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첫눈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듯 정적이 깔린 교실에 모깃소리 같은 탄성이 흘렀다. 시험지 뚫어지게 봐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을 누군가의 것이었을 것이다. ‘눈이다!’ 감독 교사는 무심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지만 십대 끄트머리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진짜…’, ‘아…’,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여기저기서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내 것도 섞여 있었다. ‘하필이면’ 대입 시험 치르는 날에 첫눈이 내린 것이다. 시커먼 남학생들이 그러했으니 같은 시각 창밖의 첫눈을 바라본 여학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래전 어느 해 11월24일, 대입 수험생으로 맞은 첫눈의 정경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지난 월요일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그날’ 날리던 눈발과 달리 왕소금처럼 ‘멋대가리 없는’ 눈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하늘은 파랗게 터져 있는데 머리 위 하늘에서는 눈 내리니 ‘여우비’(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첫눈은 첫눈이다. ‘첫 눈’이 아니라 첫눈. 그것도 ‘올 가을’ 아닌 올가을에 내린 첫눈이다. ‘올해의 준말’인 ‘올’이 붙은 ‘올가을’, ‘맨 처음의’ 뜻인 ‘첫’이 붙은 ‘첫눈’은 합성어로 붙여 쓴다. 띄어쓰기 한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대수일까. 그렇다, 소릿값이 달라진다. 두 낱말의 발음은 [올가을]과 [천눈:]이 아닌 [올까을]과 [천눈]이다. ‘올봄’, ‘올여름’, ‘올겨울’의 소릿값은 [올뽐], [올려름], [올껴울]이다. ‘봄눈’, ‘함박눈’, ‘싸락눈’, ‘소나기눈’(폭설), ‘숫눈’(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의 ‘-눈’은 장음 [눈:]이 아닌 단음으로 발음한다. ‘눈’(雪)의 본래 소릿값은 장음이지만 ‘단어의 첫음절에서만 긴소리가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표준발음법 제6항) ‘첫눈’의 ‘눈’이 첫음절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짧게 [천눈]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 김치 새벽 방송을 마친 아나운서 몇이 식당에 둘러앉았다. 날마다 먹는 아침밥이지만 그날 식탁은 여느 날과 달랐다. 가지런히 펼쳐놓은 식판들 가운데 오도카니 놓여 있는 케이크 하나. 영문 모른 채 자리 잡은 동료가 머리 갸웃하자 새내기 아나운서가 빙긋 웃는다. 꼭두새벽 출근길에 폭죽과 초까지 챙겨 온 자신을 뿌듯해하는 듯했다. 옆에 있던 후배가 촛불 켜는 사이 앞자리에 있던 이는 폭죽을 터뜨렸다. 휑뎅그렁하던 구내식당이 해사한 웃음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뜻하지 않게 받은 과분한 생일상이었다. ‘생일상’의 백미는 적당히 익어 아삭한 김치였다. ‘리어카 빌려 손수 싣고 온 김치 50포기로 김장한 날 밤, 쌈김치 배불리 먹고 난 뒤 해산했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더 맛있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거기에, 김장철 김치라 더 맛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김치의 갈래는 여럿이고 종류는 정확히 몇 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다. 동치미·나박김치 같은 물김치가 있는가 하면 ‘봄에 새로 난 배추나 무 따위로 담근’ 햇김치, ‘봄철까지 먹을 수 있도록 젓갈을 넣지 아니하고 담근’ 늦김치처럼 때의 뜻을 담아 부르는 것이 있다. 배추·무·오이·파·부추·고들빼기는 기본이고 우거지·돌나물·두릅·고수에 이르기까지 김치 담그는 재료 또한 참으로 다양하다. 그릇도 다르다. 간장은 종지에 담듯이 김치는 보시기에 담는다. 오이 허리를 서너 갈래로 갈라 온갖 재료로 양념한 소를 박아 만들면 오이소박이, 무 따위를 나박나박 썰어 담그면 나박김치, 깍둑썰어 만들면 깍두기다. 덤불김치는 알뜰 살림의 본보기다. 무의 잎과 줄기, 또는 배추의 지스러기(골라내거나 잘라 내고 남은 나머지)로 담그기 때문이다. ‘알타리(무)김치’는 총각(무)김치의 잘못이고, ‘열무냉면’에서 보듯이 국물김치로 많이 담그는 열무는 ‘어린 무’다. 남자는 있는데 여자가 없는 김치도 있다. 무나 배추 한 가지로 담근 김치를 홀아비김치라 이르는데 ‘과부김치’는 없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김장철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남편의 입술 쪽지 - 김옥자 "따르릉!" 자명종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리고 부엌으로 가서 쌀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여는데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종이에 쓰인 글을 읽기 위해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을 부볐다. <사랑하는 옥이! 가난한 내게 시집와서 고생이 많구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오. 결혼 전에 당신을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을 꼭 지키리다. 그리고 번거롭지만 내일부터 도시락을 좀 싸주시오. 식당 밥을 도저히 먹기가 싫소.> 아니, 진작 말을 하지! 반찬은 없지만 갓 시집온 새댁의 음식 솜씨가 엉망이라는 소리는 듣기가 싫었다. 나는 당장 가게에 달려가 계란과 멸치를 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내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계란찜과 멸치볶음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멸치를 손질한 다음 갖은양념에다 붉은 고추, 풋고추, 깨소금을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설탕을 넣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처음 싸보는 도시락인데 남편은 물론 남편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 쌀집으로 달려가서 팥을 샀다. 언젠가 책에서 본 것을 나도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시간은 가는데 팥이 빨리 익지를 않았다. 다행히 그이 친구가 선물한 가스 레인지 덕택에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난 네모난 도시락에 흰 쌀밥을 담고 빨간 팥으로 하트 모양을 새겼다. 그래도 허전한 느낌. 그때 계란찜에 넣었던 깨가 눈에 띄었다. 난 까만 깨로 빨간 하트 안에 작고 까만 하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어. 그의 사랑을 훔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던 날, 하루가 지리하도록 길게만 느껴졌다. "띵동 띵동!" 힘차게 울리는 벨 소리를 듣고 뛰어나갔다. 감격한 모습의 그를 기대하며 달려나간 내게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얼굴로 도시락 가방을 내 손에 넘겨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간 섭섭하고도 분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후 방을 들여다보니 잠이 들었는지 남편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까짓 도시락 한 번 싸준 게 뭐 그리 대단하다구'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빈 도시락을 꺼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쪽지를 폈다. 쪽지를 펴는 순간 웬 입술 자국이? 쪽지에는 빨간색 입술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옆에는 눈에 낯익은 남편의 글씨. <나의 사랑 옥이에게 보낸다.> 그 순간 벅차 오르는 감동에 난 소리 내어 엉엉 울었고, 놀란 남편이 잠에서 깨어 달려나왔다. 남편은 덜 지워진 입술의 루주 자국을 문지르며 쑥스럽게 웃었다. "여보, 고마워. 난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든지 덕분에 술 사고 저녁 사고..." 지금도 빨간 루주를 사와 화장실에서 종이에다 입술 자국을 찍고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면 웃음과 눈물이 한꺼번에 난다. 도시락을 다섯 개씩이나 싸는 요즘, 깜빡하고 큰애한테 빈 도시락을 넣어서 까마귀 고기라는 별명이 붙은 나에게 그이는 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할까? (미용실 원장)
Board 삶 속 글 2020.05.19 風文 R 1317
되갚음 어느 날 해거름 무렵 한 아나운서가 퇴근했다. ‘좋은 데 가는 모양?’이라는 의례적인 인사에 ‘남이사’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떠났지만 아나운서 몇의 설왕설래는 이어졌다. 빈자리 늘어가는 사무실을 채운 대화는 대충 이랬다. “남이사?” “그러게, (방송에) 써도 되나?” “(인터넷 검색 뒤) 사전에 있네. ‘남이야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뜻.” “사전에 나오면 방송할 때 써도 되겠다.” “어떤 사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네. 거기 없으면….” “찾았다! ‘남이사’는 경상도 사투리. ‘내사’와 같은 뜻인데 (사투리 억양으로) 내사~ 남이사~ 그럴듯하지?” 몇 해 전의 일이다. 지난주 점심 무렵에도 비슷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대갚음’은 맞지만 ‘대갚다’와 ‘되갚음(되갚다)’은 틀린 표현”이라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정보가 단초가 되었다. 이 가운데 ‘대갚음’만 표제어로 올라 있으니 앞의 정보는 그럴듯해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 같은 사전은 ‘분패’의 뜻풀이 뒤에 ‘전번 시합에서의 분패를 되갚아야 한다’는 예문을 들었다. 얼핏 보면 앞뒤가 안 맞는 정보다. 이를 두고 국립국어원은 “‘되갚다’는 ‘되+갚다’의 구성으로, 일부 동사 앞에 붙어 ‘도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되-’가 붙은 꼴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사전에는 접사가 붙은 말을 모두 등재하기는 어렵기에 접사를 먼저 표제어로 올리고, 접사가 붙은 몇몇의 단어들을 표제어로 삼아 등재하고 있다”고 정리한다.(‘온라인 가나다’) '남이사’처럼 인터넷 ‘오픈’ 국어사전에는 있고 ‘진짜’ 국어사전에는 없는 게 있다. ‘되갚음’처럼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으니 바르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 또한 무리다.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반드시 틀린 표현은 아니라는 얘기다. 인터넷 정보 과잉은 말글살이 세상에도 해당된다. 중요한 것은 신뢰할 만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안목인 것이다. ……………………………………………………………………………………………………………… 윤석열 국회 청문회에서 불거진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수사 문제’로 논란의 중심이 된 ‘윤석열’ 여주지청장과 관련한 문의가 있었다. ‘중징계 대상’, ‘국회 청문회 공방’ 따위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인데 이름의 소릿값은 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니 어찌된 일인가”였다. 신문이야 활자로 ‘찍어 내면’ 그만이지만, ‘소리 내야’ 하는 방송은 따져야 할 게 또 있는 것이다. 뉴스 여러 꼭지를 찾아 들어보니 얘깃거리가 될 만했다. 누구는 [윤성녈]이고 누구는 [윤서결]. 방송사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방송에서 달리 발음할 때도 있었다. 사람 이름의 발음은 쉽고도 어려운 문제다. 먼저, 한자 이름을 밝혀야 바른 소릿값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표기는 ‘석열’로 했지만 한자가 ‘렬’(烈, 洌…)이면 ‘석렬’로 보고 읽어야 한다. ‘격렬[경녈], 직렬[징녈]’처럼 [성녈]이 되는 것이다. 여주지청장 이름은 ‘윤석열(-錫悅)’이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경우 ‘(문)법’에 바탕을 두고 답하면 [윤서결]이 맞다. “이름 ‘석열’은 ‘ㄴ’음 첨가가 일어날 환경이 아니므로 [윤서결]로 발음하는 것이 적절하다”(‘온라인 가나다’)는 국립국어원의 의견을 따르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제, 어려운 문제가 남았다. ‘법’이 만능은 아니기에, 한 자 한 자가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의 한자(漢字)를 ‘독립 단위’로 보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석+열’은 ‘한자어 받침 뒤에 ㄴ을 첨가해 발음’(표준어 규정 29항)하고 ‘받침 ㄱ은 ㄴ, ㅁ 앞에서 [ㅇ]으로 발음’(같은 규정 18항)되어 [성녈]이 된다. 어느 잣대를 들이대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끝? 아니다. ‘법’과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 있다. 당사자가 바라는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한자의 뜻대로 법관을 거친 유력 정치인 ‘우(祐, 도울)+려(呂, 법·음률)’의 이름을 ‘-우여’로 쓰고 읽는 것처럼 말이다.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보리밥 도시락 - 안호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늘 이른 새벽이면 큰 가마솥에 보리밥을 앉히고 그 위에 흰쌀이 섞이지 않도록 조금 얹어서 밥을 하셨다. 그 밥으로 어머니는 삼남매의 도시락을 싸서 부뚜막에 단정히 올려 놓고 새벽 시장에 과일을 팔러 가셨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바쁘셨는지 도시락 뚜껑을 미처 닫아 놓지 않고 나가셨다. 세 개의 도시락을 보니 오빠 것은 대학생이라고 흰 쌀밥이고, 여동생 것은 수줍음 많이 탄다고 그랬는지 약간 쌀밥이고, 내 도시락은 온통 시커먼 보리밥에 쌀알이 몇 개 보일 정도였다. 나는 무척 서운하고 속상했다. 같은 반 학생들의 웃음 섞인 눈빛이 날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난 도시락을 잊고 안 가져간 것처럼 예쁘게 손수건에 싸서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촉촉이 물이 올라 미끈거리는 오월의 논두렁을 정신없이 달려 학교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특유의 넉살로 친구들과 점심을 나눠 먹었다. 오후 수업이 시작되려면 10여 분 정도 있어야 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너희 어머니가 오셨다고 전해 주었다. 나가 보니 키 작은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서 계셨다. "도시락을 왜 빼놓고 갔니? 배가 얼마나 고프니?" 어머니는 도시락을 건네주시며 살짝 말씀하셨다. "너 창피할까 봐 과일 함지박은 수위실 옆에 감춰 놓고 왔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황급히 떠나가셨다. 조그맣게 쪽찌어진 어머니의 뒷머리를 보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 오르는 뜨거운 어떤 것을 느꼈다. 오후 첫 시간 수업을 빼먹고 난 교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촉촉이 젓은 흙먼지 위에 가느다란 망초 대가 파랗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풀과 얘기를 했다. 난 아주 나쁜 계집애라고. 어머니의 사랑을 배신한 벌이라 생각하며 나는 보리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머니도 내가 왜 도시락을 안 가져갔는지 아시면서 짐짓 모른 척해 주셨을 것이다. 훗날 난 그 도시락 통을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 여드름이 퐁퐁 솟은 하얀 양은 도시락을 꺼내 볼 때마다 과일 장수를 하며 자식을 키워 내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부)
Board 삶 속 글 2020.05.18 風文 R 1392
빛깔 이름 오감이라는 게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나이 들수록 무뎌지는 게 감각이라는 것을 알기에 잘 보고 듣고 맛볼 수 있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여기며 살아간다. 휘황한 조명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공연장에서, 살아 있는 소리가 찰랑대며 휘감아 도는 음악회장에서 더욱 느낄 수 있는 감사함이다. 가림막 걷힌 숭례문을 바라볼 때도 그랬다. 먼발치에서 보면 용마루의 웅장함이,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자연스러운 돌벽의 질박함과 처마 끝 단청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그 아름답던 단청이 지금은 문제투성이가 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단청’(丹靑)은 옛날식 집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빛깔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린 그림이다.(표준국어대사전) 단청은 안료를 만드는 광물질인 ‘단사’와 ‘청확’을 붙여 이르는 말로 ‘단확’, ‘단벽’, ‘단록’이라고도 한다.(브리태니커) 단청에는 글자에서처럼 붉음(丹)과 푸름(靑)만 있는 게 아니다. 파랑(동), 하양(서), 빨강(남), 검정(북), 노랑(중앙)인 ‘오방색’을 바탕으로 다양한 빛깔을 담고 있다. 단청의 기능은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옹이를 가리고 해충과 부식을 막아 목재의 단점을 보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 숭례문 단청 작업에는 일본산 안료 11종이 쓰였다고 한다. 군청(남색), 삼청(하늘빛과 같은 푸른빛), 양록(진한 초록), 뇌록(잿빛을 띤 녹색), 주홍(붉은빛 띤 주황), 장단(주홍보다 약간 밝은 빛, 광명단), 황(황토색), 하엽(초록색), 연백(흰색), 호분(흰색), 먹물(검정)이다. 괄호 안 풀이는 따로 찾아 넣은 것이다. 색이 아닌 안료 이름이기는 하지만 한자어 이름이 학창 시절에 본 ‘먼셀 표색계’ 기호처럼 낯설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통 빛깔 어휘 231개를 모아 90개로 정리해 이름과 번호를 매긴 ‘한국 전통표준색명표’는 그래서 의미 있다. 치자색, 분홍색처럼 쉬운 말이 더 많았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 염지 집게손가락, 바닷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염전에 만든 못, 염분이 스며 있는 땅, 불경을 달리 이르는 말, 여러 가지 색깔을 물들인 종이, 손가락을 솥 속에 넣어 국물의 맛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물건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짐을 이르는 말, 번뇌를 태워 없애 지혜가 더욱 성하는 단계인 십지의 넷째 단계, 겉면이 매끈매끈하며 윤이 나는 내수성 종이, 자세히 잘 앎, ‘부추’의 함경도 방언. 이렇듯 여러 뜻으로 쓰이는 이것은 ‘부추’의 뜻일 때만 토박이말이고 나머지는 소금(鹽), 염색(染), 곱다(艶), 생각(念) 따위의 한자가 붙은 낱말 ‘염지’다.(표준국어대사전) ‘염지’의 뜻풀이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김치무리 담그기’를 이것이라 했고(동국이상국집), ‘봉선화로 손톱 물들이는 풍속’의 한자어를 ‘염지’라 하기도 한다.(한국세시풍속사전) 그런가 하면, 원뜻은 ‘소금절이’이지만 ‘훈제품 따위를 가공할 때 향신료, 조미료 등을 첨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일본어 ‘시오즈케’·에서 온 것이다. 40~50대 주부 중에 이 뜻의 ‘염지’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인터넷에서 ‘염지’를 검색해보니 ‘염지 닭’, ‘치킨 염지’, ‘닭가슴살 염지’가 연관검색어로 제시된다. 최근 누리꾼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비어치킨+염지’는 8만건이 넘는다.(구글) ‘비어치킨’은 맥주 캔이나 맥주가 담긴 전용 조리 용기를 닭 뱃속에 찔러 넣고 구워 만드는 음식이다. 증발한 맥주가 닭고기에 배게 하기 위해서다. ‘염지’는 팍팍한 고깃살을 부드럽게,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캔 맥주를 이용한 ‘비어치킨’에서 인체 유해 물질 검출”을 다룬 기사를 접한 뒤 알게 된 ‘염지’. 언중에게 낯선 용어인 이 말 대신 쓸 표현을 찾아보니 그럴듯한 게 있었다. ‘밑간’(음식을 만들기 전에 재료에 미리 해 놓는 간)이나 ‘재다’(음식을 양념 따위로 맛이 들도록 무치거나 발라 두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