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탕 팔십 개를 사먹던 시절의 행복 초등학교 때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치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학교에 어떻게 갈까 걱정하는 저를 보더니 어머니께서는 창고에서 가져온 비닐로 제 몸을 둘둘 말아주셨습니다. 백원만 있으면 버스타고 금방 가는데, 걸어가라며 비옷도 아닌 비닐을 내놓은 어머니가 참으로 미웠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머니께서는 저를 다시 불러 세우고 주머니에서 이백원을 꺼내 주시며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들고 나와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비닐하우스도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계속 몸을 뒤로 젖혀지는데도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백원 짜리 두 개 덕분에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개의 동전에 불과하지만 제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국제 캔디라고 해서 십원에 네게하는 사탕이 있었는데, 이백원이면 그 사탕을 무려 팔십개나 살 수 있었습니다. 비바람을 이겨낼수 있는 힘, 그것은 맛있는 사탕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겨우 학교에 도착했는데 수업이 다 끝나도록 비바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갈 때도 등교할 때랑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비닐로 온 몸을 감사고 집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럴 때 언니랑 마주칠 게 뭡니까. 언니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이렇게 그냥 보내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자랑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이 백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알밤을 때리며 저를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했습니다. "무섭지 않았어?" "응 사탕 생각하니까 무섭지 않았어. 언니도 그랬잖아. 지금 공부하는거 힘들어도 먼 훗 날을 생각하면 힘들지 않다고 말이야." 저는 꽤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조금 뒤에 언니는 제가 감기몸살로 며칠동안 앓아 눕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언니는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종종 언니에게서 동전을 몇 개씩 받곤 했습니다. 지금은 백원이 껌값도 되지 않는 돈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몇십 갑절 되는 돈을 벌지만 버스비를 아낀 돈으로 사탕 팔십개를 살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정혜정 님/경기도 이천시 갈산동
Board 삶 속 글 2006.11.11 風磬 R 519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매일 가져오는 남편의 선물 "하하하...." 언제나 집에 들어오면서 내게 보내는 남편의 웃음소리다. 연애 시절부터 그 호탕한 웃음이 마음에 들었고 멀리서도 그의 웃음소리는 금방 식별이 가능했다. 그 속에는 늘 그의 용기와 낙관적인 생각이 숨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어렵지 않으리라는 확식이 들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내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지치고 힘들어 집에 와서 짜증도 내고 말수도 적다는 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상 현관문을 들어설 때면 그 특유의 웃음 소리가 집안에 넘쳐 그것만으로도 나는 푸근함을 느끼고 걱정이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왜 고민이 없었겠는가. 몇 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시작한 장사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고민하는 기색없이 매일 그의 웃음만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동에 어귀까지 나가보았다. 골목 입구에 있는 포장마차를 지나칠 때였다. 너무나도 낯익은 뒷모습이 내 시야에 확 들어왔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혼자 앉아 소주를 따르는 그의 모습이 왜 그리 아프게 파고드는지. 나는 얼어 붙은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색 한 번 안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뒤 볼이 발그레해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내게 말했다. "하하하....많이 기댜렸지? 오늘도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 난 정말 복이 많은가 봐. 늘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니 말이야." 나는 아무 말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홍미라 님/서울 은평구 대조동
Board 삶 속 글 2006.11.10 風磬 R 492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주말 부부 결혼 한지 이 년이 되어가는 우리 부부는 한 달에 겨우 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는 주말 부부이다. 남편은 시부모님이 계시는 전라도 광주에서, 나는 경기도 고양에서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로 주말에 내가 남편이 있는 광주로 내려가곤 한다. 결혼하고 일 년 동안 함께 살 때는 사소한 일에 오해도 많이 하고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이렇게 떨어져 살다 보니 남편의 그 미운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 하루에도 몇 번씩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건 한다. 주말이면 광주까지 고속버스로 예닐곱 시간이나 걸리는 그 먼 거리가 피곤하게 생각되어 한번쯤 꾀를 낼만도 하지만 보고싶은 남편을 만난다는 기쁨이 앞선 나머지 오히려 주말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내려가는 토요일이면 중요한 약속을 모두 뒤로 미룬 채 나를 마중 나오곤 한다. 그 날도 광주에 내려갔던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남편과 함께 터미널에서 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종이가방은 시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정성스럽게 챙겨 주신 음식들로 제법 묵직했다. 나는 불룩한 종이가방이 터질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편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고 창문을 내다보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항상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날 배웅해 주던 남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벌써 가버렸나'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은 야속하게도 생각되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한손엔 튼튼해 보이는 부직포 가방을 들고 다른 한손엔 빵과 우유를 쥔 남편이 버스에 올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내자리로 걸어와서 말없이 내 손에 그것들을 꼭 쥐어주고는 부랴부랴 내려가는 것이었다. 남편의 손이 스치면서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함께 남편의 사랑이 마음 한구석으로 조용히 번져왔다. 나도 모르게 또 한번 눈물이 핑 돌았다. 말보다는 늘 행동을 먼저 보여 주는 사람,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입으로 말하기 어색해하면서도 가끔씩 이렇게 나를 감동시키는 남편, 마음이 든든해졌다. 차창을 내다보니 남편은 빙긋 웃으면서 나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눈물 글썽이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웬지 쑥스러워 나는 그저 내 손에 놓여진 빵과 우유만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김인숙 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Board 삶 속 글 2006.11.09 風磬 R 5172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손빨래의 즐거움 내가 아직도 손빨래를 한다고 하면 남들은 무척 놀란다. 세탁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손빨래를 고집하는 이유는 옷을 좀 더 깨끗하게 빨기 위해서다. 손빨가 힘든 것만은 아니다. 옷을 비비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손으로 빨아서 더 깨끗해 보이는 옷을 보면 기분도 좋아진다. 그리고 간혹 남편의 바지를 빨다 보면 호주머니에서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십 원짜리 동전부터 천 원짜리 지폐들이 나온다. 아이들이 과자를 사 먹은 뒤에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옷을 벗을 때 미처 꺼내지 못한 동전도 간혹 줍게 된다. 그런 돈은 다시 일일이 주기도 뭐해서 저금통에 넣는다. 한번은 그렇게 해서 십만 원을 모은 적이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막상 생각지도 못했던 십만 원이 생기니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했다. 그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 동안 갖고 싶엇지만 참아 왔던 여러 가지 물건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돈을 들고 나가 기껏 산 물건은 남편의 생일에 주려고 산 카세트였다. '으이그 속상해. 왜 나는 맨날 내 것은 못사고 남편 거나 아이들 것만 챙기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남편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카세트를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선물을 받고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돈이 없을텐데 어떻게 이런 걸 샀어?" 빨래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그 동안의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허허 웃으며 "이 카세트로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당신 해외 여행 시켜 줄게"하고 말했다. 그뒤로 남편은 정말 출퇴근 할 때마다 카세트에다 어학 테이프를 넣고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뿌듯했다. 최향란 님/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Board 삶 속 글 2006.11.08 風磬 R 532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느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실랑이 진주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 간이역에 버스가 멈추자 손님들이 하나 둘 타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예순 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계셨다. 그 아저씨는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잠시 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버스에 올라 숨을 거칠게 내쉬며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안도의 미소와 함께 내 옆자리의 아저씨 쪽으로 걸어왔다. 청년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빨리 가지 않고는....." 먼저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아주 힘들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지, 도-착-하면 이-거 가지-고 택-시 타-고 가-세-요." 청년의 발음은 정상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했다. "아니다, 너도 힘들텐데....." "그-래도 가-지-고 가-세-요." 몇 번의 주고받음 끝에 청년은 아저씨의 손에 천원짜리 서너 장을 쥐어드리로 바삐 시외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청년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 출발했다. 아저씨는 한동안 창문을 내다보며 아들이 안 보일때까지 손을 흔드셨고 아들도 정류장을 떠날 줄 몰랐다. 잠시 뒤 아저씨는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순간 내 눈에도 뜨거운 눈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수정 님/경남 하동군 금성면
Board 삶 속 글 2006.11.07 風磬 R 549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의 재산목록 1호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물을 주고 받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이 생명도 부모님께 받은 귀중한 선물이고 남편을 만난 것도 크나큰 선물이다. 슬하의 예쁜 세 공주와 듬직한 왕자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삼년 전 내 생일날 남편과 네 자녀들이 만들어 준 공로증을 꼽을 것이다. 그날 저녁 가족들이 모두 모여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아들 녀석이 자꾸만 머뭇거리는 게 좀 이상했다. 그런데 잠시 뒤 막내는 감추어 두었던 선물 꾸러미를 내 앞에 슬쩍 갖다 놓았다. 무엇인지 궁금하여 얼른 선물 포장지를 뜯어 보았다. 거기에는 공로증이 들어 있었다. 상장 용지를 어디서 구했는지 하여간 그 공로증에는 내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귀하는 우리 가정의 어머니요, 아내이며, 교회의 집사요, 서해화성의 모범사원으로서 그 소임을 잘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일남 삼녀를 양육하는 노고가 많았기에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감사의 뜻을 담아 드립니다.' 나는 공로증을 받아 든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려내렸다. 가격으로 치면 오백 원도 안 되는 선물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남편과 네 자녀의 사랑이 나를 울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선물을 벽에 붙여 놓고 힘들 때마다 읽어 본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김묘숙 님/충남 홍성군 홍동면
Board 삶 속 글 2006.11.06 風磬 R 5278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랑의 안경 직업이 안경사인 관계로 나는 여로 종류의 사람을 많이 접하게 된다. 거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 부자인 사람, 가난한 사람..... 그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그 중에서 유달리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안경점에서 늘 안경을 맞추던 아저씨가 있었다.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아저씨와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이남 삼녀의 자녀와 장모님가지 모시고 산다는 집안사정까지 훤히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저씨가 초췌한 모습으로 안경점에 들어오셨다. 머뭇머뭇 꺼내시는 얘기인즉 장모님 안경을 맞춰 드려야 하는데 가격이 비싸다고 한사코 싫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살림인지라 아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아저씨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내와 장모님이 부담 느끼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아주 저렴한 가격인 것처럼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오만 원을 내놓으며 아내와 장모님 앞에선 정가에서 오만 원을 뺀 가격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좋다고 했고 며칠 뒤 올망졸망한 손자들과 아주머니,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가 안경점에 오셨다. 할머니가 고른 안경은 정가가 십만 원이었다. 아저씨와 미리 짠대로 치면 오만원이었지만 할머니 표정으로 그것도 비싸다며 놀라실 것 같아 나는 가격을 만원이라고 말해 버렸다. '경로우대 특별 서비스'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까지 둘러대며 말이다. 할머니는 안경을 걸쳐 보더니 가격도 싸고 좋다며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 보셨다. 할머니의 흐뭇한 얼굴을 보니 내 마음까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아저씨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데 진열대 밑에 있던 손자 녀석이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꼬깃꼬깃 접은 천 원짜리 여섯 장을 내놓았다. 할머니 안경 해 드리려고 동생이랑 모은 것이라며 수줍게 웃는 꼬마의 말에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눈자위가 점점 붉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만원도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윤미경 님/광주시 북구 운암동
Board 삶 속 글 2006.11.05 風磬 R 5336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세상에서 가장 놓은 약 남편의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살다 보니 외롭고 힙들 때가 종종 생긴다. 특히 몸이 아플 때는 더욱 그렇다. 갑자기 내린 비로 기온이 뚝 떨어진 어느 날이었다. 몸살감기에 걸린 나는 온몸에 열이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이의 밥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하고 끙끙 앓아 눕게 되었다. 이럴 때 한층 더 보고 싶은 남편의 생각에 아픈 것이 서럽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옆에서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보채는 것도 짜증이 나"귀찮아"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 저편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참을 수 없이 북받치는 설움에 혼자 흐느끼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아이가 빵과 우유를 사 들고 들어왔다. "엄마, 배고플까봐 사 왔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아픈 것도 서러운 것도 남편이 보고 싶은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아이를 끌어안고 펑펑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아이도 따라 울었다. 한참 뒤 아이가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엄마, 난 엄마가 아픈 게 제일 싫어. 그러니까 아프지 마." 그 순간 나는 그 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가장 좋은 약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내가 누워 있는 며칠동안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학원 차가 올 때 배웅을 못 나가도 아무런 투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 나갔을 때, 아이는 기쁜 얼굴로 학원 차에서 내리더니 내게 달려와 안겼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살짝 속삭이는 아이의 말에 난 또 한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황은하 님/경북 안동시 용상동
Board 삶 속 글 2006.11.04 風磬 R 4924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죄 값을 치르다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 때 저질렀던 철없던 내 행동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시골의 넉넉치 못한 환경에서 자란 나는 먹고 싶고, 사고 싶었던 걸 항상 마음속에 묻어 두어야 했다. 날마다 친구들이 사주는 과자를 얻어먹으면서 단 한번만이라도 그 애들에게 보란 듯이 과자를 사 줄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혹시 입을 만한 가을 옷이 없나 해서 옷장을 열어 보게 되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몇 년씩 입어 닿을 대로 닿은 옷들만 즐비한 옷장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옷장 바닥에 만 원짜리 한 장이 놓여 있는게 아닌가! 길바닥에서 주웠으면 웬 횡재인가 했겠지만 옷장 바닥에 숨겨져 있는 만 원의 주인은 분명 엄마였다. 평소에 용돈 좀 달라고 하면 언제나 없다고만 하시던 엄마가 몰래 그곳에 넣어 두신 것이 분명했다. 그냥 제자리에 두고 내 옷만 꺼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이미 가게에 있는 많은 과자와 인형,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누가 볼세라 호주머니에 얼른 그 돈을 넣고 옷장을 원래대로 정리한 다음 바삐 방을 빠져 나왔다. 한 번 마음먹으니까 다음일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선 다음날 하교 길에 친구들에게 그 동안 사주고 싶었던 과자를 잔뜩 사서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내 손엔 천원짜리 몇장과 동전몇개가 더 남아 있었다. 평소엔 만저보지도 못하는 큰 돈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돈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면 발각될 것만 같았다. 그 돈이라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용서를 구해야 겠다는 양심의 소리는 불행히도 들리지 않았다. 집 안에 숨겨 놓으면 아무래도 들킬 염려가 많으니까 바깥에다 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휙 던져 놓고 우산을 쓰고 집 앞에 있는 샘으로 달려갔다. 평소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큰 돌 밑에 천원을 숨겨 놓겨, 화단 담장에 천원을 숨기고, 교회 담밑에도 숨겨 놓았다. 우산을 쓴 작은 아이가 첩보영화라도 찍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돈을 숨겨 놓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나는 벌벌 떨리기는 했지만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옷장을 열심히 뒤지고 계셨다. "어디 갔지?"하면서 찾으시는 것은 분명 내가 쓰고 꽁꽁 숨겨 둔 돈 만원일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앙큼하게 모르는 척했다. "엄마가 너희들 운동회 때 쓰려고 만 원을 옷장에 넣어 놨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 안 보인다. 혹시 못 봤니?" 순간 뜨끔했지만 나는 모른척 했다. "몰라, 잘 찾아봐. 엄마가 딴데다 넣어 둔 것 아냐?" 엄마 말씀이 그 돈은 내가 운동회 때 신을 실내화와 김밥 재료를 살 돈이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푹 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운동회 날 하얀 실내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경기에 참가했으며 김밥대신 하얀 쌀밥을 먹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죄 값을 치른 것이다. 임길자 님/광주시 동구 내남동
Board 삶 속 글 2006.11.03 風磬 R 542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나보다 어린 우리 오빠 "오빠, 빨리 일어나 병원 가야지. 우리 오빠, 참 착하지?" 우리 오빠는 나보다 어리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 오빠를 꼭 데리고 다닌다. 어렸을 때는 오빠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하루는 텔레비젼에서 타잔을 보다가 오빠에게 타잔처럼 해보라구 마구 졸랐다. 처음에는 선뜻 하려고 나서지 않던 오빠는 여동생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린 창고에서 창고에서 밧줄을 꺼내 산으로 올라갔다. 사 미터가 조금 넘는 언덕 위 나무에 줄을 매달고 오빠는 타잔처럼 줄을 잡고 "아~아아"하면서 뛰어 내렸다. 아뿔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무에 묶였던 줄이 풀어지는 바람에 오빠는 언덕 밑으로 추락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오빠는 언덕 밑바닥에 뾰족하게 박혀 있던 커다란 돌에 머리를 다친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에서 피가 나지 않았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도리어 놀랐겠다며 나를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피가 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빠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우린 위험한 장난을 했다고 부모님께 혼이 날까봐 그 일을 숨겼다. 며칠 후 오빠와 장난하다 우연치 않게 오빠의 머리를 만졌는데 머리가 물렁했다. 이상했다. 내 머리는 딱딱한데 오빠 머리는 물렁 물렁한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 아빠 머리도 딱딱한 걸 확인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상해.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머리는 이렇게 딱딱한데 오빠 머린 물렁물렁해." 그 날로 곧장 병원으로 실려간 오빠는 몇차례의 수술이었는데 피가 끝도 없이 흘러나와 의사들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면서 열었던 머리를 닫아 버렸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 후 오빠의 뇌는 성장을 멈추었고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오빠는 십팔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 다섯 살이다. 그래도 나는, 기끔씩 물어본다. "오빠, 지금 오빠 나이가 몇이지?" "임마, 오빠 나이도 몰라? 열 다섯이잖아?" 어쩜 그보다 어릴지도 모른다. 그때 한쪽 눈도 약간 다쳤는데, 점점 나빠지더니 결국 지금 그 눈은 장식용일 뿐이다. 성장이 멈춰 버린 머리에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오빠, 나랑 타잔 놀이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나의 기사가 되어 주었던 오빠가 그렇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빠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커 갔다. 내가 타잔놀이만 하자고 하지 않았다라도 오빠는 늠름한 청년이 되있었을텐데..... 그나마 오빠가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오늘은 오빠의 한쪽눈을 수술하는 날이다. 여태껏 반쪽 인생을 살아온 오빠에게 나머지 반쪽의 삶을 찾아주고 싶다. "하나님, 부디 오빠의 수술이 잘되게 도와주세요." 김명희 님/경남 거제시 옥포2동
Board 삶 속 글 2006.11.02 風磬 R 46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