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20년만의 부활 - 박경학 격리된 이방 지대에서 주검처럼 살아가는 내게 편지가 왔다. 20년 5개월 만에 큰딸한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신촌 할아버지의 격려 말씀대로 저희 사남매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굴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신 것으로 믿고 저희들끼리 어머니를 도와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엄청난 시간이 흘렀군요.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하고도 또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의 의사에 따라 저희들은 한 번도 아버지를 면회 가지 않았습니다. 편지도 드리지 않았구요. 그러나 아버지는 반드시 살아 계실 것으로 어머니와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저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말예요. 작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남들은 꽃놀이를 간다고 야단인데 문턱에 기대 선 어머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젠 네 아버지에게 편지도 하고 면회도 가야겠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제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후 저는 몇 번이나 편지를 쓰려고 망설였습니다. 어머니도 편지지를 앞에 놓고 눈물만 닦다가 그만두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쌓이고 겹친 슬픔을, 가슴속 깊이 맺힌 한의 실뭉치를 어머니는 좀처럼 풀어헤칠 수가 없으셨던 겁니다. 저는 벌써 10년 전에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애 아빠는 기술자로 중동에 가 있는데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초라하지만 작은 집도 한 채 장만했습니다. 아들딸 둘을 둔 영이(둘째딸)도 8년 전에 결혼해 지금은 집을 사려고 조그마한 공장에서 부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숙(셋째딸)이는 딸만 하나 두었는데 그 애 이름이 지연이라고 합니다. 지연이는 미숙이의 어릴 때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미숙이의 남편도 중동에 가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습니다. 석이(아들)에게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응석 부리던 네 살 때의 그 모습을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릴 때의 별명이 고바우였듯이 똥똥하고 눈이 작은 개구쟁이였는데 지금은 의젓한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 못한 것을 무척 서운하게 여기는 석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는 별 감흥 없이 듣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깊은 감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눈에 띄게 과묵하고 진실하고 부지런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나오실 때까지 집을 장만한다고 열성이 대단합니다.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모아 집을 산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애의 결심도 만만찮습니다. 더욱 대견하고 고마운 일은 기림동 아저씨(나의 이종 사촌 동생)가 성공한 일입니다. 맨손으로 피난 나온 아저씨는 지게를 지고 막벌이를 하는가 하면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 청계천 다리 위에서 고물장수 등 차마 볼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두 가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심과 잘살아야겠다는 피나는 의지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저씨는 물심양면으로 저희들을 언제나 도와 주셨습니다. 작년 6월, 15년 간의 각고 끝에 지어 놓은 아저씨네로 집 구경을 갔습니다. 아저씨가 손수 돌을 다듬고 시멘트를 이겨서 지은 집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아담하고 튼튼한 집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볼품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한 집이었습니다. 송진 냄새가 싱싱한 응접실에는 우리 나라 지도가 커다랗게 걸려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그 지도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형님이 죽지 않고 살아 나와야 할 텐데." 혼잣말처럼 나직이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울며 헤매던 저희들은 20년이 지난 오늘, 죽었다는 아버지가 다시 환생하는 기쁨의 그날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 사진 한 장 보내 드립니다.>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도 미소가 번졌다. 나는 편지를 보다가 사진을 보고, 사진을 보다가 편지를 읽곤 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었다. 20년 7개월 만의 출감이었다. (수기 당선작)
Board 삶 속 글 2020.05.05 風文 R 1223
Board 고사성어 2020.05.05 風文 R 1221
아무-누구 보름 전 이 자리를 통해서 “섬뜩한 느낌 주는 ‘살인 진드기’라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이후 ‘진드기’(ㅈ 일보, ㅊ 교수), ‘공포의 작명’(ㅈ 일보, ㅇ 논설위원) 등의 제목으로 비슷한 뜻을 담은 칼럼이 나왔다. 줄기는 같아도 풀어내는 방식은 달랐다. 동물생태학자와 기자답게 전공과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썼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를 두고 ‘누구’라도 떠들 수 있지만 논리를 갖춰 매체에 글을 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엊그제 라디오에서 ‘기미, 주근깨 따위에 효과가 있다’는 치료제 광고가 나왔다. ‘(피부 고운) 공주는 아무나…’ 하는 대목에 언어 직관을 거스르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나 될 수 없지만(이 치료제를 바르면 가능하다)’이 아닌 ‘(공주는) 아무나 될 수 있다’는 문장으로 끝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방송”이란 금언에 익숙해서였을지 모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책’처럼 유사한 보기가 많았으니까. ‘아무(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르는 인칭 대명사)’는 일반적으로 ‘누구’와 뜻 차이가 없이 쓰인다. ‘나, 라도와 같은 조사와 함께 쓰일 때는 긍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하기도 하는 게 ‘아무’이지만 ‘흔히 부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표준국어대사전)하기에 피부 치료제 광고가 낯설게 들린 것이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를 두고 이틀을 고민하다 ‘꽃은 피었다’로 결론 내렸다. ‘-이’는 사실을 진술한 문장, ‘-은’은 주관적인 ‘그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같은 듯 비슷한 표현도 상황에 맞춰 제대로 쓰는 게 바른 말글살이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