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7장 아르고 호 선원 2. 네메시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네메시스 상] 네메시스(Nemesis)는 그리스에서 가장 수수께기의 여신이다. 원래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전원의 여신으로 숭배되어, 예배자들에게 행운과 선물을 내리는 징험이 있었으나 점차로 여러 영험을 기원하게 되고 초기의 행운과 기회를 주는 기능은 의인신인 튜케(로마에서는 포르투나)에게 물려주고 주로 염원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하여 응징하는 여신으로 존경받았다. 그리스인 내면의 깊숙한 심리에 내재하는 한이 오만에 대한 보복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것이다. 신화에서는 뉵스의 딸이고 아비는 에레보스 혹은 오케아노스라 한다. 그녀의 미모에 매료된 제우스가 포옹하려고 가까이 왔을 때는 여러 동물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지상과 바다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거위로 변신한 네메시스에게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하여 접근, 관계를 하였다. 이 장면은 좀더 수식되어, 아프로디테가 독수리로 변하여 백조를 뒤쫓는 시늉을 하므로 백조는 거위의 샅으로 피신하였다 한다. 그리고 거위가 잠들자 백조는 교합을 하고 그 결과 회임한 거위는 호숫가에 알을 낳았다. 이 알을 목동이 주워 스파르타 튠다레오스의 왕비 레다에게 바쳤고 여기에서 헬레나와 디오스쿠리(제우스의 아들들로 폴륙스와 카스토르를 말함)가 태어났다. 이 전설에서는 레다가 디오스쿠리의 양육을 맡았으며, 헬레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많은 영웅들이 전사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네메시스는 인간과 신들의 분수 넘친 행동에 끊임없이 화를 내고 지나친 행운이나 성공으로 오만해지면 제동을 걸고 틀림없이 처벌을 내렸다. 현세에서는 물론 사후세계까지 위력을 발휘하였으므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겠다. 실제로 불의로 졸부가 된 거만한 왕이나 폭력을 일삼는 영웅은 반드시 응보천벌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분수를 넘어 지나칠 때는 세계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으므로 신에게 틀림없이 벌을 받게 된다는 그리스인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크로이소스 왕은 지나치게 부자이고 힘이 강하며 탐욕스러웠으므로, 네메시스는 페르시아의 큐로스 왕국을 원정하도록 부추겨 결과적으로 그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오만, 맹목적인 어리석음 및 보복이 의인신화된 것이 휴브리스, 아테 및 네메시스 여신들이며 여기에서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라는 원리가 정립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원래의 구성요소로 환원되어 버리는 자연세계의 지배원칙으로 네메시스를 숭배하였다. 제우스조차 두려워한 이 네메시스 여신은 모든 신에게 생명과 죽음을 내리는 여신이라 하여 '피할 수 없는' 뜻을 가진 아드라스테이아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휴브리스는 코로스의 딸, 아테는 제우스와 에리스의 딸이라 하며 리타이도 등장시켜 아테의 터무니 없는 충동을 경감시키는 마음씨 좋은 여신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네메시스의 응징은 디케(정의), 포이나(형벌) 및 에리뉴에스(복수)의 3여신의 참여하에 내려졌다. 로마에서는 행운과 기회를 내리는 네메시스의 영험을 제우스의 달 튜케에 양도케 하여 튜케를 받들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존경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과 융화시켜 이시튜케라고도 불렀다. 가장 이름난 네메시스의 성지는 아티카의 마라톤 근교 렘노스인데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여신 조상이 있다.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그 입석은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점거했을 때 사령관이 전승비로 하고자 파리아 섬에서 가져온 백색 대리석인데,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중단하고 방치한 돌이라 한다. 페르시아가 승리를 과신하고 터무니 없는 위세를 표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 것이다. 10년 전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이 승리하여 페르시아의 침범을 격퇴한 것도 네메시스의 징험이라 한다. 네메시스 여신상은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 손에는 사과나무 가지, 또 한 손에는 수레바퀴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수사슴(악타이온의 변신)이 장식된 은관을 쓰고 허리에는 응징의 채찍을 차고 있다. 수레바퀴는 계절을 돌리는 상징이었는데, 로마 시대에 와서 포르투나 여신과 관련시켜 반바퀴를 돌리면 거룩한 제왕은 번영의 극치에 달하여 생을 마치게 되며 이는 관의 사슴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온 바퀴가 돌 때는 전에 쫓아낸 경쟁자에게 보복을 당한다는 징조로 보았다. 채찍은 원래 여신이 나무와 곡식을 채찍질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사과나무 가지는 제왕이 사후에 낙원으로 입국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
Board 추천글 2023.11.15 風文 R 1387
읍참마속(泣斬馬謖) 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張?)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11.15 風文 R 882
후텁지근한 말복이 코앞이다. 올해 중복(7월 23일)에서 말복(8월 12일)까지의 간격은 20일로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게 말복이 오는 셈이다. 중복에서 말복이 달을 넘기는 월복(越伏) 때문인지 더위가 꺾일 줄을 모른다. 중동에서 온 사람에게 그렇게 더운 곳에서 어찌 사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서 오히려 한국의 끈끈한 여름 날씨가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이렇듯 온도와 습도가 함께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무더위’라고 한다. 무척 심한 더위가 무더위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실제로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무더위’의 ‘무’는 ‘물’에서 온 말이다. 요즘 같은 극심한 더위를 ‘불볕더위’라고 한다. ‘햇볕이 몹시 뜨겁게 내리쬘 때의 더위’를 말하는데 ‘불볕더위’라는 말 대신 요즘은 ‘폭염(暴炎)’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같은 뜻이라도 한자어를 쓰면 훨씬 센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폭염(暴炎), 폭서(暴暑), 혹서(酷暑)에 비하면 ‘불볕더위’는 정겹게 들린다. 말이 세져서 더위도 점점 사나워지는 건 아닐까? 더위와 관련해서 하나 더 보탠다. “‘후텁지근하다’가 맞아요? ‘후덥지근하다’가 맞아요?”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둘 다 맞다. 그런데 요즘의 날씨를 말하려 했다면 ‘후텁지근하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후텁지근하다’는 ‘불쾌할 정도로 끈끈하고 무더운 기운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것을 모두 포함한다. 반면에 ‘후덥지근하다’는 ‘열기 때문에 답답할 정도로 더운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가 높은 경우에만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3.11.15 風文 R 3151
조의금 봉투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상한 일이지만, 예전에도 한글로 ‘부의’라고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 봉투에 ‘슬픔을 함께합니다’라는 식의 어쭙잖은 문구를 적는다. 글자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일이겠거니 하면서(물론 별 소용 없는 일이다. 봉투의 쓸모는 ‘누가’와 ‘얼마’를 표시하는 데 있으니). 글 쓰다 죽은 어느 망자 빈소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 사이로 이런 문구의 조기를 본다. “우리 슬픔이 모였습니다. 보라, 우리는 우리의 도타운 글이 있나니.”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올려놓은 힘없는 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늘 언어 뒤를 따른다. 앞이나 옆이 아니라, 항상 뒤에 있다. 언어가 가자는 길로만 따라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새로운 말을 시도하자마자 그 또한 상투화의 길로 가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11.15 風文 R 2283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7장 아르고 호 선원 [ 메데아 에블린 드 모르간 작. ] 메데이아 메데이아(Madea)는 콜키스와 왕 아이에테스(헬리오스의 아들)와 이듀이아(오케아노스의 딸로 아이에테스의 둘째부인) 사이의 딸이다. 메데이아나 이듀이아라는 말은 모두 '간교한' 또는 '빈틈없는'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메데이아는 숙모 키르케(오듀세이아 서사시에서 오듀세우스와 1년간 같이 산 요정)와 마찬가지로 마술에 능하고 헤카테를 숭배하였다. 아르고 호 선원의 대장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황금양모의 탈취에 협조하고 같이 콜키스를 탈출하였다. 아비 아이에테스는 아르고 호 선원을 토벌하기 위해 메데이아의 이복동생 압슈르토스를 지휘자로 추격함선을 보냈으나 메데이아가 황금모피를 돌려주겠다고 꾀어 동생을 죽이고 추격을 모면하였다. 그 후 아르고 호 와 그 일행은 그녀의 비상한 꾀에 도움을 받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왔다. 아르고 호 대원들과 같이 이올코스에 귀착한 다음 메데이아는 빈사상태에 빠진 이아손의 아비 아이손을 마술로 살려내고, 솥에 약초를 다려 아이손에게 주입하여 혹은 그 솥에 넣어 젊음을 되찾아 주었다. 메데이아는 왕위를 찬탈한 이아손의 숙부 펠리아스에게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제의하였는데, 우선 늙은 양으로 시범을 보인 후 펠리아스의 딸들에게 아비를 솥에 넣기 위해 마취시켜 토막을 내라고 하였다. 주저하던 딸들이 마침내 그녀의 말에 속아 아비를 죽였다. 이 범죄로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헤라여신의 버림을 받아 이올코스를 떠나 코린트로 향하였다. 그런데 메데이아와의 사이에 이미 많은 아들까지 둔 이아손은 코린트의 왕 크레온에게 잘 보여 공주 글라우케와 혼인을 하게 되어 메데이아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메데이아는 독을 바른 값진 의상을 신부에게 보냈고, 이것을 입은 신부는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왕 크레온이 급히 공주를 구하려 와서 딸의 옷을 잡았지만, 오히려 같이 불에 휘말려 죽게 되고, 메데이아는 조부 헬리오스의 날개달린 용이 끄는 이륜마차로 도망쳐 코린트를 빠져 나왔다. 메데이아는 아테네로 와서 후사가 없는 왕 아이게우스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장담하여 혼인을 하고 그 왕비가 되어 메도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 아테네에 나타난 테세우스를 보고 단번에 아이게우스의 아들임을 눈치챘다. 메데이아는 왕을 설득하여 테세우스를 마라톤 평야를 황폐케 하는 사나운 미노스의 수소와 겨루도록 하였다. 테세우스가 무난히 이 황소를 퇴치하자 이번에는 왕위를 찬탈할 위험인물이라고 왕에게 귀띔하여 연회석상에서 독배를 주어 죽이려 하였다. 이 때 테세우스의 대검을 본 아이게우스가 자기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쳐서 떨어뜨렸다. 자신의 음모가 들통나자 메데이아는 도망 혹은 추방되어 아들 메도스와 함께 콜키스로 귀향하기로 하고 먼저 아들을 콜키스로 보냈다. 그런데 메데이아의 아비 아이에테스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페르세이스(아이에테스의 이복형제)가 메도스를 감옥에 감금하고, 메도스가 자신을 코린트 크레온의 아들 히포테스라고 이름을 댔는데도 없애려 하였다. 그러자 이미 선왕의 시살로 민심이 뒤숭숭했던 콜키스는 한발이 닥쳐 농작물의 불황이 겹쳤다. 아르테미스의 여사제로 변장하고 콜키스로 온 메데이아는 페르세이스에게 희생공양 의례를 자신에게 맡기면 한발을 끝내게 할 수 있다고 진언하였다. 메데이아는 소년을 보기 전까지는 희생제물이 크레온의 아들이라 한 페르세이스의 말만 믿고 소년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크레온의 가족에 대한 원한이 가슴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성을 다하여 엄숙한 희생제의를 계획하고 의식을 진행하려던 차에 메데이아는 희생제물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 메도스라는 것을 알게되자 곧 아들에게 칼을 넘겨주었다. 메도스는 뒤돌아서 지체없이 페르세이스를 찔러 죽여 조부 아이에테스의 복수를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메도스는 주변나라를 정복하여 콜키스를 대국으로 만들고 어미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을 메디아라 하였다. 메데이아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에우페모스 에우페모스(Euphemus)는 티튜오스의 딸 에우로파와 포세이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르고 호 대원으로 모험에 참가하였다. 뛰어난 준족으로 발을 적시지 않고도 물 위를 걸었다고 한다. 고향은 펠로폰네소스 최남단 타이나룸 곶으로, 거기에는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에우페모스는 아르고 호 탐험에서 민첩한 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아르고 호가 충돌하는 바위섬에 접근했을 때는 그 곳을 빠져 나갈 때를 알기 위해 비둘기를 날렸고 자신도 가보고 돌아와 동료들에게 더 빨리 노를 젓도록 재촉하였다. 아마 배를 앞질러 뛰어갔거나 또는 바위와 배 사이를 왕래하며 배를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치 네레이데스와 테티스가 남편 펠레우스를 태운 아르고 호가 떠 있는 바위에 도달했을 때 그랬듯이! 에우페모스는 북아프리카 큐레네 항구도시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선조신으로 존숭되는데 내려오는 전승은 다음과 같다 리비아 해안에서 큰 폭풍을 만난 아르고 호는 내륙 멀리까지 밀려 올라갔고 대원들은 12일 동안이나 배를 메고 끌며 겨우 트리토니스 호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바다로 나가는 수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데 그때 해신 트리톤이 큐레네의 젊은 왕 에우류퓰로스로 변신해서 나타나 바다로 나가는 수로를 알려주고 환영의 뜻으로 흙덩이를 주었다. 이것을 에우페모스가 받아서 보관하였는데 꿈에 흙덩이가 여아로 변하여 자기 젖을 빨게 하였더니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데리고 동침하였다. 자신의 행위에 가책을 느끼는 에우페모스에게 그녀는 자신이 해신 트리톤의 딸이며 아나페 섬(크레타 바다 풍랑 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초승달 섬을 발견한 대원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근방의 바다에 집을 지어 주면 후에 바다에서 다시 나와 자신을 돌보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에우페모스의 후손을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에우페모스가 이아손에게 이 꿈이야기를 해주니 이아손은 그 흙덩이를 바다에 던지면 섬이 생겨날 것이라고 해몽하였다. 몇 해가 지나자 이아손이 해몽한 바와 같이 그 흙덩이가 가라앉은 곳에서 칼리스테 섬이 생겨났다. 핀다로스에 의하면 아르고 호에서 바다에 던진 흙덩이는 칼리스테 해변으로 쓸려갔으며, 만일 에우페모스가 타이나룸의 하데스 나라 입구인 고향바다로 가져갔다면 그리스인은 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였을 것이라고 윤식하였다. 이 전설의 원천에 관한 언급은 없느나 이야기를 전한 큐레네(칼리스테)인들의 구미에 맞추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섬을 커졌으며 에우페모스 자손들은 아르고 호가 기항하였던 렘노스 섬(에우페모스 처의 출생지)에서 번성하였다. 그 후 튜레니아인들에게 쫓겨나자 그들은 스파르타로 갔다. 에우페모스 사후 여러 대가 지나 후손 테라스는 칼리스테 섬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테라(현 산토리니)라고 이름붙였다. 더 후대에 와서 테라 섬의 그리스인은 에우페모스 후손인 바토스를 따라 리비아로 가서 새로운 도시 큐레네를 건설하였는데 이 곳은 바로 에우페모스가 흙덩이를 받은 고장이었다. 제 8장 인간의 탄생 및 기타 1. 인간의 탄생 오래 전부터 인간의 탄생을 둘러싸고는 예컨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어 냈다든가 혹은 용의 이빨에서 사람이 튀어 나왔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신화 내지 전설을 아예 전혀 부정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그레이브스의 인간시대를 참조하여 인간의 탄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첫 인간은 아티카의 흙에서 대지여신의 최고 결실로 자연 발생한 알랄코메네우스로, 달의 여신보다도 먼저 아티카 보이오티아에 있는 코파이스(현 림니) 호반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우스를 보좌하고 아테나의 교육을 맏았으며, 제우스의 여성행각에 마음이 상한 헤라 여신의 하소연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즉 헤라에게 그녀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어 혼인예식을 올리라고 권하였던 것이다. 이에 헤라가 다이달로스에게 떡갈나무로 여신조각상을 만들게 하고 꽃다운 신부의상을 입혀 수레에 안치한 후 수행원을 딸려 엄숙히 거리를 행진하니 과연 제우스는 그 미모에 매료되어 다시 애정을 찾게 되었다. 그 후 매년 이에 연유한 신성 결혼의 상징으로 다이달로스 축제가 개최되었다. 알랄코메네우스는 신도시 알랄코메네스(아테네 시의 옛 이름)를 창건한 상징적 인물로서 보이오티아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이 시대는 전적으로 부계 사회였으므로 여자는 여신일지라도 남자의 지시에 따라야 했고 남성 없이는 여신은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달의 여신은 더 시대가 내려온 제우스 후기에 생겨났다. 이 시대를 인간의 황금기라 하며 크로노스 차하에 노역이나 근심없이 상수리 열매, 야생과일, 나무에서 흘러 떨어지는 꿀을 먹고 산양의 젖을 마시며 살았다. 노쇠하지 않고 춤추며 노래부르며 늘 웃고 살았던 이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잠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인간들은 사라지게 되지만 그들의 영혼과 심성은 음악을 통해 천부적 예능으로 전승되고 정의와 행운의 수호자들의 성품으로 계승되었다. 이 황금기는 농경시대 이전의 미개한 인간시대지만 양봉여신을 모시고 마치 꿀벌과 같이 협조하며 살아간 이상적인 심성을 지닌 사람들의 시대였다. 다음은 은시대 인간인데 이전의 인간과 같이 거룩하게 발행하였다. 빵을 주식으로 하고 전적으로 어미에 존속되어 100년 이상 살았지만 어미의 의사에 감히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무지하고 말다툼을 벌이며 신을 공양할 줄 몰랐지만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 시대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킨 것은 제우스였다. 은시대에는 모계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이 습관은 고대에 무서운 문신을 한 픽트족, 흑해 연안의 모이슈노이키안스, 또는 발레아레스, 그 외에 갈리키아와 시르테(현 시드라) 만에 정착한 부족에게 전래되었고 성행위를 경멸하였다. 농경을 시작한 족속이다. 세 번째는 청동기시대 인간이다. 이들은 물푸레나무에서 마치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처럼 탄생하여 청동으로 무장하였다. 빵과 생고기를 먹고 호전적이면서 거만하고 무자비한 인종으로, 흑사병이 돌아 모두 멸망하였다. 초기 그리스에 침입한 부족이며 물푸레나무 여신과 그 아들 포세이돈을 숭배한 청동기의 유목민이다. 네 번째 인간족도 청동으로 무장한 부족이만 더 고상하고 원만하며 신과 인간의 어미 사이에서 탄생한 굳세고 위엄 있는 신의 아들과 손자들이다. 테베가 포위 공격 당했을 때 이를 물리쳤고, 아르고나우테스로서 콜키스 나라로 원정을 갔으며, 또한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하고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들 족속은 미케네 시대의 무사들이며 패왕으로 이름을 날린 영웅들이고, 지하세계에서는 축복받은 낙원에서 살았다. 다섯 번째는 철기시대 인종으로 위의 부족 중 가장 하잘 것 없는 후예들이다. 타락하고 잔인하며 불의를 저지르고 악의에 찬 호색한들로 효도를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족속이었다. 기원전 12세기에 그리스에 침입한 도리스족이 그들로 철제무기로 미케네 문명을 덮쳐 파괴하였다. 그 후 유사시대로 들어와 인간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더욱 잔혹해지고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도시왕국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이 외에도 인간의 시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컨대 청동기시대에 인간들이 사악해지자 제우스는 큰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킨 일이 있다. 이 때 오직 의로운 한 부부만이 살아남았는데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그 아내 퓨라(에피메데우스와 판도라의 딸)였다. 대홍수 때 프로메테우스는 데우칼리온에게 방주를 만들어 물 위에 띄우라고 일러주었다. 9일 밤낮으로 홍수가 계속되는 동안 이들 부부는 배에서 지내다가 테살리아의 산악지대에 닿았는데 물이 바진 후 지상으로 나가니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제우스의 사자 헤르메스를 만난 데우칼리온은 제우스에게 같이 살 사람들이 있기를 청원하였다. 제우스는 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어깨 너머로 모친의 뼈를 던지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불경한 행동이라 두려워하였으나, 모친의 뼈가 바로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의 뼈 즉 돌임을 깨닫고 돌을 집어던졌다. 이에 남편이 던진 곳에서는 남자가, 아내가 던진 곳에서는 여자가 나타났고 둘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니 큰 아들을 헬렌이라 이름지었다. 이 헬렌의 후손이 번성하여 그리스인의 조상이 되었고, 현재 그리스는 이 헬렌이라는 이름에 연유하여 헬레네스라 칭하게 되었다. 그 외의 아들로 도로스, 크수토스, 및 아이올로스를 두었는데, 도로스는 도리스인, 아이올로스는 아이올리아인의 조상이되고, 크수토스의 아들들은 아카이오스 및 이온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스의 인류 탄생에 관한 신화는 지역의 인종 또는 부족의 창조신화로 전해진다. 그 이전의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종족의 존재도 상정하고는 있으나 그에 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아르고스인의 선조는 이나코스 강의 신과 물푸레나무의 요정 멜리아스의 아들 포로네오스이고, 메세니아인의 조상은 메세네오스, 테살리아의 피티오티스 나라 조상은 피티오스이다. 특기할 부족은 기원전 대략 1883년경에 하이모니아를 넘어와서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골리스에 처음 정주한 사람들로, 이들은 펠라스기아(왕은 펠라스고스)라 하며 점차 에피로스, 크레타, 이탈리아, 레스보스 등지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그리스 선주민족을 총칭 펠라스기안스, 그리스 나라를 펠라스기아라고 부르기도 하나 주로 테살리아와 에피로스, 펠로폰네소스를 말한다.
Board 추천글 2023.11.14 風文 R 1560
은감불원(殷鑑不遠) 殷:은나라 은. 鑑:거울 감. 不:아니 불. 遠:멀 원. [원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 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 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참조] 주지육림(酒池肉林), 맥수지탄(麥秀之嘆). [출전]《詩經》〈大雅篇〉 은(殷)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멸망의 선례는 먼데 있지 않다는 뜻으로, 남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라는 말. 고대 중국 하(夏),은(殷),주(周)의 3왕조 중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달기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음락(飮酒淫樂)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간 주왕의 포학을 간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당하고 서백[西伯:훗날 주문왕(周文王)이 됨]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탕왕(湯王:주왕의 28대 선조)에게 주벌당한 하왕조의 걸왕(桀王:주왕과 대동 소이한 폭군음주)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간하다가 화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이《시경(詩經)》〈대아편(大雅篇)〉‘탕시(湯詩)’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侯之世(은감불원 재하후지세)] 삼공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주왕의 친형, 망명),기자(箕子:왕족, 망명),비간(比干:왕자, 처형당함)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를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發:주왕조의 시조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Board 고사성어 2023.11.14 風文 R 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