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원룸’의 발음 우리말에는 표기대로 발음하기 곤란한 단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협력’을 표기대로 [협력]으로 발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받침 ‘ㅂ’ 뒤에 오는 ‘ㄹ’은 [ㄴ]으로 발음해 [협녁]으로 발음하는데, 여기서 또 ‘ㄴ’의 영향으로 그 앞의 받침 ‘ㅂ’이 ‘ㄴ’과 같은 비음 계열인 ‘ㅁ’으로 바뀌어 결국 [혐녁]으로 발음하게 된다. ‘막론’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막론→막논→망논’의 과정을 거쳐 [망논]으로 발음한다. ‘신라’ 역시 이를 표기대로 [신라]로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받침 ‘ㄴ’을 뒤에 오는 ‘ㄹ’과 동화시켜 [실라]로 발음한다. ‘인류’를 [일류]로, ‘삼천리’를 [삼철리]로 발음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온라인’과 ‘원룸’도 소리를 동화시켜 [올라인], [월룸]으로 발음하는 것일까? 아니면 ‘on’과 ‘one’의 뜻을 살려 [온나인], [원눔]으로 발음하는 것일까? ‘온라인(on-line)’, ‘원룸(one-room)’은 모두 외래어이기 때문에 표준 발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소리의 동화는 우리 고유의 말에만 적용되는 발음 원칙이기 때문에 이를 ‘온라인’과 ‘원룸’처럼 영어에서 온 말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대신 ‘on’과 ‘one’의 뜻을 살려 [온나인], [원눔]으로 발음하는 것이 단어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9ㆍ11 테러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 중에서 ‘빈 라덴’을 [빌라덴]으로 발음하지 않고 [빈나덴]으로 발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9.23 風文 R 1172
먼지떨이와 신발털이 밖에서 들어오면 신발에 흙이 묻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신발의 흙을 ‘떨고’ 들어가야 할까, ‘털고’ 들어가야 할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떨다’가 맞다. 그런데 우리말은 참 미묘해서, 흙을 떼어 내려면 신발을 치거나 흔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신발을 털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신발을 ‘털어서’ 흙을 ‘떠는’ 것이다. 이와 같이 ‘떨다’와 ‘털다’는 무엇이 대상인지에 따라서 구별해서 써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떨다’는 붙어 있는 것을 쳐서 떼어 내는 것이고, ‘털다’는 붙어 있는 것이 떨어지게 흔들거나 치는 행위이다. 즉 옷에 묻은 먼지, 눈, 재 따위를 ‘떨다’라고 하고, 먼지, 눈, 재 따위가 묻은 옷을 ‘털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먼지떨이’와 ‘신발털이’는 구별된다. ‘먼지떨이’는 벽이나 창틀의 먼지를 ‘떨어’내는 물건이고, 신발털이는 신발을 ‘털어’ 주는 물건이다. 흔히 ‘재떨이’인지, ‘재털이’인지 혼란스러워 하지만, 이제 ‘재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떨다’ ‘털다’가 그리 엄격하게 구분되어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흔히 “머리의 눈 좀 털어라” “바지의 먼지 좀 털어라”처럼 ‘떨다’라고 할 것을 ‘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두 단어의 쓰임을 달리 설명하기도 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견해로는 ‘털다’는 흩어져 날리는 대상에 쓴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옷에 붙은 먼지, 눈, 재 따위는 ‘터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설명은 위 국어사전의 뜻풀이와는 꽤 다르다. 물론 ‘떨다’와 ‘털다’는 사전적 의미에 따라 정확히 구별해서 써야 한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그러한 구별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화자들의 실제 쓰임에 따라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재검토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9.23 風文 R 1359
공부하다, 공부 하다, 공부를 하다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아이’에서 ‘공부하고’는 붙여 써야 한다. ‘어려운 공부 하느라 낑낑대는 아이’에서 ‘공부 하느라’는 띄어 써야 한다. 같은 ‘공부-하다’인데 왜 띄어쓰기가 달라질까. ‘힘들게’는 부사어이고 ‘어려운’은 관형어이기 때문이다. 부사어는 용언(동사, 형용사)을 수식하는 문장성분이다. 따라서 ‘신나게 놀다, 밖으로 나가다, 매우 많다’에서 보듯이 부사어 뒤에는 용언이 나와야 한다. 반면에 관형어는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을 수식하는 문장성분이다. 따라서 ‘신나는 놀이, 우리의 소원, 새 책’에서 보듯이 관형어 뒤에는 체언이 나와야 한다. 이제 ‘어려운 공부 하다’와 같이 띄어 써야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공부’는 체언이지만 ‘공부하다’는 용언이다. 따라서 ‘공부하다’를 붙여 쓰면 관형어 뒤에는 체언이 나와야 한다는 문법 규칙에 어긋나게 된다. ‘공부 하다’와 같이 띄어 씀으로써 ‘어려운’이 ‘공부’만 수식할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려운’이 관형어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용언의 어간에 붙어 문장에서 관형어 구실을 하게 만드는 어미를 ‘관형사형어미’라고 한다. ‘어려운’은 ‘어렵-+-은’으로 분석되는데, 여기서 ‘-은’이 바로 관형사형어미다. 관형어로 만들어 주는 관형사형어미는 시점에 따라서 ‘-ㄴ/-은’(지나간 날/갓잡은 생선), ‘-던’(즐거웠던 시절), ‘-는’(도망치는 사람), ‘-ㄹ/-을’(다가올 통일/먹을 음식) 등이 있다. 사실 ‘공부를 하다’와 같이 쓰면 앞에 무슨 말이 오든 띄어쓰기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힘들게 공부를 하다’에서 ‘힘들게’는 용언 ‘하다’를 수식하고, ‘어려운 공부를 하다’에서 ‘어려운’은 체언 ‘공부’를 수식하기 때문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09.22 風文 R 1167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음절을 중요시한다. 음절은 소리의 마디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소리’라는 단어는 ‘소’와 ‘리’라는 두 개의 소리 마디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시조를 지을 때에도 우리의 선조들은 시조의 운율을 위해 음절의 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시조를 지었다. 야은 길재의 시조 ‘오백 년 도읍지를’을 보면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의 음절수를 ‘3,4,3,4,3,4,3,4,3,5,4,3’으로 맞추어 시조의 운율을 살렸다. 특히 길재는 종장의 제1구는 3음절로 맞추어야 한다는 시조의 형식을 지키기 위해 감탄사 ‘아’ 대신에 ‘아’의 옛말인 ‘어즈버’를 사용했다. 그런데 음절의 수를 흔히 글자의 수로 생각하기 쉽지만 음절은 글자가 아닌 소리의 마디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몇 마디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음절의 수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즈버’를 자음과 모음의 음소로 나누어 보면 ‘ㅓ, ㅈ, ㅡ, ㅂ, ㅓ’의 5개의 음소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음소별로 발음을 할 때 입이 벌어지는 정도인 ‘개구도(開口度)’가 달라서 모음인 ‘ㅓ, ㅡ, ㅓ’를 발음할 때에는 입이 벌어져 개구도가 크지만 자음인 ‘ㅈ, ㅂ’을 발음할 때에는 입이 다물어져 개구도가 작다. 각 음절에서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가 그 음절의 핵이 되는데, 이는 소리의 마디가 입을 벌리는 횟수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개구도가 가장 큰 음소는 곧 모음이므로 모음의 개수가 몇 개이냐에 따라 음절의 개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어즈버’는 모음의 개수가 3개이므로 3음절의 단어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9.22 風文 R 1340
우리말샘 지난주에 국어사전의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 있었다.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이 개통된 것이다. 이 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의 50만 단어에 새로 일상어, 지역어, 전문어 등 50만 단어를 더해 약 100만 어휘를 수록한 방대한 웹 사전이다. 무엇보다 이 사전은 국민 참여형 사전으로서 일반 사용자가 직접 사전의 정보를 추가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른바 한국판 위키피디아 사전인 셈이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실생활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어휘가 폭넓게 수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전에는 ‘꽃할배, 아재개그, 치맥, 심쿵, 금수저, 웃프다, 힐링하다’ 등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단어들이 올라 있다. 독자들도 사전 집필자가 되어 얼마든지 새로운 단어를 올릴 수 있다. 한 가지 개인적인 바람은 이 사전으로부터 표준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것이다. 표준어는 보수적인 면이 강하여 어떤 말이 표준어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근래 새로 표준어가 된 예만 보더라도 ‘뜨락, 내음, 속앓이, 손주’ 등이 표준어 자격을 얻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또 반대로 이미 가치를 잃은 말들이 계속 표준어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게으르다, 게르다, 개으르다, 개르다’를 보면, ‘게으르다’만 주로 쓰이는데도 나머지 세 단어까지 모두 표준어이다. 이런 말들에 비하면, 오히려 새로 생겨나 쓰이는 말들 가운데 더 표준어 자격을 얻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개방형 사전에 오르면 좀 더 어엿한 국어로 대접받고, 좀 더 활발히 표준어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말샘’으로부터 고여 있는 표준어에 새 물결이 일기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9.21 風文 R 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