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다듬기 위원회 부서원끼리 뭉치고 동창들이 엮이며 여러 관계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여 베푸는 송년 모임은 어느 자리나 뜻깊다. 지난주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열린 송년회도 그랬다. 국어문화운동가에서 교수와 대중문화평론가, 번역가는 물론 사전 전문가와 기자, 아나운서에 이르기까지 말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자리였다. 서른 즈음에서 육십대 중반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소박한 밥상과 함께한 ‘말다듬기 위원회’ 송년 모임은 말 그대로 ‘말의 성찬’이었다. 올해 다듬은 말이 성찬의 재료이기도 했다. 문자결제사기(스미싱), 사이트금융사기(파밍), 전자금융사기(피싱), 대중투자(크라우드펀딩)는 경제지 편집인이 제 뜻 살펴준 덕분에 나왔다. 야외활동지도자(아웃도어인스트럭터), 문신사(타투이스트), 손톱미용사(네일아티스트) 등은 체육교육학 교수의 도움이 컸고 매력상품(잇 아이템), 대정전(블랙아웃), 위안음식(솔푸드), 옥상정원(그린루프), 착한해커(화이트해커)는 번역가의 감각이 빚어낸 열매이다. 책낭독자(북텔러), 책길잡이(북마스터), 듣는책(오디오북), 책돌려보기(북크로싱) 따위는 소설가 덕에 건져냈고 자작가수(싱어송라이터), 계절할인, 계절마감(시즌오프) 등속은 대중문화평론가의 제안이 한몫한 말이다. 국어학 교수와 국어문화운동가는 물론 신문 기자들의 역할도 컸다. 새싹기업(스타트업), 육아설계사(베이비플래너), 깜짝출연(자)(카메오), 거대자료(빅데이터)와 에너지자급주택(제로에너지하우스), 초단열주택(패시브하우스) 등은 지면에 바로 반영되었다. 사전 전문가는 뼈째회(세고시), 검정먹거리(블랙푸드), 식별무늬(워터마크)에 말맛을 담아냈다. 수행매니저(로드매니저), 촬영기록자(스크립터)는 현장에 빠삭한 아나운서들이 힘을 보태 나온 말이다. 하나 더(원플러스원), 맑은탕(지리), 곁들이찬(쓰키다시), 맛가루(후리카케), 내집빈곤층(하우스푸어), 근로빈곤층(워킹푸어), 뜨는곳(핫플레이스)을 포함해 ‘말다듬기 위원회’에서 올해 다듬은 표현은 36개이다. ……………………………………………………………………………………………………………… 불통 올 한 해 방에 들어오고 나간 것이 무엇인지 가늠해 본다. 책은 들여온 것과 내놓은 양이 비슷하다. 그나마 ‘책장 다이어트’ 덕분이다. 작품 대신 벽 여기저기에 붙여 놓은 그림엽서는 늘었고 향초는 켜 댄 만큼 높이가 줄었다. 음반은 늘었다. 헌책방에서 골라 온 엘피(LP)판 덕분이다. 레코드판이 숨 쉴 턴테이블도 하나 더 장만했다. 스피커 달려 있고, 건전지를 넣으면 전원 없이도 쓸 수 있는 물건으로 야외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휴대용이다. 모임에 들고 나가면 인기 폭발이다.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야전’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야전’은 야외전축을 줄인 말이다. 50대 이후에게 ‘야전’, 40대에게 ‘야자’(야간자율학습)는 익숙한 표현이다.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는 ‘노사모’와 같은 숱한 작명을 낳았고, ‘별밤’(별이 빛나는 밤에)은 프로그램 애칭의 대표 격이 되었다. 줄임말은 “‘전대협’과 ‘국조권’ 등 줄임말 남발은 삼가야”(1980년 ㄱ신문)에서 보듯 예부터 시빗거리의 하나였지만 이런 현상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줄임말은 반드시 바루어야 할 문제일까. 어른들은 ‘문상’(문화상품권), ‘생파’(생일파티), ‘버카충’(버스카드 충전)을 낯설어하고, 아이들은 ‘농해수위’(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아태’(아시아·태평양), ‘노조’(노동조합)의 원뜻을 찾기 어려워한다. 언어학자들은 ‘말 줄임 현상은 언어 생성의 한 방법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의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줄임말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세대간·계층간 이해가 모자라는 데 있을 것이다. 제 뜻 알기 어려운 생소한 줄임말은 풀어주고 아이들의 줄임말은 알려고 먼저 나서면 해결될 일이다. 상대가 어떤 표현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이는 게 소통의 시작이다. 아니면 불통이 된다. 지난 1년간 뉴스에 등장한 ‘불통’은 2만1000여건, 그 1년 전 7000여건의 거의 3배에 이른다.(네이버) 한 해가 간다. 가는 해와 함께 ‘불통’도 사그라지기를 바란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깊고도 깊은 가슴 - 김영지 때로 아빠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지나치시거나 워낙 깊으신 탓에 가족들에게 곧잘 원성을 들으신다. 전화가 짜증나도록 잘못 걸려 와도 너무나 공손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응답을 하셔서 귀한 분의 전화인 줄을 알고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들을 웃게 만들기도 하신다. 아빠는 회사 전 직원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챙겨 아끼시는 명상 테이프를 선물하시기 때문에 우리 집 카세트 앞에는 녹음하기 위한 공 테이프가 산만큼 쌓여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빠가 도시락을 갖다 주러 학교에 오셨다가 한 시간 남짓한 아침 자율 학습 시간 내내 교실 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추운 복도에서 서성이신 일도 있었다. 뒷문만 빠끔히 열고 전해 달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됐을 텐데 아빠로서는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교실 문을 도저히 열 수 없으셨던 것이다. 평생 다른 사람 챙겨 주느라 바쁘시고 꾀를 모르고 진실되게 살아오신 아빠의 웃음은 그 누구보다도 해맑다. 지금도 가끔 아빠는 여기저기에서 모은 명언들을 복사해서 자식들에게 하나씩 보내신다. 결코 명필이 아닌, 꾹꾹 눌러쓴 까만 볼펜 글씨와 함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위인들의 철학이 담긴 글에는 아빠의 살아가시는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아빠는 '청소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자료만 보면 당장 작은딸에게 부치시는데, 얼마 전에는 달력의 날짜 부분을 오려서 노란 봉투에 보내 오셨다. "필요하면 이용해라." 날짜 사이의 여백을 이용해서 월중 계획표로 쓰라는 아빠의 자상한 배려를 보는 순간... 왜 갑자기 울음이 북받쳐 올랐을까. (청소년 개발원 근무)
Board 삶 속 글 2020.05.21 風文 R 1077
Board 고사성어 2020.05.21 風文 R 1316
튀르기예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지난 주말이 후딱 지나갔을 것이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이어지는 깊은 밤, 김연아와 월드컵 조 편성 중계방송 보느라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 몰랐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들에게 지난 주말은 ‘아날로그 세상’이었다. 스케이팅은 모나지 않고 둥글었으며, 월드컵 조 추첨은 슈퍼컴퓨터 흔한 세상임에도 항아리(포트)에서 뽑아냈기 때문이다. 월드컵 조 추첨 방송을 두고 뒷말이 없지 않다. ㅅ방송에서 동시통역을 했던 이가 몇 마디를 엉뚱하게 통역했던 까닭이고 조 편성의 음모론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조 추첨 사전 조작설’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추첨 방식을 지켜보니, 유리 항아리에서 뽑는다-건네준다-펼쳐보인다, 이렇게 딱 세 단계이기에 그렇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국제축구연맹(FIFA)의 나라 이름은 영어를 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몇 나라 이름은 그렇지 않았다. 멕시코(메히코), 스위철랜드(스위스), 혼두래스(온두라스), 아르젠티나(아르헨티나), 벨지움(벨기에), 알제리아(알제리) 등이다. 괄호 안 표기가 그 나라 언어에 가까운 제 이름이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일본(니혼), 독일(도이칠란트), 미국(유에스에이, USA)은 우리가 한자음으로 쓰는 국명이다. 국제 무대에서 중국이 자기 이름을 ‘中國’(중궈)라 표기하고 일본이 ‘Nippon’(닛폰)이라 쓰기도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국명을 제 나라 언어로 불러주자는 것이다. 영어를 따른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에스파냐’(스페인)가 대표적이지만 터키도 한가지다. 2002 월드컵 때 ‘형제국’으로 여겼던 터키의 방송인이 ‘세계방송인대회’에서 볼멘소리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터키’(Turkey)는 영어로 ‘칠면조’와 뜻이 같다. 미국(영국)도 아닌데 굳이 그 나라 따라 터키라 할 이유가 있는가. 제 이름 ‘튀르키예’(Turkiye)로 불러달라.” 일리있는 얘기 아닌가. 터키는 터키어를 쓴다. ……………………………………………………………………………………………………………… 뽁뽁이 뽁뽁이’는 제 쓸모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미국의 발명가 앨프리드 필딩과 마크 샤반은 ‘뽁뽁이’를 만들어 벽지나 온실 단열재로 팔려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여기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뽁뽁이’는 없었을지 모른다.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회사를 차렸고 제품의 이름을 버블랩(Bubble Wrap)이라 지었다. 첫 고객은 비싼 기업용 컴퓨터 운반 방법을 찾던 아이비엠(IBM)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쓰임새는 벽지도 단열재도 아닌 포장재였다. 1960년대 초입의 일이다. 오십여년 전 발명자가 이루지 못했던 ‘단열재’의 뜻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뽁뽁이’의 귀환”이다. 포장재뿐 아니라 노리개로도 유용한 ‘뽁뽁이’는 2009년 9월 ‘콘크리트 단열 보온 양생공법’으로 뉴스에 등장한다. 같은 해 12월, ‘겨울철 하우스 참외 품질과 수량을 높이는 데 도움’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건설과 농업 부문에서 시작한 ‘뽁뽁이’의 단열·방풍 재주는 2011년에 대중적으로 빛을 발한다. 얼마 전 ‘에어캡 공장 바빠요’라는 자막에 ‘단열 효과를 내는 에어캡, 이른바 뽁뽁이 판매가 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ㅁ방송) 원 상표명은 ‘버블랩’이니, ‘에어캡’이나 ‘뽁뽁이’나 속칭인 것은 한가지이다. 그럼에도 ‘에어캡’은 방송용어이고 ‘뽁뽁이’는 속칭으로 다루어야 할까 싶었다. 프랑스어 벨벳(velour)과 갈고리(crochet)를 합쳐 만든 상표명 ‘벨크로’(velcro)에 ‘찍찍이’가 밀려나는 것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뽁뽁이’(버블랩)와 ‘찍찍이’(벨크로)처럼 서양은 생김과 구실을 따져 명칭을 만들고 우리는 의성어에서 이름을 따올 때가 많다. 기능에서 비롯한 영어 ‘플런저’(plunger)는 우리에게 소리를 본뜬 ‘뚫어펑(뻥)’으로 통한다. 어설픈 언어 사대주의는 넘어서야 한다. 이참에 ‘뽁뽁이’와 ‘찍찍이’, ‘뚫어펑(뻥)’을 제도권 언어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발자국 소리 - 이종선 몇 가구가 한 계단을 사용하는 아파트의 3층에 사는 나는, 동이 트기 전에 조간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아줌마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5층 학생이 등교하면서 뚜르르 미끄럼 타듯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도 들린다. 3남 1녀나 되는 자식들이 결혼을 해서 떠나고 나니 기다리던 발자국 소리도 사라지고 말았다. 공연히 마음이 허전하고 고독이 스며들어 반가운 사람이라도 예고 없이 찾아왔으면 싶을 때는 내 식구의 발자국 소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현관 문을 슬며시 열고 살필 때도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영감이 말한다. "이 시간에 어느 자식이 온다고... 막내를 기다리나. 이리 와 앉아요." 막내는 서른이 되도록 함께 살았다. 총각 시절 그 애는 회사 일이 바빠서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나면 초인종이 울리기도 전에 나는 문을 열고 "막내냐?" 하고 물었다. 그러면 아들은 "네, 접니다" 하고 대답하며 계단을 껑충 뛰어 올라 오며 히죽 웃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들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지?" 영감이 신기한 듯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지요." 그 발자국 소리도 결혼과 더불어 뜸해졌다. 외국에서 살다 돌아온 차남하고 살게 된 후에도 쑥쑥 가볍게 올라오는 기척이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분명하지만 문을 여는 것은 손녀의 몫이었다. 끌어안고 뽀뽀하는 상봉의 긴 장면이 끝난 후에야 아들은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큰아들네에 가면 아들이 돌아올 시간에 승강기의 땡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딩동댕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 소리로 기다리는 사람을 점치는 낭만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하찮은 일에 나만이 느끼는 허허로운 감정일까! 5층 건물인 아파트는 세월이 흘러 고층으로 재건축한다고 들먹거린다. 그러면 내 발자국 소리 진단도 막을 내리겠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교수 아파트 거주)
Board 삶 속 글 2020.05.20 風文 R 1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