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음절을 중요시한다. 음절은 소리의 마디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소리’라는 단어는 ‘소’와 ‘리’라는 두 개의 소리 마디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시조를 지을 때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시조의 운율을 위해 음절의 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시조를 지었다. 야은 길재의 시조 ‘오백 년 도읍지를’을 보면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의 음절수를 ‘3,4,3,4,3,4,3,4,3,5,4,3’으로 맞추어 시조의 운율을 살렸다. 특히 길재는 종장의 제1구는 3음절로 맞추어야 한다는 시조의 형식을 지키기 위해 감탄사 ‘아’ 대신에 ‘아’의 옛말인 ‘어즈버’를 사용했다. 그런데 음절의 수를 흔히 글자의 수로 생각하기 쉽지만 음절은 글자가 아닌 소리의 마디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몇 마디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음절의 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즈버’를 자음과 모음의 음소로 나누어 보면 ‘ㅓ, ㅈ, ㅡ, ㅂ, ㅓ’의 5개의 음소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음소별로 발음을 할 때 입이 벌어지는 정도인 ‘개구도(開口度)’가 달라서 모음인 ‘ㅓ, ㅡ, ㅓ’를 발음할 때에는 입이 벌어져 개구도가 크지만 자음인 ‘ㅈ, ㅂ’을 발음할 때에는 입이 다물어져 개구도가 작다. 각 음절에서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가 그 음절의 핵이 되는데, 이는 소리의 마디가 입을 벌리는 횟수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는 곧 모음이므로 모음의 개수가 몇 개이냐에 따라 음절의 개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어즈버’는 모음의 개수가 3개이므로 3음절의 단어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9.22 風文 R 1423
우리말샘 지난주에 국어사전의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 있었다.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이 개통된 것이다. 이 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의 50만 단어에 새로 일상어, 지역어, 전문어 등 50만 단어를 더해 약 100만 어휘를 수록한 방대한 웹 사전이다. 무엇보다 이 사전은 국민 참여형 사전으로서 일반 사용자가 직접 사전의 정보를 추가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른바 한국판 위키피디아 사전인 셈이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실생활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어휘가 폭넓게 수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전에는 ‘꽃할배, 아재개그, 치맥, 심쿵, 금수저, 웃프다, 힐링하다’ 등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단어들이 올라 있다. 독자들도 사전 집필자가 되어 얼마든지 새로운 단어를 올릴 수 있다. 한 가지 개인적인 바람은 이 사전으로부터 표준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것이다. 표준어는 보수적인 면이 강하여 어떤 말이 표준어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근래 새로 표준어가 된 예만 보더라도 ‘뜨락, 내음, 속앓이, 손주’ 등이 표준어 자격을 얻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또 반대로 이미 가치를 잃은 말들이 계속 표준어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게으르다, 게르다, 개으르다, 개르다’를 보면, ‘게으르다’만 주로 쓰이는데도 나머지 세 단어까지 모두 표준어이다. 이런 말들에 비하면, 오히려 새로 생겨나 쓰이는 말들 가운데 더 표준어 자격을 얻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개방형 사전에 오르면 좀 더 어엿한 국어로 대접받고, 좀 더 활발히 표준어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말샘’으로부터 고여 있는 표준어에 새 물결이 일기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9.21 風文 R 1364
명사형어미 ‘동명사’란 동사와 명사의 기능을 겸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는 동사에 ‘-ing’를 붙여 만든다. 국어에서 이와 비슷한 것이 ‘-기’와 ‘-ㅁ/-음’이다. 이들을 ‘명사형어미’라고 한다. “우리는 네가 성공하기를 원한다.”에서 ‘성공하기’는 ‘네가 성공하기’라는 안긴문장의 서술어이면서, 조사 ‘를’이 붙어서 안은문장(전체 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서술어가 되는 것은 동사의 속성이 있어서, 조사가 붙는 것은 명사의 속성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나는 네가 집에 있음을 알고 있다.”에서도 ‘있음’은 안긴문장의 서술어이자 안은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이런 점에서 ‘-기’와 ‘-ㅁ/-음’은 ‘-ing’와 닮았다. 그런데 ‘-ㅁ/-음’을 적을 때에는 언제 ‘-음’을 쓰고, 언제 ‘-ㅁ’을 쓰는지를 잘 알아두어야 한다. “다름, 돌봄, 설렘, 만듦, 베풂”처럼 모음이나 ‘ㄹ’ 받침 뒤에는 ‘-ㅁ’을 쓴다. 그런데 ‘만듦, 베풂’을 ‘만듬, 베품’으로 잘못 적는 경우가 많다. 소리는 [-듬, -품]으로 나지만 적을 때는 ‘ㄹ’을 살려서 겹받침으로 적어야 한다. ‘살다, 알다’의 명사형을 ‘삶, 앎’으로 적는 이치와 같다. “적음, 좋음, 했음, 있음, 없음”처럼 ‘ㄹ’을 제외한 받침 뒤에는 ‘-음’을 쓴다. 그런데 ‘있음, 없음’을 ‘있슴, 없슴’으로 잘못 적는 경우도 잦다. ‘-읍니다, -습니다’를 구분해서 쓰던 것을 1988년에 표준어규정을 개정하면서 ‘-습니다’로 통일하기로 함에 따라 ‘있습니다/있읍니다’도 ‘있습니다’로만 적게 되었는데, ‘있음’도 ‘있슴’으로 바뀐 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애당초 ‘-슴’이라는 어미는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혼란이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09.21 風文 R 1348
한글 창제의 원리 어제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70돌이 되는 한글날이었다. 한글날은 2013년부터 법정 공휴일로 다시 지정돼 한글의 소중함과 우수성을 기리고 있는데, 한글의 우수성은 과학적인 창제 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실제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을 분석해 소리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글자를 찾아내 자음을 창제했다. 먼저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는데, 여기서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획을 더해 ‘ㅋ’을 만들고, 소리가 세짐에 따라 ‘ㄱ’을 겹쳐 ‘ㄲ’을 만들었다. ‘ㄴ’은 혀끝이 윗니 뒤쪽에 붙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는데, 여기서 획을 더해 ‘ㄷ’을 만들고,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ㅌ’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ㄸ’을 만들었으며, ‘ㄷ’에서 혀가 더 구부러지는 모양을 본떠 ‘ㄹ’을 만들었다. 또한 ‘ㅁ’은 소리를 낼 때 마주 붙는 두 입술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에 획을 위로 더해 ‘ㅂ’을,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ㅍ’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ㅃ’을 만들었다. ‘ㅅ’은 아랫니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서 획을 더해 ‘ㅈ’을 만들고,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ㅊ’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ㅆ’과 ‘ㅉ’을 만들었다.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에 소리가 마찰함에 따라 획을 더해 ‘ㅎ’을 만들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분석해 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이 실제 말하는 것에 가장 가깝게 한글을 창제해 후손들에게 남겼고 한글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후손들은 정체불명의 은어, 줄임말, 외국어 등으로 한글을 오염시키고 있으니 자성이 필요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9.20 風文 R 1421
‘한글’이라는 이름 이틀 뒤면 한글날이다. 1443년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은 1926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가 ‘가갸날’을 선포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1928년부터 ‘한글날’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날이 근대에 시작되었듯이 ‘한글’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지도 오래지 않다. 한글 창제 당시 문자의 이름은 ‘훈민정음’이었는데, 그것이 ‘한글’로 불린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이가 누구인지는 주시경, 이종일(독립 운동가이자 국문학자로서 3ㆍ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일인), 최남선 선생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대체로 학계에서는 최남선 선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 기록에 따르면 1910년 광문회의 회의 석상에서 최남선 선생이 ‘한글’ 명칭을 제안하였고, 이를 주시경 선생이 수용함으로써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최남선 선생도 “조선 상식 문답”이라는 책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한글’의 ‘한’은 크다(大)는 의미와 한나라(韓)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10년이면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조선문, 조선 문자와 같은 명칭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해이다. 그래서 국어학자인 임홍빈 선생은 ‘한글’이 대한제국의 멸망을 수용한 이름으로서, 민족의 아픔과 더불어 운명 극복의 의지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한글의 원래 이름 ‘훈민정음’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담겨 있다. 문자가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던 시절, 세종은 백성이 글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어엿비’(가엾게) 여기는 마음에서 새 문자를 만드셨다. 단순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한글’에 담긴 민족정신, ‘훈민정음’에 담긴 인간 존중의 정신이야말로 한글의 또 다른 가치일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9.20 風文 R 1356
‘바’의 띄어쓰기 “평소에 느낀 바를 말해라”에서 ‘바’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쓰고, “위 사람은 품행이 방정한바 이에 상장을 수여함.”에서 ‘-바’는 어미 ‘-ㄴ바’의 일부이므로 붙여 쓴다. 둘을 어떻게 구분할까? 먼저 의존명사, 즉 띄어 쓰는 ‘바’를 알아보자. 의존명사는 앞에 꾸미는 말이 있어야 하며 뒤에 조사가 붙을 수 있다.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밝혀 주십시오”에서 ‘바’의 앞에는 수식어 ‘나아갈’이 있으며 뒤에는 조사 ‘를’이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바’는 의존명사로서 띄어 써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바’는 ‘것, 줄, 경우’ 등과 같은 다른 의존명사들과 의미가 비슷하다. “예절을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것이) 있겠느냐?”, “나는 어찌할 바를(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그렇게 억지를 부릴 바에는(경우에는) 다 그만두자.” 이번에는 어미의 일부, 즉 붙여 쓰는 ‘-바’를 알아보자. 어미는 앞에 오는 어간과 한몸이 되어 한 단어를 이루며 원칙적으로 뒤에 조사가 붙을 수 없다. “네 죄가 큰바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에서 ‘-ㄴ바’는 어간 ‘크-’와 결합하여 한 단어가 되고 뒤에 조사를 붙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ㄴ바’는 어미로서 붙여 써야 한다. 그리고 어미 ‘-ㄴ바’는 앞에 오는 어간의 종류나 시점에 따라 ‘-는바, -은바, -던바’ 등으로 바꿔 쓸 수 있으며, ‘-(으)므로, -(으)니까, -(었)는데’ 등과 같은 다른 어미들로 대체할 수 있다. “진상을 들은바(들으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인부들을 휘몰아 공사 기간 단축을 강요했던바(강요했으므로) 자연히 인부들이 불만을 가지게 됐다.” “서류를 검토해 본바(검토해 봤는데) 몇 가지 미비한 사항이 발견됐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09.19 風文 R 2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