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빗속에서의 기다림 중학교 삼년 동안 그 친구와 나는 칠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그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도 변함없이 늘 함께 다녔다. 자전거를 나란히 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삼학년 겨울 무렵 나는 그만 내 재산 목록1호인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속상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학교와 온 동네를 뒤지며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당시 가정 형편상 새 자전거를 구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낙심해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 친구는 자신의 자전거로 같이 통학하자고 했다. 그 뒤 나는 친구의 자전거를 함게 타고 다녔다. 친구는 매일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우리 학교 정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고, 또 수업을 마치면 나를 태우러 다시 들렀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아침 저녁 늘 서로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수업도 조금 일찍 끝났다. 학교 정문에 나가 보았지만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한 십여 분 기다리다가 그냥 뒤를 돌아보면서, 자전거가 보이기만 하면 친구가 아닐까 싶어 내 앞을 지날 때까지 서 있곤 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옷은 빗물에 젖어 차갑고 축축했고, 가방이며 신발도 온통 빗물로 범벅이었다. 집에서 한참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한 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내가 비맞고 그냥 걸어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버스라도 타고 가지 그랬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김춘수 님/전북 남원시 주생면
Board 삶 속 글 2006.12.06 風磬 R 4556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푸른 색 식권 세장 대학 시절, 나는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으로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친구들의 구박아닌 구박과 눈치를 받으며 어렵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장선배가 내게 다가왔다. 당시 장선배는 학교에서 '살아있는 천사표'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있던 내게 자신의 자취방에서 함게 지내자며 흔쾌히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장선배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동했다. 둘이 누우면 꽉 찼던 장선배의 조그만 자취방에서 나는 이년 동안 선배와 함께 살았다. 학교 수업이 마치면 조무래기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면서 학비 벌기에 바빴지만 나는 늘 용돈이 부족했다. 내 주머니 속엔 언제나 교통비만 달랑 들어 있었기에 점심을 거르기가 일쑤여거, 나는 아예 점심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몰래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노랫가락 몇 소절 흥얼거리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에 들어갔던 장 선배가 혼자있는 나를 발견하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의실로 갔다. 그날 저녁, 낡아빠진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장선배가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웬 편지예요? 선배님 저에게 연애 편지 심부름시키시는 거예요?" 내가 이상해서 묻자, 선배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궁금해서 얼른 봉투를 열어 본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바로 학교 식당에서 사용하는 푸른색 식권 세장이었다. 유형진 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Board 삶 속 글 2006.12.05 風磬 R 5025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슴속에 숨겨 둔 이야기 초등학교 삼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된다. 동네 골목에서 나랑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들 몇 명과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말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네가 잘못했다고 티격태격 다투다가 너무 화가 난 나는 단짝 친구에게 아주 못된 말을 뱉어 버렸다. "넌 참 좋겠다. 엄마가 둘이니까!" 그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고, 친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친구 아버지는 본처와 첩을 같은 동네에 두고 살았는데, 친구는 첩을 작은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의 친엄마가 지나가다 우리를 보고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왜 그러니? 못나게 길바닥에 앉아 울고." 난 큰일났다 싶어서 잔뜩 긴장한 채 그 친구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줄행랑을 칠 준비를 했다. "엄마, 고무줄하다 넘어졌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순간, 너무나 착한 내 친구의 대답에 난 어쩔 줄 모랐다. 그 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그쳤을 뿐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선 용서를 빌지 못했다. 핑계같지만 괜히 얘기를 꺼내면 친구의 마음을 또 한번 다치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엔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권은숙 님/대구시 서구 비산2동
Board 삶 속 글 2006.12.04 風磬 R 565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가스실에서 만난 친구 작년 겨울 나는 군인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속에서 군대라는 생소한 조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낯선 사람과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곧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구르며 나는 조금씩 단련되어 갔다. 그러던 중 어느순간 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그날은 화생방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화생방 교육이란 가스를 틀어 놓은 방에 들어가 몇분간 견디는 훈련이었다. 말로만 듣던 가스실에 들어가 직접 체험을 해 보는 것이었지만 학교 다닐 때 수없이 최루가스 냄새를 맡아 본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스실에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혀왔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고 눈물 콧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문득 지옥이 이런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집을 떠난 외로움과 고통으로 나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거 써"하며 휴지 몇 장을 내밀었다. 기스실에 함께 들어간 이름모를 동료였다. 그 전우는 자기 눈물, 콧물 닦아 내기도 모자란 휴지를 떼어 내게 나눠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나에게 따뜻함을 전해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전우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황득규 님/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Board 삶 속 글 2006.12.01 風磬 R 538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구이병과 김상병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한달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새벽 한 시까지 각개 전투 및 야간 행군 훈련을 받은 우리 소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나는 훈련도중에 다친 발목 때문에 더했다. 하지만 취침 전 선임하사의 장비 점검 구령이 떨어져 우리는 쉬지는 못하고 장비 손실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검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전에 수통을 잃어버린 박일병이 연병장을 이십바퀴나 돌았던 걸 생각하며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중대장님이 직접 장비 점검을 하는게 아닌가.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발목의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삼십분이 흘렀을까.ㅇ장비 점검을 마친 중대장님이 나타났다. "요즘 정신 나간 사병이 있다. 목숨보다 귀한 장비를 분실해? 그것도 대검을!" 침묵이 흘렀다. "이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어떻게 적과 사워 이길수 있겠나? 대검 잃어버린 김태성 상병은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 삼십바퀴 돌아! 실시!"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검을 잃어버린 건 난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나는 발목 통증도 잊은 채 내무반으로 뛰어들어가 나의 장비부터 살펴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없었던 대검이 있는게 아닌가. 연병장에는 김 상병이 완전 군장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김상병이 내무반에 들어왔다. 모두들 말없이 쳐다봤다. "야! 구 이병 니가 뛰었다카모 아마 황천길 갔을끼라. 내 대검 이리주라." 지난 밤에 불침번이었던 김태성 상병은 잠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나의 고민을 눈치챈 것이다. 김상병은 나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요즘은 쫄병들 때문에 일요일도 없다카이." 이틀 뒤 김상병은 나에게 대검 한자루를 구해줬고, 그 뒤 우리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김상병의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나의 마음 한구석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자현 님/경남 남해군 청선면
Board 삶 속 글 2006.11.30 風磬 R 5104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가장 값진 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해 가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엄마가 쓰러지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어느 큰 병원에서 '뇌지주막하출혈'이라는 병명으로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다. 그때는 내가 직장 생활에 겨우 적응하여 안정을 찾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렵게 한 달간 휴직계룰 내고 모든일을 뒤로 한 채 엄마의 병간호를 했다. 엄마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으셨기 때문에 한 달만에 퇴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다 못해 내가 일년 동안 쓸수 있는 연차와 월차를 미리 당겨서 다 썼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보름동안 회사에는 서류가 쌓일 대로 쌓이고 일 처리는 늦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쉽게 낫지 않으셨다. 엄마를 간호하려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가족중에 엄마를 간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 둘까? 하지만 엄청난 병원비는 누가 다 감당하고.....' 속상한 마음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 미숙이가 병문안을 왔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답답해서 미숙이에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 이틀 뒤에 미숙이가 다시 병원에 왔다. "미숙아, 웬일이니? 회사는 어떡하구....." "그냥 일하기 싫어서 일주일 휴가냈다. 어머니 병간호나 할란다. 너는 회사에 가 봐라." 직장 생활하면서 휴가를 낸다는 것이, 그것도 갑자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숙이는 일하기 싫어서 왔다고 하지만 나 때문에 일부러 휴가를 낸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친구의 엄마라지만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힘든 간호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미숙이의 손을 잡고 한 참동안 울었다. 엄마는 미숙이의 그런 정성 때문인지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퇴원하셨다. 엄마는 지금도 미숙이 얘기를 하신다. "미숙이한테 잘해 주거라. 그런 친구 정말 보기 힘들어." 나도 안다. 미숙이 같은 친구가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신순영 님/경남 양산시 신기동
Board 삶 속 글 2006.11.29 風磬 R 5135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언니와 나, 딸 둘뿐인 우리에게 사촌 오빠들이 입던 옷을 물려입게 하셨다. 가끔씩 겉옷은 물론 속옷도 물려 입었는데 어린 우리는 별다른 불평없이 엄마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삼학년 신체검사 때의 일이다. 그 날도 여느때처럼 나는 남자 속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자애들이 복도로 나간 뒤, 나는 웃옷을 벗으려다가 그만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친구들의 속옷 모양이 내가 입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의 속옷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차마 웃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옷을 벗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달래고, 혼내시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맨 나중에 검사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나에게 남자 속옷을 입힌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또 아무 잘못없는 담임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한쪽에서 울먹이고 있는 내게 먼저 검사를 마친 단짝 미경이가 다가왔다. 나는 미경이에게만 속상한 내 마음을 살짝 털어놓았다. "내가 입고 있는 속옷은 남자거야." 그러자 미경이가 얼른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검사가 끝났으니까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빨리." 미경이 덕분에 나는 반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속옷을 선물한다. 속옷을 고를 때마다 미경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은정 님/대전시 서구 삼천동
Board 삶 속 글 2006.11.28 風磬 R 410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사과 한알에 담긴 설레임 아빠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쁙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내게는 며칠만에 나타난 아빠의 초췌한 모습과 불편한 산골 생활이 너무 낯설고 끔찍하기만 했다.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응해야만 했다. 우선 전학을 했다. 작은 산골 마을이라 그런지 급우들은 내가 왜 전학을 와야만 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있잖아, 쟤가 집이 망해서 전학왔다는 그 애야." 내가 지나가면 모두들 수군거렸다. 비웃음 섞임 말에 몇 번이고 울컥했지만 그럴 때마다 입술을 꼬올 깨물었다. 그리고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엇다. 상처 받은 나는 그 아이들을 경계하고 미워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너무 외롭고 슬펐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다.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우정과 사랑은 설레임에서 시작한다고, 네가 아직 우리에게 설레임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우리는 너의 설에임을 기다리고 있어.'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삭막한 현실에 부딪쳐 까맣게 타 버린 가슴속에 훈훈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쩌면 내가 먼저 벽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내게 다가오는 게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바보처럼 그들만 원망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짝궁인 초희에게 사과하나를 내밀었다. "우리 할머니가 너랑 같이 먹으래." 그렇게 말해 놓고서 나는 부끄러워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그런 내게 초희는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그 뒤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참 행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쪽지는 초희와 몇몇 친구들의 공동작품이었다. 이제 가정 형편도 어느정도 나아졌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쪽지의 마지만 글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설레임이 있는 만남은 그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나에게 그런 행복을 일깨워 준 그 친구들이 너무도 고맙다. 이유록 님/경북 구미시 공단동
Board 삶 속 글 2006.11.27 風磬 R 4456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부끄러움을 알게 해 준 친구 나는 어릴 때 몸이 많이 허약했다. 체력이 워낙 약한 탓도 있었지만 엄마의 지나친 보호가 나를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는 초등학교 일학년 때 체육 수업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랑 뛰어논 기억도 별로 없고 소풍도 엄마의 채근에 못 이겨 억지로 따라 나섰다. 게다가 선생님들까지 내가 건강이 안 좋다며 많은 배려를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학년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체육 시간에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남자아이와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수업시간에도 모자를 벗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시간, 그날도 그 애와 단둘이 교실에 남아싿. 나는 그 애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야, 왜 너는 내일 모자를 쓰고 있지?" 그 애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안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해서 나는 그 애 뒤로 슬금슬금 가서 모자를 확 벗겨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애의 머리엔 머리카락은 없고 듬성듬성 솜털 같은 것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 애의 머리를 쑤욱 눌렀는데 물렁물렁했다. 그 애는 당황한 채로 서 있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썼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애는 조용히 자신의 아픔을 참아 왔다는 것을, 갑자기 조금만 아파도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던 나의 철없는 행동들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애가 얼마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이임경 님/부산시 수영구 망미2동
Board 삶 속 글 2006.11.26 風磬 R 411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그리움을 참으면 별이 된다. - 제 손은 찬데요! 매일 아이들과 티격태격인 게 학교 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두 명의 말썽꾸러기는 선생님들을 몹시도 힘들게 하지만 오늘은 제 마음이 푸근하기만 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 치고 말썽꾸러기 아닌 아이가 없지만, 특히 오학년이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어리다고 할 수도, 나이가 많다고 할수도 없는 나이인 데다가 부모님의 관심도 줄어들 때이기에 더 별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학년 배정을 받던 날부터 잔뜩 긴장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학년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 말썽꾸러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말썽 꾸러기는 장난이 하도 심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그 애는 짝을 괴롭니다 나에게 야단을 맞았는데, 고개를 푹숙인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아이의 두손을 잡고 달래 보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하며 그 아이의 손을 잡았는데 아이의 손이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야!손이 너무 따뜻하구나. 손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도 착하고 따뜻하다던데, 아마 너 가슴은 더 따뜻할 거야. 얘들아, 너희들은 모르지?"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물론 손을 잡힌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감탄사를 쏟아냈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세요? 책상 밑으로 손을 내리더니 제 손들을 매만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키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손은 찬데요. 그럼 전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가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고 제가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 많기로 소문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뭘, 네 손도 따뜻한 걸." 그러자 그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돌아서는 순간 저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핬는지 모습니다. 어른든에게는 한 순간 웃고 넘어 갈 일이었겠지만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마음은 저를 무척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생활 속에서 메마름을 느낄 때, 생활이 힘들 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해맑은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작은 웃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권은선 님/대구시 동구 방촌동
Board 삶 속 글 2006.11.24 風磬 R 4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