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rd 추천글 2020.06.04 風文 R 1847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피 묻은 태극기 - 이상룡 내가 청룡 부대 소속으로 호이안 전선에서 싸운 지 4개월쯤 되었을 때 고지를 미군과 함께 합동으로 수색 작전을 편 적이 있었다. 나는 3분대 첨병으로 적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서 폭음이 일어나며 부대의 동요가 일었다. 3분대 선임 조장의 숨찬 보고에 의하면 분대장, 통신병 그리고 대원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남국의 햇빛 아래 세 사람이 위생병의 응급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모두 의식을 잃고 있는 가운데 통신병만 정신을 차린 채 소대장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부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 통신병은 전쟁터에서 내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광주가 고향인 그는 신병 훈련소, 포항 사단 그리고 월남 전선에까지 나와 함께 생사를 나눈 전우였다. 잠시 후 헬리콥터가 날아왔다. 통신병은 들것에 실려 가면서 오른손으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뭔가 돌돌 말린 헝겊을 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그 전우가 주고 간 것을 펼쳐 보았다. 그것은 군데군데 피로 얼룩진 조그마한 태극기였다. 그리고 그 태극기 한 귀퉁이는 안녕과 행운과 개선을 비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마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내가 품고 다니던 태극기를 꺼내 견주어 보았다. 내 것은 아직 깨끗했지만 언제 통신병의 태극기처럼 피로 얼룩질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두 개의 태극기를 고이 접어 넣으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조국을 떠날 때 거리에서 혹은 부두에서 여학생들이 흔들어 주던 태극기 그리고 우렁찬 군가들이 떠오르며 그런 착잡한 심정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청룡 2605부대 27중대 일병)
Board 삶 속 글 2020.06.04 風文 R 1311
방방곡곡 여느 때보다 늦게 나온 매미가 이곳저곳에서 울어대기 시작할 무렵, 재보궐선거 벽보가 여기저기 붙기 시작했다. 온라인 곳곳에서는 ‘SNS로 효도라는 것을 해보자’는 이름을 내건 어느 후보 딸의 트위터가 화제다. 동네방네 사방팔방 주유하며 지내는 선배는 ‘우리 강토 면면촌촌 골골샅샅 삼천리 곡곡 갈 데까지 가보겠다’ 호기를 부린다. 증권가에 불어닥친 감원 바람에 거리로 내몰린 후배는 ‘나 같은 이가 도처에 널려 있다’며 오늘도 구직 활동에 진땀 흘린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곳의 문화를 두루 살피고 싶다’던 학생의 꿈은 ‘스펙 쌓기’ 현실에 밀려 뒷전이 되었다. 올해 초 아나운서가 된 새카만 후배의 메일 군데군데에는 칠전팔기의 과정이 옹이처럼 드러나 있었고. 이곳저곳, 여기저기, 곳곳, 동네방네, 사방팔방, 곡곡, 도처, 각지, 여러 곳, 군데군데…. 뜻 차이는 있지만 쓰임 폭을 넓게 잡으면 비슷한말이다. 사전은 한자어인 면면촌촌(面面村村), 토박이말인 골골샅샅도 같은 뜻으로 제시한다. 모두 방방곡곡과 동의어, 유의어인 표현이다. 방방곡곡은 ‘여러 마을(坊, 동네 방)’과 ‘산천과 길의 굽이굽이(曲, 굽을 곡)’의 한자를 반복해 만든 말이다. ‘전국 방방곳곳 이색 갈비 소개’(ㅈ일보), ‘쉬는 동안 맛집 찾아 방방 곳곳 여행’(ㅁ경제), ‘방방곳곳으로 여행 계획하는 7월말, 고속도로 전쟁’(ㄴ뉴스)처럼 ‘방방곳곳’도 제법 쓰인다. ‘곡곡’이 ‘곳곳’으로 탈바꿈한 바르지 않은 표현이다. ‘방방 곳곳’처럼 띄어쓰기하면 괜찮을까. 표준국어대사전은 ‘방방’을 ‘곳곳’(여러 곳 또는 이곳저곳)의 북한어로 설명한다. 남한에서는 이 뜻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방 곳곳’ TV 모니터, 세컨드 TV로 급부상”(ㅈ신문)은? (티브이 수신이 가능한 모니터 값이 내려가면서) 티브이를 ‘방마다’(방방, 房房) 설치하는 집이 많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이니 재치 있는 제목 뽑기다. ……………………………………………………………………………………………………………… 명량 영화 <명량>에서 아들이 아비에게 간한다. “승산 없는 싸움이니 전의를 접으시라.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임금은 아버지를 해할 것이다.”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충무공이 답한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라야 하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 ‘국가에 충성, 왕(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충(忠)’이라 했던 70년대 교실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한 일갈이다. ‘백성을 향한’ 장군의 뜻에 ‘무지렁이 백성’은 기적 같은 승리에 큰 힘을 보태는 것으로 답한다. 영화 속 해전은 왜군의 조총과 조선 수군의 화포, 활 싸움으로 시작해 백병전으로 치닫는다. 조총(鳥銃)은 ‘새를 쏘아 맞힐 수 있을 만큼 성능 좋은 무기’란 뜻으로 화승총의 하나다. 화승총(火繩銃)은 ‘불을 붙게 하는 노끈(화승)’으로 화약에 불을 붙여 쏘는 총이다. 화포와 화전(火箭, 불화살) 등의 총통으로 맞선 조선군의 공격은 위력적이다. 이름은 ‘천자총통’(天字銃筒), ‘승자총통’(勝字-)처럼 총통에 새겨 넣은 글자에서 따왔다. 발음은 [천짜-], [승짜-]이다. 백병전은 ‘서슬이 시퍼렇게 번쩍이는 날카로운 칼날’인 ‘백병’(白兵)을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이다. 영화 속 백병전에는 양날이 서 있는 ‘검’(劍), 단검의 하나인 ‘비수’(匕首, 날이 예리하고 짧은 칼)와 외날 병기인 ‘도’(刀)가 등장한다. 검은 찌르거나 자르는 데, 도는 베는 데 유용하다. ‘명량해협’ 곧 ‘울돌목’의 물살은 시속 20킬로미터에 이를 만큼 빠르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친다. ‘병 주둥이처럼 생겼는데,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협곡을 만나 방망이를 찧는 듯한 격렬한 소리를 내며 운다’(<여지도서>)에서 보듯이 ‘명’(鳴, 울 명)-‘량’(梁 들보 량)인 곳이다. ‘울돌목’은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제자의 가르침 - 최정현 지난 5월은 여러 가지 행사로 유달리 바쁜 달이었다. 평소에도 별로 건강하지 못했던 나는 과로한 탓인지, 학생들의 매스 게임 연습을 보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심한 두통과 빈혈이 일어나 일찍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이것저것 학교 일만 걱정이 되어, 아들을 불러 놓고 몇 가지 내용을 학교에 전하라고 이르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30년 전에 가르친 제자의 전화였다. 학교에 전화를 하니 편찮으시다 하여 걱정이 돼 걸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 한 시간도 안 지나 누가 찾아왔다. 전화를 걸었던 제자였다. 목소리만 듣다 얼굴을 대하니 더욱 반가웠으나, 한편 아픈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제자는 내 딸에게 부엌 좀 안내하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가만히 누워 계시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 옛날의 제자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누워 있자니 지나온 세월이 꿈만 같고, 제자가 저토록 중년 부인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 정말 늙었구나 하는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제가가 상을 차려 들여 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북어국이었다. 뜨거운 김이 얼굴에 닿는 순간 나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제자도 돌아가고 그녀의 정성 덕분인지 나의 건강도 빨리 회복되었다. 며칠 후, 새벽같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바로 그 제자였다. "오늘이 선생님 생신이시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해마다 맞는 생일이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나에게 생일다운 아침이 특별히 있을 수 없었기에 모두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우리 가족은 제자가 준비해 온 음식으로 즐거운 잔치를 벌였다. 어느 날보다 부푼 가슴을 안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아들딸들이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했다. "어머니, 안녕히 다녀오세요."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분명히 내 아들딸들은 그 제자의 성의에 감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붐비는 차 속이었지만 내게는 새로운 용기가 샘솟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길이 그래도 보람찬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제자는 자식들에게만 교훈을 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뭔가 가르침을 준 셈이다. (서울여중 교장)
Board 삶 속 글 2020.06.03 風文 R 1045
헤로인 “소리 없는 항의가 퍼져나갔다. ‘볼만하다 해서 갔더니 칼질 장면만 나오더라’는 볼멘소리였다.” 2007년 일부 관객의 반응을 전한 영화 관계자의 말이다. 같은 때 개봉한 ‘색계’를 ‘식객’으로 잘못 알고 관람한 이들이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이 영화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탕웨이가 한국 감독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매체들은 ‘한·중 정상회담’을 머리기사로 다루지만 인터넷은 ‘한·중 겹사돈’ 소식으로 뜨겁다. 한국 누리꾼이 ‘(중국 배우 가오쯔치와 결혼하는) 채림을 보내고, 탕웨이를 맞는다’는 글을 올리자 중국 ‘왕민( 民, netizen)’은 ‘전지현이나 송혜교라도 보내라’라며 응수했다고 한다. ‘영화 만추의 김태용 감독과 그의 히로인 중국 배우 탕웨이가…’(ㅁ 방송) 둘의 결혼 소식을 전한 ‘앵커 멘트’이다. ‘감독과 그의 히로인’이란 표현이 왠지 영화적으로 다가오지만 여주인공은 ‘히로인’이 아닌 ‘헤로인’이어야 한다. 남자 주인공은 ‘히어로(hero)’, 여자 주인공은 ‘헤로인(heroine)’이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여걸, 여장부’라는 뜻의 영어 ‘heroine[h rouin]’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헤로인’이다”.(국립국어원 누리집) ‘헤로인’ 자리에 ‘히로인’이 널리 쓰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약(헤로인, heroin)과 발음이 같아서 꺼리는 게 아닐까”, “‘히어로’이니 ‘히로인’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 “일본의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에 자주 등장하는 ‘여주인공(히로인 ヒロイン)’의 영향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마약의 한 종류를 ‘헤로인(ヘロイン)’으로 구별해 쓴다” 따위일 것이다. “‘헤로인’이 맞는 줄 몰랐다”처럼 싱거운 답도 빼놓을 수 없다. 뉴스 검색 결과는 여주인공의 뜻으로 ‘히로인’(1270건)이 ‘헤로인’(5건)보다 훨씬 많이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구글 검색) 여주인공 ‘헤로인’의 자리, 어떻게 찾아 줄 수 있을까. ……………………………………………………………………………………………………………… 슈퍼세이브 피파 월드컵이 끝났다. 한 달에 걸쳐 펼쳐진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유럽 대표 독일과 남미 대표 아르헨티나의 매치업(맞대결/대진)이었다. 디펜딩 챔피언(전대회우승팀/직전우승팀) 스페인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4강전에 출전할 수 없다”는 브라질 팀닥터(팀전담의사/팀전속의사/팀주치의)의 진단에 네이마르는 베이스캠프(주훈련장/근거지)를 떠나야 했다. 그래서일까, ‘영원한 우승후보’는 잘 만든 세트피스(맞춤전술/각본전술)로 4강에 오른 독일에 7점이나 내주면서 무릎을 꿇었다. 이번 월드컵은 골문을 든든히 지킨 수문장의 활약이 두드러진 대회이기도 했다. 16강전에서 4강전까지 14경기 가운데 7경기의 최우수선수가 골키퍼였다. 나이지리아 수문장 에니에아마처럼 펀칭(쳐내기) 실수로 땅을 쳐야 했던 수문장도 있었다. 런던올림픽 때는 통했던 홍명보 감독의 4-2-3-1 전술은 3-5-2, 5-3-2, 4-3-3 등의 포메이션(대형/진형)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선진 축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16강에 오르지 못해 ‘남의 월드컵’이란 소리를 듣기도 한 월드컵. 손흥민 선수는 귀국 인터뷰에서 “정말 아쉬운 월드컵이었다. 코칭스태프(코치진)와 팬들도 같으리라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관련 기사를 그러모아 월드컵의 대강을 돌아봤다. 괄호 안의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별리그 경기가 한창이던 지난달 말 ‘일반 국민이 쉽게 의미를 알 수 있고 축구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뜻을 담아 국립국어원이 다듬어 내놓은 축구용어다. 여기에 보탰으면 좋았을 용어가 있다. 축구 중계·뉴스에 등장이 잦아진 ‘슈퍼세이브’이다. 기왕에 잘 써오던 ‘(골키퍼) 선방’ 대신 이 말을 쓰는 까닭? ‘외래어(외국어)가 더 전문적으로 들린다’는 엇나간 인식 때문일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