 말 한다. 지금도 어리석은 이들은 헛되이 관음을 찾는구나. 물색에 어리는 모습을 보고자 하나 오히려 밝은 달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비추나니." 흔히 땅의 모습이나 보람을 들어 거기에 음양에 따라 성(性)을 부여한다. 이르러 음양구조라 한다. 생김새로나 분위기로 보아 금란굴은 여성이요 태음의 신이 다스리는 어둡고 신비한 공간이다. 한데 머리글에서 '총석정'은 바다 가운데 솟아버렸으니 이는 분명 남성이요 밝고 억센 양(陽)의 얼안이라고나 해둘까. 다시 같은 책(동국여지승람)을 보면서 줄거리가 되는 몇 부분을 떠올려 본다. 총석정은 통천군의 북쪽 18리쯤에 자리하고 있다. 수십개의 돌기둥이 떨기처럼 바다 가운데 솟아 모두가 6면인데 그 모양이 마치 옥을 다듬어 놓음과 같다. 4개의 정자가 바닷가에 있으며 총석(叢石)에 가까우므로 총석정이라 하였다. 세간에 전해 오기로는 신라 때 화랑도였던 술랑·남랑·영랑·안상 등이 이 곳에 와 풍류를 즐겼으매 4선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짐작하건대 금란굴의 굴상징으로 말미암아 통할 통자 통천(通川)이 된 게 아닌가 한다. 별도로 부르는 이름에 금양(金壤) 금란 금뇌(金惱) 통주 휴양(休壤)이라 함도 어떤 걸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 흔히 땅이름에서 굴 곧 구멍은 여성신으로, 물신으로 표상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농수산의 생산을 맡고 있는 지모신이란 말이 된다.이와 관련한 보기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금성(金城)과 어머니 금성에 가을이 드니 수 놓은 비단보다 좋다네 돌자갈밭에도 곡식은 끝 없어 행정구역이 바뀌어 지금은 김화에 합해졌지만 고구려 때만 하여도 어엿한 군(郡)이었다. 물론 뒤로 오면 현(縣)이 되고 다시 금성면이 되었지만. 금성은 본디 고구려 적에는 모성군(母城郡) 혹은 야차홀(也次忽)이었다. 같은 땅이면서 그 이름이 달라졌을 때 한자 또는 한글의 맞걸림- 대응을 찾아 땅이름의 내력을 찾는 일이 흔히 있다. 여기서 금(金)-모(母)의 걸림은 야차(也次)에서도 찾아진다. 그것은 야차-어시(母)의 풀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당시만 해도 터짐갈이 소리인 치읓이 마찰음(ㅅ)으로 파악되는바 야-여(어)의 '어'를 합하면 '어시(母)'가 됨을 알 수 있다. 쓰이는 글자가 다를 뿐 소리값으로 보아 '금-어머니'의 보기들은 다른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금호(琴湖)와 금물(김천)이 그러한 경우이다. 대동지지를 따르면 금호강의 뿌리는 영천의 모자산(母子山) 일명 보현산에서 비롯한다. 자료에 따라서는 금호강의 '금호'는 바람이 불 때 갈대에서 비파소리가 난다고 하여 금호라고 풀이한다(경북지명유래총람). 하지만 금호가 어디 대구뿐인가. 진주의 금산면에도 창원의 동면에도 그 밖의 고장에서도 금호가 있음은 땅이름 풀이에 의심을 품게 한다. 한자의 옛 소리를 칼그렌의 <중국고음사전>에서 보면 '금 검 감(錦 金 今 琴 儉 甘)'은 거의 같은 소리로 난다. 한자로 우리말을 적음에 있어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어 적었으니 앞의 것은 뜻빌림(訓借)이요, 뒤의 것은 소리빌림(音借)이라 했다. 하면 금호의 '금'은 금성의 '금(金)'과 마찬가지로 땅 구멍(굴) 어머니신-지모신 믿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금산(김천)의 경우를 살펴보자. 금산의 옛 고을은 어모(禦侮)현이라 부른다. 또 달리 금물(今勿) 감물(甘勿) 혹은 음달(陰達)이라 했다(대동지지). 이를 간추리면 '금-어머니(禦侮)'의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사투리로 보면 어머니(전지역) 어무이(예천 의성 선산 칠곡 고령) 어머이(횡성 원주 홍천) 엄마(강원 전남북 예천 포항) 어메(군위 김천 금릉) 옴마(칠곡 대구 달성 경산 함안) 옴매(통영 충무) 오매(진안 무안 김천 정읍) 오메(군위 김천 고령)와 같은 말이 쓰인다. 지모신 곧 어머니와 같은 생산신 숭배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오르면 곰토템 즉 곰신앙에서 그 밑바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어 자료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곰'이 고마로 드러난다(熊津고마나루). 고마는 그 속성으로 보아 아주 경건하게 흠모해야 할 대상으로 떠오른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신증유합>).곰신앙은 우리나라뿐이 아니고 몽고와 시베리아를 에워싼 북쪽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던 원시 신앙이었다. 일부 알타이 말에서는 지금도 '곰신-조상신-영혼'의 뜻으로 쓰이고 있음은 물론 곰신앙의 문화적 실증을 보여 주는 셈이라고 하겠다. 곰과 우리의 역사는 어떤 걸림이 있는가. 아다시피 삼국유사 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에 곰과 호랑이가 다투어 사람되기를 힘쓰다가 마침내 곰은 사람의 몸을 입어 환웅을 만나 단군을 낳게 된다. 단군왕검의 '검(儉)'은 고대 한자음으로는 '금'이라 하거니와 결국 '금-'계통의 땅이름은 새롭게 개척한 청동기 문화를 드러낼 뿐 아니라 원시신앙이었던 곰신앙을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곰(금)'의 어머니신 상징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아니하다. 경상도의 웅천(熊川)은 웅기(熊只)에서 비롯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웅신(熊神)으로 이어지며 이는 본디 금주(金州)에 속하는 고장이었다. 마주걸림을 간추리면 '금(金)-웅(熊)[神]'으로 뭉뚱그릴 수 있다. 이는 충남의 공주도 그러하다(금강(錦江)-웅천(熊川)(고마나루)-공주(公州)<대동지지>). 이제 남은 건 '금-엄(어머니)'의 관계다. 알타이말에서 기역(ㄱ)이 말의 첫소리 혹은 끝소리에서 약해져 떨어지는 현상을 참고로 하면 '금(곰)→흠(홈)→음(옴)/검(굼)→험(훔)→엄(움)'으로 그 소리가 바뀌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의 시골말 '옴마 오마니 엄마 움마'는 바로 같은 말들이다. 어머니는 생산의 바탕으로 굴이요, 물이다. 땅과 물을 잘 가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의 축복을 누린다. 금성을 달리 통구(通溝 通口)라 하며 물들이 고장이라 하였다. 물과 땅을 경건하게 믿고 이용하며 살아 갈 때 역사의 능선을 타고 시련을 겪는 우리들에게 지모신은 늘 함께 하시리라.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3. 생명의 말미암음 고향의 봄은 어디에 봄은 왔는데 꽃은 피는데. 이 좋은 계절에 우리들의 고향이 시들어 가고 있다니, 한 해가 다르게 빈 집이 늘어 나고 정들여 살던 마을은 한산해 선생님의 학교종도 들을 수가 없게 된 실정.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게 마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회지의 뿌리는 곧 시골 마을이다. 그 뿌리가 메말라 죽어 간다면 무성한 잎새나 소담스러운 꽃이며 열매란 애시당초 바라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농촌 마을에는 검은 구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께는 아주 귀에 설은 우르과이라운드니, 그린라운드니. 분명한 것은 생산비에도 미칠까 말까 하는 쌀값이며 봄만되면 어김 없이 뛰어 오르는 공산품 값이며 공공요금. 영농규모가 클수록 별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바에야 농사 그만 두고 도회지로나 나가보자.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해서 때로는 마을 전체가 비기도 한다는 소식도 들려 온다. 그럼에도 도회생활에 오랜 경험을 한 이들이라면 시골의 풋풋한 흙내음과 사람들의 순박한 인심을 그리워 한다. 벗어 나고 싶어 한다. 저 얽히고 설킨 도회지의 생활을. 마음의 고향이 늘 푸른 모습으로 있어 주기를 바란다. 본시 농촌과 도시가 다르지 않다. 작은 마을이 자꾸 모이면 도회지가 아닌가. 촌도(村都)가 한 몸이라. 몸이란 '모음'의 줄임말이다. 몸은 여러 부분이 모여 들어 살아 간다. 마찬가지다. 자연부락 단위로 하든 협의 기구별로 하든 서로가 고리를 지어 믿고 마시며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 삶의 터전을 가꾸어 보면 어떨까. 반상회 모임에서 일터에서 시골마을의 생활 정보를 알리고 도회마을의 정보를 알고. 해서 우리가 그리는 고향의 봄을 되찾는다면 얼마나 좋으리. 황소 개구리 뱀 잡아 먹는 개구리라. 어디 그럴 수가 있을까. 물이나 뭍에서 스스롭게 살고 있는 황소 개구리에 대하여 얼마전 방송 한 일이 있다. 마치 큰 고구마만한 개구리의 뱃속에는 잡풀들이며 물고기가 들어 있고 보통의 개구리가 아직 산 채로 있었다. 놀랍게도 크지 않은 뱀이 들어 있음은 참으로 드물게 보는 일. 흔히 뱀들은 쥐, 개구리며 새를 먹이 삼아 살아 간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황소 개구리는 대체 어디서 난 걸까. 멀리 바다 건너서 온 것인가. 그러하단다. 길러서 먹을 양식용으로 수입해 온 개구리란 풀이다. 막상 수입해 놓고 보니 사업성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결과, 황소들은 우리의 산과 들을 마구 뛰어 돌아 간 게 아닌가. 아직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농사철에 마을의 들을 가노라니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요란하다. 아들 손자 며느리가 다 모여 들었겠지. 한데 분명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같은데 꼭 황소의 울음소리 같은 게 논에서 난다. 이상하다 싶어 어느 날 해 질 어스름 해서 자세히 살펴본즉 바로 그 황소 개구리였다. 얼핏 보기에도 개구리라고 하기에는 좀 위풍이 있어 보인다. 개굴개굴 운다고 개구리라 했을 터. 울음소리로만은 개구리로 가늠 하기엔 어려울 듯하다. 잘못하다간 저 놈의 황소 개구리가 우리 마을의 개구리며 물고기, 그것도 모자라 뱀까지 다 먹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개구리는 왜 그리도 힘이 없단 말인가. 작은 고추가 맵다던데. 슬며시 약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돌을 집어 던지니 그자리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간다. 왠지 애처로운 느낌이 든다. 그도 살려고 태어 났을텐데 말야. 씁쓸하다. 마침 시주하라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신토불이(身土不二). 그렇다. 아무렴, 빼앗긴 들이 될 수는 없다. 먹거리며 옷가지며 자칫 우리의 얼까지 앗길까 걱정이 됨은 나 혼자만의 몫일런지.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3. 생명의 말미암음 울 안의 복숭아나무 엊그제 겨울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리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細雨)중에 푸르도다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움츠렸던 겨울을 보내고 봄이 어울어진 한 폭의 그림이라 하면 어떨까. 복숭아꽃은 옛부터 우리의 산과 들에 스스롭게 자라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안의 도화나무라. 다른 집이나 문 밖의 복숭아 나무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그 집에 사는 처자들이 바람이 남을 경계한 것이다. 하필이면 복숭아꽃뿐이랴. 환경에 따른 유혹이나 충동에 휩싸이지 말라 함이 아니겠는가. 담 대신 나무나 풀 따위를 얽어서 집을 둘러 막거나 어름을 가르는 걸 울 또는 울타리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우타리(하동·장성·나주) 우따리(거창·양신) 울다리(함안·창녕) 울딸(안동·영천)이라고 한다. 울과 우리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우리 안에 짐승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소·염소·돼지·닭울이 된다. 얼안의 크기로 본다면 울과 우리는 다르지만 한정된 공간을 드러냄에는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경우, 너와 나를 함께 이를 때 쓰는 우리와는 어떻게 되는가. 더러 얼안을 가리키는 말이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는 일이 왕왕 있다. 당호(當號)를 쓴다. 신사임당이 그렇고 택당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일정한 얼안이 곧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경우다. '그대 있으매'의 그대도 마찬가지. 본디는 '그 곳'의 뜻이지만 '그대'는 오늘날 아름다운 운치까지도 드러내는 대명사로 쓰인다. 일정하게 한정된 우리 안에 짐승들이 새끼를 치고 살듯이 너와 나를 함께 이르는 '우리'는 사람을 이를 경우 공동운명체요, 겹셈개념이 된다. 흔히 언어의 역사에서는 인칭대명사의 빈 자리에 들어가는 말을 일러 기움법에 따른 말이라 한다. 일정한 얼안에 사는 이들, 더욱이 혈연·지연·학연으로 얽혀진 사람들을 종종 '우리'라 한다. 마치 당호나 택호(수원댁등)가 그 사람을 부르는 말이 되듯이 말이다. 그럼 우리 또는 울의 바탕뜻은 무엇일까. '우리'에서 음절이 줄면 '우리→울'이 되니까 소리의 마디 짜임은 '울'이나 '우리'모두가 같다. 음절의 끝소리가 바뀌면 '울-ㅇ-웃'이 되는 데는 옛말의 우(ㅎ)(석보상절6.17)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끝소리 (ㅎ)은 말이 변하는 길목에서 여러갈래의 소리로 바뀌어 쓰이는 경우가 있으니 '울-웃-ㅇ-우(ㅎ)'이 모두 하나의 마디에서 새끼를 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특정한 곳에 사는 이들이나 안채가 몸이라면 그 몸 위에 옷처럼 걸쳐 두른 게 우리(울-웃-우(ㅎ))란 걸림이 된다고 보면 어떨까. 우리(울)와 걸림을 보이는 말의 겨레로는 논물이 빠지도록 뚫은 '우리구멍·우리네·우리다·우릿간' 등의 말들이 쓰이며 한자말까지 한다면 더 많은 낱말의 겨레들이 있다. 기다림의 미학(美學) 달하 노피곰 돋으샤 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기야 어강됴리 ('정읍사'에서) 기다림은 때로 무지개처럼 피어 오른다. 기다리는 그 순간이나 마음은 기다림이 없는 삶보다는 아름답다. 멀리 떠난 임을 생각하는 처자가 밝은 달을 쳐다 보면서 임에게 행여 무슨 어려움이 없을까 노심초사 애틋한 그리움과 함께 기다림의 미학을 꽃 피운 <정읍사(井邑詞)>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얼마를 기다리다 못해 망부석이 되었을까(登山石而望之). 고려사에 따르면 장사하러 나간 남정네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는 밖에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달에 빌었다고 한다. 기다림은 믿음을 그 바탕으로 한다. <서경별곡>에서는 변함없는 믿음은 마치 구슬이 떨어져 깨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끈에 비유되고 있다. 구운 밤에 움이 터 오르도록, 옥으로 지은 연꽃 세 묶음이 피도록 비는 그 애틋함과 기다림. 어디 그뿐이랴, 죽음 뒤에 이르는 곳이 어딘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믿고서 바라는 신앙이 추구하고 찬송하는 공간과 영원무궁한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없다면 어떨까.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언어는 문화를 되비친다 하였거니와 기다림이란 말이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삶과는 어떠한 걸림이 있는 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사람의 슬기가 그리 펴나지 못했던 때를 떠올려 보자. 밖에서 일 하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시달리면서 먹거리를 마련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더러는 모진 짐승의 밥이 되거나 이해를 달리 하는 겨레들에게 잡혀서 죽기도 하였겠지만. 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다가 불운의 삶을 마무리한 사람들.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탈 없이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아내며 어버이의 초조함이 어떻겠는가. 옛 적 우리 선조들은 굴살이와 나무위에 둥우리살이를 했으니 나무기둥이나 굴의 어귀에서 일 나간 사람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두시언해 와 같은 자료에서는 오늘날 말의 기다리다를 '기들오다'로 적는다. 이 말은, 바탕이 되는 더 작은 단위의 말로 나누어 보면 굴살이문화와의 걸림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기들오다'는 말의 짜임새로 볼 때 '긷다'와 '오다'가 어우러진 낱말이다. 두 개의 낱말 가운데 '긷다'가 알맹이로 보인다.'긷다'는 우물이나 냇물 같은 데서 물을 퍼다가 그릇에 담는 동작을 이른다. 이를 다시 쪼개어 보면 '긷다'는 명사 '긷'에 동사의 씨끝인 '-다'가 얼러 붙어서 이루어진다. 그럼 '긷'이란 무엇인가. 훈민정음해례 등의 자료를 보면 기둥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긷爲柱). 그러니까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줄기-집으로 이르자면 기둥에 값한다고 하겠다. 기둥도 따지고 보면 긷에다가 접미사(옹∼웅)가 붙어 이루어진 말이니 모두가 '긷'에서 비롯한 말들의 겨레에 든다. 말이 갈라져 쓰이는 데에는 한 음절의 첫소리와 끝소리가 바뀌어 이루는 경우가 있으며 가운데의 모음이 바뀌어 낱말이 갈라지는 일이 있다. 긷의 경우 말의 끝소리 자음이 바뀌어 이루어진 형태로는 긷을 포함하여 '긷-깃-길'이 함께 갖는 의미상의 걸림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기다림과 보금자리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개성이 있듯이 소리마다 느낌의 모양 곧 음상(音相)이란 게 있다. 디귿(ㄷ)은 리을(ㄹ)에 견주어 안으로 굳어지는 느낌을 주고, 리을은 흘러 가는 물과 같은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한편 시옷(ㅅ)은 시끄러우며 이의 모양처럼 솟아 오른 느낌을 준다. 이와 걸림을 지어 긷-깃-길을 풀어보자. 긷(柱)은 보금자리-둥우리가 앉을 수 있는 굳건한 나무기둥이요, 받침이 된다. 받침은 반드시 흙이나 돌 위에 고정되면 될수록 단단해진다. 기둥 뿌리를 뺀다고 하거니와 기둥은 삶의 서식처인 보금자리의 뿌리요, 바탕인 것이다. 길(道)의 경우 중세국어에서는 길이·이자·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높이·구덩이의 통로·옷섶·따위의 폭 등과 같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었다. 본디 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길이가 밑바탕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광산구덩이 안의 통하는 길을 길갈래, 물건이 높이 쌓인 모양을 길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보금자리인 굴이나 나무기둥 위에 자리잡은 새둥우리 같은 깃으로 통하는 얼안이 바로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흔히 길 가는 나그네에 비유한다. 그렇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런저런 모양으로 일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천국으로 돌아간다. 해서 같은 길을 걷노라면 삶의 조건을 풀어가기 위하여 우린 다투며 때로는 엄청난 갈등이나 선택의 길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해 내기도 한다. 마치 그 길에서 아주 오래도록 홀로 온 차지라도 할 듯한 모습으로. 하루길 가노라면 돌부리를 차기도 하며 웅덩이에 빠져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필요도 없는 남의 짐을 지고 때로는 남의 등에 엎혀서 하루의 해가 지도록 길을 가야 한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의 길을 제쳐 놓고서 말이다. 이 길을 따라서 오가며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오늘날의 생기는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듯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심리·물리·생물적인 길에의 탐색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현대를 정보의 시대요, 전자시대라고 한다. 정보망의 오고감이며 전자회로의 모두가 다 길의 개념이 터를 내린 열매들이라고 할 것이다. 저승으로 감에 있어 그 곳이 지옥이든 극락이든 정해진 자신들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우리들의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긴 여로이기도 하지 않은가. 옳은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 제갈 길을 바로 걷지 않으매 우리의 삶터는 차츰 병 들어 가고 공동 선(善)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마치 자신이 걷는 길이 신의 부름을 받은 길인 것 같이 우리는 밝고 참된, 아름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면서 걸어 가는 거다. 길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붙이로는 길동무 길갈림 길길이 길갈래 길들다(같은 길에 들어서듯 친숙해지고 잘 따르다) 길속(특정한 공간이나 영역)등의 보기를 들 수 있다. 그럼 깃(巢)의 경우는 어떠한가. 훈몽자회 등에서는 새들의 집을 뜻하고 있지만 여러가지의 뜻으로 쓰이었다. 예컨대 짚이나 대싸리로 만든 둥우리·새 날개에 달린 털·짐승 우리에 까는 짚이나 마른 풀·차지할 자신의 몫 등이 다양한 쓰임을 보이고 있다. 분명 옛말글에서는 새의 집을 가리켰다. 새의 집은 나무가지나 숲속의 어느 부분에 둥지와 같은 모양으로 보금자리를 튼다. 진서(晉書)의 기록을 따르자면 우리의 옛 조상들인 동이족들은 여름에 나무 위에서 살았다(夏則巢居)고 한다. 즉 소거(巢居)살이를 하였으니 둥우리에 가까운 새집과 같은 '깃'이었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의 아파트들도 새집 같다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에게는 하늘을 날고 싶은 그리움이 늘 있었을 거요. 결국 새집이나 사람이 사는 나무 위의 집이나 모두 '깃'으로 드러낸 셈이 된다. 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사는 집이란 말과 깃은 어떤 걸림이 있는걸까. 집은 깃에서 옛말글에서는 명사에 동사화접미사(-다)가 붙어 동사가 되는 일이 많은데 '깃다'도 그렇게 볼 수 있다. 깃다는 본디 풀이 무성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말에서 갈라진 명사형이 '기슴'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기슴, 기심이 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입천장소리되기를 입어 지슴 지심이라고도 한다. 다시 이 말이 모음 사이에서 시옷(ㅅ)이 소리가 약해져 떨어지면 기음-김-짐의 형태로 말의 모습이 달라진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논이나 밭의 잡초를 매는 일을 김매기(짐매기)라 하는 걸 보면 본 바탕이 모두 풀에서 나왔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집과 고리 지어 김 짐을 좀 더 살펴 보자. 말의 끝소리 자음이 바뀔 경우, 같은 계열의 소리로 교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김(짐)의 미음(ㅁ)이 'ㅁ-ㅂ-ㅍ'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하면 '김(짐∼집∼(집:짚))'으로 말의 소리가 달라지면 곧 오늘날 우리가 쓴 '집'의 말꼴이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집을 짓다'고 할 때 구개음화 이전의 상태로 돌리면 '깁∼깃'이 되는 것이다.'집'은 나무와 풀로써 만들어 놓은 완성의 상태요 그 말미암음은 풀이거나 나무임을 알아 차리게 된다. 그 풀의 열매는 먹거리요, 그 잎이나 실감은 우리가 걸치고 다니는 옷감이 된다. 그 줄기인 나무기둥-목재들은 우리들의 집을 짓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풀숲은 생존의 터전이요 바탕이다. 이를 가꾸고 기르지 않을 때 묵숨살이들이 편히 쉴 곳이 어디인가. 삶의 보금자리인 영원한 피안의 집을 그리워 함은 기다림을 텃밭으로 한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3. 생명의 말미암음 금 캐는 마동(薯童)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마동방을 밤마다 안고가다 (백제 무왕의 '서동요'에서) 이상한 일이다. 전혀 터무니도 없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의 신세를 그르치다니. 얼굴도 없는 머리의 노래말로 허물 없는 선화공주는 마침내 귀양을 가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마동(童)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야기의 알맹이인 '마동'은 어떤 사람인가. 먹거리로서 '마'를 캔다고 마동으로 불렀다는 것. 그의 어머니는 서울-지금의 경주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았다. 어느 때엔가 못속에 사는 용과 가까이 해서 마동을 얻게 된다.이르자면 마동은 용의 아들인 셈이다. 흔히 향가에서 서동요라 하지만 마동의 노래로 읽음이 옳다. 마동이 하는 일은 마를 캐어다가 장에 팔아 어머니의 살림을 도우는 것이었다 '마'는 다년생의 덩굴풀로 자색꽃이 피어 산과 들에 폭넓게 스스로 살아 간다. 싹과 뿌리는 먹거리나 약거리로 모두 쓰인다. 뿌리는 특히 덩이 모양을 한다. 계림유사에서 흰 쌀의 일년 소비량이 한 집 단위로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먹거리의 절대 생산이 모자라는 것이다. 지금은 쌀이 남아 이를 관리하기에 정부살림의 일천억을 웃도는 돈을 쓴다고 하니 예와 오늘이 너무도 다른 느낌이 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옛 어른들을 다 나누어 드려 먹거리 걱정을 쉽게 풀 수 있으련만. 때에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있었으니 모습이 남 다르게 아름다웠다. 소문을 들은 마동은 아이들처럼 머리를 깎고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머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효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성난 왕은 끝내 바람 난 선화공주를 귀양길로 내쫓는다. 어머니 왕비는 공주에게 금 한 말을 남 몰래 주어 보낸다. 귀양 길에 나타난 마동은 자신이 일을 꾸민 사람임을 밝히고 서로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 둘이는 백제로 간다. 왕비가 준 금 이야기로 공주는 앞날의 꿈을 말한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마동은 기뻐하는 모습도 없이. 금이라면 자신이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많은 금을 캐어 놓았다고 한다. 마를 캐서 판 것은 물론, 금(金)을 캔 것이다. 공주는 금이 있는 곳을 알아 아버지의 궁전으로 보내자고 한다. 그러마고 마동이 대답한다. 따지고 보면 보통의 먹거리로서의 '마'가 아닌 '금마'를 캔 것이요, 삼국통일의 힘을 기르는 국부(國富)를 이룬 것이 아닌가. 마침내 마동은 용화산, 다른 이름으로는 미륵산이라 하는 곳에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이야기 해서 그의 힘을 빌어 금을 신라궁으로 하룻밤 사이에 보낸다. 이 때 공주는 편지를 어버이에게 함께 보낸다. 마동은 백제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게 되고 마침내 백제의 30대 무왕(武王)이 된다. 선화부인과 함께 용화산 절에 가려고 연못을 지나게 되었다. 난데없는 미륵불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부인이 미륵불을 보고 이 연못 자리에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마동이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한즉 대사는 하룻밤에 산을 헐어 연못을 메워 절터를 만들어 놓는다. 사랑과 금을 캔 사람, 마동 이름하여 미륵사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절터만 전해 온다. 용의 옛말로는 '미르'(훈몽자회)라 읽는다. 미륵에서 받침소리를 읽지 않으면 '미르'가 되니 결국 미륵사는 용절의 뜻을 드러낸다. 아울러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두가 불교의 지킴인 용신앙의 나머지 부처의 가르침과 미륵신앙을 소중히 하는 집단의식의 드러냄이라 할 것이다. '미르'에서 한 음절이 줄면 '밀'이 된다. '밀-믿-밑'은 한 낱말의 겨레로서 땅신과 물신의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믿음이 불교신앙과의 만남이라고 하겠다. 다시 '밀-물'의 관계를 보면 3을 드러내는 것으로 체(體)·상(相)·용(用)의 불교적 깨달음에 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땅이름에도 3이 '밀'로 적힌다(밀양-삼량진 등). 이는 우리의 삼신(三神)에 대한 믿음과도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환인 -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삼신의 신앙이 겨레의 뿌리 깊은 믿음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신앙의 터전위에 불교의 미륵신앙이 접목되어 신라를 부처의 낙원으로 만들어 보고자 했던 이상으로 승화된 것이 아닐까. 마동의 '마'는 몇 가지의 살펴 볼 거리가 있다. 소리로 본 마는 말마(馬)로도 적는다.익산의 옛이름이 금마(金馬)인것을 보면 여기 마와도 무슨 걸림이 있지 않나 한다. 본디 금마는 '금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신앙의 '곰'을 적은 것이다. 곰이란 말을 한자로는 적을 수 없으니 여기에 여러 가지 뜻을 부여해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유목생활을 마무리한 농경생활의 겨레들은 곰신앙의 동물상징을 거북(검)·말·용 등으로 확대 변이해서 받아 들이고 이를 떠 받친 걸로 짐작된다. 마경(馬經)에 따르자면 말의 조상이 용이니 용·말은 결코 다름이 아니다. 먹거리로서 '마'가 아닌 '금마'를 캔 마동은 그 뿌리 위에 신라와 백제를 함께 어우른 지도자였다. 마동은 먹거리로 마를 캠은 물론이요, 금을 얻었고 그 보다 더 귀한 선화공주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노래 한 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니 말 그대로 말속에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