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산 너머로 가는 길 - 유행두 어머니, 당신을 불러 본 지도 벌써 12년이나 지났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육남매를 귀까지 어두운,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맡기신 채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 버리셨지요. 불과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로. 하지만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신 어머니의 모습은 할머니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살투성이였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했기에 언제나 학교 공납금을 꼴찌로 내는 학생은 저였고, 여름 방학을 열흘 앞둔 제헌절 날 저는 어머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긴 편지를 남기고 옷가지를 챙겨 가출을 하고 말았지요. 곧 발각돼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제게 어머니께선 조용히 왜 학교에 안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제 입에서는 돈 얘기가 줄줄 나와 버렸지요. 어머니의 쓰린 마음을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한 채. 그때 어머니께선 눈물을 훔치시며 보리 매상한 돈으로 학교 공납금도 실습비도 다 주신다고 하셨지만 전 고집을 부렸지요. 일주일 동안을 10리 길 학교 앞까지 가방을 들어 주시며 저를 달래고 또 달래고...... 방학을 하루 앞둔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 당신께선 마루에 누워 계셨습니다. 보리 매상을 했더니 피곤하다며 제게 머리 비듬을 죽여 달라 하셨지요. 싫다고 짜증 부리는 제게 어머니께서는 두 번 다시 이런 부탁하지 않겠다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달라고 그러셨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어머니의 비듬이 더러워 투덜대며 성의 없이 비듬을 죽이고서는 저녁밥을 먹고 교회당으로 공부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왠지 집에 오기가 싫어 친구 집에서 시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남아 있는데 누가 절 찾아왔더군요. 우리 옆집에 사는 한 살 위인 오빠였습니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일부러 산을 넘어 찾아온 것이 이상해 저는 서둘러 따라 나섰습니다. 친구 집을 나서며 엄마가 많이 아프냐는 저의 물음에 옆집 오빠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골목에 들어서자 우리 집 마당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어머니는 꼼짝도 않고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웃 동네에서 오신 약국 사람은 뇌출혈이라면서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 근심거리가 있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에 그런 일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갓집으로 뛰어가 외삼촌과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옆집 오빠에게서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 염을 준비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의 때묻은 지갑 속에는 제 공납금이 시커먼 고무줄에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지난 장날 외숙모 몰래 외할머니께서 주신 쌀 포대는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고, 몇 번 입지도 않은 좋은 옷들이 옷장 속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상여가 떠나갈 때 언니들은 어머니의 상여를 끌어안고 목이 쉬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나 전 얼마 울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상여를 에워싼 찬송가 가사처럼 어머니는 며칠 후 꼭 살아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일부러 죽은 척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빨래를 널고 계시는 어머니를 그려 보기도 하고 마루를 닦고 계시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습니다. 가을 추수 때 어머니께서 뿌려 놓으신 곡식들이 얼마나 풍성히 열매 맺었는지, 일요일마다 언니들이 그 곡식들을 거두러 시골로 내려왔지만 어머니께서 혼자 하셨던 그 많은 곡식들을 다 거두지도 못하고 겨울이 왔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혼자 산속에 모셔 둔 채 우리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며 절대 내 아이들에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돈을 쪼개 쓸 때면 자식들에게 돈이 없어 사주고 싶은 걸 사주지 못하신 어머니의 쓰린 마음을 십 분의 일쯤은 알 것 같습니다. (주부)
Board 삶 속 글 2020.05.15 風文 R 1059
선정-지정 대학별 수시모집 원서접수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대학 입시 전형이 문을 연 셈이다. 교육부는 이에 앞서 지원 대학 선택에 영향을 줄 자료를 발표했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대비하고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대학구조개혁위원회의 평가 결과 등을 공개한 것이다. 부실대학은 구조조정 대상이라는 의견에 맞서 일부 대학과 학생들의 반발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경쟁만을 부추기는 교육부의 줄 세우기식 대학 평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 관련 소식을 다룬 라디오 뉴스를 했다. 첫머리에 나온 ‘35개 대학을 정부 재정지원 제한대학으로 선정’ 표현이 눈에 띄었다. ‘하위 15% 사립대를…선정하고’, ‘경영부실대학은 11개교가 선정’처럼 ‘선정’이 거듭 나왔다. ㄷ일보, ㅈ일보, ㅇ뉴스 등도 같은 쓰임의 ‘선정’을 사용했다. ㅎ신문, ㅅ일보, ㅅ신문 등은 ‘선정’ 대신 ‘지정’이라 표현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보도자료를 찾아보았다. ‘…학자금대출제한대학 및 경영부실대학 지정’을 제목으로 뽑은 자료 첫 장에는 ‘지정’이 거푸 등장했다. 보도자료 본문 9쪽을 뜯어보니 ‘지정’이 24차례, ‘선정’이 12차례 나왔다. 문맥에 따라 두 낱말을 가려 쓴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검색 결과는 461건(지정), 336건(선정)이었다.(구글 검색) ‘선정’은 ‘여럿 가운데 어떤 것을 가려서 뽑음’이고 ‘지정’은 ‘행정 관청이나 단체가 필요에 따라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정을 조사한 다음 어떤 것에 특별한 자격을 줌’이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고르는 것’과 ‘가리켜 정하는 것’의 차이다. 한자 ‘선’(選-)과 ‘지’(指-)의 뜻에 주목해 보면 그렇다. ‘선정’에는 선발, 선택, 선출, 선호, 선곡처럼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느낌이 배어 있다. ‘하위 15%에 선정’ 같은 대목은 ‘-포함’으로 하는 게 낫다. 그날 라디오 뉴스 원고의 ‘선정’은 ‘지정’으로 다듬어 방송했다. 아나운서는 방송의 최종 교열자 노릇도 한다. ……………………………………………………………………………………………………………… 얼룩빼기 황소 한가위가 코앞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신경 쓰이는 선물이다. 추석 인기 선물이 예년과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봄철 일조량 부족과 긴 장마 탓에 과일 같은 신선식품은 지난해만 못하고 일본 방사능 유출 영향으로 수산물을 찾는 발길이 작년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게 한우선물세트이다. 한 대형마트의 한우세트 판매는 전년에 비해 80퍼센트 늘었다고 한다. 어느 식당 차림표에서 ‘얼룩배기 황소 된장찌개’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 것은 이 소식을 들은 뒤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룩배기’와 ‘얼룩백이’는 얼룩빼기의 잘못이다. ‘-빼기’는 ‘그런 특성이 있는 사람이나 물건’ 또는 ‘비하의 뜻’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곱빼기, 밥빼기(동생이 생긴 뒤에 샘내느라고 밥을 많이 먹는 아이), 코빼기(‘코’를 속되게 이르는 말), 악착빼기(몹시 악착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처럼 쓰인다. 얼룩빼기는 ‘겉이 얼룩얼룩한 동물이나 물건’이니 얼룩빼기 황소는 얼룩소의 하나이다. ‘얼룩 황소’가 왠지 이상하게 들린다면, 황소를 털 빛깔이 누런 누렁소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소는 큰 수소이다. 황소에는 얼룩빼기도 있고 검은 것도 있는 것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빼기 황소’, 동요로 널리 알려진 박목월의 시 ‘얼룩송아지’에 등장하는 ‘얼룩소’는 어떤 모습일까. 바둑이처럼 생긴 젖소? 아니다. ‘향수’는 1927년에 발표되었고 ‘얼룩송아지’는 1948년 국정 음악교과서에 처음 수록되었다. 이 땅에 젖소가 들어온 때는 1902년이지만 얼룩무늬의 홀스타인 종은 1962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최신축산경영학>) 시기를 따져보면 ‘얼룩빼기 황소’, ‘얼룩소’는 온몸에 칡덩굴 같은 어룽어룽한 무늬가 있는 ‘칡소’이다. 엊그제 ‘전통 칡소 고기 품질 탁월’이라는 ㅎ대학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우선물세트 인기에 칡소도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가슴속 빛을 꺼낸 어머니 - 정수연 지난해 10월 17일 오후 두 시,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한국 장애인 부모 협회가 마련한 제8회 전국 장애인 부모 대회가 열렸다. 성치 않은 자식을 두었기에 늘 가슴 저리지만 진한 교감이 오가는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 계속된 이날 행사의 꽃은 역시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이었다. 긴장 속에 드디어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과천에 사는 김혜자 씨(53세, 과천시 과천동 514)가 바로 그이였다. 평소에는 웃음이 가실 날이 없을 정도로 쾌활한 그녀였지만 이날만큼은 웃음 대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되는 앞 못 보는 아들들을 키워 온 그 세월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김씨가 장애인의 어머니가 된 건 둘째 아들인 성재(22세)군을 낳고부터다.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 큰딸 효정과 큰아들 성찬을 낳아 기를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큰 고통이 눈앞에 다가설 줄 짐작도 못했었다. 시련은 1971년 둘째 아들 성재가 태어날 때부터 서서히 그 흉칙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재를 낳았을 때 김씨의 소망은 잦은 병치레로 애간장을 태우던 큰아들과는 달리 좀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성재는 태어난 지 한 달 후부터 사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갓난아기에게 가끔 있는 일이라 처음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 일어났다. 백일이 지나고 나서 눈앞에 장난감을 갖다 줘도 아이는 눈동자 한 번 굴리지 못하고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럭 겁이 난 김씨는 아이를 들쳐 업고 서울로 달려와 전문 안과를 찾아갔다. 아이를 진찰하고 나오는 의사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의사가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재 상태로 보아 자라더라도 앞을 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선천성 시력 장애인 것 같습니다." 고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이 아이가 평생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섰다 해도 절대로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김씨는 틈만 나면 성재를 업고 전국의 유명 안과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눈물을 쏟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마음을 수습했다. 강한 어머니가 되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불행이 연이어 일어나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성재가 세 살 때 태어난 셋째 아들 성기가 성재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전국의 유명한 안과를 이 잡듯 찾아 다녔다. 집안에 비슷한 질병을 앓은 사람도 없고, 아이를 가졌을 때 음식을 잘못 먹은 적도 없는데 둘씩이나 같은 병에 걸릴 리가 없다고 위로하면서...... 그러나 어딜 가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김씨는 스스로 두 아이의 눈과 손발이 되고자 독하게 마음먹었다. 성재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어도 그녀는 선뜻 성재를 유치원에 보낼 수가 없었다. 앞이 안 보이는 아이를 보내면 다른 엄마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집을 유치원으로 만들고, 자기가 직접 유치원 선생이 되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바람소리며 물소리, 새소리 등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곧잘 짜증을 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앞이 안 보여 답답하면 제 성질을 못이기고 울부짖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도 놀다 보면 으레 상처나고 피도 나게 마련이지만, 그녀는 아이들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그것이 앞을 못 봐 그러는 것 같아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1978년,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그녀는 성재를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생활은 집이 있는 과천과 서울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것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과천이 개발되기 전이라 서울에 한 번 오려면 버스를 서너 번씩 갈아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단 하루도 결석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고, 매사를 좋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딱 한 번 사람들을 원망해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집안에 일이 있어 아이들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추질 못했다. 수업이 한참 전에 끝났는지 학교가 조용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평소에 다니던 길을 이리저리 헤맸지만 두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저희들끼리 택시 한 번 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데......' 애간장을 태우며 이리저리 낯선 골목길을 헤매는데 복잡한 길 저편에 낯익은 두 얼굴이 보였다. 두 형제는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위로도 하면서 더듬더듬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삐 걷는 사람들에게 어깨도 부딪치기도 하고 패인 곳에 발을 헛딛기도 하면서...... 멀리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세상에 자기들만 사는 것인양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 사람들을 원망했다.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을 둘씩 키우는 일은 자신을 모두 버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읽어 줘야 하고, 아이들이 집 안에 있을 땐 함부로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다. 집안 살림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다가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한 번도 자릴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누워 버리면 그날로 당장 아이들이 학교에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온몸이 불덩이 같아도 김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에 오르곤 했다. 한 번은 그런 엄마를 보고 성기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담에 커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 한 마디가 너무 고맙고 대견스러워, 그녀는 아이 둘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후 그녀의 마음속엔 좀더 확실히 그 모든 것을 인내하고도 남을 기운이 생겼다. 두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능력을 발휘하고 제 몫을 다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내겠다는 생각, 그 다짐이 시련을 이기게 해준 것이다. 그녀의 그런 피땀 어린 노력과 사랑 탓일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재는 정상인도 가기 어려운 대학(단국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지금은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다. 또 지난 1991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오버블록 맹인학교 초청으로 1년 연수를 다녀왔다. 공부보다는 피아노를 좋아했던 성기는 고생한 부모님에게 돈을 벌어 효도하겠다며, 안마원을 열 계획에 요즘 마냥 분주하다. 두 아들을 보고 있으면 요즘은 김혜자 씨는 가슴이 아리다. 이제까지의 삶이 그래 왔듯이 두 아들의 삶이 앞으로도 편하지 않을 거란 예감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인내와 노력으로 안 풀리는 건 없다고 그녀는 믿는다. 고통에 꺾이지 않는 그녀의 삶, 그래서인지 김씨 부부가 운영하는 과천 주암 낚시터의 환한 봄 햇살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자유기고가)
Board 삶 속 글 2020.05.14 風文 R 1247
- 분 ‘공장 얘기’라는 게 있다. 직장인들이 제 일터를 ‘공장’이라 부르며 회사 관련 화제를 주고받는 일을 두고 이르는 표현이다. 세트 디자이너, 카메라 감독, 편집 감독, 피디, 기자 등 다양한 직종이 모인 방송사의 ‘공장 얘기’는 직종만큼이나 다양하다. 아나운서들의 ‘공장 얘기’에 빠지지 않는 게 우리말이다. 대개 발음이나 어휘를 두고 갑론을박하지만 요즘에는 존대 표현이 도마에 오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엊그제 동료 아나운서 둘이 나눈 ‘공장 얘기’를 봐도 그렇다. “‘팬분’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분’을 남발하지 말라.”(10년차 아나운서, 30대 중반) “‘팬분’이 뭐가 이상한가. 팬을 높이려는 건데….”(새내기 아나운서, 20대 중반) 누구 얘기가 옳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는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분16’의 뜻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앞의 명사에 높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를 제시한다. 사전 뜻풀이를 놓고 보면 ‘팬분’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분’을 남발하지 말라” 한 지적 또한 일리 있다. 아무 데나 ‘-분’을 붙이는 것이 30대 이상 대부분에게는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공대법이 발달한 우리말에는 다양한 높임말이 있다. ‘친구’와 ‘형제’처럼 높임말이 따로 없는 경우에 한해 ‘(아버지) 친구분’, ‘(선생님) 형제분’처럼 ‘-분’을 붙여 썼다. 이렇듯 제한적으로 쓰였던 ‘-분’을 여기저기 붙이다 보니 ‘손님분’처럼 우스꽝스러운 표현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런 언어 현상을 어찌 생각하는지 국어학자와 방송 관계자들에게 물었다. 답은 한결같았다. 언어 직관에 거슬리기 때문에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언중 대부분을 불편하게 하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 그래서 제시하는 ‘진짜 정답’은 “(방송말을 비롯한 공공언어에서는) ‘-분’의 남용을 지양해야 한다”이다. ‘-분’을 들어내고 높임 조사인 ‘께’를 쓰는 것도 한 방법이다. ‘팬분이 준 선물’ 대신 ‘팬께서 주신 선물’처럼 말이다. ……………………………………………………………………………………………………………… 카울 지난주 우리말 관련 회의에 두 차례 참석했다. ‘정부·언론 외래어심의 공동위원회’와 외래어(외국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려 머리 맞대는 ‘말다듬기 위원회’다. 하나는 주한 미 해군 사령관 이름 Franchetti 표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는 모임이고, 하나는 옷가게 등에서 쓰는 용어인 ‘시즌오프’(season off)를 알기 쉬운 말로 다듬는 자리다. 회의 결과는 ‘프란체티’, ‘계절마감’이었다. 한 달마다 또는 한 달 걸러 여는 정례 회의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나섰다. ‘물 새는 자동차’ 기사를 본 뒤였기 때문이다. ‘카울 사이드부 매칭부 실러 도포 불량’, ‘루프패널 매칭부-’, ‘윈드실드 글라스 실런트-’, ‘리어램프 하우징패널 매칭부 실러-’, ‘테일게이트 웨더스트립 조립 불량’…. 자동차회사 내부 문서를 인용한 기사의 표현이다. ‘도포(조립) 불량’을 빼면 죄다 영어를 한글로 표기했다. 후배 아나운서와 그 회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용어 풀이를 청했다. ‘엔진 덮개와 앞날개 접합부 밀봉재 도포 불량’, ‘천장판 접합부-’, ‘앞유리 밀폐제-’, ‘미등 감싸개 접합부-’, ‘꼬리문 틈새막이-’…. 자동차 구조에 생꾼인 여자 아나운서가 한참을 궁리해 내놓은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지인이 보낸 답은 ‘햄버거, 파스타, 샌드위치의 한국말 표기는?’이었다. 원어를 들여와 쓰는 게 무슨 문제냐는 뜻이었다. 엔진, 피스톤, 실린더 따위를 ‘발동기’, ‘나들통’, ‘기통’(汽筒)으로 쓰자는 말이 아니다. 언중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동차 용어 중에 낯선 것들을 다듬자는 것이다. ‘윈드실드’(앞유리), ‘대시보드’(계기판), ‘룸램프’(실내등)가 그런 경우이다. ‘물 새는 자동차’를 다룬 기사에서 ‘플로어 패널(탑승 공간 바닥 부분)’, ‘리어 엔드 멤버(후방 사고시 충격 흡수를 위한 꺾임 부분)’처럼 알기 쉽게 풀어준 <한겨레>가 위에 보기로 든 부분 5곳에는 따로 설명을 붙이지 않아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