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범밭에 심은 꿈 올해도 우리마을엔 밤이 많이 열렸을 것이다. 밤나무가 많은 우리 마을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저절로 익어 떨어진 밤 줍기에 바쁘다. 어릴 때 여동생과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커다란 자루를 들고 밤을 주으러 가곤 했다. 해거름까지 줍고 나면 두세 자루에 둥그런 밤이 가득했다.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밤들을 보고 동생과 나는 괜히 들떠서 펄쩍펄쩍 뛰어 다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저쪽에 가서 다람쥐나 쫓아 버려라"고 야단을 치셨다. 다람쥐들과 숨바꼭질을 하느라 달음질쳐 가다 보면 멀리까지 나간다. 그러면 또 어머니가 멀리서 손짓하며 부르셨다. "순호야! 해영아!" 아버지는 지게에 밤자루를 짊어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얹으시며 "됐다, 이제 집에 가자"하시면 동생과 나는 남겨 두고 가는 밤이 아까워 주머니가 불룩해질 때까지 밤을 밀어 넣었다. 어머니가 쫓아와 큰소리를 치실 때까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 거적을 깔고 밤을 쏟아 놓으면 난 툇마루에 앉아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잠을 들곤 했다. 그러나 그 밤은 우리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어느 도회지 사람의 것이었다. 밤을 줍는 아이는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렇게 밤이 떨어지던 어느 해 나는 고향을 떠나왔다. 어머니는 빛깔 고운 생밤을 가방에 넣어 주시며 "언제든지 다시 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결심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결심이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돈을 모으는 것이 무슨 계획이냐고 나 스스로도 부끄러울 때가 많았으나 굽은 어머니의 등과, 갈라진 아버지의 손등을 기억해 내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내가 이곳 구미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동안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을만 되면 계속 남의 밤밭에 가셔서 밤을 주웠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도 그 밤밭을 사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조그만 논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그 논을 일구며 여러 자식들 잘 키워 주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 그 밤밭을 사서 그곳에 가을이 찾아오면 열심히 밤을 주울 것이다. 비록 가시에 찔려 눈물이 찔끔 날지언정 난 행복할 것 같다. 정순호 님/경북 구미시 공단동
Board 삶 속 글 2006.11.01 風磬 R 5352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다람쥐 가족 두 해전쯤 일이었을 게다. 평소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눈이 침침하다고 하셔서 안과에 모시고 갔었다. 접수창구에 의료보험증을 내밀자 이름을 확인한 간호사가 대뜸 "생후 한달도 안 된 애를 데려왔어요?"하는 것이었다. 보험증에 쓰여진 할머니의 생년월일을 끝에 두 자만 본 간호사의 실수였다. "아, 예, 1890년대 분이라......" 내가 웃으며 말하자 간호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백하고도 다시 셋을 더 사신 할머니는 몇 년 전 백내장 수술을 받으신 것을 제외하곤 잔병치레 한 번 없을 만큼 정정하시다. 할머니가 "나도 통장 한 개 맹글어 다고"하시며 평생 저금통장 하나 없이 살아오신 것을 서운해 하시자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은행에 가셨다. 컴퓨터 자판을 몇 번이나 두드려 본 은행 여직원은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되돌려 주며 몹시 난처해했다. "......저, 컴퓨터가 1800년도 입력시키지 못해서..... 통장을 만들 수 없겠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백 살 넘으면 통장도 만들지 못합니까"하시면서 벌컥 화를 내셔모시고 갔었다. 몹시 섭섭해하시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은행문을 나섰는데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밥만 축내는 깡통은 어서 죽어야지......" 라고 말씀하셔서 아버지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고 하셨다. 고손자 생일까지 기억해 낼 만큼 총기가 좋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내 어머니. 예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손 마디마디에는 흉흉한 굳은 살이 박혀 있는 데, 이것은 삼십년 배추장사의 대가이다. 매서운 바람이 들창을 두드리는 새벽녘, 장사를 하러 나가시는 어머니의 대문 닫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따뜻한 이불이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차창 밖으로 배추가 그득한 소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버스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가슴에 남아 후회가 된다. 그리고 내 아내, 동그란 얼굴의 미소가 예쁜 내 아내는 나에게 시집온 지 팔년이 되어 이제 서른 살이 되었다. 가끔 시할머니,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아내를 두고 동네 아낙들이 "어찌 사느냐"며 소근거릴 때에도 아내는 "나같이 행복한 여자 없다"며 내 팔짱을 껴 내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할머니. 부모님, 우리 부부 그리고 나의 아이들 이렇게 4대가 한 집에 옹기종기 다람쥐처럼 모여 사는 우리집,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려는 배려 속에서 끈끈한 정으로 서로를 엮어 가는 우리집처넘 행복한 둥우리가 또 있을까. 서용석 님/대전시 유성구 어은동
Board 삶 속 글 2006.10.31 風磬 R 477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달걀 꾸러미에 반하다.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첫 아이를 낳은 뒤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결혼 적령기에 있던 여동생이 직장 생활이 힘들어 잠시 쉴까 했는데 잘됐다며 자신이 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고마운 마음이 앞섰지만 선뜻 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은 기꺼이 하겠다고 나섰다. 그 뒤 동생은 아이를 돌보면서 주말이면 시골에 가 부모님 일도 거들어 드리고 사이사이 짬을 내 맞선도 보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시골에 다니러 갔던 동생이 일요일에 선을 보고 올라왔다. 동생의 얼굴이 환한 걸 보니 일이 잘된 것 같았다. 웬 달걀이냐는 내 물음에 동생은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기르는 토종닭이 낳은 거라며 언니 생각해서 가져왔다고 대답했다. 고마운 생각보다는 선보는 자리에서 달걀을 어떻게 했는지가 더 궁금해 졌다. 설마 거추장스럽게 거기까지 가져가진 않았겠지 하고 다기 물었는데 동생의 대답은 당당하기만 했다. "언니야, 달걀 꾸러미 들고 선보러 가면 왜 안되노?" 동생은 선보는 자리에 그 달걀 꾸러미를 들고 나갔던 것이다. 그 후 동생은 그날 저녁 선본 사람과 몇 차례 더 만나더니 결국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나중에 나는 제부에게 선보던 그 날 촌스러웠던 내 동생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살짝 물었다. 그랬더니 제부의 대답은 더욱 걸작이었다. "몇 번 선을 보았지만 언니에게 줄 달걀을 들고 선보고 나온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릅답고 사랑스럽게 보였는데요. 찻집에서 나올 때는 제가 그 달걀 꾸러미를 들고 나왔습니다." 제부는 애물단지 달걀 꾸러미를 액세서리 보석처럼 예쁘게 봐 준 것이다. 임미영 님/충남 홍성군 광천읍
Board 삶 속 글 2006.10.30 風磬 R 510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형수님! 형수님! 가족들이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그리고 마음마저 꼭꼭 닫아 버린 채 산다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 겠지요. 형과 어머니의 사이에는 지금 천길, 만 길이나 되는 강물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 강은 바로 형수입니다. 어머니는 형수를 좋아 하지 않으십니다. 그 강은 바로 형수입니다. 당신의 며느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그 빈자리를 형이 메워온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 하셨습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한 채 어린 나이의 아들을 거친 세상에 내놓은 것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형을 끔찍이 생각하셨고 형 역시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형이 어머니가 반대하시는 여자와 몰래 살림을 차렸으니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슬픔이 이해가 갔기에 저 역시 형의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형과 형수는 죽을 죄를 지었다며 어머니께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며칠전 형수가 저의 직장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퇴근 길에 형 집에 잠깐 들르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수는 제게 한약을 담은 봉지를 내주었습니다. 어머니 보약이라며 자신이 직접 가져다 드리고 싶지만 드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형수가 철철이 사 오는 빛깔 좋은 옷이며, 형수가 직접 만든 맛 좋은 음식을 거의 손도 대지 않으셨으니, 보약이라 한들 드실 리가 없을 겁니다. 형수는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어머니의 야윈 얼굴을 보고 그 길로 한약방으로 달려가 약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약을 지은 것처럼 말씀드려 어머니께서 꼭 드시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형수의 눈가에는 사랑 받지 못하는 며느리의 또 다른 아픔이 가득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저도 그때까지 형수를 한번도 '형수님'이라 따뜻하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어머니를 위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어머니께 다가가고 싶어하는 형수의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보약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형수의 말을 떠 올려 봅니다. "어머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용서도 빌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 동안 해 드리지 못한 것 많이많이 해 드려야죠." 허용철 님/강원도 원주군 법천리
Board 삶 속 글 2006.10.28 風磬 R 705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남편의 첫 월급날 남편을 부둥켜 안고서 나는 한없이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지만 한번 쏟아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릎쓰고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 믿음 하나로 결혼식을 올렸다. 너무나 철없던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일까.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마냥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이 그저 즐거운 따름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은 고된 노동으로 아무리 지칠지라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넉넉한 웃음으로 오히려 걱정하는 나를 위로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아침마다 일터에 나가면서 내 이마에 뽀뽀해 주는 것을 잊지 않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우리가 펑펑 울게 된 것은 다름아닌 남편의 첫 월급 때문이었다. 난 들뜬 마음에 오랜만에 삼겹살과 소주를 준비하여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퇴근해 들어온 남편은 평소같으면 오자마자 나를 꼭 안아 줄텐데. 아무 말없이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삐쳐 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월급봉투를 내밀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도데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당신에게 가져다 주는 월급인데 너무 적은 금액이라서..... 이걸로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겠어?" 난 남편의 기가 죽을까 봐 얼른 말을 이었다. "첫 월급이 다 그렇지 뭐. 그리고 이 돈이 뭐가 적다고 그래. 적으며 또 어때, 쪼개서 쓰면 되지. 내가 얼마나 알뜰한 살림꾼인데......." 쏟아지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나는 남편의 월급봉투에서 얼마를 꺼내 남편에게 용돈으로 건네주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돈도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 염치가 있지, 용돈은 무슨......" 그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나는 남편을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나중에는 남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슴아파 더 서럽게 울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젊기에 이 가난한 시절을 서로 믿고 사랑하며 잘 버텨 나가고 있다. "정래 씨, 사랑해요. 그리고 파이팅!" 송주연 님/ 전남 광양시 중동
Board 삶 속 글 2006.10.27 風磬 R 466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월에 떠난 당신 벛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사월, 내 사랑하는 아내는 서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낫습니다. 돌도 안 지난 명성이와 다섯 살 난 대성이, 그리고 나를 남겨두고서.....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갈라놓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 오릅니다. 집안 구석구석 아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잇지만 정작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가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씁니다. '늦은 밤, 불꺼진 아파트 창을 올려다 보며 혹시나 당신이 두 아이를 재워 놓고 나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기대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엽니다. 그러나 와락 밀려들는 어둠 속에서 슬픔과 고독만이 내 가슴 깊이 파고 듭니다. 늘 조용하고 말이 없던 당신, 그러나 누구보다도 웃음이 많던 당신, 오로지 아이들과 나밖에 모르던 당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아픔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명성이 때문에 당신이 아프다는 나의 말에 그런 소리 말라며 우리 명성이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하더니 그 예쁜 명성이를 남겨 둔 채 왜 그리 빨리 떠났소. 당신이 떠난 뒤 명성이를 형님 댁으로 보내고,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하던 대성이마저 누님댁으로 보냈다오. 꽉 닫힌 아이들의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없는 당신과 보고 싶은 아이들 생각에 나는 밤마다 당신을 원망합니다. 시트를 갈아주기가 무섭게 금방 소변을 보았다고 몇번이나 화를 낸 일, 구토한다고 많이 먹지 못하게 한 일 등등...... 당신에 대한 너무나 많은 후회와 안쓰러움이 나를 무척이나 괴롭게 합니다. 당신이 보고 싶을 때면 나는 장모님께 전화를 합니다. 어제는 장모님과 통화하면서 갑자기 당신 생각이 나 와락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장모님과 함께 수화기를 붙잡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이것이 살아 남은 자의 몫입니까? 무슨 일을 해도 모두가 부질없이 느껴지고 허무할 뿐입니다.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옛날의 행복을 이제 모두 꿈으로 돌려야만 합니까? 남들은 떠난 사람 빨리 잊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당신을 쉽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향한 이 그리움을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힘없는 걸음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오늘도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과 함께 느끼던 계절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당신은 어디에 있기에 돌아올 줄 모르는 겁니까?' 김동석 님/충남 논산군 두마면
Board 삶 속 글 2006.10.26 風磬 R 506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도 운동하면 걸을 수 있어요 나는 스물아홉살이고, 여섯 살 먹은 재우 엄마다. 재우는 여섯 살이나 되었는데도 혼자서 걷지 못한다. 그래서 가까운 곳이라도 내가 업고 다녀야 한다. 재우가 태어났을 때 나는 이 세상을 얻은 것 마냥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팔삭둥이로 태어난 재우는 오 개월이 지나도록 고개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가 재우 때문에 걱정하자 어른들은 발육이 조금 늦을 수도 있다며 천천히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재우가 '경직성 뇌성마비'라는 것이었다. 조기 출산하여 어쩔수 없이 인큐베이터에 있었는데 산소공급이 제때 잘 안돼서 오른쪽 뇌를 다친 것이다. 나는 우리 재우가 치료를 해도 백 퍼센트의 완쾌는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의사 선생님의 오진인 거야.'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는 내 아들이 건강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한가닥 희망을 안고 병원앞에서 아이를 안고 흐느껴 울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쪽 마음이 지금 어떤지 저도 잘 알아요. 제게도 뇌성마비 아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힘내세요." 그분은 자기 자식은 지금 일곱 살인데, 네 살 때 병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치료를 시작해 많이 만힝 늦어 더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그래도 재우는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위로를 해 주셨다. 그 위로에 힘을 입어 그때부터 나는 아이를 업고 부지런히 치료하러 다녔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으레 내게로 시선이 모아진다. 그 중에는 수근거리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덜컥 겁이 나고 가슴이 무너진다. '나야 괜찮지만 재우가 그런 모욕을 견딜 수 있을까. 아이가 불편한 몸 때문에 남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내 앞에서 울면 어떡하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얼마 전 재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도 운동하면 걸을 수 있어요."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면서 '우리 아들 기특하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들보다 못한 나는 그저 울음을 삼키며 자꾸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임정 님/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Board 삶 속 글 2006.10.25 風磬 R 5460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종이 시계와 어머니 이제 어린 규덕이가 준 종이 시계는 내가 이제까지 가져 본 네 번째 시계였다. 종이 시계를 보며 예전에 내가 받은 시계들에 대한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지난 내 삶 속에 시계의 역사랄까? 그 소중한 의미를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맨 처음 가져 본 시계는 엄마가 착용하던 중고 시계였다. 그 시계는 꿈과 고민이 넘치던 여고 시절을 함께했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처럼, 내 조급한 성격을 꾸짖듯 고장 없이 꾸준히 잘 갔다. 말없이 꾸준함을 알려 준 내 첫시계는 대입 체력장을 무심히 주인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여대생이 된 딸에게'라는 붓글씨 메모와 함께 받은 알이 크고 둥근 시계는 내 두 번째 시계로, 중고가 아닌 새것이었다. 자기 삶에 충실하고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내라는 엄마의 추신은 아직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둥근 큰 시계는 여동생에게 물려 주었고 대신 어머니께서 취업이 되면 시간을 잘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 돼야 한다며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시계를 사 주었다. 하지만, 그 시계는 부모님의 기대에 일조도 못한 채 지금 안방 반짇고리 속에서 벌써 십년을 보냈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 예물을 받을 때도 그 금빛 시계 때문에 극구 시계만은 사양을 했다. 나는 그 시계를 볼때마다 아리한 슬픔이 느껴진다. '엄마가 외출하실 때 '분'을 바르시니까 긴 바늘은 엄마 바늘입니다. 아가가 오줌눌 때 '쉬'하니까 아가바늘은 '시'바늘입니다. 긴바늘은 분를 나타내고 짧은 바늘은 시를 나타냅니다. 길이가 기니까 엄마바늘은 분바늘, 짧은 바늘은 시바늘입니다.' 규덕이의 바늘이 없는 시계에 쓰여 있는 글을 보며 부모님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육십 걸음을 부지런히 걸어 가셔서 어서 오라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격려한 분바늘이었구나. 자식인 난 겨우 한걸음 밖에 가지 못한 시바늘이었구나.' 어머니는 자식의 한 걸음을 위해 한바퀴를 돌으셔야 했던 것이다. 아이 키우고 살림한다고 친정 부모님께 무심한 딸자식은 규덕이의 종이 시계를 보면서 많은 자책과 반성을 했다. 나도 이제는 세월이 가져다 준 분바늘과 시바늘의 기능을 다해야 하는 위치에 왔다. 부모 노릇의 분바늘 기능만 하고 자식 노릇의 시바늘 역할은 얼마나 충실히 했는지 아니면 분바늘 시바늘 어느 기능도 원활하지 못한 먹통시계는 아닌지, 어느 질문에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난 우두커니 벽에 걸린 벽시계만 바라본다. 김안나 님/대구시 북구 복현2동
Board 삶 속 글 2006.10.24 風磬 R 4990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소화의 작은 행복이야기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그야말로 촌이랍니다. 동네 옆으로 금강이 흐르는데요. 아버지는 논에서 돌아오실 적에 금강에서 저녁 반찬거리로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아오시지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논농사를 짓지만 그것말고도 고구마, 인삼, 담배, 배추도 심어요. 씨앗만 있으면 모두 해결되지요. 산도 하나 있어요. 산 이름은 '동그라미 산'인데 나즈막하지만 그 산에 올라 마음껏 소리도 지르고, 밤에는 하늘에 뜨는 주먹만한 별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요. 저희 집은 마을회관 바로 아래예요.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집이지요. 그 집은 불이 여러번 나서 엄마는 죽을 뻔하신 일도 있었다는데 그래도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있어요. 아버지의 연세는 올해 마흔 일곱, 직업은 농부시지요. 젊으셨을 때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셨대요. 아버지는 가끔 그 시절을 얘기를 하시는데 서울 영등포 어디를 말뚝을 박아놓고 "내 땅이다"했는데 누가 그 땅을 팔아먹어 어찌 어찌하여 고향으로 쫓겨 오셨답니다.그 얘기를 하실 때면 아버지 얼굴은 '참 아깝다'는 표정이 되어요. 저희 엄마는 이런 아빠 밑에서 순종하고 사는 평범한 시골 아낙이시랍니다. 고모들은 엄마가 가난한 외가에서 실컷 고생하시다가 시집와서는 더 큰 고생을 한다면서 엄마의 주름 잡힌 손을 잡고 자주 우시지요. 그리고 저, 저는 너무 작고 여려요.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뭐든 작아요. 얼굴은 좀 못생겼지만, 튼튼해서 약 한 번 먹어 본 일이 없어요. 의료버험카드에도 제 진찰기록은 하나도 없거든요. 주변의 학교가 없어서 멀리 강경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우리 반 얘들 중 저 같은 촌 아이는 없어서 나름대로 상처 받는 일도 있지만 아이들과 좀도 친해보려고 노력 중 이랍니다. 우리 집은 식구가 아주 많아요. 부모님, 나, 동생 말고도 소 네 마리, 송아지 한 마리, 개와 강아지 여섯 마리, 염소 세 마리, 닭 일곱 마리, 그리고 가장 많은 식구인 방바닥을 쉴새 없이 오가는 수많은 개미들까지...... 이렇게 많은 식구들과 살다 보니 아주 시끄러운 일도 많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우리 집에서 사는게 정말 기쁘고 신이 나요. 권소화 님/충남 부여군 임천면
Board 삶 속 글 2006.10.23 風磬 R 558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삼남 씨와 장미 꽃다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전남 순천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이다. 이 곳에서 나는 병원 안내를 담당하고 있어서 분만실을 자주 들르게 된다. 분만실은 탄생의 희비가 엇갈리는 풍경들로 가득한데 가끔 난산을 하는 산모들을 위해 우리 수녀들이 헌혈을 해야 할 만큼 긴박할 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만 대기실의 제일 가는 화제는 아들이냐, 딸이냐 하는 것인데 마치 국회의원의 당선장을 방불케 하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흐른다. 분만실 수녀님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데려가려고 하면 보호자들이 수녀님 주변을 에워싸고 묻는다. 먼저 "아들이에요? 딸이에요?"하고 물으면 대부분 시댁 쪽이고, "산모의 건강은 어때요?"하고 묻는 쪽은 친정 식구들이다. 오늘은 점심에 식당에서 신생아실 수녀님에게 삼남씨가 또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릴 때 내리 딸만 두신 부모님이 그이에게 삼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며 "너는 이다음에 꼭 아들 셋을 낳아라"했다는 데 그이 역시 세 딸의 엄마가 되었단다. 오후에는 삼남씨 일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몹시 바빴는데 복도에서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든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할아버지, 어디 찾으세요?" "내 며느리가 딸을 낳았다고 해서." 삼남 씨의 시아버님이었다. 할아버지를 삼남씨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 누워서 시아버님을 뵙게 된 그녀는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가, 순산하고 아이도 건강하니 고맙구나. 정말 수고했다. 아들이면 그냥 오려고 했는데 네가 딸을 낳고 서운해할까 봐 사 왔다." 할아버지는 들고 온 빨간 장미꽃을 삼남씨 앞에 내미셨다. "아버님...." 삼남씨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직 신생아실 면회 시간이 안 되었지만 특별 면회를 선물로 드리고 싶어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며느리가 마실 음료수를 산다며 급히 돌아서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없이 푸근하고 따뜻해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부럽다. 삼남씨가 딸을 낳을수록 더 많은 장미꽃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김정자 님/전남 순천시 장천동
Board 삶 속 글 2006.10.22 風磬 R 5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