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시골 버스 - 작자 미상 인생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오직 가슴으로만 느껴진다. - 헬렌 켈러 한여름의 시골길을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먼지로 뒤덮인 버스는 화덕처럼 뜨거웠다. 얼마쯤 달리는데 가로수 그늘 밑에서 한 젊은 군인이 손을 들었다. 버스는 그 앞에 멎었다. 군인은 커다란 배낭을 안고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버스는 떠나지 않았다. 왜 안 떠나느냐고 승객들이 소리쳤다. 운전수는 "저어기" 하면서 눈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승객들은 모두 운전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젊은 여인이 열심히 논둑을 뛰어오고 있었다. 버스를 향해 손짓까지 하는 폼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승객들은 여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개울가로 가서 세수도 하고 바람을 쏘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 여인이 도착했다. 그러나 여인은 버스에 타지 않았다. 운전수가 빨리 타라고 소리쳤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맨 앞좌석에 앉은 젊은 군인에게로 가서 창 밖으로 내민 손을 잡고서 "몸 성히 잘 가이소" 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젊은 군인도 "걱정 마래이" 하며 여인의 손을 아쉬운 듯 놓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승객들은 너나없이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즐겁고 흐뭇한 웃음이었다. 버스는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여인을 뒤에 남겨 둔 채 매미 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로수 사이로 멀어져 갔다.
Board 삶 속 글 2020.05.26 風文 R 1046
좋은 목소리 의젓한 김연아 선수. 우리나이로 스물다섯, 어른이지만 ‘어린 말투’를 쓰는 또래 젊은이가 많은 시대에 그의 말씨는 돋보인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어느 날 ‘아이처럼’ 말하기 시작한 서른 즈음의 여자 후배가 떠올랐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끝의 변화였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찾아 나서기 위해 예쁘게 아기처럼 소리 내려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위장발화’라 한다는 걸 <한겨레> ‘esc’를 통해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에너지와 파장이 숨어 있음’을 짚어준 지난주 ‘내 목소리 성형법’ 기사는 인상적이었다. 좋은 목소리는 곧 예쁜 목소리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언중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가수나 성우, 아나운서의 성대는 예쁘게 생겼다. 같은 가수여도 판소리하는 사람을 보면 혹이나 굳은살이 박인 성대가 많다. 쇳소리를 내는 사람은 성대가 가지런하게 맞닿아 있지 않다.” ‘성대를 보면 직업을 알 수 있다’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말이다. 성대에 따라 목소리가 결정된다는 얘기지만 고운 목소리가 곧 좋은 목소리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성대는 악기와 같은 것이어서 연주법을 제대로 익혀 갈고닦으면 투박한 악기(성대)로도 훌륭한 연주(발성)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성형’의 기본은 바른 발성과 발음에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성형’이 ‘호감 있는 소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좋은 음색에 훌륭한 발성으로 말해도 불편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투박한 목소리여도 편하게 들리는, 가슴 울리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은 <번암집>에서 ‘말이란 마음에서 나온다’ 했고, 같은 시기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루이 뷔퐁은 ‘스타일(화법·문체)은 그 사람 자신이다’라고 했다. 말(글)은 곧 사람, 인격인 것이다. 호감 있는 소리를 내려면 예쁘게 고치거나 만드는 ‘성형’만큼이나 인격(마음)을 바로잡는 ‘정형’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 좋은 발음 라디오 청취율 1위를 다투는 한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김연아 선수는) 새로운 ‘슬레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라 했다. 여자 진행자가 멈칫하는 느낌이 전파 너머로 느껴질 순간 남자 진행자가 “영어가 아닌, ‘설레임!’” 하며 잡아챈다. “아, ‘슬레임’이 아니라 ‘설·레·임’입니까?”로 되받은 출연자. ‘설렘’이 맞는 말이지만, ‘사투리가 귀엽다’는 청취자의 반응을 전하며 프로그램은 마무리됐다. 그런가 하면 그 옛날 어려웠던 청소년기를 얘기하며 ‘특수상고’를 졸업했다고 힘주어 말한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그 학교가 ‘덕수상고’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묵동’(중랑구) ㅎ아파트 가자고 했던 손님, 혹시 싶어 되물으니 ‘목동’(양천구)이었다”는 택시 기사를 만난 적도 있었고. 모두 ‘ㅓ/ㅡ’ 구별이 모호한 경상 방언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는 말씨가 엉망인 꽃 파는 처녀와 그의 말투를 다듬어 사교계에 데뷔시키겠다고 장담하는 음성학자가 나온다. 그의 호언은 현실이 되고 영화는 행복결말(해피엔딩)로 끝난다. [h] 음가를 제대로 내기 위한 ‘촛불 불기’로 [후]와 [하] 따위의 후음을 익히고, ‘입에 구슬 넣고 발음하기’처럼 조음기관 길들이기로 바른 소릿값을 만드는 방법 등이 영화에 나온다.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스페인에서 비는 평야에만 내린다)을 되뇌며 [r]과 [l]의 소릿값을 익혀가는 주인공의 노력은 ‘제값’을 한다. 훈련으로 발음 바룰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좋은 발음, 곧 정확한 발음의 출발은 ‘법학[버박]’, ‘밑을[미슬/미츨]’, ‘그렇지[그러지]’가 아닌 [버팍], [미틀], [그러치]처럼 연음을 살리는 것이다. 모음 소릿값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6모음(ㅣ, ㅏ, ㅜ, ㅗ, ㅔ/ㅐ, ㅡ/ㅓ)체계’인 경상 방언 화자도 반복 훈련으로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누리집(www.korean.go.kr)의 ‘바른발음’은 좋은 발음의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바보처럼 바보처럼 - 이원하 어느 겨울 오후, 동대문 근처 의약품 도매 상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지난 날의 한 여환우를 만났다. 몹시 초췌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 - 역시 또 실패인가? 나의 그녀는 H요양원에서의 투병생활의 암운 때문에 서로 깊이 애중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잘 가요" "그럼 안녕히" 두 마디로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었다. 나는 그녀가 요양원에서 줄곧 겪어야 했던 투병의 위협을 아직도 계속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극도로 쇠약한 결핵 환자가 마음과 육체의 절대적 안정을 그토록 철저히 침해받고 있었다는 것. 이제 나는 너무나 쉽게 결단을 내렸다. 그녀에게 구혼하면서 "대답은 듣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철없는 불장난을 하려는 줄로만 알았을까. 그들의 이해를 얻기까지 우리는 무척 부심하였다. 다음해 겨울은 그녀의 고향인 낙동강 상류에서 투병 생활을 하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마을이 보이는 대안에 조그만 방을 구해 들고 좌선과 와선(?)과 산책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새벽에 강을 건너 그녀의 집에서 조반 먹고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시 월강했다가, 저녁에 다시 강을 건너 석반 먹고, 어두운 낙동강 건너올 때면 그 싸늘한 낙동강의 모래 바람도, 강물 소리도, 초생달 그림자도 모두가 내겐 무한히 깊고 따스한 감동만 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밤새워 원고를 쓰다가 새벽에 그만 잠이 들었다. 약속된 조반 시각이 훨씬 지나도 내가 강가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바람 부는 강둑 위에 나와서 기다리던 그녀가 문득 헐레벌떡 강을 건너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겁에 질린 얼굴로 녹아 떨어진 나를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흔들어 깨운다. 눈을 뜨고 일어나 영문을 물으니, 그제야 그저 망연자실하며 눈물만 주르르 흘린다. 바보처럼 바보처럼... 내가 가스 중독으로 죽어 있는 줄 알았다니. (소설가)
Board 삶 속 글 2020.05.25 風文 R 1199
Board 고사성어 2020.05.25 風文 R 1285
꼬까울새 꼬까울새를 보았다. 서울 한강 언저리에서 찍어 올린 지인의 사진 덕분이다. 이름이 재밌어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나오지 않는다.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게 2006년 3월 홍도에서였고 그해 4월에 이름 붙여졌으니 그럴 법하다. 이 새 이름은 ‘꼬(고)까울+새’, ‘꼬까+울새’, 어느 것일까. 녀석을 보면 ‘고까운’(섭섭하고 야속한)이 아닌 ‘(알록달록 곱게 만든 아이의 신발이나 옷 같은) 꼬까-’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깜찍한 모습을 이름에 담은 것이다. 새 이름을 짓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생김새를 따서 이름 짓는 것이 하나이고, 몸짓의 특성을 따서 붙이는 게 다른 하나이며, 소리를 흉내 내어 부르는 게 나머지 하나다. ‘머리와 멱에 까맣게 검은 줄이 박혀 있는’ 곤줄박이, ‘정수리에 상모 모양의 노란 털이 두드러진’ 상모솔새는 생김을 딴 이름이다. ‘물속의 먹이를 잡아먹으려 숟가락 모양의 부리를 좌우로 흔드는’ 저어새, ‘방정맞게 머리를 깝작이는’ 깝작도요새 따위는 행동이나 습성을 담아낸 것이다. 부채꼬리바위딱새처럼 ‘부채처럼 펼쳐지는 꼬리’와 ‘바위, 자갈에 주로 앉는’ 습성을 엮어 지은 이름도 있다. 아나운서의 관심을 끈 이름은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뚜루뚜루’ 우는 두루미, 울음소리가 물레질의 그것과 비슷한 물레새 등이다. 의성어 ‘졉졉’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이’가 붙은 ‘졉이’가 제비가 되었고, 울음소리 ‘갗갗’에 ‘-이’가 붙은 ‘갗이’가 까치가 되었다는 얘기에는 수백년에 걸친 어휘변화가 담겨 있다.(<내 이름은 왜>) 새소리를 통역하려는 이가 있다. “새들의 의사소통 체계가 어렴풋하게나마 잡힐 듯하다”며 오늘도 새를 찾아 나서는 생태동화작가 권오준이다. 새소리도 통역이 될까? 스웨덴 웁살라대학 미카엘 그리에세르 팀이 발표한 ‘시베리아 어치들은 25가지 이상의 발성으로 복잡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는 철새 탓’ 따위의 주장을 쑥 들어가게 할 ‘새 지저귐 통역사’의 등장을 기대한다. ……………………………………………………………………………………………………………… 해독, 치유 바다를 건넜다. 몇 시간을 날아 도착한 그곳에서 이루려 한 것이 있다. ‘온라인’을 끊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항에 내려 휴대전화를 켜니 저절로 로밍이 되었다. 이런, 기기뿐 아니라 몸도 ‘온라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로밍 상태는 유지하기로 했다. 완벽한 오프라인은 포기했지만 데이터 로밍은 하지 않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따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어줍은 오프라인 세상을 이루리라는 야무진 생각은 잡지 표지를 보며 더 굳어졌다. 무료함을 달래려 들고 간 미국 시사주간지 한국판은 ‘디지털 해독을 위해 떠난 힐링 여행’을 표지 기사로 다루었다. 잡지는 최근에 가장 뜨는 여행 트렌드는 ‘디지털 디톡스’라 하면서 ‘디톡스’(독소 제거)의 뜻을 괄호에 넣어 풀이했다. 원어(de-, ‘제거, 분리’를 뜻하는 접두사)에 충실하려는 번역자의 생각이 담긴 듯하다. 몇 년 전에 처음 만난 ‘디톡스’의 뜻을 단박에 알아채지 못했던, 그즈음에 늘기 시작한 ‘힐링 요가’와 ‘웰빙’ 간판이 낯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힐링(뮤직)’은 2010년 ‘충청북도 행정용어순화자문회의’에서 ‘치유(음악)’로, ‘웰빙’은 2004년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다듬기’에서 ‘참살이’로 다듬은 말이다. 영어 ‘디톡스’(detox, detoxification의 줄임말)는 ‘몸 안의 독소를 없애는 일’로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자료집’에 수록된 단어이다. 외래어표기법을 따르면 ‘웰비잉[wel-bi:ŋ]’, ‘디탁스[diːtks]’가 되겠지만 외래어심의회 등에서 따로 다루지는 않았다. 언중은 이 용어들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해독’(460만여건)은 ‘디톡스’(1700만여건)와 차이가 컸지만 ‘해독주스’(1180만여건)는 ‘디톡스주스’(8만3천여건)를 앞섰다. 방송 프로그램 ‘힐링캠프’를 제외하면 ‘힐링’(350만여건)도 ‘치유’(600만여건)에 못 미쳤다.(구글) 언중은 쉬운 말에 끌린다는 방증일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