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빨갛게 벗겨진 할머니의 머리 일 년, 이 년, 삼 년……. 제가 외갓집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십이 년이 다 되어갑니다. 제가 아마 다섯 살 때였을 겁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다섯 살의 어린 꼬마에겐 너무도 엄청난 겨울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엄마! 내 아이들, 내 아이들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아무 대답도 못하셨지요,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딸자식 못 살린 것도 원통한데 내가 너희들 셋을 못 키우겠니"하시며 이를 악무셨습니다. 그 각오로 지금까지 저희 삼남매를 힘들게 키우셨죠. 해질녘에 들어오셔서 밤새 팔다리가 아파 신음하시면서도 어김없이 새벽 네시가 되면 일어나서 빨래하고 밥을 지으시며 저희들의 도시락까지 싸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일을 팔 년씩이나 하실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육학년 때까지도 할머니께서 무슨일을 하시는지 잘 몰랐습니다. 어느 날, t소풍에서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할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엇던 할머니가 고무통에 벽돌을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삼층 계단을 기어가듯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세상이 깜깜하고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음인지라 창피하다는 생각에 저는 그만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잠이 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할머니의 정수리 부분이 빨갛게 벗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머리를 빨갛게 벗겨지게 한 것은 벽돌이 아니라 우리 삼남매였습니다. 남들은 자식 한명도 키우기 힘들어서 키운다, 못키운다 쩔쩔매는데 우리 할머니는 자식도아닌 외손주를 셋씩이나 키우시며 부모님보다 더 잘해 주시니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소중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김은정 님/전남 여수시 연등동
Board 삶 속 글 2006.10.05 風磬 R 7635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아버지가 사 가신 그림 아버지가 작업실에 오셨다. 장남이 그림을 그린답시고 값싼 지하실을 전전하는 동안 한 번도 찾아오신 일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오신 것이다. 밤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에 라면을 먹고 있던 나는 당황한 정도를 넘어 민망스러웠다. 아버지의 손에는 이홉들이 소주 한 병과 안주감이 들려 있었다. "내가 술이 좀 취해서 차를 몰고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겠다. 오다가 요 앞 가게에서 파는족발이 하도 맛있게 생겼길래......너 족발 좋아하지?" 그날 밤 아버지와 나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간에 쌓였던 보이지 않는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갔다. "나야 그림에 대해 뭘 알기나 하나. 그림 그리는 자식을 뒀다지만 나는 아직도 그림에는 영 문외한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참 좋다"를 연발하셨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고, 전작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고셨다. 잠이 드신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니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안계셨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풍경화 한 점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노란 종이 위에 먹을 갈아 정성스렀게 쓴 아버지의 불글씨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그림 한 점 가져 간다. 이야기하고 가져 가야겠지만 곤히 자고 있어서 그냥 간다.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그림 값은 탁자 위에 놓았다. 라면만 먹지 말고 밥을 먹도록 해라.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이 네 어머니 생일이니 선물 하나 준비해서 꼭 오너라. -아버지가 장남에게」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들의 그림 한 점 맘놓고 가져가지 못하고, 생활에 보태 쓰라고 그림 값까지 두고 가신 아버지께 나는 과연 어떠한 아들이었던가. 다음 주에는 꼭 집에 가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가 사 가신 그림을 보니 그림 보는 안목이 보통은 넘어신다고...... 류명기 님/전북 완주군 비봉면
Board 삶 속 글 2006.10.03 風磬 R 689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새악아 미안하데이 "엄마, 괜찮아요......이까짓 다리 좀 불편한 것 사는데 지장없다구요!" 속상하신 나머지 어머니는 "그러게 누가 맏며느리 자리에 시집가랬더냐!" 하시며 내가 교통사고 당한 것을 시집 잘못 간 탓이라고 여기셨다.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는 시동생, 시누이 뒤치다꺼리와 일 년에 열 번이 넘는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며 사십여 년 간 두 다리 죽 뻗고 자본 일이 없다고 자주 얘기하시곤 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던 종가집 며느리 자리에 막내딸이 시집간다고 했을 때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나는 잘살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속으론 그 많은 시댁 식구들과 어떻게 맞추어 살아갈 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걱정이 점점 커지긴 했지만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시할머님, 시부모님, 시누이, 모두들 내게 세심하게 잘해 주었지만계속되는 생일 잔치, 제사, 차례는 나를 몹시 힘들게 하였다. 그러던 중 시할머님 생신을 하루 앞둔 날, 시장에 다녀오다가 오토바이와 부딪힌 나는 중상을 입어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었다. 병원에서 몇 달 간 치료를 한 뒤 나는 곧바로 친정으로 옮겨졌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도 잘 모르겟고, 시댁으로 돌아갈 업두 또한 나지 않았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자주 들러 "그만 집으로 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차일피일 날짜만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시누이가 전화를 걸어 왔다. 시할머님이 새아기가 그리된 것은 모두 당신 탓이라며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시고 우시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시댁 식구들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전화를 끊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은 나는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가 부르셔서 나가보니 시댁 식구들이 모두 서 있는 것이었다. 남편과 시부모님, 시누이, 시할머님까지..... 허리가 구부러져 몸이 새처럼 작은 시할머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새악아.....미안하데이." 그 길로 나는 챙겨 놓은 짐을 들고 시댁 어른들을 따라나섰다. 시댁 어른들의 배려 속에서 불편한 몸에 대한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선 나는 시할머님, 시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글쓴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
Board 삶 속 글 2006.10.03 風磬 R 669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회초리는 맨날 어디서 나와? 소똥 냄새가 풍기는 그곳에는 매일 빨래 바구니를 이고 시냇가로 가던, 나의 소박한 모습이 간직되어 있다. 그곳은 바로 시골 할머니 댁이다. 내 또래의 도시 아이들은 아마 냇가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맛벌이를 하신 탓에 나는 어린 시절의 몇 년 동안을 할머니 댁에서 보냈다. 빨래한답시고 흰 빨래를 바구니 가득 가져 가서는 구정물만 잔뜩 들여오던 내 고사리 같은 손에 얼마의 돈을 쥐어 주며 웃으시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모든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지만 할머니의 호된 꾸지람과 사랑이 깃든, 종아리에 착착 감기던 싸리나무 회초리만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짖궂은 장난을 잘 쳐서 회초리로 많이 맞았다. 부러져도 또 생기고, 숨겨 놔도 또 생기던 회초리! 할머니는 늘 따뜻하게 대해 주셨지만 잘못은 무섭게 꾸짖으셨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손에는 예외없이 싸리나무 회초리가 들려져 있었다. 그 무섭고 싫던 싸리나무 회초리가 내 가느다란 종아리를 가차없이 내리칠때면 눈물이 찔끔 나오고 "할머니 미워!" 하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기를 몇차례, 내 머리속에 한가지 기막힌 꾀가 생각났다. '숨겨 놓으면 될거야. 할머니가 항상 다락에 두었으니까. 그걸 몰래 숨기면 돼.' 이런 생각을 해낸 내가 어찌나 대견스러웠던지. 그때의 기쁨을 크기로 나타낸다면 아마 백두산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할머니에게 또 회초리로 맞고 말았다. '회초리는 분명 다 없애 버렸는데.....' 나는 할머니가밖에 나가신 위 울면서 다락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싸리나무 회초리가 얇고 미끈한 곡선미를 뽐내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여러개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하도 이상하고 또 신기해거 할머니께 뛰어가 큰소리로 투정하듯 물었다. "할머니, 회초리는 맨날 어디서 나와?" 강운아 님/서울시 서초구 반포2동
Board 삶 속 글 2006.10.02 風磬 R 987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인기 최고 우리 집 마루 "진희야, 아빠 등 좀 봐라." 아버지의 등에는 물인지 담인지 모를 물이 흥건했다. "와, 아빠 등목하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땀이다!"하고 외치셨다. 사 년 전 어느 여름 날, 마루를 만들고 계신 아버지 곁에서 나는 심부름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큰언니 결혼식을 일년 정도 앞두고 있던 때였는데 결혼식 손님을 맞기에는 마루가 너무 좁았다. 그래서 마루와 토방을 이어 넓히자고 했는데 아버지가 직접 해보겠다고 일을 벌이신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솜씨는 참 미더웠다. 마루가 토방보다 높아 낮은 토방에 우선 자갈을 갈고 그 위에 다시 흙을 깔아 턱을 맞춘 다음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끌로 다듬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어느 미장공 못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드디어 마루가 완성되었다. 청록색 정사각형 무늬가 있는 장판을 깔아 놓으니 온 집안이 환해지는 듯 했다. 그런데 발을 디디는 순간,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걸어다녀 보더니 영 불편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미장이 불러오자니까 자기만 믿으라더니." 어머니께서는 울퉁불퉁한 마루바닥을 못마땅해 하셨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내내 우리집 거실은 인기 최고였다. 아버지께서는 거실 한가운데에 목침을 놓고 큰대자로 누워 세상 만사 다 잊어버린 듯 주무셨다. 어머니께서도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두른 채 잠깐 눈만 부친다며 눕지만 두세 시간 정도는 깨어날 줄 모르셨다. 그리고 밤이면 마루는 아예 온 가족의 침실이 되었다. 어머니, 언니, 오빠의 판판하지 않다는 불평은 쏙 들어가고 울퉁불퉁한 마루는 우리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도의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안 해 본 일 없고, 못하는 일 없다던 아버지는 큰언니의 결혼을 한 달쯤 앞두고 바다에 나가셨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하늘나라 어느 집에 마루를 만들어 주러 가셨나 보다. 이제야 실토하지만 아버지 실력은 별론데..... 하늘은 정말 바보다. 아버지는 마룻바닥 하나 제대로 미끈하게 못 만드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데려갔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냥 아버지를 보내 주면 내가 다시는 하늘을 향해 바보라고 하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음을 내게 알려주신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게 있다. 그리움은 영원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엄진희 님/충남 보령시 신혹동
Board 삶 속 글 2006.10.01 風磬 R 663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머니의 일기장은 수건 초저녁부터 장롱 앞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엔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보고 있던 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도 어머니는 여전히 장롱 앞에 앉아 계셨다. "밥 안 주능교?" 대뜸 던진 내 말에도 어머니는 그저 "응? 그래 조금만 있어봐라" 하셨다. 그제서야 빨래를 정리하시나보다 하던 나의 무관심이 호기심으로 변했다. "뭐하는데 아까부터 내내 그라고 있능교?" 슬그머니 다가앉은 나를 보시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정리하던 서랍 속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보이셨다. "이게 뭔지 아나?" 내가 보기엔 그저 노란빛이 바랜 낡은 수건이었다. "뭔데요? 수건 아인교?" 했더니 "그래 너 처음 나아서 싼 수건이다 이놈아" 하셨다.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어머니의 말씀에 점 쑥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수건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도 보았다. 수건 속에 싸인 나를 상상해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그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수건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날짜가 적혀 있고 무슨무슨 기념이라는 글자가 적힌 수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마치 어머니의 지난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처음 나들이 나갔을 때 산 수건이라든지 내가 수학여행때 사다 드린 수건, 또 누군가 선물로 준 수건 등등. 수건 하나하나를 보며 그때 있었던 일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해 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정래 씨가 쓴 수건의 맵시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들의 수건 쓴 모습을 우리는 참 많이도 보았던 것 같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수건을 쓰고 후끈거리는 밭이랑에 앉아 호미질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빨래터에서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앉아 빨래 방망이질을 하시던 모습들은 어릴 때 자주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어머님들은 쓰시던 그 수건으로 훌쩍거리는 우리 아이들의 코도 풀어 주고 맛난 과일을 깨끗하게 닥아도 주고 무슨 설움으로 부엌 부뚜막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찍어도 내었으리라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그 수건에도 꽤 정이 간다." 문득, 지난 가을 집 앞의 대추나무를 털던 날에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무에 모른 나는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대추를 털면서 일부러 어머니가 계신쪽으로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흰 수건을 쓴 어머니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빨간 대추들..... 내 심술을 알기나 하신 듯 "이놈아!"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저녁상을 차리려고 나가신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를 들르며 나는 장롱 앞에 다시 앉아 어머니의 서랍을 몰래 열어 보았다. 그 속엔 어머니의 추억이 묻은 수건들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이것들도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소품들이라 생각하니 웬지 코끝이 찡해 왔다. 김판수 님/경남 양산군 상북면
Board 삶 속 글 2006.09.30 風磬 R 8670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빨리 밥 먹어라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 년 만에 집에 들어서는 내게 하신 할머니의 말씀이다. 이 년전, 나는 할아버지를 속이고 어릴 때부터 꿈꿔 오던 수도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때 할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해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말씀 드린 뒤 몰래 수녀원에 갈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사실을 몰랐던 가족들에겐 본의 아닌 허락을 받아냈지만 할아버지께는 끝내 아무런 말슴을 드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나는 수녀원에 가기 전까지 할아버지께 잘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월급날엔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청자 담배를 사서 부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봉투째 보낸 첫 달 월급을 돌아가실 때까지 안 쓰고 지갑 속에 넣어 다니며 동네 어른들게 자랑하실 정도로 나를 끔찍하게 생각해 주셨다. 일찍 부모를 여윈 할아버지는 장남이신 나의 아버지가 6.25전쟁 때 전시하자 아버지에게 쏟았던 사랑을 손녀인 나에게 주셨다. 그런 사랑을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커 가면서 그 사랑이 나의 마음에 늘 채워져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말씀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드실 때마다 "내가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손녀 시집갈 때 상객으로 따라가야지"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처음엔 직장에 있는 것처럼 편지를 드렸다. 그러나 거짓말로 쓰는 편지가 어려워 점점 편지쓰는 것도 줄였다. 그러뎐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외출하셨다가 내가 수녀원에 간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젠 날벼락이 떨어지겠구나'하며 온 가족이 떨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눈물만 흘리셔서 또 한번 가족들을 놀라게 하셨다. 그 엄하신 할아버지께서 우시기만 하시니 가족들의 마음은 더욱 아팟을 것이다. 수녀원에서 보내 주는 휴가도 할아버지께 붙잡힐 것 같아 처음에는 가지 않았다. 집에서도 언젠가는 내가 돌아오겠지 하고 퇴거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주민등록 정리를 해야 된다며 집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어라"하셨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벽쪽으로 등을 돌리셨다. 나는 할아버지 등 뒤에서 울기만 했다. "배고프겠구나. 어서 건너가서 밥 먹어라." 갑자기 할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할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저는 잘 있었지만 할아버지 걱정에....."라고 소리내어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빨리 밥 먹어라."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엇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밤을 세워 가며 할머니와 나는 수녀원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도 옆에 누우셔서 다 들으시고 수녀원도 사람 살 만한 곳이란 걸 이해하셨고, 또 내 얼굴이 여전히 밝고 행복해 보임을 아시고 모든걸 받아주셨다. 할아버지의 큰 사랑은 나의 거짓말까지 다 품어 주신 것이다. 이엘리아 님/경남 마산시 합포구
Board 삶 속 글 2006.09.29 風磬 R 7634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아들의 명찰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더니 새벽녘이면 눈이 번쩍 떠진다. 방바닥에 비춰지는 창 크기만한 달빛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네 놈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라 목언저리가 저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불효막심한 일이 제 무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이라던데 네가 바로 그 꼴이로구나. 심장마비로 네가 죽은지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네 엄마가 하루에 몇번씩 우는 통에 어제는 화를 좀 냈다. 텔레비젼을 보면서도 네 또래의 사람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고, 밥 먹을 때 네가 않았던 자리를 보고 또 울고..... 그래서 아예 네 의자를 치워버렸다. 의자 뿐만 아니라 네가 쓰던 물건은 모조리 버렸단다. 네 엄마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눈물로 호소하던 사진까지..... 그런데 오늘 아침, 도장을 찾으려고 서랍을 뒤지다가 네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에 달앗던 명찰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보니 네 장례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떨어지더구나. 고등학교 때 넌 무던히도 어미, 아비 속을 썪였었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권투한다고 체육관이나 들락거리고..... 어느날인가는 밤 늦은 시간에 어디서 먹었는지 술에 잔뜩 취한 너를 네 체육관 친구들이 업고 왔었지. 다음날 아침, 네게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난생 처음으로 네 머리를 세게 후려쳤는데 넌 그때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오히려 내 팔을 부여잡고 말리려는 어머니를 네게서 떼어 놓았다. 그래서 난 더 때릴 수가 없엇는데 그날 밤 가슴이 무척 쓰리더구나. 한편으로는 반항하지 않고 맞기만 하는 너를 보고 '이젠 아이가 아니로구나. 다 자랐구나'하는 생각에 대견하기도 했단다. 아들아, 그땐 정말 미안했구나.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들아, 옆에서 자고 있는 네 엄마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네 명찰을 보니 그간 네 엄마에게 네 생각 못하게 한 것이 후회가 되는 구나. 내일 아침에 이 명찰을 네 엄마에게 선물로 주어야 겠다. 그리고 실컷 울어볼란다. 우리 부부 울음소리 네가 있는 하늘까지 들리도록 말이다. 박승중 님/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Board 삶 속 글 2006.09.28 風磬 R 6532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구멍뚫린 어머니의 신발 어느 해 유월이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잔잔한 바람과, 코끝으로 전해오는 풋풋한 풀내음이 그날다라 얼마나 짜증스러웠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모두 즐겁게 놀고 있겠지하고 생각하니 울고 싶었다.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들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데 내게는 너무나 가혹한 벌처럼 느껴졌다. 실은 어머니가 수학여행비라며 옆집에서 꾼 오만원을 주셔서 그것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새 옷에, 새 신에다 넉넉한 용돈을 가지고 가는데 나만 빈손으로 가면 초라해 보일 것 같아 차라리 농사일이나 돕겠다고 남은 것이다. '이왕 도와 드리는 것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어머니께 투정 부리고 짜증을 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일하고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신이나 한 켤레 사 신으라며 꼬깃꼬깃하게 접힌 이만 원을 내게 쥐어 주셨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어머니의 손은 많이 거칠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어머니가 주신 이만 원으로 빨간 운동화를 사 신었다. 새 운동화에 흙먼지가 묻을까 봐 조심조심 대문을 들어서다 나는 그만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어머니는 못 쓰게 된 장판 조각에 발을 대고, 발 크기만큼 오리고 계셨다. 그리고 축담에는 닳고 닳아 밑창이 뻥 뚫린 허름한 신발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갑자기 새 신을 신은 내 발을 감추고 싶었다. 왜 진작 몰았을까. 당신은 장판을 잘라 헌신에 붙여 신으면서 자식에게는 새 신을 사 신기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마구 화를 낸 것이다. "수학여행 가는데 옷 한 벌 안 사주고 용돈도 이것밖에 안 줘!"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다음해 어버이날 나는 일년 동안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하얀 구두를 선물했다. 하얀 구두보다 더 맑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내 마음은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 질 수 있었다. 김선옥 님/경남 남해군 남해읍
Board 삶 속 글 2006.09.27 風磬 R 840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장모님이 사 주신 책상 결혼 일주년을 맞은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인 상도동 단칸방에는 큼지막한 책상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당시 야간 대학 이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와 결혼식을 올린 아내는 주위에서 신랑의 직장생활과 공부 뒷바라지를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걱정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유독 장모님만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결혼한 뒤에도 이년간이나 더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중학교때부터 쓰던 낡고 작은 책상을 옮겨 오기로 했다. 아내의 집이나 우리 집이나 살림이 넉넉지 않아 결혼비용을 최대한 절약하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극구 새 책상을 사겠다고 했지만 나는 아내를 구슬러 간신히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런데 가구가 들어오던 날, 장롱과 화장대 뿐 아니라 주문하지도 않은 커다란 책상까지 배달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와 아내는 가구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가구점 주인은 책상은 맞게 배달되었으며 계산도 모두 끝났다고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장모님이 그 책상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딸 많이 사랑해 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란 뜻이네!" 장모님의 말씀에 나는 그저 "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신혼의 단꿈이 젖어 있던 어느 날, 아내가 장모님이 이상하다는 말을 했다. 오전에는 항상 집에 안 계셔서 어디 다녀오셨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안 하신다는 것이었다. 장인어른께 전화로 살짝 여쭈니 식당에 나가신다고 하셨다.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어떻게 식당일을 하시겠냐는 생각에 나는 장모님께 식당에 절대 나가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장모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송서방 괜찮네. 운동삼아 아침에만 잠간 하는 일인데 뭐....." 그날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장모님이 식당에 나가신 이유는 우리 부부에게 사 주신 책상 값을 갚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송제인 님/서울시 송파구 잠실2동
Board 삶 속 글 2006.09.26 風磬 R 6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