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SERIES/183/288458.html 강물의 ‘갈색 울음’ 고기가 떠났고 사람들도 뒤따른다 김용택의 강가에서 ① 다시 선 강가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의 산문 ‘강가에서’를 매주 화요일에 싣습니다. 산문 연재를 위해 13년 만에 고향 집으로 다시 들어간 시인이 고향 마을 사람들과 자연,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들려줄 것입니다. ‘화무삼일홍’ 너무 허망한 봄 삶도 그러하니 건방떨지 말라 이 산 저 산 꽃들이 한 차례 산과 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산천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간다.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그 사이를 가르며 보라색 오동 꽃이 피어난다. 오동나무 오동 꽃이 피어나는 산에 꾀꼬리가 울며 노랗게 솟으면 층층나무, 때죽나무, 이팝나무 같은 큰 나무에 하얀 꽃이 핀다. 커다란 나무에 핀 하얀 초여름의 꽃들은 첫 출산의 고통을 통과한 여인처럼 성숙해 보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이제 반성은 끝났다. 이제 지루한 녹음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지리라. » 김용택 시인 올해는 꽃들이 열흘 이상 앞서 피었다가 졌다. 섬진강에 매화꽃이 핀다고 온갖 난리(정말 매화꽃이 핀 곡성, 구례, 화개, 광양, 하동 쪽에 가면 꽃이 ‘난리를 피운다’는 말이 맞다.)들을 피우다가 구례 산동 산수유로 그 난리가 옮겨 붙더니, 이게 웬일인가. 이 꽃 저 꽃 온갖 지초들이 그 시기를 앞당겨 한꺼번에 우우우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벚꽃이 피고 산벚꽃이 피고 산복숭아꽃이 피고 그 사이사이에 진달래가 피며, 네가 먼저 피어라, 아니다 나는 아직 필 때가 아니니 네가 먼저 피어라, 사양하고 권하며 이렇게 저렇게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꽃들이 순서를 지키며 차례차례 피어나야 하는데, 이놈의 꽃들이 한꺼번에 무엇에 쫓기듯 우우우 피어나는 것이다. 꽃들이 그렇게 우우 피었다가 가 버리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날씨가 갑자기 무더워져서일 터인데, 꽃들이 하루나 이틀 동안만 피었다가 금세 또 우수수 져 버리는 게 아닌가. 산벚꽃이 피면 그래도 한 사나흘은 그 화사한 꽃이 산을 환하게 물들이며 사람들 속을 환장하게 뒤집어 놓기도 하는데, 이건 아니었다. 해 저문 날 산을 바라보며 저 산 산벚꽃 좀 봐라! 하고 일렀다가 그 이튿날 그 꽃을 산에서 찾으면 그냥 희미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꽃 볼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꽃이 금세 지니, 꽃 피고 지는 일이 아무리 허망하다 하나, 이건 너무 허망한 일이다. 내가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예는 없었던 것 같다. 더디게 온 봄이 이렇게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털고 뜬 것은 기후 변화가 분명해 보인다. 봄 날씨가 추웠다가 따듯해졌다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기온이 올라가야 하는데, 이놈의 기온이 갑자기 올라가 버리니, 나무와 풀들이 그 변화에 재빨리 적응한 것이다.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것은 자연 아닌가. 사람들만 늘 더디게 뒷북을 치며 호들갑들을 떤다. 아무튼 봄은 “날씨가 왜 저렇게 미쳤다냐?”라는 우리 어머니의 험한 말씀만 남기고 허망하게 떠났다. 내가 근무하는 작은 학교에는 유독 꽃들이 많이 피었다. 80년에 가까운 연륜을 자랑하는 벚나무의 꽃은 그 꽃빛이 희고 탐스럽다. 그 꽃이 피었다가 지며 꽃잎들이 내가 앉아 있는 집 지붕을 넘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감탄하고 감동했었다. 그러나 허망하다. 꽃들은 벌써 그 흔적도 없는 것이다. 거짓말 같다. 생이 또한 이런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일이 이렇게 다 일장춘몽이 아닌가. 열흘 가는 꽃 없다더니, 올해는 열흘은커녕 사흘 가는 꽃도 드물어졌다. 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꼬라지’하고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가. 사람들아! 지난봄 그 허망한 꽃들을 생각하라. 그리고 제발 건방들 떨지 마라. 5월이다. 강가에 다시 섰다. 강물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강물은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강물은 우리의 거울이다. 강물이 죽으면 우리들이 죽고, 강물에서 고기들이 쫓겨나면 사람들도 강물에서 쫓겨날 날이 머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 앞 강물이 소 탕 물(소 외양간에서 나오는 물)같이 갈색으로 변했다. 올봄 비가 오지 않아서일 터이지만 강물에서 냄새가 나고, 고기들도 눈에 뜨이게 줄어들었다. “다 망해부렀다” 어머니의 한탄 해 저문 산 그늘 서러운 찔레꽃 나는 앞으로 강으로 세상을 질타하고, 강으로 울고, 강으로 웃고, 강으로 분노하고, 강으로 세상의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강가에 살고 있는 내 삶이 그러하였다. 산이 강을 두고 가지 않은 것처럼 나는 강을 두고 어디로 간 적이 없다. 징검다리 징검돌에 앉아 빨래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고, 흐르는 강물에 손을 담근 이래 나는 강물을 떠나지 않았다. 내 일생은 눈을 뜨면 강물이었다. 잠을 잘 때도 늘 물소리가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저문 물은 부산하고, 새벽 물 소리는 조용했으며, 아침 물 소리는 서서히 깨어났다. 그 강물을 따라 살던 마을 사람들 중에 아직도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강 그 사람들의 세세한 일상도 여기 옮길 것이다. 나는 그 물을 머리맡에 두고 평생을 살았다. 어디 가서 잠을 자든 그 강물은 내 머리맡에서 흐른다. 그곳이 어디든 잠을 자다가 조금만 마음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면 금세 강물 소리가 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내가 사는 마을 산과 강은, 그리고 거기 사는 오래된 마을 사람들은 내 몸과 같다. 내 육체는 내 마을 흙으로 빚어졌다. 내 피는 그 강물로 이어져 있어서 강물 아프면 내가 아프고 그 땅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프다. 그 강물이 울면 나는 강물을 뒤로하고 돌아앉아 산을 안고 운다. 나는 그 강가에서 태어나 그 강가에서 자라 그 강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일찍,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사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가치에 내 생을 걸었고, 또 그렇게 아이들 곁에서 강을 노래하며 살았고, 또 그렇게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내가 생긴 그만큼만 살 것이고 또 그만큼만 쓸 것이다. 강에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선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그 강 길이 옛길이나 사람들은 떠나가고 또 죽고, 사람들이 강을 떠나는 것처럼 고기들도 강을 떠났다. 어느 날 10여년 전에 찍은 동네 어른들 사진을 보았는데, 많은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아침에 어머니와 밥을 먹으며 동네 사람들이 모두 28명이라고 했더니, 남은 사람들도 서넛 빼고는 성한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동네가 다 망해부렀다”고 하셨다. 강변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해 저문 산그늘 속의 찔레꽃은 왜 그리 서러운지, 산그늘 아래 파르르 살아나는 검푸른 풀빛은 지금도 나를 긴장시키는지. 산과 산,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들이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 나는 이때를 못 견뎌했다. 그리하여 나는 땅거미가 밀려오는 이 어둠을 견디지 못해 산과 강변을 헤매곤 했다. 그러다가 어둠이 밀려오면 모든 사물들이 편안해진다. 그러면 나도 마음이 가라앉아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 불을 밝혔던 것이다. 강물은 늘 자기가 거느린 모든 것들을 강물로 다 불러들여 흐르게 한다. 나도 강물을 따라 얼마나 흘렀던가. 내 글이 내 나라 내 산천에 저 강물처럼 굽이치며 하얗게 부서지고, 산굽이를 힘껏 들이받으며 외치고, 작은 자갈돌들을 돌아가고, 희고 고운 모래 위를 흐르며 그렇게 또 유유하고 자적하기를 바란다. 지금 강변엔 짙은 남청색 붓꽃이 한창이다. 붓꽃이 활짝 피기 전 그 붓끝 같은 붓꽃을 뽑아 침을 묻혀 바위에 이름을 쓰던 생각이 난다. 김용택 시인 » 일러스트레이터 김병호 일러스트레이터 김병호 1969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람.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그린 책으로 <똥은 참 대단해> <짱구네 고추밭 소동> <바보별> <싸움소> <똥 싼 할머니> <저것이 무엇인고> 등이 있음. [한겨레 창간 20돌] 연재 작가 공지영·김용택·안도현 대담
Board 추천글 2009.07.10 바람의종 R 25040
.. 어제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번 국토부에서 발표 한 계획에는 4개의 보 계획이 빠졌다고 합니다. 처음 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개발 계획이 늘어나게 될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뒤 늦게 밝혀진 4개의 보 중 2개의 보는 낙동강 상류인 하회와 구담 쪽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정부는 왜 이 두 구간에 대한 계획을 발표 당시 감추어 두었을까요. 아래 사진은 뒤늦게 개발 계획이 밝혀진 옥동- 마애- 병산- 하회- 구담의 풍경입니다. 이 풍경들의 무너짐 뒤에 올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지금 저는 수의를 입은 기분으로 낙동강을 걷고 있습니다. 하회마을 전경 . 옥동 . 마애 . 병산- 하회 .. 구담습지 아래 글은 지난 번 LA.Time지 기사가 나가고 난 후 Jin Hee Hann님께서 제 홈피에 남긴 글입니다. 이역에서도 느끼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닥아 오지 않는 이유는 이 글에서 지적한 것 처럼 <자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강은 너무나 큰 아픔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 아픔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작은 힘들이지만 그 힘들을 모아가는 단체나 개인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고 나눌수 있는 실천을 선행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닥아 올 재앙을 염려하는 것 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나는 너무나 슬픕니다. I am so saddened > - Jin Hee Hann 전 LA에 거주하는 한진희라는 한국계 미국여인입니다. 전 읽고 쓸줄을 알지만 한국어 자판을 사용할 수 없네요. 엘에이 타임즈지 앞기사 에서 오늘 아침 산과 강을 구하고자 분투하는 한 믿을수없는 승려에 관한 기사를 막 읽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용기에 깊이 감동했고 그녀의 영웅성에 대항하는 공공의 분노에대해서 슬픔을 느꼈습니다. 27년간 한국밖에서 살며 다른 문화권에 있지만 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10년전쯤 연세대 국제학생프로그램에 다니며 도시의 숨막힘과 광기에서 벋어나고자 서울바깥으로 자주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산에갔고 도보여행을 했으며 강을 따라 걸었고 섬에 갔고 시골로 차를 얻어타기로 했고 그것의 단순미에 경탄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자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는다고 느꼇습니다. 한국정부가 국제 관람객을 유치하기위해 국가의 이미지를 재브랜드화한다는 지난주 기사를 막 읽었습니다. 저는 한국이 외국인들에게 정말로 제공해야 할 것은 쇼핑 구역이나 새롭고 세련된 마케팅 계획이 아닌 나라의 본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평이한 어떤 것을 보기위해 한국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의 산(예,어떤 다른 산보다 아름다운)과 강을 보러 갈것입니다. 누군가 한국정부가 각성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환경적인 이슈만이 아닌 경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스님의 용기에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My name is Jin Hee Hann and I'm a Korean American woman living in Los Angeles. I can read/write Korean but just can't type. I just read an article this morning in the Los Angeles Time newspaper, front page, about this incredible monk's struggle to save a mountain and a river. I am so moved by her courage and saddened by the public's outrage against her heroism. Having lived outside of Korea for the last 27 years and been exposed to other cultures, I think I have a different perspective on this issue. I remember when I attended Yonsei University's International student program about 10 years ago, I remember frequently taking trains out of Seoul at every chance I had to escape the grueling city and its craziness. We went to mountains, hiked, walked along streams, went to islands, hitchhiked to sigols and marveled at its simple beauty. I remember feeling like Koreans just didn't appreciate the magnificence of their country's beauty. I just recently read another article in L.A Times last week about Korean government's effort to rebrand the country's image to draw in international tourists. I thought to myself that the only genuine and beautiful thing that Korea really offered to foreigners is its raw beauty of the land, not its shopping districts, not its new savvy marketing ploys. We're not dumb. We're not going to go visit Korea to see yet another generic looking tourist attraction. We'll go there to see its mountains (yes, it IS more beautiful than other mountains!) and its rivers. So, someone needs to tell the Korean government to wake up. This is not only an environmental issue but an economic one as well. Thank you, monk, for your courage. I wish I could tell you all this in person. I think you're an amazing person. ▶ 강가에서
Board 추천글 2009.06.23 바람의종 R 23828
삶의 마지막 동행자 호스피스계 대모 노유자 수녀에게 듣는 죽음이란 “삶 마디마디 맺힌 매듭풀고… 화해하고 편안히 떠나는게 ‘존엄한 죽음’ 이죠” 20090616003609 ◇노유자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장은 “호스피스는 환자의 한마디 말과 손짓의 숨은 뜻, 눈 깜박임, 침묵 속에서도 몸과 마음, 영혼의 총체적 요구와 절규를 들어주는 적극적인 경청, 특별한 의사소통”이라고 말한다.“죽음은 떠나는 자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남은 자들의 사건입니다. 말기 환자가 삶을 얼마나 존엄하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 남은 가족의 행·불행이 뒤바뀌고 삶의 질이 달라지거든요.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시기에 생명운동이자 안락사 예방운동으로서 호스피스는 중요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안에 위치한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 죽음으로의 여정 위에 놓인 말기 환자들의 마지막 동행자이자 환자 가족들의 보호자로 30년을 살아온 노유자(66·쟌 드 마리 수녀) 센터장을 지난 15일 센터에서 만났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돌아오는 것은 울음뿐”이라지만 정작 수녀는 밝고 호탕한 웃음으로 센터를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녀님을 못 만나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것” 노 수녀의 촘촘한 일상은 연예인 못지않다. 무료 가정방문을 통해 돌보고 있는 말기 환자는 17명. 1주일에 2∼3회씩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로 구성된 호스피스팀을 이끌고 환자들을 찾아나선다. 환자의 몸과 마음,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일은 물론 가족들과의 화해, 이별준비를 돕는 게 그의 소명이다. ‘애프터서비스’도 중요하다. 세상을 떠난 환자의 영안실과 장례식, 삼우제, 기일을 챙기는 일은 당연한 예의다. 슬픔에 잠긴 사별가족의 전화 상담 역시 중요한 일과다. 15년 된 사별가족이 지금껏 연락을 해온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의 벽을 넘어 전국 각지에서 호스피스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수녀는 지방으로 강의를 떠날 때 사별가족을 동행시키기도 한다. 자동차는 또하나의 달리는 상담소가 되기 때문이다. 기자와의 인터뷰도 호스피스센터에서 시작해 달리는 자동차 안으로 이어졌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도 수녀의 몫이다. 외출이 쉽지 않은 환자들을 데려와 수녀원 정원을 산책시키는 일, 미술, 원예, 음악, 아로마 치료 등을 해주는 것도 센터에서 이뤄진다. 소명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녀는 “호스피스를 통해 환자가 가족 곁에서 공경과 사랑 속에 삶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는 모습은 자녀들에게 외국 유학보다 큰 교육효과가 있다”고 자부한다.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심이 담긴 유언을 남겨 보세요. 칼 들고 나갔을지 모르는 자식도 칼자루를 떨어뜨리게 돼 있어요. 그러니 호스피스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운동이 됩니다.” 1970년 간호 수녀로 시작해 가톨릭대 간호학과 교수, 가톨릭대 성모병원 수간호사, 성바오로 병원장 등이 맡겨질 때마다 “울면서 끌려갔다”는 수녀는 환자를 직접 돌보는 꿈이 이뤄진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했다. 호스피스 전문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38년 전. 간호수녀로 돌봤던 간암 말기의 34세 미혼여성이 “수녀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너무 억울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저와 같은 환자를 많이 도와주시고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요”라고 했던 유언이 그를 인도했다. 80년대 의사 간호사 등을 모아 호스피스 운동을 펼쳤던 수녀는 꾸준히 각국의 호스피스 학회를 탐방하다 2002년 아예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유럽에 호스피스 연수를 2년간 다녀왔다. 그리고 가정호스피스센터를 개관한 게 2007년 3월이다. 최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존엄사 문제에 대해 수녀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이어야 한다”면서 “가족, 경제적 상황, 체면 때문이 아닌 환자 본인의 생명 의지가 반영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 대리인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한 말기 환자가 가족들에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말해놓고 제겐 귓속말로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제 아파죽겠어도 오늘 다시 살고 싶은 게 본능이죠. 하나를 가진 사람이나 백개를 가진 사람이나 내려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괴로우니까 죽고자 하는 건데, 고통을 한껏 줄여줘서 끝까지 잘 살도록, 편안히 떠나도록 돕는 게 호스피스예요.” #존엄한 삶은 존엄한 죽음에서 시작돼 삶의 마디마다 맺힌 매듭을 풀고 화해 속에 “사랑합니다” 껴안고 떠나게 하는 일은 호스피스의 가장 큰 보람이다. 수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못다 이룬 일에 대한 후회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괴로워하더라”고 했다. 수녀는 암에 걸린 40대 남자가 죽기 전에 부인이 소원하던 혼배성사를 올리도록 도왔고 행복해하던 그들 부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유럽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말기 환자가 죽기 전까지 엄마, 아빠 두 단어를 발음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호스피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의 평생 희망을 죽기 전에 이루도록 도와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들에게 남은 인생을 원없이 살아보도록 돕는 한 편의 연극 예술이고 드라마입니다.” 호스피스 활성화를 위해 수녀의 마음은 바쁘다.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 호스피스가 유기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독립 호스피스센터가 국내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바오로 호스피스센터도 현재 100% 개인 후원에 의지해 무료로 운영돼 병동 건립은커녕 재정난에 시달린다. 유급으로 상근 간호사와 의사를 두고 맘껏 환자들을 찾고 싶지만 아직 욕심뿐이다. “아일랜드에서는 호스피스를 거쳐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가망 없는 치료에 매달려) 환자를 고생만 시켰다는 가족들의 후회와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은데,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는 일도 과제예요.” 규모에 치중하는 우리의 장례문화도 장애다. 수녀는 “죽은 후 대형 병원의 장례식장과 화환장식에 치중하느라 장례식의 전도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대학병원 4인실이나 6인실, 중환자실에서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이별 인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임종방 같은 병원 측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www.stphc.or.kr) 이용 및 후원 문의 (031)575-9971. 남양주=글·사진, 김은진 기자
Board 추천글 2009.06.18 바람의종 R 33413
성주괴공 成住壞空 이제 다시 안동으로 돌아왔습니다.물길 걷기를 시작하면서 벌써 5번째 안동 땅을 밟게 되지만 안동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지난 8일,정부는 4대강 개발사업의 마스터블렌을 발표했고, 눈 앞에는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현장이 펼져있습니다. 소송으로 서울을 오르 내리느라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고, 오늘에서야 겨우 국토부에 들어가 보도자료를 내려 읽어 보았고 이곳 저곳에서 발표한 성명서와 그에 대한 기사들도 챙겨 보았습니다. 그 모두 속에서 한결 같은 절망과 깊은 한숨이 느껴집니다. 저 역시 , 한조각 인연의 땅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들과 싸우는 것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제가 서있는 시점을 지워버리는 일이 더 쉽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저러한 상념 속을 걷다가 문득, 헐거워져 가는 탑신을 묵묵히 바치고 있는 신세동 칠층석탑의 지대석 금강역사를 만났습니다. 국보 16호 신세동 칠층 전탑 안동댐으로 올라가는 왼편 길목에 국보16호 신세동 칠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동안 수차례 이곳을 지났지만 이 탑이 눈에 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 그도 그럴것이 이 탑은 위의 사진에서 처럼 방음막으로 가려진 스산한 골목에 위치해 있었기에 설사 탑신을 스쳐 갔다해도, 그 탑이 우리나라의 국보였다고는 생각치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전탑은 화려한 주변의 풍경들과 동떨어진 채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은 몸체를 힘겹게 가누고 있습니다. .. 탑의 상륜부는 소실되었고, 탑신의 벽돌들은 틀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으며, 기단부의 문짝은 페인트칠한 나무판자로 붙여져 있었으며, 옥계석에는 풀들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대중석은 시멘으로 덮여 있었고 지대석인 사천왕과 팔부중상만이 안간힘으로 힘겹게 이 탑신을 받들고 있었습니다 옥개석 옥개석 기단부의 사천왕상과 금강팔부상 .. 기단부의 사천왕상 .. 빨간 화살표가 전탑이 위치한 곳이지만 안동댐 주변의 안내판에는 기제조차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헐거워져가고 있는 탑사 주변에는 숙박업소와 식당가, 드라마 촬영세트장, 그리고 불과 20-3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바로 앞에는 강을 파헤치는 역사(力史)의 현장이 펼져 있습니다. 조상의 얼과 문화를 상품화하고 이제 그 시선을 산하로 옮겨놓고 있으니 왜곡되는 것이 어찌 역사 뿐이겠으며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어찌 사람 뿐이겠습니까. ▶ 4대강 개발의 첫삽을 뜬 안동천 주변의 공사 현장
Board 추천글 2009.06.15 바람의종 R 2489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9941.html ‘암투병 소녀’와 ‘바보’ 하늘나라서 ‘접속’ “노 대통령 만나고 싶다” 글올리자 봉화서 ‘진짜’ 만남 3개월 뒤 하늘나라로…노 분향소에 아끼던 앨범으로 조문 송호진 기자 » 고 성민영씨(왼쪽)와 고 성민영씨를 만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출처 : 사람사는 세상(http://www.knowhow.or.kr) 암투병 고 성민영씨와 노 전 대통령 사연 공개 “봉하마을을 다녀와서 (성)민영이가 ‘살고 싶다’고 했었는데….” 작년 6월이었다. “3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던 의사의 말보다 소녀는 3개월을 더 버텨내고 있던 때였다. 18살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입엔 마스크를 씌웠다. 골육종 암이 덮쳐온 건 소녀 12살 때. 그 싸움을 이겨낼 무렵, 그래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복까지 사놓고 들뜬 소녀에게 불쑥 혈액암이 또 찾아왔다. 교복은 입지 못했다. 일반 학교를 가지 못한 소녀는 병을 꾹꾹 참아가며 화상으로 공부하는 경남 꿈사랑사이버학교로 갔다. 이곳엔 소녀와 비슷한 병과, 비슷한 희망을 가진 또래 친구들이 있다. 꿈사랑사이버학교 권도희 선생님은 “소원 들어주기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민영이의 소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거였죠”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편지를 썼다. 선생님은 노 전 대통령 홈페이지인 〈사람사는 세상〉에 “아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한번이라도 뵈었으면 하는데 뵐 수 있는 건가요”라고 적었다. 글엔 “이 편지가 과연 읽혀질까? 읽으시더라도 연락을 주시는게 가능할까”라는 걱정도 담겼다. 선생님의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와 노 전 대통령의 진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 봉하마을 자택 앞에서였다. 소녀는 분홍색 모자를 썼고, 노 전 대통령은 밀짚모자를 썼다. 노 전 대통령은 선생님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온 소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고 앉았다. 그리고 검정색 펜으로 글을 적어갔다.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 2008.6.26. 노무현” 권 선생님은 “지난해 3월까지 밖에 못 산다고 해서 아이가 힘들어했는데, 봉하마을에 갔다온 뒤로 기운을 냈어요. 살고싶다고 했으니까요”라고 떠올렸다. 선생님은 노 전 대통령 만남을 기념한 앨범을 만들어 아이에게 선물했다. 노 전 대통령 홈페이지에 감사 편지도 다시 보냈다. “너무 예쁜 민영이의 시간이 더 이상 멈추질 않았으면 합니다”라는 편지였다. 소녀는 노 전 대통령과의 추억이 담긴 앨범을 받아든 뒤 3개월을 더 살았다. 소녀가 떠난 지 8개월 만인 지난 5월 말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분향소 영정 앞에 소녀가 아끼던 앨범 한권이 올려졌다. 앨범엔 소녀가 마지막까지 다니던 학교 선생님들의 추모편지도 있었다. “저 하늘에서 이 편지를 보실 수 있으실런지요. 진작 이 앨범을 드릴 것을…. 그날 민영이의 손을 잡아주시던 그 따스한 손과 마음으로 살아오셨고, 그렇게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라는 편지였다. 하늘에서 다시 만난 ‘소녀와 대통령’의 사연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에서 근무한 신미희 전 행정관이 11일 〈사람사는 세상〉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지게 됐다. 신 전 행정관은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김해로 이사해 노 전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해왔다. 신 전 행정관은 이 글에서 “(당시) 대통령은 마음 아파하면서도 소녀를 위해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희망을 잃지 말라며 쾌유를 비는 말을 건네는 동안,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소녀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또 영정에 올려진 앨범과 추모편지를 보고 (노 전 대통령) 비서진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 신 전 행정관은 소녀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있는 경남꿈사랑사이버학교에 대한 관심도 부탁했다. 신 전 행정관의 글을 본 누리꾼들은 “두 분이 하늘에서라도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소녀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신미희 전 행정관이 <사람사는 세상>에 올린 글 ‘하늘나라에서 만난 대통령’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성민영. 예쁘고 해맑은 이 소녀에게 불행이 닥친 건 6~7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골육종이라는 암이 찾아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시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골육종과의 기나긴 싸움이 끝나갈 재작년 무렵, 이번엔 소녀의 몸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생겼습니다. 골육종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전이되는 경우는 국내외에서도 몇 안 되는 드문 경우라고 합니다. 간신히 병을 이겨내고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려고 할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백혈병은 소녀의 작은 몸을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항암 치료도 더 이상 할 수 없어 그저 상태가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병원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던 소녀에겐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보는 일이었습니다. 소녀는 정상적인 학교수업이 힘들어, 병마와 싸우며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화상강의를 통해 수업을 가르치는 경남 꿈사랑사이버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이 곳 선생님들이 소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나서게 됐습니다. 한 선생님이 지난 해 5월 노무현 대통령님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소녀의 사연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글을 올려 보는 일, 제 삶에 있어 두 번째가 될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님께 편지를 쓰는 건 제가 가르치는 아이의 조그마한 소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선생님의 편지는 너무 절절했습니다. “아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한번이라도 뵈었으면 하는데 뵐 수 있는 건가요? 민영이가 낫길 바라지만 앞일을 알 수가 없기에 급한 마음에 이렇게 몇 글자 남깁니다. 안되면 저희 민영이에게 힘내라고 한번만이라도 연락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런 편지 드리면서 이게 과연 읽혀질까, 읽으시더라도 연락해 주시는 게 가능할까, 찾아갔을 때 먼발치에서라도 민영이가 바라는 대로 대통령님을 뵐 수나 있을까…. 우리 민영이 말고도 더 힘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이 글이 올라가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두 사람의 만남을 소망하는 성원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소망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님 이 글 보시고 꼭 아이를 만나주셨으면 좋겠네요.” “꼭 뵙길 바랍니다. 노 대통령님은 약자를 돌보시는 분이시니 분명히 만나주실 것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꼭 건강하길 빌어요.” 수많은 응원이 이어졌습니다. 비서진들이 대통령님께 보고를 드렸고, 선생님들과 협의해 드디어 만날 날짜가 잡혔습니다. 지난해 6월 26일 소녀가 봉하마을을 찾았습니다. 방문객 수 백 여명을 맞이하고 난 대통령은 소녀와 가족들을 사저 앞으로 초대했습니다. 부모님, 동생, 선생님들과 함께 대통령을 만난 소녀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예쁘고 해맑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설레는 마음으로 소망을 이뤘습니다. 얘기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여러 장 찍었습니다. 대통령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이고 앉아 서명을 해서 선물로 줬습니다.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 2008.6.26.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 아파하면서도 소녀를 위해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희망을 잃지 말라며 쾌유를 비는 말을 건네는 동안,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소녀와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당신의 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가녀리고 창백한 소녀의 손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아쉽게 이별하고 나서 대통령은 말이 없었습니다. 소녀의 슬픈 처지에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나 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소녀는 대통령을 만난 뒤 생가 방명록에 들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빨리 나을게요. ^-^ 감사합니다. >-< ” 얼마 뒤 반가운 편지가 다시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올랐습니다. 선생님이 쓴 글이었습니다. “제가 이 학교에서 일하다 보니 한 해에도 정말 많은 아이들이 병마와 싸우다 사망합니다. 작년에도 저희 반 아이들을 4명이나 하늘나라로 보냈거든요. 그래서 실은 민영이의 나들이가 혹시라도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내심 조마조마하였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민영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정말 전날까지 찌푸렸던 하늘이 그날 아침 맑게 개어주었고 아파서 힘들어하던 아이가 그날만큼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평소 덕담의 사인은 잘 하지 않으신다던 대통령님께서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라고 써주신 내용은 아이에게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과의 만남 후 학교를 가지 못했던 민영이는 창원에서 저희들이 마련한 작은 음악회와 함께 어머니, 동생이 함께 오붓하게 식사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사이버 학교로 와서 저희들이 마련한 작은 이벤트에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재 민영이는 골육종 치료가 거의 끝난 상태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발병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항암 치료약이 듣지 않아 치료의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민영이 가족에게 더 이상의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지만 경제적으로 그리고 치료에도 아직은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너무 이쁜 민영이의 시간이 더 이상 멈추질 않았으면 합니다. 제 바람이 결코 욕심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러나 가족들과 선생님들과 대통령의 절박한 바람을 등지고 안타깝게도 소녀는 지난해 9월 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하늘나라로 먼저 간지 8달 만에 대통령님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봉하마을에 차려진 분향소에 민영이의 선생님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추모한 뒤 한 권의 책을 대통령님 영전에 바쳤습니다. 대통령님과 민영이의 만남을 기념해 만든 앨범이었습니다. 앨범 맨 앞 페이지엔 민영이 학교 ‘교직원 일동’으로 된 추모편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다가 비서진들은 눈물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저 하늘에서 이 편지를 보실 수 있으실런지요. 진작 이 앨범을 드릴 것을, 너무 늦어 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작년 이맘때 민영이가 대통령님을 뵙고 참 좋아라 했는데…. 대통령님께서 써주신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 문구가 우리 민영이에게 삶의 힘이 되어주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민영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가슴 속 불씨였는데…. 그날 민영이의 손을 잡아주시던 그 따스한 손과 마음으로 살아오셨고, 그렇게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곧으셨고 또 누구보다 여리시고 인간다운 분이셨기에 선택하신 마지막 길이라 너무도 애통합니다. 부디 편안한 곳으로 가시어 쉬시길 빕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 긴 인연.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대통령님과 민영이가 두 손 꼭 잡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그려볼 뿐입니다.
Board 추천글 2009.06.12 바람의종 R 23774
조선일보의 정정 보도 지난주 조선, 중앙이 언론중재위의 결정 사안이었던 정정및 사과문을 실었습니다. 법원의 심리가 진행되고 있었고 화해 조정을 하는 상황에서 개제 된 기사였기에 법원의 판결에 앞서 중재위의 조정을 신청했던 결과입니다. .. 천성산 관련 정정보도는 마치 거대한 돌무더기 속에 던져진 하나의 작은 조약돌처럼 활자들 속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세상의 무관심과 망각으로 부터 귀환을 되풀이 하면서 찾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돌무더기 속에 던져진 하나의 작은 조약돌 ! 만일 당시에 언론들이 위의 정정 보도문에 쓴것 같은 사실에 논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천성산 문제는 지금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최소한 위 정정보도의 표제와 같이 "환경운동의 내리막 길은 천성산에서 시작됐다"고 쓰지는 못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우리 국토가 < 여성 한분의 단식으로 수십조 낭비... 그 낭비 된 예산으로 기업을 만들었으면 30만 일자리는 충분히 만들어 냈을 것 >이라고 한 사람에게 맡겨져 지금처럼 수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반스님은 그의 발언이 종교인을 비하 했다며 분기했지만, 저는 대기업의 오너였고 현장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그 분의 산수(算數)를 의심했으며, 그 분이 우리의 산수(山水)를 바라보는 관점을 의심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저는 불길한 기분으로 그 분이 벌이고 있는 사업장인 4대강 개발의 현장 앞에 서있습니다. 더구나 이 현장의 지휘 감독자는 - 철도 시설공단 이사장 시절이었던 지난 2005년 논란이 됐던 고속철도건설공사 천성산 구간 문제를 정면 돌파해 주목받았던( 연합뉴스) 정종환 국토부 장관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아서 그들의 산수법은 기발하여 구체적인 계획도 나오기 전에 착공식을 하더니 착공 6개월 만에 8조가 불어나 버렸습니다. 현대의 악령 이제 2조 5천억원의 손실이 기실 145억 이라는 수치로 정정 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제가 무엇 때문에 이 수치를 조정하기 위하여 긴시간 법정을 드나들고 천성산 문제를 놓치 못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래 도표를 보면 천성산 문제를 정면 돌파했던 국토부 장관 정종환의 치적이 무엇이며 이 수치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법정에 서있는 언론사들이 노래했던것,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속철도 홍보물 . 최근 법원에 요청한 사실조회 자료에 따르면 - 화려했던 홍보와는 달리 경부 고속철도의 영업 수익은 1조가 넘지 않으며, 1단계 완공시 20만이었던 예상탑승객은 실제 3분의 1 밖에 되지 않고, 2010년 완전 개통시 28만이라고 예상했던 수효 역시 - 현제 8만의 이용객과 80% 대의 탑승율, 그리고 완전 개통시 요금이 65.000 원대임을(1km당 158.09원) 대입하여 보면 어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 1일 최대 탑승객을 52만으로 standby하여 계획하고 홍보하고 투자했던 그 시스템 자체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에서 운하 문제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출발 선상에 있는 주자들도 투자가들도 전문가들도 언론도......... 바뀐것이 있다면 그들의 시선이 이제 우리 모두의 생명 줄기인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편집 될 수 있으며 정보는 그들로 부터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조차 않습니다. 진실은 매도 될 수 있고 때로는 투옥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시 법정에 서게 되며 강가로 돌아 왔습니다. 가능하면 나날의 일지를 올려 보려하며 재판의 일정도 올려보려합니다. 지금 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간극 속에 갖혀있기 때문입니다. - 지율합장 아래는 법원에 의뢰하여 고속철도 공단에서 보내 온 사실조회 내용입니다. 위의 홍보물과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조회내용 . 사실조회내용 .... ▶ 조선일보의 정정보도에 부쳐
Board 추천글 2009.06.09 바람의종 R 29790
한국의 승려 -자연을 명상하는 힘 지난 5월 대법원 판결 후 LA 타임지 기자로 부터 인터뷰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으로 내려오겠다고 했습니다 언론의 혹독한 비판이 지나간 직후였기에 저는 망설였고, 한국의 산하를 인터뷰 한다면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인터뷰는 병산서원의 옥난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자님은 비스듬히 누운 채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특히 천성산 운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집요 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저는 시간을 지우며 간다고 질문들을 피했습니다. 마음을 천성산으로 옮겨가는 것도 힘이 들었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4대강 문제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저러한 일과 속에서 잊고 있던 일이었는데 얼마전 기사를 보신분께서 번역하여 홈피에 올려주셨습니다. 외국인이 쓴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의 질문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며 옮겨 놓습니다. .. 지율은 수도원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산을 관통하는 장대 터널을 만들려는 정부 계획에 항의하는 행동을 감행했다. 그녀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이 그녀를 바꿀 것이다. - LA Times 2009년 5월 14일 한국 안동에서 잿빛 승복 속의 작은 여인은 불도저를 만났을 때 숲에서 명상의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녀는 암자에서 주변의 숲만 거닐며 10년 이상을 고립되어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어느 봄날의 산책은 달랐다. 기계들의 난폭한 소리, 숲의 싱싱한 녹색과 대조를 이루는 튀는 색깔은 거의 그녀를 흐느끼게 만들었다. “어떤 슬픔이 엄습해왔어요.” 불교식 신념에 따라 지율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알려진 52세의 (승려)는 회상했다. “암자로 돌아가는 길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약간의 조사 후에, 이 승려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 정부는 암자 아래로 8 마일의 철도 터널을 뚫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신성하게 여기는 산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지율은 항상 지구를, 품고 있는 것들을 기르는, 온화한 어머니로 봐왔다. 그녀의 눈에는, 상업적인 기차 여행에서 단지 몇 시간을 줄이기 위한 그런 손상을 입히는 것은 범죄였다. 조언자들은 지율에게 암자를 떠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관료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면서, 5피트 90 파운드의 승려는 수십 회의 가부좌 시위, 단식투쟁, 수백 마일의 삼보일배를 포함하는 혼자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율의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대신 지율을 바꾸려고 한 것은 세상이었다. 전직 영문학 교수이며 환경 잡지의 편집자인 친구 김종철씨는 “스님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것이 나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만약 그분이 이 사회가 얼마나 사악하고 망쳐졌는지 알았다면 결코 혼자만의 세상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지율이 단순해서 현대적 삶(의 방식)에 준비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전 순진했어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거든요. 심지어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전 얼마나 큰 도전과 직면하게 될지 인식하지 못했지요. 제가 문 밖으로 한 발짝 나가자 거기엔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그림이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문화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수 년 동안 지율은 자신의 문제를 지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 내면의 세계에 집중하며 자신을 잊고 말을 적게 하는. 그때 숲을 찢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운명적인 산책 다음에 그녀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전철을 건설하는 정부 계획의 세세한 부분을 공부했다. 지율은 천천히 계획을 생각했다. : 카메라와 나침반을 갖추고 그녀는 야생 생물을 기록하고, 그 소리와 냄새와 느낌을 기록하면서 산을 자세히 알고자 했다. 그녀의 탐구대상은 심미적인 것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산의 생태계는 인간이 만든 침범에 의해 불가역적으로 변하게 될 12개의(많은) 시냇물과 24개소의 습지를 받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기차의 진동에 의해, 한 때 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보호되었던, 야생생물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환경운동가들도 그 터널 계획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지율도 처음에는 그들과 합류했다. 2002년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은 커지는 외침에 반응하여 당선되면 그 계획을 수정하겠다고 공약했다. 노무현이 이겼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일단의 불도저와 다이나마이트를 투입했다. 환경운동가들은 과격했지만 아마도 지율만큼은 아니었다. 2003년 그녀는 가는 곳마다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해 2월 그녀는 38일간의 단독 단식투쟁을 단행했다. 그 후 그녀는 네 번 더 단식투쟁을 단행했는데 매번 혼자였고, 소금, 물, 차만으로 연명했다. 한 번은 45일간, 한 번은 58일간 지속했다. 이들 단식투쟁 뒤에는 약 100일에 이르는 두 번의 단식투쟁이 뒤따랐다. 뒤에 지율은 다섯 명의 승려와 함께 부산에서 대구까지 175마일을 걸었다. “암자의 규율은 대문을 나가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규율을 깬 것이구요. 하지만 우리는 사태가 워낙 중하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이겠어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잃을 것이) 많았음이 밝혀졌다. “전 바깥세상에서 조심하려고 노력했어요. 세상과 오랜 세월동안 단절된 후 전 많이 소심해져 있었어요. 저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어요. 전 적대시하지도, 선동하지도 않았어요. 비판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비판하든 그것이 진실에 입각한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지율은 말한다. 지율은 자신이 경멸의 대상임을 발견했다. 그녀들은 매체들의 거친 스폿라이트를 견뎌내야 했다. 인터넷 채팅방에서는 폭력의 위협들도 있었고, 추잡한 편지, 심한 조롱들도 있었다. 한편 어떤 이들에게는 환경운동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지율은 경찰들에게 들볶이고,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많은 동료 승려들로부터 배척당했다. 정부는 그녀의 저항이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낭비한다고 했다. 2004년 정부는 그녀를 법정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검찰로부터 국가 업무를 방해한 죄로 기소되었다. 지난달 한국 대법원은 그녀의 시민불복종은 정당하지 않다고 기소를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폭력적이지 않았고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실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지지자들은 지율이 정부가 이윤 추구를 위해 안이한 방법으로 일하고 있을 때 환경보호를 국가적 이슈로 만들도록 도왔다고 말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부교수인 조은수씨는 “그녀는 분극시키는 존재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고집이 세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선구자로 봅니다. 긍정적으로 보였든지, 부정적으로 보였든지 관계없이 그녀의 일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개인적으로 지율 (자신)이 변화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녀는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지요. 한 사람에 의한 이런 사심 없는 행동이 그렇게 조롱당하고 무시당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라고 잡지 편집자인 친구 김(종철)씨는 말한다. 더 나쁜 것은 그녀의 캠페인은 그녀를 거의 죽일 뻔 했다. 2005년에 있었던 가장 최근의 단식에서 이 승려는 서울의 청와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절친한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녀는 지지자들도, 고위층들도, 정부 관리들도, 심지어 가족들도 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그 단식투쟁을 관리들이 환경영향 평가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에야 끝을 냈다. 그렇지만 승리는 잠시 동안이었다. 2006년 대법원은 지율과 다른 환경운동가들이 터널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해 위험에 빠진 도룡뇽들을 언급하며 제소한 소송을 기각했다. 뉴스 매체들은 조롱하듯이 그녀의 수단을 ‘도룡뇽 소송’이라고 이름붙였다. 지금까지도 비판자들은 읊조리기를 계속한다. 어떤 블로거는 최근 대법원의 판결 후에 “그녀를 도룡뇽과 함께 묻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천성산 터널은 내년에 완공되는 것으로 계획되어있다. 지율은 방문객에게 가죽으로 알려진 쓴 나물을 권했다. “중들은 이걸 즐겨 먹지요. 이건 마늘 같은 맛이 나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16세기의 서원으로 가는 길에 휴식을 취할 겸 안동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흙길에 멈춰 선다. 그 뒤 서원의 누각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느리게 움직이는 물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녀가 마지막 단식투쟁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을 동안 어느 친구가 그녀를 업고 이 장소에 왔다. 친구들은 정부가 관광과 경기부양을 추진하기 위해 어떻게 낙동강을 깊게 파서 운하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제가 위태롭게 된 이 아름다운 강을 봤을 때 내 심장은 다시 박동치기 시작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그 작은 승려는 다시 그곳에 있다. 그녀는 35미리 카메라를 목에 걸고, 생각을 메모하면서, 정부의 어리석음을 증명할 강의 생명의 기록을 만들 목적으로 강을 따라 걷고 자전거를 탄다. “이 모든 것이 습지로 이어져 있지요. 하지만 정부는 전진이란 이름으로 물을 빼버렸어요. 있던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번에는 어떤 단식투쟁도 시민 불복종운동도 없다. 지율은 자신의 노트와 사진을 학교에 강을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세미나 자료로 제공할 계획이다. 그녀도www.chorok.org라는 웹 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천상)산 싸움에 대해 유감이 없다. 이날 오후 그녀는 따뜻한 태양 아래서,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평화로워 보인다. “저의 부모님들은 이땅에서 호랑이와 곰을 본 세대이고 , 우리 세대는 늑대와 여우를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음 세대는 다람쥐와 토끼를 보는 행운을 누릴 겁니다. 이 변화들은 너무나 빨라서 100만년이 아닌 반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이야기할 때 한 관광객이 서원의 잠긴 문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문이 잠겼을 때 안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왜죠?”라고 그녀는 물었다. john.glionna@latimes.com Times' 서울 지국의 박주민이 이 기사에 공헌하였음. 기사 원문 주소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monk14-2009may14,0,6530756.story 다시 법정에 서며 지난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자의적인 기사를 생산해 낸 언론(조선 동아 중앙 문화)에 대한 재판과 중재위의 심리가 있어 서울에 올라 와 있습니다. '환경운동의 내리막은 천성산 문제에서 부터 시작됐다'(조선) '전설 주술 미신 광기'(동아) '도룡뇽 재판 유죄확정이 주는 교훈'(중앙) '환경도그마 페해 일깨운 도롱뇽재판 유죄확정'(문화) - 그들이 사설로 뽑아 올린 이 표제들은 대한 민국 주류 언론들이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통각이며 그들이 비약해가는 논리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씨 뿌리려고 하는 정부의 개발논리를 대변함이기에 그들이 목소리 높여 이야기 하는 곳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제가 거대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을.... 조금 기이하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들과 제가 보고 있는 곳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 실체가 없는 그들과 싸우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 www.chor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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