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전 이화전에 대하여 이작품은 작자 미상의 국문 소설로서, 전기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의 힘으로는 왜적을 격퇴할수 없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왜적을 몰아 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전라도 여산땅에 괴변이 일어났으니 부임하는 부사마다 죽고, 백성도 알수 없는 병으로 수 없이 죽었으며, 여산은 마침내 폐읍이 되다시피 변해 버렸다. 이러할 때 이화라고 하는 장사가 있어 조정에 나아가 여산부사가 되어 가기를 자원하는데, 물론 이화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인물이다. 이부사가 부임하여, 먼저 관아 후원연못에 있는 수백년된 자라가 밤중이 되면 나와서 처녀가 있는 민가를 찾아가 괴롭혀 죽게 하는 것을 퇴치한다. 그런데 그 자라가 민가로 들어갈 때 대문 앞에서 "여백아! 문열어라"하니 그 대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을 보고 그 대문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가져오게 하여 앞에 놓고 여백을 부르니 대답을 하므로 부사가 죽은 이유를 알고 있는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백의 혼이 알고있다고 하면서 관아 후원에 있는 은행나무 속에 수백 년 묵은 암수의 여우가 있어 조화가 무궁한데, 드 여우가 원님을 죽여 피를 먹는다는 것이다. 이에 이 부사는 고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은행나무를 베게 하였더니, 나무 속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나무 위에서는 백발노인이 살려 달라 외치고, 땅에 떨어져 죽은 요괴는 소녀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 부사가 크게 놀라 여백을 불러 물어 보니, 원님은 3년후에 중국에 들어가 죽게 될것이며, 자기에게도 큰 화가 닥쳐 왔으니 도망하겠다 하고 다시는 대답이 없다. 그런데 대문 자물쇠에 붙어 있었던 귀신은 임진왜란때 청병장인 이여송의 아우로 부원수로 형과 같이 출전했다가 전사하고는, 그 영혼이 의지할데가 없어 자물쇠에 붙어 있었다고 했으나, 이여백이 임진왜란에 출전한 것은 사실이나 전사하지는 않았으므로, 이것은 작가의 허구이다. 이렇게 하여 이부사가 수백년 묵은 자라와 여우를 퇴치함으로써 여산 땅은 무사하게 되었으나, 그때 죽지 앟고 살아 남은 암여우가 중국으로 들어가 황제의 총비를 죽여 없애고, 자기가 총비의 탈을 쓰고 황제를 유혹하게 되니,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진다. 하루는 총비가 아파누워, "밤마다 꿈에 조선의 장사 이화가 와서 나를 죽이려 하며, 대국을 치고 황제를 죽이겠다고 하니, 빨리이화를 잡아들여 죽이소서." 라고 말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이화를 데려오게 한다. 이화가 중국으로 들어가는데 홀연 이여백이 나타나 중국으로 들어가 살수 있는 계교를 일러준다. 이에 이화는 이여백이 시키는대로 보라매를 사가지고 가서 황제 앞에 내놓으니, 그 보라매가 총비의 백호를 쫓자, 총비가 죽으면서 여우로 변하였다. 황제는 이화로부터 전후의 얘기를 듣고는 요괴를 퇴치한 공을 사하고는 높은 벼슬을 제수한다. 이화는 중국에서 벼슬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이여백의 화상을 그려 사당을 지어 보시고 사시로 제사를 지내 주었다. 이와 같은 '이화전'은 요괴퇴치 설화를 소설화한 작품으로, '김원전'이나 '김영전'과 같은 유형의 전기소설로서, 우리의 겨레의 지혜를 중국에 과시한 점에 있어서 흥미롭다. ************************************************************************************* 선조의 말에 시운이 불행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일어나서, 모든 장수며 군사가 정예하여 물을 건너와 백성을 마난즉 살해하니, 상과 문무백관이 날마다 근심하여 군신이 상의왈, "장수를 뽑아 삼군을 익르어 적군을 막으라." 하시대, 장수 수명 발군하여 나아가 진치고 적을 기다리더니, 왜적이 날아들어 일합 충살하여 조선군이 반이나 죽으매, 남은 군사 감히 저항하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적병이 승승 장구 하여 성에 들어가 여름농사 지으며 아국 사람과 혼인하여 사는지라. 상이 근심하사 통곡 왈, "아국이 불행하여 왜적에 함놀 한바 되었으되 일인도 가히 막을자 없으니 이를 어이 하며, 수토 백성이 반년에 유리할줄 어지 알리오." 하시고 감창유체하시니, 백관이 오열고두청죄 왈, "이제는 달리 처치할 길이 없사오니 대국에 청병이나 하여 봄이 마땅할까 하나이다." 상이 옳게 여기사 중원에 사신 보내어 청병하시니, 명천자 대경하여 즉시 장수를 뽑아 보내실새, 장군 이여백 형제를 장수 삼아 일만 정병을 거느려 보내시니, 이여백 형제 하직코 사신과 한가지로 아국에 이르러 이여백은 좌선봉이 되고 이여송은 우선봉이 되어 가각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 왜적과 접전하매, 수합이 봇하여 적병이 대패하여 행렬을 앓고 어찌할줄을 몰라 사방으로 분산하여 살기를 바라 돌아가니라. 가석할사, 이여백은 만리 타국에 와 만군중에 죽으니, 어찌 망극하지 않으리오. 이때에 왜적은 멸하였으나 여송은 형을 죽이고 망극히 돌아가고, 상은 만조백관을 거느리어 입경하사 연구히 태평을 누리시나, 전라도 여산 고을 간 원마다 죽고 고을이 황폐하여 인심이 궤란함을 들으시고 깊이 근심하사 유예불평하시더니, 시에 이화 란 장사있어 이찍 무과급제하여 오래 벼슬을 못하고 분울해 하더니, 차언을 듣고 상소하여 주왈, "신이 이제 과거하여 10여 녕에 벼슬을 못 하옵고 성하에 무익 하옴을 숙야에 한이 깊삽더니, 이제 여산의 재변이 고 이하와 본국이 위태하오니, 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한번 입거하와 사변을 제어하오리이다." 상이 서사를 보시고 대희하사 즉이 여산부사를 제수하시자, 이화 대희하여 사은하고 집에 돌아오자, 가중이 대경하고 부모왈, "이제 여산 가는 원마다 죽은자 30여인이라. 네 구태여 자원하여 죽으려 함은 어쩜이뇨. 달리 말고 가지 말라." 생이 대왈, "소자 듣자오니 사불범정이라 하오니 존고는 과히 염려치 마소서." 인하여 즉시 하직코 발행 4일에 여산에 이르러 도입하고 본부 왈, "아사를 수보하라." 관인이 일시에 보왈, "수보하지 못하리로소이다." 원이 대질왈, "내 조그마한 사용의 말을 들으리로. 빨리 수보하라." 하리 고이히 여기고 두려우나 시러곰 마지 못하여 쓸고 고하니라. 이에 원이 걸어 배회하더니, 앞에 부슨 나무 있거늘 물은대, 대왈, "고인이 이르되 천여 년이나 묵은 은행나무라 하더이다." 하더라. 원이 밤에 잠이 없어 두루 배회하니, 월광은 은양에 배이고 만뢰 구적하매, 자연 두루 걸어 후언에 이르니 큰 못이 있거늘, 나아가 못가에 앉아 속상을 굽어보려니 홀연 물 가운데에서 소반 같은 검은 짐승이 나와 마로 마을 집으로 가는지라, 극히 고이히 여겨 마침내 보고자 따라가니, 고을 과역한 집에 들어가벼 의연히 말하여, "이여백아, 문열어라." 하니 문 속에서 응대하고 문열리는 듯 하더니, 그 짐승이 들어가거늘, 더욱 고이히 여겨 가까이 가보니, 문득 배 앓는 소리 진동하더라. 조영히 들으매 달이 서령에 떨어지고 원촌에 계성이 나니, 그 짐승이 또나와 여백을 불러, "문열라." 하니 대답코 문을 여니, 다시 나와 그 못속으로 들어가는지라. 원래 여백은 당장이라. 타지에서 원사하여 고혼이 유유탕탕 무의하다가 이집 자물쇠속에 접하였으니, 옥동사귀되어 뒷복의 묵은 자라의 청을 들어 문을 ㅇ응하여 사람을 앓게 하더라. 원이 가장 의범하여 돌아와 자고 명일에 과인을 불러 그 집에 든 자를 물으니, "이고을 아전의 집이니이다." 즉시 아전을 부르라 하여 문왈, "네 예서 산지 몇해나 되었느뇨." 대왈, "오륙대를 아전으로 내려왔으니, 몇해이온줄 알리이까." 원 왈, "네집 자녀소솔은 얼마나 되며, 일직이 우환이 없었느냐." 대왈, "소인이 신수 기험하와 나이 늦도록 한 자식이 없어서 상하 설워하옵더니 노년에 일녀를 얻었사오며, 비록 무익하오나 재용 총혜하옴이 드므온지라, 깊이 사랑하오며 의롭사옵은 위에 없삽더니, 7세부터 야야 복통을 얻사와 아제 7,8년에 점점 고황지질이 되오니 죽기에 가까운지라. 일로 설워하나이다." 말을 끝내고 구구 연낙하거늘, 원이 추연이 여겨 이르되, "네 원래 가히 불쌍하니 내 술로 병 고칠 바를 이르리라." 아전이 전전 감은하니, 원이 작야사를 생각코 짐작을 이르되, "네집 문앞을 널리 파고 그 속에 탄화를 많이 피워, 그 위에 흙을 얇게 하여 허방을 놓으면 반드시 신통함이 있으리라." 아전이 배번 감사하며 짐에 돌아와 원의 가르친 대로 하였더니, 과연 차야부터 앓지 아니하는지라. 아전 부처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원에게 은혜하여 하니, 다만 제 집 전답 문서 가장을 가져다가 원의 앞에 이르러 백배칭은 고두사 왈, "천만 의외에 높은 은혜를 입사와 죽사올 한낱 자식을 실리시니, 황공 성은 이 백골 난망이라. 소인의 전답 문서를 감히 드리나이다." 원이 소왈, "내 불길한 문서를 받으리오. 다만 네게 달리 청할것이 있으니 들을소냐." 아전이 감황 대왈, "소인의 모체를 헤치어도 당당히 사양치 못하오리니 이르시는 바를 봉행하리이다." 원이 답왈, "네 집의 묵은 큰 자물쇠를 구하나니, 큰 문 잠갔던 것을 가져오라." 언필에 아전이 전도히 가더니 드쇠를 가져다가 죽시 헌하는지라. 원이 기꺼이 받고 문왈, "네 집 허방 놓은 곳에 무슨 표 있더냐." 아전이 대왈, "큰자라 그속에 빠져 죽었사오니 고이히 여기나이다." 원왈, "그 짐승이 네 자식 앓게 하던 것이니라." 한데, 아저과 듣는 자 신기히 여기고 아전은 감사 백배하여 가니라. 이화 그 자물쇠 속에 이여백의 혼이 접하였음을 알고 읍중 재변을 알고자 하니, 치인의 신기묘략과 덕을 알리러라. 자물쇠를 앞에 놓고 소리하여 이여백을 부르니, 그쇠속에서 쾌히 대답하니, 원이 고성왈, "내그대 성명을 들으니 대국 명장이라. 불행히 타국 난군 중 몸이 망하메 인간의 차탄하는 마이어늘, 비록 혼백이나 녹록히 말을 집 자물쇠 속에 들매, 짐승의 청을 들어 사람을 해하니, 그대의 용상함을 위하여 웃노라." 여백이 감탄왈, "내 네 나라를 위하여 구하러 만리 타국에 왔다가 애매히 난군중에 죽음을 만나 이런 고혼이 유유 탕탕하여 의자할 길이 없겉늘, 이 집 자물쇠 나이 많아 가히 주접하기 마땅한지라. 머물러 온지 오래지 아닌지라. 무슨 사람을 해함이 있으리오." 이화 이르되, "내 가히 보았는지라. 문을 열어 출입을 응하니 해한 작시 아니냐." 여백왈. "이 뒷못에 만년이나 묵은자라 있어 신기 도술로 사람을 잃게 하며 괴로이 보채니, 이기지 못하여 문을 열어 주나, 구태여 해함이 아니로다." 이화 왈, "여언이 최선하니 지리히 이를 것이 아니나, 내 다만 긴도히 묻고자 하는일이 있으니 혼은 사양치 말라." 하고, 인하여 문왈, "내 들으니 이 고을 원이 전후에 오는 이마다 죽는 자 하나둘이 아니라. 반드시 무슨 요사작나함이라. 어찌 알소냐." 여백왈, "내 모름이 아니나, 이사귀 억만여 년 북은 은행나무 점유하여 신기묘산이 천만리를 제치고, 능통요술이 이매망량을 다 멸하니, 이러므로 고을 원이 많이 죽었으나 감히 뉘우치지 못라였으매, 제어하는 도리 극난하니 말과 의사 부질없도다." 이화 차언을 들으매 사세 다난하되 종래 알아 제방할 뜻을 두고 다시 문왈, "내 비록 용렬하나 약간 간사로 없이할 것이어늘 말을 끝내고 묻지 않음을 나를 업수이 여김이라. 빨리 이르지 아니하면 내 찬 보검이 수중에 있으니, 네혼령을 버히리라." 여백 왈, "처음이라. 더크게 말하면 크게 어려운 줄 달거든 다시 물어 두렵게 하내 어찌 이르리오." 이화 성노하여 칼로 당당히 버히고자하니, 여백이 애걸하여 왈, "네 나를 버히고자 하니 무릇 두 번 죽는 일이 없으나, 너를 불행히 만나 괴로움을 당하는지라, 내 이르나 에 처지를 잘못하면 나는 예있지 아니하고 너도 참사하리라." 이화 운둔 문왈, "좋은꾀를 가르치면 어찌 성치 못하리오." 여백왈, "저 은행나무 천여 년이나 묵은 여우 자웅이 있어 변화 무궁하여, 이 고을 원마다 죽여 그 피 빨아먹으니, 점점 요술이 더욱 신기한지라. 잡기를 착실히 할지니, 이고을 백성에게 영하여 만군으로 겹겹이 진쳐 인인이 다 활과 총과 창검을 장약하여 대하고, 대톱과 큰 도끼로 나무를 버히면 처음 혈이 낭자할것이니, 억만병으로 여우를 잡되 일시에 둘을 다 잡으면 변이 없으리라." 이화 차언을 듣고 기꺼워서 왈, "내 착실히 할 것이니 염려 말라." 하고 가 면에 하령하니, 그물을 맺거 두루 치고 억만인으로 겹겹이 둘어 진치고 나무를 버히라 하니, 모든 관리와 백성이 일시에 말려 왈, "이나무 극히 영겁하와 나무 위에 백수 노옹, 노고 때때로 나오니 이는 신선이라. 신기 변화 무궁하니 이 나무 버히신즉 백성이 다 죽기 쉼사오니 성주꼐서도 화 있사온가 하나이다." 원이 대소 왈, "너희 무삼 지각이 있노라 감히 내 명을 거스리느뇨. 순의치 아니하니 나무 속 묘사를 잡지 못한면 반드시 너희들 이 창검으로 처벌하리라. 빨리 나무를 버혀 착실히 다 잡으라." 하고 호령하니, 질성이 상이 무너지고 고을이 터지는 듯하니, 모든군사 문득 황겁용약하여 일시에 달려들어 버히니, 과연 나무 속에 유혈이 낭자하니, 다 실색 창황치 않을수 없어 일시에 빌어왈, "이나무 변이 이 같사오니 덕분에 버히지 마사이다." 원이 문득 고성으로 대질왈, "너희 관원의 지휘를 받아 몸이 비록 진하나 맞지 아니려든 나무 재변이 여차하며 버히는 바라. 너희 방자히 굴어 대사를 이렇듯 긄케 하니, 반드시 실리지 못하리라." 하고 호령이 추상 같으니, 제군이 마지 못하여 일시에 버히니라. 연하여 나무 위에 백발노오, 노고 있어 '살리라' 벽력같이 소리지르니 문득 천지 합색하는 듯 일광이 혼무하고 음풍 대작하며 내외 진동하니, 성하 제군이 다 거구로지고, 이화 겨우 정신을 차려 고성 왈, "모든 군사는 창검을 발하여 저 요괴를 잡으라." 연하여 재촉하니, 군민이 겨우 인사를 차려 일시에 고함하고 나무를 버히니, 요괴둘이 땅에 떨어지매 길이 한발은 되고 금빛같은 여우라. 화살과 창검으로 그 짐승을 죽이니 그제야 정신을 차려 원에게 사례왈, "이런 요괴 읍중에 있어 종전 대변이 그러하옵더니, 성주 명공의 신기 이 같사오니, 이제는 태평을 누릴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천신이 강림하여 여러 원님의 보원을 하시다." 하더니, 문득 보니 죽은 여우 숫여우 뿐이라 하니, 이화 실성대경하고 돌아와 여백더러 왈, "지휘로 인하여 잡았으나 암 여우를 잃었으니 장차 어찌하리오." 여백이 대경왈, "당초에 너더러 이르매 하나 잃으면 대한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암여우를 잡지 못하였으니 나도 아무곳으로나 피하려니와, 너는 삼년내 대국에 가서 죽으리라." 하고 하직하고 없거늘, 아무리 부르나 대답지 않으니, 이화 기울지념을 정치 못하여 일야 면식이 불안하여 여취여치하여 지내더라. 화설, 암여우 여러 천여 년을 태평히 지내다가 이화의 화를 입어 분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국에 들어가니, 황제 이때 백관의 조회를 파하시고 춘화당에 어좌하여 외첩귀인을 청하사 화촉을 완상하실새, 귀인의 반취한 양볼이 도화같고 춘풍을 이기지 못하여 세우 휘둘러 광풍을 만난 듯 하여 아리따운 태도 인심을 녹일 듯 한지라. 황제 새로이 희소 왈, "귀인의 반취한 옥안이 금이 더욱 진실로 경국지색 이로다." 하시더니, 언미필에 동남간으로서 금광이 조요하여 모란 포기로 들어가거늘, 황제 대경하사 궁인으로 가보라 하시니, 종적이 없는지라, 황제 의혹 경민 하사 장사로 궁중 사면을 지키라 하시나, 종래 무슨 자췬줄 모르고 궁인이 많이 불행하더라. 차석타. 귀인이 그날 여우를 보고 기운이 혼침하여 즉시 침실로 들어와 밤새 위중하여 극중한지라. 황제 크게 근심하시고 궁중이 진경하더라. 이때 그 여우 밤마다 삼사경 이면 궁중에 들어와 귀인 침소하더니 병이 드는지라. 일일은 일기 심히 음랭하여 사람의 기운을 혼침케하더니, 차야에 홀연 바람이 일어나 촉화어지럽고 한기 사람에게 사무치니, 궁중 제인이 다 거꾸러졌더니, 여우 들어와 귀비를 잡아 골육을 다 먹고 그해골을 써 완연히 그 자리에 누었으니, 뉘능히 여우인줄 알리오. 동방이 밝으매 모든 궁의 방을 보니 완연히 전과 같거늘, 들어가 귀인을 보고 꿇어 문왈, "간야에 음풍이 일어나고 냉기 극심하니 가장 고이코 기운이 혼침하와 겨우 진정하였사오니, 행여 귀체를 상하신가 하여이다." 귀인이 탄왈, "너희 등이 나로하여 여러날 경야하여 구치하니 그렇도다. 나도 그런일 없고 병세 나으니 차후는 염려 말라." 하더라. 언필에 황제 병을 보고자 들어오시니, 귀인이 화계 복지 돈수 왈, "신첩이 폐하의 은총을 온전히 입사와 아제는 병세 나았아니다. 폐하의 망극하온 은념이로소이다." 상이 크게 기꺼워하여 그 손을 잡고 웃어 왈, "귀인의 병으로 근심이 깊더니 금일에 얼굴을 보니 가장 신기 한지라. 천상 정장 유액을 먹었도다." 귀인이 고운 빛을 머금고 아리따운 교태를 하니, 교언영색이 장부의 굳은 간장을 사르는지라. 황제 더욱 과혹 하사 조야사를 귀인의 처치대로 하니, 나라가 점점 어지럽더라. 일일은 귀인이 금금에 싸여 일어나지 아니코 앓으며 상께 고왈, "근래 야야에 꿈울 꾸오니 한 장사 보검을 비껴 들고 이르러 조선국 이화 여산원 장수라하고 칼을 들어 첩의 머리를 치고 이르되, 타일 내 반드시 아군 전발하면 천자와 너의 머리를 버혀 쾌히 하리라 하고 죽이려 하오매, 꿈을깨니 이리 앓아서 죽음이 가까오니 잔구하온 목숨을 아끼옴이 아니오라 폐하의 갖자온 은혜를 잊자오면 구천 타일에 원혼이 되올지라 깊이 슬퍼하나이다." 상이 탄왈, "숨이 고이고 또한 병이 저렇듯 하니 필연 조선 장사 있어 정녕하다." 하시고 조선에 사람에 보내어 이화를 잡아오라 엄칙하시니, 사자 아국에 이르매, 선조 황칙을 받자와 이화 불러 보시고 가기를 이르시니, 이화 전일 여백의 말을 아뢰고,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아뢰어 작별하니, 상이 또한 감탄하사 왈, "이 다 아국 재변이 대국에 참변한가 싶으니 양국의 불행이라. 어쩐 연곤 줄 아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헤아리니 침식이 불평하도다." 하시고 아무려나 빨리 감을 전교하시니, 이화 사표를 향할 의여취여치하여 집에 돌아와 부모 처자와 친척을 모아 생리 사별됨을 함구 탄왈, "전일 여산에서 이화를 나타내었으니 또한 원될 것이 없고, 장부 한번 죽기를 아낌이 아니라, 노래 노부모를 이별하고 타국 원혼이 되매 어찌 참담한 심히를 억제하리오." 인하여 누수 냉락하니, 부모 통곡 왈, "무단히 대국에서 부름이 고이하나 어찌 돌아오지 못함을 이르느뇨." 이화 여백의 말을 고하자 부모 처자 우너근 족친이 아니 우는 이없더라. 정일을 당하여 십리 정도에 주찬을 익르어 배별하고 천행으로 다시 돌아옴을 축원하더라. 이화 궐하에 하직코 발행하여 3일이 되매 의주에 이르러 홀로 잠이 없으니, 문에 기대 비회를 정치 못하여 탄식, 옹려에 하늘을 우러러 축수하더니, 홀연 공중에서 불러 평부를 물으니, 이화 경혹 답왈, "혼야에 뉘 나를 운군히 불러 묻느뇨." 답왈. "나는 이여백이니, 이제 네 저렇듯한 형색이 있을줄 먼저 헤아린 바라. 가히 참혹하여 보지 못함이로다." 이화 반갑고 기쁨을 띠어 답왈, "금야 찾음이 실로 여의라. 생사에 유신함을 알리로다. 과연 그대 영신의 이 같음에 밤곡하나, 장차 어쩌리오." 여백이 위로 왈, "내 찾음이 살길을 알리고자 함이라. 수회를 그치고 자세히 들으라." 이화 감은함을 이기지 못하더니, 여백왈, "내일 발행하반 일이 못하여 비가 오거든 여차여차 한집에 들면 보라매 있을 것이니 값을 헤아리지 말고 사 가지고 대국에 이르러는 황제 반드시 옷을 벗고 들라 하나 죽기로 거역하고 벗지 말고 그 매를 소매 속에 넣고 들어가 내어 놓으면 살 게교를 족히 될것이요, 공명도 얻르까 하노라." 이화 대회 감읍왈, "뜻하지 아니한 곳에 이르러 은근히 살기를 두 번 가르치시니 진실로 은혜 백골난망이라. 타계에서 갚기를 기약하고 상벌하노라." 명일에 길 떠나 반일이 못하여 과연 죄우 대래하니, 이화 양천사 왈, "여백의 신기함이 이 같도다." 하고 마을을 찾으니, 과연 여백이 이르던 집이 있거늘, 이꺼이 들어가 주인에게 불을 구하여 옷을 말려 입고 두루 보니 조금나 보라매 있거늘, 사기를 기약하고 크게 기거이 주인을 청하여 문왈, "저매가 주인의 것이냐." 담왈, "우리께 삼대째 내려오나니 사냥을 잘 하여 일로 십여 수를 잡으니, 저매로 일생 생애를 하매 귀하게 여기나이다." 이화 왈, "내 젊어서부터 매를 좋아하더니, 이매를 보니 일생 소원이라. 내 값을 정치 않을것이니 네 팔라." 주인이 답왈, "이를 파오면 생애 그쳐질 것이니 팔지 못하겠소이다." 화 은자 천냥을 주어 왈, "비록 어려우나 내 지극히 사고자 하니, 객중 소회를 위로하고 다시 팔라 한들 무엇이 어려우리오." 주인 그 간절함을 보고 감동하여 주니, 이화 대열하여 그 매를 가지고 중원에 이르러 황제께 뵈옴을 아뢰니, 귀인이 시좌하였다가 고왈, "조선복색을 다 벗고 들어오라 하소서." 상 또한 벗고 들어왈 하신데, 사관이 나아가 웃옷을 벗고 들어오라는 황명을 이르자, 이화 진복질 왈, "조선 예의국 지방 사람이라. 조그마한 조선에도 옷 벗고 뵈는 일이 없거늘, 하물며 황제 만승지전에 옷벗고 뵈는 도리 있으리오." 하고 사자를 물리치고 점점나아오더니, 귀인이 겁하여 이르되, "이화 황명을 저렇듯 거역하니 전일 몽사를 생각사오면 어찌 흉악지 아니하리이까. 빨리 장사로 들어오는 문을 닫고 옷을 벗기려 하니, 이화 고성왈, "비록 황사의 명이 계시나 죽을지언정 옷을 벗지 못하리라." 하고 손으로 모든 장사를 밀치고 정전에 들어가니, 황제 귀비와 한가지로 앉아계시거늘, 이화 황상께 팔배 고두 한후 문득 소매에서 매를 내어 놓으니, 바로 귀비의 어리에 날아 앉아 백호와 두 눈을 쪼아 먹으니, 귀비 변하여 문득 황급 같은 여우되거늘, 황제 대경 실색하사 좌우로 하여금 끌어 내라 하시고 겨우 정신을 정하사 이화를 나아오라 하사 손잡고 연고를 물으시니, 이화 전후 수말을 세세히 주달하니 황제 차탄하시고, 상이 심히 참담하사 귀인이 여우에게 죽은 줄을 척연하사 여우 주검을 일만 조각 내어 귀인의 신의를 위로하시고 제문지어 제하시고, 좌우를 돌아보라 가라사대, "이화의 신기 도술이 아니었던들 거의 종사를보전치 못하고, 천하 갖산이 타인에게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리라." 하시니, 군신이 일시에 만세를 불러 하례 왈, "이화의 신기 며산으로 대화를 진정하오니 이는 폐하의 홍복이로소이다." 상이 전교 왈' "이화를 영릉 태수 무신후에 봉하라." 하시고 금은 보화를 많이 주시니, 이화 황광복지 왈, "소신이 천위를 범하온 죄 중하옵거늘, 높은 봉작을 주시고 또 증상르 어찌 받으리이까. 복원 폐하는 신의 무례한 죄를 다스리소서." 상이 위로 왈, "경은 진실로 사직지신이라. 조선에 지자 많음을 희열하나니 경은 사양치 말라." 이화 백배 사은하고 물러난다. 선시에 이화의 부모 처자 북을 바라 호곡하니 혈루 첨의하더라. 기처 한씨 재용 덕행이 빼어났더니, 차시를 당하여 유자를 어루만져 통곡왈, "첩이 죄악아 주앟여 골육이 성치 못하오니, 구고도 한낱 이 아해를 무휼하사 종자를 잇게 하옵소서. 첩이 당초에 부자의 뒤를 이어 죽으려 하되, 지아비 이르되 둘이 다 죽으면 봉사를 의탁하라 하였사오니, 첩이 차마 멸치 못하였더니 잘길러 봉사를 의탁하라 하였사오니, 첩이 차마 멸치 못하였더니, 이제 이아비 타국에 가서 헛되이 우너사 하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삽고 해골을 거두리이꼬. 첩이 차마 안신치 못하오리니, 이제 나아가 백골묻힌땅을 찾아가 혼잭을 따라 뒤를 좇고자 하나니 불효가 태심하오이다. 구고는 무념하시고 길이 무강하소서." 하고 돌아 거연히 하직하니, 부모 대경하여 통곡 오열왈, "네 어찌 노인과 유아를 두고 이런 설계를 하느뇨. 이제 반년을 더 기다려 해아의 생사를 알아 결단하라." 하니, 차마 떠나지 못하고 통곡하더라. 이적에 이화 황제께 상표왈, "은덕을 입사와 벼슬이 이름나옵고 은총이 빛나오니 길이 종신토록 섬기고자 하오나, 칠씹 쌍인이 다른 자식이 없는지라, 늙은 어버이를 보게 하시면 신의 일신 사생을 모르고 주야 통곡하는 가운데 생환하는 생사를 보게 하옵소서." 상이 간필에 추연 탄왈, "짐이 불행하여 궁궐에 요얼이 작란함을 몰랐더니, 경의신기 묘락으로 요얼을 제방하고 궁중이 평안하니 실로 골이 큰지라. 장차 머물러 작상을 갚고자 하더니 표를 보매 위친지정을 막음이 임박한지라. 인자지정을 막지 모샇여 돌려보내나, 심히 결연하여 침식이 불안하리로다." 이화 백배 고두사 왈, "신이 가기를 바라도 폐하 은헤를 다 갚삽지 못할까 하나이다."' 인하여 하직하고 돌아올새, 각각 금은을 실어 전송하니, 재물이 불가 승수 더라. 이화 돌아 향하여 오래지 아니하여 압록강을 건너 생황하는 소식을 급히 통하니, 일가 황홀 희지하되 도리어 통곡하고, 한씨는 이 소식을 듣고 여몽여상하여 기절하니 합가 위로하더라. 오래지 아니하여 이화 이르러 상달하니, 상이 빨리 불러 인견하사 칭찬왈, "짐이 지각이 없어 영웅과 신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진실로 경은 고금에 없는 재략이라. 대국에 이르러 달기 없기 하고 조정을 평정하여 아국을 빛내니, 금옥 같은 절효 죽백에 드리오나 믿지 못하리로다." 여러 번 칭송하사 도총부총관에 명하시고 충렬공에 봉하시니, 이화 고두 사은하고 집에 돌아오니, 부모 반김이 극하니, 연이 집수하여 통곡 반향에 기쁨을 이르어 생환한 수말 전후사를 일일이 고하되, 부모와 처자며 덕으로 두 번 살기를 얻고 양국에 대공을 얻었음을 칭찬하고 은혜를 망극하여 부모 이르되, "진실로 여백의 은덕을 세세 생생에 갚지못하리라. 하물며 너와 네 자손은 대대로 잊지 못하리라. 당에 사당을 이루고 화상을 만들어 사시 향화를 그치지 아님이 옳으니라." 이화 즉시 화상 만들어 사당에 걸고 사우를 잇게 대대로 자손이 향화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화 중국에서 얻은 바를 충관과 빈궁한 일가 친척에세 나누어 주고 인근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혼상대서를 구제하니, 원근사람이 칭송하는 소리 진동하더라. 이화 부귀 극하니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 노부모를 효양하고, 자손이 버성하여 천년 안향하니, 후인이 아름다이 여겨 사적을 약강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나니라. 대강 이화의 영웅호걸과 이여백의 여달한 정백을 후인이 알게 하니라.
장끼전 (3/3) 한편, 한뫼도령과의 싸움에서 운무장군을 잃은 그 아버지 대보장군은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잠이 오지를 않앗다. 싸움의 경위를 보면 내 아들이 힘이 모자라서 진것이아니라 운수가 나빠서 진 것이요, 목숨을 잃게 된것도 한뫼처럼 교활하고 기특하게 몰래 침입해서 장수초를 훔쳐오는 수단을 밟지 않고 정정당당히 매들을 물리치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던 결과였다. 힘을 제대로 겨루기로 하면 한뫼 같은 애숭이 상놈이 감히 당할 바가 아니엇다. 그런 용감하고 귀중한 아들을 잃은 것은 한뫼라는 악귀 같은 녀석의 출현 대문이지, 자신이나 운무에게 잘못이 있엇던 소치가 아니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아들의 원수는 갚아 주어야겠다고 대보 장군은 이를 달며 맹세하였다. 그는 대왕이 한뫼도령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기는 했지마는 마지못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요, 그가 탐탐해서 한일이 아님을 알고있었다. 운무를 공주의 작으로 하자고 한 것은 다름아닌 대왕 자신의 뜻이엇었다. 운무의 죽음을 대왕도 크게 언짢아 하고, 무슨 핑계든지 명분이 서면 한뫼를 내쫓을 것이 분명한 것을 대보 장군은 알고있었다. 밤새 궁리를 한 끝에 배조 장군을 그럴법한 계락을 한가지 기막히게 생각해 냈다. 이튿날 그는 자기하고 그중 가까운 병부대신을 만나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였다. "미거한 자식놈이 싸움에 진 것을 가타부타 재론할 일은 아니지만, 애비된 심정에 너무도 억울하여 기가 막히오." 이에 병무댄신이 말하였다. "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 용맹한 자제분이 교활한 저 필부놈에게 욕을 당한 생각을 하면 우리 무사 전체가 낯이 뜨거운 일입니다. 지난얘기는 묻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 간사스러운 젊은 놈을 없앨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보 장군은 병부대신의 말에 힘을 얻어 말하였다. "그얘기를 의논하려던 참입니다. 듣자하니 한뫼라는 애는 제아비의 뜻으로 다른곳에 정혼을 해놓은 자라고 합니다. 다른곳에 정혼을 한 필부가 저 존귀한 공주님으 농락하다니 이렇게 질서가 문란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에 병부대신이 신이나서 크게 말하였다. "과연 훌륭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그려. 그 사실을 구실로 다시한번 힘겨루기를 시키도록 대왕께 상주함이 어떻겠습니까?" 대보 장군은 목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내 생각이 바로 그생각입니다. 내게는 이미 아들이 없으니 병부의 자제분을 천거하도록 합시다. 이다음 어전회의 때 귀공은 한뫼가 다른곳에 정혼한데가 있다는 사실만 아뢰십시오. 그말이 떨어지면 대왕도 즉시 그와 다시 힘을 겨룰 젊은이를 지목하라 하실 것인즉, 그때 내가 귀공의 자제분을 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뫼를 물리치고 귀공의 자제가 부마가 되도록 할 기회가 아닙니까?" 은밀히, 그리고 단단히 모의를 하고 그들은 다음날의 어전회의에 임석하였다. 회의가 끝날무렵 병부대신이 업숙한 복소리로 대왕께 아뢰었다. "봉묏골 태수의 아들 한뫼는 엄연히 정혼한 규수가 잇다고 하옵니다. 그런자를 대왕전하의 부마로 삼음이 어찌 왕실을 크게 욕되게 하는일이 아니옵니까?" 대왕은 놀라며 물었다. "그런말은 처음듣소. 사실이 그러하오?" 대왕은 여러 신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어느 신하가 말하였다. "그런일이 분명히 있는 줄로 압니다." 이때 다른 신하가 정중히 말하였다. "얘기가 오고가기는 했으나 한뫼 당자는 분명히 거절한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일은 논의를 것이 못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대왕 스스로가 한뫼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참이라, 한뫼를 닥닥할 수 있는 명분있는 구실이 나온이상 그대로 묵살하고 싶은 마음은 조급도 없었다. "그런 일의 유무는 둘째로, 말이 오고간 것도 온당하다고 볼수가 없소. 다시 힘을 겨루도록 해서 승패를 가리게 한 뒤에 이긴자로 하여금 공주의 짝을 지어주도록 하겠소. 힘세고 덕있는 이를 누구든 천거하도록하오." 대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부대신의 아드님이 용기로 보나 지혜로 보나 인망으로 보나 이나라 젊은이의 으뜸이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어의로 살피어 주소서." 임금은 여러 신하들을 두루 바라보며 말하였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그 중의 한 신하가 대왕계 조용히 여쭈었다. "병부대신의 아드님이면 과연 모든 면에서 출중하옵니다." 병부대신의 아들이 운무 장군에 지지않을 만큼 힘이 세고 동작이 날쌔다는 소리를 그 누구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병부대신의 아들 큰내 장군과 한뫼도령을 마주 대전케 하는데 의견을 모앗다. "싸움하는 상대는 대신들의 뜻이 같으니 그리하도록 하려니와, 어떤 방법으로 싸움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대왕이 물었다. "맨처음 운무장군의 경우와 같이 두 젊은이로 하여금 하늘에서 맞붙어 다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한 신하가 의견을 제시하자, 내부대신이 점잖고 공손히 해명하며 말하기 사직했다. "우리 국법에는 한번 치룬 싸움은 그 당자에게 되풀이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되어 있사옵니다. 이번에는 다른 방도로 싸우게 함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누구도 반대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부대신의 말이 옳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슨 새 종목을 내세우는 것이 다시 또 싸움을 하게 하는 행상에 맞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신에게 한가지 방법이 있사옵니다." 큰내 장군의 아버지 병부대신이 말하였다. 이에 대왕이 물었다. "어서 좋은 방법을 말해 보도록 하시오." 병부대신은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여쭈었다. "지금 우리 겨레는 산에 있는 힘센 짐승들에게 시달림을 받기도 하지만 속세에 사는 인간에게도 또한 그에 못지 않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사옵니다. 우리들의 조상에, 그들을 위해서 이런넓고 아름다운 산속을 모리고 그들의 집안에 들어가 닭이라고 이름까지 고쳐서 주기는 커녕 한층 더 우리들을 해치려고만 하옵니다. 그러나 워낙 몸집이 크고 꾀가 있으니, 우리들이 그들을 마주 응징하거나 보복을 가할 길을 없사옵니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활'이라는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 우리들이 그 근처에 있기만 하면 화살로 쏘아 목숨을 앗아가고는 하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추석날, 인간들은 또 활을 메고 우리들을 사냥하러 출동하기로 되었다고 하옵니다. 저들이 사냥을 올라올 때 큰내 장군과 환뫼를 내세워 두 젊은이의 힘과 꾀를 겨루어 모게 할겸, 사람들의 행패를 막는 길도 찾아보게 함이 어떨까 마음이 듭니다." 말을 다듣고 난 대왕은 다시 물었다. "그런 방법만 있으면야 희한하지 않겠소? 무슨 방도로 그런 성과를 거두겠소?" "사람들이 사냥을 올라오는 길목에 두 젊은이를 미리 가있게 하옵니다. 다람쥐 한 마리 놓치지 않고 샅샅이 뒤지고 활을 쏘고 하며 올라오는 그들의 공격을 어떻게 하든지 모면해 보라고 하는일이옵니다. 불행히도 둘이 다 죽게 되는 위험과 염려가 있기는 하지만, 만일에 살아남기만 하게 되면 공주 마마의 짝이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요, 그 힘과 꾀를 우리 겨레가 전부 배우도록 한다면 우리 겨레 구언의 영웅으로 받들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대왕은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과연 훌륭한 의견이오. 이번의 싸움을 계기로 우리 겨레가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덜 당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의 무제뿐아니라 겨레를 위해서라도 죽음을 무릎쓰고 실천토록 해볼만한 일이오. 다른 대신들의 뜻은 어떠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찬성의 뜻을 표했다. 어전회의에서 논의되고 정해진 얘기는 곧 널리 온나라 안에 퍼졌다. 추석날, 인간의 두목과 그 무리가 활을 메고 사능로 올라오게되면, 두젊은이가 산중턱 가까이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무슨 수를 쓰든지 그들이 통과한 뒤에 살아서 되돌아 오기로 하는일이 었다. 포고가 내리자 백성들은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 다시 또 싸우게 하는 처사에도 놀랐지마는 구름처럼 몰려올라 오는 사냥군들의 발길을 벗어나 보라는 내용에 더욱 놀랐다. 이때까지 그 얼마나 많은 꿩들이 인간의 포위를 벗어나 보려하다가 아깝게 죽어갔는지 수를 헤아릴수 없는 일이다. 백성들보다도 더욱 놀란 것은 역시 공주와 한뫼도령 당사자들이었다. 잔디밭에서 오손도손 장래를 설계하고 있다가, 그들은 니포고의 소식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또다시 힘겨루기를 하라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되지도 않을 말이어요. 낭군과 저를 기어이 떼어 좋으려고 억지로 꾸며낸 모한이어요." 공주는 안타까움과 조기를 이기지 못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함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진작 세상을 떠났어냐 옳았을 것을 또 살아나서 이런 욕된 걱정을 기쳐드립니다." 한뫼도령도 절망과 분노섞인 말을 쏟아 놓았다.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공자님이 언제 어느 규수와 약혼을 한일이 있으며, 백번 그런일이 있었기로 제 남편되는 데에 부슨부족이 있다는 말이어요? 아바마마께 직접 아뢰겠어요." 이에, 한뫼도령이 말하였다. "아무 말씀도 마십이오. 번연히 근거없는 일을 결정지으신 이상, 웬만한 말쓴을 귀담아 들으실 법이나 합니까? 저를 공주님에게서 뗴어놓고야 말겠다는 뜻의 소치입니다. 어명을 순순히 받들어 천운이 있어서 다시 살길이 솟기를 마라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한뫼도령의 한탄을 듣고 공주의 마음은 무너지는듯했다. 즉시 어마마마를 찾아 문후한 뒤에 이번의 처사의 부당함을 아뢰며 그 포고를 다시 거두어 들이도록 간곡히 호소하였다. 딸의 간청을 듣고, 왕후는 다시 또 대왕을 만나 뜻을 전하기는 했으나 왕비의 힘으로써 굽어질 대왕의 심사도 아니었고, 일단 널리 선포한 포고를 지금 뒤집어 놓을수도 없는 딱한 일이었다. 추석날이 되자 요전번의 장소에 또다시 임원들과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한낮에 인간세산의 두목과 그 무리들이 용마루 골짜기의 어귀에 이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알고 있었다. 그날 해가 지기 까지 사람들은 용마루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 꿩이고 산짐승이고 닥치는대로 잡아가기로 한 것이다. 한뫼도령과 큰내 장군은 세 마리의 엄정한 심판원과 함께 일찌감치 용마루 골짜기 꼬대기에 이르렀다. 심판원의 지시에 따라 해가 돋을 무렵쯤해서 두 젊은 장끼는 하늘 높이 몸을 날려 골짜기의 중턱 사람들이 치닿는 바로 역로의 절반쯤의 지점에 몸을 내렸다. 갑자기 아래 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요란스럽게 골짜기 위를 치달아 기어 올라오는 모습이 심판원들의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각각 흩어져서 울타리 형태로 열을 지어 소리치며 올라오고, 우두머리와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인간들은 활에 살을 재이고 그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노루가 뛰어 달아나다가 별안간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뒹구는 것이 몇번이고 숨어서 보는 두장끼의 눈에 똑똑히 띄었다. 두 장끼다 몸을 담고 있는 풀숲과 바위 틈세에서 차차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가워졌다.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과 긴장이 두 젊은이뿐 아니라 심판원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큰내 장군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 옆에 있는 풀포기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만하면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을 만븜 안전하고 두터운 풀속이라고 큰내 장군은 생각하였다. 사람의 걸음으로 쉰 발쯤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람은 풀을 더듬고 나무를 툭툭치며 천천히 걸어 올라온다. 사람의 옷모양과 얼굴모습이 나무와 풀사이로 뚜렷이 어른거렸다. 기골이 느티나무처럼 장대하고 감발감은 짚신 발이 바윗장처럼 육중하고 억세다. 저 발길에 밟히든지 채이든지 또는 휘두르는 작대기에 얻어맞든지 하면 몸이 흙가루처럼 으스러져 버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살아남을 길이란 단한 가지밖에 없다고 큰내 장군은 생각했다. 저 발길이 내몸에 닿지 않느 곳으로 지나가 주는 일이엇다. 제발 저쪽으로 비켜 가소서하고 큰내 장군은산싱령에게 빌엇다. 발자국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엇다. 두발중의 하나가 바로 코앞에 놓이더니 또 한 발이 버쩍 들려 올라갔다. 올라간 신발이 아무래도 다른 자리에내려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머리통을 으스러져라 하고 밟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아얏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채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크게 큰내 장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는 그대로 있을수 없는 것을 큰내 장군은 그 순간 개달았다. 이대로 죽을 바에는 설사 또 다른 죽음의 기다린다 해도 달아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푸드득..." 있는 힘을 다모아서 큰내 장군은 날개를 크게 뒤흔들었다. 그곳을 빠져나온 몸이 화살처럼 가벼운 무게로 허공에 떠오는 것을 느꼈다. 저 무서운 발자국을 빠져 나왓으니 이제는 살았다 하는 생각이 솟아 올랐다. 살앗다는 생각을 채 끝맺기도 전에 큰내 장군은 난데 없이 솟는 화살의 휭하는 소리를 바로 귓전에서 듣는 순간이었다. "앗!" 별안간 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남아잇는 한쪽 날개를 움직여 몸을 지탱하려고 해도 자꾸 허공에서 맴남 돌며 앞으로 는 조금도 나가지 못했다. 큰내 장군은 이를 악물며 앞쪽을 향해 몸을 내밀었으나 몸은 꽂혀잇는 화살과 함께 자꾸 맴돌녀 가라앉을 뿐이었다. 땅에 떨어졌을 째는 한쪽 날개를 움직일 기운조차 없어졌고 그보다도 와아 하고 들려오던 사람들의 환호성까지 자꾸 먼곳으로 멀어져 가기만 하였다. "아따, 그놈 크기도 해라." 하는 젊은 몰잇군의 목소리를 큰내 장군은 마지막으로 들었다. 큰내 장군의 죽음을 멀지 않은곳에서 지켜보던 한뫼도령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도 저런 신세가 될 것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 몰잇군들의 포위망을 살아서 벗어날 길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할수 없는 일이라고 한뫼도령은 생각했다. 나는 기어이 공주와 인연이 없는 몸이니 몰잇군들의 작대기에 맞거나 발에 밟혀죽는 것이 주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한뫼도령은 처음부터 떡갈나무 포기 속에 몸을 도사리고 안증ㄴ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으로는 자그마치 두 사람의 몰잇군이 서로 얘기를 주고 받으며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노루와 산돼지는 꽤 튀어나오는데 꿩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웬일일까?" 큰 소리로 외치며 한 사라미 작대기로 언저리의 풀숲을 툭 쳤다. "꿩들도 요새는 약아져서 사람이 어른거리는 줄 알면 진작 멀지감치 달아나 버리고 말거든!" 또한사람이 대꾸를 하며 성큼 바윗돌 위로 기어올랐다. 쉰걸음쯤 사이를 두고 두 몰잇꾼이 자꾸 한뫼도령이 있는 나무포기 가까이로 다가왔다. 저아래 멀찌감치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이제는 뚜렷이 드러나 보였고, 옮겨 놓는 걸음새 한발, 한발이 파도처럼 억센힘으로 마구 밀려닥쳐왔다. 가슴이 떨리며 온몸에서 땀이 마구 흐르는 것을 한뫼도령은 몸으로 느낄수 있엇다. 눈 앞에 있는 몰잇군의 한발이 번쩍 머리위로 치솟아 올라가자 한뫼도령은 저도 모르게 날개에 힘을 주었다. 이 발자국에 밟혀서 죽느니, 한 날개라도 날아보다가 요행 죽지 않고 사는길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속에 떠올랐다. 순간 한뫼도령은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 꾸짖었다. 몸을 뛰쳐나가다가 그대로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져 버린큰내 장군의 죽음을 바로 조금전에 보지 않았느냐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몸이 이 나무포기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수백 명의 눈동자와 수백개의 화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올것이 분명하였다. 귀신같은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일단 들키는 날이면 살아 남지 못할것이 뻔하다. 몰잇군의 발자국은 지금 내머리위에 있지마는 운수가 좋아 내몸집 위에 내려지지만 않으면 살수가 있을 것이다. 저들은 일단 지나간 걸음을 다시 되돌아서는 일은 없다. 한발자국이나 면하게 되면 살길이 있는 것이다. 화살에 꿰뚫려 죽느니, 이 몰잇군의 발밑에 밟혀 죽으리라 하고 한뫼도령은 굳게 결심하였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으며 한뫼도령은 운명의 순간을 기다렸다. "앗!" 한뫼도령은 절망의 부르짖음 소리를 내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와 잔등은 밟히지 않았으나 꼬리 끝으 밟혔기 때문이엇다. "푸우!" 아찔하는 순간이 지나가자 한뫼도령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몰잇군의 뒷모습이 저꼭대기 까마득한 산봉우리 옆을 휘돌때에야 한뫼도령은 몸을 움직였다. 몰잇군의 발에 밟혔던 꼬리가 뽑혀질 뽄했는지 깃밑둥이 몹시 괴롭게 아팠다. 높직한 소나무 맨꼭대기 가지에 올라가 둘레를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저 꼭대기에 심판원들만이 눈에 띄었다. 이쪽을 지켜보는 심판원들의 눈에 놀라는 빛과 승리는 네 것이라는 선언이 넘쳐잇엇다. 한뫼도령은 공주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사람들은 이미 고개를 넘어간지 오래되었다. 한뫼도령의 옆으로 온 심판원은 한뫼의 목에 그의 목을 휘감으며 기쁨을 나누었다. 뽑혀질 뻔한 꼬리털의 모양을 살피며 마지막까지 유지한 그 끈질긴 침착성에 새삼스럽게 탄복하였다. "우선 꼬리 깃부터 바로 잡도록 해라." 그중의 하나가 후루룩 날아 올라가서 연하게 자라나는 약초잎을 뜯어다가 꼬리가 빠지려고 하는 자리에 문대었다. 상처가 시원해지며 아픈 기운이 가시었졌다. "어서 갑시다. 이 꿈 같은 승리를 알려드립시다." 심판원들과 한뫼도령은 위세좋게 몸을 날리어 대왕과 관중들이 모두 기라리고 있는 그 잔디밭으로 되돌아갔다. 군중들의 환성은 요전 장수초를 뜯어올때보다도 더 우렁찼다. 아무도 두 용사가 제대로 살아서 돌아올 줄은 기대하지 않고 잇엇기 때문이었다. "아뢰옵니다. 두 용사 중에서 큰내 장군은 불행히도 인간들의 잔학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고 모뚱이마저 끌려 갔사오며, 한뫼는 침착성과 지혜를 끝까지 발휘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감히 손발을 대지 못하게 하고 돌아왔나이다. 오늘의 싸움은 한뫼도령이 승리했음을 선포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판원중의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이에 대왕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감탄과 기쁨을 말하면서 대견해서 크게 말하였다. "기특하도다. 심판원의 결과 보고를 받고 이에 한뫼가 승리했음을 널리 선포한다. 기특한 일이로다." "황공하옵니다." 전례대신이 씌워주는 승리의 관을 받아 쓰며 한뫼도령은 몇번 이고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기쁨과 감격을 누르지 못해서 주위의 눈총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꾸 울기만 했다. "싸움의 과정은 이것으로 완전히 끝났음을 알린다. 우리의 용감한 한뫼가 어떻게 해서 저 포악하고 무지한 인간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엇는가를 들어보기로 하자!" 대왕이 말하자 한뫼도령은 정중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 겨레들은 누구나 적이 가까이 올 때 놀란 나머지 정신을 잃고 하늘 높이 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옛날 산짐승들이 못살게 굴어 그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날기 시작한 것이 그대로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제는 덮어놓고 날아 올라가는 것이 도리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솔개나 보라매뿐 아니라 인간들은 활을쏘아 서 날고 잇는 우리들을 마구 죽이기 때문입니다. 소신은 이 점을 생각하고 최후까지 마음을 가다듬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 보았던 것입니다."
장끼전 (2/3) 왕후가 공주의 괴로움을 보다 못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야. 너의 괴로움은 곧 대왕마마의 괴로움이고 나의 괴로움이란다. 이제 그 괴로움을 거두고 다시 예전처럼 명랑하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해라." 공주는 왕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어마마마, 죄스러움에 몸둘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오나 한번 마음먹은 저의 마음은 스스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태수의 아들 한뫼도령이 석방되어 소녀의 배필이 될 때까지는 소녀의 마음과 몸은 회복될 것 같지 않사옵니다." 공주의 처절한 말을 듣고 왕후는 나직하게 말햇다. "공주야, 네 심정이야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게다가 아바마마께서도 짐작하고 계시단다. 허나 나라의 법에는 상감도 복종해야될 엄격한 것이 있으니 법앞에서는 너의 괴로움도 참는 수밖에 달리 구할 길이 없지 않겠느냐?" 왕후는 잠시 얘기를 멈추고 공주의 눈치를 살피는 듯 하더니 계속해서 말하였다. "이제 그 도령은 잊고 아바마마가 정하신 대보 장군의 아드님과 혼인하게 되면 그동안 너의 괴로움은 한낱 지나간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왕후의 말을 듣고 공주는 확고하게 말하였다. "만일 이 다음에 설사 태수의 아드님을 제손으로 내쫓을 만큼 싫어지는 한이 있다 하여도 지금은 그 도령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수 없나이다. 이제 더 이상 다른 말씀은 말아 주십시오." 왕후는 공주의 단호한 말을 듣고 답답하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왓다. 아들이라고는 없이 귀하게 애지중이 키워온 딸마저 잃어버리게 되지난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엇다. 그날 밤 침전에 든 대왕에게 왕후는 절실한 음성으로 조영히 말하였다. "분명히 공주가 큰 병이 들었사옵니다. 자칫 하다가는 그애까지 잃게 될지 모르니 이 왕실의 대가 끊기게 될 염려가 없지 않사옵니다. 그 애를 구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태수의 아들을 내놓으라 어명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대왕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물론 공주의 병든 몸을 보기 민망해서 눈시울이 더워지는 것 같은 표정도 있었으나, 태수의 아들 한뫼도령에 대한 더욱 커지는 증오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엄숙한 목소리로 왕은 말하였다.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더하오. 하나 태수의 아들을 부마로 삼을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 첫째의 이유는 이미 내입으로 정해 놓은 혼처를 두번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그뚤재 이유는 미천한 태수의 아들을 궁중으로 들여놓을 도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요. 이제 공주 얘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도록 하오." 왕후는 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시옵니까?" 왕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하였다. "태수의 아들을 옥에서 내어 공주를 농락한 죄를 엄하게 다스려야 하오. 몸의 털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뽑아야 하고 다리를 묶어 죽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소." 왕후는 다급해져서 말하였다. "그 말씀은 지당하오나 그렇게 하시면 공주는 필시 자결을 하고 말것입니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목숨을 가볍게 버린뒤에 태수의 아들의 영혼 곁으로 갈 것이 분명하옵니다. 대왕마마, 부디 공주에게 그런 참혹한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너그러움을 베푸시옵소서.:" 말을 끝내고 왕후는 엎드리어 체통도 잊고 흐느겨 울었다. 대왕은 왕후의 동정을 한참이나 살펴보고 있었다. 왕은 마음이 복잡해져서 심란하였다. 그것은 왕후의 말대로 태수의 아들을 죽이는 날이면 분명 공주가 자결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끝에 왕은 희한한 묘안을 생각하고 왕후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왕후는 의외의 말에 선뜻 물어보았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습니가?" 왕은 나직히 말하였다. "태수의 아들과 대보의 아들을 힘과 지혜겨루기를 하게 한단말이오. 이러한 싸움에서 어쩔수 없이 서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되는 관계로 태수의 아들은 대보의 아들에게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그럼 공주도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오?" 왕후 는 의아해 하며 다시 물어 보았다. "그러다가 만일 태수의 아들이 이기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왕은 왕후의 말에 미소하며 덤더히 말하였다. "대보의 아들을 이긴다고? 그런 일을 없을 거요. 대보의 아륻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장사요. 과히 염려 마시오" 그 말에 왕후는 마음이 크게 놓여 말하였다. "필시 묘한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럼 언제쯤 그 일을 시행 하시게 됩니까?" 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유유히 말하였다. "오래 끌수록 왕실의 체면은 사나와지고 민심 또한 불안할 뿐 이오. 그러니 당장 내일이라도 즉시 겨루기를 연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좋을줄로 아오." 과연 이튿날 궁중에서 대보의 아들 운무 장군과 태수의 아들 한뫼도령이 힘과 지혜를 겨루게 된다고 나라안에 포고가 내렸다. 별로 자주 못보던 일이라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백성들은 모두들 반가운 얼굴들을 하였다. 한편 대보의 아들 운무장군은 그렇지 않아도 한뫼도령이 괘심하여 어떻게 하든지 가만히 두지 않으려고 벼르던 때였다. 운무장군은 싸움이 붙게 되면 깃을 뽑는다거나 잔등을 쪼아 아픔을 준다거나 할것도 없이 단번에 승무를 내어 죽이든지 두 눈을 파내어 평생 고칠수 없는 병신을 만들어 주리라 결심했다. 각지에서 벌어진 수많은 무술 겨루기에서 단한번도 져 본일이 없는 운무 장군은 하잘것없는 일개 태수의 아들쯤은 상대하기 우스운 존재라고 막연히 짐작하였다. 이때, 공주와 한뫼도령의 경우는 운무 장군의 형편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났다. 힘센 운무 장군을 당해낼 힘이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싸움에 나가는 일이 한뫼도령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릇임을 공주는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바에야 그렇게 해서라도 영광스럽게 죽게 하느냐 편을 고를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뫼도령도 마찬가지 생각이엇다. 운무 장군이라 하면 이나라에 으뜸가는 장사요, 그의 힘을 당할 자는 하나도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러니 한뫼도령은 도저히 운무 장군을 당할 힘이 없었다. 다만 이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어떤 꾀를 쓰거나 하늘이 내려주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뫼도령은 싸울 날이 올때까지 운무 장군을 물리칠 꾀만을 생각했다. 허나 묘안은 떠오르지 않아 단지 아까운 시간만을 공연히 소비하고 말았다. 드디어 겨루기로 한 날이 왔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늦은 봄의 날씨에 바람조차 없었다. 궁궐 뒤, 전날에 한뫼도령과 공주가 처음 만났던 잔디밭이 싸움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 둘레에 둥그렇게 전국에서 모인 구경꾼들이 자리잡고 있엇다. 잔디 한 구석에 대왕과 왕후 그옆에는 공주가 불안스럽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대신, 대작, 원로들이 빙 둘러 서잇었으며 또 그옆으로는 직위의 차례대로 수많은 고관들이 늘어서 있엇다. 대왕의 앞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운무 장관과 한뫼도령이 나란히 자리잡고 앉아 있엇다. 운무 장군은 발톱과 주둥이를 날카롭게 갈아 놓고 목덜미와 등어리에 대보 장군의 아들이라는 표식이 늠름한 은행잎 관으로 얹혀 있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 비로소 풀려난 한죄도령은 옥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여 얼굴은 창백하고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단지 등어리와 목에 공주가 밤새워 짠 청올치 갑옷이 두둠히 입혀져 있을 뿐 신분을 펴시하는 관조차 얹혀져 있지 않앗다. 운무 장군의 늠름한 체구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고 빈약한 한뫼도령의 모습이엇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행사를 맡은 전례대신이 육중한 걸음으로 걸어나와 왕과 관랍자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오늘의 싸움 진행 규정ㅇ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우선 제일 먼저 신호가 나면 두 젊은이는 양편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저 산꼭대기의 높이에 오를 때쯤 또 다시 신호가 보이게 되면 서로 힘을 겨루도록 하시오. 어떠한 방도로 어떻게 싸우든지 상관없습니다. 단 싸움은 중단되거나 쉬는 일이 없으며 승패가 날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힘에 겨워서 항복하게 되거나 해가 저물어서 싸움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또는 대왕전하의 특별한 분부가 계실때에 한해서는 싸움이 중지 되거나 끝맺게 됩니다." 전례대신은 군중에게 설명을 끝내고 나서 두 용사에게 말하였다. "지금 말한 것은 신성하며 엄숙한 규칙이다. 두 용사는 이 규정을 충분히 알도록 하고 절대 복종을 해야한다." 운무 장군이 대답했다. "네이!" 씩씩한 운무 장군의 대답에 이어 한뫼도령은 가볍게 대답하엿다. "알겟습니다." 전례대신의 지시로 두 용사는 대왕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잔디 밭 양편으로 가서 자리잡고 있다가 깃대를 높이 올려서 신호를 하자 둘이 똑같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두 용사는 날개를 퍼덕이며 올라가 산꼭대기 높이쯤에 이르자 전례대신은 또다시 신호를 보냈다. 이제 어느 한쪽이고 죽어야 끝나게 될 숨막힌 처절한 싸움이 시작될 순간이다. 드디어 두 용사는 잔디밭 한 가운데에서 서로 마주쳤다. 서로 몇번 쪼고는 물러서고, 또 쪼인 뒤에 달려들고는 하다가 마침내 운무 장군이 맹렬한 기세로 한뫼도령을 향해 달려 들었다. 한뫼도령은 급히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워낙 빨리 달려드는 운무 장군의 주둥이를 피할 겨를이 없엇다. 하마터면 목줄을 물릴 뻔 하였으나 겨우 몸을 피하고 나서 보니 목털이 수없이 뜯겨 있엇다. 한뫼도령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맹렬히 달려들었으나 겨우 그의 날개를 한두 개를 뽑았을뿐, 운무 장군도 조금도 끄덕하지 않앗다. 운무 장군은 또다시 한뫼도령을 심하게 공격하엿다. 이번에는 한뫼도령의 머리가 억세게 물어뜯겨 대뜸 붉은 핏줄이 하늘로 치솟았다. 기어이 횐뫼도령의 목숨은 불과 몇분을 더 견딜수 었을지 의문이었다. 한뫼도령의 머리에서 피까지 심하게 흐르는 것을 보자 공주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외쳤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왕은 공주닁 외치는 소리에 놀라서 말하였다. "무슨일이냐!" 공주는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결국은 말하고 말았다. "제발 싸움은 중지시켜 주십시오. 이제 무슨 말씀이든지 듣자올 터이니 어서 속히 영을 내리시어 싸움을 중지시키시옵소서." 대왕은 매정하게 말하였다. "보기가 아무리 딱하다 하더라도 이런 싸움은 경솔하게 중지시킬수 없다. 보기 괴롭거든 궁궐로 들어가 있거라." 대왕의 냉혹한 거절에 공주는 울며 말하였다. "아바마마! 제발..." 공주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소리내어 울면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쳐다볼수가 없었다. 하늘에서는 두 용사가 마지막 힘을 쓰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서쪽으로 달아나던 한뫼도령이 별안간 방향을 마꾸어서 남쪽으로 몸을 급히 꺾었다. 한뫼도령의 뒤를 바짝 쫓던 운무 장군은 몸을 남쪽으로 돌리게 되는 바람에 잠시 몸의 균형을 잃엇다. 게다가 정면에서 강하게 비쳐오는 햇빛때문에 눈이 부시어 앞 뒤 좌우를 분간할 수가 전혀 없었다. 그 순간 운무 장군의 입에서는 숨막히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몸을 돌린 한뫼도령의 주둥이가 운무 장군의 눈앞을 집게처럼 바짝 파고 들어간 채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으윽! 아, 아!" 운무 장군은 아픔에 연거푸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파고 들어간 한뫼도령의 주둥이는 더욱 억세게 힘을 더해갈 뿐이었다. 드디어 운무 장군의 두 눈은 뒤집히기 시작했고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어떻게 해도 도저히 회복할 수가 없었다. 기운이 거의 없게 되자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고 날개를 떨어뜨린 채 땅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뫼도령은 운무 장군이 가라앉는 대로 서서히 따라 내렸다. 그러나 조금도 주둥이를 늦추지 않은채 매달려 따라 내렸다. "와아!" 뜻밖의 광경에 관중들은 높은 함성을 질렀다. 드디어 땅에 내려오자 운무 장군은 한뫄도령에게 질질 끌려 다녔고 이미 기운도 다해서, 얼굴에는 사색이 완연히 깃들엇다. "용기를 내라! 힘을 얻어라 운무장관!" 많은 나졸들이 운무 장관에게 응원하였다. 그러나 몇 안되는 공주의 시녀들은 한뫼도령을 응원하였다. "한뫼도령, 끝까지 놓치지 마셔요." 괴로움을 이길 길이 없는 운무 장군의 눈은 차차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의 죽음에 이르는 모습처럼, 이세상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처절한 눈길이었다. "이럴수가!" 대왕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이나라에서 제일 신임하는 운무 장군을 그대로 죽일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대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명하였다. "즉시 싸움을 중지하라!" 대왕의 심상치 않은 명령에 신하와 관중들은 잠시 술렁댔으나 곧 잠잠해졌다. "싸움을 멈추어라!" 왕의 명령에 전례대신은 크게 복창하였다. 이에 정신없이 운무 장군의 눈알을 품고 늘어졌던 한뫼도령은 명을 받들고 급히 주둥이를 뽑았다. 한뫼도령이 운무 장관의 눈에서 떨어지자 전례대신이 다시 말하였다. "대왕마마의 특별명령으로 오늘릐 이 싸움은 여기에서 중지한다." 전례대신의 말을 듣고 한뫼도령과 운무 장군은 대왕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였다. 절을 받고 대왕은 엄숙하게 선포하였다. "힘을 겨룸에 있어 아까운 목숨을 굳이 앗게 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의 겨룸은 한뫼가 승리했으므로 그 상에서 옥으로 나오도록 조처를 취할 것이며 이로써 싸움이 아직 남아 있는바, 한달 뒤에 서로의 몸이 완쾌된후에 겨루도록 할 것이니 그때 다시 이곳으로 모여라." 모든 왕의 신하들은 왕이 운무 장군을 살려내려고 전례없는 조치를 취하는 줄 이미 알아 차렸지만 감히 누구하나 입 밖으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공주는 여러 사람들의 눈총도 개의치 않고 한뫼도령의 옆에 가사 기쁨에 넘친 울음으로 그를 격려하며 진정으로 말하였다. "잘 사우셨어요. 저는 공자만이 돌아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몰라요." 한뫼도령은 공주의 정성에 크게 감동하며 말하였다. "이 모두가 저의 승리를 빌어주신 공주님의 은공으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한뫼도령과 공주는 함께 울면서 오늘의 승리를 기뻐했다. 이제 날은 흘러 또다시 시합할 날이 되었다. 한달 전의 모습과 간이 오늘도 똑같은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전례대신은 전번과 마찬가지로 나타나서 관중과 두 용사에게 설명하여 말하였다. "오늘의 시합은 힘의 대소가 아니라 지혜의 대소를 가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거니와, 저 앞 큰 뫼 너머에 매들이 사는 매바윗골이 있슴니다. 그 골짜기의 속에는 대왕께서 늘 구하시는 장수초가 있습니다. 오늘의 시합은 무서운 매들이 득실거리는 매바윗골을 감히 지나가서 그 장수초를 뜯어 오는 일입니다. 누가 먼저 뜯어다 대왕전하께 바치느냐를 겨루는 것입니다. 두 용사는 정정당당히 겨루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고 나서 전례대신은 다시 두 젊은이를 의미심장하게 마라보며 말하였다. "그럼 지금 출발한다. 저쪽 형편을 알수 없는 관계로 언제까지 돌아와야 한다는 규정은 세우지 않았으나 누구든지 먼저 장수초를 가지고 오는 자에게 승리의 관을 싀워 주도록 할 것이다." 하고, 깃대를 높이 치벼들고 신호를 보냈다. 시합의 내용과 규정을 듣고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매들이 사는곳에 들어가서 장수초를 뜯어가지고 오라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든지, 애초에 근처에도 가지말고 그대로 돌아오라는 뜻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뫼도령과 공주도 이 내막을 얼른 짐작했다. 시합을 성공시키기 보다는 두 용사 다 실패로 돌아가게 해서 이번을 유야무야로 넘겼다가, 이다음에 운무 장군을 다시 부마로 삼으려는 속셈임을 능히 알수가 있었다. 사실 알수 있기는 하지만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뫼도령과 운무 장군은 훌쩍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두 용사는 전날의 결사전은 아주 잊어버린 듯이 마치 친구처럼 나란히하여 매바윗골을 향해 달렸다. 어느 한쪽도 상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매바윗골이 얼마남지 않은 고개에 이르자 한뫼도령은 매의 냄새를 맡을수 있었다. 이제부터 위험 지역이라는 중거였다.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매가 공격해 올지 알수 없는 일이다. 한뫼도령은 운무 장구을 바라 보았다. 운무 장군은 위험한 기색을 전연 느끼지는 못했느느지 그대로 냅다 앞질러서 갔다. 한뫼도령은 몸을 얕게 내려 날카롭게 언저리를 살피며 운무 장군의 뒤를 바짝 따랐다. 저아래 골짜기에서 분명히 두려운 매의 소리가 들렸다.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보니 크고고 작은 매들이 이리저리 위세좋게 날고 있었다. 매들의 출현에 운무 장군도 주춤하기는 했으나 뒤로 물러서거나 몸을 숨기거나 하지 앟고 그대로 날아갔다. 저 무서운 악마들의 소굴에 먼저 뚫고 들어가려는 심사임이 분명히 엿보였다. 장끼의 날아오는 모습을 매의 보초가 발견했다. 저아래로 신호를 하자 보기에도 크고 매서운 매의 무리가 여섯 마리나 하늘로 치솟아 갑작스럽게 올라온다. "앗!" 한뫼도령이 놀라는 순간 운무장군은 그제야 일이 수습할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을 안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얼른 머리를 돌려 되돌아 날기 시작하였다. 장끼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매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넓고 큰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장끼에게로마구 덮쳐왔다. 아무리 힘세고 가벼운 장끼라고 하더라도 매의 날개를 당할재간은 결코 없었다. 채 고개를 넘지 못해서 매의 발톱에 어개죽지가 걸렸다. 매와 장끼는 마치 전날 한뫼도령과 싸울대처럼 한동안 하늘 가운데서 어울려 뒹굴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의 힘과 기술은 매의 발톱과 주둥이에 견줄바가 아니다. 다른 매들이 채 닿기도 전에 운무 장군은 먼저 덮쳐든 매에게 숩줄기가 막혀 길다란 비명을 만겨 놓고 그대로 몸이 축 쳐졌다. 매떼들이 땅에 뒤구는 운무 장군의 눈을 때고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숨어서 바라보는 한뫼도령은 소름이 끼쳤다. 매바윗골에 들어서려고 한다면 저 운무장군의 신세를 스스로 부르는 행도에 지나지 않는짓이다. 죽을 결심이라면 몰라도 살 생각이라면 매떼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다시 되돌아가는 수밖에 전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가는 나를 공주가 반겨줄지는 모르짐나, 그런 부끄러운 태도로 공주를 만날 면목은 도저히 서지 않는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약초를 뜯어가는 수밖에 없다. 한뫼도령은 백방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몇 시간이나 지나서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지루하기는 하지마는 밤 되기를 기다려 몰래 약초가 있는 곳으로 매들 모르게 침입해 들어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뉘엿이 넘어가기 시작하던 햇빛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누리기 어두워졌다. 날짐승들은 무슨 종류고 날이 어둡기만 하면 전부 잠자리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뫼도령은 눈에 불을켜고 언저리를 살피며 살금살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날갯소리를 내지 않고 이렇게 걸어갈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복이라고 한뫼도령은 생각하였다. 간간이 흙덩이가 무너져 내려오고 발에 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앚게 했으나, 이곳에 남의 눈을 피해 들어오는 장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매떼들은 부스럭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몇 군데의 바위 기슭, 몇 군데의 바탈길, 또 몇 고비의 모퉁이를 돌아가니 매의 냄새도 짙은 매바윗골의 한가운데였다. 발소리를 한층 죽이며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매 둥지가 여기저기 유난히 꺼멓게 드러나 보였다. 매들이 사는 마을의 궁궐 근처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좀더 기어 들어갔다. 갑자기 푸드득하며 날개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나?" 하고, 찢어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도망갈 길도 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한뫼돌여의 머리를 스쳐갔다. 바위틈에 바짝 몸을 숨기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잠시 푸드득 거리던 매의 소리가 도로 조용해졌다. 산짐승이 지나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나무 위에서 다시 마음을 놓고 잠들기 사작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지 와서 더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한뫼도령은 또 몸을 드러내 놓고 앞으로 소리없이 기어갔다. 무득 이제가지 맡아본 일이 없는 그윽한 풀향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얘기로만 들어오던 장수초가 바로 눈앞에 솟아 있는 것을 알수 잇었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좀더 앞으로 기어가니 칠흑처럼 어두운 바위밑에 마치 무지개 같이 영롱항 빛을 뿜고 있는 풀잎이 앞을 가로 막았다. 분명 장수초임에 틀림없었다. 한잎, 두잎, 입이 터질 만큼 그득히 따물고 한뫼도령은 얼른 몸을 빼쳐 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빗속을 날을 때처럼 젖어 있는 것은 이슬 때문이 아니라 땀이 흐른 탓임을 한뫼도령은 알았다. 이미 익혀둔 길이라 돌아올때는 어렵지가 않았다. 여전히 흐트러지는 흙덩이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나뭇잎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앚게 하기는 햇지만, 우선 숨을 방도는 있으니 그만큼 안심이었다. 몇번이고 푸드득 거리는 매의 움직이는 소리가 있기는 했지만 어느 한 마리도 한뫼도령의 동정을 살펴내지는 못했다. 아까 운무 장군이 죽음을 당한 마루턱에 이르러 한뫼도령은 이제는 자기의 목숨이 제대로 붙어 있게 된 것을 알았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한뫼도령은 날개소리도 요란히 하늘로 치솟아 높이 올라갔다. 어디서도 매의 날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사 쫓아온다고 해도 여기가지 따라올수없음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처음 떠나올 때부터 몇 식경이나 지나서 한뫼도령은 아까 출발한 잔디밭 상공의로 날아들었다. "저기 용사의 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군중의 놀라움과 환호가 섞인 소리가 한뫼도령의 귀에 들려왔다. 한낮에 떠난 용사들이 이토록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사실에 모두들 큰 변이 난 것으로 알고 차차 기다리기를 단념하고 있던 참이었다. 잔디밭 상공에 이른 한뫼도령은 마지막 힘을 모아 한 바퀴 휘익 돌아보이고는 떨러지듯 힘없이 땅으로 내려 굴렀다. 땅에 내려앉았을 때 한뫼도령은 대왕과 전레대신과 공주의 모습을 눈앞에 보았을 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앗다. 지켜 보던 전의가 뛰쳐나와 소생초의 잎을 짜서 그 물을 코에 흘려 넣자 한뫼도령은 조용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전례대신은 뜯어온 장수초를 신기한 듯이 받들고 섰고, 대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와 군중들이 금심스러운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공자님. 정신이 드셔요?" 한 쪽에 웅크리고 안절부절 못하던 공주가 달려나와 얼굴을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 공주 마마!" 한뫼도령은 간신히 말하였다. "한뫼는 분명 장수초를 뜯어왔고, 또한 문명히 운무보다 앞서서 되돌아 왔습니다. 오늘의 시합에도 한뫼가 승리했음을 알립니다." 이에 군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쳣다.. "한뫼도령 만세!" 전례대신은 한뫼도령의 곁으로 가만히 와서 이번에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운무 장군은 언제즘 돌아올 것 같은가?" 한뫼도령은 심각해지며 말하였다. "운무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하고, 한뫼도령은 그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하였다. 군중들은 운무장군의 아까운 희생을 언짢아 하기는 했지만 한뫼도령의 참착성과 인내와 지혜에 모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장하다! 이번의 싸움에서 한뫼는 힘과 인내심과 지혜를 보게 보여주었다. 한뫼가 승리했음을 우리 모두 축하하자!" 할수 없이 대왕도 군중에게 말하였다. 운무 장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차지한 한뫼는 옥에서도 풀려나고 그 뒤 거리낌없이 공주와 다정하게 만날수가 있게 되엇다. 그들은 처음에 알게 된 잔디밭 위에서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을 나누었다. 한뫼도령이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리라는 소문이 온나라 안에 널널 퍼졌다.
장끼전 (1/3) 장끼전에 대하여 장끼전도 토끼전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의인소설이다. 여기서는 장끼(수꿩)과 까투리(암꿩)가 등장하여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소설도 인간의 모순점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또한 충효를 강조한다. 특히 이작품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장끼가 뭇꿩들을 위하여 살신 성인의 모범을 보이니, 이것은 다른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다. 또한 고대소설 대부분이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는데 여기서는 주인공 장끼가 죽자 아내인 까투리도 따라 죽어 비극미를 풍긴 것이 색다른 구성이다. 장끼전도 여느 작품처럼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대소설의 저자는 왜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소설이 실학의 융성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것에 유의해야한다. 실학이라는 것은 우리들 생활에 실제 나타나고 있는 현실성을 상대로 하는 학문인 만큼 소설과도 다깝고 또 이해할수 있는 학문이라 할수 있다. 해서 그 전까지 미처 들어오지 못한 중국소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한때 중국소설의 수입을 엄히 금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식자층에 널리 읽힌 소설은 자기 표현 욕구에 부심하고 있던 창작욕을 일깨워줘 우후죽순처럼 소설이 쏟아져 나왔으리라. 또한 이때 부녀자들에게도 소설이 대유행하였으니 서로 빌려 보곤했다는 기록이 도처에 보이고 있다. 이렇게 글을 아는 독자층이 소설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졌으나 수요가 공급보다 적어 자연히 소설을 지어보겠다는 욕망을 일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고료에 대해서는 현재의 판권 소유의 원고료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겠고, 다만 자기가 창작한 소설을 필사하여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울시내의 소위 세책집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여 발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가난한 선비가 소설책을 만들어서 팔기도하고 또 즉 그서을 남에게 빌려줘 약간의 돈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남의 작품도 필사하여 돈을 받고 빌려줘 살림을 꾸려 나갔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제도가 양반이 아니고서는 벼슬길에 오를수도 없고, 또 어디 취직을해서 생활을 한다는 것도 극히 곤란한 중인계급중의 유식한 인물이나, 당쟁으로 인해 정치계에서 밀려나 살림을 꾸려가기 어려운 가난한 선비가 아마 대부분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고전소설의 그 작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들 시민계급 인물들이 작품을 쓰고, 또 그것을 필사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고쳤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입장이 못되었으리는 것은 쉼게 생각할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소설이 대부분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음을 어떤 면으로 환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왓다는 것은 평민계급이 자각하고, 또 실학이 일어나는데 따라 일반시민의 문학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조용하고 으슥한 산골짜기 봉묏골이다. 뒤로는 기이한 바위들이 촘촘히 둘러싸 있고, 옆 좌우로는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는 진달래, 싸리, 머루덩굴 들이 옹기종기 솟아있고, 저 아래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그앞을 맑은 시냇물이 가로질러 굽이쳐 흐르고 있다. 봄이 되면 온갖 새들이 예쁜 모습과 고운 목소리를 자랑하며 나무 사이를 뚫고 날아다닌다. 여름이면 우거진 나무와 풀들이 앞을 다투어 하늘로 치솟아 위세를 부린다. 가을이면 날짐송과 들짐숭들이 이리저리 어울려 추수에 정신을 팔며, 겨울에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일년 동안의 노고를 잊고 잠들어 이듬해의 봄을 조용히 기다린다. 때는 어느 화창한 봄날. 사방을 살펴보면 진달래와 개나리 등이 그득히 펼쳐져 저마다 활짝 핀 꽃을 자랑한다. "도련님, 고단하실텐데 이만 돌아가시지요." "지금 돌아가야 할 일이 없지 않느냐? 고단하다 해도 한잠자고 나면 몸이 가쁜해져서 새 기운을 얻게 되는 법이다. 좀더 있다가 꽃냄새에 싫도록 취해 보자꾸나." 나무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마리의 장끼가 주고 받는 대화였다. 한 마리는 면두가 우뚝 치솟고 꼬리가 유난히 길며 두 눈이 샛 별처럼 빛나는 귀공자로 바로 봉묏골 골짜기에 대대로 살아 내려오는 태수의 맏아들 한뫼도령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면두가 조그맣고 후줄그레한 꼬리에 두눈이 곧 감겨질 듯이 게슴츠레해서 어디로 보나 남의 하인 노릇밖에 못할 어벙벙한 모습인데 바로 태수의 집에서 대대로 종노릇을 해내려오는 하인 장끼의 아들 들머루 였다. 진달래꽃이 산과 골짜기를 뒤덮고, 잠을 깨어 피어난 새싹은 어서 오라 손짓하는 계절이라 한뫼도령과 들머루는 일찌감치 둥지에서 나와 고개를 넘고 들판을 건너 이곳 강벼랑에서 구경하는 중이었다. 해가 뜰 무렵에 집을 나왔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해서 들머루는 부지런히 날아가야만 어둡기 전에 집에 닿으리라 생각하고 조바심을 하는 중이었다. 들머루가 다시 재촉했다. "도련님, 어서 가십시다. 늦게 들어가면 아버님이 꾸중하실 것입니다." 하뫼도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수는 없지 않는냐? 꾸중 이야 참으며 견딜수가 있지만 이아름다운 풍경은 한번 떠나면 다시 볼수가 없다." "하지만 꽃구경은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곳에 얼마든지 있을뿐더러 이곳의 모양도 올해가 지난다 해도 내년이 또있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꾸중은 도련님의 마음을 오랫동안 아프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자 한뫼도령이 마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네 말에도 그럴듯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보도록하자. 어? 저기 저것은 무엇이냐?" 한뫼도령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에 들머루는 덩달아 고개를 부쩍 치켜들고 두리번 거렸다. "무엇 말입니까? 소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뎁쇼." "어허 심분이 미천한 놈은 눈마저 밝지 못하구나! 저기 저 잔디위에 선녀처럼 아름다운 까투리 아가씨들이 놀고 있지 않느냐?" 들머루가 쳐다보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 아가씨들 말입니까? 소인은 벌써부터 보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보시고 야단 이십니까?" "상놈은 욕심이 많아서 눈에 띠는 것도 많구나. 저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보고 왜 돌아가자고 안달부달했느냐?" 들머루가 히죽 웃고 대답했다. "소인이 바른 말을 드리리다. 사실은 도련님이 저 아가씨들을 보고 딴 생각을 일으킬까 봐 어서 돌아가자고 재촉한 것입니다." "허허... 네 녀석은 눈만 빠른줄 알았더니 눈치 또한 빠르구나. 과연 저 아가씨들을 보니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구나.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라. 어서 이리로 데려 오도록 해라." 들머루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련님은 성미도 급하십니다. 저들이 어떤 아가씨들인 줄이나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네놈은 정말 무식한 상놈이로다. 사내 대장부가 처녀를 보면 우선 만나볼 생각부터 해야지, 그누가 신분을 알고자 한단 말이냐?" 한뫼도령의 말에 들머루는 펄쩍 뛰었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저 아가씨는 우리 꿩들을 다스리고 있는 임금님의 무남독녀 공주님이십니다. 오늘 어쩐 일로 저렇게 시녀 몇 명만 이끌고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탐을 내어도 안될것이니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들머루를 꾸짖었다. "듣거라, 이 무식한 녀석아, 제아무리 신분이 높다해도 까투리는 장끼를 남편으로 삼는 법이다. 그리고 남편이 될 장끼들 중에서 누가 먼저 공주의 마음을 사로 잡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저 아가씨들도 이쪽을 힐끔 힐끔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히 내게 마음을 둔것같다. 들머루야, 어서 가서 데려 오너라." 하뫼도령이 호령호령하자 들머루는 어이가 없어 자꾸만 달랬다. "도련님, 저까투리는 한 나라의 공주님입니다. 그러니 이쪽을 바라본다 해도 정다운 눈은 아닐것이니 제발 딴생각은 마십시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서릿발처럼 차갑다고 하더라도 내 가슴에서 치솟는 이 뜨거운 정열은 걷잡을수가 없구나. 만나지 않고 이대로 돌아갈수는 도저히 없다." 들머루는 안타까운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도련님과 짝이 될 까투리가 무수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말고 어서 고개를 돌리십시오." "인석아, 자기의 마음도 어쩔수 없는 떄가 세상에 많은 법이다. 저분 공주님도 나를 만나기만 하면 내 마음을 곧헤아리고 나와 평생을 함께 지내려고 할 것이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 공주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군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도련님이 꼼짝없이 잡혀가서 목숨을 잃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거두시고 어서 돌아가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무슨 배짱인지 고집 불통이었다. 지금 당장 붙들려가서 죽는다 해도 만나보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겠다. 어서가 데려 오도록 해라. 들머루는 안색이 변해 속으로 부르짖었다. '큰일 났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애당초 이쪽으로 오지 말 것을 그랬구나. 잘못하다가는 우리 도련님 목숨만 잃게 될 것이다.' 들머루는 어쩔줄을 모르다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안됩니다! 제발 소인의 말씀도 좀 들어 보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한뫼도령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어떨게 해도 누를 수가 없었다. 해서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이런 발직한 놈, 갔다 오라고 하면 갔다 올것이지 말대꾸가 왜그리도 많으냐? 만일 거역했다가는 집에 돌아가서 다른 하인 들을 시켜 네 깃털을 뽑고 면두를 뜯도록 하겠다. 그게 싫거든 어서 가서 냉큼 모셔오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들머루는 집에가서 곤장을 맞을지언정 대궐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소인은 죽으면 죽었지 못가겠습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날개가 빳빳하게 굳어져서 목을 도무지 뭉직일수가 없구만요." 들머루가 죽을 듯이 엄살을 부리자 한뫼도령은 참다 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에이,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싫거든 그만둬라. 내가 몸소 가볼 테니까!" 한뫼도령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하늘높이 몸을 솟구쳤다. 이를 본 들머루도 어겁결에 뒤쫓아 푸르륵하고 날개를 쳤다. 두 마리의 장끼는 허공을 가로질러 위세당당하게 까투리들이 놀고 있는 잔디밭 위에 풀써 내려 앉았다. "에그머니!" 까투리들은 기겁을 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대는 늦었다. 공주만은 한 마리의 시녀와 함께 잔디 옆 숲속에 겨우 몸을 숨길수 있었지만 다느 까투리시녀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마리의 장끼 앞에 어쩔줄을 모르고 몰려 있었다. 그러나 행여 공주에게 해나 끼치지 않을까 해서 눈을 팽팽하게 치뜨고 있었다. 한뫼도령은 의젓하게 인사를 차렸다. "무례하게 군 것을 영서하십시오. 저는 저쪽 봉묏골에 살고있는 한뫼라는 자입니다.저기 숨어 계시는 저분 아가씨를 만나 뵈러 염치 불구하고 왔습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한뫼도령의 태도에 겁에 질렸던 까투리들은 얼마간 마음이 놓엿다. 그중에서 가장 영특하고 용기있는 시녀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매섭게 꾸짖었다. "잘못은 이미 저질러 놓고 무슨 용서를 구한단 말이죠? 우리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왕님의 무남독녀 이신 공주님을 모시고 나온 궁녀들이예요. 그러니 이곳은 장끼가 얼씬할수 없으니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이 자리를 뜸녀 무사하겠지만 잠시라도 어물쩍 거렸다가는 신변이 위태롭게 될 것이오." 횐뫼도령이 어찌 순순히 물러가겠는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들이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라는 것도 알고 있소, 또 이곳에 함부로 들어올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온 곳이니 만나지 않고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시녀 까투리가 머럭 호통을 쳤다. "이렇게 무엄하고 경우를 모르는 장끼가 있나! 설사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도 미천한 몸으로 어떻게 귀하신 공주님을 만나 보겠다는 것이요? 할말이 있거든 시녀장인 내게 말하도록 해요." 한뫼도령이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비록 공주님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내가 할말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직접 아뢸 테니 부디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시녀장은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다시 꾸짖었다. "바위보다도 더 답답하고 굼뱅이 보다도 더 미련한 장끼가 있을줄이야! 다시 한번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면 바로 저아래 있는 경비대장에게 알리겠소. 공연히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어서 자리를 뜨오!" 그래도 한뫼도령은 막무가내였다. "이미 목숨을 각오하고 온 이상 이대로 돌아갈수는 없소이다. 공주님을 해코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공주님을 뵙게 될 때가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고집은 똥고집이로다. 더 말해 보았자 내 입만 아프겠다. 얘들아!" 시녀장은 한쪽에서 웅크리고 관망하4고 있는 조그만 까투리들을 돌아보고 외쳤다. "네이!" "어서 내려가서 경비대장에게 고하라. 공주님이 나들이 나오신 이곳 잔디밭에 난데없는 장끼 두 녀석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주둥이가 세고 발톱이 날카로운 경비병을 당장 올려 보내라고 일러라." "네이!" 명을 받자 시녀 까투리가 후르륵 낏을 치고 나무 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바로 이때, "얘들아 어찌 그리 소란하냐?"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공주가 더 이상 보고만 있을수 없어 마침내 몸을 나타냈다. 주둥이가 유난히 곱고 날개에 윤기가 기름을 칠한 것처럼 자르르한 것이 과연 귀한 몸답게 품위가 있고 고귀해 보였다. 그러나 시녀장이 땅에 이마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공주마마, 죄송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정신나간 장끼 두놈이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야료를 부리고 있기에 경비대장에게 알리러 보내는 참이옵니다." 공주가 근엄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내게 할말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말이라고 하더냐?" "제가 대신 전해 올리겠다고 말했으나 직접 아뢴다고만 하고 물러가지를 않나이다." 공주는 한쪽에 서있는 한뫼도령을 힐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를 해치러 오진 않은듯하니 경비대장에게 알리기 전에 무슨 말인지 들어보자꾸나. 알리러 가는 아이를 도로 불러라." "몸소 만나시겠다니 이 어인 말씀이옵니까? 저런 무엄한 놈은 털을 뽑고 눈을 빼내어 다시는 못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벌을 내려야 할 것이옵니다." 시녀장은 아뢰고 나서 한뫼도령을 흘겨보앗다. 공주가 듣고 안색이 변하며 꾸짖었다. "나라의 법이 그러할지라도 용기잇는 자에게는 양보가 있어야 한다. 목숨을 각오하고 이런데를 찾아오는 용기가 아무에게나 있을수 없는 일이다. 내가 몸소 만날 테니까 너희들은 물러가라." 공주의 엄명인데 어찌 거역하겠는가. 시녀장은 저만큼 날아 내려가는 시녀를 도로 불렀다. "얘야, 공주님의 명이시니 돌아오너라." 하고는, 한뫼도령 앞으로 걸어와 퉁명스럽게 일렀다. "이번 한번만 공주님이 그대를 만나시겠다고 하오. 귀하신 몸이시니 말을 삼가서 하고 즉시 물러나도록 하오." 한뫼도령은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만나뵙게 해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다른 말씀을 듣게 할 리가 있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하고는, 공주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공손히 절했다. 공주가 답례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궁녀들만 노는 곳에 어인 일로 공자는 찾아 오셨소?" "공주께서 죽음 대신 만나뵙게 해주신 은혜 백골 난망이옵니다." 한뫼도령은 다시 한번 예를 차리고 나서 양해를 구했다. "여쭙기 황공하오나 시녀들을 잠시 멀리 해주소서." "무슨 말이 그리 은밀하오?" 공주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미 만나보기로 한 바에 굳이 여럿이 있는 앞에서 말하라고 하기는 싫었다. 이 젊은 장끼가 수상하게 굴면 즉시 군졸들을 불러 물리칠수가 있기 때문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거라." 공주가 명령하자 시녀들은 하는수없이 멀찌감치 물러갔다. 그러자 한뫼도령이 모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제가 여쭙고자 하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씨도 화창하고 해서 여기까지 놀러 나왔다가 공주님의 자태를 한번 뵙고는 젊은 가슴이 마냥 설레이고 황홀한 나머지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이 공주님의 높은 지체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저의 애틋한 말씀을 드리러 이렇게 감히 나섰나이다." "무...무슨 말을..." 뜻밖의 말에 공주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듯 정면에서 사랑의 고백을 들은 적이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공주의 작은 가슴은 달달 떨리기까지 했다. 한뫼도령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신분의 몸이오나 공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비길수 없나이다. 공주님이 제 뜻을 받아주신 다고 하면 언제든지 공주님을 위해 이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부디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듣고 어떯게 대답하라는 것이오? 백성의 혼인은 부모가 정해주는 것이며 공주의 혼인은 오직 대왕마마만이 결정하시는 것을 모르시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한뫼도령은 실망하지 않고 거듭 여쭈었다. "물론 혼인의 절차는 대왕마마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마음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애타게 사모하는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겠노라고 한 말씀해 주십시오." 공주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인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대답하라고 하시오? 공자의 심정을 알았으니 다음날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오." 한뫼도령은 하는수없이 작별을 고할수 밖에 도리가 없엇다. "그럼 공주님의 회답을 기다리겠나이다. 저는 봉묏골 태수의 아들 한뫼라는 자이옵니다. 언제쯤으로 알고 기다려야 할지..." "내게 맡기고 어서 돌아가도록 하오." "높고 푸른 하늘을 믿듯이 공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겠나이다. 부디 다시 뵐 날을 알려 주십시오." 하뫼도령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는 일이 어떻게 될가 하고 목을 움츠리고 있는 들머루에게 소리쳤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두 마리의 장끼가 푸드득하며 하늘로 치솟아 저편 골짝기로 멀어져 갔다. 공주는 애틋한 눈길로 사라져가는 한뫼도령의 뒷모습을 바라조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해가 서쪽 산너머로 숨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한뫼도령은 그 뒤 모든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인 들머루를 데리고 언제나처럼 집을 떠나 언덕으로 날아 올라가도 쾌할하고 즐겁게 뛰놀생각은 않고 나뭇가지나 잔디밭에 앉은채 멍하니 있을때가 많았다. 두 눈은 항상 공주가 사는 대궐이 있는 저편 고개 똑으로 향해있었으며, 구름조각 하나만 지나가도 무슨 소식이 오지나 앟을까 해서 고개를 쳐들어 보곤했다. 그러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뿜었다. 들머루는 보기가 안타까와 옆으로 와서 말했다. "도련님, 이렇게 기다리신다고해서 소식이 빨리 오고 기다리지 않는다고 올 소식이 안 올리도 없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병이라도 난다면 몸만 축날뿐이니 어서 꽃구경이나 하며 벌레도 잡아먹고 하십시다." 그러나 한뫼도령의 귀에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얘야!" "네, 도련님." "저기에 솟아 있는 저 검은 점은 무엇이냐? 궁궐에서 공주님이 보내는 심부름꾼이 아니냐?" 들머루가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심부름꾼이 아니라 바위 틈에 솟아잇는 나뭇가지 인뎁쇼." "그러면 저기 먼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은 무엇이냐? 저것은 분명리 까투리가 아니면 장끼렷다?" "에이, 도련님두... 먼하늘이 아니라 바로 저 고개위를 날고있는뎁쇼. 까투리가 아니옵고 까불기 잘하는 종달새이옵니다." 한뫼도령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벌써 여러날이 지났는데 왜 아무런 기별이 없지? 분명히 소식이 있을 터인데, 왜 아무 새도 날아오르니 않느냐?" "아무렇게나 말한 아녀자의 말을 도련님은 너무 믿고 계십니다. 공주꼐서는 벌써 도련님을 까맣게 잊고 지금쯤은 다른 신랑감과 즐겁게 얘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서 공주의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 버리도록 하십시오." 들머루가 아뢰는 말에 한뫼도령은 화를 벌컥 냈다. "시끄럽다! 상놈이란 할 수없구나. 너희 상놈은 아침에 한 말을 저녁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마는 공주는 결코 그런 일이 없는 법이다. 공주의 말 한마디는 마위처럼 굳고 나뭇잎처럼 싱싱한 것이다. 아, 저기 저 이리로 기어오는 것은 무엇이냐?" 들머루가 보고 기급을했다. "저건 삵괭이놈입니다. 이렇게 있지 말고 어서 몸을 피합시다. 이러다가는 도련님 눈에서 저 무서운 늑대나 사냥개도 모두 공주가 보낸 사신으로 보이겠습니다요." "괴로움과 기다림 속에서 이렇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늑대나 사냥개에게 잡아먹히어 세상을 떠나는 편이 좋겠다." 얼빠진 소리를 하는 한뫼도령을 서둘러 재촉하여 들머루는 간신히 삵괭이의 공격을 피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뫼도령은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간신히 문안을 드리고는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된 어머니가 한밤중에 한뫼도령이 잠자리를 몰래 찾아왔다. 그러자 아들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멀거니 본채 눈을 또랑 또랑 뜨고 있지 않은가. "한뫼야, 밤이 벌써 깊었는데 왜 자지 않는거냐?"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묻자 한뫼도령은 공손히 아뢰었다. "어머님,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무일도 이닙니다." "얘야, 이 어미가 보건 데 분명히 근심이 있는 것 같구나. 어디 무슨일인지 얘기해 보렴." 어머님, 누구에게나 잠 못이루는 밤이 있는 법입니다. 곧 잘테니 어머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가서 주무십시오."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엇다. "옛말에도 어미의 눈길은 불빛보다도 빠르고, 그마음은 천리 떨어진 곳에서도 닿는다고 했느니라. 보아하니 너는 며칠 동안이나 잠을 자지 않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가슴속에 있느니라. 어서 무슨일인지 이 어미엑게 들려다오." "별것이 아니니 너머님은 돌아가 주무십시오, 소자도 곧 자겠습니다." 한뫼도령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으나 어머니마저 괴로워할까 봐 임을 꼭 다물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야원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파 탄식을 하고는 힘없이 돌아섰다. 이튿날 아침, 한뫼도령은 일어나자 마자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면두에 흰빛이 갑돌 만큼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한뫼야, 요사이 네게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다고 네 어머니가 말씀하시니 사실이냐?" "약간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기는 하오나 그렇게 대단하지 는 않사옵니다." 아들이 조심스럽게 아뢰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얘기할 일이 있어서니라." 아버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을 건너편 골짜기의 태수댁을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아버님." "그댁에 혼기가 찬 아리따운 낭자가 있느니라. 우리와 집안도 엇비슷하고 또 친하게 지내기도 하던차에 너희들의 혼인얘기가 나와서 마로 어제 성사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느니라. 곧 혼레식을 올릴수 있게 준비를 서두르겠으니 너도 그리 알고 있거라." "혼인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입니까?" 한뫼도령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아들의 마음을 아지 못하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댁과는 대대로 우의가 깊고, 그 집 낭자는 어렸을 때부터 너도 잘알고 있는 처자가 아니냐? 용모뿐 아니라 재주도 뛰났느니라. 들리는 소문으로는 벌써부터 너를 은근히 사모해 왔다는 구나. 우리집에 그런 며느리가 들어오게 되다니 정말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다." 한뫼도령이 놀란 나머지 급히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님!" "왜그러느냐?" "그 혼인은 취소해 주십시오." "무엇이!" 아버지는 놀란 나머지 압을 딱 벌렸다. 거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그쳤다. "취소하다니? 너도 전부터 그 낭자를 칭찬해오지 않았드냐? 그 낭자보다 더 나은 신부감이 어디 있다고 이번 혼사를 취소하라는 것이냐?" "아버님, 그낭자가 못생겼다거나 나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혼인을 할생각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애써 변명하자 아버지는 음성을 낮추어 달랬다. "너보다 어리고 못난 장기들도 버젓이 혼인을 하고 자손들을 낳으며 잘살고 잇다. 그런데도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 "장끼마다 겉모습이 다르듯이 속마음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으니 부디 취소해 주십시오." "그낭자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누구에게 마음을 준 상대라도 있다는 말이냐?" "..." 한뫼도령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앗다. 공주와 약속이라도 했다면 서슴치 않고 아버님께 아뢰겠지만 혼자 사모하고 있는 일을 여기서 밝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변명하랴. 그러자 아버지가 다시 추궁을 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어디 다른데 약속했느냐?" "..." 아들이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아버지의 음성은 노기까지 띠었다. "왜 말을 못하느냐? 너는 아비의 말을 이유도 없이 거역하겠다는것이냐?"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적어도 두 골짜기의 태수가 만나서 여러모로 의논을 거듭한 결과 정한 혼사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취소할 수가 없다. 공연히 말을 꺼냈다가는 우리 마을과 저쪽 마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유도 없이 혼인을 취소한 우리가 싸움에 지게 되고, 집안가지 망할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래도 이번 혼사를 취소하라고 말하겠느냐?" 듣고보니 정말 큰일이엇다. 한뫼도령은 자기도 모르게 등에 식은 땀이 흘러 우선 이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아버님,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담나 얼마동안의 시간을 주십시오. 갑자기 듣고 보니 소자는 얼떨떨 하기만 하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렇게 하렴. 혼인을 하기로 한다면야 언제 하겠다는 대답은 조금 늦은들 괜찮다. 그만 나가 보아라." 아버지의 앞을 물러나온 한뫼도령은 이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만만한 하인 녀석을 붙들고 하소연 할수밖에 없었다. "들머루야, 일이 대단히 급하고 까다롭게 되었구나. 어떻게 하면 수습이 되겠느냐?" 들머루는 눈을 껌뻑껌뻑하다가 대답했다. "지금이야 말로 마음을 돌릴 좋은 기회입니다. 공연히 공주님만 생각하다간 큰일날 것입니다." 그러나 한뫼도령이 이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 "공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없애느니 차라리 세상을 하직하겠다. 너는 다시는 그런 소리 말아라." 도련님, 제발 생각을 고치심시오. 이번 혼사를 취소하면 우리 마을분만 아니라 온 집안이 큰 욕을 당할것입니다. 부모님에게 화를 끼치는 일이 두렵지 않습니까?" 한뫼도령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자신없이 입을 열었다. "공주님과 혼인을 하게되면 그쪽과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공주민의 마음이 도련님에게 향하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 한뫼도령은 대꾸할 말이 없어 바위 옆에 힘없이 웅크리고 앉아 공주가 있는 대궐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색들이 소란스럽게 웃어댔다. 벌써 정오가 되었다는 신호다. "오늘도 소식이 없는가 보구나. 아, 이애타는 마음을 공주님이 알아 주셨으면..." 한뫼도령이 기운없이 중얼거릴 때 듦루가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댔다. "앗, 도련님! 저것이 무엇입니까?" "무얼 말이냐?" "저기 검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보인단 말이냐? 상놈의 눈에는 허깨비만 보이는 모양이구나." "분명히 장끼와 까투리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도련님, 저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한뫼도령도 이쪽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똑똑히 볼수 있었다. "정말 장끼와 까투리가 날아오는구나! 저 뚜렷이 빛나는 깃은 궁궐에서 보내는 사신과 시녀의 표시이다. 분명히 공주님이 보내신 사신이로다." 한뫼도령이 뛸뜻이 기뻐할 때, 사신으로 날아온 장끼와 까투리는 한뫼도령과 들머루가 주춤거리고 있는 상공을 한 바퀴 쓰윽 돌더니 바위 옆으로 가볍게 내려 앉았다. 그러더니 장끼가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공자가 이곳 태수의 아드님이십니까?" 한뫼도령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궁궐에서 나오신 사신들이시군요. 먼길에 수고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이유로 저를 찾는지요?" "공주마마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공주마마께서 보내신 이글월을 받으십시오." 까투리가 깃 속에 간직해온 가랑잎 편지를 내놓았다. "아, 공주님의 글월이라구요!" 한뫼도령은 공주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한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편지를 펼쳐 보았다. 한뫼공자님 보옵소서. 공자님을 한 번 뵈옵고 소녀는 평생 공자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려고 생각했습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장벽이 있을 줄이야 그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마마마를 통해서 제심정을 아바마마께 아뢴즉, 아바마마께서는 벌써 부마(임금의 사위)될 장끼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시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혀 놓은 공자님을 즉시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한뫼공자님! 우리들은 이세상에서 인연이 없는듯하니 험악한 나졸들에게 욕을 보시기 전에 멀리 떠나서 다른 나라를 찾아가 복되게 지내 십시오.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쓸수가 없습니다. 공주 올림. 편지를 읽은 한뫼도령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절망감! 안타까움!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안돼! 공주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이상 나는 도망칠수가 없어!' 한뫼도령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욱고 굳은 결심의 빛이 눈동자에 나타났다. "들머루야!" "예, 도련님." "나는 이길로 이분 사신을 따라 공주님이 계시는 궁궐로 들어가겠다. 그러니 너 혼자 들어가서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공주님과의 사연과 이 편지 받아보았다는 것을 내 대신 낱낱이 여쭈어라. 이번에 궁궐로 들어가면 살아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으니 부디 나를 찾으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라." 이 비장한 말에 들머루는 펄쩍 뛰었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발 사리를 냉정히 판단하십시오. 살아 돌아올 길이 없는줄 알면서 왜 대궐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까?" 한뫼도령의 태도는 오히려 차분했다. "공주 없는 세상 살아서 무엇하리. 일찍 죽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부모님께 불효자식 되고 이웃마을 태수의 따님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공주님이 계신 궁궐에서 죽는 것이 차라리 내 소원이다. 내가 죽음을 당하게 되면 크게 소문이 날것이고 시체또한 들판에 버려질 것이다. 들머루야, 네가 나를 주인으로 여기고 있거든 시체나마 찾아 고이 묻어다오. 그리고 나 대신 부모님을 잘 모셔다오." 들머루는 정신이 아득하여 급히 외쳤다. "도련님, 어쩌자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신다고 해도 부모님계 인사나 드리고 가십시오." "헤어지는 괴로움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길어지는 법이다. 나는 이대로 떠날테니 네가 대신 인사를 드려다오." "도련님, 그렇다면 소인도 따라 가겠습니다. 공주님없는 세상 도련님이 살수 없듯이 도련님안계신 곳에서 소인이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들머루는 몸부림치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어댔다. 한뫼도령은 측은한 시선으로 하인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사신 쪽으로 돌렸다. "편지에는 나더러 이곳을 떠나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이길로 그대들을 따라서 궁궐로 들어가겠습니다. 나졸들에게 잡히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공주님을 남나 뵙고 싶으니 그대들은 먼저 들어가서 말씀좀 전해 주시오. 전날 공주님을 뵈옵던 잔디밭에 앉아 기다리겠소이다." 사신으로 온 까투리가 공손히 대답했다. "우리들은 공주마마의 심부름꾼이니 공자의 말씀을 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신은 즉시 작별을 고하고 날아 올라 사라졌다. 한뫼도령과 들모루도 하늘로 훌쩍 치솟아 올라갔다. 고개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 그들은 전날 공주가 노닐던 잔디밭위에 내려 앉았다. 주위의 광경은 전날과 다를바가 없는데 한뫼도령의 마음은 견딜수 없을 정도로 허전하고 쓸쓸했다. 공주를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오게 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공주가 오기전에 나졸들이 오면 꼼짝없이 묶여 가서 귀신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공주가 편지에서 말한 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하직을 고하고 다른 나라를 찾아가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뉘우침이 간혹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뫼도령은 이런 마음을 누르고 공주가 오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이때, 궁궐쪽에서 한 날짐승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한뫼도령이 있는 곳까지 날아온 까투리는 뒹굴 듯이 땅 위로 내려앉았다. "앗, 공주님!" 한뫼도령은 급히 공주의 앞으로 달려갔다. 공주가 말하였다. "공자님 이렇게 또 다시 뵙게 되어서 저는 죽어도 한은 없사오나 어쩌자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말을 마치자 공주의 섬세하고 커다란 두 눈에서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뫼도령은 이 모습에 감격하여 말하였다. "이미 저의 한 목숨은 공주님께 바쳤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언젠들 공주님을 잊을수가 있으며 어디에선들 찾지 않을 떄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로 인해서 부왕마마의 노여움을 사셨다니 이토록 쿤 죄를 어지해야 합니까?" 이에 공주가 말하였다. "전번에 여기에서 뵌 뒤에 밤낮으로 생각해 왔사옵니다. 그러나 전생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서로 해로할수 없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사옵니다." 공주는 잠시 한뫼도령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다시 말하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몹시 기쁘오나 나졸들이 몰려오기 전에 속히 이 자리를 떠나셔요." 공주의 염려에 한뫼도령은 차분히 말하였다. "수백의 나졸들이 온다해도 조는 조금도 무섭지 않으며 수천의 화살이 제개 날아와도 저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주님의 신변이 도리어 걱정되오니 이 자리를 뜨도록 하십시오." 공주는 한뫼도령의 진지한 말에 대답하였다. "저도 공자님과 한께 여기에 있껬사옵니다. 여기에 제가 있으면 공자님이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또 제가 이곳에 있으면 나졸들이 온다해도 공자님을 거칠게 대하지는 못할것이니까요." 한뫼도령은 공주를 책하려는 듯 말하였다. "여기서 계속계시는 것은 제게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만일에 부왕마마께서 더 큰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드때는 공주님의 신변에 화가 미칠텐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주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나직히 말하였다. "공자님께오서 저의 몸을 위해서 목숨가지 버리시려는데 어찌 전들 혼자 살아서 욕된 목숨을 보존하려 하시겠습니까? 정녕코 저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사옵니다." 한뫼도령과 공주님은 가장 긴받한 환경속에서 가장 기쁘고 만족스러운 마음에 도취하였다. 그들은 서로 눈물을 쏟으면서 굳은 사랑을 몇번이고 맹세 하였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소란스러워지며 수많은 날짐승들이 궁궐쪽에서 치달아 올라오고 있엇다. 조그만 참세떼처럼 검고 작은 날짐승들이 쏜살같이 공주와 한뫼도령이 있는 잔다밭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올수록 날짐승들의 모습은 커가고 뚜렷해졌다. 그것은 궁궐을 지키는 나졸의 무리였고 한뫼도령을 잡으러 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거기 그대로 있거라!" 제일 앞서 날아오던 나졸 한놈이 땅에내려서기도 전에 한뫼도령을 향해 소리쳤다. "..." 한뫼도령은 이미 모든일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조금 전에 큰소리쳤던 나졸들이 한뫼도령에게 물었다. "네가 봉묏골에 사는 태수의 아들이 분명하렷다!" 한뫼도령은 아무 동요도 없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친위부 대장은 얼굴이 일그러 지며 말하였다. "우리는 궁궐을 지키는 친위부대다. 대왕마마의 어명을 받들고 너를 체포하러 왔다." 말을 듣고 난 한뫼도령은 친위부대장에게 물었다. "대체 대왕마마가 무슨 까닭으로 나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셨소? 나는 아무런 죄도 없소이다." 친위부 대장은 큰 소리로 말하길, "이 괘씸한 놈! 대왕마마께서 아무런 이유없이 너를 잡으라고 하셨겠느냐! 여봐라, 어서 이 죄인을 묶도록 하라!" 우렁찬 친위부 대장의 호통이 떨어지자 나졸들은 우루루 달려가서 한뫼도령에게 밧줄을 들이대었다. "이 무엄한 놈들!" 갑자기 공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네이!" 하고, 나졸들은 한번더 호총쳤다. "이놈들, 네 놈들눈에는 감히 공주가 보이질 않느냐? 감히 공주의 앞에서 그런 무엄한 짓을 하고도 목숨이 성할줄 아느냐?" 친위부 대장은 공주의 태도에 황공한 듯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 얼굴에는 공주를 비웃는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공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책하듯 말하였다. "이분으로 말하자면 자기 처소에서 노희들에게 들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다. 옛부터 찾아오신 손님네께는 성대한 대접을 베푸는 것이 예의이거늘, 정중히 모시지는 못할지언정 이토록 무례하게 포박을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행동들이냐?" 이에 친위부 대장이 말하였다. "하오나 공주마마, 하늘에 두 해가 없듯이 이나라에 두분대왕마마가 없사옵니다. 어명을 받들고 죄인을 잡는데 포박을 하지 않는 일이 없사옵니다. 공주님 말씀이 간절하기는 하나 어명을 어길수는 없는 아닙니까?" 그러자 공주는 크게 노해 말하였다. "그렇게는 못한다. 이도련님을 묶어가는 놈들은 한 놈도 용서없이 큰 벌을 내리리라." 말을 듣고 난 친위부대장은 은근히 위협하는 말투로 말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공주마마! 부디 노여움을 진정하시옵소서. 어명을 거역할수 없는 일아닙니까?" 말을 마치고 나졸들을 돌아보며 명려하였다. "무엇을 꾸물대느냐? 어서 죄수를 묶도록 하라!" 이에 나졸들은 대답했다. "네이!" 부대장의 날카로운 호령이 떨어지자 남은 나졸들은 공주에게서 들은 꾸중의 분풀이도 할겸 아까보다도 더욱 우악스럽게 달려들엇다. 그리고는 한뫼도령의 날개와 다리를 곰짝 못하도록 옭아 놓았다. 이에 한뫼도령은 크게 노하여 부르짖었다. "이놈들! 내기어코 네놈들으 단 한놈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릴 것이다. 두고 보아라. 이 괘씸한 놈들 같으니." 친위부 대장과 나졸들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엇다. 공주는 이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였다. "안된다. 네놈들이 이 공자님을 이토록 참혹하게 끌어가지는 못할 것이리라." 공주의 말을 듣고 한뫼도령은 타이르듯이 말하엿다. "공주님은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것이나 편안히 가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연이 제게 남아 있으면 살아 나와 공주님을 평생 모시게 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부디 눈물을 거두시고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는 직접 앞장을 서서 한뫼도령은 걸어 나갔다. 이렇게 되자 공주는 위업도 기운도 다 잃고 친위부 대장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여봐라! 제발 모질게 모시고 가지는 말아다오!" 부대장의 태도는 공손하기는 했지만 공주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앟고 나졸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죄수를 끌고 내려가자. 대왕마마께서 몹시 기다리시겠구나." 하고는, 포졸들을 이끌고 위세도 당당히 궁궐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뫼도령이 옥에 갇히게 되자, 그날부터 공주는 침식을 전폐하고 슬퍼하였다. 이에 시녀들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올리고,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하였으나 공주는 슬프고 괴로운 펴정으로 밤낮을 지냈다. 그러므로 공주의 몸은 나날이 수척해 갔다.
최척전 - 조위한(1558~1649) 이 작품은 광해군 13년 윤 2월에 조위한이란 문인이 지었다. 그 창작 동기를 보면 작자가 60세 되던 광해군 13년에 전라도 남원 주포에서 지내고 있을 때, 이 작품의 남자주인공이 되는 최적이 찾아와서, 자기의 기구하였던 운명을 얘기하며 없어지지 않기 위해 글로 기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대강을 서술했다는 것을 작품의 끝에다 밝혀 놓았다. 우리는 이 작품과 같은 얘기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유몽인의 '어우야담' 에 '홍도전'이란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작품과 같은 실화가 임진왜란 때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또한 그와같은 실화를 소재로 하여 쓴 창작으로 인정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홍도전'과 '최척전'을 비교해보면 홍도전은 짤막한 설화인데 반하여 '최척전'은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작자인 조위한은 명종 13년에 나서 인조 27년(1649) 91세로 죽은 문인응로서, 참판 나언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자를 지세라했고, 호는 현곡, 소옹이라 했다. 그의 나이 43세 되는 선조 34년(1601)에, 늦게야 사마시를 거쳐 광해군 원년 (1609(51세 되는 해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을 지내다가 광해군 5년 (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때 파직을 당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로 사성이 되고, 인조 5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때에는 관군과 의병을 거느리고 싸웠다. 그후 직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작자는 당대의 명필까요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사를 풍자하는 '유민탄'이란 가사 작품도 지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작자는 천성으로 타고난 효자요,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모부인의 명환이 위독했을 때 약에 쓸 똥과 오줌의 맛을 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모부인의 입에 넣었다고 한다. 또 형제와 같이 잔치하기를 좋아하고, 잔치가 끝나고도 차마 떨어지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벼슬은 공조 참판에 그치고 말았으나 항상 천리를 널리 돌아보고자 했고, 세상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벼슬을 그만두고는 당대의 시인인 석주 권필과 친히 지냈다고 하니, 같은 소설 작가로서의 의기가 상통했으리라. 최척전에 대하여 이 작품은 임진왜란때 있었던 실화를 소설화하였는데, 실화의 서술이라 할수 잇는 홍도전과 비교해 보면, 첫째, 남녀 주인공들의 성명이 다르다. 홍도전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성이 정생인데 대하여, 이 작품에서는 이름을 밝힌 최척으로되어있고, 여자 주인공은 홍도전으로 되어있는데 대하여, 이 작품에서는 이옥영으로 되어잇다. 둘째, 플롯에 있어서는 홍도전은 이작품의 경계정도로 짤막하고, 이 작품에서는 홍도전에 없는 많은 플롯으로 결구되어 있어서 작품의 우열로 보아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우리 고전 문학에서 남윤전과 함계 드물게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포로 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는 희귀한 소설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내 이씨는 포로로 되어 일본으로 끌려 갔으나, 남장을 한 이씨를 남자로 안 왜인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같이 사랑하며 상선에다 태우고 장사하러 안남의 항구에 정박하게 된다. 한편 피난중 가족을 잃은 남편 최척은 우리 나라에 출전했던 명군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 살며 친구의 상선을 타고 안남에 갔다가 왜선에 타고 있었던 아내와 눈물겨운 상봉을 한다. 이렇게 하여 해후한 최척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와 살다가, 남편이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를 치기 위하여 명군에 증발되어 만주로 출전하면서 아내와 다시 눈물의 작별을 한다. 명군이 패배하고 포로가 된 최척은 수용소에서 뜻밖에도 명나라의 구원병으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된, 고국에서 난 아들을 만나 부자간임을 확인하고, 감시병의 호의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부자가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최척이 등창이 나서 죽게 되었을 때 그를 고쳐준 의원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살고있는, 중국에서 낳은 아들의 며느리 부친이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한편 중국에 남아 살고있는 아내 이씨는 명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천신만고 끝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로, 이와같은 실화는 동서 고금에도 없는 신기한 얘기 가 아닐수 없다. 해후가 거듭되고, 기적이 되풀이 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전쟁으로 인하여 부부가 헤어졌다가 이역만리에서 해후하고, 아내가 위기에 빠져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부처님이 나타나 죽지 말라고 격려하는데 이 모든 구원이 부처님의 가호에 의함이었다고 작자가 작품의 끝에다 언급해 놓은 것으로 보아 그 창작 의도를 알 수 있다. 이와같은 부처님의 가호는 실화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는 홍도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 이씨가 남원에 있는 만폭사에 가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여 아들을 낳았고,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상선을 타고 다니면서도 항상 염불을 하였던 것을 보면, 이작품은 불교의 영험사상을 표현해 본 불교 소설의 주제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 전라도 남원땅에 한 소년이 있었으니 이름은 최척이요, 자는 백승이라했다. 최척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서문 밖 만복사 동쪽에서 아버지와 외로이 살고 있었다. 최척은 나이가 어렸지만 생각이 깊고 마음은 한없이 착했으며, 벗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이런 충고를 했다. "네가 공부를 즐겨하지 않는다면 커서 무뢰한밖에 더 되겠느냐. 도대체 너는 어떤 인물을 본받고자 하느냐. 지금 한창 난리가 일어나 고을마다 장정을 널리 뽑고 있다는걸 너도 들어 알게다. 그런데 너는 오직 놀기에만 힘쓰니 어지 이 늙은 애비를 기쁘게 할수 있겠느냐. 이 책을 마련해 줄 터인즉 선비를 찾아가 배우도록 하려므나. 비록 과거 급제하여 명성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쟁터에는 끌려가지 않을 것이다. 저 성남에 정상사란 선비가 있다. 그와는 소시적부터 친구여서 잘아는 사이다. 그는 면학에 힘써 문장이 능하니 초학자를 가르침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도록 해라." 최척은 당일로 정상사를 찾아갔다. 그는 간곡히 가르침을 청했다. 그래서 정상사는 끝내 거절을 못하고 문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이미 학문은 크게 진전을 보았다. 동네 사람들은 소년의 총명함을 칭찬해 마지 않앗다. 최척이 글을 배울때면 한 소녀가 숨어 들어 글읽는 소리를 몰래 엿듣곤 했다. 나이는 열일곱 여덟쯤 됐을까. 새카만 윤기어린 머리를 가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어느 날이었다. 정상사가 식사를 하느라고 글방을 비워 최척 혼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창틈으로 조그만 쪽지가 들어왓다. 최척은 이상히 여겨 그것을 주워서 펴 보았다. 그 쪽지에는 시경에 있는'표유매'의 마지막 장이 씌어 있었다. 그는 이글을 읽자 마음이 마냥 들었다.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언제 밤이 오려나 몹시 기다려졌다. 그로다가 공부하는 사람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둬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롤수록 마음이 달아 올랐다. 최촉은 공부를 다하고 글방을 나섰다. 문밖에 지켜 서 있던 푸른옷을 입은 계집아이가 뒤를 따라오며, "저, 긴히 드릴 말씀이 이사옵니다." 했다. 최촉은 계집아이를 보자 쪽지 생각이 났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자세히 물으니, 계집아이가 대답했다. "저는 이 낭자의 시녀인 춘생이라 하옵니다. 낭자께서 저를 보내시며 낭군님에게 청하여 화답의 시를 받아 가지고 오라고 하시었사와요." 최촉은 이 계집아이가 의심쩍어 물었다. "너는 정가의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이 낭자라고 하느냐?" "저의 낭자 께서는 원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동에 살고 있었어요. 아버지 이신 이경신 어른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심씨 홀로 딸을 데리고 살고 있답니다. 이름은 옥영일라 하옵는데, 오늘 낮 창너머로 시를 던져 준 사람이 바로 저의 낭자 이옵니다. 지난해, 난리를 피해 강화에서 배를타고 나주로 피난 나왔습니다.. 올가을에 거기서 다시 여기 정씨 댁으로 옮겨왔답니다. 그것은 한 과년한 딸을 두었기 때문이랍니다. 표형되시는 정상사에게 혼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사옵니다." 최척은 아버지를 뵙고 청혼을 해보도록 간청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들은 화족이니까, 반드시 부자가 아니면 혼인하려 들지 않을곳이다. 우리집은 빈한해서 응하지 않을곳이 분명해." 최척은 몸이 달아 재삼 아버지를 졸라댔다. 마침내 아버지는 말했다. "네가 굳이 원한다면 내 한번 청혼을 해 보긴 하겠다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느니라." 이튿날이엇다. 최공은 정상사를 찾아가 아들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정상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표매가 와 있긴 있다네. 그 딸은 재색과 행실이 아주 뛰어나 내가 신랑감을 널리 구하고 있는 중일세. 자네 아들의 재주가 뛰어나고 또한 준수하니 신랑감으로는 적합하다고 생각되나 짐안이 가난한 것이 한일세그려. 그러나 한번 누이와 상의해 가부간에 알려줌세." 최공이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최척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상사는 최공을 보낸다음 안으로 들어가 심씨와 상의했다.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제가 집을 버리고 피난을 나와 외롭고 위태로와도 의탁할곳이 없잖아요. 다만 딸 하나밖에 없으니 부잣집으로 출가시키기를 원해요. 가난한 집의 아들은 비록 그 마음이 아무리 어질다 하더라도 원치 않아요." 그날 밤이엇다. 옥영은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 최척의 말을 할까 망설이며 눈치를 살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려므나."했다. 옥영으리 이말을 듣고 얼굴은 붉혔으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머님이 사위감을 고르시는데 부잣집만 바라고 있으니,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님의 그 뜻은 저인들 어찌 모르겠어요. 부잣집인 데다 사위감이 어질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그러나 생활은 부유하더라도 남편이 변변치 못하다면, 그 넉넉한 살림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옵니다. 저는 집안이 무자라 하더라도 남편될사람이 어질지 못하다 하오면 그런 집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어요." "너, 그게 무슨 당돌한 소리냐?" "당돌한 말이 아니옵고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어요. 제가 일기로는 최척이라는 사람이 아저씨 댁에 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품이 충후하고 성실하여 단연코 경박한 탕자는 아닌가 합니다. 그런 분을 남편으로 섬긴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어요. 더구나 가난한 것은 선비로서 떳떳한 길이 아니옵니까? 저는 원래부터 불의의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아니합니다. 부디 그 댁으로 혼사를 정해주시어요. 이런 말은 처녀로서 드릴 말씀이 아닌줄 압니다만, 혼자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일이옵기에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리옵니다. 만일에 일생을 그르친다면 어찌할 것이옵니가. 이것은 깨진 병을 다시 원상대로 할수 없으며, 물들인 실을 다시 희게 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옵니다. 제 아무리 가슴아파 한들 또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옵니다. 더구나 이 몸은 남의 집에 얹혀 있사오며, 거기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쟎았어요. 그리고 적병이 정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장모를 잘 받들어 모시겠어요?" 심씨는 딸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튿날, 심씨는 정상사와 마주앉아 말했다. "제가 지난 밤동안 곰곰 생각해 보았어요. 최랑은 비록 가난하지만 훌륭한 선비인 것 같아요.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 인력으로는 어찌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엑세 출가시키기 보단, 차라리 잘아는 최랑으로 사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누이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 반드시 성사시켜 줌세. 최생은 가난하나 그 사람됨이 옥과 같네. 비록 서울 넓은 바닥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그만한 사람은 드물걸세. 앞으로 뜻을 이루어 학업이 대성한담녀 우물안의 개구리는 되지 않을것이니 안심하게." 그날로 매파를 보냈다. 사주를 써 약혼했다. 내친 걸음에 9월 보름날로 혼인날까지 받아 두었다.. 부모 조다도 당사자들이 크게 기뻐했다. 혼인날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얼마 동안의 세월이 흘렀다. 남원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참봉을 지냈던 변사정 이엇다. 이 의병들이 영남 으로 진격할때였다. 최척은 활을 잘 쏠 뿐만아니라 말타는 재주가 비상하다 하여 의병으로 뽑혔다. 최척은 진중에서 고민하다 못해 병이 들었다. 결혼날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그는 의병장을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의병장은 말했다. "이 때가 어느 때라고 감히 결혼한다고 휴가를 달라는고. 상감께서도 몽진하셔서 풀밭, 진흙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계셔, 신자된 도리로서 마땅히 총칼을 들어 적을 부찔러야 함이 옳은 일이 아닌고. 하물며 너는 아직도 장가 들 나이가 아니쟎느냐. 왜적을 격파하고 난후에 장가 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는 내색도 하지 말라." 이렇듯 엄하게 책망하며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최척은 종군한 위로 혼인날이 박두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옥영은 혼인날을 헛되이 보냈다. 그녀는 하루하루 수심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옥영의 이웃에 양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자는 옥영의 아름다운 미모며 착한 마음씨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혼자인 최척이 출정하여 돌아오지 않음을 틈타 구혼을 했다. 몰래 보화를 정가로 들여 보냈고 매파를 충동질했다. "최생이라는 자는 빈곤하기 그지없나이다. 날이면 날마다 때 걱정을 하니 부친 봉양하기에도 어렵습니다. 항상 남한테서 쌀을 빌어 오는 처지라 합니다. 그런 처지에 아내를 얻는다면 그 어려움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을것이요, 더구나 최생이란 자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 생사를 알수 없지 않은가요. 그런데 비해 양씨는 원래부터 한다 하는 부자가 아닌가요. 그의 아들 또한 어질어 최생만 못쟎으니, 아주 금슬 좋은 부부가 될것이 뻔하지요." 매파는 성가시게 보챘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격으로 심씨는 마음이 소롯이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끝내 승낙을 하고 말았다. 결혼 날짜도 열흘 앞세워 정하기까지 하였다. 옥영은 이를 알았다. 그날 밤, 옥영이는 어머니와 마주하자 단연코 반대하여 말했다. "최랑이 오지 못한 것은 그 몸이 의병장에게 매인 때문이어요. 고의로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니온데, 최랑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파혼하는 불의를 저는 원하지 않사옵니다. 만약 딸의 뜻을 꺾고자 한다면 저는 당장 죽어 버리겠어뇨. 어머니 마저 이 마음을 몰라주는데, 어찌 하늘인들 알아 줄리 있겠어요?" "너는 어찌 제 고집만 부리느냐. 응당 남의 딸이 되었으면 부모의 처분만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냐. 감히 어느 앞이라고 시집가는 것까지 간섭을 하려 드느냐." 하고 심씨는 딸을 몹시 책망했다. 밤이 깊었다. 심씨는 잠결에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다. 놀라 깨어났다. 옆에 누워 자던 딸이 없엇다. 당황하여 급히 찾아나섰다. 옥영은 창 밑에 쓰러져 있었다. 수건으로 목을 졸라 맨 것이었다. 이미 소발은 싸늘하게 식었고, 가느다란 숨소리만 가쁘게 들렸다. 이것마저 점점 희미해 지더니 뚝 끊어지고 말았다. 심씨는 통곡했다. 부랴부랴 목을 맨 수건을 풀었다. 손길은 마냥 떨렸다. 이때 춘생이 깨어나서 불을 밝혔다. 그녀도 주저앉아 통곡했다. 급히 서둘러 물 몇 모금을 입을 벌리고 흘려 넣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간은 흘렀다. 이윽고 가느다란 숨결이 되살아 났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다. 너나 없이 달려와 구완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였다. 심씨는 양가와의 혼사 문제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발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최공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 왔다. 그는 그 사실을 아들에게 알렸다. 그 무렵, 최척은 병으로 몸져 누워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서신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병세는 다급해졌다. 의병장도 이를 알고 최척을 불렀다. 곧 귀가 조치를 취해 주었다. 최척이 집으로 돌아온지도 수일이 지났다. 그렇게 위독하던 병세도 씻은 듯이 나았다. 마침내 그날, 섣달 초사흘이 다가왔다. 최척은 정상사의 집으로 가 옥영과 혼례를 치렀다. 두사람의 기쁨이란 이후 형언할수 없엇다. 최척은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왓다. 집안에 들어서 기도 전이었다. 친척들이 몰려와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송해 마지 않앗다. 이웃 사람들도 어진 아내를 데려왔다고 부러워들했다. 옥영은 시집온 지 3일도 채 안되서 시집일을 열심히 했다. 베틀에 올라 베를 자고 들로 나가 김을 맸다. 그녀는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공경했고 남편을 정성스레 섬겼다. 웃 사람들을 공손히 받들었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극히 자상했다. 그녀는 인정과 사랑을 골고루 베풀었다. 원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양홍의 아내며 포선의 며느리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이라고들했다. 최척은 옥영을 아내로 맞이한 후 부족함이 없엇따.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혼인을했으니 더 이상 바랄것이 없엇다. 살림도 나날이 넉넉해져 갔다. 이래서 아기자기한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최척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를 이을 아들이 늘 걱정이 됐다. 생각다 못해 매달 초하루가 되면 부부 동반해서 만복사로 올라가 자식 하나 점지해달라고 빌었다. 이듬해는 갑오년이엇다. 이해도 정초에 만복사로 올라가 불공을 지성으로 드렸다. 그날 밤이었다. 부인의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만복사의 무처로다. 내가 그대들의 지극한 정성에 크게 감동되었도다. 그래서 기남자를 점지해 줄것인즉, 이후 부인의 몸에는 태기가 있을 것이로다." 과연 그달로부터 태기가 있엇다. 만삭이 되어순산하니 아들이엇따. 등에는 손바닥만한 붉은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석이라지었다. 최척은 피리를 썩 잘불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나 꽃피는 아침 나절에 피리를 불었다. 그가 피리를 불 때면 저무는 봄날하며 아름다운 밤으로 미풍이 간드러지게 살랑거렷고, 밝은 달은 빛을더해 현란하게 비쳤다. 바람에 나느 꽃잎은 옷에 나앉았고, 그윽한 향이가 코 끝에 맴돌았다. 그러면 술독에서 빚어 놓은 술을 퍼, 잔 가득히 부어 마셨다. 취기가 한껏 돌면 책상에 기댄채 피리를 불엇다. 그 피리 소리는 간드러지게 울려 퍼져 멀리까지 번졌다. 옥영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첩은 오래 전부터 아녀자들이 시를 읊는 것을 못마땅해 했었어요. 그렇지만 이런 정경에 이르러선 도저히 참을수가 없군요." 최척이, "어디 부인이 한수 읊어 보오." 하니 옥영이 칠언 절귀 한수를 읊었다. 최척은 이제까지 시를 지어 본적이 없엇다. 부인이 읊은 시를 듣고 크게 놀랐다. 너무나 감동해 시흥이 절로 솟앗다. 화답의 시를 읊었다. 읊기를 마치자 옥영은 몹시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할 것을 지레짐작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세상살이에는 불의의 변고가 많사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끼어들게 마련이옵고 헤어지고 만남이 무상한 것이오니, 어찌 마음이 슬퍼지지 않을수 있겠어요." 최척은 부인의 눈물을 소매로 훔쳐주며 위로했다. "굴신과 영허 천도의 상리요, 길흉과 회린은 인사의 당연함이라 하지 않소, 설혹 타고 난 운명을 바꿀수야 없다손 치더라도, 얽매여 살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러니 너무 슬퍼하거 근심하지 마오. 옛 사람이 말하되 '길한 말만 하고 흉한 말은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부질없는 마음을 써 이 즐거운 마음을 상하게 할 것까지야 없지 않소." 이로부터 부부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이들 부부는 지음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루도 떨어져 있는 일이 없엇다. 옥영은 왜놈에게 붙잡혀 왜국으로 끌려갔다. 왜병중에 늙은 병사가 있었다. 비록 글은 배우지 못했지만 부처님을 믿어 그 마음 은 자비로왔다.. 그는 장사를 생업으로 했다. 그리고 배타기를 익혔다. 그래서 왜장 소서행장이 선주로 삼아 조선으로 나오게 되엇다. 이 늙은 왜인은 옥영을 아껴 주었다. 부인을 집으로 데려가 좋은 옷과 맛잇는 음식을 주어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도망치지 않으려니 여겼다. 옥영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는 직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배를 내어 도망치려 했으나 감시가 심해 들키곤했다. 어느날 밤이었다. 옥영은 웅크리고 있다가 선잠이 들었다. 꿈결에 부처님이 나타나,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반드시 후일이 있을 것이다."하고 계시해 주었다. 옥영은 꺠어나 그 꿈을 곰곰히 생각했다. 부처님을 굳게 믿어 후일이 있을 것을 기약하고는 자살하려던 뜻을 굽혔다. 이왜인의 집에는 늙은 딸이 하나 있을뿐 아들이 없엇다. 늙은 왜인은 옥영을 집에만 있게 했고 바깥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옥영은 말했다. "저는 몸이 작은데다 약골이라 병이 잦습니다. 본국에 있을때도 장정으로 안 뽑혀 출전도 못했습니다. 단지 바느질과 밥짓는 것만 배워 다른일은 전혀 할수 없습니다." 그러자 왜인은 더욱 가상히 여겼다. 아들같이 사랑했다. 이 왜인은 언제나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장사를 나서면 옥영을 배 안에 두고 밥을 짓게 했다. 왜인은 중국 민절지간을 왕래하며 장사했다. 그때즘이었다. 최척은 요흥부에 여공과 함꼐 형제지의를 맺고 있었다. 여공은 매부를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척은 굳이 사양했다. "나는 집을 적화에 잃고 또한 노부며 약처하며 자식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껏 발상이나 복상도 봇하고 있는 처지에 어찌 마음을 놓고 아내를 얻어 평안한 생활을 도모할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뚝 잘라 거절했다. 이후 여공은 두 번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었다. 여공은 마침내 병들어 죽고 말았다. 최척은 더 이상 의탁할수 없었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랑의 길로 들어섰다. 각지의 명승고적을 찾아다녔다. 소상강, 동정호, 악양루, 고소대, 들을 돌아보며 시를 지어 읊었다. 그는 어느새 이렇게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한 세상을 보내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러다가 해섬도사 왕용이라는 사람이 청성산에 은거하며 황금연단을 복용하여, 백일만에 승천하는 도술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장차 촉땅으로 들어가 그 도사를 찾아서 배우기를 청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 때였다. 다행이도 송우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집은 향주 용금문 안에 있었고, 경사에는 일가견을 가졌지만 공병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저서로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는 성미였다. 최척은 이 사람과 사귀어 지기가 되었다. 송공은 최척이 촉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련해서 찾아왔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근히 취한 후였다. 송공이 취척에게 말했다. "이 난세에 백일 승천하느 도술을 누구인들 원치 않으리요. 그러한 이치는 고금을 통하여 없을뿐만아니라,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런 마음을 다 먹소. 복식하기 의하여 굶주림을 참고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까지야 뭐 있소. 그래 산귀와 더불어 벗하려고 그러는가? 최공은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 배를 타세. 오월로 다니면서 비단이나 팔고 차나 팔면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면, 이 또한 달인의 업이 아니겠는가?" 최척은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송공을 따라 항주로 갔다. 그해는 경자년 봄이엇다. 최척은 송공과 함께 상선을 타고 안남을 왕래했다. 이항구 에는 왜선 10여 척이 열흘 전부터 정박하고 있었다. 때는 4월이라 모드들 노곤하여 곯아떨어졌다.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었다. 물빛은 비단같이 아름다웠고, 바람이 자 물결은 잔잔했다. 물결소리조차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만 높은데, 이따금 물새우는 소리만이 들려왓다. 그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매우 구성지게 들려왓따. 최척은 홀로 선창에 기댄채 신세 타령을 했다.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품속에서 퉁소를 꺼내어 곔녀조 한곡을 불면서 가슴속에 맺힌 애원한 정을 풀고 있었다. 이 피리 소리에 하늘마저 근심스런 빛을 딘 듯했고, 구름과 연기조차 침울하기 그지 없엇다. 배 안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도 놀라 깨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슬픈 낯빛을 지었다.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염불소리 대신에 조선어로 칠언 절귀를 한수 읊는 소리가 들렸다. 읊기를 다하자 한숨을 휴 내쉬는 것이엇다. 최척은 이시 읊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뜻밖이어서 들었던 퉁소마저 떨어뜨렸다. 넋을 잃은 듯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송공이 이상히 여겨 큰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가?" 그러자 최척은 그만 기절해 버렷다. 얼마가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말했다. "저 시는 내 아내가 지은시오, 둘만이 알지 다른사람은 아무도 모르오, 더욱이 시 읊는 소리가 아내와 흡사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소. 아내가 저배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도저히 그럴리 없지." 그리고는 왜적의 습격을 당하여 가족들이 흩어진 내력을 들려 주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그속에 두 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젊고 용감 한 반면에 좀 덤벙대는 선비였다. 그는 최척의 말을 듣자 의기를 나타내 주먹으로 뱃전을 쳤다. "내가 당장 찾아 보겠소." 그러나 송공이 만류하며, "깊은 밤에 일을 꾸몄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두려우이. 내일 아침에 정중히 찾아보는 것이 좋을것이오."하니, 모두들 찬성했다. 그날 밤 최척은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아침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날을 밝혔다. 이윽고 동쪽이 밝아왔다. 그는 조금도 지체할수 없어 배에서 내려왓다. 곧장 언덕으로 내려가 왜선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시를 읊은 사람은 틀림없이 조선인일거요. 나도 조선인이오. 이 머나먼 안남까지 와서 고국 사람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이 또한 기쁜일이 아니겠습니까?" 옥영은 배안에서 퉁소소리를 들었었다. 그것은 곧 조선의 곡조요, 또한 엤날에 귀에 익었던 소리였다. 그래서 남편이 그 매에 와 있지 않나해서 시를 시험 삼아 읊었던 것이엇다. 이때 남편이 자기를 찾는 말을 듣자, 옥영을 황망하여 몸둘바를 몰랐다.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급히 난간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소리치면서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너무나 감격해 가슴이 막혔다. 심정이 격하여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이 극적인 광경을 보느라고 양국의 뱃사람들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그들은 처음에 친척이나 친구인줄로만 알다가 급기야 부부지간이란 것을 알고는 서로 쳐다보며 큰 소리로, "이상하고도 기이하도다. 이것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았도다. 일찍이 이런일은 보지 못했는데 정말 기쁜 일이로다."하며 경탄을 않은 사람이 없엇다. 최척은 집안 소식을 물었다. "그 때 저희들은 산중에서 도망하여 강가로 나왔어요. 시아버님과 어머님은 그때까지 무사했어뇨. 날은 저물고 창황중에 배를 타느라고 그만 서로 헤어지고 말았어요." 두 사람은 또 한번 통곡했다. 이 정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송공이 왜인을 청하여 백금 세 덩이를 주며 옥영이를 사겠다고 나섰다. 왜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을 얻은지 4년이나 흘렀습니다. 그 단정한 거동을 사랑하여 친자식같이 사랑했고, 침식도 함께하며 잠시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부인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이제 이런 해후를 보고 하늘과 귀신마저 감동하거늘, 내 비록 완고하고 미련하나 어찌 보석과 같으리요. 어찌 값을 받을수 가 잇겠소이까."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열냥의 은자를꺼내어 옥영에게 주며 말했다. "4년 동안이나 동거하다가 하루 아침에 이별하게 되닌 슬픈 심정을 참을수 없구려. 잃었던 남편을 만리 바다 밖에서 다시 만난 것은 이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오. 내가 욕심을 낸다면 하늘이 벌할것이오. 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 부디 몸조심하고 행복하게사시오." "주인 영감님의 도움을 입어 다행이 죽지 않고 살아서 남편을 남났으니, 그 베푼 은혜가 이미 깊사옵니다. 더욱이 이렇게 많은 돈까지 주시니 어떻게 보답할 길을 모르겠사옵니다." 옥영은 왜인의 손을 잡고 치사했다. 최척도 왜인에게 극구 사례했다. 그는 옥영을 데리고 배로 돌아왓다. 이웃 배에서 모두들 찾아와 채단과 금은을 주며 축하했다. 최척과 옥영은 그 사례를 말로 다할수 없었다. 송공은 최척의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한칸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 부부로 하여금 평안히 살게 했다. 최척은 난 중에 잃었던 아내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만리 타국이라 의탁할 곳이 없었으며, 사방을 돌아봐도 친척하나 없었다. 더욱이 늙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의 생사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상심했다. 근심 걱정이 귾어질 날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기원했다. 항주에 있는 옥영은 판군이 호병에게 전멸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 남편은 전쟁터에서 횡사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죽기를 기양하고 물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어루만지며,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지어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후에 잔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로다." 하고 일깨워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옥영은 몽석을 붙잡고 말했다. "내가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는데 남원 만복사의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그 후 4년 만에 네 아버지를 안남 바다 가운데서 만나지 않았느냐. 이제 내가 죽기로 마음 먹었는데, 또 그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일깨워 주는구나. 이러니 아무래도 네 아버님은 적의 칼을 피했음이 분명하다. 만약 네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죽어도 오히려 산것과 다르바 없으니, 무엇을 원망하리." 몽석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했다. "요새 듣자니, 오랑캐들이 명군은 죽었으나 조선 사람들은 탈출했다고 해요. 아버지는 조선 사람이니 틀림없이 도망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처님의 꿈이 참으로 영험합니다.. 그러하오니 어머님은 부디 살아 계셔 아버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소서." 그러자 옥영은 기운을 차리고 말했다. "오랑캐의 소굴이 조선과 인접해 있지 않느냐. 네 아버님이 도망쳤다면, 그 형세를 보아 조선따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어찌 만릿길을 건너와 처자를 찾을수 있겠느냐. 나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다 죽는 한이 엏어도 돌아가겠다. 창주로 가다가 국경이나 넘어서 죽는다면, 선영에 묻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 이역 만리 헤매는 귀신은 면할수 있지 않겠느냐? 월조는 남쪽에 집을짓고 호마는 북쪽을 향해 운다 하니, 이제 죽을 날을 앞두고 더욱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자의하소서." 몽석은 이렇게 위로했다. 옥영이 말을 이었다. "외로운 시아버님, 어머님이며, 어린아들을 모두 잃고 그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구나. 요새 상인들의 말을 들으니, 왜적이 잡아간 조선 사람을 본국으로 내려 보낸다더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겠느냐. 네 조부와 부친이 비록 이역땅에서 죽어 백골이 비 바람에 굴러 다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선을 누가 돌보겠느냐. 원근 친척들이 난리에 다 죽었다한들, 어찌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고국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고국으로 돌아가다니요?" "그렇다. 너는 배를 사서 준비해라. 여기서 조선까지는 수로로 수천리나 되지만 순풍에 돛만 달면 한달이 봇되어 고국 바닷6가에 닿을 것이다. 이미 내마음은 결정됐다." 이에 몽석은 울며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어머님,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닿기만 한다면야 그 얼마나 다행이겠어요. 그렇다고 만리 창파 험한 바다를 작은 배로 는 건널수 없어요. 풍파하며 교룡과 상어의 습격을 예측할수 없나이다. 더구나 해적들이 도처에서 뎨지어 출몰하니 어복에 장사 지내시 십상입니다. 어찌하여 생사도 확실히 모르는 아버님만을 생각하셔서 이런 결정을 내리셨어요. 자식이 비록 어리석으나 큰 일을 앞두고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홍도가 옆에서 남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너무 어머님을 탓하지 마셔요. 어머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됐어요. 비록 수화나 해적을 만난다 하더라도 능히 면할수 있을 거예요."하고 옥영은 며느리의 믈을 듣고 나서 말했다. "수로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내 일찍이 많은 경험을 얻었다. 일본에 잡혀 있을때다. 장사하는 주인을 따라 봄이면 민경 지방에서, 가을에는유구로 다니며 배를탔다. 산 같은 파도 속에서도 헤어났고 조수의 흐름도 알수 있다. 선박의 안위며 풍파, 험난도 내가 다 해낼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어찌 벗어날 방편이 없겠느냐." 이어서 조선옷과 일본 옷을 만들었다. 며느리로 하여금 양국의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몽석에게 주의하기를, "배는 오로지 돛대와 노에 달려있으니 견고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지남철은 없어서 안되는 것이니 꼭 마련하도록 해라. 떠날 날은 정해졌으니, 내 뜻을 어기지 말아라."했다. 몽석은 어머니 앞을 물러나오자 아내를 책망햇다. "어머님은 여생을 돌보지 않고 만번 죽을 곳으로만 가시려고 하시니... 돌아가신 아버님은 그만이거니와, 살아있는 어머님 마저 어느 땅에 묻고 싶어서 찬성하는 거요? 어찌 생각이 그리도 깊지 못하오." "어머님은 지성으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말로만 다툴수는 없는 것 아니어요. 이제 만류한다 하더라도 돌이킬수 없는 후회가 될까 봐 찬성했어요. 순순히 따라 나서는 것이 좋아요. 제 근심스런 심정이야 오죽 하겠어요." 수일 후였다. 옥영 일행은 배를 띄워 조선을 향해 떠났다. 며칠을 가다가 산같은 파도를 만나 한 무인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 무인도에 해적이 나타나 금은 보화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옥영이 나서서 중국말로, "우리는 명나라 사람인데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풍파를 마나 이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보화를 가졌겠읍니까?"하면서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해적들도 사정을 살피다가 다만 배만 빼앗아 저희 배 뒤에 달고 사라졌다. 해적들이 자라지자 옥영은 눈물을 거두면서 말했다. "필시 저놈들은 해랑적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저놈들은 중국과 조선사이를 출몰하면서 약탈만 할 뿐 죽이지를 않는다는구나. 내가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모하게 나왔다가, 하늘이 돕지 않아 끝내 이런 낭패를 당했구나. 배마저 잃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머님 이러때 일수록 용기를 가지셔야 합니다." "저 넓은 바다를 날아갈수도 없고 뗏목으로 갈수도 없었으나, 아들과 며느리가 나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이로다." 옥영은 이렇게 말하면서 며느리를 붙잡고 통곡했다. 그 울음이 어찌나 처절햇던지 바위 언덕을 떨치고 굽이치는 물결에 닿으니, 바다도 슬퍼하고 귀신도 신음하는 것 같았다. 옥영은 절벽으로 올라가 바다로 몸을 던지려 했다. 이때 아들과 며느리가 붙들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몽석에게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지 못하게 하니 어느때를 기다리느냐? 양식도 사흘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그럴 바에야 일찌감치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양식이 떨어진 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는데까지 살아 봅시다. 그 새 어떤 도움이 생길지 알수 있나요?" 몽석은 어머님을 부축하여 바위산을 내려왓다. 바위틈에서 웅크리고 잤다. 날이 밝았다. 옥영이 며느리에게 말했다. "내가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없어 잠시 조는 사이였다. 부처님이 또 나타나 전과 같이 일ㄹ러 주시니 정말 이상하구나." 세 사람은 함께 염불을 외며 기원했다. "부처님, 대자비하신 부처님! 저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를 보살펴 주옵소서!"기원했다. 이틀이 지났다. 저 먼 수평선에서 한 돛단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몽석이 놀라며, 옥영이 보고 말했다. "저런 배는 아직 본적이 없으니 걱정이 됩니다." "어디? 우리는 이제 살았구나. 저 배는 조선배가 틀림없다." 모두 한복으로 급히 갈아 입었다. 언덕으로 올라가 옷을 벗어 흔들었다. 배가 가까이 다가와 닻을 내렸다. 뱃사람이 나서며, "당신들 어떤 사람들이오? 이 고도에 살고 있소?" 하고 큰소리로 물었다. 옥영이 조선말로 대답했다. "우리는 본래 한양의 사족이었어요. 나주로 내려가다가 졸지에 풍파를 만나 배가 전복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고 우리만 정신을 차려 부서진 판자조각을 타고 여기까지 표류해 왔습니다." 뱃사람은 듣고 불쌍히 여겼다. 밧줄을 내려 배에다 태워 주며, "이배는 통제사의 무역선이오. 갈길이 정해져 한양으로는 갈수없소." 했다. 마침내 순천에 이르러 정박했다. 세 사람을 뭍으로 내리게 했다. 때는 경신년 이엇다. 옥영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지름길을 따라 대엿새 만에 남원에 이르렀다. 마을이 왜적에게 불타 없어졌으니 많이 변화했으리라 짐작이 들엇다. 옛집을 찾아보려고 만복사를 찾아나섰다. 금교에 이르러 성곽을 바라보니 옛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옥영은 아들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집이 바로 너의 아버님의 옛집이란다. 지금은 주가 들어가 살고 있은지 모르나, 찾아가 하룻밤 신세지면서 자세히 물어보자꾸나." 어느덧 옛집에 당도했다. 최척은 버드나무 밑에서 사람들과 담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옥영이 그들 가까이 다다가 보니 바로 남편이었다. 보자 며느리가 일시에 달려들며 울음이 터졌다. 한바탕 울음 바다가 되엇다. 최척도 곧 알아보고 대성 통곡하며 말햇다. "몽석 어멈이 살아오다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몽석은 이 말을 듣자 달려나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님을 끌어안고 흐느겼다. 온 가족이 상봉하는 그광경은 가히 짐작할수 있으리라. 서로 붙들고 늘어지며 방으로 들어갓다. 심씨는 감이 깊어 정신이 없다가 딸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절했다. 옥영이 끌어안고 갖은 정성을 다하니 얼마후에 깨어났다. 최척은 진공을 불러, "오늘에야 온 가족이 상봉을 하는구려." 하면서 홍도를 불러 인사 시켰다.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상봉했으니, 고금 천하에 다시 이와 같이 신기하고 극적인 일이 있을수 없었다. 이 소문은 일시에 사방으로 퍼졌다. 구경군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더구나 험난을 뚤고 나온 옥영과 홍도의 자초 지종을 듣고는 무릎을 치며 찬탄해 마지 않았다. 다투어 가며 그런 이야기를 이웃과 이웃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옥영이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가족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음덕이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만복사가 황폐해지고 부처도 파괴되어 없어져서 의지하고 불공을 드릴곳 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냥 앉아만 있으리까." 이래서 음식을 갖추어 폐사로 올라갔다. 주위를 깨끗이하고 지성껏 제를 올렸다. 이후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녀를 돌보면서, 남원부 동쪽에 있는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박씨전 (3/3) 간신의 무리는 모두 물러가고 그 나머지 신하들은 임금이 타신 수레를 옹호하여 산성으로 피난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과연 백성들의 소문을 들으니 호의 군사가 서울에 침입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대궐 안에 들어가 관리를 모두 목베어 죽이고 고관들과 부녀자들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서울의 많은 백성들은 피난가느라 길거리를 메웠다고 했다. 임금은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매우 놀라서 정신없는데도 불구하고 박씨 부인의 신명함과 충성스러움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시백을 불러 찬양하시었다. 이즈음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성에 도착한 용골대는 국왕이 이미 광주로 피난했음을 알고 분해 했다. 과연 용골대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 용홀대에게 서울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오천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물밀 듯이 나아갔다; 송파를 건너서 넓은 벌판에 진을 치고 광주산성의 남대문에 에워싼 후 크게 외쳤다. "죽기가 두려우면 어서 문을 열고 항복하여라." 이 외침을 들은 수문장이 바삐 뛰어 들어가서 아뢰었다. "호장 용골대가 남문을 에워싸고 문을 열라 고함을 지르니 임금께서는 속히 군사들을 풀어 도적을 막으시옵소서." 상감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하였다. "오오, 빛나는 삼백 년의 왕업이 내게 이르러 하루 사이에 몰락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늘이 무심도 하구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임금님의 소매는 눈물로 젖었다. 이 모습을 보고 이시백이 침착하게 아뢰었다. "상감께서는 과히 걱정 말으소서. 이 모든 것은 하늘의 섭리이니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용골대가 제 아무리 강한 군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산성의 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으니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도 상감을 에워싸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곧 총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오랑캐가 성의 주위를 빠짐없이 에워싸고 사다리를 놓아 한꺼번에 올라와서 성 안으로 총을 쏘니 성내에는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다. 온 성의백성들이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짓밟히어 다쳐서 달아나며 슬피 우는 소리에 성내는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상감이 놀래시어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께서는 과히 근심마시고 적군과 화친하소서. 필시 용골대가 삼형제의 세자님을 잡아갈 것이 매우 슬픈 일이오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먼저 구하소서. 나라의 운세가 불길하여 호국의 침입을 받은 것은 모두가 하늘의 섭리이니 어쩔 도리가 없나이다. 저는 다름 아닌 광주 유수 이시백의 아내이옵니다. 제가 칼을 한 번 들면 용골대의 머리와 호병 삼만 명을 풀베듯이 죽여 없애겠지만 하늘의 뜻을 어기지 못함이오니 저의 무능을 용서하시옵소서." 이 모습을 상감이 신기히 여기시어 뜰로 내려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칭찬하셨다. 상감이 적군과 화친을 청하니 용골대가 세자와 왕대비를 데리고 광주를 떠났다. 이때쯤 박씨 부인은 모든 일가 친척과 충신들의 집에 통지하여 피화정으로 잠시 피신하도록 전했다. 한편으론 용골대의 아우 용홀대가 박씨 집 후원으로 들어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다른 한 편을 바라다보니 담 밖에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고 그 아래에서 수십 칸이 넘는 초당이 깨끗하게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아름다운 미녀가 다홍치마에 색옷을 어여삐 입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녀의 무릎 위에는 서너 살 된 아이가 재롱을 떨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홀대는 급히 진지로 돌아가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그곳에 와 보니 많은 나무들은 모두 기병으로 변하여 깃발과 창칼이 벌려 있는 것 같았다. 뜰 안으로 들어가니 진을 쳐놓은 곳에 한 미녀가 앞을 향하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네가 바로 호국의 장수 용골대의 아우 용홀대로구나. 너는 영락없는 오랑캐로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고 남의 나라를 감히 침략하며, 또한 버릇없이 양반집의 안방에까지 무례하게 들어오니 너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며, 서서히 다가서면서 침착하게 말하였다. "내가 누군 줄 모르느냐? 나는 다른 사람 아닌 광주 유수 이공의 부인 박씨의 계집종 계화이다. 네가 오랑캐의 선봉이 된 그 죄로나의 손에 목없는 귀신이 될 것이니 그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구나." 계화는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용홀대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 미인은 머리에 태화관을 쓰고 몸에는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금빛 갑사띠를 둘렀다. 거기다가 손에는 큰 칼을 들고서 있으니 흡사 물찬 제비 같았다. 용홀대는 눈 앞이 아찔하였으나 분함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쳐 계화에게 말하였다. "가냘픈 여자가 상스럽지 못하게 대장부 앞에서 감히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느냐? 내가 대장부로서 너 하나 잡지 못하고 세상에 나설 수 있겠느냐?" 용홀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들었다. 용홀대와 계화의 칼이 사오십 번을 부딪쳐도 승부가 속히 나지 않더니 한 번 계화의 칼이 번쩍 불을 뿜으니 용홀대의 커다란 머리가 칼의 빛을 쫓아서 땅으로 떨어졌다. 계화는 용홀대를 칼 끝에 꿰어 들고 좌우로 크게 흔들며 사방의 적을 위압하니 모든 장병이 넋을 잃고 한꺼번에 항복을 했다. 계화가 그 용홀대의 머리를 박씨에게 바치자 부인이 일렀다. "그 머리를 높은 나무의 가지에 매달아 용골대가 제 아우의 머리를 보고 놀라게 하라." 박씨의 분부를 받들고 계화가 후원의 전나무에 높이 달아 매었다. 그 뒤 여러 날이 지나서 용골대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세도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동대문을 들어오다가 제 아우가 박씨의 계집종 계화에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탄식하였다. 용골대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눈치더니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어 가지고 박씨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큰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대체 박씨란 여자가 어떠하기에 멋모르고 대장을 죽이고 게다가 그 머리를 저 전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겁없는 짓을 하느냐? 이제 내가 상대해 줄테니 어서 나와 내 머리도 잘라 놓아 보아라." 용골대의 우레와 같은 음성에 박씨가 분하여 불러서 일렀다. "네가 나가서 죽이지는 말고 용골대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어주고 오너라." 계화는 명을 받들고 해와 달, 국화의 무늬가 수놓여 있는 관을 쓰고 몸에 붉은 비단으로 치장하고 손에 석 자 정도의 칼을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얼굴은 썩은 대추빛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눈은 가늘게 찢어져서 쳐다보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흉칙하게 생긴 용골대가 꼼짝 않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하였다. "용골대, 네가 호의 대장으로 위임받고 조선에 들어와서 나약한 여자에게 망신을 당하고 돌아갈 줄은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용골대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계화에게 말했다. "너는 한낱 천한 조선의 계집으로서 대장부를 얕보고 상스러운 말을 즐겨하니 대체 어찌된 연고인가? 내가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너의 몸을 다섯 조각으로 잘라 죽여 아우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말을 듣고 난 계화는 용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네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감히 나를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우리 조선의 운세가 불길해서 너희 오랑캐에게 욕을 보이기는 하지만 너의 아우는 우리 부인의 신명한 비법으로 목이 베였다. 그로 인해 다시 나라를 빛내었으니 어떻게 그 머리를 돌려줄까 보냐. 용골대는 들어라. 옛날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고 그 머리로 오줌 그릇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 부인도 네 아우의 머리로 그 그릇을 만들어 임금님께 바쳐서 위엄을 빛내고자 함인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다시는 망령된 말을 그만 두고 너의 나라로 한시 바삐 돌아가는 것이 너의 생존에도 이로울 것이다." 계화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계속하였다. "나라의 운세가 좋지 않아서 네가 세자님을 모셔가는 것을 우리 부인의 재주로 막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왕대비님은 모셔가지 못할 터이니 그리 알고 속히 피화정으로 모시게 하여라." 계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일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너의 목숨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용골대는 분함을 못 이기어 삼백 근짜리 쇠뭉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에 계화는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화단을 헤치고 달아나니 용골대가 몰아붙이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달아난다고 해서 네가 이 쇠뭉치에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용골대가 계화의 바로 뒤까지 쫓아오게 되자, 별안간 사방이 분간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계화는 쥐었던 칼을 공중에게 휘저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래와 돌이 날리고 사방으로 귀신 같은 군사들이 에워싸고 들어왔다. 또한 잠깐 사이에 눈과 비가 상당히 내려 물이 한 길도 넘었다. 용골대가 아무리 맹장이라 해도 박부인의 무서운 재주는 당할 수 없었다.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말하였다. "소인이 눈은 있어도 망울은 없어 높으신 어른을 빨리 알아 보지 못하고 침략하여 천만 번 죽을 죄를 졌사옵니다. 부디 목숨만은 건져 주신다면 이 길로 제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옵니다." 계화가 큰 소리로 일렀다. "네 생각이 정녕 그렇다면 어서 왕대비님을 이곳으로 모셔와라." 용골대는 바삐 군사들을 재정비시키고 몇몇 군사를 불러 왕대비님을 피화정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용골대의 명령을 받들고 왕대비님을 피하정으로 모셔 오라고 전하니 왕대비님은 세자를 붙드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였다. "너희 세 사람은 부디 몸조심하여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삼형제의 세자님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국가의 불행한 운세를 아뢰고 계화에게 명했다. "용골대를 풀어주어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하라." 계화가 부인의 명을 받고 용골대에게 말하였다. "네가 돌아가는 길에 의주에 다다르면 부득이 임 장군에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글을 보여 드리면 어쩔 수 없니 너를 살려 보낼 것이다." 용골대가 크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군사들을 이끌고 의주에 도착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용골대가 동쪽으로 들어와서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세자님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 크게 성내었다. 그리고 혼자서 창을 들고 말 탄 채 달려들며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오랑캐의 대장은 목을 내밀고 나의 칼을 받아라!" 임 장군의 노여움에 불타는 얼굴을 보고 용골대는 겁이 나서 정신없이 말에서 내려와서는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부디 장군은 노여움을 그치시고 이 글을 받아 보소서. " 하면서 두 손으로 글을 바쳐 올렸다. 임경업이 분을 누그러뜨리며 칼 끝으로 받아 보니 그 글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조판서 겸 광주 유수인 이시백의 처 박씨는 임 장군께 글월을 보냅니다 지금 나라의 운세가 지극히 불길하여 이런 슬픈 변을 당하였으나 이는 하늘이 정한 어쩔 수 없는 운수이기 때문에 용골대가 세자님을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은 분한 마음을 진정시키시어 용골대를 무사히 돌아가게 하여 삼 년 후에 세자님을 편안히 돌아오게 하심이 현재로서는 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장군께서는 부디 박씨의 말을 곧이 들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임 장군은 글을 다 읽고 나서 분함을 어지간히 누그러뜨리고 말에서 내려 세자님을 뵈옵고 피눈물을 흘렸다. 임장군은 머릴를 조아려 서글피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세자님들게서는 부디 슬픔을 이겨내시어 삼 년을 참으시면 신이 죽기를 다하여 호국에 가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세자님들은 신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기억해 주시옵소서." 세자는 할 말이 없어 그대로 경업과 이별하고 떠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감께서 왕대비님과 세자님을 호국에 보내시고 마음이 원통하시어 침식이 불안해하시며 며칠을 계속 보냈다. 그러나 어느 하루, 하늘에서 한 선녀가 머리에 해와 달, 국화 무늬가 수 놓여진 관을 쓰고 몸에는 비단 옷을 입고 사뿐이 내려와서 땅에 엎드리므로 상감이 놀래서 급히 물으셨다. "선녀는 누구기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박씨가 다시 일어나 절하며 대답을 했다. "저는 이시백의 아내 박씨이옵니다." 상감이 놀라서 이르기를, "그대의 슬기를 늘 칭찬하였는데 오늘에사 그대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구나." 상감께서는 이렇게 말을 끝맺고 이시백을 돌아다보며 일렀다. "그대의 충성이 지극하므로 저런 부인까지 두었으니 어찌 갸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상감은 유수의 벼슬을 높여 세사자-세자 시 강원의 으뜸 벼슬로서 정일품-를 시키시고 박씨에게는 정경부인의 직분을 내리셨다. 그리고 시백의 부친 득춘에게도 보국숭록대부 겸 봉조하-평생 연금을 받는 벼슬-를 시키시고, 그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을 내려주시니 시백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였다 "신에게는 조금의 공도 없사온데 분에 넘치는 벼슬을 주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임금께서 이르셨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그대가 지탱하여 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지 않았는가? 내가 여러번의 위험이 있을 때 그대의 부인이 나를 도와주었고 용골대의 용맹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왕대비님을 편히 모셨으니 이는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은공인데 조그만한 벼슬로써야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대궐로 돌아가시는데 가시는 거리마다 백성들이 임금님의 행차를 마중하였다. 조용한 때를 기다려 왕대비님은 박씨의 은덕으로 피화정에서 대궐로 돌아오심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하시어 상감은 박시의 노고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충신문을 세웠다. 그리고 피화정 옆에 한 집을 세우고 이름을 일가정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이곳으로 임금께서 매년 한 차례씩 춘삼월이 되면 거동하시어 꽃놀이 구경을 하시었다. 그 이후 이시백의 공덕을 더욱 아름답게 여기시어 시백에게 의정부-내각에 해당함-우의정-의정부의 정일품 벼슬-과 대광보국숭록대부의 벼슬을 주시고 부인 박씨에게는 충렬 정경 부인의 벼슬을 주셨다. 그리고는 시백과 박씨를 매우 칭찬하셨다. 이럭저럭 세월이 지나서 세자가 호국에 간 지 삼 년이 되니 왕대비님과 상감이 그 소식을 몰라 늘 걱정하시었다. 그래서 한 신하가 상감께 나아가 아뢰었다. "신에게는 비록 재주가 없사옵니다마는 제가 호국에게 세 세자님을 모시고 오겠사옵니다." 말을 듣고 상감께서 자세히 보니 그는 의주부윤 임경업이었다. 상감께서는 몹시 기뻐하시어 임경업에게 병조판서 겸 훈련 대장의 벼슬을 주시고 상사로 삼으셨다. 그리고 곧 떠나라 하시니 경업이 거듭 절하고 감격해서 임금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수행원들과 함께 여러 날 만에 호국에 도착하여 황문시관-내시-에게 통했다. 왕실에 들어간 내시가 조선국 사신이 왔다고 알리니까 호왕이 속히 들어오라고 해서 경업이 들어가 절하나 호왕이 기뻐하여 말하였다. "어떻게 수천 리 험한 길을 오게 되었느냐?" 경업이 대답하였다 ."제가 이렇게 오게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조선 왕이 예물을 갖추고 세자님 삼형제를 돌려 보내시기를 바라옵기에 온 것입니다." 말을 끝맺고 많은 금은 보석과 글을 올렸다. 호왕은 글을 보자 글시가 온공하고 예물이 욕심에 흡족하여 기뻐하며 일렀다. "과연 조선 왕은 예절을 잘 아는 임금임에는 틀림이 없구나." 호왕은 곧 이어 세자님 삼형제를 불러 일렀다. "너희 나라에게 너희들을 데리러 사신이 왔는데 무슨 원이 있으면 한 마디씩 말해 보아라." 먼저 첫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고 아버님이 기다리시니 오직 자식된 도리로서 하루 속히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이어서 둘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의 원이 있다면 여러 해만에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혼자서만 가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미 수백 명의 본국 백성들이 와 있사오니 그들과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번에는 셋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름다운 미인을 한사람 주시면 데리고 가서 아버님께 뵈오려 합니다." 호왕은 모두의 소망을 전부 들어주었다. 경업은 즉시 하직인사를 드리고 세자님 삼형제를 모시고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즉시 상감께 나아가 보고하니 먼 길에서 무사히 돌아옴을 크게 기뻐하시고 세자님 삼형제를 불러 호국에게 여러 해 동안 고생한 일들을 물으셨다. 그리고 또 일렀다. "그대들이 떠나올 때 호왕이 무슨 말을 묻더냐?" 첫재는 세자가 먼저 대답하였다 ."소원을 묻기에 저는 한시 바삐 본국에 돌아가 부왕을 뵙겠다고 했사옵니다." 이어서 둘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의 원은 백성들을 오랑캐 땅에 두기가 분하여서 데려 가겠다고 청했사옵니다." 상감께서는 둘째 세자를 크게 칭찬하시고 일렀다. "그대는 한 나라의 생명을 거느릴 만한 능력이 있구나." 그리고 셋째 세자를 꾸짖어 말씀 하셨다. "너는 미녀를 나에게 데리고 오면 무엇이 흡족하느냐? 어리석은 자식이로구나!" 상감께서는 갑자기 벼루를 들어 셋째 세자를 치시니, 왼쪽 다리를 맞아 다리가 부러져 항시 다리를 절며 다녔다. 한편 그 전에 영의정이었던 김자점은 이시백과 임경업을 대단히 시기하여 해치고자 하고 있었다. 먼저 임경업을 해치려고 어명이라고 거짓으로 말하고 형벌을 중히 덮어 씌워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장차 죽이기로 꾀하였다. 이에 세자는 경업이 자점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알고 불쌍히 여기시어 감옥으로 가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감옥 문앞의 흥선문을 고쳐 거동하기를 기다렸으나 온 조정이 말리기를, "조정에서는 신하를 보시려고 친히 감옥에 가시는 법이 절대로 없사옵니다. 세자께서는 깊이 살피시기 바라옵나이다." 하여서 세자는 그리 여기시고 중지하였다 .이 때 경업의 형벌은 더욱 가중해져서 기묘년-1639년-삼월 이십 육 일에 서른 두 살의 아까운 나이로 목숨이 끊겼다. 어느 하루, 상감이 잠자리에서 주무시는데 꿈결에서 경업이 온 몸에 피를 흘리고 걸어오며 아뢰었다. "생전에 신이 충성으로 임금님을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운세가 몹시 나빠서 김자점의 말에 속아 온몸이 성한 곳이라고 한 군데도 없이 중상으로 죽었습니다. 이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원하건대 저의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역적 김자점을 죽여 주셔서 저의 한을 풀어주시면 신은 죽어서 넋이라도 충성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 상감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하시되 덧없는 꿈이었다. 상감은 이 꿈을 이시백을 불러 말하고 임경업의 일을 물어보셨다 .시백은 눈물을 흘리며 김자점의 음흉함으로 임경업을 매질하여 가두었기 때문에 맞은 독이 곪아서 원통히 죽음을 아뢰었다. 지체함이 없이 상감은 크게 성내시어 자점을 의금부에 가두고 엄중히 문초하시니 모든 죄상을 다 말했다. 그 말에 상감은 더욱 노하시어 명령하셨다 ."곧 김자점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여러 고을에 돌려 침뱉게 하고 몸뚱이는 경업의 집안에 내어 주어 마음대로 복수하게 하여라. 또한 김자점의 처자는 모두 목을 옭아매어서 죽이되 사대에 한하여, 모든 세간을 몰수하도록 하여라."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한 나라의 영의정 벼슬을 지내어 부귀가 영화로움에도 불구하고 악독한 흉모를 꾸며 김자점 자기 자신이 몸을 망쳤으니 넋인들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때 이시백은 상감의 분부를 받들어서 김자점의 죄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그의 몸을 묶어 신전에 세워 놓고 먼저 목을 베고, 그 다음에는 몸을 찢으니 경업의 식구들은 불같이 달려들어 김자점을 썰고 집씹으며 간을 내어다가 영 앞으로 제사하여 원통함을 풀고 또 풀었다. 이 때 상감께서는 경업의 원통한 죽음을 가엾이 여기시고 예조에 명하여 충신문을 세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벼슬까지 높여 주시어 대광보국과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를 내리셨다. 또한 시호를 충렬공이라 하고 왕족의 대우로 장사지내라 하시고 그 자식에게 벼슬을 주어 어버이의 거상 중에도 나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제문을 손수 지으시어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십 년까지 영의정의 녹을 누리게 하시니 성은이 바다와 같았다. 이때 임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시어 구월 초순에 돌아가시니 왕위에 오르신 지 꼭 삼십 이년이 되었다. 온 조정이 장례를 치르고 세자가 즉위하시니 나이가 십구 세였다. 이제 태평한 날은 계속되어 길에 버려진 것을 줍지 않고 산에는 도적도 없고 밤에 문을 걸지 않아도 걱정이 없으니 거리마다 태평가가 넘쳐 흘렀다. 이러한 태평 연월에 이시백은 한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나랏일을 잘 다스려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이끌고 백성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였다. 이에 공의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그의 아들 희인 형제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하나는 평안도 감사가 되었고 하나는 송도유수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정치가 또한 청렴 결백하고 자손이 여럿 되어 한결같이 똑똑하여, 그 재롱을 보며 세월을 보내고 살았다. 어느 해 뜻바까에도 정승이 병을 얻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시백의 부부는 아버님을 잃고 주야를 뜬 눈으로 지새우며 깊이 슬퍼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 또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인이 이어서 세상을 떠나시니 연세는 여든 셋이었다. 한꺼번에 어버이의 상사를 당하고 나니 더욱 애통하여 정신까지 잃었다가 겨우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그 때가 장례일이 되었다. 서산에 장사를 지내고 예를 갖추었다. 이 소식을 상감께서 들으시고 슬퍼하시어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시고 이시백을 궁궐로 부르시어 얼굴이 수척함을 보시고 매우 근심하셨다. 이시백은 상감의 위로에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니, 상감이 공이 너무 애통해 하는 것을 보시고 넌지시 말하였다. "네가 그대의 무거운 직책을 갈아 봉조하를 시키니 아침 회의에는 참석치 말고 집에서 한가로이 쉬며 자손들의 효성을 받아 보아라." 상감께서는 말을 마치시고 희인의 벼슬을 높여 이조판서의 직책을 맡기시고 희기에는 도승지 겸 형조참판을 시키시며 일렀다. "며칠내로 상경하여서 내 기대함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두 사람은 대궐로 나아가 성은에 감사하였다. 상감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일렀다. "그대들은 나라의 일에 충성으로 그 직분을 다하여라." 두 사람은 곧 물러나서 집에 돌아와 공의 부부께 문안드리고 일가 친척을 청하여서 여러 해 동안 그리워하던 정을 풀었다. 이공의 부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손들을 교훈하여 부귀를 누렸다. 이럭저럭 공의 나이가 여든 살 넘었으니 아직까지도 기운이 넘쳐서 장성한 젊은이도 당할 만 하였다. 가을의 구월 보름께에 이르자 달빛이 유난히 밝아서 공의 부인과 함께 완월대에 올라서 좌우에 남녀 자손들을 앉히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즐기는데 공이 두 아들에게 손수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말하였다. "내 어린 시절이 이제 어제와 같이 느껴지더니 벌써 여든 살이 지나게 되니 이젠 내게 한이라고는 없구나." 공은 술을 스스로 따라 마시며 다시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세상 연분이 다하여서 장차 너희들과 영원히 작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두 사람은 조금도 슬퍼 말고 자손을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지어다." 아버님의 슬픈 말씀을 듣자, 두 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눈물이 눈 속에 가득 찼으나 어찌해야 옳을겐가? 알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이 속절하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공의 부부가 정색하며 타일렀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은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네 아비는 여든이 넘어 노령이고 자손에게 부귀를 남겨 놓으므로 집안을 크게 빛내니 오늘 죽더라고 원통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제 너희들은 자손들을 잘 보살핌에 많은 생각을 하여라." 말을 마친 공의 얼굴이 매우 불안하므로 안색을 바로 하고 다시 두 아들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많은 손자들을 일일이 불러본 다음에 상을 물리라 분부하고, 부부가 가지런히 잠자리에 누워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판서 형제가 상을 당하여 슬퍼하였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또한 슬퍼하시어 예관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또한 시호를 문충공이라 내리시고 박씨 부인은 충렬 부인에 봉하시었다. 얼마 후에 계화도 세상을 떠나니 이판서 형제가 정중히 장례식을 치르고 선산에 묻었다. 이판서 형제는 무덤가에 풀로 집을 짓고 삼년상을 치루니 임금께서 그 충효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좌의정과 우의정에 각각 중수하였다. 이렇게 벼슬이 정일품에 이르고 자손이 대대로 번창하니 사람들이 충효의 집안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박씨전 (2/3) 드디어 과거 날이 되어서 시백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글의 제목을 보고 곧바로 그 벼룻물을 담긴 물로 먹을 갈아 단숨에 써서 내놓으니 너무도 글이 잘 지어져서 고칠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시백은 맨 먼저 글을 내고 발표하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얼마 후 시험관이 발표를 하는데 장원은 서울 출신 이시백이며, 그의 부친은 이조판서 이득춘이라고 크게 소리쳐 알리었다. 시백이 너무 기뻐 당황할 대 시험장 위에서 새로 합격한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백이 많은 사람 속에서 나와 과거 보던 곳 아래에 이르자, 상감께서는 장원을 보셨다. 시백의 됨됨이가 영특하고 월등한 호걸이므로 임금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공이 그의 아들을 두어 나라에 큰 기둥이 되게 키운 것을 칭송하시면서 종이꽃과 남빛 옷을 내어 주셨다. 시백은 성은에 사례하고 비단 도포와 옥으로 된 띠에 뛰어난 얼굴로 풍악을 거느리고 대궐문을 나왔다. 기운으로 불그스레 취한 동작이 참으로 이 나라의 인재 다왔다. 시백의 일행이 안국동 가까이 다다르자, 우선 사당에 엎드려 절하고 부모님들과 친지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또한 바깥채에서 치하하러 온 여러 손님들이 장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상공과 함께 나가보니 상공의 친구가 많이 모여 기뻐하고 치하해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파연곡-잔치가 끝날 때 부르는 마지막 노래-을 불렀다. 그 후 시끌시끌하던 집안이 이젠 고요해졌다. 모든 손님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상공은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간 저녁상을 물리고 촛불을 켜서 낮을 이어서 계속 즐기는데 상공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상공은 손님을 보기가 부끄러워 방안에만 앉아 있을 박씨를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부인이 마음이 심히 상하여서 물어 보았다. "오늘같이 하나뿐인 아들이 과거에 급제를 해서 경사스러운 일은 평생에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인즉 어찌하여 상공의 얼굴 빛이 그러하십니까? 혹시 그토록 추악하게 생긴 며느리가 이 자리에 없음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온지요?" 상공이 침묵하여 대답하기를 꺼리는 것 같아 보이자 부인이 재촉해서 물어보았다. "어서 말해 보십시오?" 갑자기 상공의 얼굴빛이 엄숙해지며 일렀다. "부인, 아무리 학식이 얕고 좁다한들, 겉모양만을 중요시하고 속에 담겨진 큰 재주를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며느리의 재주는 위대하기까지 하며 옛 제갈공명의 부인인 황씨보다 크게 뛰어날 것이오. 덕행 또한 충만하고 절개가 돋보이니 주나라의 문왕의 아내인 태사에게도 견줄 정도이니 우리 집안에는 분에 넘치는 며느리인데 부인의 그 속좁은 말은 우습지 아니하오?" 상공은 여전히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이 때 서방님의 장원급제를 듣고서 계화는 박씨에게 기뻐 치하하고 또 탄식하여 말하였다. "아가씨! 시집오신 후로, 서방님 모습은 단 한 번도 침실에 보이지 않았었지요. 우리 아가씨가 어질고 착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의 박대하심을 당하시어 홀로 쓸쓸히 후원에서 많은 날들을 지내시며 집안의 모든 일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시니, 저의 생각에도 아가씨를 생각할 때면 서러워짐을 느끼고 눈물까지 나옵니다."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여릿여릿 말하는 계화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태연히 대답했다. "우리 인간의 팔자는 이미 하늘이 정하신 것이니 어찌 나의 기구한 팔자를 탓할 수 있겠느냐?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옛부터 얼굴빛이 붉은 여자와 팔자 사나운 사람이 한 둘이 아닌고로 나 혼자만이 기구한 것이 아니느니라. 선한 이는 분수와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 옳은 것이니, 아녀자된 도리로써 어찌 서방님의 은혜로서 사랑하심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제 다시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라. 모르는 사람이 듣게 된다면 나의 몸가짐에 관해 천히 여길 것이 분명하다." 박씨의 넓은 마음과 어질로 정숙한 말에 계화는 감격하였다. 이미 이 때는 박씨가 시집온 지 삼년이 되었다. 하루는 안채에 나와 시부모님께 절하고 조용히 여쭈었다. "제가 시집온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본가의 소식이 아득하니 부모님의 안부를 알고 싶어 다녀오려 하오니 어른께서는 허락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상공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대뜸 놀라서 일렀다. "네 심정이 짐작은 간다마는 여기에서 금강산까지는 오백 리에 달하고 길도 험한데 어찌하여 네가 떠나고자 하느냐? 나이 많은 남정네도 출입하기가 어려운 곳인데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 떠날 수 있단 말이냐?" 박씨가 숨을 죽이고 가만 있자 덧붙여서 말하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아예 먹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박씨는 상공의 말을 듣고 송구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물론 아버님의 말씀이 옳으신 줄 압니다만 꼭 다녀오고자 하는 심정이니 부디 허락하시고 어른들께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지혜로움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승낙하고 일렀다. "너의 효성이 아름답기로 꼭 한 번 다녀오도록 할 것이다. 내일 떠날 차비를 차려 줄 터이니 속히 다녀오도록 하여라." 다시 박씨가 여쭈었다. "저 혼자 사나흘 동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차비는 필요치 않습니다." 사실 박씨의 재주가 월등함을 짐작은 하지만 그렇게 빨리 다녀올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박씨의 신통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이튿날 시부모님께 절하고 방으로 돌아온 박씨는 계화를 불러 다짐을 주었다. "친정집에 잠시 다녀올 테니까 너는 내가 떠난 모습을 어떤 사라에게도 소문내지 말도록 해라." 말을 끝마치자 뜰에 내려와 서너 걸음 걷다가 몸을 구름 위로 날려 눈감짝할 사이에 금강산 비취정에 이르러서 부모님께 절하고 문안을 드렸다. 딸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박처사는 슬픔이 복받쳤으나 딸의 손을 잡고 탄식하듯 말했다. "어언 시집 보낸 지 삼년 동안에 너의 운명에 기박함을 서러워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어서 방도를 찾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너의 불행이 끝이 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 달 십오 일에 서울로 올라갈 터이니 너는 잠시 쉬고 가거라." 박씨는 말씀 그대로 몇 해 동안의 정을 풀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처사 내외가 재촉하며 말하였다. "네 시아버님께서 기다릴테니 어서 돌아가서 안심시키도록 해라."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이별을 고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려 구름을 타고 잠깐 사이에 제 방으로 돌아왔다. 계화가 아가씨를 맞아 잘 다녀오신 것을 기뻐했다. 박씨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나서 상공께 여쭈었다. "친정에게 돌아올 적에 저의 아버님이 이 달 십오 일에 오신다고 시아버지께 아뢰라고 하여 이렇게 말씀 올립니다." 상공은 알아들었다고 이르고 집안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술과 안주를 듬뿍 장만해 놓고 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십오 일이 되자 달빛이 밝게 비치고 맑은 바람이 휙 부는 듯하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처사가 구름을 타고서 내려왔다. 상공이 마당으로 내려가 처사를 맞이해서 방으로 모시고 절을 마친 다음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또한 시백은 옷을 가다듬어 입고 처사를 향해 절하며 여러 해 동안의 문안을 드리니 그 모양이 훤하고 의젓하게 보였다. 처사가 대단히 기뻐하고 사위의 굵은 손목을 덥석 잡으며 상공께 치하하여 말했다. "훌륭한 인품의 아드님이 장원 급제함을 진실로 축하드리며 높은 벼슬까지 올라가니 귀하신 집안에 이런 경사가 또 다시 없음을 익히 알면서도 천성이 어리석어 상공께 변변히 치하 드리지 못했더니 올해에 딸의 불행이 끝나고 지금 그 흉한 얼굴과 추한 탈을 벗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과거에 급제한 사위를 높이 치하하고 더불어 딸아이를 보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상공은 처사의 말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고 갑작스런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객이 술을 마시며 서로의 정감 있는 말을 나누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닭 우는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어 편히 쉬고 처사는 박씨의 박에 들어갔다. 박씨는 부친을 맞아 절하고 문안까지 드리니 처사가 딸의 손을 잡으며 남쪽을 향해서 앉혔다. 처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박씨에게 일렀다. "비로소 오늘에야 너의 허물이 다 끝났다." 하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부르는 말을 줄줄 외며 소매를 들어 박씨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다지도 흉하던 얼굴의 허물이 깨끗이 벗겨지며 옥같은 고운 얼굴의 뛰어난 미인으로 바뀌었다. 처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박씨에게 말하였다. "너의 이 허물을 내가 가져가고 싶다만 의문을 풀 길이 없구나. 그러니 시아버님께 잘 말씀드려 궤짝 하나를 얻어서 시아버님과 서방에게 보여 의심을 풀게 하여라. 이제 오늘부터 너와 내가 이별한 뒤 칠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지나야 우리 부녀가 다시 만나 다하지 못한 정을 풀 수밖에 없겠구나." 처사는 아쉬운 듯 딸의 모습을 쳐다보고 바깥채로 나가서 상공과 이별하며 말했다. "다음에 혹시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시면 며느리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처사가 마당으로 내려서 두어 걸음 걷는 것 같더니 이내 모습이 없어졌다. 상공은 신기하게 여겨졌다. 다음 날 계화가 상공께 나아가 알렸다. "처사께서 어제 다녀가신 뒤에 저의 아가씨의 허물이 말끔히 벗겨져 이제는 매우 아름답고 고운 부인이 되었사옵니다. 이토록 신기한 술법이 있기에 감히 상공께 아뢰옵니다." 말을 듣고, 상공은 기쁨에 넘쳐서 속히 후원으로 들어가 보았다. 과연 며느리는 어여쁜 미인이 되어서 상공을 맞이했다. 입이 딱 벌어진 상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박씨는 공손히 여쭈었다. "저에게 전생의 죄가 너무 커서 흉칙한 허물을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수십 년 동안의 불행을 겪으며 사니 저의 처지를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님께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도록 하라고 명하여 이제 오셔서 제 얼굴을 되찾아 주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의 변한 모습에 과히 의심하지 마십시오." 말을 듣고 난 상공은 어리둥절하여 며느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거짓말같이, 구슬같이 하얀 얼굴과 앵두 같은 입술에 만 가지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 이보다 예쁜 미인이 다시없어 보였다. 상공의 놀라움이 너무도 크니, 박씨가 시아버지께서 의심함을 눈치채고 이미 벗은 허물을 내어 보이니 상공이 보고 틀림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크게 깨달아 며느리를 향해 일렀다. "이제야 너의 본래의 모습이 돌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으니 너의 시어머니와 특히 네 서방이 기뻐할 것이다." 말을 마치고 안채로 나오려는데 박씨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궤짝을 하나 주시면 이 허물을 그 속에 넣었다가 시어머님과 남편의 의심을 풀고자 합니다. 선뜻 상공은 허락하고 바깥채로 나아가 궤짝을 얻어 들여보냈다. 박씨는 자기의 허물을 소중히 궤짝 속에 넣어 두었다. 이때쯤 상공은 안방으로 들어가 부인과 아들에게 박씨의 얼굴이 말끔히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부인이 믿지 아니하고 비웃으며 말하길,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래서 마음에 켕기는 무엇이 있어서 계집종을 시켜 박씨를 부르게 했다. 전갈을 받은 박씨는 옷차림을 가다듬고 계화에게 허물을 넣은 궤짝을 들게 하고 안방에 이르러 부인께 절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부인이 한참동안 박씨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허허롭게 말했다. "별스런 일도 다 있구나? 이럴 수가..." 부인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다시 박씨에게 말하였다. "대체 너의 흉한 허물은 어디로 가고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느냐?" 박씨는 엎드려 여쭈었다. "제가 흉한 얼굴로 주제넘게 귀하신 집안에 들어온 지 이미 팔 년 동안에 시어머니께 다시없게 불효를 했사옵고, 홀로 팔자를 원망하였더니 전생의 죄악이 끝나서 아버님이 오시어 저의 본래 얼굴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이르는 말씀이 벗은 허물을 궤짝 속에 넣었다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보여 드려 의심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박씨는 말을 마치자, 계화에게 궤짝을 가져오라고 했다. 궤짝 속에서 허물을 내어 보이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의심을 말끔히 풀어 그제서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하였다. 이즈음 상감께서는 시백의 총명과 덕망을 사랑하시어 벼슬을 높여서 병조판서를 시키시니 시백은 성은에 감사드리고 크게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와 상공을 뵈었다. 대뜸 상공이 묻기를, "지금 너의 아내가 어떠하냐?" 시백이 송구스러워 대답을 못하자 상공이 말했다. "사람의 잘되고 못됨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므로 너의 지난 어리석음을 뉘우치거라. 이제 무슨 낯으로 아내를 쳐다볼 수 있겠는가? 그런 됨됨이로 나라의 중책을 어찌 감당해 낼지 의문이로고." 시백은 면구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자 박씨의 방에 들어가니 박씨는 등불을 밝히고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앉아 있었다. 시백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박씨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먼저 말하였다. "어리석은 몸이 부인의 흉한 얼굴을 싫어하고 여러 해를 박대하였더니 하늘이 나의 처복을 도와 주셨구료. 이제 당신의 본래 얼굴을 되찾아 세상에선 둘도 없는 미인이 되셨으니 내가 아무리 뉘우쳐도 당신을 마주볼 면목이 도저히 없소이다. 하지만 부인의 도리는 남편을 따름이 그 첫째 요인이니 부디 부인의 이것을 생각하시어 나의 어리석었던 생각을 용서해 주시구려." 그러나 박씨는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비록 인물이 추하다 하여 시집온 뒤로 시부모님을 효성껏 모시고 당신을 모시어 커다란 잘못이 없었는데 당신이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고 구박까지 심하셨습니다. 거기다가 한갓 아름다운 얼굴만을 취하시니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은 생각 마십시오. 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 사시고 저의 생각은 조금도 마십시오."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옳은 고로 시백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의 잘못이므로 아무쪼록 박씨의 마음을 달래기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밤을 지새며 무릎이 닳도록 사죄하니 어진 덕성을 갖춘 박씨는 시백의 끈덕진 지성에 감동하였다. 박씨는 자기가 너무 박정히 대한 것 같아 공손히 말하였다. "군자의 체통이 귀하고 또한 재상의 위신이 무거운데 어찌 철없는 젊은이와 같이 행동하십니까? 제가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추한 상을 보인 것은 당신의 마음을 반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신을 쓰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요, 여러 해 동안에 박색을 꺼려하여 말을 붙이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신의 말씀을 삼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당신의 심보를 괘씸히 여겨서 한평생을 풀지 않으려 했더니 당신이 이렇게 말하심을 보니 여자의 마음인지 제 마음이 봄눈 녹듯이 풀려 이제 지난 일을 전부 잊었으니 당신은 체통을 차리십시오." 부인의 말을 들으니 판서의 마음이 한없이 기뻐서 박씨에게 사례하여 말했다 ."나는 세상에 어리석고 무능한 자로서 보는 눈이 좁지만 부인은 선녀와도 비길 수 있으니 생각이 넓고 마음 또한 깊구려, 철없는 내가 어찌 부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마는 부인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 해 맺힌 마음을 풀어 버리고 내 이런 기쁨은 평생에게 처음인 듯 싶소이다." 박씨는 곱게 웃으며 자기의 말이 너무 지나쳤음을 판서에게 말하고 밤이 깊도록 말하니 두 사람의 사랑은 부풀어 갔다. 어느새 계화가 들어와 이부자리를 펴니 판서가 부인과 함께 자리에 들고 서로 깊이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두 내외가 서로 화합한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아기를 배니 상공의 부부가 손자의 재롱을 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달이 다 되어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상공이 산실로 들어가 뼈대가 굵고 두 눈방울이 초롱초롱한 갓난 손자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상공의 부부는 온갖 일을 잊고 손자들의 재롱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에 손자의 이름을 희기와 희인이라고 지어 손 안의 보배처럼 몹시 사랑하였다. 이때쯤 상감께서는 판서의 총명과 어진 덕망을 아름답게 보시어 평안감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감사가 황송하여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벼슬이 높아진 것을 알고 일가 친척과 집안 식구들이 이 판서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판서는 이제 길 떠날 차비를 하며 장이를 불러 쌍가마를 꾸미라고 하자 박씨가 이상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쌍교를 꾸미십니까?" 판서가 미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부인을 데려 가고자 함입니다." 박씨가 놀라며 말하였다. "장부의 몸이 나라에 맡겨지면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날도 적다고 하였는데 게다가 처자까지 돌보겠습니까? 제가 집에서 부모님을 성심껏 받들겠사오니 저는 생각지 마시고 하루 속히 부임해서 나랏일을 잘 다스리십시오." 부인의 말이 지당하므로 이에 머리를 숙이고 사례하며 일렀다. "당연한 말이오. 내가 어리석어 늙으신 부모님의 외로우심을 생각지 못하고 망령된 말을 했으니 곁의 사람들이 웃을까 두렵소이다. 내 미숙함을 탓하지 마시고 두 분 어른을 봉양하십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자 부인에게 절을 하고 부인과도 섭섭한 이별을 한 후에 곧바로 대궐에 나가서 절하고 부임길에 올랐다. 여러 날 만에 평양에 도착한 감사는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근심을 보살피고, 각 고을 원님들의 잘잘못을 조사해서 백성을 사랑하고 공무에 많은 힘을 쓰는 자는 나라에 알려 큰사랑을 주게 하였다. 또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자는 파면시켜 명백하게 다스리니, 도둑은 양민으로 변하여 백성들은 편안히 살게 되어 태평가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도내의 백성들이 감사의 정치에 고마움을 느끼고 거리마다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축송하는 소리가 상감께 알려지니 상감께서는 이 감사의 선한 정치를 아름답게 보시고 병조판서로 임명하시며 속히 상경하여 나랏일을 진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왕명을 받자 이 감사는 대궐을 향해서 네 번을 절하고 서울로 올라오니 여러 고을의 원님과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에 가득히 모여서 감사와 이별하기를 아쉬워하였다. 여러 날만에 서울에 이르러 상감께 절하고 임금님의 은혜에 또 다시 감사를 드리니 임금께서는 감사에게 칭찬을 아기지 않으셨다. "그대가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 사랑하는 것은 이 모두가 백성의 복이요, 나의 충실한 신하다." 하시고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시니, 판서가 은혜에 감사하고 절하며 물러났다. 본집에 이르러 우선 부모께 인사드리자 상공이 손을 꽉 잡으며 판서에게 말하였다. "내가 늘 너를 어리석게 여긴 것은 예전에 너의 부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랬더니만 이제는 감사의 직분을 충실히 다해서 백성이 칭송하고 상감께서는 네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높은 벼슬을 주셨으니, 이제서야 내가 바라던 아들이 되었고 임금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고 박씨의 마땅한 지아비가 되었구나." 크게 기뻐하는 상공의 말을 듣고 판서는 황송하여 절하고 그 동안 그리웠던 생각을 말씀 드리며 부모님과 이야기 하다가 밤이 깊음을 알고 주무시도록 여쭈고 일어나 박씨의 방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몸을 일으켜 맞아들이는데 판서가 손을 꼭 잡으시며 앉히고는 정답게 말하였다. "그간 부모님을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오?" 이에 박씨는 수줍게 잡힌 손을 빼며 대답했다. "어찌 그것을 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모두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수년간 객지에서 고생한 판서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럭저럭 이야기하다가 오랜만에 잠자리에 함께 드니 그 정다움이란 이루 표현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명나라의 남경은 이때쯤 소란스러워서 가달이란 오랑캐의 두목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 소식이 나라 대궐에까지 들리자, 상감은 근심이 되어 이시백을 상사-명나라로 보내는 사신-에 임명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대와 화합이 잘되는 사람으로 군관을 삼고 날을 잡아 출발하여라." 시백은 임경업으로 정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임경업은 원래 충주 사람으로 힘이 세고 슬기가 그지없었다. 어려서 무과에 으뜸으로 뽑히고 때마침 벼슬이 철마산 군영의 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시백은 임경업을 상사군사로 삼아 중국의 남경으로 갔다.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에서 온 사신의 이름을 듣고 황자명으로 접빈사-외국사신을 맞는 벼슬-를 삼아 맞게 했다. 접빈사를 따라 임경업과 함께 황제 앞에 나아가 이시백이 네 번 절하고 글을 올리나 황제가 글을 거두고 옆의 신하에게 저지하여 조선의 사신을 데리고 예부에 나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 그때 마침 북쪽 오랑캐 사신이 이르러 글을 올리어 황제가 보시었다. 그 대충 내용은, <가달이 일어나서 우리 나라의 땅을 침략하니 그들의 군사는 너무 강해서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황제게 간곡히 아뢰오니 한시 바삐 지원군을 보내 주시어 저희 불쌍한 백성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황제는 몹시 걱정하여 그곳에 보낼 장사를 선정하려고 하자 접빈사 황자명이 아뢰었다. "조선 나라에서 온 임경업 상사군관의 얼굴을 보아 하니, 다른 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지혜와 용기를 높이 갖추어 가달을 물리칠 만한 능력이 있으므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병의 최고 사령관에 정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가 이시백을 불러 경업의 됨됨이를 물으니 시백이 여쭈었다. "경업의 지혜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큰 중책은 이끌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백의 겸손함을 명나라 황제는 칭찬하고 임경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큰 칼을 손수 주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베어 죽이라고 하면서 삼만 명의 대군을 내주었다. 임경업은 명을 받고 물러 나와서 장병들에게 많은 연습을 시키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오랑캐 나라에 이르니 그곳 국왕이 경업의 용맹을 보고서 크게 기뻐하여 맞이하고 대접을 극진히 했다. 국왕이 가달의 군대가 강함을 걱정하니 경업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비록 제가 지혜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무찌르겠습니다." 말을 끝마치고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에 도착했다. 무려 적군과 삼십여 번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더니 임원수가 큰 소리를 지르며 길다란 팔을 늘이어 가달을 사로잡아 본진에 돌아오자 호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임원수를 맞아 웃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즐기었다. 임원수는 지휘대에 높이 앉아 군사에게 호령하여 가달을 잡아들이고 뜰 앞에 꿇어 앉히고는 무섭게 꾸짖어 말하였다. "비록 네가 무식한 오랑캐이지만 너의 병력이 강한 것만을 생각하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느냐?" 가달은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며 말했다. "무지한 저희가 하늘의 섭리를 모르고 호국을 침략하여 장군께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다시는 악한 마음을 먹지 않고 호국에 복종하여 충성하겠으니 장군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수는 옆 사람에게 지시하여 묶은 것을 풀어 주고 자기 옆 자리에 오르게 해 술잔을 주며 위로하였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진실로 그대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므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니 또 다시 이런 부질없는 마음은 먹지 말고 하늘의 뜻대로 살아 죽을 때가지 평안을 누리도록 하라." 가달이 크게 절하고 말하였다. "저의 죽어 마땅한 죄를 이렇게 용서하시니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달은 백 번 절하고 호왕과 작별하고 남은 군사를 지휘하여 제 나라로 돌아갔다. 임원수의 넓은 그릇됨을 크게 칭찬하고 호왕은 말하였다. "이토록 훌륭한 장군이 조선에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경업의 탁월함을 높이 사시어 왕조의 사위로 삼고자 하여 궁궐 안에 들어가 왕비와 의논하고 공주를 불러 경업의 사내다움을 말하여 일렀다. "너의 남편감을 고르려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이 말에 공주는 얼굴을 숙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녕 아버님의 분부가 저의 전부이오나 여자의 평생을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소녀에게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직접 보고 말씀 드리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공주의 바른 말에 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호왕은 다음 날 바깥채에 나가 임경업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장군을 신임하여 부탁할 일이 있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 경업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대답했다."어떤 말씀이신지요?" 호왕은 진지하게 말하였다. "내게 딸이 하나 있는데 장군을 내 사위로 삼고 싶은 바 공주에게 말했더니 그 아이의 말이 제 눈으로 보아야 정할 수 있겠다기에 그러자고 했네만 자네의 생각은 어떤지 그게 알고 싶네." 임원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이 말에 호왕이 매우 기뻐하여 안채로 들어가 말을 전하고 높은 다락채에 발을 내려치고 공주를 그곳에 올려 보내니 임원수는 벌써 공주의 관상 보는 법을 직감하고 신발 속을 세 치나 헝겊으로 높이고 기다렸다. 과연 들어오라고 하여 경업이 들어갔더니 한참 동안 위 아래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키는 세 치가 더 크니 앞으로 보자면 밤 하늘의 별과 같이 크게 될 인물이요, 뒤를 보자니 용봉의 모양이어서 영웅은 영웅이지만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 못내 애처롭소이다." 이 말을 듣고 난 호왕이 경업을 사위로 삼지 못하게 되자 마음 깊이 상해하며 원수에게 나가 있으라 하고 호왕이 바깥채로 나와 공주의 거절하는 뜻을 말하고 마침내 원수와 작별하게 되자 많은 보석을 상으로 주었다. 경업은 많은 보석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감격하여 한결같이 대답했다. "저희 중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아서 원수의 은혜가 바다같이 깊사온데 이렇게 보물까지 나누어주시니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의 사람됨에 모두들 감격하고 있을 때, 원수는 호왕과 작별하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남경에 도착하여 황제께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칭찬하여 말하였다. "남경에 가 이토록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이제 경업의 이름이 세 나라에 크게 떨치니 이제 내 사랑하고 신임하는 믿을 수 있는 신하가 되었구나." 게다가 벼슬까지 높여 주시니 경업은 머리를 숙여 감격하였다. 한편 호왕은 이시백과 임경업을 보내고 나자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게 하고 우리 나라의 위엄을 말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의외로 가달로 인해서 임경업을 보게 되니 그 힘이 상당히 강하여서 가볍게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겠구나." 호왕이 마음이 편하지 못해함을 알고 공주가 곁에 있다가 한 마디 했다. "아버님께서는 과히 근심 마십시오. 제가 조선에 들어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이시백과 임경업을 죽이고오겠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나서 호왕은 마음이 풀려서 말하였다. "본시 너의 뛰어난 지혜는 용맹스런 사내들도 이겨낼 지혜가 없음을 잘 아는 터이니 어찌 어리석은 근심을 하겠느냐?" 잠시 후 남장을 하고 나타난 공주에게 왕은 날카로운 칼을 주고 작별하였다. 집을 떠나기 전에 공주는 왕비와도 작별을 고했다. 왕비는 다짐하여 말하였다. "이제 조선 땅에 들어가거든 우선 의주와 평양 등지에서 말소리를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 습성을 익힌 뒤에 서울로 들어가 이시백의 집을 찾아 감쪽같이 시백을 죽이고 나서 곧 의주로 가 임경업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돌아와 나라에 큰 공을 세우도록 하라. 부디 몸조심하여라." 공주가 명을 받들고 곧장 길을 떠나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먼저 평안도 의주에 이르러 이시백의 집을 찾아 왔다. 이즈음 하루는 박씨가 안채에서 저녁 인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시백은 밤이 깊어져서야 들어왔다. 박씨가 판서를 맞이하여 앉혀 드리자 아들의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워 박씨와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박씨는 엄숙하게 판서를 향해 말했다. "내일 저녁때쯤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고 하면서 설중매라는 기생이 당신 서재로 찾아갈 것입니다. 만약에 그 계집의 미모에 빠져 당신의 침실에 가까이 하시면 밤중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 계집에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제 방으로 보내 주시면 제가 잘 처리 하겠사오니 제 말을 무심하게 여기지 마시고 큰 일을 그르치게 마십시오." 유심히 듣고 있던 판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허허, 그 말씀 흥미롭군요. 어찌 판서된 도리로 조그만 계집의 손에 몸을 다칠 수 있겠소." 박씨가 마음이 상하여 얼굴을 찌푸리며 강하게 말하였다. "저의 말을 당신이 믿지 않으신다면 그 계집을 후원으로 들여보내시고 상공이 그 뒤를 따라 후원에 들어오시어 그 계집아이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시면 제 말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에 판서가 승낙하고 박씨와 밤을 지냈다. 이튿날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관청에 들어가 나랏일을 처리하고 해가 진 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손님들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은 각자 돌아갔다. 판서가 저녁 상을 물리고 한가하게 앉았는데 밤이 점점 깊어지자 어느 여자가 문을 열며 살며시 들어와 절하거늘 판서가 눈을 들고 자세히 보니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다. 판서가 당황해서 물었다. "대체 너는 어떤 계집이냐?" 그 여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주에서 살고 있는 설중매라 합니다 .상공의 훌륭하심이 시골 구석까지 파다하기에 늘 상공의 모습을 그리워하다가 사랑을 맺고자 험준한 길도 마다않고 올라왔사옵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대뜸 판서가 대답했다. "네 말은 기특하지만 이곳에는 손님이 많이 드나드니 후원의 부인에게 가 있으면 밤이 깊은 후 손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너를 부르도록 할 것이니라." 말을 마치자 계집종을 불러서 후원으로 인도하라 일렀다. 박씨의 방에 들어간 설중매는 박씨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이에 박씨가 웃으며 말하였다. "어서 올라오너라." 박씨의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들어와 앉았다. 계화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오도록 하여 한 잔 가득 술을 부어 주니 설중매가 황망히 말하였다. "저는 본시 술을 못하옵나니다만 부인께서 손수 따라 주시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하여 너댓 잔을 계속 마시더니 정신이 흐려져 술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박씨가 살펴보자 여자의 얼굴에 살기가 스며 있어 독한 기운이 드러나 보이므로 천천히 옷 속을 뒤져보았더니 날카로운 단도가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다. 박씨가 그 칼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그 칼이 갑자기 박씨에게 달려들므로 깜작 놀라서 재빨리 피하고 주문을 외워 칼을 막아내고 잠깨기를 기다렸다. 설중매는 날이 밝아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박씨가 일렀다. "어서 빨리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말하였다. "본시 저는 강원도 원주에 사는 계집으로서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 없어 춤과 노래를 배워서 기생이 되었는바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심은 대체 무슨 말씀이옵니까? 아가씨의 높으신 이름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박씨가 소리를 높여 꾸짖어 말하였다. "끝내 나를 업신여기고 속이기까지 하니 괘씸한 일이로구나! 네가 바로 호왕의 공주 기룡대가 아니란 말이냐?" 기룡대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마가 닳도록 사죄하며 말하였다. "부인께서는 신명하시어 저의 본색을 꿰뚫어 보시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부인의 말슴대로 저는 호왕의 공주로 아버님의 명을 받고 이 집에 숨어들어 왔으니 넓으신 은덕을 베푸시어 목숨만은 살려 주시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평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박씨가 차분히 일렀다. "과연 네가 사실을 말하여 용서해 주겠으니 이 길로 너의 나라에 돌아가 임금에게 전하여라. 조선에 들어갔더니 이판서의 부인을 만나자마자 본색이 드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박씨가 이르길, 내가 잠시라도 조선에서 머뭇거린다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니 하시도 지체함이 없이 돌아가서 화를 스스로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해서 돌아왔다고 하여라." 기룡대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엎드려 죄를 모두 고백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원하옵건대, 제 죄를 용서하시고 무사히 저의 나라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씨가 무섭게 말하였다. "너의 국왕이 분에 넘친 욕심을 내어서 조선을 침략하려 하니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운수가 몹시 나빠서 그렇기는 하지만 너의 군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조선을 쉽사리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니 너는 빨리 돌아가서 상세히 말하도록 하여라." 말을 끝마치고 기룡대에게 몇 잔의 술을 다시 먹이고 나가기를 재촉하였다. 기룡대는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후에 하직하고 나와서 길을 찾았으나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한참 헤매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해서 말했다. "호국의 공주 기룡대가 조선 이시백의 집에 들어가서 죽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기룡대의 통탄하는 모습을 보고 박씨가 물었다. "내가 그토록 말했는데 어찌 지금가지 돌아가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 기룡대가 땅에 엎드려 대답했다. "제가 부인의 은덕을 입고 돌아가려고 했사오나 삼면이 급경사의 낭떠러지여서 갈 수가 없으니, 바라옵건대 부인께서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박씨는 타이르며 말하였다. "그대로 너를 보내게 된다면 필시 임 장군을 죽이고 갈 것 같아서 너에게 내 솜씨를 잠시 동안 보여준 것뿐이다." 박씨는 손을 모으며 공중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러한 순간에 갑자기 천둥소리와 벼락이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기룡대의 몸이 저절로 날아서 눈깜짝할 사이에 호국의 궁성 뜰에 닿았다. 호왕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어찌하여 우리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느냐?" 한참 후에 기룡대는 의식을 차리고 여쭈었다. "하마터면 소녀는 아버님을 다시는 못 뵐 뻔했사옵니다." 호왕이 급히 물었다. "그 말은 웬 말이냐?" 기룡대가 조선에 들어가서 겪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상세하게 아뢰었다. 왕은 놀래서 한숨을 크게 쉬고 일렀다. "허, 놀라운 일도 다 있구나. 이시백의 지혜로움을 높이 칭찬하였더니 그 부인 또한, 그토록 희한한 재주를 지녔구나. 비록 조선의 땅은 작으나 재주 많은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잘 알겠구나." 왕은 많은 신하들을 모아서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누가 앞장서서 큰공을 세우겠는가?" 호왕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뜰 아래서 두 장수가 똑같이 아뢰어 말하는 것이었다. "신들에게 기묘한 재주는 없사오나, 군사를 맡겨 주시면 속히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아와 나라에 충성을 하겠나이다."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대장군 용골대와 그의 아우 용홀대였다. 왕은 몹시 기뻐하며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준치 원년이라 고치고 용골대와 용홀대로 하여금 좌우 선봉장을 삼고 군사 삼만 명을 주며 명하였다. "이제 동쪽으로 돌아가서 병자년-1636년-십이월 이십 팔일에 한양성에 도착하여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워라." 호왕의 명령을 받들고 용골대의 형제가 군사들을 훈련시켜 험한 길을 떠났다. 한편박부인은 상공을 모시고 걱정스레 여쭈었다. "기룡대가 혼이 나서 돌아간 뒤, 호국의 힘이 더욱 강대해져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임경업을 죽이고 위로는 임금님께 항복을 받고자 해서 용골대의 형제들을 좌우 선봉장으로 삼아서 북쪽으로 이십 팔일에 동대문을 깨치고 물밀 듯이 쳐들어 올 것이니, 부디 그 날을 기억하였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시어 급히 화를 면하십시오. 뒤의 모든 일은 제가 이곳에서 막아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박씨의 침착한 말에 상공의 부자는 알아 듣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그 날을 초조히 기다렸다. 드디어 십이 월 이십 사 일이 되자 시백은 임금께 진중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내의 말이 이 달 이십 팔 일 밤에 호국의 군대가 북쪽으로 해서 동대문을 깨치고 쳐들어 올 것이니 임금님과 대비님, 그리고 세자님 사형제를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게 하시어 재난을 피하라 하였습니다. 진실로 신은 그의 신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상감님께 아뢰옵니다." 상감은 크게 놀라며 산성으로 피난하려고 하시자 영의정 김자점과 좌의정 박운학이 아뢰었다. "도승지 이시백은 평화롭게 편안한 이 때에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속절없는 말을 하여 임금님을 불안하게 하니 버릇없는 이시백을 파면시킨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이에 상감께서 결정을 못짓고 머뭇머뭇 거리는데 문득 하늘에서 선녀가 칼을 옆구리에 끼고 살며시 내려와 뜰 아래서 절을 하니 임금께서 깜짝 놀라시며 물으셨다. "선녀는 무슨 일로 여기에 내려왔는가?" 그 선녀는 다시 절하고 여쭈었다. "소인은 이시백의 부인 박씨의 계집종 계화이옵니다. 박씨 부인이 제게 이르기를 지금 임금께서 간신 김자점의 허울 좋은 말을 들으시고 머뭇거리실 테니 네가 빨리 가서 광주산성으로 옮기시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어 이렇게 왔사옵니다." 말을 끝마치고 칼을 칼집에 꽂고 앞에 있는 망두석-양편에 있는 돌기둥-을 들어 내려칠 듯이 하여 김자점과 박운학에게 겁을 주며 꾸짖어 말하였다. "김자점과 박운학은 들어라. 너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라 있으면서도 임금님의 성은을 갚을 생각은 꿈도 안 꾸고 나라에 옳은 말을 하는 충신들을 헐뜯고 도리어 해치려 하니 너희 같은 썩어빠진 신하를 어찌 용서할 것이냐마는 너희 죽을 기한이 아직 되지 않아서 우리 부인의 말씀이 너희들의 죄만을 나무라셨다. 그리고 조선의 국운이 무궁하니 비뚤어진 마음을 다시 품지 말라고 하셨다." 계화의 꾸짖음에 낯이 벌겋게 달아 오른 김자점이 슬며시 물러났다. 계화는 다시 임금을 향해 엎드려 여쭈었다. "만약이 이 밤을 이대로 보내시면 큰 화를 분명히 만나실 것입니다. 부디 저와 부인의 말슴을 어기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계화는 돌아갔다. 임금은 매우 기이히 여기시고 이시백에게 이조판서 겸 광주유수를 함께 시키시고 왕족을 호위하게 하여 산성으로 가려고 했다. 본래 망두석은 태조 대왕께서 임금으로 되실 때에 일등 석수들을 불러 만들어 세워놓은 것이다. 그 무게 천근도 넘어 세상에서 그것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연약한 여자가 가볍게 드는 것을 보고 조종의 높은 관리들이 전부 놀래서 짐작을 해보았다. 그 짐작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박씨의 계집종이 저렇게 힘세니 그 주인의 신기한 재주와 지혜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씨전 (1/3) 조선조 인조 임금 때에 서울 안국동에 이름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이요, 이름은 득춘, 자는 문채라 했다. 대대로 나라에 충성한 집안으로 이득춘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판, 홍문관-삼서의 하나로 경서에 관한 사무 담당-부제학-홍문관의 정삼품 벼슬-에 이르렀다. 사람이 충성과 효도를 겸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워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그 부인 강씨는 집금오-근위장관-강창문의 딸로 현숙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젊어서 결혼하여 부부 사이가 다정했으나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자녀가 없음이 늘 근심이었다/ 해서 이름난 산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자식이 없었다. 이에 이공이 부인을 보고 탄식했다. "우리 팔자가 복이 없어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뵙겠소?" 부인이 황송하여 사죄하기를, "제가 이씨 집안에 들어와 시부모의 사랑과 지아비의 극진한 보살핌을 입고도 이을 자식을 못 낳으니 모든 것이 저의 죄입니다. 부디 부인을 새로 얻어 저의 죄를 씻어 주소서." 이공이 듣고 부인을 위로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복이 없는 것이니 어찌 부인을 나무라겠소." 그리곤 부인과 의논하여 금강산 명월암으로 들어가 정성껏 칠일 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이공이 책상에 의지하여 잠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흰 수염을 나부끼며 들어오더니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지극함에 하늘이 감동하시어 아들을 주시니 귀하게 길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하라." 하며 소매 안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 공이 받고 감사의 뜻을 말하려고 했더니 노인은 간 곳이 없었다. 이어 구슬이 변하여 사내 아이가 되어 안방으로 아장아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공이 놀라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크게 이상하게 여긴 이공은 즉시 내실로 들어가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한 꿈을 꾸었는데 참으로 신기하오." 부인은 이공의 꿈 얘기를 다 듣자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방금 그러한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부인의 손을 잡고 웃었다. 과연 그 달부터 부인은 태기가 있더니 어느덧 날이 열 달이 찼다. 하루는 부인이 피곤하여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다. 이 순간, 하늘에서 성스러운 빛이 내리비치며 옥같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이 아이는 하늘의 별로, 세상에 내려와 그대의 집안을 빛낼 것이오. 그리고 이 아이의 짝이 될 사람은 금강산에 있으니 부디 하늘의 정하심을 어기지 마시오." 이공 부부가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보니 꿈에 보았던 아이와 똑같았다. 때는 갑진년-1604년-사월 십칠 일 오전 여덟 시였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름을 시백이라 하고, 자를 명선이라 짓고 보물처럼 사랑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세 살이 되자 슬기와 재주가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 이듬해 삼월에 부인이 또 태기가 있어 딸을 낳으니 이름을 시화라 짓고 사랑스럽게 길렀다. 차츰 자라니 얼굴이 옥같이 예뻐지고 재주가 뛰어나 소문이 자자했다. 다시 세월이 구름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십 육 세가 되었고 시화는 십 삼 세가 되었다. 이 때에 인조 임금께서 이공의 충성스러움에 만족하시어 특별히 강원 감사-지금의 강원도 도지사-에 임명하셨다. 이공은 임금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아들 시백을 데리고 부인과 딸 시화와 작별하고 임지로 떠났다. 강원 감영에 간 이공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면서 아들에게 열심히 글공부를 가르쳤다. 이때 금강산 상상봉에 등지고 숨어사는 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박이요, 이름은 현옥, 호를 유점대사라 했다. 학문이 깊기로 유명한 선비로 그의 부인 최씨와 함께 유점사 근처에 비취정을 짓고 세월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여 비취 선생이라고도 하고, 또는 유점처사라고 했다. 일찍이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십 칠 세였으나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아직 시집도 못 가고 아우만 일찍 시집갔다. 박처녀는 얼굴이 빌고 박색이라도 마음시가 착하고 공부가 끝없이 높아 세상 만물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박처사는 이를 기특히 여겨 딸을 매우 사랑하며 늘 칭찬이었다. "이 아이는 재주가 이처럼 높으니 반드시 똑똑한 사람을 짝지어 주리라." 이런 때에 마침 이공이 강원 감사로 내려왔다는 말을 듣자 박처사는 부인을 보고 말했다. "내가 감영에 가서 이공을 만나 청혼하겠소." 부인이 놀라 물었다. "이감사는 유명한 집안 출신인데 어찌 시골에 묻혀 사는 집안과 인연을 맺겠습니까?" 박처사는 웃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부인은 염려하지 마시오. 두 아이는 하늘이 정해주신 연분이니 이 감사도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오." 부인은 박처사의 신기한 재주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말이 없었다. 박처사는 즉시 나귀를 타고 감영에 이르러 군졸에게 말했다. "너의 감사께 손님이 왔다고 전하라." 군졸이 들어가 감사께 아뢰니 이감사는 즉시 들어오시도록 하라고 명했다. 박처사가 조금 후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천천히 들어오니 이 감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기고 마당까지 내려가 맞이하였다. 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로 절한 다음 박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금강산 산골에 묻혀 사는 박현옥이라는 천한 몸이옵니다. 이렇듯 외람되게 감사 어른을 찾아온 것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감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박처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여쭈었다. "제가 하늘의 이치를 살펴본즉 아드님이 저의 딸과 천생 배필이옵니다. 다만 부끄러운 것은 딸아이가 얼굴이 못생기고 바탕이 천하므로 감히 아드님과 짝이 될 수는 없으나 하늘이 정하신 것을 어길 수가 없어 감사께 아뢰는 바입니다." 감사가 듣고 나서 처사의 언동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고 기쁜 낯으로 대답했다. "선생의 높고 밝으신 뜻과 따님의 뛰어난 바탕으로 어리석은 저의 자식을 배필로 삼고자 하시니 더 없는 영광입니다. 말씀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박 처사는 크게 기뻐하여 엎드려 절했다. "감사께서는 높으신 몸으로 천한 몸의 딸을 쾌히 허락하시니 감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는 즉시 아들 시백을 불러들여 박 처사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처사가 답례하고 눈을 들어보니 참으로 영웅의 기상을 갖추고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리라 생각했다. "참으로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처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감사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아주 혼례식을 올릴 날을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처사의 말에 감사는 쾌히 응낙했다. 이에 처사가 좋은 날을 가리니 이듬해 팔월 이십 일이 좋으므로 그 날로 정했다. 이어 주인과 손님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러자 처사가 몸을 일으켜 하직하고 가볍게 돌아가니 그 걸음이 바람처럼 빨랐다. 이 감사는 아들 시백과 함께 박 처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신기함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신선이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어느덧 이듬해 봄철이 되었다. 상감께서는 감사가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잘함을 여기시어 이조판서와 세자빈객-세자의 스승-의 높은 벼슬을 내리시고 역말편으로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했다. 이에 이공은 임금님의 높으신 성은에 감사하고 상경했다. 이윽고 박처사와 언약한 날이 거의 되어서 이공이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인, 원주 감영에 내가 얼마간 있었을 때에, 금강산 박 처사의 딸과 정혼하기로 약속한 것은 부인도 이미 알 것이오. 이제 혼례일이 가가이 다가왔으니 애를 데리고 내려가서 성례하고 오겠소." 부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대한 일인데 서로 약속하여 정혼까지 하시고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이공은 부인의 참된 마음씨에 대단히 기뻐하여 다음 날 상감께 나아가서 사연을 아뢰었다. 이공의 말을 듣고 난 후 상감께서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속히 내려가서 예식을 지내고 올라와서 안정을 찾은 다음 직책을 보살피도록 하오."하시며 게다가 상감께서 친히 금, 은, 옥 등 귀중한 보석까지 내려 주시었다. 아들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 어귀에 이르러 비취정에 살고 있는 박처사의 집을 물으니, "여기에서 삼 사십 년을 살아왔지만 박처사란 이름은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하는 한결같은 동네 사람들의 말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이 같은 말에 이공은 안타깝게 생각하며 혼잣말로, "아들의 혼례일이 바로 내일인데 지금까지 박처사의 집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의 딸과 시백이와의 연분이 없는 것 같구나."하고 머뭇거리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선명한 학의 소리가 나더니 박처사가 나타나며 이공의 손을 꽉 잡고 웃으며 말하였다. "귀하신 분이 이렇게 천한 사람을 찾으려고 누추한 곳에 오시어 여러 날을 헤매시었으니, 이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저의 집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박 처사는 말을 끝맺고 바삐 시백의 손을 이끌고, 이공과 함께 몇 리를 들어가자니 산길은 어지간히 험해서 발조차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처사의 걸음은 어찌나 유연한지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았다. 얼마를 걷자니 빽빽한 소나무의 숲과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한 곳에 너댓 간의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보였다. 집 앞에 당도하자 대문 위에 피갈정이라는 금빛 글자로 현판을 달아 붙인 게 보였다. 그들이 서당에 이르자 뜰 앞에선 백학이 짝지어 노닐고, 버드나무 위에서는 노란 꾀꼬리가 지저귀니, 이공의 부자에겐 참으로 신선이 사는 고장인 듯 싶었다. 처사는 이공의 부자를 인도하여 객실로 모셨다. 객실은 수많은 서적들로 장식되었으며 그 서적에서 풍기는 냄새가 방에 가득 차 있었고 한쪽 벽에는 거문고가 세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다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처사가 이공의 부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잠시 쉬게 한 다음 차를 내오게 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곧 시녀가 저녁상을 차려 올렸다. 처사가 자시기를 권하므로 이공이 밥상을 받고 보니 반찬은 청결하고도 소담스럽게 차려 놓아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린 후에 처사와 같이 고금의 일을 논의하고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였다. 밤은 깊어져 처사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이공의 부자도 편히 쉬었다. 이튿날 이공의 부자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처사가 정감 있게 웃으며 말하였다. "벌써 날이 밝았으니 시백에게 예복을 입히고 혼례를 치를 준비를 하십시오." 처사의 말을 듣자 이공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찼다. 곧 아들에게 예복을 입혀 안채로 들어가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백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처사는 식장으로 시백을 인도하니, 신랑이 다가서서 상자 위에 기러기를 놓고 마루 위에 올라 신부와 서로 절을 한 다음 몸을 돌려 바깥채로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이공은 기쁨에 겨워 아들의 손을 잡고 처사에게 사례하며 말하였다. "선생과 같은 지대한 분이 미숙한 저의 자식에게 훌륭한 따님을 내주시니 저의 부자는 그야말로 행복에 겹습니다." 이공의 말이 끝나길 기다려 처사도 사례하며 말하였다. "아드님의 총명한 머리와 뛰어난 얼굴로서 딸의 몹쓸 얼굴을 대하게 되니 저는 몸둘 바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맺어 놓은 연분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바라는 유일한 청이라면 상공께서는 은덕을 내리시어 딸의 미운 얼굴을 용서하시고 잘 보살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공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싶더니 웃으며 대답하였다. "허허, 말씀이 너무 겸양하시군요. 선생의 말씀같이 따님의 얼굴이 아름답지 못하다 해도 여자의 보배로움은 소박하고 어진 것이 제일의 으뜸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얼굴이 고운 여자는 기박한 운명을 타고 나기 쉬우니 선생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처사는 상공의 말을 고맙게 듣고 술을 내다 주객이 진종일 마시며 즐기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자 저녁을 마친 뒤, 이공이 아들에게 신방으로 들라고 이르니 시백은 분부를 받잡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시백은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안의 물건이 여자의 바느질 그릇은 도대체 보이질 않고 손오병서와 육도삼략과 같은 무술에 관한 서적만이 책장에 수북히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시백은 방안의 스산한 풍경을 이상히 여겨 부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니까 방문이 열리며 신부가 들어오는데 키는 거의 일곱 자는 되어 보이고, 퍼진 허리는 열 아름쯤 되며, 뭉뚱한 코와 내민 이마가 둥근 눈망울에 어울려 매우 흉스럽게 보였다. 손발이 부자유스러워서 다리까지 절며, 얼굴빛은 먹칠을 해놓은 것 같고, 양쪽의 혹은 두 어깨에 늘어져 가슴께를 덮었으니 신부의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흑살천신이라는 귀신이 아니라면, 확실히 염라대왕이 사는 곳의 우두나찰이란 귀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신부의 흉악한 얼굴을 대하고 나니 시백은 넋이 달아나고, 거기다 역겨운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연상 코를 지르니 신랑의 비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만 정신없이 뛰어 나와 놀라움을 진정하지 못하자, 상공이 놀라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놀라서 단정치 못하게 뛰어 나오느냐?" 시백이 아직 진정되지 않음에 머뭇거리자니 상공이 급히 재촉하며 말하였다. "도대체 네가 무엇 때문에 놀랜 기색으로 나왔는지 까닭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시백은 힘없이 부친의 가슴께를 쳐다보며 여쭈었다. "소자가 신방에 들어가 방안의 모습을 이상히 여길 때쯤 신부가 들어왔는데, 그의 몰골은 마치 지옥에나 있을 법한 검둥이 귀신같아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시백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더더욱 소자의 마음이 상했던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악취가 물씬 풍겨 비위가 거슬렸습니다. 더 이상 마주보기 어려워 이렇게 나왔습니다." 상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아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네가 아무리 어리석다지만 오늘이 바로 첫날밤인데 비록 신부의 겉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다 해도 무엇이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이냐! 여자의 도리는 오직 어질고 착한 것이 으뜸이어서 얼굴이 아름답지 못함은 그리 생각할 필요가 없거늘 하물며 네가 미를 얻고자 덕을 하찮게 보는 것은 옳지 못한 행실인 줄을 모르느냐?" 상공의 노한 얼굴을 보자 시백이 황송하여 땅에 무릎을 조아려 다시 여쭈었다. "본래 소자가 아우 하나 없어 외로왔고 단지 남매뿐이어서 좋은 아내를 만나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자녀를 낳아 뒤를 이을 본분이 여자의 행할 도리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거동은 말할 수 없이 이상하고 괴이하여 정녕 마주볼 수가 없으니 이것은 필시 조물주가 시기하고 또한 하늘조차 미워하여 이런 괴물로서 계집이라 일컬으시니, 아무리 하늘의 뜻을 어기는 행실이 되고 부모님께는 천하의 불효가 된다 할지라도 다시는 볼 수 없사오니 저의 급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주시고 어서 바삐 상경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말이 끝나길 기다려 상공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대단히 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꾸짖기 시작하였다. "자식된 도리로 아비의 말을 손톱만큼이나 가볍게 여기고 버릇없이 말하는구나. 여자의 정숙한 덕성을 돌아보지 않고 어여쁜 얼굴만을 요구하니 어찌 아비된 입장에서 한심스럽지 아니하며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너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방으로 들어가 신부의 착하고 어진 덕에 감격하여 잘 지내고 부디 아비의 말에 순종해라." 상공은 차츰 말소리를 낮추며 아들에게 말했으나 아들의 태도가 수그러지지 않는 것 같아 상공은 덧붙여 다짐을 주었다. "만약에 다시 한 번 거역할 때는 부자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것임을 명심해라." 너무도 엄격한 부친의 분부에 시백은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다시 신방에 들어갔다. 신부를 마주보기가 싫어서 한쪽 구석에 옷도 벗지 않고 누웠다가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닭이 울자 바깥채로 나와 부친의 침소를 살피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 또 날이 저물면 구실 삼아 신방에 들어갔다가 날이 밝으면 나왔다. 이렇게 삼 일을 간신히 보내고 날을 가려 상경하게 되었다. 처사와 이별하고 이공의 부자는 신부를 가마에 태워 출발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서울 본집에 당도하여 아들을 데리고 대청에 들어가 부인과 절을 한 다음에 다시 의관을 가다듬어 부인과 함께 신부를 맞이했다. 신부가 단정하게 폐백을 마치자 부인이 눈을 들어 신부를 보자니 세상에는 둘도 없을 박색이었다. 부인은 기분이 상하여 상공에게 말하였다. "어찌 저런 인물을 며느리로 삼아 살 수 있겠오?" 부인의 말에 상공의 기색이 완연히 달라지며, "부인, 신부의 외모가 아름답지는 못하나 재주가 신기하여 수많은 도법이 마음속에 가득 하다오. 덧붙여 정숙한 덕을 지녔으니 사실상 우리 집안에 빛을 끌어들일 인물인데 어찌해서 부인은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시비하시오?" 부인은 상공의 엄한 말을 듣고 더는 말을 못했다. 조금 후에 상공이 아들과 신부에게 지시하여 사당에 올라 쌍으로 잔을 드려 조상에게 아뢰고 나서 바깥채로 나가 많은 손님을 접대하도록 했다. 날이 저물자 모든 손님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상공은 신부에게 제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럭저럭 여러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시백은 한 번도 신부 방에 들지 않았다. 이에 상공은 크게 성내어 아들에게 이르길, "옛날에 제갈 공명의 부인인 황씨는 퍽이나 인물이 박색이었다 한다. 하지만 공명의 사랑이 두터웠고 마침내는 벼슬길에 올라 유황숙을 도와서 일을 할 때에 황부인이 여덟 가지의 둔갑술과 바람을 일으키고 또한 비를 내리는 술법을 공명에게 가르쳐 주어서 삼국에 이름을 떨치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비록 얼굴은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지아비에게 내조하는 정성은 지대했단 말이다. 부디 네가 옛일을 길이 받아들여 내 어질고 착한 며느리를 박절하게 대하지 말아라."라고 심각히 꾸짖었다. 이후 시백은 상공의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고 박씨의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백은 한편 구석에서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있다가 날이 밝으면 나가 버릴 뿐, 박씨에게 한 마디의 말도 붙이지 않았다. 박씨의 마음속은 말할 수 없이 아팠지만 결코 내색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박씨가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인사를 드릴 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이므로 상공이 인사를 받고 나서 며느리에게 물어 보았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조심스럽게 엎드려서 상공에게 여쭈었다. "어리석고 못난 저의 바탕으로 이처럼 귀한 집안에 들어와서 시부모님을 모시되 잘못이 너무 많아 아버님께 아뢰옵기 송구스럽사오나 저의 본성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번잡한 곳은 매우 괴롭사옵기에 미천한 뜻을 아뢰옵니다. 뒤뜰에다 아담한 초당을 짓고 살기가 소원이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상공은 불쌍한 며느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뒤뜰에 십여 간이나 되게 초당을 짓도록 하고 아름다운 꽃들도 많이 심어 며느리의 마음을 펴게 하니 박씨는 상공의 배려에 감격하였다. 이럭저럭 일을 끝마치고 좋은 날을 잡아서 계집종 계화를 데리고 초당에 이르러서 동산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기이하게 생긴 아름다운 꽃들이 봄빛을 자랑하고 청학과 백학들이 번거롭게 노닐다가 주인을 반기는 듯, 모두가 선한 정경이었다. 박씨가 몹시 기뻐하며 계화에게 아버님께 가서 종이 한 장을 얻어오라고 하였다. 상공은 계화의 얘기를 이상히 여겨 즉시 글공부하는 아이에게 빛이 고운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하고 친히 가지고 초당으로 들어갔다. 박씨는 상공이 계화와 같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뜰에 내려와 맞았다. "아가, 종이 한 장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박씨는 고개를 숙이고 차분히 여쭈었다. "이처럼 귀한 집에 별호가 없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허허, 과연 내 며느리로고. 그대의 문필에 대한 제간을 보고 싶으니 직접 내 앞에서 쓰도록 하라. 자! 어서." 박씨는 지시를 받고 계화에게 붓과 먹을 가져오라 하였다. 벼루에 먹을 갈아서 종이에 내려쓰자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상공이 보니 필체는 신기하여 푸른 용이 나는 듯하니 그 현판에 피화정이라 씌어 있고 그 옆에 <신미년-1631년-첫 봄에 취희당을 쓰다>라고 되어 있었다. 상공은 박씨의 필법을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칭찬하여 주며 흐뭇해서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훌륭한 필체로다. 그대가 아버지의 재주를 온통 물려받은 듯 싶구나." 상공이 대단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박씨는 송구스러워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칭찬에 황송하여 절하고 그 종이를 한 번 뒤적이니 별안간 금으로 쓴 현판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는 세상에서 드문 재주를 가졌구나. 시백의 마음이 어리석어 대접이 몹시 심하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할까." 이러한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의 어느 날 박씨는 안채에 나아가서 시부모님께 절하고 엎드려 상공에게 여쭈었다. "내일 새벽에 종에게 명하시어 종로에 있는 개주집에 가게 되면 묶어 놓은 수십 필의 말이 있사온즉,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잡고 값을 물어보면 일곱 냥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체도 말고 돈 삼백 냥을 주고 사오라 하십시오." "실로 그대의 말이 이상하구나. 일곱 냥이면 살 말을 구태여 삼백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사오라 하니 말이다." 박씨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황송 하옵지만, 후일에 보시면 자연스럽게 아실 것입니다." 박씨의 대답에 상공은 믿고 있었지만 부인이 속으로 비웃으며 상공의 믿음에 핀잔을 했다. 이튿날 상공은 바깥채로 나와 가장 충실한 종을 불러내어 돈 삼백 냥을 주고 지시하였다. 종은 상공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스레 생각하기도 했지만 분부를 받들고 종로에 있는 객주집에 가 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말의 흥정꾼을 불러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손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말하였다. "저기 있는 말 값은 얼마나 합니까?" 흥정꾼이 묘하게 생각하는 눈치더니 말했다. "건강한 말이 많은데 하필 연약한 말을 사려고 하십니까? 값은 일곱 냥입니다." "우리 영감님이 분부하시길 일곱 냥 하는 말을 삼백 냥 주고 사오라 하시니 이 돈을 받으시고 그 말이나 제게 주시오." 말 흥정꾼이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그 분 이상도 하시네. 일곱 냥하는 값싼 말을 어떻게 삼백 냥이나 받고 팔 수 있겠소? 절대 받을 수 없소." 상공의 종이 말하길, "이것은 우리 영감님의 분부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하며 삼백 냥을 억지로 주려 하니, 말 흥정꾼이 나직히 말했다. "말 값은 일곱 냥 내어놓고 그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집에 돌아가서 삼백 냥을 다 준 것처럼 하시오." 상공의 종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반씩 나누어 가지고 말을 끌고 돌아오니, 상공이 나와서 말을 이끌고 뒤뜰로 나가 박씨를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박씨가 나와서 보다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송구스럽지만 저 말을 도로 내다가 주라고 하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말이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네 말대로 사왔는데 어째서 도로 주라고 하느냐?" 박씨는 똑똑히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말 값을 덜 주고 사왔으니 무엇에 쓸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해서 도로 내어다 주라고 하였사옵니다." 상공이 놀라서 종에게 꾸짖었다. "너는 말 값을 얼마나 주고 사왔는지 솔직히 말하렸다." 종이 여쭈길, "영감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왔나이다." 하니 박씨가 몸을 돌이켜 종을 꾸짖었다. "아무리 네가 어리석은 상놈이지만 상전을 속이길 예사롭게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아니할 일인가? 네가 말 값을 흥정꾼에게 주자 그 놈의 말이 '말 값 일곱 냥만 빼어놓고 다른 나머지는 우리가 똑같이 나누어 먹자' 하니 그 말에 너의 귀가 멀어 나누어 가지고 왔거늘, 너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상전을 속인 크나큰 죄는 뒤에 다스리겠지만 어서 가서 네가 나누어 가진 돈을 말장수에게 주고 돌아오되, 만약 늦어지면 너의 목숨은 보존하기 힘들게 될 것이니라." 종이 박씨의 말을 듣고 나자 두렵고 겁이 나서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고 속히 객주집에 가서 거간꾼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이 몹쓸 놈아, 너의 말에 솔직하여 곧이 듣고 말을 가지고 갔더니 하마터면 상전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다." 말 값을 모두 합쳐서 임자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삼백 냥을 억지로 주고 돌아와 박씨에게 말하였다. "전부 주고 돌아왔습니다." 박씨가 이르기를, "물러가 있거라." 하고, 상공께 여쭈었다. "말에게 하루 깨 한 되와 생동쌀 오 홉씩으로 죽을 쑤어서 삼 년만 먹이고 초당 앞뜰에 찬 이슬을 맞힌 다음 버려 두고 나면 쓸 곳이 꼭 있습니다." 박씨의 진중한 말에 상공은 기꺼이 허락했다. 벌써 삼 년이 다 되어서 하루는 박씨가 안채로 나아가 시부모님께 절하였다. 그때까지도 부인은 며느리의 얼굴이 보기 흉해서 눈썹을 찡그렸지만 항상 웃는 낯의 상공은 손까지 잡고 며느리에게 일렀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담담하게 여쭈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명나라 황제가 돌아간 소식을 전하려고 사신이 올 것입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믿을 만한 종을 시키시어 내일 아침에 그 말을 끌고 나가서 남대문 옆에다 세워서 두면 공문을 가지고 오는 칙사가 보고 '저 말 값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거든 '말 값은 삼만 팔천 냥이오.' 하면 그 사신이 그 값을 전부 주고 살 것입니다. 그 말 값을 받아오라고 하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말을 신기하게 여겨 그의 말을 허락하고 그 이튿날 심복 종 원삼이를 불러 단단히 분부를 내리었다. "네가 이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 서 있으면 필시 명나라의 칙사가 이러이러 물을 것이니까 '말 값이 삼만 팔천 냥이오.' 하면 곧바로 다 치를 것이다. 주는 대로 받아 오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원삼이가 분부를 받들고 곧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서 있자니 정말로 칙사가 들어오다가 그 말을 보고는 통역관을 시켜 주기에 그대로 말했더니 다시 묻지 않고 말 값을 다 주므로 받아 가지고 곧 돌아와 상공께 아뢰었다. 상공은 종의 노고에 칭찬하고 후원에 들어가 박씨에게 말 값을 받아 온 것을 말하였다. "어찌 그 말 값이 그렇게도 비싼 것이냐?" "그 말은 천리를 달리는 날쌘 말이어서 조선에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나 명나라는 지방이 넓고 오래지 않아 쓸데가 많으므로 칙사는 영특한 사람이기에 알아보고 삼만여 금의 비싼 값에도 아랑 곳 없이 사 갔사오나 조선은 지방이 좁아서 쓸 곳이 없사옵니다." 탄복한 상공이 말하였다. "비록 너는 여자 몸이지만 총명하여 만일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보탬이 많을 것이다." 이 시절에는 나라가 태평하여 전 백성이 즐거웠고 또 상감이 성현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드리시고 과거를 베풀어서 인재를 등용시키시니 이시백이 과거를 치르고자 온갖 준비를 갖추고 나가려 했다. 이날 밤 박씨가 꿈을 꾸었는데 뒤뜰 연못 가운데 꽃이 활짝 핀 곳에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옥백으로 만든 벼룻돌을 담는 그릇이 갑자기 변하더니 푸른 용이 되어 놀다가 여의주를 얻어 물고 은색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꿈이었다. 매우 이상히 여겨져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연못가에 나가 보니 거짓말처럼 벼룻물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꿈에서 본 것이었다. 박씨는 그것을 가져다 간수하고 계화를 일렀다. "소서헌에 가서 상공께 잠시 들어오십사고 여쭈도록 해라." 즉시 소서헌에 다다른 계화는 시백에게 박씨의 말씀을 여쭈었다. 계화의 말을 듣고 시백은 언짢게 여기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큰 일이기에 여자가 대장부의 과거 공부를 지체하게 하느냐?" 계화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박씨는 얼마 간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계화를 보내어 일렀다. "무릇 여자의 도리로써 앉아서 서방님을 오시라 함이 당돌합니다만 잠시 들어오시면 과거장에서 쓰실 도구를 드릴 것이니까 한 번의 걸음을 하시기 빈다고 여쭈어라." 박씨의 명으로 계화가 마지못해 박씨의 전갈을 상세히 아뢰었다. 계화의 말을 전부 듣고 난 시백은 대단히 노하여서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일개의 계집이 집안에 앉아 과거 공부하는 장부를 이토록 마음 산란하게 하니 어째서 큰 소리가 안 나올 수 있겠는가?" 시백은 말을 마치자 더욱 분함이 치밀어 올라 호령하고 계화에게 꾸짖어 말하였다. "시골에서 자란 너의 주인에게 일의 순서를 너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전하고 여자가 되어서 어찌 장부를 마음대로 오라느니 가라느니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내 오늘 네게 벌을 주는 것은 너의 주인을 대신하려 함이니 그대로 전해라." 말을 마치고 매를 서른 대를 때리시니 계화가 울며 박씨에게 자기가 당한 얘기를 서럽게 말하자 박씨도 눈물을 흘리며 일렀다. "분명히 내 죄를 너에게 내리셨구나. 이제야 여자의 위치가 가엾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겠구나." 잠시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쉰 연후에 물을 담는 그릇을 주며 전하였다. "이 벼룻물을 담은 그릇으로 먹을 갈아 글을 지으면 장원 급제하여 크게 출세해서 이름이 세상에 날 것이며 부모님께는 영원한 복을 드리므로 집안이 빛날 것이며 이제 나는 서방님에게 필요 없을 테니 내 생각은 마시고 지체 높은 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와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여쭈어라." 계화는 박씨의 말을 새겨듣고 그대로 전하였다. 시백이 계화의 말을 듣고 나서 벼룻물을 담는 그릇을 보니까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자기가 너무나 지나친 말을 한 것 같아 속으로 뉘우치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계화에게 천천히 일렀다. "아가씨께 전하여라. 본디 나의 천성이 우악스럽고 급해서 아가씨의 말씀을 언짢게 여기고 너에게 심히 책망하여 벌까지 주었으나 아가씨의 성품이 워낙 온순하여 벼룻물 담는 그릇을 보내주어 과거 보는 일에까지 도움을 주니 대단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한 행동을 분하게 여겨서 다른 집안의 여자에게 다시 혼인하라는 말씀은 조금 지나친 말인 줄 안다고 가서 여쭈어라." 명을 받들고 계화가 다시 돌아와 박씨에게 서방님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주생전 - 권필(1569~1612) 이 작품은 선조 때의 문인인 권필이 지었다. 자를 여장, 호를 석주라 했다. 본관은 안동이요, 습재 벽의 아들로 선조 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송강의 풍모를 사모하여, 송강이 강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때, 동악 이안눌과같이 찾아가 뵈오니, 송강이 크게 반가워하며 "천상에서 내려온 두 신성을 보게 되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신선 같은 풍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권필은 공명에 뜻이 없어 과거도 보지 않고 시주로 도락을 삼고 가난하게 살았다. 31세 되는 해 여러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의 벼슬을 받았으나, 의관을 갖추고 예조에 나아가 배알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결연히 사퇴하고 말았다고 한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국왕이 의주로 피난할 조의가 분분할 때, 국왕을 잘 보필하지 못한 이산해, 유성룡 등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사 고천준을 맞아 대접하게 되어 문사를 고를 때, 한낱 야인의 몸으로 권필이 뽑혀 안팎으로 문명을 떨쳤다고 한다. 광해군의 비형으로 정국을 어지럽히고 있는 유희분을 풍자하는 궁류시를 지어 퍼뜨리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시를 지은 사람을 찾던 중, 광해군 4년(1612) 깁직재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 시를 발견하였다. 광해군이 권필을 친히 국문하여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백사 이항복 등의 구명으로 죽음을 면하고 귀양갈 때, 동대문밖에 어떤 사람이 준 술에 취하여 죽으니, 그때의 나이 43세 였다. 권필은 40평생 기인, 불기인으로 처세하였으나, 그의 문장은 당대를 울렸고, 동악 이안눌 보다도 낫다고 평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석주집'이 남아있다. 주생전에 대하여 이 작품은 작자가 선조 26년(1593) 봄에 송도에 갔을 때, 이 작품의 주인공 주생을 여관에서 만났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의사를 하는 가운데 그가 지어서 보여주는 '답사행'이란 사곡 중의 연애 사건을 추궁하자, 주생이 숨기지 못하고 자기의 실연담을 얘기해 주는 것을 듣고 돌아와서 기록했다는 발문이 이 작품 끝에 있으나, 이것은 고전 작가들이 흔히 쓰는 가탁에 불과하고, 우리는 이 작품을 작자의 창작으로 보아야 하겠고, 이 작품의 창작연대는 선조26년으로 잡아야하겠다. 이 작품은 중국 명대를 배경으로 하고, 남 주인공 주생과 두 여주인공 기생 배도와 귀족의 딸인 선화와의 삼각연애를 주제로 한 애정소설이다. 남자주인공 주생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으나 몰락하여 기생이 되어 있는 배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기생의 신분으로 운명에 얽매어 우는 여주인공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다. 기생배도의 눈물겨운 사랑의 호소를 받은 주생이 배도를 사랑하다가, 귀족의 딸인 선화를 만나고 부터는 배도에 대한 사랑이 선화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배도는 고민 끝에 유언을 남겨놓고 병사함으로써 주생과 배도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기생이란 신분에 대한 사랑의 염증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귀족의 딸 선화에게로 사랑을 옮긴 주생은 배도의 죽음과, 공부를 가르쳐주던 선화의 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다시 유랑의 길을 더나 어머니의 친척인 장 노인을 찾아가 선화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장노인의 주선으로 선화와 정식으로 약혼하지만,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에 출정하게 됨으로써 주생과 선화의 결혼은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다른 고전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남자의 배신으로 인한 한 여성의 죽음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고, 천한 기생에 대한 사랑보다는 귀족의 딸을 택하는 남자의 이기적인 생각, 여성의 선천적인 애욕과 질투, 비천한 신분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기생의 고민을 볼 수 있다. ************************************************************************************* 주생의 이름은 회이고, 자는 직경이며, 호는 매천이라 했다. 주생의 집안은 대대로 전당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부친이 촉주의 별가라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촉에서 살게 되었다. 주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민 했다. 시도 잘 지었다. 나이 열 여덟에 태학 생이 되었고, 동배들의 추앙을 받는 바가 되었다. 주생 자신도 재주와 학문이 남에게 뒤지지 낳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태학에 다닌 지도 수년이 흘렀다.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을 했다. 이에 주생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 세상의 인생이란 마치 티끌이 연약한 풀잎에 깃들어 있는 것과도 같은데, 어찌 명예에 얽매여 더러운 속세에서 허덕이며 아까운 청춘을 보낼까 보냐" 이때부터 주생은 과거에 대한 뜻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장사에 뜻을 두었다. 주생이 재산을 헤아려 보니 백천냥이나 되었다. 그중 반으로 배를 구입했다. 강호를 오가며 남은 돈으로 잡화장사를 시작했다. 잇속이 있어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 이래서 아침에는 오땅에 있었고 저녁이면 초땅에 있었다. 그는 장사에만 굳이 구애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악양성밖에 배를 매어두고, 오래 전부터 친히 지내는 나생을 찾았다. 그 또한 뛰어난 선비였다. 나생은 주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주생은 취하는 줄도 모르고 대취하여 배로 돌아왔다. 날은 벌써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둥근 달이 떠올랐다. 주생은 배를 강가운데 띄워놓고 돛대에 기댄 채, 어느새 곤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배는 맞바람을 받아 쏜살같이 흘러갔다. 주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뿌연 안개 속에서 절간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달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강 양쪽 언덕에는 푸른 나무들만이 희미하게 보였고, 새벽빛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초롱 불빛이 붉은 난간의 푸른 주렴사이로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딘 가고 물으니, 전당이라고 했다. 아침이 밝았다. 주생은 고향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 태반은 벌써 세상을 떠나버린 뒤였다. 주생은 시부를 읊조리며 배회했다.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기생 배도를 만났다. 주생과는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그녀는 재주나 미모에 있어 전당에서는 제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배랑 이라 불렀다. 배도는 주생을 집으로 모셨다. 서로 마주 대하니 몹시 기뻤다. 주생은 시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배도는 시를 읽고 몹시 놀라 말했다. "낭군의 재주가 이다지도 훌륭하니 모든 사람에게 굽힐 데가 없구료. 어찌하여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시옵니까? 그래 장가는 드시었나요?" "아직도 장가를 못 갔소." 배도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소원이옵니다. 낭군님은 이제 배로 돌아가지 마시고 저희 집에 머물러 계시 와요. 그러면 낭군님을 위해 좋은 배필을 마련해 드리겠사옵니다."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둔 터였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은근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생은 웃으면서 사양했다. "내 어찌 감히 바랄 수가 있겠소." 이렇듯 즐겁게 노는 동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배도는 어린 계집종을 불러 주생을 별실로 모셔 편히 쉬게 했다. 침실 벽에는 절구 한 수가 걸려 있었다. 시의 내용이 생소한 것이었다. 주생이 계집종에게, "이시는 누가 지은 것이냐?" 하고 물으니, "주인아씨가 지은 것이옵니다."했다. 주생은 벌써 배도의 곱디고운 자태에 흠뻑 취해있었다. 그런데다 그녀의 시를 읽으니 한층 더 정이 쏠렸고, 마음은 불같이 타올라 만 가지 생각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 시의 대구를 지어 그녀의 뜻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아무리 고심했으나 좀체 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달빛은 뜰에 가득했고, 꽃 그림자는 운치를 도왔다. 주생은 이리저리 배회했다. 홀연 문 밖에서 얘기소리, 말 우는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주생은 매우 의심쩍었다.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배도의 방은 그리 멀리 않았다. 주생은 배도의 방을 살폈다. 사창에선 촛불이 환히 비쳐 나왔다. 주생은 몰래 다가가 안을 보았다. 배도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채운 전을 퍼놓고, '첩연화'란 시를 초하고 있었다. 단지 전첩만 지었을 뿐, 후첩은 아직 짓지 못하였다. 이에 주생은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주인 아가씨의 시를 이 나그네가 채워드려도 좋겠소?" 배도는 짐짓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미친 손이 어지 하여 여기까지 오셨나요?" "내가 미친 것이 아니오. 주인 아가씨가 이 나그네를 미치게 할 따름이오." 배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주생으로 하여금 그 시를 완성하게 했다. 주생은 시를 다지었다. 그때서야 배도는 자리에서 일러 났다. 그녀는 약옥선 술잔에다 서하주를 따라 군 했다. 주생은 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배도가 아무리 권해도 사양했다. 그녀는 주생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처연히 말했다. "저의 조상은 호족이었지요. 조부께서는 천주의 시박사 벼슬을 지내시다가 죄를 지어 서인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빈곤하여 다시는 제기할 수 없었어요. 더욱이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다른 사람 손에서 자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절개를 지켜 깨끗이 간직하려 했지만, 이미 기생의 명부에 올라 부득이 사람들과 얼려 술 마시고 놀게 됐답니다. 저는 늘 한가한 시간이면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달을 바라보며 넋을 잃곤 했어요. 이제 낭군님을 뵈오니, 풍채가 의젓하시고 거동이 활달하며, 재주가 빼어나고 생각이 깊사옵니다. 제 비록 몸은 천하오나, 침석에 모시고 건즐받들기를 원하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낭군님이 후일에 입신출세 하셔서 속히 높은 신분이 되시어, 저를 기생의 명부에서 빼주시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 주시 온다면 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낭군님이 저를 버리셔 도중에 헤어지더라도 그 은혜를 잊지 낳겠사오며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사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주생은 그녀의 하소연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씻어주며 말했다. "그것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생각이 없을까?" 배도는 눈물을 거두고 안색을 달리하여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여야불상이요, 사기이행이라 하지 않았어요. 낭군님은 이익과 곽소옥의 일을 못 보셨는가요? 낭군님이 저를 멀리하시고나 버리지 않으시겠다 하오면 맹세의 말씀을 해주시와요." 배도는 노나라에서 나는 고운 명주 한 자락을 꺼내어 주생에게 주었다. 주생은 즉석에서 붓을 들었다. 주생이 쓰기를 마치자, 그녀는 정성껏 봉해서 치마띠 속에다 간직했다. 이 날밤, 그들은 '고당부'를 읊으며 맘껏 즐겼다. 그것은 김생과 취취며 위랑과 빙빙의 재미에 견줄 바 아니었다. 이튿날이었다. 주생은 지난밤에 들었던 사람의 말소리며 말울음 소리에 대해 물었다. 배도가 대답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붉은 대문을 한 집이 물가에 면해 있사옵니다. 그것은 죽은 노 승상 댁이옵니다. 승상은 이미 돌아가시고 노부인이 일남 일녀를 거느리고 홀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아들딸을 성사도 시키지 않고, 날마다 노래하며 춤추는 것으로 일을 삽고 있답니다. 지난밤에도 사람과 말을 내어 저를 데리러왔었어요. 그러하오나, 낭군님이 와 계시어 병을 핑계 대고 거절하였습니다." 이날 해질 무렵 승상 부인은 배도를 데리러 사람을 보내 왔다. 그녀는 또다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주생은 떠나는 배도를 문 밖까지 나가 배웅하면서, "밤을 새우지 말고 곧 돌아오도록 하오." 하고 신신 당부 했다. 배도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그 모습은 산듯한 난조 같고, 말은 나는 용과도 같이 꽃과 버들 숲을 스치면서 염염히 사라졌다. 주생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뒤따라 알려갔다. 용금문을 나섰다. 왼편으로 돌아섰다. 수홍교에 이르렀다. 웅장한 저택이 구름에 닿을 듯이 우뚝 서있었다. 주생은 곧 이 집이 물가에 면해 있는 붉은 대문 집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집은 공중에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음악 소리가 뚝 그치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밖에까지 들려왔다. 주생은 다리 위에서 방황했다. 고풍시 한 수를 지어 기둥에 적어 두었다. 주생이 방황하는 사이에 어느덧 석양의 놀이 짙어졌다. 어둠이 밀려왔다. 이때 여러 무리의 여자들이 붉은 대문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금안과 옥륵의 광채가 휘황하게 비쳤다. 주생은 배도가 이 무리 속에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길가의 빈집으로 숨어들어 지나는 십여 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배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의심쩍었다. 다리 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날은 이미 소와 말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에 주생은 곧장 붉은 대문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전혀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각 밑으로 가 보았다. 역시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생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달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각의 북쪽으로 연못이 훤히 보였다. 수면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밭 사이로는 길이 굽이굽이 나 있었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슬금슬금 걸어갔다. 꽃밭이 끝나자 집이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보 꺾어 들었다. 멀리 포도가 아래 한 채의 집이 보였다. 규모는 작으나 아담했다. 사창은 절반이나 열려 있었고,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 밑으로 붉은 치마, 푸른 옷소매가 나풀거리는데, 영락없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주생은 몸을 숨기며 다가갔다. 숨마저 죽이고 몰래 엿봤다. 금빛 병풍이며 비단 요가 눈을 부시게 했다. 승상 부인은 자색비단 옷을 입고 백옥 책상에 의지하여 앉아 있었다. 나이는 50줄이나 됐을까, 조용히 뒤돌아보는데 여유가 작작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 옆에는 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머리채는 곱게 뒤로 닿아 내렸고, 얼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맑은 눈이 살짝 옆을 흘기는 모습은 흐르는 맑은 물결 위에 가을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웃을 때면 애교가 넘쳤고, 그 입 모양은 정녕 봄꽃이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듯 했다. 이들 사이에 앉아있는 배도는 그들에 비한다면 봉황과 까마귀, 구슬과 조약돌 격이었다. 주생의 넋은 구름밖에 나앉고 마음은 허공을 맴돌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들고픈 심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갔다. 배도는 자리에서 돌아가려고 했다. 부인이 끝내 말려 했으나 그녀는 간절히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부인이 말했다.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리도 서두는가. 정든 사람과 약속이라도 있단 말인가?" 배도는 옷깃을 단정히 하고, "마님께서 하문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주생과 인연을 맺은 내력을 자세히 아뢰었다. 승상 부인이 미처 말할 사이도 없이, 소녀가 미소짓고 배도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좀더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하마터면 하룻밤 즐거운 모임을 놓칠뻔 했군." 부인도 역시 크게 웃으며 돌아가도록 했다. 주생은 재빨리 그 집을 빠져나왔다. 한발 앞서 배도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까지 골면서 자는 체 했다. 배도는 이내 뒤따라 왔다. 주생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는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낭군님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계시옵니까?" 주생은 제멋대로 읊어댔다. 배도는 몹시 불쾌해하며, "소위 선아 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지요?" 하고 힐문했다. 주생은 대답할 수 없어 다시 시로 써 응답했다. 주생은 배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대가 내 선아가 아닌가." 하니 , 배도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낭군님은 저의 선랑이시군요." 이 뒤부터 서로 선아 선량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생이 배도에게 늦게 들어온 사연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연회가 파한 후 다른 기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였으나, 유독 저만 남게 했나이다. 저를 따로 선화의 거소에다 불러 다시 조촐한 술자리를 벌여놓고 붙들었습니다." 주생이 자세히 유도해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선화의 자는 방경이고 나이는 열 다섯입니다. 용모가 빼어나 세속 사람 같지 않으며, 사곡을 잘 지을 뿐만 아니라, 자수도 잘 놓아 저같은 것은 감히 댈 수도 없어요, 어제는 풍입송의 사를 짓고 거기에 맞춰 금현을 뜯고자 했어요. 제가 음률을 안다고 머물게 하고서는 그 곡을 노래하게 했습니다." 주생이 다시, "그럼 그 시는 어떤 것인가?" 물으니, 배도는 소리내어 죽 읊었다. 배도가 한 구절 한 구절 읊을 때마다, 주생은 은근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짐짓 말했다. "이 시곡에는 규방의 춘회가 남김없이 발휘되었구료. 소야란 정도의 뛰어난 솜씨가 아니면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는 좀 힘들 것 같소, 그러나 나의 선아가 꽃을 다듬고 옥을 깎는 재주만은 못하오." 주생은 선화를 본 후로 배도에 대한 정이 없어졌다. 응수할 때만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즐거운 체했으나, 마음엔 오직 선화생각 뿐이었다. 하루는 승상 부인이 어린 아들 국영을 불러 말했다. "네 나이 벌써 열둘이 아니냐. 아직도 취학을 못하고 있으니, 후일 성년이 되면 어떻게 자립하겠느냐. 내 들은 바로는 배도의 남편인 주생은 글을 잘하는 선비라고 한다. 네 가서 배우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부인의 가법은 매우 엄했다. 국영은 이 말을 어길 수 없었다. 그날로 책을 챙겨 주생에게 갔다. 주생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됐구나'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체 하면서 허락했다. 어느 날 주생은 배도가 출타한 틈을 타 국영에게 조용히 말했다. "네 오가면서 글을 배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네 집네 빈방이라도 있다면 내가 너의 집으로 옮겨갔으면 한다. 너는 왕래하는 불편을 덜 것이요, 나는 너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텐데." 국영은 넙죽 절을 하면서 "그러하옵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말씀드려 그날로 주생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배도는 외출했다 돌아와 몹시 놀라며 말했다. "아마도 선랑께서는 딴 마음이 있으신가 보군요. 왜 저를 버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십니까?" "내 듣건대 승상 댁에는 삼만 축의 장서가 있다하오. 무인은 선공의 유품이라 함부로 내고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지 않소 그래서 제집에 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들을 읽어보려는 욕심으로 그러는 거요." 배도는 "낭군님께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저의 복입니다." 하고 말했다. 주생은 승상 댁으로 옮겨갔다. 낮이면 국영이와 같이 있고, 저녁이면 집안의 문이란 문은 빈틈없이 잠가버리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갖은 궁리를 다하는 동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문득 그는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선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봄이 다가도록 만나지도 못했구나. 황하의 물 말기를 기다린다면 몇 해나 기다려야 할지. 차라리 어둔 밤에 선화 방으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 일이 성공하면 귀한 몸이 될 것이요, 실패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한다 해도 좋다." 이 날 저녁 따라 달이 없었다. 주생은 어려 겹의 담을 뛰어넘어 선화의 방 앞에 이르렀다. 복도에도 구부러진 큰 기둥이 있는데 염막이 겹겹이 드리워 있었다. 주생은 얼마 동안 동정을 살폈다. 인적이 없었다. 선화 혼자만이 촛불을 발기혹 곡을 뜯고 있었다. 주생은 기둥사이에 바짝 엎드려 그 뜯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뜯기를 다한 선화는 소자 첨의 하신랑사를 작은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선화는 못 들은 척 했다. 곧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생은 방안으로 들었다. 함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 데다 약질이었다. 정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엷은 구름과 가는 비처럼 버들과 어림 꽃처럼 교태로 왔다. 울다가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살며시 미소짓다가는 가볍게 찡그리기도 했다. 주생은 별이 꽃을 찾아 날 듯, 나비가 꽃가루를 그리워하듯 매혹되었다. 정신은 한없이 무르녹았다. 어느덧 날은 밝아왔다. 난간 앞 꽃나무 가지에 앉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문득 들었다. 주생은 깜짝 놀랐다. 방을 급히 나갔다. 집과 연못은 고요했고, 새벽안개는 몽롱했다. 선화는 주생을 보내느라고 방문을 나섰다가 들어가며 말했다. "이제 간 후로는 다시는 오지 마셔요. 이 비밀이 새나가 누설된다면 사생이 걱정되옵니다." 주생은 기가 막혔다. 목이 메어 급히 달려들어 말했다. "이제 겨우 좋은 인연을 이루었는데 어찌 이렇게도 박대를 하는 거요?" 선화는 방긋 미소 지으면서, "아까 말은 농담이에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옵고 저녁으로 만나도록 하시어요."하고 말했다. 주생은 연신 "응응"하면서 급히 달려나갔다. 선화는 방으로 들어오자 '조하간효앵'시를 일절 지어 창밖에 걸었다. 다음날 저녁이었다. 주생은 또 선화를 찾아갔다. 갑자기 담 밑 나무 사이에서 아련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켰나 싶어 달아나려 했다. 신을 끌던 사람이 청매를 던져 주생의 등을 맞쳤다. 그는 피할 곳이 없어 몹시 당황했다.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신 끌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랑, 놀라지 말아요. 앵앵이가 여기 있어요." 그제서야 주생은 선화가 한짓인줄 알았다. 일어서서 선화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왜 이렇게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요?" 하니, 선화는 웃으며 말했다. "어찌 감히 낭군님을 놀라게 하겠어요. 낭군님 혼자 지레 겁을 먹었을 뿐이지요." 주생은, "향을 훔치고 구슬을 도둑질하는데 어찌 겁이 나지 않겠소." 하고는 손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생은 창문의에 걸린 절구를 보았다. 마지막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름다운 선화가 무슨 근심이 있어 이런 시를 지었소?" 선화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자의 몸은 수심과 함께 나서, 만나지 못했을 때는 서로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면 서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니 어찌 여자의 몸으로서 편안하게도 근심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낭군님은 절단지기를 어겼고 저는 행로지욕을 받았습니다. 불행이도 하루아침에 우리 정사의 자취가 발각된다면 친척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동리 사람들은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우리들이 손을 잡고 해로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구름 속에 든 달과 같으며 숨은 꽃과도 같습니다. 설사 한때는 즐겁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테니 어찌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후, 눈물을 주룩 흘리며 원한 품은 태도를 보였다. 거의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주생은 눈물을 훔쳐주며 위로해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 하나를 얻을 수 없겠는가. 내 나중 중매의 절차를 밟아 예법대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니 너무 걱정을 마오." 선화는 눈물을 거두며 치사했다. "낭군님의 말씀대로만 될 것 같으면, 저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록 집안을 화복 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나물을 캐어 정성껏 제사를 받드는 일만은 다하겠습니다." 선화는 향합을 열었다. 조그만 화장용 거울을 꺼내어 둘로 깨뜨렸다. 한쪽은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은 주생에게 주며, "동방화촉의 밤을 기다렸다. 다시 하나로 합하와요." 했다. 또한 흰 깁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이두 물건은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제 마음의 간곡함을 나타내는 것이옵니다. 제 소원이니 승란의 처로 생각하시어 가을밤의 원한을 끼치지 마시옵고, 가사 항아가 그림자를 잃을지라도 꼭 밝은 달빛을 어여삐 여겨 아껴 주업소서." 이후로 그들은 밤이면 만났고 새벽으론 헤어졌다. 하룻밤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주생은 오랫동안 배도를 만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그녀가 이상히 여길까 두려워 그녀의 집으로 가서 잤다. 밤사이 선화는 기다리다 못해 주생의 방에까지 갔다. 선화는 주생이 쓰던 단장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그녀는 배도가 지은 시 두어 폭을 발견했다. 그녀는 화가 뿌듯이 치밀었고 질투심이 솟아났다. 그래서 책상 위에 있는 붓을 들어 까맣게 지워 버렸다. 그 밑에다 '안아미사'일 절을 지어 푸른 비단에 써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나가 버렸다. 이튿날 주생이 돌아왔다. 선화는 조금도 질투하거나 원망스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또 주머니를 끌러 본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생 스스로 깨달아서 부끄러워하게 하고자 함이어서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승상 부인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배도를 불렀다. 부인은 주생의 학행을 칭안했다. 아들 글 가르치는데 수고를 한다고 치사했다. 그리고는 손수 술을 따라 배도로 하여금 주생에게 잔을 권하게 했다. 주생은 이날 밤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배도는 혼자 앉았으니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시가 먹으로 지워진 것을 보았다. 마음은 자못 언짢았고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 밑에 '안아미사'를 보니 선화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그녀는 몹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이 시를 소매 속에 감춘 다음 주머니를 전처럼 싸매 두었다.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렷다. 주생이 술에서 깨어나자 침착하게 물었다. "낭군님은 이곳에서 무작정 유할건가요? 도대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생은, "국영이가 공부를 아직 다 마치지 못한 탓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처의 동생을 가르치는 것이니 불가분 마음을 다해야 겠지요?" 주생은 얼굴을 붉히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요?" 하고 물었다. 배도는 얼마동안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주생은 당황하여 어찌할줄을 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만 응시 했다. 배도는 그 시를 꺼내어 주생의 면전에 던지며 말했다. "유장상종이요, 찬혈상규구료. 이 어찌 군자가 할 짓입니까? 난 지금 곧장 들어가 부인께 말씀 올리렵니다." 배도는 몸을 일으켰다. 주생은 황망히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사실대로 고백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빌었다. 선화는 나와 백년 해로를 굳게 언약한 사인데, 어찌 죽을 곳으로 몰아 넣는단 말이오." 배도는 마지못해 뜻을 돌리고는, "그렇다면 곧 저와 같이 돌아 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낭군님이 저와의 언약을 어긴 바에야 제가 무어라고 맹세를 지킬 것이오리까." 하고 말했다. 주생은 하는 수 없었다. 부인에게 딴 핑계를 대고 배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배도는 선화와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 부터는 다시는 주생을 선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마음속에 불평이 끓어올라서였다. 주생은 오로지 선화만을 생각했다. 몸은 나날이 여위어 갔다. 끝내는 병을 빙자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스무 날이 지나갔다. 돌연 국연이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이 왓다. 주생은 제물을 갖춰 영구 앞에 나아가 전을 올렸다. 선화 역시 주생과 이별한후 상사의 병이 깊어 기거 동작도 남의 손을 빌어야 했다. 문득 주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났다. 담장소복을 하고 주렴안에 혼자 서 있었다. 주생은 전을 끝냈다. 멀리 선화가 보였다. 눈을 찡긋해 정을 표시했다. 머리르 숙이고 서성거리고 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앗다. 세월은 흘러 몇달이 지났다. 배도마저 병들어 눕고 말았다.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 주생의 무릎을 베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저는 봉비하체로서 그늘에서만 살아오다가 아름다운 청춘이다가기도 전에 시들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 저는 낭군님과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비단 옷이며 좋은 관현 악기가 소용이 없고, 전날의 소원도 다 그만입니다. 다만 원하옵는 바는, 제가 죽은후에 낭군님은 선화를 취하여 배필로 삼으시옵소서. 그리고 내 죽은 뒤 시신은 낭군님이 왕래하시는 길 가에 묻어 주신다면 죽더라도 산 거같이 여기고, 편안히 눈을 감겟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기절했다. 한참만에 다시 깨어나 주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랑, 주랑이여! 부디부디 몸조심하시어요. 몸조심 하..." 이러기를 몇 번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생은 배도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그는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호산의 길 가에다 고이 묻어 주었다. 주생은 제사를 마쳤다. 그는 두 계집종과 이별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집을 잘 간수 하여라. 내 후일 성공해 돌아오면 반드시 너희들을 돌봐 주마." 계집종들은 섧게 울며, "저희들은 주인 아씨를 어머니 같이 우러러 받들었고, 아씨도 저희를 자식같이 사랑해 주시었어요. 이제 저희가 박복하여 아씨를 일찍 여의었으니, 오직 믿고 슬픔을 달랠 길은 서방님 뿐이온데, 이제 서방님 마저 가신다니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하고는 더욱 섧게 울었다. 주생은 새삼 계집종들을 달래 주고는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올랐다. 그러나 차마 노를 저을수가 없었다. 이날 밤 주생은 무홍교밑에서 묵었다. 멀리 선화의 집을 바라보니 촛대의 불빛만이 숲 속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는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만날 인연이 끊어졌음을 슬퍼했다. 그는 '장상사'일 절을 읊었다. 주생은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가면 선화와 영영 이별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머물자니 배도도 가고 국영도 또한 죽었으니, 의지 할데라곤 없었다. 벌써 날이 훤히 밝아 왔다. 주생은 하는 수 없이 노를 저어서 물길을 떠났다. 선화의 집이며 배도의 묘는 점점 아득해졌고, 산굽이를 돌아 강이 굽어진 곳에 이르니 홀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생의 외가인 장씨 노인은 호주의 갑부 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복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주생은 그리로 찾아가 의지했다. 장 노인댁에서는 주생을 지극히 후하게 대접햇다. 주생은 비록 몸은 편안하였으나, 선화를 생각한즉 정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주생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 세월은 흘렀다. 춘삼월 호시절을 맞았다. 이 해가 바로 만력 임진년 이엇다. 장씨 노인은 주생이 나날이 여위어 가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 까닭을 물엇다. 그는 감히 감추지 못해 사실대로 아뢰엇다. 장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에 맺힌 한이 잇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내 안사람과 노 승상은 동성이어서 여러해동안 긴밀히 지냈다. 내 너를 위해 힘써 보겠으니 염려하지 마라." 이런 다짐을 둔 다음 날이었다. 노인은 부인을 시켜 편지를 써, 늙은 하인을 전당으로 보내 왕사지친을 의논했다. 선화는 주생과 이별한후 날마다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여윌대로 여위어만 갔다. 승상 부인도 선화가 주생을 사모하다 얻은 병인줄 알고 있엇다. 그녀의 뜻을 이루어 주려 했으나, 이미 주생은 떠나 버려서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돌연 노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온 집안이 놀라며 기뻐했다. 선화도 누워있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세수도 하며 몸단장을 하는 등 전과 같았다. 이해 구월로 혼인날이 정해졌다. 주생은 날마다 포구로 나가 늙은 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흐레가 되던 날이었다. 그 늙은 종이 돌아 왔다. 정혼의 뜻을 전하고, 더욱이 선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주생은 급히 편지를 뜯었다. 분향냄새가 그윽했다. 편지지에는 눈물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는 선화의 애원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주생은 꿈꾸다 깨어난 것만 같고, 술에 취했다. 정신이 난 것만 같았다. 슬프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오는 구월을 손꼽아 보니 아직도 아득했다. 주생은 혼일을 고쳐 잡으려고 장씨 노인을 찾았다. 다시 한번 늙은 종을 보내 달라고 청한후, 선화에게 답을 썼다. 주생이 편지를 써 놓았으나 전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앗다. 마침내 원병을 중국에 까지 청해왔다. 사태는 매우 급박했다. 황제는 조선이 지극히 중국을 섬기므로 불가불 구원을 해야했고, 또 조선이 무너지면 압록강 서부 지방은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임을 간파했다. 장차 왕업의 존망계절이 달린 판국이어서 거절할 도리가 없엇따. 그레서 도독 이여송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때 행인사의 해인 설 번이 조선을 다녀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북방 사람들은 오랑케를 잘 막아내며 남방의 사람들은 왜놈을 잘 방어하오니, 이 싸움은 남방의 군병이 아니면 어렵겠나이다." 이래서 호절의 여러 고을에서 병정을 급히 모집하게 되었다. 그때 유격 장군 이었던 어떤 사람이 평소에 주생의 성명을 알고있어, 출전하는 날에 끌어내어 서기의 소임을 맡겼다. 주생은 굳이 사양했으나 어쩔수 없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조선으로 나왔다. 안주의 백상루에 올라 고풍칠언시를 지었다. 이듬해 계사년 봄이었다. 명군은 왜적을 대파하여 경상도로 몰아붙였다. 주생은 밤낮으로 선화를 생각하여 마침내 병이 중해졌다. 그는 종군해 남하할수 없어 송경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나는 때마침 일이 있어 송경에 갔었다. 한 여관에서 주생을 만났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앗다. 그래서 글로써 의사를 통했다. 주생은 내가 글을 안다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나는 주생에게 병든 내력을 불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근심에 싸여 응답이 없었다. 하루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나는 주생과 같이 불을 밝히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생을 답사행의 사 한수를 지어 보여주었다. 나는 몇번이나 이시를 읊었다. 그리고 시 중의 정사를 탐독했다. 주생은 더 이상 갑추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 말하지 말라느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사를 아름답게 보앗다. 그리고 이들의 기우를 한탄했고, 좋은 시일을 놓친데 대하여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헤어진후, 나는 붓을잡아 이를 써나가지 않을수 없었다.
화사 도 도나라의 열왕은 성이 매요, 이름은 화며, 자는 선춘이라 하였으며 나부의 사람이었다. 그의 선조에 상나라를 도운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고종의 재상이 되어 공으로 도 땅에 봉을 받았더니 중세에 초나라의 대부 굴원이 쫓긴 바와 같이 되어 합려성에 피한 것으로 인연하여 자손이 대대로 여기에 살게 되었다. 몇 대가 지나고 고공사에 이르러서 무른의 도씨의 딸을 취하여 아들 셋을 낳았는데 왕은 그 큰 아들이었다. 도씨는 낳아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어서 그가 시집가는 날에 당하여는 반드시 그의 집을 빛나게 할 것이로다라고 시인이 칭송한 바 있다. 그는 일찍이 요지에 가 놀다가 왕모가 붉은 열매 하나를 주어 받아 먹은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왕을 날 때에 이상한 향기가 풍겨 그것은 달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때의 사람들은 그를 향해아라고 불렀다. 성장하여 그는 영자하고 상려하였으며 성질이 박질한데다가 풍채는 아결하였고 선조의 유훈을 이어받아 그 덕이 높아서 원근을 막론하고 그의 풍문을 듣고 노인을 이끌며 어린 것을 데리고서 찾아와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차에 등륙이 만물을 방자하게도 학살함에 천하가 워낭을 하여 마지않게 되자 고죽군인 오균과 대부 진봉 등이 그를 추대하고 왕으로 세움에 합려성을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도라 하고 목덕이 왕이 되어 축월을 세수로 삼고 다섯을 상용의 수로 쓰고 색은 백을 숭상하였다. 가평 원년 동 십 이 월에 사제를 지내고 붉은 매로 초목을 매질하고 가평이라 건원했다. 그는 열 두 달을 1년으로 하고 일 월은 시에 달을 달리하고 날을 말한 것을 쫓은 것인바 다 이것을 본받았다. 2년에는 계씨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는 월성 출신으로 정숙하며 요조한 덕이 있고 여공에 근면하여 왕의 덕화를 돕는 바가 되었기에 때의 사람들은 그를 주나라의 태사에 비유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두는 바다. 집과 나라의 흥망은 부부간에서 비롯되는 것이매, 시에 갈담의 읊음은 나라가 새로 일어날 징조였고 산의 뽕나무로 만든 활의 예언은 집안이 망한 징후였다. 도왕에 도씨의 모친이 있고 또한 계씨비를 얻었으니 그 흥성은 마땅한 일이었도다. 3년에 오균을 배하여 재상을 삼았다. 균의 자는 차군이고 초나라 상주의 사람이었다. 그는 청허하며 과욕하고 곧은 절개를 지킴으로써 호를 원통처사라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에 상강에서 오 땅으로 옮겨와 왕과 더불어 죽마지우가 되었었던 바 등륙이 그의 어진 소문을 듣고는 고죽군으로 봉하였다. 등륙의 난리가 일어나자 오균은 도왕에게로 나아가 진언하기를 "등륙이 음탕 잔학하여 만민을 잔해함에 그 풍성이 미치는 바에 떨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인민이 시들며 만물은 얼고 주리어 천하가 다 갈상지탄을 하고 해내에 운예지망이 간절하오니, 비록 주옥의 궁실을 지닌 가멸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멸망은 곧 목전에 있는 것이오니다. 이제 공은 밝은 덕이 있고 명성이 높으며 호걸을 영도하고 있는 터이오니, 이 기회에 합려에 의거하여 널리 영웅을 모으면 누구라 어깨를 으슥거리며 와서 술두루미로 맞이하면 따르지 않으리까? 원컨대 신은 촌토를 얻어 공훈과 이름을 죽백에 드리고자 하나이다." 라고 하니 공이 크게 기뻐하여 좌우에서 떠나지를 못하게 하고, "하루라도 차군이 없을 수가 없다."로 말하고 나서, 이에 이르러 배하여 재상을 삼고는 다시 천호를 봉하여 주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두는 바다. 옛날 제왕의 홍성에는 반드시 보좌하는 어진 사람이 도왔으니, 상나라 탕왕 때의 유신의 들에 있어서나, 제나라 환공 때의 관중에 있어서나, 한나라 고조 때의 소하에 있어서나, 소열 때의 제갈에 있어서는 다 이것이었다. 군주는 어진 사람을 만난다면 마땅히 냇가에 배를 얻은 것같이 여기고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도 같이 생각하여 오로지 어진 사람을 써서 모진 자를 배제하고, 일단 어진 자에게 일을 맡기면 그를 의심하지 말고 군주는 보필의 효험을 책할 따름이며, 신하된 자가 충정의 절개를 다한다면 나라의 일은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은 창설할 것이다. 도왕이 오균의 말을 듣고는 왕을 도울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의 옆에 두어 영구한 계획을 수립함에 참례시키었으매 그에게 일을 하고자 하는 뜻이 크게 있었음을 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으랴! 이에 비추어 본다면 후세의 인군은 어진 사람을 다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이면서도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었으랴! 4년에 진봉 백직 등이 등륙을 대파하여 그를 멸망시키고 대장군이 되었다. 진봉의 자는 무지라 하였다. 그는 그의 선조가 진나라에서 봉을 받았으므로 말미암아 이름을 진봉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는 건장하게 큰 키에다 푸른 수염은 창과 같이 뾰죽하여 날카롭고 동량 절충의 재능이 있었던 데다가 성품이 곧아 중심에 표변함이 없었다. 진봉 그는 백직과 마찬가지로 장군직에 보임되어 언제나 충정의 마음을 다하고 있다가, 이 때를 당하여 등륙이 밤을 이용해서 합례성으로 쳐들어오매 두 장군은 몸을 일으키어 무장하고 높이 거산을 펴고 석단 위에 서서 크게 소리를 내어 호령을 하니, 위풍이 진동하여 등륙은 흰수레를 타고 와서 단하에 이르러 함벽하고 항복을 했다. 그는 다시 남아 있는 적의 패주자를 모조리 소탕하고 즉일로 풍류를 불며 개선을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진봉을 이양대장군에 배하고 백직은 승상대장군을 삼았다. 백직은 자를 열지라 하고 위땅의 사람이었다. 성질이 곧고도 견실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 그는 매양 싸움에 이기고서도 공을 무지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가 대수의 풍토가 있다고 일컬었다. 두충, 동백, 산치, 노송, 종려, 소철 등에게 조서를 나려 작을 주었다. 등륙의 난리에 조정의 신하가 많이 포위를 당하였는데, 그 때 두충 등도 또한 적중에 빠져 위협능 당함이 심급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고 굴하지 않으매 적이 감히 해를 가하지 못했었다. 왕은 그들의 지조가 굳음을 가상히 여기고 이이ㅔ 조서를 나려 포상하고 각각 한 계급씩을 올려 주었다. 5년 봄 2월에 동성의 사람들을 봉하여 준바 아우 예를 대유공으로 삼고, 악은 양주공을 삼았으며, 사촌 동생 영은 서호공을 삼고, 질인 방은 파공을 삼고 그 나머지는 다 후백에 봉한 바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의 조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오호라! 나는 외롭고도 약한 몸으로서 선조의 유열을 이어 옛나라를 새로이 일으키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넘어진 고목에 새싹이 돋아 나온 것과 같아 요행히도 과질이 끊임없이 면면함이로다. 이에 나는 봉례를 밝히어 분토를 하노니 각기 봉토가 그 포모를 심고 본손과 지손이 백세에 길이 경사를 많이 누릴지니라." 6년 겨울 10월에 왕이 오 땅에 출유했을 때 경정산에 올라서 되놈에게 저를 불게 하며 진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그것을 들음에 그 풍류 소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돌아가 물에 소쉐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죽어 갔다. 왕비가 어려서부터 좀버러지병의 신병이 있어서 아들을 낳지 못하였기에 오균은 왕의 아우 양주공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으니 이가 곧 동도의 영왕이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두는 바다. 오호라 열왕의 덕은 크고도 아름다웠도다. 왕은 어진 신하를 얻어 천하를 바로잡고 어진 장수를 써서 변방을 다스리어 싸움이 없이도 화 시켰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었으며, 동성을 봉하여 그 은혜를 길이하고 충절의 신하를 포장하여 그 풍성을 높이었으니, 옛날 은주의 치국이라 하더라도 이에 더함이 없었도다. 그러나 왕은 질박하고도 간략하게 나라를 세우자마자 죽어서 간책에 실릴 가언과 선행이 아주 적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당 당나라 명왕은 성은 백이고 이름은 연이었으며 자는 부용에 은거하였었다. 그의 부친의 이르은 함담이라 했고, 처음엔 야야계에 살았다. 모친 하씨는 광채가 찬란한 창포의 꽃이 핀 것을 보고 그것을 입에 집어 넣어 삼키고서 아이를 잉태하여 왕을 낳았다. 왕의 얼굴은 아름다워 마치 천인과도 같았고 탈속적인 의취가 있었으며, 정갈한 것을 생명으로 하면서도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물을 좋아하여 항사아 물 가운데에 있었다. 그러기에 그를 수중 군자 혹은 수진인이라고 불렀다. 하나라가 망하고 난 후 임금이 없을 때 상주의 사람인 두약과 백지 등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매 그는 수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하고 7월을 세수로 삼고 전당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남당이라 불렀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같이 말해 둔다. 도나라는 목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고, 하나라는 토덕으로 왕이 되어 붉은 색을 숭상했으며, 당나라는 수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던 바이다. 그것의 연유는 알 수가 없다. 덕수 원년에 정전의 법을 열고 전폐를 쓰기 시작했다. 이 해 풍백이 그의 임금인 계주백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금이라 하고 서북 땅을 겸병하니 녹림의 적이 또한 이에 복종했다. 왕은 두약을 승상으로 삼았다. 그 조서에는, "그대는 맡은 바를 잘 보살펴서 그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이며 동시에 오로지 이 당나라의 이름을 떨치게 할지니라."고 하였다. 두약은 당의 어진 재상이었던 두여회의 후손이었다. 7월에 왕은 수정궁으로부터 나와 추향전에 행어하여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이 때를 당하여 천하가 다 녹림적의 소굴이 되었거늘 다만 당만은 깊은 개울에 높은 성을 구축하였기에 병폐를 입지 않아 인민은 모두 편안하고 국가가 은부하여졌다. 그리하여 이에 수형의 돈이 많아 거만에 달하고 천택의 어별이 불가 승식이었으며, 아랫 사람들은 실 만들기에 힘쓰고 윗사람들은 조석으로 구슬 헤아림에 힘쓸 따름이었다. 3년에 야야계의 관리 김량이 급한 보고를 올려 말하기를, "적이 있어 야야계를 침입하여 먼저 아압지를 쳤는데 그 적들은 다 사당주를 타고 목란의 삿대를 저으며 부용의 옷을 입고서 채릉곡을 노래불렀으며, 그 모양과 거동, 그리고 복장이 우리 나라 사람과 흡사하였기로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가도 노랫 소리를 듣고서야 그것들이 적인 줄을 알았나이다. 그 노래는, '옆 잎 비단 치마가 한 색인데 부용 붉은 볼이 두 갈래로 피었고나, 아무케나 못 속에 들어가야 보이지 않는 사람 노래 듣자 온 줄 알겠세라.'고 하였나이다. 이리하여 우리 편은 깜짝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이 칼에 맞아 죽고 부상을 당한 것이옵니다." 라고 하자 왕은 크게 놀래고 "우리 나라의 지세는 험악하여 천연의 참호인데 어떻게 날아 넘을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고는 곧 장수 백빈한테 조서를 나리니, 백빈은 관졸 수천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쳤다. 이 때 군졸 중에 이라는 자가 있어 입으로 바람을 낼 수가 있었는 바 이에 큰 풍랑을 일으키어서 적의 배를 몰아붙이고 정신없이 흔들어 젖히니 적은 크게 두려워하고는 배를 끌고 달아났다. 애당초 국가가 국토를 방비하는 준비가 없어 마침내는 적의 환을 치르게 되었더니, 이 때 백빈이 강의 요해의 곳곳에다 질려를 부설하고서 돌아오고 또 마료로 하여 복파장군을 삼아 도적을 방비하니, 이로부터는 남북의 사람들이 감히 강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마료는 마원의 후예로서 옛 선조의 복파장군호를 이어받았다. 도인이 묘법경을 가지고 왕에게로 나가 말하되 "설경을 하면 사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연에 잉태되어 극락세계에 화생하옵니다." 라 하니 왕은 크게 기뻐하고 즉시 수륙 도량의 시설을 하니, 그것에 든 비용이 억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왕은 날마다 좌우의 모든 신하들과 같이 아침 저녁으로 설경만을 하고 나라의 일은 돌보지 않았다. 학사 문조가 청포에 엎드려 충간하기를, "불은 과시 무엇이옵니까? 그는 그릇된 교리와 사특한 말로 세상을 혹되게 하며 인민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옵니다. 제왕이ㅡ 도는 다만 유가의 경만을 지키어야 할 따름이어늘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부체 있는 곳에 불법을 하고 패엽을 옳은 경으로 아시옵나이까? 인생은 마치 나무의 꽃이 자리에 떨어지는 것은 귀한 것이 되나 똥간에 떨어지는 것이라면 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어서 이것은 즉 자연의 이치이거늘 인과설을 어찌 믿어 들을 것이 되오리까?" 라고 했으나 왕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문조는 백빈과 동본 이성의 친족으로 성질이 고결하고 문장이 능난하여 왕직을 도았다. 첩여인 반씨가 제빈보다도 더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어느 때에 왕이 연꽃을 못 위에 늘어놓고 반씨로 하여 그 위를 걷게 하고서 하는 말이, "보보생연화"라 하고 육랑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때에 어느 아첨 잘하는 자가 있어 말하되, "사람들은 육랑을 연꽃 같다고 하나 신은 연꽃이 육랑가 같다고 여기옵니다."라고 하매 왕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둔다. 심하도다. 아첨하는 자의 말이여! 그 말은 실로 사탕의 풀을 씹는 것보다도 달고 그 아첨은 예수한 것보다도 더한 것이니 아아 슬픈 일이로다. 4년에 강리를 상주로 귀양을 보냈다. 강리라는 자는 초나라의 사람으로 자를 채채라고 하였다. 성질이 고결하여 직간으로 왕의 뜻을 거슬리게 하자 공자 가란은 참소를 하여 그를 귀양 보내게 하니 그는 수고의 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소를 지어 스스로를 원망하였다. 5년에 왕은 방술사 두생의 말을 들어 백로를 마시고는 병이 나서 좌우의 신하를 불렀으나 좌우의 신하들도 다 이슬을 마시고 입을 놀리지를 못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라,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만 하하라 소리를 지르고 죽어갔다. 처음 왕이 동리처사인 황화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받지를 않았다. 그 때 금인이 녹림의 군병을 몰고 당을 에워싸기를 여러 달에 성 안의 인민이 다 굶주리어 말라 죽었던 바 두약 백빈 등도 또한 이 난리에 죽었고, 당나라는 겨우 5년 만에 망하고 말앗다. 황화의 자는 금정이라 하고 위인이 속지 않아 태고풍이 있었다. 그는 신세에 도 나라의 임금을 섬긴 것으로 말미암아 율리에 살며 홀로 굳은 절개를 지키고 있어 비록 금인의 난폭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었기에 그는 만적 선생이라 불리었다. 사신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둔다. 삼대의 홍체가 깜짝하는 사이에 있고, 사군의 존몰이 잠깐 사이었던 것으로서, 그것은 다만 동원의 편시와 남가 일몽일 뿐만이 아니라 봄바란이 부는 동산에서 쓸데없이 새가 슬피욺을 듣고 해가 지는데 못가의 대에 올라서 다만 운연이 잠겨 있음을 보는 것과도 같아, 이것은 옛날 중국 은나라 고도의 유허를 노래부른 맥수가와 주 나라 사람이 지은 서리의 시로는 그 탄식할 바를 비유한 것이 되지 못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며 애석한 일이 아니랴! 그리고 또 하왕이 옥매를 찾아서 도를 계승케 하였으니 그 덕이 충성스러울 것이요, 당이 삼각지전을 세운 것은 더욱이나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세상에 만초 모란 부용류가 있는바 이것들도 또한 하 당의 유손인가 한다. 이상의 것을 다 통틀어서 말할진대 즉 다음과 같다고 할 것이다. "천지간에서 인간은 단지 한 가지뿐이로되 꽃에는 천백 종이 있은즉 사람은 진실로 꽃의 수와는 같이 못한 것이다. 하늘은 꽃으로써 춘하추동의 시절을 행하고 사람은 꽃을 가지고 시절을 분간하니 인간이 어찌 꽃이 신용을 지킴과 같으리오! 꽃은 끊임없이 봄바람에 피고 가을이 되어 떨어져도 원망하지를 않으니 인간이 어찌 그와 같이 어질 것이랴? 그리고 또 혹은 뜰 위에 나기도 하고 분토의 가운데 나기도 하지만, 고하의 귀천을 다투지 않고 한가지로 꽃 피고 시드는 것이니 그 공심 역시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즉 꽃에는 지극한 어짊과 지극한 신과 지극한 공평에 또한 많고도 수하여 천성의 바른 것을 얻음이 있는 바다. 무리가 많음에 어찌 나라를 위한다는 것이 있고, 어질고 신 있고 지극히 공평하기가 이 같음에 어찌 임금을 위한다는 것이 있을까보냐? 그러나 무릇 사람은 한 가지 기능과 조금의 재주만 있어도 반드시 일세에 자랑을 하고 백대의 후세에 전하고자 하며 서로 공명을 다투어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꽃은 그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천성의 아름다움이 인간 중의 군자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송 나라의 염계 선생은 뜰 앞에 있는 풀을 매지 않고 하는 말이 '나의 의사도 한가지일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이같이 군자가 이와 한가지가 되고자 원한 것인즉, 그것의 성품이 완전하고도 바른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 문장에 오름을 구구하게 구하고 일에 공 이루기를 힘쓰는 자가 어떻게 그 성품이 완전하고 또한 바를 수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