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현장 소식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장마가 계속되는 지난 한달 동안 제게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4번에 걸쳐 법정에 섰으며 4대강 개발에 대한 국토부의 발표가 있은 이후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지속적으로 현장에 머무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분주했던 지난 한달 동안의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려볼까 합니다. 지난 6월 23일 부산 공간초록에서 운하문제에 대한 강연과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간담회는 한 달에 한번 공간에서 환경영화를 상영하는 단체들의 주관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날 행사에 참석 했던 친구들은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이 개발계획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고 긴 토의 끝에 몇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이끌어 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크게 세가지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는, 낙동강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올릴 수 있고 참여 시킬 수 있는 홈피를 만들 것, (그 일은 저와 평상필림 친구들이 전담하기로 했고.... 현제 홈피의 외관은 완성단계에 있습니다.) 둘째는 이 일을 홍보 할 수 있는 초등 3년 수준의 교육프로그램을 만들 것(그 일은 습새와 생명과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의 선생님들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는데 아직 작업 중입니다.) 셋째는 강가에 순례 길을 만들고 영화제 등의 문화 활동을 통해서 일반 시민들이 참여 할수 있는 "우리가 강이 되자"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순례자들의 활동을 지원 할수 있는 메카를 만들어 내자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위와 관련된 일련의 작업을 "낙동강 3.14"라고 부르기로 했고 홈피도 그렇게 명명했습니다 . 낙동강 3.14 로고이며 홈피의 주소입니다. 로고를 클릭하시면 홈으로 들어 가실수 있습니다. 이후 전국 미디어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이 활동에 참여하여 영상활동을 지원하기로 했으며 7월 31일 병산 모래벌에서 국악마당과 환경영화제, 도보순례를 깃점으로 낙동강 3.14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설명은 간략 하지만 저는 이일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이 되는 이곳 저곳 사무실로 옮겨다니며 한달동안 새우잠을 잤습니다. 함께 해준 친구들도 마찮가지였습니다. 무덥고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것은 공명의 친구들께 참여를 위한 몇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는 4대강 영상물을 실어 나를 낙동강 3.14 베너를 자신의 홈피나 카폐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낙동강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게 될 것이며 이 현장을 통해 현제 지금 우리의 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중지를 모아나가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이달 말(7월 31일) 이 운동의 시발점이 될 병산에서 열리는 문화제와 순례 길에 동참을 부탁드립니다.아래는 위 내용을 정리하고 이 행사의 취지를 담은 내용입니다. . 로고를 클릭하시면 베너와 베너소스가 열립니다. 낙동강 3.14 - 우리가 산이, 강이 되자. 자연스런 물의 흐름은 3.14배의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구의 자전과 인력이 만들어내는 원리 때문입니다. 낙동강 700리는 그렇게 자연의 순환을 따라 굽이굽이 억만년을 흘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흐름들을 거스르지 않았고 그 흐름들과 함께하면서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고 문화를 꽃피우며, 구비마다 물위에 굴곡진 삶들의 사연을 띄워 함께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개발사업이 시작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이 아름다운 강은 원형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훼손되어 깊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 없이 자연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4대강 개발 사업을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었는지를 깊이 뉘우치게 됩니다. 병상의 노모가 자식의 발걸음을 기다리듯, 지금 강은 우리가 찾아와 주기를 애타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이 자연을 치유하는 힘이 됩니다. 이제 생명의 길, 자연의 길로 향하는 ‘낙동강 3.14’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병산 서원 부근에 민박집과 식당이 많이 있어 식사와 숙박은 각자 해결합니다. ※ 텐트나 야숙도 가능한 곳으로 자율적인 참여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 됩니다. . 고택과 민가 등 전통 가옥촌으로 마을 전체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하회마을 . 하회보 건설로 수몰 될 위기에 처해있는 하회나루 백사장 . 구담보 건설로 수몰 될 위기에 처한 구담습지 지금 저희는 긴 여정을 준비하는 첫 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이 일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럴때 마다 저는 이야기 드립니다. " 지금 우리는 이 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잘못 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을 그만 둘 수 없다"고,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시행착오의 결과로 되돌아 올 길을 만드는 것"이며, "그 지점에서는 누구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 낙동강 3.14? - 묻고 답하기
Board 추천글 2009.07.24 바람의종 R 23973
국립국어원(원장 권재일)은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www.malteo.net) ’ 누리집을 열어, 함부로 쓰이고 있는 외래어, 외국어를 대신할 우리말을 두 주에 하나씩 공모하여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회에는 ‘서로 다투는 중요한 점이라는 뜻으로, ‘논쟁거리’, ‘논점’, ‘쟁점’을 뜻하는 이슈(issue)에 뜨거움을 뜻하는 ‘hot’이 붙어 좀 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논점이나 쟁점’ 을 가리켜 이르는‘핫이슈(hot issue)’의 다듬은 말로 ‘주요쟁점’ 을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회원님께서도 ‘주요쟁점’이 ‘핫이슈(hot issue)’ 를 대신하는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될 수 있도록 널리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7월 8일부터 7월 20일까지 ‘음식의 조리 방법을 뜻하는 요리 용어’를 가리켜 이르는 ‘레시피(recipe)’ 를 대신할 우리말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514건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국립국어원은 이 가운데 ‘레시피(recipe)’ 의 원래 뜻을 잘 반영한 다음 일곱을 투표 후보로 선정하였습니다. 회원님께서는 ‘레시피(recipe) ’의 다듬은 말로 다음 후보어 가운데 어느 것이 좋으십니까? 이번 투표 기간은 7월 22일부터 8월 3일까지입니다. 1. 조리법 2. 요리법 3. 조리길잡이 4. 요리길잡이 5. 맛길잡이 6. 맛내기본 7. 맛본 또한 7월 22일(수)부터 8월 3일(월)까지는 ‘ 부디 회원님께서도 저희 사이트를 찾아 주셔서‘레시피(recipe) ’와 ‘트위터(twitter)’ 의 다듬은 말을 결정하는 데에 직접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Board 추천글 2009.07.22 바람의종 R 24989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보고 배우는 서양사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시각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럽 내지 북미지역을 포함하는 서양 세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은 탁월한 문명을 발전시킨 우월한 지역으로, 비서양 세계는 야만적이고 정체된 지역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이라는 것은 19세기, 정확히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월을 고대까지 소급시키려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사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이렇게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상황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철구 교수의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 읽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문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약 10년간 서양사와 세계사를 우리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된 강 교수의 책으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1, 용의 숲, 2004>가 있다. 이 시리즈는 매주 2회(화, 목요일) 게재된다. <편집자> 필자 약력 1979-1988: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89-현재 : 이화여대 인문대 사학전공 교수 민족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계간 <민족현실> 발행인 역임 현 민족미래연구소 이사장 1.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1)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역사'의 쓸모 있음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끊임없이 역사와 접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TV나 영화에서의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나아가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까지도 모두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책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었지만 예수의 성배 전설을 현실로 끌고 온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매우 친숙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큰 열정을 가지고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단군이나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내는 적지 않은 수의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읽기'나 '공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을 이야기하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E. H.카의 널리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되뇌며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수천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온 후 수많은 역사책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정치가나 군인들, 학자와 지식인들, 또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역사의 이런 유용성은 특히 역사학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다른 학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과 객관성 이렇게 역사가 유용한 지식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정확한 사실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에 바탕을 둔 소설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실성 문제가 나온다. 역사는 어떻게 진실성을 갖게 될까?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역사를 단순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책에는 사실과 역사가의 상상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 바뀌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서양학문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는데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그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독일사람 레오폴트 랑케이다. ▲ 랑케 (Ranke, Leopold von), (1795~1886), 근대 역사학을 처음 시작한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 그는 역사를 쓸 때 역사가의 상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 연구란 '그것이 원래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인 사료를 잘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날 문서나 책, 비석, 고고학적 유물 등 사료들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 되고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 가운데에는 쓸모없는 것도 많고 또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들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랑케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가들이 랑케를 본받으며 19세기 말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역사학이 근대적인 객관적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과학과 같이 역사학도 보편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른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 쓰기와 객관성의 한계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 쓰기는 정말 가능할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인간이 한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부만이 요행히 살아남을 뿐이다. 이는 개인들이 일기를 써 놓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아 있는 사료 가운데에는 일부러 남긴 것들이 있다. 어떤 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두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부장품들과 같이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나 우연히 남은 것도 있다. 또 옛날 책이나 문서들도 좋은 사료가 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이 사료들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을 다시 엮어 낸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 쓰인 것이나 오늘날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다. 사관이란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사관은 처음 사료를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전체 과정에 간여한다. 사료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다 이용할 수 없으니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야 한다. 이때 무엇을 골라낼까를 결정하는 데 사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에는 같은 사료를 놓고도 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관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기호나 욕망, 편견, 또 그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지방색이나 민족의식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영향도 받는다. 현재라는 시점이 주는 영향도 크다. 누구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이런 한계들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려고 해도 자신의 편견이나 세계관, 이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이것은 랑케의 경우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독일 역사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그가 기초를 놓은 독일 역사학은 매우 이데올로기성이 강한 역사학으로 19세기 이후 독일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프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독일인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역사를 쓰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이 역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일 역사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의 역사학은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중심주의이다. ▲ 트라이치케 (Treitschke. Heinrich von )의 초상. 트라이치케는 랑케의 계승자로서 19세기 독일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것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그 밑에 집어넣든가 함께 결합하며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보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 사람들이 쓴 많은 서양사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노골적이든 아니든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비서양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문제이다. 서양만을 중시하며 비서양 세계의 발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또 서양세계에게 예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비서양 역사가들이 서양 역사가들이 쓴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 역사학을 선진 학문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경우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서양인들보다 더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유럽과 미국의 산물이다. 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문화가 정체되어 온 후진적인 지역으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서양국가들이 비서양 지역을 식민 지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불평등한 세계질서는 힘의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결과라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사나 세계사의 실제 사실과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또 그것은 상당 부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야 되겠는가? 먼저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2) 유럽중심주의와 그 역사학 '유럽'은 근대의 산물 요사이 유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 때 배낭여행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관광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가보지는 않았다 해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니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하면 그 이미지가 대체로 머리에 떠오른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 끝의 섬나라인 영국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우랄 산맥까지의 러시아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대륙이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리적 단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럽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혈통이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하나의 단위로 생각된다. 유럽 사람들이 백인이며, 또 생활양식, 언어, 문화, 종교 등 문화적 면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생각될만하다. ▲ 현대의 유럽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이런 모습의 '유럽'은 고대에는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최근 몇 세기 사이, 즉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7세기부터이나 그리스 시대에 유럽은 그리스 반도 전체이거나 그 일부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유럽과는 상관이 없다. ▲ 고대 로마의 판도 로마시대에도 오늘날 유럽의 경계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영토가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의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지역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기독교가 믿어지는 지역을 의미했다. 이런 생각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고 그 후 두 세력권이 경쟁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권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1세기 이후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빼앗으려 한 십자군 전쟁 때에 강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권에 속하지만 그리스 정교를 믿는 발칸 반도나 러시아 같은 지역은 카톨릭 지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은 15세기까지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세계라는 생각이 깨지고 대신 세속적인 가치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럼 점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세계를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유럽을 그 최고인 '문명' 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은 지역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야만'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이 합리성, 근대성, 자유,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로 생각된 반면 비유럽은 비합리성, 야만성, 부자유, 정체(停滯)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유럽'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문명이 모든 비유럽 문명에 비해 독특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가치관, 나아가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근대에 만들어졌으니 유럽중심주의도 당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문명이 우월하다는 18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 그 결과인 비유럽세계의 지배로 현실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문명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인류사 전체가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유럽의 다른 모든 문명들은 근대 유럽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자 부분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유럽 문명들의 비중도 크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중심주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유럽예외주의이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예외주의는 말 그대로 유럽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유럽 외에 어디에서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 세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세계사의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예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며 유럽이 성취한 것을 '유럽의 기적'이니 뭐니 하며 치켜세운다. 중세도시, 산업화,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주의 등등 유럽이 이룩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성과라는 것이다. ▲ 사이드 (Said, Edward W,)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이라는 책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달리 오리엔탈리즘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을 말한다. 16세기부터 시작되나 특히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에, 선교사 · 관리 · 학자 · 상인 · 여행자 등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나 글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세계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박해받은 선교사,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는 식민지 관리나 어용학자들이 아시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문명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나 독자성, 창조성은 대체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아시아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럽과 비교하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전통적인 성격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진보와 문명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는 덜 성숙하고 미개하여 스스로는 발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세계사가 당연히 인류의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유럽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보기 제1-(1)강 우리 눈으로 세계사 보기 ☞ 동영상강의 바로가기 제1-(2)강 우리 눈으로 세계사 보기 ☞ 동영상강의 바로가기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Board 추천글 2009.07.15 바람의종 R 24275
닭 팔아 월사금 쥐어주고 조그맣게 돌아선 어매 [김용택의 강가에서] ② 닭에 대한 시 한편, 기억 하나 학교 쫓겨나 삼십리 자갈길 터덜터덜 집으로 아버지는 말없이 보리만 베고… 가슴이 꽉 메어왔다, 눈물 속에 어른어른 한편의 시 강추위가 와도 강물은 얼지 않았다. 강추위가 와도 강물이 얼지 않은 것은 강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며 비 쌍피로 비 띠를 때리며 큰집 형님은 이러면 손핸디, 하며 패를 거두어간다. 벌써 7피다. 뒷산 밤나무에는 익지 않은 밤송이들이 떨어지지 않고 웅숭크린 새들처럼 산그늘 속에 매달려 겨울을 지내고 있다. 광을 판 이웃 동네 내 동갑내기는 바지춤을 추키며 이런 니기미 좆도 겁나게 추어부네 니미럴, 어치고 되얏서 시방, 입에다가 욕을 달고 으으으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 앉는다. 잔돈이 한쪽으로 몰리고 한쪽이 죽은 열이레 달이 떠오른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 날 아침 강물이 꽝꽝 얼었었다. 어찌나 추웠던지 얼음장 금가는 소리가 아침까지 산을 울렸고 강기슭이 밤 새워 운 어머니 입술처럼 하얗게 부르텄었다. 제사상을 차리고, 영정 속의 잘 생긴 아버지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이지만 여전히 젊다. 형님이 술을 따른다. 술잔을 올려놓고 아버지를 생각한다. 나 죽으면 국수를 제사상에 차려 놓거라. 아버지의 별명은 국수 일곱 그릇이었다. 잔치 집에 가셔서 국수를 일곱 그릇이나 잡수셨다고 했다. 설이 가까운 아버님의 기일에 동생들은 오지 않는다. 군산 사는 작은누이, 그 아들 둘, 나, 내 아내, 딸, 그리고 큰집 형님만 절을 한다. 달이 밝다. 허물어진 담과 지붕 위에 달빛이 누추하다. 한쪽이 헐린 빈집 지붕 위를 지나는 달은 언제 보아도 을씨년스럽다. 오랫동안 나는 강에 가지 않았다. 큰집에서는 결정적일 때 또 누가 싼 모양이다. 어어! 고함소리가 지붕 위로 솟는다. 강추위가 귀때기를 베어가게 추워도 강물은 얼지 않는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돌아눕고 돌아눕는다. 내 방은 그렇게 달빛으로 돌아누우며 물소리를 듣는 방이다. 외풍으로 코끝이 차다. 책장에는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시집들이 나란히 꽂혀 죽은 듯이 조용하다. 달이 지려면 멀었다. 아버님은 헛기침을 하시며 뒷산을 오르시다가, 달빛 아래 우리 집을 한번 돌아다본다. 빈 집터 닭장에서 목이 쇤 폐계가 운다. - 졸시 <폐계> 전문 » 김용택 시인 ● 한 가지 기억 학교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방이 교문 앞 게시판에 붙은 지 3일째다. 오늘은 학교에 가자마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지난주에 집에 갈 차비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걸어가야 한다. 길은 자갈길 14킬로다. 날은 더웠다. 길을 나서서 갈 길을 바라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굽이굽이 하얗게 멀리 아득하다. 저 멀고 먼 길을 나는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걷자. 하얀 자갈길에 불볕이 이글거리고 길은 팍팍하다. 훅훅 찌고 팍팍…집에 가봐야 돈이…찔레꽃 덤불은 더욱 희다 1킬로도 가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솟고 속옷을 입지 않은 등의 땀으로 교복이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집에 가야 돈이 없을 텐데. 주저앉고 싶고 학교로 되돌아가고 싶다.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학교가 멀리 보인다. 보리 베고 모내는 철이다. 하얀 찔레꽃덤불들이 유월의 햇살 아래 더욱 희다. 평지를 두 시간쯤 걸었다. 날은 훅훅 찌고, 자꾸 숨이 턱에 찬다. 이 비탈길이 갈재다. 갈재 몰랑에 올라서서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본다. 까마득한 곳에 순창읍이 희미하다. 여기저기 보릿대 태우는 연기가 솟고 있다. 땀으로 옷이 다 젖었다. 초가집이 저만치…징검다리 건너 보리밭…발길 무겁고 겁난다 남은 길도 멀다. 신작로 길로 멀리 돌아가지 않고 전쟁 때 죽은 빨치산들을 묻었다는 공동산이라는 재를 넘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공동산 산꼭대기에 올라서자 멀리 우리 동네를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보인다. 집이 가까워 올수록 나의 발길은 무겁고 겁이 난다. 동네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허리를 펴고 서서 나에게 슨 말들인가를 했다. 동네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에 다다랐다. 회색으로 변한 초가지붕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있었다. 강 건너 우리 집 밭이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리를 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조금 앞서 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답했다. 집에 들르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해는 한낮이 조금 지나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리 밭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만큼에서 보리를 베고 있었다. 불렀다, 두번 세번…붉은 허리와 검은 얼굴…놀란 어머니 “가자!” 나는 밭가에 서서 어머니를 불렀다. 몇 번 불러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보리 베어지는 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베어 눕혀놓은 보리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어머니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다시 불렀다. 그때서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문득 일어섰다. 한 손에는 낫이, 한 손에는 보리가 쥐여져 있었다. 어머니는 놀랐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이 다시 허리를 굽혀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아버지 쪽에서 보리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보리 위로 드러난 아버지의 구멍 난 러닝셔츠 사이로 붉게 탄 허리 살이 보였다. 어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더니, 땀을 닦고 옷의 먼지를 툴툴 털면서 “가자!” 하며 앞서 밭을 걸어 나갔다. 징검다리에 이르자 어머니는 징검다리에서 얼굴을 씻었다. 검게 탄 얼굴이 땀 때문에 상기되어 평소보다 하얗게 보였다. 얼굴을 씻었어도 어머니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땀방울들이 투명해 보였다. 망태에 담고…들길 지나 장으로…그 돈이 다 였다 집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어디선가 보리를 한줌 들고 나오더니, 마당과 앞 텃논에서 놀고 있는 우리 집 닭들을 구구구구 불러들였다. 보리들이 마당에 툭툭 떨어지고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닭들이 마당으로 후두두두 날개를 펴고 달려 들어왔다. 어머니는 닭을 천천히 부르며 닭장 안으로 보리를 흩뿌렸다. 벌건 대낮인데도 닭들은 보리알을 따라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닭들이 어느 정도 닭장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닭장 문을 닫고 망태를 들고 오시더니, 다시 닭장 문을 열고 닭들을 한 마리씩 잡아 망태에 담기 시작했다. “가자.” 어머니가 앞장을 서셨다. 차 타는 곳까지 30분을 걸어야 한다. 들길을 지나고 마을을 지났다. 차를 타고 갈담 장으로 갔다. 염소나 닭이나 오리나 강아지를 파는 장 한쪽 구석으로 갔다. 영계들은 금방 팔렸다. 어머니는 회비하고 내가 순창으로 갈 차비를 주었다. 닭 판돈은 그 돈이 다였다. “어매는 어치고 헐라고?” “나는 걸어갈란다.” 나는 가슴이 꽉 메여 왔다. 어머니는 빈 망태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매는 어치고?”…뽀얀 먼지 뒤로하고…비틀 하시는, 아! 어머니 “차 간다. 어서 가거라.” 나는 차를 탔다. 내가 차에 오르자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신작로 길로 들어섰다. 한참 후에 차가 움직였다. 차가 차부를 벗어나 조금 가니, 저기 조그마한 어머니가 뙤약볕 속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내가 탄 차가 지나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차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앞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며 나는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리만 베던 아버지 모습이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뽀얀 먼지 속에서 자갈을 잘못 디뎠는지 몸이 비틀거렸다. 아! 어머니. 나는 돈을 꼭 쥐었다. 점심을 굶은 어머니는 뙤약볕이 내려 쬐는 시오리 신작로 길을 또 걸어야 한다.
Board 추천글 2009.07.13 바람의종 R 27607
http://www.hani.co.kr/arti/SERIES/183/288458.html 강물의 ‘갈색 울음’ 고기가 떠났고 사람들도 뒤따른다 김용택의 강가에서 ① 다시 선 강가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의 산문 ‘강가에서’를 매주 화요일에 싣습니다. 산문 연재를 위해 13년 만에 고향 집으로 다시 들어간 시인이 고향 마을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들려줄 것입니다. ‘화무삼일홍’ 너무 허망한 봄 삶도 그러하니 건방떨지 말라 이 산 저 산 꽃들이 한 차례 산과 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산천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간다.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그 사이를 가르며 보라색 오동 꽃이 피어난다. 오동나무 오동 꽃이 피어나는 산에 꾀꼬리가 울며 노랗게 솟으면 층층나무, 때죽나무, 이팝나무 같은 큰 나무에 하얀 꽃이 핀다. 커다란 나무에 핀 하얀 초여름의 꽃들은 첫 출산의 고통을 통과한 여인처럼 성숙해 보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이제 반성은 끝났다. 이제 지루한 녹음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지리라. » 김용택 시인 올해는 꽃들이 열흘 이상 앞서 피었다가 졌다. 섬진강에 매화꽃이 핀다고 온갖 난리(정말 매화꽃이 핀 곡성, 구례, 화개, 광양, 하동 쪽에 가면 꽃이 ‘난리를 피운다’는 말이 맞다.)들을 피우다가 구례 산동 산수유로 그 난리가 옮겨 붙더니, 이게 웬일인가. 이 꽃 저 꽃 온갖 지초들이 그 시기를 앞당겨 한꺼번에 우우우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벚꽃이 피고 산벚꽃이 피고 산복숭아꽃이 피고 그 사이사이에 진달래가 피며, 네가 먼저 피어라, 아니다 나는 아직 필 때가 아니니 네가 먼저 피어라, 사양하고 권하며 이렇게 저렇게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꽃들이 순서를 지키며 차례차례 피어나야 하는데, 이놈의 꽃들이 한꺼번에 무엇에 쫓기듯 우우우 피어나는 것이다. 꽃들이 그렇게 우우 피었다가 가 버리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날씨가 갑자기 무더워져서일 터인데, 꽃들이 하루나 이틀 동안만 피었다가 금세 또 우수수 져 버리는 게 아닌가. 산벚꽃이 피면 그래도 한 사나흘은 그 화사한 꽃이 산을 환하게 물들이며 사람들 속을 환장하게 뒤집어 놓기도 하는데, 이건 아니었다. 해 저문 날 산을 바라보며 저 산 산벚꽃 좀 봐라! 하고 일렀다가 그 이튿날 그 꽃을 산에서 찾으면 그냥 희미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꽃 볼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꽃이 금세 지니, 꽃 피고 지는 일이 아무리 허망하다 하나, 이건 너무 허망한 일이다. 내가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예는 없었던 것 같다. 더디게 온 봄이 이렇게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털고 뜬 것은 기후 변화가 분명해 보인다. 봄 날씨가 추웠다가 따듯해졌다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기온이 올라가야 하는데, 이놈의 기온이 갑자기 올라가 버리니, 나무와 풀들이 그 변화에 재빨리 적응한 것이다.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것은 자연 아닌가. 사람들만 늘 더디게 뒷북을 치며 호들갑들을 떤다. 아무튼 봄은 “날씨가 왜 저렇게 미쳤다냐?”라는 우리 어머니의 험한 말씀만 남기고 허망하게 떠났다. 내가 근무하는 작은 학교에는 유독 꽃들이 많이 피었다. 80년에 가까운 연륜을 자랑하는 벚나무의 꽃은 그 꽃빛이 희고 탐스럽다. 그 꽃이 피었다가 지며 꽃잎들이 내가 앉아 있는 집 지붕을 넘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감탄하고 감동했었다. 그러나 허망하다. 꽃들은 벌써 그 흔적도 없는 것이다. 거짓말 같다. 생이 또한 이런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일이 이렇게 다 일장춘몽이 아닌가. 열흘 가는 꽃 없다더니, 올해는 열흘은커녕 사흘 가는 꽃도 드물어졌다. 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꼬라지’하고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가. 사람들아! 지난봄 그 허망한 꽃들을 생각하라. 그리고 제발 건방들 떨지 마라. 5월이다. 강가에 다시 섰다. 강물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강물은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강물은 우리의 거울이다. 강물이 죽으면 우리들이 죽고, 강물에서 고기들이 쫓겨나면 사람들도 강물에서 쫓겨날 날이 머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 앞 강물이 소 탕 물(소 외양간에서 나오는 물)같이 갈색으로 변했다. 올봄 비가 오지 않아서일 터이지만 강물에서 냄새가 나고, 고기들도 눈에 뜨이게 줄어들었다. “다 망해부렀다” 어머니의 한탄 해 저문 산 그늘 서러운 찔레꽃 나는 앞으로 강으로 세상을 질타하고, 강으로 울고, 강으로 웃고, 강으로 분노하고, 강으로 세상의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강가에 살고 있는 내 삶이 그러하였다. 산이 강을 두고 가지 않은 것처럼 나는 강을 두고 어디로 간 적이 없다. 징검다리 징검돌에 앉아 빨래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고, 흐르는 강물에 손을 담근 이래 나는 강물을 떠나지 않았다. 내 일생은 눈을 뜨면 강물이었다. 잠을 잘 때도 늘 물소리가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저문 물은 부산하고, 새벽 물 소리는 조용했으며, 아침 물 소리는 서서히 깨어났다. 그 강물을 따라 살던 마을 사람들 중에 아직도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강 그 사람들의 세세한 일상도 여기 옮길 것이다. 나는 그 물을 머리맡에 두고 평생을 살았다. 어디 가서 잠을 자든 그 강물은 내 머리맡에서 흐른다. 그곳이 어디든 잠을 자다가 조금만 마음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면 금세 강물 소리가 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내가 사는 마을 산과 강은, 그리고 거기 사는 오래된 마을 사람들은 내 몸과 같다. 내 육체는 내 마을 흙으로 빚어졌다. 내 피는 그 강물로 이어져 있어서 강물 아프면 내가 아프고 그 땅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프다. 그 강물이 울면 나는 강물을 뒤로하고 돌아앉아 산을 안고 운다. 나는 그 강가에서 태어나 그 강가에서 자라 그 강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일찍,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사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가치에 내 생을 걸었고, 또 그렇게 아이들 곁에서 강을 노래하며 살았고, 또 그렇게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내가 생긴 그만큼만 살 것이고 또 그만큼만 쓸 것이다. 강에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선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그 강 길이 옛길이나 사람들은 떠나가고 또 죽고, 사람들이 강을 떠나는 것처럼 고기들도 강을 떠났다. 어느 날 10여년 전에 찍은 동네 어른들 사진을 보았는데, 많은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아침에 어머니와 밥을 먹으며 동네 사람들이 모두 28명이라고 했더니, 남은 사람들도 서넛 빼고는 성한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동네가 다 망해부렀다”고 하셨다. 강변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해 저문 산그늘 속의 찔레꽃은 왜 그리 서러운지, 산그늘 아래 파르르 살아나는 검푸른 풀빛은 지금도 나를 긴장시키는지. 산과 산,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들이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 나는 이때를 못 견뎌했다. 그리하여 나는 땅거미가 밀려오는 이 어둠을 견디지 못해 산과 강변을 헤매곤 했다. 그러다가 어둠이 밀려오면 모든 사물들이 편안해진다. 그러면 나도 마음이 가라앉아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불을 밝혔던 것이다. 강물은 늘 자기가 거느린 모든 것들을 강물로 다 불러들여 흐르게 한다. 나도 강물을 따라 얼마나 흘렀던가. 내 글이 내 나라 내 산천에 저 강물처럼 굽이치며 하얗게 부서지고, 산굽이를 힘껏 들이받으며 외치고, 작은 자갈돌들을 돌아가고, 희고 고운 모래 위를 흐르며 그렇게 또 유유하고 자적하기를 바란다. 지금 강변엔 짙은 남청색 붓꽃이 한창이다. 붓꽃이 활짝 피기 전 그 붓끝 같은 붓꽃을 뽑아 침을 묻혀 바위에 이름을 쓰던 생각이 난다. 김용택 시인 » 일러스트레이터 김병호 일러스트레이터 김병호 1969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람.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그린 책으로 <똥은 참 대단해> <짱구네 고추밭 소동> <바보별> <싸움소> <똥 싼 할머니> <저것이 무엇인고> 등이 있음. [한겨레 창간 20돌] 연재 작가 공지영·김용택·안도현 대담
Board 추천글 2009.07.10 바람의종 R 25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