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비를 맞으며 - 박원길 작년 가을부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아 눕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심한 몸살이거나 노환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갔다.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나는 어머니를 등에 업었다. 어머니는 가벼웠다. 어머니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무겁지? 내려 다오. 천천히 걸어 가면 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뜨거운 것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올랐다. 일주일 간의 결근계를 회사에 내고 집과 병원을 오가며 나는 어머니만을 생각했다. 생사조차 모르는 아버지, 핏덩이인 나를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봄비가 내려 머리가 젖은 채로 병실에 들어섰다. 어머니 침대 머리맡에 왠 낯선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나와 피부색이 다른 혼혈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검은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내 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네 형이다. 진작 밝혔어야 하는 건데, 이 에미 잘못으로 여태 숨겼구나, 이제야 만나게 해서 미안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나는 형이란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그 시꺼먼 곱슬머리 사내가 내 형이라니!' 그후,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형이란 친구는 늘 어머니 곁에 붙어 있었다. 느닷없이 어머니를 빼앗긴 것 같아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제 할 수 없었다. 무조건 무엇이든지 부숴 버리고 싶었다. 나는 밤이 깊도록 술을 마셨다. 병실에는 언제나처럼 그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는 잠이 드셨는지 눈을 감고 계셨다. 형이란 사람의 눈이 내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나는 외면했다. "어머니를 원망하지 마라.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낳으신 거야. 6 25는 어머니를 희생시켰어. 나는 1년 전에야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신 것도 모두 내 탓이다. 용서해라." 나는 어머니를 보았다. 얼굴에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흘 후에 숨을 거두셨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 어머니는 형의 손과 내 손을 마주잡아 놓으셨다. 우리의 두 눈이 부딪쳤다. 이번에 나는 형을 피하지 않았다. 형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어머니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울부짖었다. "형! 어머니가 죽었어. 이제 우리 둘뿐이야! 우리 둘뿐이란 말야!" (회사원)
Board 삶 속 글 2020.05.07 風文 R 1055
위탁모 목요일 깊은 밤에 안방극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원봉사 희망 프로젝트, 나누면 행복’이다. 엊그제 방송의 주인공은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갓난아기였다. 심장 수술을 받아 파리한 아기를 보니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랬던 핏덩이에 살이 오르고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양부모가 나서기 전까지 보살피는 자원봉사자의 돌봄 덕분이다. 프로그램은 아기의 뜻깊은 백일을 담아냈다. 한 배우가 ‘일일엄마’로 나서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돌봐준 것이다. 그의 역할은 ‘위탁모’였다. 위탁모(가정)’를 사전에서 찾으니 나오지 않는다. 방송에서 써도 되겠느냐'는 방송 작가의 문의가 ‘위탁모’를 글감으로 삼게 했다. 무심히 흘렸던 관련 표현을 찾아보았다. ‘(입양 전) 위탁모’는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다. 그 이전에 “위탁양육보호제도를 처음 실시한 곳은 홀트아동복지회로 67년부터였다… 위탁양육부모의 조건은…”(ㅁ경제, 1976년 3월15일)에서처럼 ‘위탁양육 부모’가 보이기도 한다. 위탁은 ‘남에게 사물이나 사람의 책임을 맡김’으로, 여기에 붙어 만들어진 낱말은 ‘-무역’, ‘-품’, ‘-생’, ‘-인’ 등 32개였다.(표준국어대사전) 이에 기대어 ‘위탁모’의 뜻을 새기면 ‘일정한 계약 아래 남에게 아이를 맡긴 여자’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탁모’와 다른 것이다. ‘조어의 문제’로 ‘위탁모’를 배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낼지 모른다. 역할에 걸맞은 말을 찾자면 ‘피(被)위탁모’와 ‘탁아모’(보호자 대신 어린아이를 맡아 돌보는 여자), ‘수탁(다른 사람의 의뢰나 부탁을 받음)모’쯤 되겠지만 이 또한 왠지 마뜩잖다. 이참에 ‘위탁모: 부모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맡고 있는 사회복지기관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 또는 주로 아이가 입양되기 전까지 기관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고려대 한국어대사전)처럼 사전에 올려 자리 잡아 주는 것은 어떨까 싶다. ……………………………………………………………………………………………………………… 땅거미 올해 태양이 가장 높게 뜬 순간은 지난 6월21일 낮 2시4분께였다. 낮 길이가 가장 긴 하지의 한때였다. 여름 기운 짙어지는 칠월에 접어들면서 더위가 깊어간다. 한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낮 길이는 한겨울 동지까지 짧아진다. 해넘이가 빨라지면 어스름이 찾아오는 때도 빨라진다. 황혼이 깃들고 땅거미 지는 시간이 일러지는 것이다. 황혼은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또는 그때의 어스름한 빛’이고, 땅거미는 ‘해가 진 뒤 어스레한 상태. 또는 그런 때’이니 비슷한 표현이지만 말맛은 조금 다르다. ‘빛’(황혼)과 ‘그림자’(땅거미), 어느 쪽을 보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옅은 밤’인 박야(薄夜), ‘저녁 그늘’인 석음(夕陰), ‘어스레한 낮’의 뜻인 훈일도 사전에 올라 있지만 죽은말(死語)에 가깝다. 해거름 무렵 드리워지는 ‘땅거미’는 노래와 시에 잦게 등장한다. 노래로 불리고 시어로 살아 있는 ‘땅거미’가 나오는 곡은 얼마나 될까. ‘땅거미’를 노래한 이는 많았다. 같은 곡이어도 부르는 가수, 편곡이 다른 경우까지 따져보니 132곡이었다. 한명훈·이범용(‘꿈의 대화’), 이선희(‘영’, ‘혼자된 사랑’), 남궁옥분(‘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 김승진(‘스잔’)의 것처럼 귀에 익은 노래는 물론 그 옛날 배호(‘먼 여로’)의 곡도 있었다. 얼마 전 타계한 이종환(‘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의 시 낭송을 포함해 발음은 하나같이 [땅꺼미]였다. 에스지 워너비(‘꿈의 대화’ 아르앤비 솔(R&B Soul) 버전)는 [땅·거미]라 했지만 유의미하지 않았다. 어쿠스틱 버전에서는 [땅꺼미]로 했으니 악센트 때문이었기에 그렇다. [땅꺼미]는 ‘땅거밋과의 거미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땅에 사는 거미’를 가리킨다. 사전은 황혼녘의 ‘땅거미’ 발음을 [땅거미]로 제시하고 있다. [땅꺼미]가 대세인 현실 발음과 다른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손가락을 이식시켜 주세요 - 정혜숙 어느 날 아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의 일이다. 젊은 처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내가 막 출근하자마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은 왠지 무척 초조하고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마침내 처녀의 어머니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의사선생님, 제 딸이 다음달에 시집을 가는데..."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옆에 앉아 있는 딸의 손을 감싸 쥐었다가 펴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제 딸이 어렸을 적에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잘못해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는 어릴 때 이식을 시켰는데, 나머지 한 손가락은 아직 이식시키지 못했어요. 저, 선생님. 지금도 이식 수술이 가능할까요? 딸이 시집갈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어서 저 애나 저나 매일 눈물이에요. 저의 손가락이라도 이식시키고 싶어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느새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네. 이식 수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떤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결혼한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는 딸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이식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고 말았다. (간호사) 검불 장사 콩나물 장사 - 김금흥 올해 예순넷이 된 저는 레슬링 선수 장창선의 에미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고 창선이가 내 늙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줘, 꽃을 달고 시장에 나왔습니다. 저는 인천 신포 시장에서 평생 동안 콩나물만 팔며 살아왔습니다. 콩나물 팔아서 딸 둘, 아들 하나 굶어 죽지 않게 잘 키우고 손주까지 봤으니 이제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남들은 창선이 같은 효자 아들을 두었으면서 왜 아직도 콩나물 장사를 하느냐고 합니다만, 저는 이 장사를 안하면 할 일이 없습니다. 창선이와 며느리도 제발 좀 시장에 나가지 말라고 해서 크게 싸움까지 했습니다만, 이제는 제 고집에 지쳐서 더 이상 말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몸이 성하니까 그렇지, 몸만 아파 봐라. 콩나물 장사 하고 싶어도 못한다." 아들이 사업을 해서 풀칠할 만하다고 늙은 에미가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뭘 합니까. 이렇게 시장 바닥에라도 나와 앉아 있는 게 더 좋은 걸요. 10원때기, 100원때기 하는 검불 장사인 콩나물 장사를 한다고 어디 큰돈을 버는 겁니까. 그날그날 물건 값 떼고 손주들 사탕이라도 사들고 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 결코 돈이 그리워서 하는 장사는 아닙니다. 이 장사로 창선이 운동시켜서 은메달('64년 동경 올림픽 때를 말함)을 따게 하고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즐겁고 고마운 일입니다. 새벽에 시장에 나와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미역줄기 같은 것들을 매만지면 무척 즐거워집니다. 그중에서도 나물 가운데 가장 어른 격인 콩나물을 수북수북 추스르면 저는 마치 제 손주 녀석과 같은 마음이 됩니다. 요즘은 불경기라 그런지 이 장사마저도 잘 안됩니다. 그래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싶지,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이대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못 팔면 안 먹고, 팔리면 밥해 먹고, 조금 팔면 죽 쑤어 먹고 살면 됩니다. (이 글은 기자가 장창선 씨의 어머니를 인천 신포 시장으로 찾아가 받아 적은 것이다.) 콩나물 장사의 아들 - 장창선 콩나물 장사 40년. 이것이 일흔의 나이로 돌아가신 지 이제 백일도 안된 우리 어머니를 설명하는 말의 전부이다. 1966년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내가 금메달을 딸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을 파느라 내 소식을 모르셨다. 텔레비전을 본 시장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금메달을 땄다"고 알려 주었고, 방송국에서 "콩나물 장사 아들이 세계에서 1등을 했다"며 취재를 하려고 어머니에게 달려와서야 겨우 금메달 소식을 들으셨다. 내가 귀국하던 날, 트랩을 내려서자 여전히 고쟁이에 돈주머니를 찬 어머니는 그만 내 앞에 풀썩 엎어져 한없이 우셨다. 강한 줄만 알았던 우리 어머니, 고생으로 다져진 어머니의 다부진 모습만 보아 온 나는 그때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그후 어머니는 아들의 금메달 덕에 콩나물 좌판 하나 마련한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때까지 남의 가게 처마 밑을 전전하시다가 겨우 시장 한복판에 변변한 자리 하나를 마련하신 것이다. 내가 선수 생활을 마치고 조그만 전자 대리점을 차렸을 때도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셨다. "거, 장 서방, 어머니한테 너무 하는구먼!"하는 시장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싫었고, 이젠 먹고 살 만한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창피한 것 같아 좌판을 부수면서까지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다투고 나면 일주일씩 좌판 앞에서 새우잠을 자고 음식을 굶으면서까지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 생활을 고집하셨다. "네가 레슬링을 버릴 수 있느냐?" "내가 건강하니 이 정도로 움직이고 손주들 세뱃돈도 주지"하는 말로 오히려 나와 아내를 설득하였다.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해서도 "콩나물 몇 사발이요? 50원입니다" 라고 헛소리를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우리 자식들이 결국은 지고 말았다. 자식들 눈에는 안돼 보이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생활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Board 삶 속 글 2020.05.06 風文 R 1416
‘엘씨디로’ 학창 시절 어느 겨울방학에 영동으로 이사한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원도로 가는 줄 알았더니 강 건너 서울로 이사한 친구였다. 강남(江南)보다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永東)이 널리 쓰이던 때였다. 전화 걸어 알아낸 새 주소의 동네 이름이 재미있었다. 이웃에는 ‘구정동’과 ‘뒷구정동’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 이름이었다. ‘진관내(진관외)동’과 ‘상수(하수)동’처럼 ‘내-외’, ‘상-하’로 나뉜 동네가 있던 시절이니 ‘앞-뒤’도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앞구정동’으로 쓴 편지는 제대로 배달되었다. 갈매기(鷗, 갈매기 구)와 친하게(狎, 친할 압) 지낸다는 뜻을 담은 정자 ‘압구정’을 까맣게 몰랐던 1970년대의 일이다. 압구정동을 비롯한 동 이름이 주소에서 사라진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이루어진 ‘도로명 주소’가 내년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전통과 역사를 담고 있는 지명을 없애면 전통문화를 누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나왔다. 여기에는 ‘체육관로’, ‘디지털로’ 따위는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기에 주소로 부적절’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새 주소를 써도 지금껏 써왔던 동 이름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지번과 (도로명)주소는 이원적 체계로 운영’되고 ‘동 제도·명칭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임의적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게 정부 방침이기 때문이다. ‘기존 주소 체계는 1918년 일제가 도입한 것’으로 ‘새 주소는 예전부터(1318년) 써왔던 집 중심 체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번호 사이는 ‘-’로 표기하고 ‘의’로 읽는다”는 대목은 왠지 반갑다.(안전행정부 자료) 하지만 ‘엘씨디로’(파주), ‘테라피로’(영주), ‘크리스탈로’(인천 서구)는 작명 취지를 떠나 손봐야 할 길 이름이다. ‘엘시디-’, ‘세러피-’, ‘크리스털-’로 해야 외래어표기법에 맞는 것이다. ……………………………………………………………………………………………………………… 각출-갹출 아나운서 사무실에는 다양한 문의 전화가 온다. 그 가운데 표준어와 표준발음, 맞춤법 관련한 내용이 빠질 리 없다. 아나운서는 우리말의 이모저모를 꿰뚫고 있다고 믿는 시청자들 덕분에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으니 고마운 일이다. 이런 질문은 저녁 이후 시간에 많다. 그 까닭은 ‘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것이 맞다 답하면 전화기 너머로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다. 아나운서는 ‘밥값(술값) 내기’의 심판자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아나운서들에게 걸려오는 전화에는 바람직한 언어 사용을 위한 제안이나 방송언어 오남용을 걱정하는 쓴소리를 담은 내용도 있다. 며칠 전 “방송에서 ‘더치페이’(Dutch pay)는 용인하면서 ‘분빠이’(分配)를 거부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전화를 동료 아나운서가 받았다. ‘더치페이’는 ‘각자내기’로 이미 다듬은 말(국립국어원, 2011년)이니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어에서 왔건 일본어에서 왔건 둘 다 ‘각출’의 뜻”이라며 이어간 시청자의 볼멘소리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몇몇에게 물으니 30대 이상은 ‘각출’을, 20대는 ‘갹출’을 처음 듣는다 했다. 각출(各出)은 ‘1.각각 나옴 2.각각 내놓음’, 갹출(醵出)은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럿이 돈을 나누어 냄’이다. 어느 학원 강사가 “‘각출’은 같은 비용, ‘갹출’은 각자 능력껏 다른 금액을 부담하는 것”이라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밥값 5만원을 다섯 명이 1만원씩 내면 ‘각출’, 누구는 3만원을 내고 어떤 이는 5천원을 내서 5만원을 만드는 것은 ‘갹출’이니 ‘더치페이’에 딱 들어맞는 것은 ‘각출’”이라 밝힌 칼럼(ㅈ일보)도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2000년 이전 신문에는 추렴의 뜻인 ‘갹출’과 주식(경제) 용어인 ‘각출’(殼出)을 구분해 썼지만 최근에 국립국어원은 두 낱말을 한뜻으로 제시한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