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감성사전 소망 자신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하고 타인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소망이라고 한다. 욕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고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욕망은 영웅을 따라 다니지만 소망은 신을 따라 다닌다. 그러나 소망과 욕망은 같은 가지에 열려 있는 마음의 열매로써 환경의 지배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형태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호롱불 초가삼간 토담 벽에 펄럭이는 세월이다. 세월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이다. 어머니 귀밑머리에 스며드는 놀빛이다. 천년을 침묵으로만 다스려 온 설레임의 불꽃이다. 겨울밤 심지가 타 들어가는 아픔으로 피워 올린 그리움이다. 흥건한 눈물이다. 동지 시간이 결빙된다. 세월이 정지한다. 숲이 해체된다. 들판은 백설에 덮여 밤에도 눈부시고 하늘은 빙판 같아서 달빛이 더욱 시린데 강물은 얼음 밑에서 속삭임을 죽인다. 일년중 빔이 가장 긴 날이다. 가슴에 아직도 그리움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면의 고통도 가장 긴 날이다. 빙하시대 지구의 전 생명체가 신으로부터 냉동시설의 혜택을 가장 공평하게 받았던 시대. 굶주림 인간을 가장 비굴하게 만든다. 인생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인격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자신을 동물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죽음보다 잔인한 형벌이다. 그러나 현자는 육신의 굶주림을 통해 정신의 배부름을 얻음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보여준다. 촛불 가섭이 들어올린 한 송이 연꽃이다. 어둠 속에 벙그는 부처님의 미소다. 살이 녹고 뼈가 타서 적멸의 빛이 된다. 중생들도 대개 자신이 촛불처럼 어둠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살을 녹이고 뼈를 태우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으므로 아직도 세상에는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서양으로부터 건너온 기독교인들의 가장 화려한 축제일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신의 사랑을 더욱 널리 전파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지는 날이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교인들은 많아도 예수의 탄생에 즈음하여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아기들의 영혼에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교인들은 매우 드물다. 우상 인간이 만든 신. 무지와 욕심이 결합해서 탄생시킨 미신의 길잡이 또는 어떤 계층에게 절대적 추종자로 지목되는 인격체. 신과 우상이 다른 점은 그 절대성에 있다. 우상은 그 절대성이 순간적이고 신은 그 절대성이 영속적이다.
Board 추천글 2024.10.23 風文 R 860
의존명사의 띄어쓰기 (4) ‘만’의 띄어쓰기는 꽤 복잡하다. ‘만’은 크게 의존명사인 경우와 조사인 경우로 나뉜다. 무엇을 한정하거나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만’은 보조사이므로 앞말에 붙여 쓴다. 보조사는, ‘이/가, 을/를’과 같은 격조사와 달리, 명사뿐만 아니라 용언이나 부사에도 두루 붙어서 특별한 의미를 더해 주는 조사를 말한다. ‘은/는, 도, 만, 마저, 부터’ 따위가 있다. (밥만 먹고 운동은 안 하니까 살이 찌지. /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어요. / 빨리만 와 다오.) 보조사 ‘만’이 ‘(못)하다’와 함께 쓰여서 ‘앞말이 나타내는 대상이나 내용 정도에 달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못)하다’는 별개의 동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즉 ‘집채만 한 파도’, ‘산만 한 덩치’, ‘형만 못한 아우’와 같이 ‘만’과 ‘(못)하다’를 띄어 써야 하는 것이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어미를 잃었다.”, “이게 얼마 만인가!”에서처럼 시간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여서 ‘동안이 얼마간 계속되었음’을 나타내는 ‘만’은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에, 이다’와 같은 조사가 함께 쓰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만’은 의존명사임을 알 수 있다. ‘앞말이 뜻하는 동작이나 행동이 가능하거나 타당함’을 나타내는 ‘만’도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여기에 ‘-하다’를 붙여서 ‘~할 만하다’와 같은 꼴로 쓰기도 하는데, ‘만하다’는 보조용언으로 분류되므로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가 화를 낼 만도 하다. / 조금 아프지만 참을 만하다.) ‘마는’의 준말로 쓰이는 ‘만’도 있다. 이것은 조사이므로 붙여 쓴다. (나이는 들었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 집에서 쉬겠다더니만 웬일로 나왔니?)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10.23 風文 R 1579
‘김밥’의 발음, 어떻게 할 것인가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기 때문에 한국어에 밥과 관련된 어휘들이 많이 있다. 새벽밥부터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까지 밥 시간대 별로 밥들이 있고 밥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쌀밥, 오곡밥, 잡곡밥, 팥밥, 나물밥, 메밀밥, 콩나물밥, 콩밥, 계란밥, 약밥, 쑥밥, 굴밥, 쌈밥, 김밥 등이 있으며 밥을 만들거나 담는 형식에 따라 비빔밥, 고봉밥, 사발밥, 한솥밥, 덮밥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밥들을 발음할 때 [밥]으로 발음할지, [빱]으로 발음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먼저 받침 ‘ㄱ, ㅂ, ㅌ, ㅍ’ 뒤에 연결되는 ‘ㄷ’은 자연스럽게 된소리로 발음되기 때문에 새벽밥, 저녁밥, 오곡밥, 잡곡밥, 팥밥, 약밥, 쑥밥, 한솥밥, 덮밥 등은 [빱]으로 발음하면 된다. 문제는 받침 ‘ㄴ, ㄹ, ㅁ, ㅇ’ 뒤에 오는 밥을 어떻게 발음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 표기상으로는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합성어의 경우에는 뒤 단어의 첫소리 ‘ㅂ’을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규정에 따라 아침밥, 점심밥, 비빔밥, 고봉밥, 사발밥 등은 [빱]으로 경음화시켜 발음해야 한다. 그러나 쌀밥, 나물밥, 메밀밥, 콩나물밥, 콩밥, 계란밥, 굴밥, 쌈밥, 김밥 등은 관형격 합성어가 아니라 밥을 만드는 재료와 관련된 합성어이기 때문에 표기대로 [밥]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김밥’은 [김:밥]으로 발음해야 하지만 대다수의 언중들이 [김:빱]으로 발음하면서 괴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립국어원은 2016년 3분기 국어심의회의 결정으로 [김:밥/김:빱] 복수 발음을 허용하게 돼 이제는 어느 것으로 발음해도 무방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10.23 風文 R 1435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2/2 그 후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테스는 목장에 남아서 젖을 짜고 있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하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고 젖을 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었다. 테스를 찾아 목장에 나온 에인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테스를 보자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는 테스에 대한 애정이 날이 갈수록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인젤은 테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본 것이다. 진흙 속에 박혀 있는 보물처럼 테스도 자신에게서 교육을 받는다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인이 되리라. 에인젤은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연으로 끌리는 두 사람의 애정을 가로막고있는 것은 어쩌면 테스의 거부보다도 에인젤에게 있는 이성 때문이 아닐까? 이성적이고 사리 분별이 뛰어난 에인젤은 어느덧 테스를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에인젤은 들의 여신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테스를 보자 테스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말았다. "용서하십시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 참, 소가 다 놀라서 젖통을 차고 말았어요" "테스, 나와 결혼해 주오" "아아 에인젤 씨,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왜요? 테스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없다는 건가요?" 에인젤은 더욱 세게 테스를 감쌌다. 테스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고 있어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그렇지만 당신하고 결혼을 할 수는 없어요"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와 약혼이라도..." "아녜요" 테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당신하곤 신분도 다르고 또 저는..." 테스는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무거운 화석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깊은 밤에 일어난 그 숲의 사건 자기는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절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에인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에인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자신을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인젤은 또 다시 테스를 포옹하며 "그럼 내 말을 듣고서 대답해 줘요. 난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당신의 훌륭한 성품을 이해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당신도 날 사랑해 주겠지?" 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승낙하겠소?" 에인젤의 말을 들으면서 테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 진실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질 수는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테스, 분명히 대답해 주오"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그리고 나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테스! 결국 승낙해 주었구려" 테스는 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인젤의 손등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테스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집에 돌아간 에인젤은 저녁에 가족 예배를 마친 후에 아버지께 말을 했다. 학벌이 없고 집안도 가난하지만 순결하고 정숙하며 독실한 종교 신자이고 농장 생활에 있어서는 월등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규수는 네가 결혼할 만한 훌륭한 가문이니? 정말 정숙한 숙녀이구?" 어머니가 불쑥 말을 했다 "그 규수는 농부의 딸이지만 보통 숙녀 정도가 아니에요. 감정이나 성품이나 몸가짐이나... 가문만 좋으면 뭘 합니까. 장래 제가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어야죠" "마시는 정말 가문 좋고 예쁘고 교양 있고 남 주기는 아깝지" 어머니는 안경 너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외면상으로 좋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테스의 생활과 행동은 시 그것입니다" 얼마 후 테스는 어머니에게 이 목장에서 신분이 좋고 교육을 받은 에인젤과 결혼하게 됐다는 편지를 냈다. 어머니로부터는 곧 테스의 결혼을 기뻐하는 회답이 왔다. '사랑하는 테스, 네가 훌륭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결코 남편될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을 하고 나면 불행이 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네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구차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란다. 네가 50번을 물어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하겠다. 너는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털어놓고 무슨 일이건 말해 버리는 정직한 성품이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다. 너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내 말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네 아버지는 술김에 주책없이 네 결혼을 사방에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줏대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단다. 사랑하는 테스야, 생기에 넘치는 마음으로 결혼해 다오. 결혼 선물로는 사이다를 한 독 보내겠다. 에인젤에게 안부를 전하도록' 에인젤에게 아직 말을 하지 못한 괴로운 비밀을 어머니는 이렇듯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표리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만일 에인젤과의 애정이 무너지게 된다면 테스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12월 31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식은 테스가 즐겨다니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목장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젖 짜는 아가씨들은 부러운 마음으로 신혼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가 된 테스도 명랑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축복에 대답했다. 에인젤이 선사한 아름다운 신부 옷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웰브리지라는 시골에 가서 조용히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몰락하기 전의 더버빌 저택이었는데 에인젤은 테스의 혈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징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에인젤이 기존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적이라 해도 그 역시 인습을 어느 사이엔가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생활로 돌아갈 때에는 인습이 우선인 것이었다. 신혼 초야의 잠자리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을 때 테스는 난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시시각각으로 테스의 양심에 육박해 오는 것이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바라보자 테스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마음은 점점 더 긴장해졌다. 모든 일을 말해 버리려고 에인젤을 바라보았을 때 에인젤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스, 내 말 좀 들어 줘 난 당신한테 고백할 일이 있어" 테스는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에인젤도 나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도... "여보, 당신의 천사와도 같은 순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숨길 수가 없소" 에인젤은 이어 대학 시절에 방탕하고 창녀와 함께 몇 밤이나 지냈던 일을 고백했다. "테스, 이 더러운 내 과거를 용서해 주겠어?" 에인젤은 부들부들 떨면서 테스의 고운 손을 꼭 쥐었다.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에 싸였던 테스는 남편의 말을 이어 자신의 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깨끗이 과거를 먼저 얘기해 주셨어요. 내게는 그보다 더 무서운 과거가..." "쓸데없이 무슨 말을...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라니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에인젤은 자기의 가슴에 뭉쳐 있던 고백을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테스는 더욱 괴롭기만 했다. 칼을 들고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생각으로 분명히 말했다. "이대로 나를 기만할 수 없어요. 내 얘기를 다 들어 줘요" 테스는 창백한 얼굴에 단호한 결심의 빛을 띄우며 그 검은 숲 속에서 알렉 더버빌에게 당했던 무서운 일과 어린애까지 낳았다가 죽고 만 얘기를 다 털어 놓았다. 아내의 고백을 듣고 난 에인젤은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앞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난로 불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테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에요.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나는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막상 말을 하려니 당신이 나를 버릴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에인젤은 머리를 움켜 쥐고 미칠 듯이 쥐어 뜯으며 소리쳤다. "무서워, 정말 무서운 일이야. 여보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오. 당신한테 그런 끔직한 일이 있다니. 테스, 부디 거짓말로 그래 본 거라고 말해 주오" 테스는 오히려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가 사실이에요. 지금에 와서 당신을 추호라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주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게 없어요. 여보 에인젤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내 이 과거를 용서해 줘요" "아아, 무서워. 용서고 뭐고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이렇게 고운 당신이 딴 남자한테 몸을 맡기고 아이까지 낳다니. 아아 무서운 일이야. 내 꿈은 깨졌어. 저주받은 결혼..." 테스는 엎드려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어 한사코 호소했다 "여보 에인젤, 용서해 줘요. 난 당신 이외의 사람을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땐 난 아직 어린애였어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어린애였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아냐. 피해를 당했을 뿐이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동기야 어쨌든, 난 괴로워. 이런 일을 알고 나서 당신과 같이 있을 순 없어.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난 더욱 괴로워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 이처럼 엄격해 남편의 마음이 아주 풀리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테스는 이미 이혼을 각오했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간 지 사흘째 되는 날 테스가 먼저 제안을 했다. "난 불평은 안하겠어. 어쨌든 내일이라도 곧 친정으로 돌아가겠어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역시 헤어지는 게 상책일 것 같소. 적어도 얼마간은, 지금까지의 사유를 좀더 뚜렷이 알게 되고 내가 당신한테 편지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당신은 법률상으로 나의 아내요" 에인젤은 테스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의 속마음은 그녀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해진 에인젤은 에인젤 자신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인습의 안에서 성장했던 가짜 에인젤인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테스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 날로 두 사람은 각각 짐을 꾸렸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마차에 몸을 싣고 우선 낙농장으로 돌아갔다. 농장주 클리크 씨 부처와 만나서 일처리를 마친 다음 그들은 다시 마차를 몰아 나즐베리에 이르러 헤어지게 됐다. "난 참을 수 없는 것도 되도록이면 참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자리를 잡으면 곧 당신한테 그 주소를 전하지. 그리고 그 일을 참을 수 있는 심경에 이르면 그 땐 당신 곁으로 돌아가려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준엄한 선고를 테스는 순순히 받아들인 채 고향으로 향하는 다른 마차를 탔다. 마차가 언덕을 기어오르고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에인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은 시의 한 귀절을 읊조렸다 '주님은 천국에 계시지 않고 세상은 온통 잘못 투성이' 테스가 언덕 마루를 넘어간 뒤에야 에인젤은 자기 갈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를 가도 마음의 고통을 풀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와 같은 번뇌를 등에 지고 마침내 고국을 떠나 멀리 브라질로 가버렸다. 고국이라도 아득히 떠나 있으면 마음의 고통이 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블랙모어 분지로 마차가 접어들자 어릴 적 눈익은 풍경이 사방에 전개되어 테스는 혼미한 상태에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부모님의 얼굴을 대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손에 든 보따리는 가벼워도 마음 속에는 무거운 짐을 진 테스는 지금 온 세상에 갈 곳이란 여기 만한 데도 없다는 듯 친정집 문간을 찾아들고 있었다. 시집 간 딸이 소식도 없이 찾아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어머니는 테스를 보자 깜짝 놀라 말을 했다. "아니, 테스 아니냐. 그래 네 신랑은 어디 있니?" 어머니는 놀라움과 불안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테스는 흐느껴 울면서 대강을 얘기했다. "그렇게까지 주의를 했는데도 넌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보지 뭐냐" 더버빌 부인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테스에게도 자기 몸에도 물을 마구 뿌리면서 고함쳤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려 부러워하던 테스의 결혼이 도리어 동네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테스는 괴로웠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도 테스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하던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자기를 떠나 멀리 브라질까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스의 앞길은 암담했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내내 바보라고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눈물을 감추고 되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안 식구들에게 에인젤이 다시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고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났다. 테스는 맡은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동생 리자루의 기별이 와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게 되고 아버지 역시 중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편 알렉은 그 동안 개심을 하고 캠프나 기타 종교 회합에서 설교를 하며 시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회합에서 그는 우연히 테스를 보았다. 그리고 또 뒤를 따라다녔다. 테스에 대한 연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의 징조를 유린하고 그로 인해서 평생을 파멸시키고 있는 알렉의 손길이 다시 테스에게 뻗쳐 왔다. 그는 종교 순회를 집어치우고 플린트콤애쉬로 테스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알렉은 자기가 테스의 진짜 남편이며 에인젤 클레어는 결코 테스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결혼을 요구했다. 테스는 에인젤에게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는 회답이 오지 않고 알렉의 구혼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게다가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가에 대한 알렉의 친절과 클레어의 이해할 수 없는 무소식이 겹쳐 차츰 테스를 궁지에 빠뜨렸다. 테스의 어머니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렉의 집안은 너도 알다시피 이 근처에서 제일 가는 부자다. 사실 또 네게 처음으로 남자란 걸 알게 해 준 인연도 있지 않니 그러니 이런 얘기가 나온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테스는 이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걸음 더 파고 들며 얘기했다. "생각해 보렴. 네가 그만큼 솔직하게 과거를 말했는데 그렇다고 널 버리고 타국에 간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매정한 사람이지 뭐냐. 그런 박정한 남자한테 의리를 지키다니 넌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니?" "그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에요" "참 딱하기도 하지. 글쎄 돌아올 리가 있겠니. 첫날 밤에 신부를 안아보지도 않은 남자가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냐. 거기 비하면 알렉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네게 대한 책임을 느끼고 청혼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알렉과 결혼을 하면 우리는 이 집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동생을 학교에 보내게 되며 남부럽지 않게 살게 아니냐. 내말만 들으면 틀림이 없다" 테스는 무척 괴로웠다. 브라질에 있는 에인젤에게 또 편지를 썼다. '그리운 남편에게 당신을 이렇게 부르게 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이세상에 정녕 당신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인젤! 저는 지금 무서운 유혹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대가 누구라는 것도 너무도 지겨워 차마 말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 번 지난 날의 목장 시절과 같이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있다면 곧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안 되면 저를 당신 곁으로 데려가 주세요. 저를 당신의 아내로 하실 수 없다면 하녀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오든지 아니면 제가 당신 곁으로 가지 않으면 저는 죽을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당신을 위해서는 깨끗이 죽을 것이며 또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살겠어요.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은 알렉과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고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결혼을 한다면 우리 집은 가난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무정하고 모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코 당신은 저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하러 돌아와 주세요. 곧 돌아오실 형편이 못된다면 얼마 후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보내 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올가미에 걸려서 영원한 함정 속에 빠지고 말 것 같습니다. 빨리 저를 만나 주세요. 당신의 테스는 주님께 맹세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께만 순정을 바치는 애타는 테스 올림' 이러한 편지를 발송한 테스는 에인젤의 회답을 받은 뒤에 자기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다. 테스는 편지가 가고 올 날짜를 계산하며 남편의 답장을 고대했다. 그러나 답장이 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알렉도 어머니도 그것 보라는 듯이 테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알렉은 때로는 에인젤이 영국에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써 보내온 편지를 보고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테스는 이제부터 석 달만 더 기다려 보아 회답이 없을 경우에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어느덧 3개월도 흘러갔건만 에인젤로부터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매일 문간에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소식이 온 것이 아닌가 그이가 돌아온 것이나 아닌가 하고 가슴을 죄며 기다리던 보람도 없이 공허한 날만 지나갔다. 테스는 절망과 자포 자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빈곤한 살림이 테스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더욱 꾸짖기만 했다. 테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알렉의 청혼을 수락하여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에인젤에게는 마지막 원망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테스의 애통함을 보다 못하여 옛 목장 시절의 두 처녀는 에인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부인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도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디 부인을 돌보아 주세요. 그 이유는 부인은 지금 친구의 탈을 쓴 원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멀리 쫓아 버려야 할 사람이 도리어 부인 곁을 추근추근 따라다니고 있어요. 여자에게 자기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을 주어서는 안 될 거에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아니 그 이상의 다이아몬드라도 뚫어 없애고야 말 거에요. 테스의 행복을 비는 두 친구로부터' 테스는 알렉으로부터 선사받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알렉은 테스를 데리고 샌드번으로 가 신혼 가정을 이루었다. 에인젤 클레어는 브라질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더구나 처음부터 몹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귀국 길에 그는 어떤 영국 사람을 만나 그에게 자기 결혼에 대한 얘기를 고백했다. 그 사람은 클레어에게 부인과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클레어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그는 테스를 찾기 시작했다. 에인젤은 테스가 샌드번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기차를 타고 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테스의 주소를 물었다. 알렉과 테스가 결혼한 지 며칠이 안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어떤 남자가 알렉 더버빌 부인을 만나러 왔다는 집 주인의 전갈을 듣고 테스가 아무런 생각없이 현관에 나갔을 때 안색이 나쁜 한 남자를 보았다. "테스!" "에인젤..." 에인젤은 두 팔을 내밀었으나 팔은 다시 양 옆으로 힘없이 내려갔다. 테스가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한낱 황색 해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 에인젤은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느끼고 자기의 외양이 테스에게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도망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테스!" "이제는 너무도 늦었어요" 테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왜 당신은 좀더 빨리 돌아와 주시지 않았어요? 그처럼 저를 기다리게 해 놓고" "테스, 난 거기서 열병으로 누워 지냈고, 당신 편지는 5개월이나 늦게야 내 손에 들어왔던 거요" "정말 퍽 마르셨어요. 에인젤 지금은 저 알렉의 아내예요. 그인 지금 윗층에 있어요. 이 옷도 그이가 입혀 준 거에요. 에인젤 제발 곧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말아 주세요" "물론 내가 나빴어. 테스 용서하오. 내 딴에는 편지를 받아보자 곧 병석에서 일어나 돌아오느라고 왔는데도, 결국 이미 늦었구려" 에인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인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알렉의 동네에서 빠져 나왔다. 간밤에 묵은 여관에 들렀다가 곧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마치 테스가 신혼 여행 때의 여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와 같은 고민이 에인젤을 사로잡았다. 그는 차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심정이 아니어서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신작로는 얼마 안 가서 내리막길이 되고 움푹한 골짜기가 뻗어 있었다.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서 서쪽의 오르막길을 가다가 숨을 돌리려고 발을 멈춰 무심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걸어온 길 저쪽에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테스일까 싶어 기다려 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헐떡거리며 뛰어온 사람은 분명히 테스였다. 테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와 이리로 오는 걸 봤어요" 에인젤은 여자의 손을 쥐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전나무 아래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에인젤! 왜 제가 당신 뒤를 쫓아왔는지 아시겠어요? 전 그 사람을 죽이고 왔어요. 전 기어이 해치우고 말았어요. 제가 당신을 생각하고 울고 있을 때에 그는 당신을 마구 욕하지 않겠어요. 전 벌써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망쳐 놓은 거에요. 전 그 사람에게 짓밟히며 거짓 속에서 일생을 보낼 순 없어요. 에인젤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절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말해 주세요. 네 어서 절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에인젤 클레어는 파르스름한 입술로 테스에게 키스하고 여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과거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든 말이야" 두 사람은 아래로 한없이 걸어갔다. 그리하여 산 속에 있는 어느 나무꾼의 빈 움막에 들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안주할 곳을 발견한 듯 흐뭇한 마음으로 포옹했다. 그들은 이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생애를 건 지극한 사랑을 다만 이 자리와 이 한 순간에 기울여 테스는 에인젤에게 매달렸다. 에인젤도 테스를 사랑했다. 그들은 낮에는 숲 속에서 쉬다가, 밤이면 어둠을 타고 도망을 쳤다. 북쪽으로 가서 항구로 빠져나가 도망하려는 것이 에인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장한 사랑도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여보, 제가 죽더라도 제 동생 리자루를 돌봐 주세요. 만약 그 애가 당신 것이 된다면 제가 죽은 후에도 우리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을 거에요. 여보 에인젤, 우리는 저승에 가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테스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산에 들어온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색대는 이들을 포위했다. 먼저 눈을 뜬 에인젤은 그들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테스가 잠이 깰 때까지 좀 참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없이 석상처럼 서서 테스의 잠자는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뜬 테스는 에인젤에게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 리 없어요. 지금까지도 저에겐 과분했어요. 저는 마음껏 행복을 누린 셈이에요. 이젠 더 살면서 당신에게 멸시 당한 일도 없게 되었어요" 하고 일어서서 수색대원 앞으로 나가며 "포승줄로 묶으세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일찌기 웨섹스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옛 도시 윈톤세스터 시에는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테스가 갇혀 있는 감옥이었다. 이 건물에는 팔각형의 높은 탑이 솟아 있고 그 탑 꼭대기에는 길다란 깃대가 서 있었다. 극도로 쇠약한 에인젤 클레어와 키가 후리후리하고 한창 피어나는 그의 처제 리자루는 언덕 위에 서서 이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후에 검정 깃발이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7월의 아침 바람에 펄럭거렸다. 검은 깃발은 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시였다. 드디어 심판은 끝났다. 여러 신들의 말을 빌리면 거느리는 자는 마침내 테스에 대한 희롱을 끝마친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 가의 옛 조상인 기사들이며 귀부인들은 무심히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섰던 에인젤과 리자루는 마치 기도를 올리듯 땅 위에 쓰러져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검정 깃발은 말없이 바람결에 나부끼고만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일어서더니 다시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외수의 감성사전 고백 양심의 거울에 묻어있던 가책의 먼지를 닦아내고 참회로써 자신의 본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마음의 자물쇠를 푸는 일이다. 오직 진실만으로 이루어지며 그 자체가 선행이다. 하나의 예술은 하나의 고백이며 모든 고백에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수면제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일용하는 밤의 양식. 불면의 세월 속에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허무의 수풀을 잠재우고 허약해진 육신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안식의 초대자. 꿈의 동반자. 소음 제거제. 삼라만상 라면 세 그릇으로 가득 채운 상. 자살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써의 경거망동. 생명체로써의 절대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 출발점 과거를 끊어낸 자리. 미래의 생장점. 현재 바로 그 자리. 윤회의 매듭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자리. 시간과 공간의 소실점. 인생의 모든 새벽. 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길을 만든다. 인간들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을 만든다. 땅위에도 만들고 땅속에도 만든다. 하늘에도 만들고 바다 위에도 만든다. 그러나 인간들은 본디 자신들이 어느 길로 왔으며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를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어로는 그 길을 도라고 표기하며 개개인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설파되어 왔다. 시계 하루를 시간별로 스물 네 토막씩 절단하는 기계. 문 드나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설치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감옥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감옥마다 견고한 문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법칙과 현상들이 갇힌다. 모든 이름과 추억들이 갇힌다. 그러나 아무것도 드나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으며 안다고 하더라도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 있는 문은 오직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만 그 열쇠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열쇠를 발견하는 순간 하나의 사물들은 하나의 문이며 언제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닫혀 있었던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달팽이 한여름의 고독한 여행자.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을 한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여행자. 자물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문이며 서랍이며 장롱이며 금고 따위에 설치하는 방범장치의 일종. 주인들은 대개 인간을 불신하고 자물쇠를 신뢰하지만 노련한 도둑을 만나면 무용지물이다. 그 자물쇠마저도 훔쳐 가버리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때로 마음의 문에까지 자물쇠를 채운다. 자물쇠를 채우고 스스로가 그 속에 갇힌다. 마음 안에 훔쳐 갈 보물이 빈약한 사람일수록 자물쇠가 견고하다. 그러나 그 누구의 마음을 걸어 잠근 자물쇠라 하더라도 반드시 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불길로 그 자물쇠를 녹여 버리는 일이다. 총 새가 그 끝에 앉아 있을 때 가장 비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무기.
Board 추천글 2024.10.22 風文 R 850
웃프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 제목을 기억하진 못해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노랫말은 기억할 것이다. ‘웃다’와 ‘눈물이 나다’를 병치하여 또 다른 차원의 슬픔을 표현한 이 노랫말은 닥친 현실에 초연하려 하지만 그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언제부터인가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 ‘웃프다’이다. “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웃펐다”나 “이 드라마는 직장인들의 웃픈 현실을 잘 그렸다”와 같이 쓰인다. ‘웃다’의 ‘웃-’과 ‘슬프다’의 ‘-프-’를 조합하여 만든 낱말로, 그 뜻은 ‘웃기면서 슬프다’인데 의미구조상 ‘슬프다’에 방점이 찍힌다. 그런데 ‘웃프다’로 표현하는 ‘웃픈 현실’은 대개 어이없으면서 한심한, 황당하면서 괴로운 현실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냉소적으로 보려 하지만, 이 ‘웃픈’ 현실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임을 느끼기에 ‘웃픈 감정’은 결국 아픔으로 남는다. 그래서 ‘웃픈’ 현실은 ‘비웃음, 쓴웃음, 코웃음이 나오는’ 현실과는 다르다. 모순적인 말을 병치하여 새말을 만드는 것은 세상사를 하나의 감정 혹은 하나의 기준으로만 느끼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착하면서 나쁘다’는 뜻의 ‘착쁘다’가 있다. 블로그나 웹툰 등에서 ‘착쁜 사람’ ‘착쁜 생각’ ‘착쁜 놈’ 등으로 쓰인다. ‘웃프다’에서 착안하여 만든 말로 보이는데, 말맛은 ‘웃프다’에 미치지 못하고 사용 빈도도 낮다. 현재 ‘웃프다’는 ‘우리말샘’에 새말로 등록되어 있지만, ‘착쁘다’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웃픈 일과 웃픈 사연을 매일매일 겪고 듣는 사이에 ‘웃프다’가 먼저 우리말 어휘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10.22 風文 R 980
의존명사의 띄어쓰기 (3) 의존명사로도 쓰이고, 접미사로도 쓰이는 말이 있다. ‘간(間), 들’이 그런 말들이다. ‘접미사’란 명사나 동사 따위의 뒤에 붙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요소를 가리키는데, ‘선생님’의 ‘-님’, ‘지우개’의 ‘-개’와 같은 것을 말한다. ‘간’이 ‘기간’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접미사로 분류되므로 앞 말에 붙여 써야 한다. 이때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인다. (한 달간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살이 쑥 빠졌다. / 지난 오 년간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반면에 ‘간’이 ‘사이’나 ‘관계’ 또는 ‘선택’의 뜻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서울과 부산 간 야간열차 / 서로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킵시다. /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라.) ‘들’은 흔히 붙여 쓰기만 하는 걸로 아는 이들이 많은데, 한자어 ‘등(等)’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책상 위에 놓인 공책, 신문, 지갑 들을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 과일에는 사과, 배, 감 들이 있다.) ‘듯(이)’는 의존명사로도 쓰이고 어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짐작이나 추측의 뜻을 나타낼 때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이때는 ‘~할 듯이, ~하는 듯이’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그는 마치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듯이 말한다. / 하늘이 맑으니 남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듯(이)’가 뒤에 올 내용이 앞에 한 말과 거의 같음을 나타낼 때에는 어미이므로 앞말에 붙여 써야 한다. 이때도 용언이 앞에 나오기는 하지만 ‘~할, ~하는’과 같은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거대한 파도가 일듯 사람들 가슴에는 분노가 솟구쳤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10.22 風文 R 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