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7장 아르고 호 선원 2. 네메시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네메시스 상] 네메시스(Nemesis)는 그리스에서 가장 수수께기의 여신이다. 원래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전원의 여신으로 숭배되어, 예배자들에게 행운과 선물을 내리는 징험이 있었으나 점차로 여러 영험을 기원하게 되고 초기의 행운과 기회를 주는 기능은 의인신인 튜케(로마에서는 포르투나)에게 물려주고 주로 염원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하여 응징하는 여신으로 존경받았다. 그리스인 내면의 깊숙한 심리에 내재하는 한이 오만에 대한 보복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것이다. 신화에서는 뉵스의 딸이고 아비는 에레보스 혹은 오케아노스라 한다. 그녀의 미모에 매료된 제우스가 포옹하려고 가까이 왔을 때는 여러 동물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지상과 바다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거위로 변신한 네메시스에게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하여 접근, 관계를 하였다. 이 장면은 좀더 수식되어, 아프로디테가 독수리로 변하여 백조를 뒤쫓는 시늉을 하므로 백조는 거위의 샅으로 피신하였다 한다. 그리고 거위가 잠들자 백조는 교합을 하고 그 결과 회임한 거위는 호숫가에 알을 낳았다. 이 알을 목동이 주워 스파르타 튠다레오스의 왕비 레다에게 바쳤고 여기에서 헬레나와 디오스쿠리(제우스의 아들들로 폴륙스와 카스토르를 말함)가 태어났다. 이 전설에서는 레다가 디오스쿠리의 양육을 맡았으며, 헬레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많은 영웅들이 전사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네메시스는 인간과 신들의 분수 넘친 행동에 끊임없이 화를 내고 지나친 행운이나 성공으로 오만해지면 제동을 걸고 틀림없이 처벌을 내렸다. 현세에서는 물론 사후세계까지 위력을 발휘하였으므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겠다. 실제로 불의로 졸부가 된 거만한 왕이나 폭력을 일삼는 영웅은 반드시 응보천벌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분수를 넘어 지나칠 때는 세계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으므로 신에게 틀림없이 벌을 받게 된다는 그리스인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크로이소스 왕은 지나치게 부자이고 힘이 강하며 탐욕스러웠으므로, 네메시스는 페르시아의 큐로스 왕국을 원정하도록 부추겨 결과적으로 그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오만, 맹목적인 어리석음 및 보복이 의인신화된 것이 휴브리스, 아테 및 네메시스 여신들이며 여기에서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라는 원리가 정립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원래의 구성요소로 환원되어 버리는 자연세계의 지배원칙으로 네메시스를 숭배하였다. 제우스조차 두려워한 이 네메시스 여신은 모든 신에게 생명과 죽음을 내리는 여신이라 하여 '피할 수 없는' 뜻을 가진 아드라스테이아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휴브리스는 코로스의 딸, 아테는 제우스와 에리스의 딸이라 하며 리타이도 등장시켜 아테의 터무니 없는 충동을 경감시키는 마음씨 좋은 여신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네메시스의 응징은 디케(정의), 포이나(형벌) 및 에리뉴에스(복수)의 3여신의 참여하에 내려졌다. 로마에서는 행운과 기회를 내리는 네메시스의 영험을 제우스의 달 튜케에 양도케 하여 튜케를 받들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존경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과 융화시켜 이시튜케라고도 불렀다. 가장 이름난 네메시스의 성지는 아티카의 마라톤 근교 렘노스인데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여신 조상이 있다.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그 입석은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점거했을 때 사령관이 전승비로 하고자 파리아 섬에서 가져온 백색 대리석인데,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중단하고 방치한 돌이라 한다. 페르시아가 승리를 과신하고 터무니 없는 위세를 표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 것이다. 10년 전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이 승리하여 페르시아의 침범을 격퇴한 것도 네메시스의 징험이라 한다. 네메시스 여신상은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 손에는 사과나무 가지, 또 한 손에는 수레바퀴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수사슴(악타이온의 변신)이 장식된 은관을 쓰고 허리에는 응징의 채찍을 차고 있다. 수레바퀴는 계절을 돌리는 상징이었는데, 로마 시대에 와서 포르투나 여신과 관련시켜 반바퀴를 돌리면 거룩한 제왕은 번영의 극치에 달하여 생을 마치게 되며 이는 관의 사슴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온 바퀴가 돌 때는 전에 쫓아낸 경쟁자에게 보복을 당한다는 징조로 보았다. 채찍은 원래 여신이 나무와 곡식을 채찍질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사과나무 가지는 제왕이 사후에 낙원으로 입국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
Board 추천글 2023.11.15 風文 R 1578
읍참마속(泣斬馬謖) 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張?)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11.15 風文 R 882
후텁지근한 말복이 코앞이다. 올해 중복(7월 23일)에서 말복(8월 12일)까지의 간격은 20일로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게 말복이 오는 셈이다. 중복에서 말복이 달을 넘기는 월복(越伏) 때문인지 더위가 꺾일 줄을 모른다. 중동에서 온 사람에게 그렇게 더운 곳에서 어찌 사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서 오히려 한국의 끈끈한 여름 날씨가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이렇듯 온도와 습도가 함께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무더위’라고 한다. 무척 심한 더위가 무더위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실제로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무더위’의 ‘무’는 ‘물’에서 온 말이다. 요즘 같은 극심한 더위를 ‘불볕더위’라고 한다. ‘햇볕이 몹시 뜨겁게 내리쬘 때의 더위’를 말하는데 ‘불볕더위’라는 말 대신 요즘은 ‘폭염(暴炎)’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같은 뜻이라도 한자어를 쓰면 훨씬 센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폭염(暴炎), 폭서(暴暑), 혹서(酷暑)에 비하면 ‘불볕더위’는 정겹게 들린다. 말이 세져서 더위도 점점 사나워지는 건 아닐까? 더위와 관련해서 하나 더 보탠다. “‘후텁지근하다’가 맞아요? ‘후덥지근하다’가 맞아요?”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둘 다 맞다. 그런데 요즘의 날씨를 말하려 했다면 ‘후텁지근하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후텁지근하다’는 ‘불쾌할 정도로 끈끈하고 무더운 기운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것을 모두 포함한다. 반면에 ‘후덥지근하다’는 ‘열기 때문에 답답할 정도로 더운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가 높은 경우에만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3.11.15 風文 R 3275
조의금 봉투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상한 일이지만, 예전에도 한글로 ‘부의’라고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 봉투에 ‘슬픔을 함께합니다’라는 식의 어쭙잖은 문구를 적는다. 글자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일이겠거니 하면서(물론 별 소용 없는 일이다. 봉투의 쓸모는 ‘누가’와 ‘얼마’를 표시하는 데 있으니). 글 쓰다 죽은 어느 망자 빈소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 사이로 이런 문구의 조기를 본다. “우리 슬픔이 모였습니다. 보라, 우리는 우리의 도타운 글이 있나니.”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올려놓은 힘없는 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늘 언어 뒤를 따른다. 앞이나 옆이 아니라, 항상 뒤에 있다. 언어가 가자는 길로만 따라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새로운 말을 시도하자마자 그 또한 상투화의 길로 가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11.15 風文 R 2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