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나라 사랑의 꽃, 무궁화여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이호우의 ‘개화(開花)’에서) 꽃을 보고 더럽다든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온 겨레의 가슴에 와 닿는 나라꽃에서라면 더욱 애틋한 느낌이 있을 법한 일. 무궁화꽃이 비록 뚜렷하게 아름답지는 않은 꽃일지라도 말이다. 무궁화라, 끝없이 피고 지므로 하여 모진 겨울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그 어디서나 흐드러지게 제 삶을 누리다가 스스로 사위어 간다. 조선왕조 고종 무렵에 칠곡부사로 나라일을 보던 한서 남궁억 선생이 선친들의 고향인 흥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때의 일이다. 고향마을에 배움터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서면 모곡리, 곧 보리울에 보리울 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 때 무렵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삼아 나라 사랑의 보람으로 하자는 뜻을 세웠던 것. 해서 보리울 학교에서 무궁화 어린 나무를 길러 온 나라의 학교와 교회, 혹은 사회단체 앞으로 보내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나라꽃으로 가꾸고 사랑하자는 집념을 편 게 나라꽃의 말미암음이 됐다. 꽃이란 말의 속내는 두드러져 솟아 나온 부분을 이른다. 얼굴의 코도 옛말은 '고'였으며 때로는 '곳(곶)'으로도 쓰였나니 코의 두드러짐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씨알 보존의 열쇠이며 자물통이 꽃이요 그에 따라 오는 게 열매라 하겠다. 겨레의 오래고 먼 그리움처럼 홍천에서부터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의 봄을 지폈던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어찌 시련이 없었을까. 3 1 기미 독립 운동 이후 일본의 사이또 총독은 마침내 무궁화를 없애고 벚나무를 심도록 명령했다. 보리울 학교인들 예외일 수만은 없었다. 관리들이 찾아 오면 뽕나무 밭이라고 속여서 어물어물 넘기곤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제 나라 땅에 나라꽃 한 그루 맘 놓고 가꾸고 아낄 수 없다니. 그러니 어쩌겠는가. 망한 나라의 백성이 겪는 그 고초야 더 물어 무엇하리. 목숨이 오고가는 마당에. "내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무궁화 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고 남궁억 선생은 이르셨다. 그래서일까. 800여 동학전쟁 때의 농민군이 마지막으로 외세에 맞서 싸운 곳도, 6 25 한국전쟁 때 몸으로 돌격, 적의 전차를 맞서 대거리 한 곳도, 월남 파병을 앞두고 훈련 중에 부하들의 안전을 위하여 터지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산화한 강재구 소령의 고향이 바로 넓은 내, 홍천이었던 것이다. 벌력천(伐力川)에서 홍천으로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듯 땅 또한 그러하다. 한데 땅이름이란 시대에 따라서 바뀌어 가기도 하는 것. 고구려 때에는 홍천을 벌력천(伐力川)이라고 했으며, 통일신라 때에는 벌력천정(停)이라 하여 군인이 상주하는 군영지가 있었다. 한산정에서와 같이 군인이 주둔하는 곳을 '정'이라 했다. 그 뒤 신라 35대 임금이었던 경덕왕(757)적에 벌력천이 녹효(綠驍)현으로 바뀐다. 여기 '효'는 경상도 현풍이 '현효'이듯이 정(停)보다는 좀 약한 예비군 겸 군사용 말을 관리하는 곳을 이른다. 그러나 고려조 태조 때에 접어들면서 오늘날의 홍천(洪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면 바뀐 이름 사이의 맞걸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눈에 뜨이는 건 먼저 '벌(버르)-풀(푸르)'의 걸림이다. 소리의 발달로 보면 옛적 우리말에는 거센소리가 없었으니 풀(푸르)이 불(부르)의 소리마디의 꼴이 된다. 하면 홀소리가 달라졌을 뿐 '벌-풀'은 같은 흐름의 소리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홍천강이 흐르는 넓은 벌판에 푸른 먹거리들의 향기로운 벼 내음이며 계절따라 갈아 입는 철옷을, 보는 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삶에의 용기를 돋우어 주기에 충분하다. 벌 곧 벌판은 산골짜기에 견주어 볼 때 넓고 크다. 하니까 넓을 홍자, 홍천(洪川)으로 풀이하면 어떠할지. 벌력(伐力)의 글자 풀이를 하자매 치는 힘 곧 국방력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한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는 아닐지라도 마한 진한 변한과 고구려 사이에서 혹은 성난 이리떼처럼 밀려 들어오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자매 힘을 길러야 막는다는 주요한 군사의 요충지임을 드러낸 것이다. 군사적인 가치는 물론이요, 먹거리 생산의 보금자리이니 이를 잘 지켜야만 했던 것. 게다가 원주와 춘천, 그리고 서울과 속초로 이어지는 활달한 교통의 모꼬지임은 홍천을 지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떠 올릴 수 있으리라. 마치 하늘을 스스롭게 날으는 새처럼 어느 쪽으로도 어렵지 않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벌-녹'의 맞걸림은 앞의 마디글에도 풀이한바 있는 '보리울(벌울)'에서도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재미롭다. 한자로 쓰면 모곡(牟谷)이라고 했거니와 이 또한 크다는 뜻이고 보면 넓다는 뜻의 홍천과 바로 맞닿는 뜻의 줄기가 있다. 보리(벌)라 함은 신라의 땅이름 또는 백제의 땅이름의 접미사로 쓰이는 보기가 상당히 있다. 서라벌 밀벌 소부리 니릉부리가 그런 경우임은 다 아는 터. 여름지이가 산골에서 물이 있는 벌판으로 비롯됨에 따른 자연스런 마을 이루기의 한 흔적이라 하겠다. 상서로운 학이 울고 넘는 우령(羽嶺) 산의 모양이 공작처럼 생겨서 공작산일까. 수풀 우거진 산골짝에 속세를 등진 해탈한 성자처럼 서있는 수타사(水墮寺)가 한겨울 눈 속에 외로워 보인다. 요즘 종문의 개혁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응봉산(鷹峰山)에서 흘러 내린 덕치천 냇물이 공작산의 공작골과 함께 어우러져 수타사를 감돌아 이내 홍천강으로 든다. 저승으로 간 소헌왕후 심씨를 잊지 못해 그의 명복을 빌어 주려고 둘째 아들 수양대군에게 시켜 지은 세종임금 적의 '석보상절'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세조 임금이 된 수양은 1458년 '월인천강지곡'을 어우러 '월인석보'를 만들었는데 '용비어천가'와 함께 수타사의 사천왕상의 뱃속에서 나왔고 이를 갈무리하고 있다. 물론 절을 고치던 중의 일이었다. 절은 신라 성덕 임금 시절(708)에 원효 큰스님이 지었는데 본디 이름은 일월사(日月寺)이더니 뒤에 수타사(水墮寺)로 했다가 다시 취운대사가 조선왕조 고종 무렵에 목숨수자 비얄타자 수타사(壽陀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니 내력이나 빼어난 경치만큼이나 이름도 야단스럽다. 수타란 결국 부처님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뜻이렸다. 절에 보관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한 부분을 살펴 보자. "팔방여래(八方如來)와 함께 내신 소리를 듣자옵고 세상이 모두 진동하나니 다보여래와 함께 한 곳에 앉으신 상(相) 보옵고 모든 나라가 기뻐하나니" ('월인석보' 319에서) 남국을 그리는 공작새이듯 산이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듯. 홍천에는 비교적 새와 걸림을 보이는 땅이름이 상당히 있다. 학명루며 학교(鶴橋)가 그러하며 공작산과 응봉산 또한 그러하다. 어디 그뿐인가. 고개 중에는 깃우자 우령(羽嶺)도 이에 든다. 우령-깃고개에는 옛부터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상당한 암시를 준다. 학이 객관 남쪽에 날아와 모여 있다가는 이 고개를 날아 구름과 함께 날아 넘는다. 그 때마다 고개에는 새깃 털이 많이 떨어졌다 하여 깃고개 우령이 되었다는 것. 다리를 다 만들었을 때 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학다리. 그로 말미암은 학명루(鶴鳴褸). 학은 상서로운 새라고 하거니와 홍천은 그렇게 아름답고 길한 고장인가 보다. 한데 군을 대표하는 새가 '까치'로 되어 있다. 아마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니까 상서로운 새로 보아서 그랬는지. 글쓰는 이의 생각이라면 역사성을 살려서 '학(鶴)'으로 하면 어떨까 한다. <훈몽자회>에 하였으되 하늘을 나르는 모든 날짐승을 '새'라고 하였다. 응봉산의 '응(鷹)' 또한 다를까. 새가 되긴 마찬가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 든 잠재의식 속에는 많은 새들이 끝없이 날고 있다는 심리학의 얘기. 우리나라의 땅이름 중에는 새와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공간으로 보면 '사이'지만 민간신앙으로 보면 우리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저승새의 구실을 한다는 게다. 예서 제서 피다 지는 산유화만큼이나 많은 새들이 공작산을 날아 절간의 풍경소리와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이다. 팔봉산은 본디 감물악(甘勿岳)이었으니 땅이름 자료를 따르면 여덟 봉우리의 팔봉산(八峰山)은 본디 '감물악(甘勿岳)'이었다. 보리울 벌판을 적시우는 홍천강의 그 모습이 확실해 지기로는 팔봉천과 구만천이 만나면서부터이다. 산이 '감물악' 혹은 '감악'이라면 팔봉천 또한 감물내 혹은 감내(甘川)가 된다. 한반도에는 감(甘)-계의 냇물이나 산이름이 상당히 있다. 횡성의 감내가 그렇고 충청도 대전의 갑천, 경상도의 김천에 감내(甘川)가 그러하다. '감(갑)'은 가운데 신(神)을 이른다고 하였으니 보리울로서는 뿌리샘 중에 주요한 내가 된다는 뜻으로 풀면 어떨까 한다. 들과 물을 아끼고 간수함은 그게 우리 삶의 가능성이며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벌이나 산을 휘돌아 흐르는 곳의 땅모양이 코처럼 툭 튀어나온 모양이 꽃같다 하여 홍천을 달리 화산(花山)이라 했다. 홍천에는 새와 함께 꽃과 걸림을 보이는 땅이름이 여럿 있다. 꽃뫼(花山) 꽃마을(花洞) 꽃시내(花溪)가 그러하다. 그래서 한서 남궁억 선생의 마음 속에 나라꽃을 무궁화로 해 보겠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일었는가. 그래서 꽃같은 나이에 농민의 목소리를 높이고 군인의 길을 지켜 나라가 어려웠을 때 꽃잎지듯 가버렸을까. 진달래를 군꽃으로 하였거니와 못다 핀 나라지킴의 넋인 양 온산에 진달래로 활활 타오르는가. 비가 내린 봄들녁에 보리울에 밭갈이틀의 소리가 요란하다. 때로 산골짝에는 봄일에 힘 겨운 소를 모는 산유화의 노래가 메아리지고. "산유화여 산유화여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도록 필역하게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죽음의 소리 보람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유치환의 '바위'에서) 죽음과 삶의 뿌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 이름하여 윤회전생의 풀이다. 몸의 활동기능이 완전히 멈추는 동작과정을 '죽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비유적으로 쓰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다·(그림등에)생기가 없다·상대에 잡히다(경기에서)·불 꺼지다·맛이 가다'의 뜻으로 쓰인다. 대자연의 죽살이길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을까. 죽음처럼 절박한 한계상황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죽음에 대하여 진지한 자세로 아니 가장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종교는 없다. 죽음을 새로운 다시 삶에의 이정표로 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는 시점으로 본다. 가령 천국이라든가. 극락과 같은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말은 소리상징이며 소리는 말을 쓰는 겨레들의 문화를 되비친다. 이제 죽음이란 소리상징이 어떠한 문화터전 위에서 쓰였으며 죽음에 대한 배달겨레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일까. 돌그릇을 쓰던 신구석기 시대에 우리 한아비들은 혈거 곧 굴살이를 하였으며 나무 위에서 새의 둥우리 같은 데에서 살기도 하였다. 중국의 진서(辰書)에는 동이족들의 생활에 대하여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겨울에는 굴에서 살았다'고 풀이한다. 다시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흙으로 무덤과 같이 둥글게 만든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이르기를 부족장의 경우 사다리 9개가 들어 갈 정도의 깊은 굴속에 자리잡고 살았다는 거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흙집 또는 공통주택들도 옛적의 굴살이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지하철도 생각하기에 따라 부족장의 집에서 크게 다를 바가 있겠는가. 태어 나 사는 곳이 흙과 돌로, 나무로 이루어진 데라면 바로 그 자리에 돌아 가 죽음의 누리로 들어 간다. 하긴 우리들이 태어 난 어머니의 태반도 굴속이라 해서 뭐 이상 할 것이 있을까. 움직임을 드러내는 '죽다(死)'는 말의 짜임으로 보아 어간 '죽'에 어미 '다'가 녹아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말의 줄기인 '죽'이 가리키는 속내는 무엇인가. 서재극(1980,중세국어 단어족 연구)에서 '죽'은 '기운이 떨어지고 앞으로 기운다'는 '숙다'의 '숙'에 그 뿌리를 둔다고 했다. 뜻이나 소리로 보아 그러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소리의 경우 옛적에는 파찰음이 없었기 때문에 '숙→죽'의 변천과정이 풀이될 수 있다. 그럼 그 뜻은 어떠한 것인가. 또 '기운이 줄고 앞으로 기울어 지는' 게 곧 죽음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글쓴이는 '죽다'의 '죽'이 우리가 살다 돌아 가는 '땅'과 어떤 걸림이 있지 않을까 한다.형태로 보면'둑·디'에서 비롯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먼저 '둑'의 경우를 살펴 보자. '둑'은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언덕을 이른다. '둑'의 원형은 흙으로 만든 무덤과 같은 집이요, 죽은 뒤에 돌아가는 공간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사투리말의 쓰임을 보아 '둑→죽'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둑→방죽(서천·함양) 뚝(많은 지역). '둑'의 모음이 바뀌어 이루어 지는 낱말겨레로는 '독(궤·항아리)덕대(시렁)'를 들 수 있다. 옛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오는 걸 보면 뼈항아리 곧 골호(骨壺)가 있는데 일종의 '독'에 해당하는 것이다. 항아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니까. '덕'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무더운 여름날 나무 위에 덕대를 매어 놓고 살았음은 필자도 생각이 난다. 덕대는 풍장(風葬)을 지낼 때에도 쓰인다고 한다. 조상이 돌아 가면 나무나 조금 높은 곳에 덕대를 매고 그 위에 시체를 모셔 놓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뼈만 거두어 다시 장례를 지내는 풍습인데 진도 같은 일부 섬 지방에선 지금도 풍장이 행하여 진다고 한다. 결국 '둑-덕-독-딕'은 같은 계열의 낱말로서 같은 뜻에서 갈래져 나온 말이라 하겠다. 이 모두가 '땅'에서 비롯한다. 단적으로 공간명사 'ㄷ(다)'에서 비롯하여 발달한 형태들이다. 본디 '다'는 ㅎ종성체언으로도, ㄱ곡용어로도 쓰이다가 소리들이 윗말에 녹아 붙어 '독-둑-덕-닥-딕'으로 재구성된 말로 보인다. 이같이 땅을 드러내는 말에는 '디'가 있음을 지적해야 될 것 같다. 중세어 '디다(落)(월인석보 등)'는 '지다'로 바뀌어 쓰인다. 이른바 입천장소리되기를 따라 된 형태인 것이다. 가령 '숨지다·넘어지다·떨어지다'의 '지다'가 그러한 경우로 보면 된다. 보조용언으로 곧 의존동사로서 아주 널리 쓰이는 분포를 보인다. 땅을 뿌리로 하는 '죽다'의 '죽'은 방위로 보아 북쪽·뒤를 이른다. 막말로 해서 드러낼 때, '죽다'를 시골말로 '뒈지다'고 한다. 때로는 '뒤지다(강원등지) 디지다(경상도)'와 같이 말하기도 한다.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이다. 삶의 뒤, 죽음의 그늘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 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朱土)의 거리로 돌아가자 (박종화의 '사의 예찬'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시간과 공간이 삶의 앞이라면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가상의 시간과 공간은 뒤가 된다. 앞에서 '죽다-뒈지다(뒤지다)-디지다'를 떠올린 바 있다. 중세국어 자료를 보게 되면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인 '두다'가 '뒷다(석보상절6.2)'로 적힌 것. 여기 '뒷'은 '뒤(ㅎ)-뒷'으로 쪼가를 수 있다. 흔히 '뒤'는 북쪽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겨울을, 짐승으로는 곰·거북이·뱀을, 소리로는 목구멍소리, 성으로는 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필자(1991) 우리말의 상상력). 특히 고조선 건국의 모티브가 된다. 단군의 어머니가 되며 우리말과 같은 계열의 만주어에서는 '조상신-영혼'의 뜻으로도 쓰인다. 곧 곰-조상신이라는 등식이 이루어 진다. 소리가 바뀌어 오늘의 '어머니'가 되었음은 '어머니와 곰신앙'부분을 보기로 한다. 땅과 걸림을 둘 때, 어머니는 곧 땅이요, 그 품에서 태어나 살다 다시 그 누리로 돌아 간다. 별상징과 뒤-곰을 더 풀이해 보자. 어느 겨레도 마찬가지이나 우리 조상들에게서 북두칠성 믿음은 아주 두드러진다. 태어남의 말미암음을 삼신(三神)이 별로 점지함으로써 비롯된다는 것. 어릴 때 궁둥이 쪽의 검푸른 반점을 삼신할머니가 빨리 나가라고 때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이른바 몽고반점이지. 해서인지 별신앙과 관계가 있는 땅이름이 꽤나 된다. 비로봉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사실 '비로봉'도 별의 사투리인 '빌(경상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빌다'도 마찬가지이다. 별의 바탕은 무엇인가. 광명이요, 빛인 것이다. 결국 빛은 태양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북두칠성과 맞걸림은 배달겨레가 바이칼호 변두리의 지역-고아시아족의 고향이 우리들의 밑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례장의 기러기, 임종직후의 복(復)이라 함은 모두가 죽은 뒤 고향의 나라에서, 다시 돌아 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귀향의식의 드러냄이라는것. 말의 형태로 보면 ㄱ-ㅎ종성체언은 서로 넘나 들어 쓰이는 일이 있다. 하면 '뒤(ㄱ)다→ㄷ다→쥑다→죽다'로 변천과정을 풀이할 수 있다. 하니까 '뒈지다-뒤지다'는 이미 과거 시제요 불타오르는 이 세상이 아니고 저승이 된다. 마침내 제 고향의 땅으로 가는바, '디다'의 '디'가 땅(다)을 드러냄은 같은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죽다'의 말뿌리를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 상정한 형태 가운데에서 글쓴이는 '뒤(ㄱ)다→ㄷ다→쥑다→죽다'로 봄이 옳지 않나 한다. 그것은 '둑→죽'보다는 소리의 질서가 더욱 그럴듯함이 있기 때문이다. 땅이름에서 '뒤'는 '디'로 드러나는 일이 왕왕 있다. 가령 지례(知禮)·지품(知品)의 [지-디]가 그 보기요, 경상도말로 '죽인다'를 '지긴다'로 함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경상도말에서는 '뒤'의 '뒤'가 '이'로 발음이 되기 십상이요, '뒤-쥐'는 구개음화에 따르는 바탕 풀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 '뒤(ㄱ)→둑(딕)→죽(직)'으로 풀이 못할 바도 아니다. 낱말밭의 볼모에서라면 죽은 뒤에 영혼의 오름과 내림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배해수(1982)현대국어의 생명종식어에 대한 연구). 이 모두는 죽은 뒤의 누리와 관련하여 신앙에 터를 두고 생겨난 말들이다(천당가다-극락 가다-소천하다-등선(登仙)하다/지옥 가다-축생 되다-황천 가다 등). 분명한 것은 삶이 끝 나면 흙으로 돌아 가는 일이다. 그 건 바로 우리 삶의 뒤뜰이요, 조상이 묻힌 공간이 아닌가. 값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한 참삶이 절실하다. 이는 바로 북두칠성의 별이 빛나는 어머니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로서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굴살이와 굿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들어라 들지를 않으면 구워서 먹을테다 (삼국유사 '영신가'에서) 신령한 거북이를 통하여 하늘의 신이 내리심을 맞이하는 굿노래. 그것도 김수로왕을 맞이하는 맞이굿이 아니던가. 무당이 노래나 춤을 추면서 귀신에 치성을 드리는 의식이나 연극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누리는 구경거리를 일러 '굿'이라고 한다. 대체로 무당의 굿은 기원적으로 하늘신을 섬기는 제천의식에서 비롯한다. 모시는 신의 계통은 하늘의 천신→산신→성황신이거나 천신→산신→특수인격신→시조신 혹은 천신→시조신으로 떠올려 잡기도 한다. 그러면 제천의식을 드러내는 '굿'은 근원적으로 어떠한 뜻으로 쓰였으며 이 말과 궤를 같이하는 낱말겨레로는 어떤 형태가 있는가. 쓰임에 따라서 '굿'은 '굿(궂)-굳-굴(걸)'같은 말들과 함께 사람이나 짐승이 살던 굴(穴)을 가리킨다. 자료로 보아 굿은 제천의식을 올릴 때 종교적인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예컨대 삼국유사 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었던 곳이 바로 굿(굴)이요, 「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바, 단군이 기림이란 굴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도 그러한 보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 의 삼성혈 이야기도 좋은 보기가 된다. 굴에서 세신이 나와서 처음으로 사람의 누리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적어도 신석기 이전 사람들의 주거 형태가 굴살이 곧 혈거생활이었음을 생각하면 굿은 종교공간이면서도 생활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유적들이 상당 수 있다. 이 때 살던 이들은 정착된 농경살이를 하였으며 뿔과 돌로 만든 쟁기, 낫, 돌, 맷돌 등을 썼다. 집의 모양은 원추형 또는 장방형의 굴살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혹은 받침기둥이 있는 민속촌의 오막살이를 연상케 하는 반쯤이 굴로 된 굴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와 요동반도 남쪽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우리나라의 원시 잠자리에 관한 연구, 김용남 김용간, 1975(평양)).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동이들의 주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수풀 속에서 늘 굴살이를 하였고, 지도자의 굴은 사다리 아홉 개가 들어갈 정도였다고 하니 그 깊이가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물론 동이족이 바로 한민족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분명 동이족 가운데 대부분이 한민족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결국 오늘날 무당의 춤과 치성, 구경거리를 가리키는 '굿'은 기원적으로 종교이자 생활공간을 가리키는 굴(穴)에서 그 뜻이 바뀌어 오늘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 공간에서 행위로 바뀐 셈이 된다. 종합문화의 복합성을 바탕으로 하는 제의 문화가 갈라져 종교와 정치는 따로 그 구실을 해냈다. 하지만 제의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옛말의 쓰임은 그뜻이 달라졌을 뿐 소리는 그대로 쓰인다. 행정관청을 구위 또는 구이(구의)라고 한다(두시언해등). 이 말들이 이루어진 과정을 보면 굴을 뜻하는 '굿'에 접미사 '의(이)'가 달라 붙어 '구시'로 되었다가 시옷이 반치음으로 되어 소리가 약해져서 '구위(구의, 구이)'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제정일치 때 임금이 곧 종교의 지도자를 겸하고 있었고 또 임금-부족장이 제사를 드리거나 행정을 보던 공간이 모두 굴 속이었다고 보면 굿이 관청이라는 등식이 이루어진다. 이는 바로 말이 문화를 드러내는 보기라 하여 망설임이 없는 바탕이 된다 하겠다. 행정관청의 일을 맡은 벼슬 혹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실'이라 하거니와 구실도 위에서 풀이한 구위실과 같은 말로 '굿'에 일을 더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굿이란 공간이 해내던 역할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형태는 그대로 있으나 가리키는 내용이 달라진 셈이다. 지금도 여전히 무당의 춤이나 치성드리는 일 따위를 굿이라고 하니까 종교적인 역할을 드러낸다는 것은 크게 다른 풀이가 있을 수 없다. 굿은 굴이었다. 방언 분포로 보면 말에 따라서 '구석'을 대부분 구석이라 하지만 구숙·구속·구식·구시라 한다. 이와 함께 소나 말의 먹이를 넣어 주는 것을 소구시·말구시라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구융· 구시·귀영·구이·구세·귀이라 이른다(한국방언연구, 김형규,1982). 이 모두가 굿에서 갈라져 나와 쓰이는 형태들이다. 어느 모퉁이의 안쪽이나 밖에 드러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곳을 구석이라 하지 않는가. 바위굴이나 구석진 곳에 촛불을 밝혀놓고 치성 올리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제정일치의 시기였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제의공간일 것이며 북쪽의 거룩한 굿에 불신과 물신(땅신)-배달의 겨레신을 모셔서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강화도 참성단을 생각해 보자. 분화구인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방위 별신에게 제사를 모시던 곳이 아닌가. 굿이 굴이라는 중거는 이 밖에도 상당히 많다. 우리의 신체조직 가운데 밖에서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옮겨지는 데가 '귀'다. 귀는 우리 옛말로 올라가면 구이로 발음되며 이는 '굿'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귀는 굿 곧 굴모양을 하여 소리가 담기는 얼안이란 말이다. 형태로 보든 그 기능으로 보든 설득력이 있다. 최현배 선생은 입을 입굴, 목을 목굴, 코를 콧굴로 이름지어 불렀거니와 굿-굴의 모양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긴 굴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둥그런 원형을 바탕으로 한다. 둥그런 땅덩이 위에서 지구와 함께 돌아가며 삶이란 꽃은 피어나고 진다. 그리하여 삶의 고리를 만들고 목숨의 거룩한 씨알을 지켜나가고 서로는 하나의 목숨에서 말미암았음을 일깨워 살아간다. 날씨가 나쁘거나 언짢은 일이 있는 상태나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정황을 '궂다'라 한다. 또 '굿기다'가 그러한 뜻인데 무덤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말이다. 죽은 짐승의 고기를 '궂은 고기'라 하지 않는가. 어말자음에서 굿의 시옷이 파찰음으로 바뀌면 '궂'이 된다. 풀이에 따라서 굿-굴은 삶과 죽음의 공간이며 종교와 행정의 공간이랄 수가 있다. 글머리에서 보였거니와 굿의 낱말겨레로 어말자음이 바뀐 '굳-굴'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중세국어 자료를 보면 구들방·굳뱀·굳이라 해서 모두가 '굴'의 뜻으로 쓰인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 구덩이·구대이·구데이·구뎅이라 하여 쓰이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음운교체의 일종으로 시옷이 말음에서 디귿으로 드러난 셈이다.여기서 다시 디귿이 흘림소리로 바뀌어 '굴'이 되기에 이른다. 생각해 보면 굴의 모양과 걸림이 있는 사물이나 사실은 흔히 볼 수 있다. 원한경 선생이 사랑하던 초가지붕에 목화처럼 피어 오르던 연기를 뿜는 굴뚝과 바다의 돌과 돌 사이에 사는 굴이며 벌이 꽃에서 따다 먹이로 갈무리 해둔 달콤한 꿀도 굴과 걸림이 있다. 앞의 굴은 연기가 나오는 우묵한 공간이며 뒤의 굴은 움푹하게 들어간 돌 사이에 산다고 하여 아예 그러한 조개류의 이름으로 굳어졌고, 꿀은 벌이 갈무리한 먹이를 두는 구멍인데 공간이 사물자체를 이르는 말이 된 경우다. 헤르만헷세의 시「흰구름」의 구름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굴-구르'로 이어지는바 여기에서 파생된 동사의 명사형이 다름아닌 구름인 것이다. 구름 자체도 바람에 밀려 구르는 모양이지만 한용운의「구름」에서처럼 구름은 해를 가리고 온 누리를 어둡게 만드는 굴의 효과-굴현상을 가져오게 하니까. 오늘의 누리엔 참다운 사랑과 가르침의 굿이 필요하다. 거룩한 하늘의 뜻과 이 땅 한반도가 어우를 그러한 굿이. 거기에서 겨레의 참삶이 싹터 오를 테니까.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빌면 무쇠도 녹는다 칠성당에 들어 서니 칠성님이 좌정하여 한손에 명줄 잡고 또 한 손에 복끈 들어 칠성단에 좌정하시고 삼신당에 당도하니 삼신(三神)할미 내려 올 때 '빌면 무쇠도 녹는다'는데 정말 그럴까. 사람에게는 잘못이 많다. 그 죄를 빌고 사죄하면 아무리 고집 센 사람이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많이 있다. 해서 사람에게 빌지 않고 별신 칠성님께 빌어 사람의 성공과 번영을 얻고자 하였다. 위의 글은 하느님께 비는 '제석경'의 한 부분이다. 적어도 옛적은 그러했다. 드높은 하늘을 떠돌아 다니는 별이 하고 많지마는 우리들의 한아비들은 북두칠성을 머리로 해서 소원을 빌었다. 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두운 밤 하늘에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목숨들의 영혼인가. 아니면 저승의 불꽃인가. 어렸을 적에는 누구든지 마음 속에 아름다운 별나라에의 꿈을 가져 보게 마련이다. 계절이나 방위를 셈할 때 기준이 되는 별이 큰곰자리별이다. 왜 하필이면 곰으로 떠올렸을까. 우리 겨레는 옛적부터 곰이 조상신이요, 영혼일 거라는 곰신앙 곧 곰토템이 있어 왔다. 단순하게 곰은 북쪽에 사는 짐승일 뿐이라면 그만이다. 하지만 믿음의 대상이 되면 뿌리에 값하는 문화의 뿌리상징이기에 이른다. 신증유합 등의 자료에서는 곰(고마)을 경건하게 예배하고 그리워 해야 할 그 무엇으로 적고 있음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이야기는 바로 삼국유사 의 단군설화로 이어진다. 우리 겨레의 조상인 단군의 어머니가 곧 곰(고마)부인(熊女)이질 아니한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충남 공주에서는 곰나루에 곰사당을 모셔 놓고 거기에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던 일은 물론이요, 그 밖에 가장 보수적인 우리들의 땅이름에는 전국에 걸쳐 곰(고마)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그만큼 한반도에는 곰이 많이 살았을까.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추상화된 거룩한 상징이 곧 곰인 것이다. 곰신앙을 가진 겨레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시베리아 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까 별에 곰의 의미를 부여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줄거리로 간추릴 수 있다. '빌'은 별이라 구름이 가리지 않는 밤이면 우리들의 머리 위로는 늘 별이 뜬다. 그리운 얼굴이듯이. 별은 빛나는 물체요, 어둠을 밝히는 등대이기도 하다. 별을 보고 점을 쳤던 페르시아 왕자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별의 속성은 빛이요, 광명이다. 광명의 밑바탕은 태양이요, 불이다. 옛부터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여 제사하던 삶을 살아온 건 우리뿐이 아니다. 무덤 속의 벽화라든지 빗살무늬·솟대 등의 살아온 민속 자료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우러름은 곧 별신앙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말 '빌다'와는 무슨 걸림이 있을까. 자신의 소원대로 되기 바라며 잘못을 뉘우쳐 용서를 원하는 행위를 '빌다'로 드러낸다. 더러 남의 물건을 우선 갖다 쓰거나 도움에 힘입음을 뜻하기도 한다. 부족을 대신하여 빌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임금이요, 제사장이었다. 그 대상은 앞에서 이른바 태양신-별신이요, 태음신이자 물신인 곰(고마)신이었다. '빌다'는 움직씨로 명사 '빌'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다.'빌'이 상징하는 중심뜻은 무엇일까. 글쓴이가 보기로는 별의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먼저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게 쓰는 별의 방언을 찾아보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별'이지만,일부 지역에서는 벨(경기·강원·함경·평안) 빌(강원·충청·전라·제주·경상) 밸(경남) 베리(함경)로 쓰인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빌'의 변이형이다. '빌다'를 중심으로 보면 별의 기본형이 바로 '빌'이 아닐까 한다. 별은 용신앙과 더불어 물을 다스리는 태음신이자 북방신이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광주본 천자문에 미르진(辰)이라 해서 별을 드러내었으니 용과 별은 같은 소리로 나는 동음이의어로 보인다. 다시 같은 문헌에 미르룡(龍)이라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별(빌)-밀'의 맞걸림을 알게 된다. 그럼 미르와 별(빌)은 어떻게 그 소리상징의 질서를 풀이할 수 있는가. 본시 미음(ㅁ)과 비읍(ㅂ)은 입술소리로서 같은 계열의 소리이다. 발달단계로 보아 미음이 비읍에 앞서 있었음을 고려하면 소리로는 용-물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깊었음을 알겠다. 오늘날에도 보면 바위 밑에나 절간 또는 암자에 촛불을 밝혀 놓고 별신에게 빈다. 무당이 빌고 어려움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빈다. 별빛이 무수하게 땅으로 내리듯 별은 그렇게 많은 복을 갖고 있는지. 칠성은 북두칠성을 이른다. 큰 곰자리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게 이 북두칠성이다. 앞의 네 별을 괴(魁)라 하며 뒤의 세 별을 표(杓)라 해서 만물의 때를 알아 차리는 자가 되었으니 별신앙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줄기로 풀이되기도 한다. 무슨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북두칠성이 앵돌아졌다'고 함도 이들 별신앙이 아주 깊게 우리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보이고 있다. 어떤일을 처음 시작할 때 '비롯한다'고 한다. 살펴보면 비롯도 별을 뜻하는 '빌'에 접미사 '-옷'이 달라붙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의 단위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해서 헤아려지니까 그렇다. 토이기 말에서도 수사 가운데 첫째를 '빌(ㄱ)'이라 하는데 같은 계통의 말로 보인다. 별(빌)을 바탕으로 해서 벌어져 나아간 말들을 보면 '빌미(재앙이나 불행이 생기는 원인) 빌미잡다·빌붙다(남에게 아첨하다)·빌어먹다/벼르다(마음 먹은 것을 이루려고 꾀하다)벼름벼름·별빛·별똥/밝다·보름(밝음>발금>보름)'과 같은 말의 겨레들이 널리 쓰인다. 별을 그리는 마음은 밝음을 좇는 지향을 갖는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질 겨레들의 영원한 길목을 지키는 큰곰자리의 영혼이 꽃처럼 쏟아지는 우리의 조국은 정녕 별을 바라 정성으로 비는 처음이요, 마지막의 얼안이어야 한다. 처용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줄 아는 건 정말 아름다운 한아비들의 모습. 늘 봄이 오듯 그렇게 별을 바라 빌고 겨레의 하나됨을 애타게 기다릴 일이다. 저 푸른 바다의 끝을 멀리 보고 서성이면서. 믿음의 소리갈 즈믄 해를 외오곰 녀신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신(信)잇단 그츠리잇가 나난 ('서경별곡'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 바람직한 사람의 사이가 이루어 질 것인가. 설령 천 년을 떨어져 살 수도 없지만 그렇게 산다 치자. 하더라도 그대가 나를 믿고 내가 그대를 믿는 믿음은 변할 리가 없다는 사랑의 노래말. 비유로서 바위에 떨어지는 구슬에 비기었다. 구슬 하나하나는 깨어질 수 있지만 그 끈은 끊어질 수가 없듯이 세월을 넘어 변할 줄 모르는 사랑은 대동강의 푸르름만큼이나 우리들 마음에 와 닿는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여기는 마음을 흔히 '믿음'이라 한다. 믿음은 형식 무형식 간에 하나의 약속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다. 말만 해도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렀듯이 말은 약속이요, 상징이란 것이다. 같은 말을 쓰고 사는 겨레들에게 있어 말이란 그 겨레를 묶는 동아리요, 고리이다. 이 약속을 등지고 마음대로 말을 한다면 본디 말의 기능이라 할 생각과 느낌의 오고감이란 기대할 길이 없어지고 만다. 믿음이란, 말로 드러내지 않는 말 이전의 생활이며 문화를 빚어 낸다. 자연발생적으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연물을 받들어 올리게 되고 거기서 나오는 믿음으로 거치른 세상의 목숨살이를 축복으로, 혹은 시련으로 받아 들인다. 이르러 종교라 하는 게 바로 믿음 그것도 자연발생적인 것에 옷을 입혔다고나 할까. 정신활동이 가져온 열매를 통틀어 문화라고 한다. 말도 심리-생리-물리적인 과정을 거치는 약속된 소리의 체계들이다. 따라서 말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문화가 얼비친다. 필자는 이를 언어의 문화투영이라 일컫는다. 그러면 '믿음'이란 소리 상징에는 어떠한 문화가 되비쳐 있단 말인가. 그 말의 짜임새는 어떠한가에 대하여 살펴 본다. '믿음'이란 말은 '믿다'란 동사에서 갈라져 나온 형태이다. 말의 줄기 '믿'에 조음소 '으'와 명사형어미 '-ㅁ'이 녹아 한 형태로 굳어져 아주 널리 쓰인다. '믿다'는 움직임은 주로 어떤 뜻으로 쓰이는가.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뜻으로 본 특징은 '인정·의지·바람·좋아함·(믿고)씀'의 두드러짐을 보인다. 믿음의 동작이 대상으로 하는 갈래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 자연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랑과 소망을 믿음과 함께 한 전제로서 내 세우며, 불가에서는 법·불·승으로 귀의(歸依) 곧 돌아감으로 표방하기도 한다. 한편 도가(道家)에서는 꾸밈 없는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모든 믿음의 종교행위는 상당 부분이 말로서 이루어진다. 해서 말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 있으므로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말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 믿었던 것. 이를 일러 언령설(言靈說)이라 한다. 유교에서는 천명 곧 하늘의 명령을 믿고 중하게 여긴다. 믿음은 땅에서 비롯 말하는 것을 자료에 따라선 '믿다'를 '밋다'로도 적는다. 이는 하나의 또 다른 변이형으로 바탕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움직임을 드러내는 '믿다'는 명사 '믿'에 동사화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 진 말이다. 중세어에서 '믿'은 항문·믿둥·밑천 등으로 파악된다(훈몽자회·신증유합·박통사(초)상).'믿'은 같은 뜻으로 적기에 따라서 '밑-밋-믿'으로 적힌다. 오늘날에와서는 모두 '밑'으로만 쓰인다. 이제 '믿'과 걸림을 보이는 4백여년 전의 말들에 대한 살핌을 둔다. 본래의 나무가지를 믿가지(두시언해)·본처를 믿겨집(삼강행실도)·본고장을 일러 믿곧(법화경)·문장의 본을 일러 믿글월(노박자)·본나라를 믿나라(법화경)·본디의 흙을 믿흙(분문온역방) 이라 하는 게 그러한 보기가 된다. 원산지를 밋따(박통사)라고 하거니와 '믿'은 오늘날 '밑'으로 적히는바, 기본적인 뜻은 '땅(地)'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한다. 단적으로 땅과 물이 살아가는 가장 밑바탕이 되지 않는가 특히 물이 그러하다. 서양말에서도 강(river)은 뚝방이요, 살고 죽는 줄살이의 갈림길이란 뜻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낱말의 겨레란 볼모에서 같은 뜻을 드러내는 형태로는 '밋-믿-밀-밑-및' 등을 들 수 있다. 물과 직접 관련을 보이는 것은 '밀'이다. 훈몽자회 에는 용(龍)을 '미르(밀)'라 하였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신의 동물상징이다. 땅이름으로 볼 때 밀양(密陽)의 경우를 보자. 양(陽)은 물의 북쪽이란 뜻이니 나머지 '밀'은 물 또는 3이란 말이 된다(密陽-推火-三浪津)/彌勒山-龍華山<대동지지>).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보면 '용-미르(밀)' 이전에는 검(거북이)이, 그전에는 고마(곰)가 동물상징으로 떠올랐다. 수렵생활의 표징이라 할 곰에서, 유목생활로 바뀌면서 검(거북이)으로, 용(미르·밀)으로 바뀐 것이다. 용신앙은 곧 물신앙-밀신앙이 된다. 상당한 땅이름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다가 불교의 수호짐승인 용이 물신앙과 융합이 되어 이른바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 '믿-밋-밑-밀-및'에서 모음이 바뀌면 '묻-뭇-뭍-물'의 형태들이 쓰인다. 다시 양성모음이 되면 'ㅁ-못-몰'이 되는데 물의 본질인 '모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이란 작은 수증기 상태의 분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결정체이다. 본시 물체란 작은 부분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던가. 샘은 흘러 내로 다시 바다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개인과 개인이 어울려 우리의 사회를 이루고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어 나아간다. '밑이 쿠리다'고 할 때 '밑'은 항문 부분을 가리킨다. 모든 음식을 삭이고 난 뒤에 함께 모이는 데가 '믿'이라 할 때 '모임'과의 걸림을 떠 올리게 된다. 동아리 지으면 '믿'은 물(밀)이요, 작은 것이 모여 이룬 물체의 기본틀이란 말이다. 모이려면 높이가 가장 낮아야 되기 때문에 아래 부분에 값하는 쓰임이 생기게 마련. 또 물은 모든 생명의 피요, 근원이니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바탕이요, 뿌리가 '밑'이 되는 셈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들인 돈이나 노력에 비하여 손해를 보았을 때, 우리는 '밑지다'라고 한다. 근세어에서는 '밑지다'(노걸대)로 적힌다. 그러니까 아주 기본이 되는 물질이나 터전을 잃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믿-밑-밋-및'에서 기본형은 말음현상에 따라 '믿'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말에서는 '밑'이 기본으로 쓰이고 있다. 동작을 드러내는 '믿다'의 대상은 신(神)과 사람이 중심을 이룬다. 머리의 <서경별곡>에서처럼 사람에 대한 믿음의식은 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은 인간애-사랑으로써 나타낸다. 믿음은 사랑의 기본이니까 그러한가. 희랍신화에 나오는 아모레는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의 신은 살 수 없다'면서 푸시케를 떠나 버린다. 믿음과 사랑은 고기와 물과 같은 걸림이라 해 두자. 사랑이란 고기는 믿음의 물이 아니면 살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좋아하다는 뜻으로,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중세어에서 '닷다(愛)'(능엄경)는 형태가 있다. 여기 '닷'은 땅을 뜻한다. 땅은 물질 개념의 대표적인 것으로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뿌리가 된다. 요즈음 땅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 않은가. 그 놈의 땅 때문에. 믿음과 사랑은 근원적으로 땅과 물, 그러니까 지모신(地母神) 신앙에서 흘러 나와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 하고 목이 마른 영혼의 들판에 맑은 물을 대어 준다. 해서 우리들의 조상들은 물과 땅에서 신격(神格)을 부여해서,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땅과 물을 다루면서 살라는 삶의 슬기를 주신 것이다. 한데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한시도 쉴 사이 없이 오염으로 공해의 강산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가. 거룩한 하늘의 백성인 배달겨레는 우리의 물과 땅에 대한 믿음을 꽃 피워 하늘과 땅의 사랑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그 열매로, 갈등으로 얼룩진 홍익인간의 그리움을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선물로 받은 빈 자리라 여기며 외롭다 여기며 약손 얻어 가슴 쓸어 내리듯 산다. 사랑을 가진 나는 (김남조의 '아가'에서)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술과 푸닥거리 지나 가노라니 배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오라 조롱곳 누룩이 매와 잡사오니 내 이를 어찌 하리잇고 ('청산별곡'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서러운 한을 이기지 못하여 술로 달랠 수밖에 없었나 보다. 13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몽고 사람들에게 압박과 설움을 당하면서 굽실거리고 70만이 넘는 사람들은 20년 동안 붙들려 가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을 칠테니 모든 군사용 먹거리며 장비를 대라는 것. 전해 오기는 고려 때 이름 높은 원감국사의 '영남민간고상24운'을 바탕으로 해서 청산별곡이 되었다고 한다. 청산별곡의 후렴구의 '얄라(yala)'는 몽고말로서 서럽다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아예 저리 가야만 하던 상황이라. 그래 저래 술이나 퍼 마실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단 말인가. 술이란 무엇인가. 벌써 이른 때에 신에게 드리는 이바지로 술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서처럼 여름지이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풍년과 겨레의 안녕을 비는 큰 거지에서 날마다 며칠씩 먹거리와 술을 먹고 마시면서 노래와 춤을 추었다니 그 열기 또한 대단하였던 모양. 동네마다 노래방이 있으매 노래의 열기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피속에는 그러한 옛부터의 열기가 내림을 타고 흐르는 듯. 하늘과 땅신에게 이바지로 술을 바쳤다는 사연이 된다. 한 마당의 굿판을 벌려 신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하나됨에의 체험을 함으로써 모두는 하늘의 백성이 되고 신명이 지핀 거리, 축제의 거리가 된다. 하긴 서양말로 축제-페스티발도 '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서 말미암는다. 해서 모두는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을 굳게 하였다. 뭔가 서로의 마음에 응어리를 풀고 닦아 내는 씻김굿이며, 푸닥거리를 치렀던 것. 한 마당의 굿판을 이끌어 나아갔던 이는 누구인가. 아사달에 벌린 신의 나라-신시(神市)에서는 환웅이 비스승, 구름스승, 바람스승을 더불어 사람의 나라에 내려 왔다는 거다. 이르자면 배달겨레의 위대한 스승들이라 할 수 있다. 스승이란 말은 사이를 뜻하는 슷(間)에 접미사 '응'이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훈몽자회 참조). 사이라면 무슨 '사이'일까. 미루어 보건대, 하늘과 땅의, 신과 인간의 사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아닐까 한다. 앞의 사이는 종교직능자로서 교황에 맞먹는 스승의 구실이요, 뒤의 사이는 행정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스승이다. 정성 어린 제사를 모시는 이바지로서의 '술-사이'는 어떤 언어적인 질서로 풀이할 수 있을까.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 다르다. 술이란 다달말의 실에서, 우갈말의 셀에서, 산스크리트말의 수라에서, 몽고말의 상랑에서 빌어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원표, 1947, 술의 어원에 대하여). 거꾸로 우리말 '술'에서 다른 겨레들이 꾸어 갔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마치 서양의 실크(silk)가 우리말의 '실'에서 옮겨 간 것처럼 말이다. 슷-숫을, 같은 '사이'의 뜻을 지니는 낱말겨레로 볼 수 있다. 숫은 다시 숟-술로 이어지는 가지벋음이 있으므로 해서 술은 곧 사이란 말이 되기에 이른다. 흔히 곡물에 누룩을 넣어 빚은 것으로 막걸리·청주·맥주가 있고, 증류한 것으로 소주·고량주가 있다. 그 밖에 화학적으로 만든 합성주, 향료 약거리를 넣어 만든 발효음료를 통틀어 술이라 한다. 문제는 발효에 있다고 본다. 상한 것도 아니요, 날 것도 아닌 중간쯤 되는 게 발효가 아니던가. 바로 술이 그러하다. 계림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술을 수발(禾醱)이라고 적었다. 글자대로 풀면 곡식(禾)을 발효(醱)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발효라 함은 곡식에 누룩을 넣어 썩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날 것도 아닌 뜬 상태의 곡식이다. 여기에 여러가지 향료나 약거리를 사이에 끼워 넣기도 한다. 쟁기의 보습을 끼우는 것도 술이요, 먹거리를 퍼 먹는 숟가락도, 책이나 종이 사이에 놓아 두는 게 모두 술이 아닌가. 지나치면 독이요, 적절하여 알맞으면 술이 약이다. 혼례를 갓 치른 신랑과 신부는 합환주를 나눈다. 영혼과 육신으로 보아 이제 둘 사이에 다름이 있을 수 없다. 술로서 하나됨에의 동기유발을 불러 일으키는 데 큰 구실이 있다. 진실로 화기애애한 세상살이를 위하여 갈라진 겨레의 하나됨을 위하여 흠씬 취할 술을 마련해야 되리라. 하면 우린 한 몸이 되는 게 아닐까. 술의 참뜻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꽃 이바지 진달래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수로부인의 '헌화가'에서) 꽃을 보고 더럽다고 하는 이가 있을까. 봄이면 산에 들에 어우러져 피는 진달래. 어쩐지 아려오는 설레임이 있음은 나 혼자뿐이랴. 삶에 지친 겨레와 함께 해 온 탓인지. 주리다 못해 진달래라도 뜯어 먹고 두견이 우는 봄밤 이즈러진 달을 보고 서러움을 달래던 자장가 때문이었을까. 꽃을 꺾어 뿌리며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산화가(散花歌)의 사연이 있다. 이를 보면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이바지, 아니면 대신 소나 개같은 짐승을 바치는 이바지, 보다 한 걸음 승화시켜 꽃을 바치는 꽃 이바지, 노래와 춤을 드리는 이바지, 실로 그 내력은 가지가지. 이제 꽃노래로 '헌화가'에 대한 사연을 더듬어 보자. 신라 33대 임금인 성덕왕 시절. 순정공(純貞公)이란 이가 명주-지금의 강릉 땅에 태수의 자리로 부임하는 도중이었다. 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된다. 병풍을 치듯한 바위벼랑이 바다에 이어 있고 천길이나 되는 듯 높은 벼랑 꼭대기에 손짓인양 철쭉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는 꽃을 보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저 꽃을 꺾어 나에게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극락에 필 만다라화라도 되었을까. 아님 그저 그냥 가까이 보고 싶어 그랬을까. 때에 암소를 끌고 가던 웬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들었다. 나의 꽃 이바지를 기꺼이 받아 준다면 꽃을 갖다 주겠단다. 아니나 다를까. 벼랑 위의 꽃을 꺾어 줌은 물론이요 꽃 이바지 노래-헌화가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벼랑 위에 꽃꺾이를 한 것이 우선 신기한 일인데다가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부임 행차는 계속 이어 진다.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나타나 수로부인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 간다. 이에 놀란 순정공은 발을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데 이 게 웬일인가. 난데 없는 노인이 나타나 부인을 구출하는 방법을 일러 주지 않는가.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衆口삭金)고 했으니 바다의 용이라고 해서 뭇 사람의 말을 두렵게 여기지 않겠느냐고.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말대로 사람들을 모아 '바다의 노래'를 불렀더니 용은 부인을 데리고 나와 순정공에게 되돌렸다. 불렀던 당시의 노래는 이러하다. "검(거북)이여 검이여/수로를 내 놓아라 남의 부인을 빼앗은 허물이 얼마나 크냐/만일 네가 부인을 내 놓지 않으면/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해가(海歌)'에서) 부인은 너무도 아름다워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귀신에게 잡힌 바 되었다. 수로는 벼랑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 했다. 사람의 손이라곤 닿지 않는 저 높은 벼랑 위의 꽃을. 알 길 없는 한 노인의 도움으로 꽃과 노래를 얻는다. 이르자면 꽃노래라고나 할까, 꽃 이바지라고 해 둘까. 꽃은 두드러짐이라 사람이 신(神)을 섬기거나 사람을 모실 때에 이바지가 따르기 마련. 때로 꽃을 신에게 바치기도 하고 양같은 짐승을 이바지로 드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 신은 마침내 인간의 몸. 그것도 처녀를 요구하기도 한다. 부처 앞에 꽃을 뿌리고 공덕을 기리기도 하는바, 이를 산화공덕(散花功德)이라고 했다. 꽃이란 무엇인가. 꽃은 생명이 깃드는 보금자리요, 풀나무의 정수리이다. 그런데 그 꽃을 꺾어 바친다는건 희생이요, 자기 부정의 다시 태어남이다. 태어나는 공간은 물이며 바다를 지키는 용과의 하나됨이 아니겠는가. 최소한의 희생으로 나머지 모두가 산다면 그건 거룩한 일임에 틀림 없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자란다. 옛 것은 가고 새 것의 움이 트듯 또 다른 목숨살이의 터밭이 꽃이다. 옛말에 꽃은 곳(월인석보), 곧(두시언해), 곶(용비어천가)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뜻을 드러내는 같은 소리의 낱말겨레들이다. 꽃은 '두드러져 솟음'이다. 장산곶 마루에서 '곶'은 바다쪽으로 툭 두드러져 나온 뭍을 이른다. 꼬챙이처럼 말이다. '곳'은 어떤가. '곶'에서 받침소리 지읒이 마찰음이 되면 '곳'이 된다. 꽃봉오리가 솟아 나오듯 뭍도 물 보다는 위로 두드러져 솟아 오른 공간일 시 분명하다. 물론 '곧'은 받침 자리에서 얻어지는 말음현상에 따라 굳어진 말로 보인다. 마침내 '곶'이 거센소리와 된소리로 되어 오늘날의 '꽃'으로 바뀌어 쓰인다. 옛부터 우리의 산과 들에는 진달래가 피고 진다. 머리의 '헌화가'에서 그 꽃은 진달래로 봄이 옳다. '짙배 바위'의 짙배는 '딜배-달배-달외-달래'의 걸림을 보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대구에는 월배(月背)라는 곳이 있다. 월배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달배'가 되니 말이다. 이는 또 그 주위의 꽃을 가리키는 '화원(花園)-달배'와 어울려 맞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상 진달래는 참꽃이라고도 하며 흔히 두견새의 넋을 떠 올리고 망제(望帝)의 옛일을 함께 고리지어 많은 정서를 우리들에게 안겨 준다. 진달래는 짜임새로 보아 '진(眞)-짙/달래'의 어우름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꽃노래로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이라 하나 꽃은 식물의 성(性)이요, 씨알보전의 상징이다. 특유의 빛깔과 냄새로 뭇 벌과 나비를 부르고, 지나는 바람에 날려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어렵사리 진달래꽃을 마련한 수로부인은 누구일까. 순정공의 아내임은 물론이요,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라 해서 무리가 될까. 수로라, 물수의 '물'을 중심으로 해서 이두식으로 읽으면 '수로-물'이 된다. 하니까 당연히 바다의 신(神) 곧 물신과 하나가 된다. 또한 용의 제물이 된다. 훈몽자회 에서 용을 '미르(辰)'라 한다. '밀-물'은 한 가지로 '물(水)'을 바탕으로 한다. '밀'은 미륵신앙으로 이어지며 용으로 상징됨은 흔히 보는 일이다(서동요 참조). 어려운 일이 있기만 하면 도와 주는 노인. 짐작하건대 그 사람은 미륵부처가 사람의 몸을 입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미륵'도 읽기에 따라서는 '미르-밀'로 읽혀질 가능성이 있기로서다. 틈만 나면 바다를 건너 침노하는 일본의 세력은 떨칠 수 없는 위협이며, 크낙한 과제였으니 부처의 힘을 빌어 가정을 지키고 나라를 일으키는 호국안민의 생각을, 노래는 그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문무대왕이 죽은 뒤 감포 앞바다 속에 능침을 만들라고 한 걸 보면 당시에 일본과의 국제관계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꽃은 겨레를 지키려는 자기암시의 꽃이며 수로는 물-바다를 잘 지키라는 바다의 안녕 질서를 비는 사다리가 아니던가. 이바지가 없는 누리. 그건 꽃이 펴도 져도 벌나비가 없는, 만들어진 거짓의 꽃일게다. 섬김은 다스리는 슬기요 미덕이기에.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웃으면 젊어진다고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어간다 (一笑一少一怒一老)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한다. 같은 값이면 웃으면서 상대방을 대함이 낫지 않겠는가. 다른 이에게 창피와 모멸감을 주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마음 속에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기가 막힐 때, 느낌의 변화나 상태에 어울리게 밖으로 드러내는 생리적인 움직임을 일러 '웃는다(웃다)'고 한다. 겉으로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고 기뻐하면서 웃는다. 사람을 같잖이 여기거나 비웃을 경우도 있다. 흔히 마음은 움직임으로 드러나게 마련. 해서 행동과학이라는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 차려 알맞게 처리를 한다. 마음 속에 쌓인 긴장이 풀어질 적에 그러한 반응으로서 해학이 일어난다는 생각도 있다(서라사, 1971, 문학에 있어서의 웃음의 개념, 국어국문학51). 때때로 우리들은 삶의 과정에서 어떤 불안이나 불만족을 겪으면서 살아 간다. 검은 구름같은 불안이 풀어 지고 평안한 느낌을 갖게 될 때 여기에 웃음이 따라 붙는다. 간추리건대, 웃음은 안에서 일어 나는 마음의 드러남에서 움직임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 말의 됨됨이를 보면 '웃다'는 말의 줄기가 되는 '웃'에 움직임 접미사 '-다'가 녹아 붙어 이루어 진다. 여기 말의 줄기인 '웃'은 어떤 뜻을 드러내는 걸까. '웃'은 위 아래의 '위(上)'에 값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웃음은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 마음의 느낌이나 생각을 위로 드러낸다는 데 터를 댄다. 마침내 얼굴의 모양이나 입으로 소리를 내서 귀로 그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친절하고 상냥한 웃음 띤 얼굴이 우리의 일상에 들꽃같이 느껴운 때가 있다. 그 게 딱히 베아트리체나 모나리자의 미소일 필요는 없다. 단군시대의 곰부인-웅녀가 주는 웃음이 아닐지라도 우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마음의 건강을 꽃 피운다. 한 집안에는 겨레붙이들의 족보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도 그러하다. 하면 웃을 때, 내는 소리나 얼굴의 모습 또는 신체의 변화와 걸림을 보이는 웃음의 낱말겨레로는 어떠한 형태들이 있을까. 먼저 소리에 따른 웃음의 표현에 대하여 더듬어 본다. 웃음의 소리가 기냐 짧으냐에 따라서, 아니면 작으냐 크냐에 따라서 몇 가지로 갈래 지워 진다. 길게 웃다는 장소(長笑)하다, 그 반대인 경우는 단소(短笑)한다고 이른다. 아울러 크게 웃을 때는 대소하다·굉소하다·폭소하다로 드러낸다. 폭발적인 웃음의 효과를 보이는 '폭소하다'가 가장 큰 웃음소리를 가리킨다. 대소-굉소-폭소는 단계적으로 소리의 크기에 따른 변별력을 갖는다. 입을 크게 벌린 모습으로 웃는 경우, 홍연대소한다고 하며, 아주 즐거운 표정을 함께 드러낼 때, 간간대소한다고 한다. 참으로 웃는 모습도 가지가지이다. 하늘 보고 너털웃음을 웃는 일이 있는데 이를 두고 앙천대소하다로, 손뼉을 치면서 웃는 걸 박장대소하다로 표현. 깔깔대며 웃는 건 뭐라 하는가. 가가대소라 한다. 방자하게 웃는 건 방소(放笑)하다로, 그냥 웃어 넘기는 것은 '소쇄하다'로 이른다. 주로 한자어에 힘 입어 웃음의 개념이 표현되는 게 좀 이상할 정도로 많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입을 약간 벌리고 웃는 모양을 '빙그레'라 한다. 이에 따른 말겨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방글방글-벙글벙글/방긋방긋-벙긋벙긋'은 빙그레와 같은 뜻이면서 소리느낌만 다를 뿐이다. 이제 소리와는 달리 웃는 모습에 따른 웃음표현의 낱말겨레를 살펴 본다. 우선 얼굴의 모양을 중심으로 했을 때 어떤 말의 겨레들이 있는가. 즐겁게 웃는 것은 환소하다로,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웃는 건 담소하다, 언소(言笑)하다로 드러 낸다. 이 밖에도 얼굴 모습이 변하는 것과 걸림을 보이는 것으로는 요염하게 웃다(교소하다), 사랑스레 웃다(교소하다)와 같은 말꼴들이 있다. 아울러 입술의 모양이 변하면서 웃는 말에는 어떤 게 있을까. 약간 입을 벌려 웃는다(신소하다). 소리없이 웃는다(미소하다)와 같이 한자어 계통의 말이 중심을 이룬다. 고유어계에서는 한 번 웃고 지날 때는 방긋하다로, 되풀이되는 경우는 방글거리다로 드러 낸다. 입 모양의 변화는 물론이요, 눈 모양이 함께 달라 질 경우는 어떠한가. 한 번 웃을 때 상긋하다, 되풀이할 때는 상글거리다로 표현된다. 이 밖에도 상긋방긋하다(일회성), 상글방글하다(반복성)와 같은 드러냄말들이 있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참으로 웃음도 가지가지. 웃음의 정도가 심해 지면 몸의 특정한 부분이 달라 지기도 한다. 이 때에 쓰이는 말로는, 자지러 지게 웃다(절소하다) 배가 아픔을 느낄 정도로 웃다(배꼽잡다) 허리가 구부러 진 양으로 웃다(요절복통하다)가 있다. 얼마나 웃으면 배에 아픔을 느낄 정도로 웃는 것인가. 하긴 처녀 때에는 소똥 말똥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웃는다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의 웃는 동작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 나는 웃음이다. 한데 그렇지 않은 수가 있다. 뭔가 겉과 속이 어긋남으로 일어 나는 일이 있다(배해수, 1982, 웃음동작의 낱말밭). 이를 동아리 지어 알아 보도록 한다. 이 얼안에 드는 웃음은 분명 자연스러움이 없는 경우라고 할 것이요, 정상적인 웃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해서 객관성도 없을 수가 있다. 웃지 않아야 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웃는 경우, 실소(失笑)한다고 한다. 거짓으로 웃을 때는 가소하다, 어쩔 수 없이 웃을 때는 습소(濕笑)하다, 겉으로만 웃을 때 헛웃음 치다 등의 말이 쓰인다. 웃는 소리나 모습이 두드러진 경우에 쓰이는 말이 있다. 아주 괴상하게 웃을 때 괴소하다, 미친듯이 웃을 때 광소하다, 바보처럼 웃을 때 치소(痴笑)하다, 찡그려 웃을 때 빈소하다로 드러 낸다. 가끔 미친듯이 웃어주고 싶은 때가 있기는 하다. 잘 찡그려 웃는 이가 미인이라니 중국의 월나라 적 서시(西施)란 미녀가 살았다. 그는 월나라 임금 구천의 사랑을 온차지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된다. 한번은 서시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장거리로 나아 갔다. 해가 눈에 부셨음인가. 눈을 많이 찡그리고 웃었다는 얘기. 이를 본 다른 여성들은 눈을 잘 찡그려 웃는 것이 미인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여 너도 나도 눈을 잘 찡그려 웃는 연습을 하여 한 바탕의 유행을 낳았다니. 누구나 아름다워 지려는 욕구가 있을 테니깐 하긴 누구라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망해가는 월나라를 건지기 위하여 서시는 마침내 오나라 부차임금에게 미인계의 머리로 뽑혀 월나라의 원수를 갚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녀는 가는 데마다 눈을 찡그려 웃음을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을까. 그것도 적의 나라에 들어 가서. 참말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억지로 찡그려 웃어야 할 판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에서 웃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서시 같으면 원한 어리게 웃었을 것이다(검소(劍笑)하다). 다른 이에게 아첨하여 웃는 것(첨소), 간사하게 웃는 것(간소), 아양을 부려 웃는 것(미소(媚笑). 선웃음 치다·웃음을 팔다. 등을 들 수 있다. 열등감과는 달리 우월감에 차 있으면서 웃는 일이 있다. 가령 실 없이 놀리는 듯이 웃는 것(회소하다), 비웃다·조소하다·업신 여김의 웃음(비소·고소하다) 등이 있다. '웃'의 홀소리가 바뀌면 '옷'이 된다. 옷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 위에 걸치는 날개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의 옷. 생각의 옷 가운데 우린 즐거움과 기쁨을 드러낼 수 있는 무지개 빛 옷같은 미소-웃음을 잃고 살 수는 없다. 그 게 좀 마음에 안 맞는 옷이라 할지라도 벗고서 거리를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몸에 맞는 옷. 분수에 맞는 옷은 정말 필요하다.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용기를 일으킬 수 있는 웃음을 웃자. 우리 한 번 마음을 터 놓고 웃고 삽시다. 그럼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들온 말 쓰기와 말글 한 누리 오늘의 시대를 일러 지구촌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둘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과 인간관계에서 말미암은 말과 글자살이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일고 있다. 때로는 우리 말과 글이 참으로 우리 것인가를 되돌아 보아야 할 만큼 우리말은 비속어나 은어 또는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어 곧 들어온 말로 크게 멍들고 마침내 병이 들어 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낌은 글쓰는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말이란 사람이 사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길에 하나의 규범이요 제도이며, 일종의 약속이다. 특정한 말소리와 그 소리가 가리키는 속내와의 관계는 필연이 없다. 하지만 일단 감정과 사고판단의 도구로서 약속이 된 것은 분명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에 구속성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말 속에는 그 말을 쓴 겨레들만이 누려온, 누릴 수 있는 문화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문화가 인간이 벌여 온 정신활동이라고 볼 때에 말글은 온 겨레가 함께 다듬어 가야 한다. 정책적으로 우리의 약속을 관리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는 한글로 우리의 문화적인 유산을 옮겨 살아간다. 나라말이 한민족의 의사전달의 그릇일 때만이 쓰여야 할 있음과 필연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사람이면 누구나가 쉽고 바르게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한 소리는 한 글자로 규정하여 흔들림이 없이 쓸 수 있음은 우리가 바라는 글자살이의 커다란 꿈이다. 이러한 꿈을 우리의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외국어를 받아들여 쓰고 말하기에 본이 되어야 할 규정들을 놓고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가 있지 않은가. 어떤이는 외국의 원주민이 발음하는 소리대로 적자고 한다.이름하여 원음주의라고 한다.반면에 다른 이들은 말은 쓴 사람이 주인이니까 외국어를 빌어다 쓰는 사람에게 익숙한 말로 되옮겨서 적거나 말을 함이 옳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이를 일러 현실음주의라고 한다. 이 두 가지의 생각과는 달리 원음과 현실음을 벗어나 철자발음을 따라 적고 읽는 철자발음주의가 있다. 이를테면 [gas-가스]로 적어 읽는 방법이다. 받아들인 대부분의 들어온 말은 영어 계통의 낱말들이다. 상당수가 철자발음주의를 따라서 받아들여 우리말의 소리에 맞추어 적는다. 현실음이냐 아니면 원음주의냐 혹은 철자식 발음 위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방식들이 우리말에서의 들온말을 어떻게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우리말의 언어능력과 수행을 늘려가는 방법이냐의 물음으로 간추릴 수 있다고 본다. 모두가 길고 짧은 점이 있다. 말하는 이의 언어감각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현실음과 철자식 발음에 익숙한 우리의 현실은 원음주의만을 좋은 것이라고 하여 얼핏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 말에는 우리말대로의 새로운 말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어법이 있다. 일단 들어온 들온말은 그에 걸맞는 우리말이 있으면 좋고, 아닐 때에는 우리에게 익은 철자식 발음을 중심으로 씀이 어떨까 한다. 철자식 발음은 여기서 현실음주의와 크게는 한가지 방법으로 보아 이르고 있음을 짚어 놓아야겠다. 이제까지 외국에서 들어온 말들을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 우리말 조어법에 맞는 말들로 바꾸어 쓸 수 있으면 모두의 관심사로 다루어 어떻게 써야할까를 따져 본 셈이다. 과학문명과 더불어 밀려 들어 오는 엄청난 들온말을 일일이 따져서 씀도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말에 대한 규정들을 때때로 사람마다 쓰는 발음이 각자 다른 것을 하나하나 다 규범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는 원음을 취하거나, 현실음을 취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주로 들온말을 어떻게 적고 말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조금 생각을 돌려보면 분명히 우리말로도 다 두루 통해 쓸 수 있는 것도 별 생각없이 들온말을 마구 쓰는 문제가 앞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실제의 우리 둘레에서 우리말이 시들어 병들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홀로서는 말글살이 일상의 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보기들을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봄으로써 앞서 말한 것들과 고리지어 보면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이냐에 대한 되돌아봄에의 조그만 실마리가 될 줄로 생각한다. 남과 북이 하나됨에 있어 언어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우리로서는 참으로 되돌아 봐야 한다. 하나하나의 낱말은 언어생활의 바탕이 되며 결정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그릇이다. 이른바 기생체계(parasite system)란 말을 쓰거니와 우리의 최근세사는 다른 겨레들에 힘입어 주객이 바뀐 삶을 살아 왔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프랑스와 같은 힘에 기대어 살아온 역사가 아니었던가. 우리말에는 한자, 일본어, 서구의 여러나라의 말들이 뒤섞이어 쓰이고 있다. 오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문화,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이 넘나들어 그 결과로 우리말처럼 뿌리를 내려 부족한 부분의 우리말을 기워주는 구실을 한 생산적인 측면도 많이 있다. 논리적인 어휘라든가, 수리적인 말에서는 절대적이며 현대로 오면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명·문화어들이 자연스레 우리말로 들어와 쓰이게 되었다. 일본이 겨레의 땅을 강제로 빼앗은 뒤 여러가지 많은 탄압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말과 고리지어 보면, 일본어를 쓰게 하고 조선말을 전혀 쓰지 못하게 했다. 이를테면 언어의 말살정책이 전가의 보검인 양 춤을 추어댔다. 오늘날에 와서 1960년 이후 일본을 통하여 들어오던 외국어가 직접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산업분야나 운동, 오락 등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먹고, 입고, 자는 집의 이름에도 외국어의 사용이 부쩍 늘어났다. 가히 우리말의 국제어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선 손 쉬운 보기로서 신문·방송에 쓰인 들온말 사용의 범람을 들어본다.(이종재(1987) 참조) (영어의 경우) 마이카시대에 맞추어 날로 늘어가는 여성 자가 운전자들, 선글라스에 휘날리는 스커프의 조금은 희귀하던 이미지에서 이제는 높아진 우먼파워의 상징이기라도 하듯 어디서고 쉽사리 마주치게 되는 모습들이다.(매일신문 1984. 11.13) 심플한 디자인에 V네크 스타일은 주니어들에게 어필하는 캐주얼복이다. (매일신문 1985. 7. 5). '88올림픽 59일간 종합리허설(조선일보 1987. 8. 13) 경북대학교가 첫 케이스이다(KBS 1984. 3. 6 9시 뉴스) 오 삼계탕 스태미너 넘버원(KBS 1987. .8. 23) (일본말의 경우) 노모를 단까에 태우고 피난 간다. 아나고 한 사라 하고 와리바시 두개 주시오, 요오지 있습니까. 당신 옷 가라가 좋구려. 위의 보기에 드러난 들온말은 이에 값하는 우리말로 얼마든지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말글살이의 이상이 '말 따로 글 따로 사람 따로' 하지말고 이른바 '언문일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들 들온말을 우리말로 모두 바꾸어 쓸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말이요. (영어) 마이카→자가용, 자가운전, 선그라스→색안경, 스카프→목도리, 이미지→모습, 상, 우먼파워→여성의 세력(힘), 심플→단순한, 산뜻한, 네크, 스타일→옷깃, 유행(양식), 어필하다→마음에 들다, 주니어→젊은이, 리허설→예행연습, 케주얼→평상, 케이스→사례, 경우, 스태미너, 넘버원→정력최고 (일본어) 단가→들것, 아나고→붕장어, 사라→쟁반(접시), 요오지→이쑤시게, 와리바시→짜개 젓가락, 가라→무늬 쓰는 사람에 따라서는 새롭고 호기심도 일고 하여 들온말을 쓸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제 나라 말을 두고, 조상대대로 써 내려온 겨레말을 놓아두고 다른 나라의 말을 씀은 참으로 되돌아 봐야 할 일이다. 말이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정신 곧 민족정서 혹은 민족의식이 깃들어 있음이요, 문화의 상징임을 돌이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감사하다는 인사말로 '고맙다'는 말을 한다. 이 때 고맙다(고마+ㅂ다>고맙다)의 고마는 <용비어천가>의 고마나루(熊津)의 고마(→곰熊)이며 이 형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서 삼국유사 고조선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어머니 신격인 고마(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맙다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아 [당신의 은혜가 단군왕검의 어머니신인 웅녀-곰신이 단군을 낳아 길러준 은혜와 같다→고마와 같다→고맙다]와 같이 모습이 심층에서 변형되어 쓰이고 있음을 알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단순비교이기는 하지만 영어를 비롯한 다른 말에는 '감사하다'는 인사말에 그 겨레들의 종교와 역사적인 내력이 드러나는 말은 많지 않다. (우리말과 다른 말에서 '감사하다'의 비교) 고맙다(국어) thank(영어) danken(독어) merci(불어) 謝謝(중국어) 有リ難ウ(일본어) (고맙다→(형태분석) 고마(熊)+ㅂ다(如) 고맙다 (뜻) 당신의 은혜가 단군의 어머니이신 고마(熊女)와 같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니까 우리말 갖고는 도저히 풀이할 수 없고 실용적이지 못한 경우에까지 들온말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위의 보기들에서처럼 얼마든지 역사와 문화전통에 뿌리박은 우리말을 놓아두고 새로움만 추구하려는 듯한 들온말의 사용은 피하자는 것이다. 이종재(1987-15)에서 보여주듯이 들온말을 쓰게 되도록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로서 조사항목을 100으로 볼 때 4할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이 잡지(21%) 친구(17%)의 순위로 드러나고 있다. 공영방송이나 신문에 쓰이는 말이나 문자표현은 규범성을 띤 표준성을 갖는다. 굳이 들온말을 써서 우리말을 뒷전으로 세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좀더 우리말에 애정을 가지고 남 다른 관심으로 겨레의 얼이 담긴 우리말을 써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조사보고에 따르면, 상품 이름 중에 서양말 이름이 차지하는 비율은 신발류 86% 자동차 86% 학용품 60% 학생잡지 70%가 넘으며 조사대상 2천여 상품에서도 순수한 우리말은 10%정도였다(박정숙 1987. 상품명에 순 우리말 10%뿐). 글쓴이가 1990년도 어느시의 전화번호부에 실린 몇가지 분야의 상점, 음식점 이름을 살펴본 일이 있다. 음식점 이름은 들온말로 된 이름이 66% 의류는 72%로 조사하였다. 여러지역에 있는 집합주택(아파트 1989)의 이름은 20%가 넘게 외래어와의 혼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가히 한국어의 국제화시대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일종의 언어적인 사대주의에 빠질 염려조차 없지 않다. 외국인이 와서 살 집도, 옷도, 상품도 아닌 것이 분명한 데 도대체 우리말을 제치고 외래어를 마구 써서 얻어지는 것이 무얼까. 어떻게 생각하노라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란 속담이 있다.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각기 겨레들이 돌아가야 할 기항지는 겨레얼이요, 겨레주의인 것이다. 오늘날 국제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발트삼국의 독립선언이 그러하고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배려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안 그래도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말로 토착하여 버린 중국어(한자)가 한글학회의 큰사전 에 따르면 55%나 된다. 알게 모르게 참다운 우리말은 외래어에 떠밀리어 국적이 없는 겨레말로 표류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 겨레는 지금 남과 북이 하나됨으로 가기 위하여 1991년 9월17일에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어떠한 값을 치르더라도 하나되는 겨레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 남북한이 보여주는 말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이미 상식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북에서는 주체사상이라 하여 거의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네들의 조어법을 따라 새롭게 뒤치어서 외래어를 쓰고 산다. 한편 남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통일을 하자면 전제되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말글의 남되기를 넘어서 겨레의 말글한누리를 이루는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연 세종날 529돌 학술발표모임(1991. 5. 18)에서 모스크바대학의 마주르 교수는 북에서 1980년 이후 처음으로 한자계통의 접미사를 허용 했다고 조사, 보고한 바 있다. 하물며 들온말의 범람이란 주체사상을 실현함에 있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어정책도 이쯤 되고 보면 닫힘구조라고 하겠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에서는 너무도 외래문화 내지는 말을 받아들임이 지나치게 개방적이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냐를 따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건대, 말이나 글살이는 우리 것에 중심을 두고 우리 생활에 꼭 받아들여야 할 들온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좋을 것이다. 들온말을 적는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들온말 받아들이기와 그 맥을 함께 한다면 대답은 바른 가늠이 잡힐 것인데, 이제까지의 현실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필요한 부분만큼 원음에 가까운 말을 살려서 적는다면 앞뒤가 맞을 것으로 짐작된다. 들온말의 낱말 받아들이기나 낱말을 적는 문제 모두는 우리말을 살리어 나아가는 말본과 맞춤법의 큰벼리-표준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에 따라서 이에 맞도록 이끌어 가면 통일지향의 언어 공동체를 이룸에 이바지가 될 것이고 우리말에 드러난 우리의 얼을 지켜가는 길이 될 것이다. 나라의 부강을 이루려면 겨레와 나라의 땅과 겨레의 말이 어우러져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시경 스승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고리모양의 어우름, 한라산 물 맑고 별이 아름다운 밤이면 하늘의 선녀는 달빛을 타고 연못에 내려온다. 몸과 머리를 깨끗이 하고 하늘이 그리운 마음에 달빛을 타고 다시 하늘에 오르곤 한다. 어느 새 선녀의 벗님이 된 사슴은 시나브로 예쁘고 나이 어린 선녀에게 정이 들고 둘이는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부족함이 없이 둘은 하늘과 땅, 풀꽃과 짐승, 새들의 축복 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며 달 밝은 밤이면 뭇 사슴들의 부름을 받고 이바지 음식을 대접 받기도 하였다. 한데 이게 웬 일입니까. 용왕의 부름을 입고 선녀는 사슴도 모르게 용이 되어 구름을 타고 하늘로 되돌아 간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운 임을 찾아 헤매었으나 사슴은 찾지를 못하였고 별이 내리는 못물 위에 선녀의 환상이 흐느끼는 듯 부는 바람에 물결만 드높을 뿐. 먹이도 물도 잃어 버린 채 밤과 낮으로 선녀를 그리워 하다가 물 위에 어린 선녀를 찾아 물속으로 들어 갔다가 아예 물속에서 죽게 된 슬픈 사연이 전해 온다. 해서 백록담 - 흰 사슴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라산은 깨달음의 원산이라 한라산, 이는 곧 제주를 뜻한다. 그 한라의 기슭에 뭇 목숨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 간다. 끊임 없는 바람이 불어 산을 넘듯 역사의 수레바퀴는 숱한 아픔의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그것도 섬 아닌 육지 사람들이 들어 오면서부터 말이다. 산은 제주섬의 남쪽 20리에 있으며 섬의 바람막이이자 울타리가 되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 은하수나 구름을 손으로 잡을 만큼 높고 아름다운 곳이 아닌가. 산은 달리 머리가 없다는 뜻의 두무산(頭無山) 또는 머릿부분이 둥글다고 원산(圓山)이라고도 한다(대동지지 참조). 막상 산 위에 올라 보면 백록담이 꼭대기에 있으며 이렇다 할 봉우리가 없다. 거의 둥근 모습을 한 백록담은 물론이요, 산아래로 펼쳐 진 바다로 둘러 싸인 큰 산이란 느낌을 준다. 하긴 산 중턱에서 올라다 보아도 반쯤 둥그스레한 산의 머리통을 알아 차릴 수 있다. 이름으로 보면 '한라-두무산-원산'이 같은 산을 가리킨다. 먼저 두무산은 어떤 내용인가. 글자대로라면 머리가 없는 산이니 우선 머리가 평평하고 둥그니까 그렇게 이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한 암시가 될 수 있다. 마을 이름으로 두무실이 있듯이 '두무(둠)'는 그 보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모음이 바뀌면 '둠-담-돔'과 같은 말들이 한 낱말의 겨레를 이루는 걸로 보인다. 기역을 말 끝으로 취하는 특별한 형태변화를 하여 곧 '둠(ㄱ)-둥/돔(ㄱ)-동/담(ㄱ)-당'과 같은 변이형들로 퍼져 나아 간다. 둥그미·동그라미·당그러하다와 같은 말이 같은 뜻 '둥그러함'을 드러 내는 말들이다. 탐라만 해도 그렇다. 옛말에는 아직 거센 소리가 자리잡지 못하였음을 떠 올리면 탐라-담라의 맞걸림을 생각할 수 있다. 하면 탐(담)은 원(圓)이지만 '-라(羅)'는 무엇인가. 신라의 '-라'와 같이 '땅'을 아니면 큰 마을을 드러낸다. 제주가 바다에 둥그렇게 둘러 싸였음에 터한 지도 알 수 없다. 바다와 구름과 안개 속에 둘러 싸여 보는 이로 하여금 느낌의 숲을 이루게 한다. 지구가 둥글게 돌아 가니까, 우주는 원의 모습으로 움직여 나가니깐 이 땅 위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들은 원형성 지향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동그란 귤나무의 꽃들이 아픈 세월의 한라산을 이야기하듯 계절을 두고 피다가 열매로 접어든다. 한라에 대하여 덧붙여 둘 것은 크고 좋다는 뜻의 '한'에 땅을 가리키는 '-라'가 본디의 속내가 아닌가 한다. 한라산(두무산 ·원산)은 둥글고 크고 좋은 산이란 의미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산(1915미터)이요, 보기 드문 풀과 새들이 떼지어 사는 곳. 겨레의 하나 될 동그라미를 진작부터 말 없는 외침으로 우리를 손짓해 준다. 어서 빨리 뭉치라고. 해서 잘 굴러 가라고. 산은 깨달음의 성자인가. 조선왕조초 권람의 글을 옮겨 놓으며 글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푸른 하늘 아래 한갓 한라산이라네 멀리 보이는 저 큰 바다는 끝 없이 넓기도 하여라 사람이 하늘별을 타고 바다의 나라에 왔는가. 말인듯 용인듯 바다와 산이 한가롭구나 땅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주었나니 배는 바람을 타고 갔다간 되돌아 온다. 태평세월에 벼슬 하는 이 고을의 그림만 만지작거려 이 고을이 비록 별수 없어 보인다 해도 그림에서 베어내면 어떡할려고."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먼 눈 뜨기와 천수관음(千手觀音) 무릎 세우고 두 손 모아 천수 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 손과 일천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두 눈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오시면 그 자비가 얼마나 클 것입니까 ('도천수관음가'에서) 눈이 먼 아이를 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차라리 어머니 자신의 눈이 먼 게 낫지. 신라 경덕왕 무렵,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부인은 태어나 다섯살 된 아이가 갑자기 소경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행여 어떨까 하여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집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 앞에 나아갔다. 끓어 오르는 답답함과 간절한 소원이 온몸을 휩싸 안는다. 아이를 시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관음(觀音)부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웬일인가. 아이의 먼 눈이 갑자기 보이는 게 아닌가. 희명부인의 기도소리를 바르게 들었을까. 관음부처의 일천 손과 일천 눈이. 부인의 이름이 드러내는 듯이 상당한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바랄 희, 밝을 명. 그러니까 눈이 밝게 되기를 빌고 바라서 소원을 성취한다는 얘기다. 그 간절한 기도의 소리를 눈으로 보듯 알아차린 관음(觀音)부처의 신통한 병고침. 앞뒤가 서로 걸맞는 줄거리다. 지극한 정성이면 먼 눈이라도 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눈이 멀다의 '멀다'는 어떠한 뜻바탕을 갖는가.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멀리 있는 하늘이나 산 혹은 바다를 보면 그 형체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을 터. 멀어서 안 보이는 보통사람이나 맹인이나 멀리 있는 물체를 보지 못하기는 한 가지다. 마침내 '멀다'는 말은 '멀리 있다' 곧 보이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에둘러 이르는 그림씨이다. 거꾸로 눈이 잘 보인다는 건 보아야 할 물체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어 확실하게 드러남을 이른다. 눈이 먼 아이의 안스러운 처지를 바라다 본 관음부처의 눈과 귀가 희명부인의 간절한 소원의 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을것인즉. 아니라면 어떻게 천수관음부처에게 올리는 노래를 마치자 먼 눈이 잘 보였단 말인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은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온 게 사실. '아이로 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令兒作歌禱之)'는 삼국유사의 글을 어떻게 풀이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지은이가 된다. 우선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기도하도록 했다'는 풀이와 '아이로 하여금 (희명이) 노래를 지어 그대로 빌게 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앞의 경우라면 노래를 지은이도, 빈 사람도 아이가 되지만, 뒤의 경우에는 희명부인이 노래를 짓고 아이가 그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앞에서 희명부인이 지은 노래임을 풀이하였거니와 이제 노래의 내용을 떠 올리면서 그러한 가능성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노래의 속내와 어머니의 기원 무릎을 곧추하고 두 손바닥을 모음은 관음부처를 향한 경건한 기도의 자세를 드러낸다. 아이도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모습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짐 깊은 경건한 기도의 모습은 원왕생가(願往生歌)나 청전법륜가나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에서도 보인다.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원왕생의 노래, 법우(法友)를 빌기 위하여 부처님에게 나아가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청전법륜(請轉法輪)의 노래며 손을 부비어 아뢰는 청불주세(請佛住世)의 노래는 모두 간절한 사람들의 소망을 비는 모습임에 틀림없다(장진호,1989, 앞 논문 참조). 대상이 누구라도 좋다. 아이의 눈만 뜨게 해 준다면 하는 어머니의 샤마니즘에 가까운 생각은 분명 보통 사람의 생각을 넘는 초능력한 파장을 일으켜 관음부처의 마음에 전함으로써 같은 기가 만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을 불러낸 것은 아닐런지. 지성이면 감천이라 함도 이러한 동기감응의 이어짐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본다. 무릎을 꿇는다 함은 모든 걸 던져 버린 상태다. 희명부인과 아이는 부처님의 은총을 기다린 것이다. 많은 사람의 간절한 말은 쇠붙이라도 녹인다고 했는바, 여기에 희명부인 말고 다른 사람의 정성이 끼어 들어 보았자 별 볼 일이 있겠는가. 또 다섯살의 아이가 그렇게 간절한 소원을 빌 수가 있을까도 의심스럽다. 이러한 희명부인의 절절한 기원은 둘째 연에서도 드러난다. 천수관음의 일천손 가운데 하나를 놓아서 손 끝에 달린 눈 하나를 빼어 아이에게 달라는 기원이다. 그 손과 눈은 어리석은 뭇중생을 위한 손이며 눈이었으나 저다지도 간절하게 비는 마음을 어찌하랴. 만일 승려가 이 노래를 지었을 경우라면 눈을 빼 달라는 교리에 벗어난 애원을 하기란 어려운 일. 아이의 눈을 고치게 하기 위하여는 염치도 온갖 명예도 다 던져 버리는 어머니의 피눈물 어린 정성이 노래에 배어 있는 것이다. 꼭히 승려가 지었고 빌었다면 눈을 뺄 게 아니고 다라니 주문과 같은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읽으면서 빌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천수관음에 비는 노래를 지은 이는 희명부인 밖의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약한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힘으로 눈을 뜨게 되는 심청의 아비 심봉사처럼 도천수관음가에 눈을 뜬 아이도 관음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희명 즉 부처의 광명한 세상에 눈을 뜸과 동시에 아이도 눈을 뜬다는 겹치기 효과가 있어 영험하고 신이한 부처의 누리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한다. 눈이 육신의 등불이라면 믿음은 영혼의 누리를 밝히는 정신의 횃불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시대를 따라 바뀌지만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삶이란 갈대는 지나친 욕심으로 점차 눈이 멀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원망(怨望)의 노래와 잣나무 물색 좋게 잣나무는 가을에도 그릇되이 아니 지매 (잣나무) 너처럼 (살아) 가자고 하였는데 우러르던 (그 때 그) 얼굴이 (지금) 가신 줄에야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엣 지나가는 물결(이) 언덕을 할퀴듯이 (임)의 모습이야 바라 볼 수 있다 해도 세월 (세상 인심) 인즉 마저 함부로 달아난 것이로구나 ('삼국유사 - 원가(怨歌)'에서) 약속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믿음이 깨어지고 없는 곳에 사랑의 움이 돋을 리가 있을까. 거기에는 어떤 열매도 바라 볼 수도 없는 일. 그것도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었던 굳건한 약속이었기에 더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어지러워 흔들리는데 이를 아물여 가기 위하여는, 앞 일을 꾀하기 위하여는 뼈를 깎는 발돋움이 요구되었던 터.한데 신충(信忠)과 경덕 임금 사이에 있었던 약속은 사라지고 속은 상하고 해서 임금과 함께 있었던 자리의 잣나무에 원망이 담긴 글을 적어 매어 달자 나무가 말라 죽는 이상스러운 변괴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효성왕 때의 이야기로 나온다. 효성왕이 세자 시절에 신충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한 효성왕(孝成王)의 말이 있었다. "뒷날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얼마뒤 효성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며 공을 세운 신하들에세 상을 주었다. 하지만 신충은 벼슬이 없었다. 이에 원망을 품은 신충(信忠)은 임금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나무가 말라 버리는 괴변이 일어났다는 것. 이를 안 임금은 진상을 조사해서 다시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매 잣나무가 다시 살아 나게 되었으니 그 때 신충이 지은 노래가 원망의 노래 - 원가(怨歌)라는 것이다. 여기 효성임금을 경덕임금으로 본 실마리는 무엇인가. 문제의 풀이는 신충이 벼슬을 그만 둔 시기로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충은 경덕왕 16년(757)에 김사인(金思仁) 대신에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에 오른다. 경덕왕이 우리나라의 땅이름을 당나라식으로 '-주(州) 군(郡) 현(縣)'을 붙여 쓰게 하는 등 중국화 정책을 실시하였던 시기가 바로 신충과 함깨 정사를 보던 때이다. 신충은 김옹과 더불어 경덕왕 22년(763)에 벼슬 자리에서 물러 난다. 이는 같은 정당이면서도 생각을 달리한 이순(李純)의 상소사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실인즉 경덕왕의 정치가 잘못되었음을 바로 이르는 내용이었으니, 이들 대신에 만종(萬宗)과 양상(良相)이 등용된다. 뒷날 양상은 신라 36대 임금인 혜공을 죽이고 스스로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신충은 개혁정치에 앞장 서 일하다가 반대파들에게 몰려서 그만 두게 되니 임금과의 약속이 깨어졌던 터. 차려 놓은 밥상에 재 뿌리기가 된 것이다. 나름대로 얼마나 야속하고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한데 일연(一然)스님은 신충, 김옹, 이순이 모두 왕의 사랑을 받은 신하로서 함께 벼슬을 그만 두고 남산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다. 까닭인즉 삼국사기의 '신충, 김옹을 면하고'의 '면(免)'을 그냥 지나쳐 버렸으니 신충이 다른 두 벗과 약속을 하고 갓을 벗어 걸고 산으로 갔다는 풀이를 하였기 때문이다(양주동, 1977, 고가연구, 참조). 다시 신충이 벼슬을 그만 두고 단속사(斷俗寺)란 절을 지은 기록만 보아도 미심쩍다. 절을 지은 해가 일연스님의 기록으로는 경덕왕 22년(763)인데 배경설화에 대한 별도 기록인 별기(別記)에서는 이순이 왕 7년(74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일로 보아 '원가(怨歌)'를 지은 창작 시기나 동기가 삼국유사 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저 잣나무처럼 살자더니 세자는 바둑을 두면서 잣나무를 두고 변함없이 잘 해 보자는 약속을 한다. 너를 잊지 않겠다(不忘汝)함은 특정 개인인 신충 뿐 아니라 신충과 함께 나눈 나라 다스림과 삶의 바른 길에 대한 서로간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에 감복한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는 것(興拜). 세월이 흐르고 자리가 달라지면 마음이 바뀌기 쉽다. 경덕왕도 세자 때 먹었던 마음이 바뀌고 신충과의 언약을 저버렸으니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걸어 놓고 원망하는 노래로 부를 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반대파의 말만 듣고 신충과 김옹을 벼슬 자리에서 쫓아낸 것이니 바로 '우러르던 (그 때 그) 얼굴이 (지금) 가신 줄이야'하고 원망을 한다. 우러르던 얼굴은 곧 경덕왕이요, 변한 것 - 가신 것은 약속이요, 서로의 믿음임에 분명하다.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에 / 지나가는 물결이 언덕을 할퀴듯이"라. 달빛이 환하고 아주 평화로운 연못에 바람이 불고 해서 그런 평화는 깨어진다. 못에 담기는 물은 나라 다스림으로 볼 수도, 많은 나라의 백성일 수도 있다. 본디 '못'이란 '못 - ㅁ - 몰'과 같은 낱말 겨레를 이루며 작은 물체들이 모여 드는 곳을 이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은 달이니, 임금이 달로서 비유된다. 잔잔한 못은 평온한 세월인바, 여기에 바람이 불어 닥친다. 큰 시련이 다가 선 것이다. 신충과 임금의 약속은 무너지고 정세는 험난해져서 세상이 살얼음판으로 바뀌게 된 걸 이른다. 할퀴면 상처가 나는 법. 심하면 목숨을 잃는다. 해서 신충 산속으로 든다. 노래의 흐름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험한 세상을 원망하고 탄식하기에 이른다. "임의 모습이야 바라볼 수 있다 해도 / 세월(세상 인심)인즉 마저 함부로 달아난 것이로구나." 임금은 같은 사람인데 간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세상 인심이 고약해지고 평화는 사라지고. 신충 자신의 무능력함과 아울러 임금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드러냄이다. 노래의 줄거리로 보아서 정과정곡의 마지막 글과 같이 임금이 마음을 돌리어 옛 약속을 지킴을 애원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장진호, 1989, 앞의 논문). 애 어른 할 것 없이 약속을 지킨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약속은 약속이기에 믿음을 이루어 내야 한다. 믿음은 '믿다'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씨이다. 여기 '믿'은 바탕 곧 땅을 가리킨다. 땅을 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신하이든 임금이든 마찬가지. 흙에서 모든 목숨살이가 태어나서 다시 그 흙으로 돌아감이니 가장 변함이 없는 건 흙이다. 흙은 어머니요, 삶의 뿌리이니 진실로 믿음이란 우리의 영혼이 깃드는 영역이기에 믿음을 저버리면 거기에는 깨어져 부서짐만이 있을 것이로다. 믿음이여.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