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rd 삶 속 글 2006.12.29 風磬 R 587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명의사의 명약 저희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곰국이나 한약을 자주 드시는 편입니다. 이곳저곳 여러 한의원에 갔었지만 그때는 가까운 읍내에 있는 인제 한의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약을 지었습니다. 한의원에 가면, 한의사 선생님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라도 하듯 금방 진맥을 끝마친 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방전을 쓱쓱 휘갈겨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대기실에 잠깐 기다리다가 처방대로 지어준 약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의원은 여느 한의원과 달랐습니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주 세세하게 진맥을 하고 어머니의 병세를 듣고, 그것을 종이에 쓰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쓸으시며 너무도 자상하게 진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좋은 약 효과의 삼분의 일 정도는 그런 친절한 진료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료를 받고 난 며칠 뒤 아침에 한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약은 잘 잡숫고 계십니까? 배가 아프거나 이상이 있지는 않으셨는지요." 한의사 선생님은 어머니가 한의원을 다녀간 뒤의 병의 차도를 요모조모 물으셨습니다. 아침 청소를 하다말고 나는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약사나 의사선생님의 관심어린 대화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약하고 아픈이게게는 명약 못지 않은 좋은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도 그분 전화를 받은 후 약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지셨는지 몸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김옥자 님/경남 양산군 양산읍
Board 삶 속 글 2006.12.27 風磬 R 5198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정류장에서 만난 어느 부부 햇볕이 유난히 뜨겁던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일찌감치 집으로 향한 나는 정류장에서 늦게 오는 버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에구, 젊은 사람들이 안됐군." 옆에서 버스를 함께 기다리던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느릿느릿 걸어오는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 왔어요, 더우시죠?" 갓난아이를 안은 아내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팔을 잡고 더듬거리며 걷는 남편을 버스타기에 가장 좋은 곳에 서게 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남편은 검은 안경에 노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매우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작은 체구로 힘겹게 아기를 안고 있었다. 남편은 시각 장애인이었고, 아내는 곱사등이었다. 정류장에서 무료하게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이들 부부를 힐금힐금 쳐다 보았고, 내옆의 아주머니는 연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부부는 주위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계속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더워지려나 봐요. 여보, 오늘 하늘은 너무 맑아요." 아내의 밝은 목소리에 남편도 고개를 하늘 쪽으로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잠시 뒤 여러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빠르게 남편의 손을 이끌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른 그녀는 남편을 운전기사의 뒷자리에 앉히고는 급히 내리며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자 아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채 버스가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었다. 전경숙 님/부산시 연제구 거제1동
Board 삶 속 글 2006.12.26 風磬 R 538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쉰한 살 고등학생의 푸른 꿈 나는 현재 쉰한 살 된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이다. 스물네 살 때 결혼한 나는 아들 넷을 낳아 기르느라 등에서 아이들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르며 약 이십년 동안 자유시장에서 점원도 없이 혼자 아동복 도매상을 운영해 왔는데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을 한달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네 번씩 밤차로 오르내려야 했다. 남편은 신경성 위장병 때문에 힘든일이나 신경쓰는 일을 할 수 없어서 청소, 은행일, 가게 문열어주는 일등을 잠깐씩 도와주고 나머지 시간은 주로 동네를 위해 봉사하며 짬짬이 건강을 위해 등산도 다닌다. 그래서 나의 삶은 눈만 뜨면 시장에 나가 하루종일 장사하고 밤이면 집에와서 여섯 식구들 뒤바라지하는 고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밤이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도 쓰고 책도 읽으며 배움에 대한 꿈을 남몰래 키워 나갔다. 오랜 기원 끝에 1992년 8월 나는 야간 학원에 입학했다.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는 길을 일주일에 세 번씩 공부하러 다녔다. '정말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과 함께 삼십년 넘게 굳어 있던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중학교 기초부터 시작했는데 이년 만에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기쁨을 얻었다. 내 나이 쉰한 살인 지금, 또다시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있다. 삼년 동안 공부했지만 아직도 수학이 큰 걸림돌이다. 영어단어 하나 외우기 위해 백번을 써 보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려 몇번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다시 시작한다. 집안 일 때문에 결석을 밥먹듯하고 꾸벅꾸벅 졸던 때도 많다. 그럴때마다 선생님께서는 "그만 잡시다"하며 빙그레 웃으신다. 모르는것은 열번, 백번이라도 목이 쉬도록 가르쳐 주시는 어린 선생님 덕분에 나는 늘 열아홉 소녀 같은 푸른 꿈을 안고서 값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김윤선 님/부산시 동구 자유시장
Board 삶 속 글 2006.12.25 風磬 R 6119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아저씨의 빵집은 수리중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어느 날 조그만 빵집이 새로 생겼습니다 그 앞을 지나노라면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입안 가득 군침을 돌게 했습니다. 진열장엔 여러 가지 종류의 빵들로 가득했습니다.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초콜릿빵, 길고 재미있게 생긴 막대 빵, 그리고 얼기설기 얽힌 곰보빵까지...... 동네 꼬마들은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빵의 개수를 헤아리기도 했습니다. 퇴근 길에 빵집에 들러 빵들을 구경하며 빵을 고르는 것에 어느 새 재미를 붙였습니다. 어린 동생들도 늘 저녁 시간 무렵이면 나를 기다렸습니다.그 빵집은 곧 동네에서 인기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녀석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빵을 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누나, 나 이 빵 안먹어. 이 빵 만드는 아저씨 얼굴이 이상하대." 느닷없는 동생의 말에 영문을 몰랐습니다. 동생은 그 빵집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괴물같기 때문에 빵을 안먹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고 그 빵집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집에서 고소한 빵을 맛있게 사 먹었습니다. "얼굴이 무슨 상관이람, 맛만 좋으면 됐지." 그리고 동생들을 꾸짖었습니다.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씨와 솜씨로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음날 어김없이 빵집에 들렀습니다. "아주머니 안 계세요?" 나는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한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예 잠깐 나가셨습니다.." 머뭇거리듯 말하는 그 남자의 얼굴은 화상으로 온통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이 아저씨가 주인인가봐!' 몹시 당황한 나는 그냥 빵집문을 나섰습니다 나도 차츰 빵집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동생들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교회를 다녀오다 보니 그 빵집은 문이 닫힌 채 '수리중'이라고 쓰여진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수리중?' 뭘 수리한다는 말인가. 아저씨 얼굴을 수리중인 걸까? 그런데 정말 수리할 것은 우리 마음이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그 빵집의 빵을 더 이상 맛보지 못했습니다. 박진구 님/경기도 부천시 삼곡동
Board 삶 속 글 2006.12.23 風磬 R 537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기중이와 명주의 자랑 우리 동네 언덕 아래 골목길은 시장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어느 날 유치원 아이들과 연극 관람을 하고 시장 길을 막 지나칠 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기중이 녀석이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기! 저기요! 저기 우리 할머니 있었요. 우리 할머니가 순대 팔아요." 순대 장수 할머니가 자기 할머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내다보니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커다란 양푼 위의 도마에 순대를 썰고 있는 초라한 할머니가 보였다. 내가 창 밖을 보며 "그래, 너희 할머니니?"라고 하자 기중이는 자랑스럽게 "예!"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얼마쯤 지나려니 이번엔 명주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야! 우리 엄마가 일하시는 냉면집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가 저기서 일하세요." 명주의 깍듯한 높임말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그 천진스러움은 도리어 우리 선생들을 당혹하게 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라도 들을까 봐, 마치 내 비밀을 들켜 버린 양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을 한 명씩 내려주고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시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명주 엄마가 일하는 냉면집도 지나고 순대 파는 기중이 할머니의 좌판도 지나쳤다. 일부러 창 밖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 속의 천진함과 맑음은 어느새 가식으로 치장되고 채워져 부끄럽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것을 당당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기중아, 명주야, 나도 너희 처럼 순대파는 초라한 할머니가 내 할머니라고, 냉면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바로 내 엄마라고 자신있게 외치고 싶구나.' 석미진 님/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
Board 삶 속 글 2006.12.22 風磬 R 4385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보리암에서 되돌아온 지갑 한 삼년 전의 일입니다. 그 해 여름이 끝날 즈음, 저와 몇몇 친구들은 남해로 야유해를 떠났습니다. 출발할 때 하늘이 조금 흐렸엇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한두 방울 빗방울을 흩뿌리더니 남해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결론 짓고 경치가 좋다는 보리암이라는 절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빗속을 뚫고 산에 오른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절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우리처럼 비를 맞고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엔 조그마하고 깊숙한 동굴들이 많았는데 모두 정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약수도 한 무금 들이키고 나서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제 지갑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비 때문에 우왕좌왕하다가 어디엔가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모처럼 온 여행이니 즐겁게 놀다 왔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저를 찾는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사람은 며칠전 보리암에 갔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제 지갑을 주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소포로 지갑을 부쳐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에 정말로 소포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마치 귀한 것이라도 들어 있는 듯 깨끗이 싸여 있는 포장을 풀어 보니 그 속엔 지갑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를 맞아 엉망이 되었을 지갑을 얼마나 닦았는지 반들반블 윤이 나고 있었습니다. 지갑을 손에 쥔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성득 님/경남 통영시 봉평동
Board 삶 속 글 2006.12.21 風磬 R 470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혹시 내 걱정할까봐 점심 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약간 흥분된 모습의 활머니 한 분이 세무과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어제서야 세금 고지서를 받았어요. 그런데 납부 기한이 며칠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납부기간까지 돈을 준비할 수 없어요. 다음달 초순쯤 할아버지 품팔이 대금을 받는데, 그때까지만 기한을 늦춰 주세요." 딱한 사정이었지만 법으로는 할머니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할머니, 고지서를 두고 가시면 제가 대신 세금을 내겠습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돈을 받아오시면 그때 돈을 가지고 오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공무원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셨다. 며칠 후 납기일이 되자, 사무실은 민원인들로 시골장터같이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번에 오셨던 그 할머니가 서 계셨다. '세금을 준비하지 못해서 오셨나 보다'라고 짐작하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반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아저씨, 세금은 방금 내고 오는 길이에요. 그때 아저씨가 친절하게 대해 줘서 어떻게든 아저씨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 세금을 내고 혹시나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봐 알려 드릴려고......" 그날 나는 무엇보다 값진 마음의 따뜻함을 선물로 받았다. 김경한 님/경북 구미시 송정동
Board 삶 속 글 2006.12.20 風磬 R 659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거울 속의 쌍둥이 송아지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우리집 형편은 대부분의 시골 농가가 그렇듯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쪼들리는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큰맘먹고 어린 암소를 한 마리 사 오셨다. 그 암소는 온 식구들의 기대한 관심속에 원래 있던 황소 한 마리와 사이좋게 어울리며 무럭무럭 잘자랐다. 아버지는 소에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지만, 아무 탈없이 쑥쑥 잘 자란 암소는 어느덧 새끼를 갖게 되었다. 송아지가 태어나던 날,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 코, 입 모두가 똑같은 암수 쌍둥이 송아지가 태어났던 것이다. 어미 소가 지긋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송아지는 머리를 부딪히며 싸우는가 하면 코를 마주대고 다정한 모습으로 잠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집에 갑자기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서운함을 애써 감추시며 우시장에 나갈 준비를 하셨다. 발육 상태가 더 좋은 수송아지를 먼저 내다 팔기로 작정하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꺼내려는데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쌍둥이 송아지가 애닯게 울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어미 소도 마치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께서도 송아지를 팔고 돌아오시는 길에 펑펑 울고 마셨단다. 혼자 남겨진 송아지는 어미소곁에서만 맴돌뿐 외양간에서 한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정말 가여웠다. 얼마 후, 겨우 마당으로 나온 송아지는 마루 옆에 걸려있는 큰 거울에서 우연히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거울에 제 볼을 갖다대며 부비는 것이었다. 인정 많은 우리 할머니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거울을 송아지가 잘 보이는 마당쪽에 옮겨 달아 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장흥진 님/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Board 삶 속 글 2006.12.19 風磬 R 5473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아침을 여는 사람들 여기 양동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주변에 위치한 시장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세 시까지 근무를 한다. 요즘같이 싸늘한 공기가 피부 깊숙이 파고드는 새벽이면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더욱 짜증스럽다. "아! 도로 중앙까지 나오시지 말래두요!" "여기다 차를 세우시면 어떡합니까!" 오늘 새벽이었다. 아침을 여는 시장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유없는 짜증을 부렸다. 한참 교통 정리를 하다보니 손끝이 시려왔다. '이런 장갑을 두고 왔잖아!' 장갑을 두고 온 나는 어쩔 수 없이 추위를 참고 서 있었다. 그 추위가 나를 더 짜증나게 했다. "수고하시네요. 이거 끼고 하십시오." 지나가던 택시가 내 앞에 스르르 멈추더니 기사 아저씨가 장갑을 내미셨다. 그리고는 택시를 몰고 휑하니 떠나 버리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는데..... 장갑을 끼고 조금은 따뜻해진 나는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교통정리를 했다. 차들에게 진행 신호를 하는 순간이었다. 한 할머니가 갑자기 중앙선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중앙선엔 나와 할머니 둘이서 서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으려는데 할머니께선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셨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저기 시장에 내 물건을 두고 와서요. 미안합니다." 할머니의 공손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졌다. "할머니, 할머니 물건은 꼭 있을 겁니다. 여기 시장 분들은 모두 정직하시니까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아들같은 사람이 참 싹싹하구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방긋 웃으셨는데 꼭 어릴 적 내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다시 신호가 바뀌자 할머니는 "총각 수고해"라고 크게 말씀하신 뒤 찻길을 건너 가셨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른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두 내 가족처럼 여겨졌다. 김인수 님/광주시 서구 양1동
Board 삶 속 글 2006.12.18 風磬 R 5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