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웃고 있는 사람 작가 호퍼는 노동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실업자가 되어 우울하게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직업소개소에 아침마다 나가 일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무려 5백여명이나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가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잔디 깎을 사람이요! 가구 운반할 사람이요!' 라고 소리치며 5백명의 사람들 중 한 두 사람을 뽑아 갔다. 호퍼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 중에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을 뽑아가는 걸까? 그것만 안다면 일자리를 구하기 쉬울텐데.' 호퍼는 그 비결을 찾기 위해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다. 하루는 맨 가운데 앉아 보기도 하고 또 하루는 맨 앞에, 어느 땐 맨 뒤에 서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눈에 띄게 하기 위해 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진한 색깔의 옷을 입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법 역시 호퍼에게 일자리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내가 정말 직업을 구하는 게 시급한 사람처럼 보이면 뽑히지 않을 거야. 행복하게 보이고 직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 가능성이 있을거야.' 다음날, 호퍼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소개소엔 역시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들어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이야기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가운데 웃고 있는 사람!" 그는 호퍼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뒤, 호퍼는 매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을 가꾸는 지혜 中
이봐, 턱을 높이 들라구 종교가 금지되어 있던 시절,소련의 한 작은 마을에 카톨릭을 몰래 전파하는 신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부는 경찰에게 들켜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소식을 듣고 마을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발사는 매우 슬퍼했다. 결국 친구가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그는 무작정 시베리아로 떠나 그 곳 수용소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이발사는 그 곳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이발사의 일은 죄수들의 머리를 깎아 주는 것이었는데 감시가 심해 죄수들과 자유롭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러간 어느날, 여느 때처럼 죄수들의 머리를 깎기 위해 대기실로 들어간 이발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의자에 덥수룩한 머리의 신부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눈빛만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었다. 신부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발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부에게 이발사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머리카락을 고르게 자르기위해 고개를 들라는 주문뿐이었다. "이봐, 턱을 들어." 이발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은 러시아 말로 "힘 내!"라는 관용적 뜻이 숨어 있었다. 신부는 이발사의 말에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고맙네, 친구. 턱을 빳빳이 들어 이무서운 곳에서 꼭 살아 남겠네.' 이발사는 신부가 풀려나기 전 3년 반 동안 수용소에서 그 일을 계속했다. 비록 몇 개월에 한 번씩 이루어진 만남이었지만 그때마다 이발사는 신부에게 힘주어 말했다."이봐, 턱을 더 들어!" 그러면 신부는 턱을 들면서 이발사의 눈빛을 슬쩍 바라보았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참 소중한 이야기 中
어머니의 빨래 내가 어릴 적에는 지금 같이 세탁기가 없었다. 작은 빨래는 대충 우물을 길어서 했지만 이불이나 한복 빨래는 멀리 시냇가에 가서 방망이로 두드려야 했다. 빨래 비누도 귀한 때여서 잿물에 빨래를 담그었다가 몽근 겨로 만든 새까만 빨래 비누를 발라 가면서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아야만 때가 빠졌다. 이렇게 힘든 빨래를 구정 가까운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해야 했다. 한 번은 나도 닭표 성냥 한갑과 짚 한 다발을 묶어 들고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솥에 뜨겁게 삶은 빨래를 이고 간 빨래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빨래판 주변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어머니는 빨래 방망이로 얼음을 깨뜨려 구멍을 내고 그 차가운 물속에 빨래를 헹구었다. 맨손으로 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약간 언덕진 곳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바라보았다. 한참 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추우면 짚불을 피워라." 짚불을 피우자 어머니가 빨래를 멈추고 다가왔다. "너무 춥구나. 내 손이 내 손 같지가 않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 추우면 빨래 끝날 때쯤 다시 오너라. 들고 갈 것 도 있으니..." 어머니는 바가지로 물를 끼얹어 짚불을 끄더니 다시 빨래를 시작했다. 나는 좋아라 하고 집에 왔으나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상기야, 상기야, 이것 좀 받아라." 나는 깜짝 놀라 방문을 차고 나왔는데 어머니는 어느새 토방까지 올라와 서 있었다. 머리에는 빨래가 담긴 큰 널판지를 이고 한 손에는 수대를 들고 있었다. 나는 송구해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마당을 가로 질러 긴 철사줄에 이불빨래를 걸쳤다. 하얀 무명 빨래가 바람에 펄럭펄럭 성화난 듯 나부꼈다.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中
어떤 모녀 섣달 그믐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추운 날, '맑은물 목욕탕'의 유리문을 열고 80살쯤 된 할머니를 업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저런 착한 며느리가 없지. 아니, 며느리가 아니고 딸인가?" 벌써 여러번 보아 온 광경이지만 주인은 그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숱이 없는 엉성한 은빛 머리칼,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할머니는 몹시 쇠잔해 보였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중년 여인은 샤워기를 틀어 노인의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겼다. 조심조심 머리를 감기고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양치질까지 해주더니 밖으로 나와 옷을 입히고 편안히 바닥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다시 욕탕 안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자 옆에 있던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여인이 목욕을 하는둥 마는둥 금새 밖으로 나가자 몇몇 여자들이 인사를 건네던 여인에게 물었다. "잘 아시는 분인가 보죠?" "그럼요. 이웃인걸요. 할머니는 꼭대기 무허가 판자집에 혼자 사시는 분이구요. 할머니 아들이 십년전 교통사고로 죽자 며느리가 집을 나갔대요. 아까 그 아주머니도 식당일을 다니면서 어렵게 사는데 수시로 할머니를 보살펴 드린다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목욕탕까지 업고 오다니, 딸이라도 하기 어려운 일을..." 여자들은 놀라서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탈의실로 나온 중년 여인은 노인의 스웨터 단추를 꼼꼼히 채우더니 다시 등에 업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카운터 앞을 지나는데 주인 남자가 등뒤에서 불렀다. "아주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오래오래 사십시오." "고맙습니다." 중년 여인이 총총히 문을 나서자 주인 남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뽀얀 유리문 너머로 어느샌가 하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저런, 두 모녀가 눈을 맞겠는걸. 하지만 즐거운 새해를 맞으라는 축복일거야." 빈터를 보면 꽃씨를 심고 싶다 中
어느 사랑이야기 만년설을 이고 선 히말라야의 깊은 산골 마을에 어느날 낯선 프랑스 처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마을에 머물면서 날마다 마을 앞 강가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몇해 몇십년이 흘러갔다. 고왔던 그년의 얼굴엔 어느덧 하나둘 주름이 늘어갔고 까맣던 머리카락도 세월속에 희어져 갔지만 속절없는 여인의 기다림은 한결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제는 하얗게 할머니가 되어 강가에 앉아 있는 그녀 앞으로 상류로부터 무언가 둥둥 떠내려 왔다. 그것은 한 청년의 시체였다. 바로 여인이 일생을 바쳐 기다리고 기다린 그 사람이었던것이다. 그 청년은 히말라야 등반을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된 여인의 약혼자였다. 그녀는 어느날인가는 꼭 눈 속에 묻힌 약혼자가 조금씩 녹아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오리라는걸 믿고 그 산골 마을 강가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녀는 몇 십년전 히말라야로 떠날 때의 청년 모습 그대로인 약혼자를 껴안고 한없이 입을 맞추며 울었다. 평생을 바쳐 마침내 이룩한 사랑, 어디 사랑뿐인가, 쉽사리 이루기를 바라고 가볍게 단념하기를 잘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슬픈 이야기다. -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는 아무관계가 없다. 사랑은 오직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느 봄날의 기억 그해 뉴욕시의 겨울은 4월이 돼도 추위가 누그러들 줄 몰랐다. 혼자 사는 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인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다. 마침내 추위가 가시고 봄이 성큼 다가온 어느날. 나는 지팡이를 들고 산책을 나왔다.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이 한없이 따사로웠다. 조용히 길을 걷고 있는데 이웃사람이 날 불렀다. 그는 내가 가는 곳까지 차로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걸었다. 모퉁이에 도착하자 습관대로 걸음을 멈췄다. 파란신호등이 들어올때 사람들과 같이 길을 건너기 위해서였다. 차 소리가 멈춘지 꽤 오래됐는데도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봄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강하면서도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쾌활한 분이신 것 같군요. 제가 함께 길을 건너도 될까요?" 그의 정중한 물음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내팔을 가볍게 잡았다. 우리는 함께 천천히 길을 건너면서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씨를 즐길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는 얘기도 했다. 길을 거의 다 건넜을 때쯤 자동차 경적이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신호가 바뀐 모양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길을 건널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쪽으로 돌아서서 감사 인사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실 겁니다. 저 같은 장님을 도와 길을 건너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봄날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작은 기적들> 中
Board 삶 속 글 2007.01.21 風磬 R 4940
아버지의 교훈 아버지는 조그만 도시에서 '우리 마을 만물상' 이라는 가게를 운영했는데 우리 일곱형제들은 먼지를 털거나, 물건을 진열하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그 일이 익숙해지면 손님을 상대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때 나는 아버지에게 장사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나는 가게에 들러 장난감 선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때 여섯 살쯤 된 꼬마아이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의 코트는 낡아서 소매끝이 너덜너덜했고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는 위로 삐죽삐죽 뻗쳐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아이는 무척 가난해 아무것도 사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는 장난감 선반을 둘러보며 이것저것 집어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도로 올려놓곤 했다. 얼마 후 이층에 있던 아버지가 내려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다정한 미소를 띄우며 무얼 찾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동생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꼬마아이를 어른 손님과 다름없이 대하면서 선물을 천천히 골라보라고 말했다. 20분쯤 지나자 아이는 장난감 비행기를 집어 들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거 얼마예요, 아저씨?" "얼마나 있니?" 손바닥을 펼치자 아이의 새까만 손엔 100원짜리 동전 두 개에 50원짜리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고른 장난감은 4천원 짜리였다. "그거면 됐구나." 장난감 비행기를 포장하며 나는 방금 일어난 일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아이가 장난감을 들고 가게를 나갈 때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 낡은 코트와 신발은 더 이상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보물을 손에 들고 기쁨에 넘쳐서 환하게 웃던 꼬마아이의 얼굴만이 커다랗게 다가왔다. 일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中
Board 삶 속 글 2007.01.19 風磬 R 5441
敵軍 장교와 60년 '못다한 사랑' 유럽이 울었다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운명은 혹독한가. 60년 가까운 기다림 끝에 다가온 짧은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지난달 80세로 세상을 떠난 한 그리스 할머니가 온 유럽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안젤리키 스트라티고우. 이 할머니는 '아모레 셈프레(영원한 사랑)'라는 이탈리아어로 끝나는 두 통의 엽서를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거뒀다. 할머니가 숨지기 직전 몇 분동안 한 말은 "티 아스페토 콘 그란데 아모레(난 위대한 사랑을 안고 그대를 기다렸어요)." 시간은 1941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의 이탈리아군 소위 루이지 수라체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파트라이로 파견된다. 행군을 하던 루이지는 집 앞에 앉아 있던 안겔리키 스트라티고우에게 길을 묻는다. 처녀는 크고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다. 청년은 의젓하며 정이 많은 장교. 둘은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길을 가르쳐준 처져가 굶주림에 지쳐 있음을 눈치채고 갖고 있던 전투식량을 나눠줬다. 루이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먹을 것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루이지는 그리스 말을, 안겔리키는 이탈리아 말을 배웠다. 짧았던 행복. 그러나 이 행복은 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끝난다. 급거 귀국해야 했던 루이지는 안겔리키를 찾아 손을 한 번 잡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적군 장교와 사귀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려워한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전쟁이 끝나면 결혼해 달라" 는 루이지의 청혼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난 후 루이지는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렉지오 칼라브리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루이지는 안겔리키에게 계속 편지를 띄웠다. 당시 그녀는 고모집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카가 적군과 연애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모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없애버렸다. 메아리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던 루이지는 천일째 되던 날 드디어 그녀를 잊기로 결심했다. 루이지는 곧 결혼을 했다.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삶이 계속 됐다. 그러나 부인이 96년 세상을 떠나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그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파트라이의 시장에게 사연을 담은 편지를 냈고, 시장은 현지 스카이 방송사 기자들의 도움을 얻어 아직도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안겔리키를 찾아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소식을 들은 안겔리키의 첫 마디였다. 안겔리키의 연락을 받은 루이지는 얼굴을 가리고 한없이 울었다. 그녀가 60년 가까운 옛날의 결혼 약속을 여전히 믿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 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의 성밸런타인데이에 둘의 감격어린 재회가 이뤄졌다. 파트라이를 방문한 루이지는 또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했고 안겔리키는 벅찬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루이지는 77세, 안겔리키는 79세였다. 1년의 절반씩을 각각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지내기로 한 루이지와 안겔리키의 달콤한 계획은 안겔리키가 앓아누운 끝에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꿈이 돼버렸다. 사망일은 1월 23일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2주일 앞둔 9일이었다. 루이지는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 그 자신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고, 주변에서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도 연기된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펜을 들어 '영원한 사랑'으로 끝나는 엽서를 쓴다. 엽서는 그녀의 무덤앞에 쌓이고 있다. ─ 중앙일보 99년 2월 5일자 10(국제)면, 채인택 기자
Board 삶 속 글 2007.01.18 風磬 R 632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찬희, 상희, 그리고 동섭이 나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서 서점을 열고 각종 신앙도서와 아동도서를 팔고 있다가. 얼마전 이웃 동네 꼬마 찬희와 상하가 우리 가게의 문 앞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그 아이들은 낯선 남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선생님,애가 진짜 도둑놈이에요!” 라로 말하는 것이었다. 언뜻 며칠전 찬희가 “우리 동네에 자전거 훔치는 도둑놈이 있어요” 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찬희에게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사돈 남말 하는 게 아니야' 하는 의미로…찬희,상하와 만난 것은 그 애들이 아파트 단지 내에 세워 둔 자전거를 몰래 훔치다 발각되면서부터이다. 두 아이 모두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찬희는 엄마가 가출하고 아빠와 형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고,상하는 여섯 시구가 단칸방에서 올망졸망 살고 있었다. 찬희와 상하는 타이르는 내얘기를 듣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더니 다시는 그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꼬마 도둑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동섭!” 나는 동섭이의 두 손을 맞잡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동섭이가 그 동안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주세요.' 한동안 동섭이의 손을 잡고 있자니 동섭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선생님,동섭이도 반성문 쓰게 해야지요!” 찬희의 말에 쓰고 싶으면 쓰라고 말했다. 잠시 후 저희들끼리 무얼 하나 들여다보니 동섭이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옆에서 찬희가 열심히 그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초등학교 사학년이면서도 동섭이는 글을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섭이 부모님은 직장일이 너무 바빠 아들이 글을 모르는 것도,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반성문 한 장을 써 가지고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아직도 동섭이 눈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나는 동섭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찬희야, 상하야, 이젠 동섭이를 소개할 때 '제 친구 동섭이에요'라고 말하려므나” 찬희와 상하가 내게 진짜 도둑을 데려온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이계옥 님/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Board 삶 속 글 2007.01.17 風磬 R 6146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이사가던 날의 후회 이사를 갔습니다. 집안의 가재도구를 모두 꺼내어 다시 정리하느라 어수선했습니다. 빨리 일을 끝내려는 욕심에 마음이 급했고 그럴수록 일은 더욱 더뎌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남루한 옷차림에 핼쑥한 얼굴을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 거리더니 말했습니다. "아저씨, 쌀 좀 주세요. 시어머니가 누워 계시는데 죽을 쑤워 드릴 쌀이 없어요."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애처로웠지만 그때 저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음에 오십시오.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내 주번을 서성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말했습니다. "조금이면 됩니다. 조금이라도....." 그때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짐 부리는 사람이 참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아, 동사무소에나 가보십시오. 거기엔 영세민에게 쌀을 무료로 준다오. 왜 남의 집에 와서 그러시우. 어서 동사무소로 가 보라니까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대충 짐을 옮기고 집안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그 여자 얘기를 했습니다. 얘기를 들은 아내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오죽했으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돈도 아니고 쌀을 달라고 했겠느냐는 아내의 말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나가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라고 끝은 맺지 못한 그녀의 말이 하루종일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조문현 님/서울시 은평구 역촌동
Board 삶 속 글 2007.01.16 風磬 R 5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