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아들을 살린 야속한 아버지 내게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게 지내온 K라는 친구가 있다. 지금은 조그만 제조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 늘 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K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제법 큰 질그릇공장을 하셨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공장은 부도가 났고 그의 어머니는 빚에 쪼들리다 못해 삼남매를 남겨두고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는 홧김에 술을 드시고 때론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하셨다. 그러다가 남매를 친척집에 맡기고 당시 일곱 살 된 K만을 데리고 광주로 올라왔다. K의 아버지는 거기서 손수레로 짐을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K는 여느때처럼 일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 잘 곳도 없었던 K는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다 타버린 연탄재를 끌어안고 눈발을 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정이 훨씬 넘어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다. 그리고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는 아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다. "내가 수레에 올라가 누워 있을 테니 너는 앞에서 끌어라!" K는 아버지가 야속하고 미웠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밤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손수레를 끌엇다. 새벽녘에야 K의 '수레끌기'는 끝이 났다. 언제 벗겨졌는 지 검정 고무신 한 짝은 간데없고 발바닥에서 흐른 시뻘건 핏방울만이 하얀 눈위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K는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지만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친척집에서 생활하던 누나도 점심을 먹고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병원에 가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급체라고 예상만 했을 뿐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K는 아버지에 이어 누나도 잃었다. 이후 K와 그의 형은 각기 다른 곳으로 보내져 처절한 생존 투쟁을 해야만 했다. K는 초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을 전전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야학에 등록아여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사랑하는 여인과 가정을 꾸미고 아들을 낳은 K는 무척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때, 어려서 헤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형이 '간암 2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절망을 안고 폐인이 되어 나타났다. K는 그런 형을 임종때까지 온 정성을 다해 돌봤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잇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 밤새 수레를 끌라던 명령은 자식을 얼어죽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려 깊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만약 그날 춥다고 둘이 부둥켜안고 노숙이라도 했다면 둘 다 얼어 죽고 말았을 것이라며..... 김기준 님/광주시 북구 운암동
Board 삶 속 글 2006.09.25 風磬 R 6438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우리 집은 아들 둘에 딸이 둘이다. 할머니께서 내리 딸만 일곱을 낳고, 마지막으로 귀한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들 손자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신 분이셨다. 엄마는 오빠 둘을 낳은 후에 나를 낳았는데 첫째, 둘째가 아들이었으니 셋째도 당연히 아들일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할머니께 나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달고 나와야 할 고추는 어디다 떼어 버리고 나왔냐"며 내가 태어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쪽에 밀어두고 씻어 주지도 않으셨을 정도였으니까. 손자가 둘 씩이나 있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서운하셨는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까지도 나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으셨다. 그래도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손녀일 거라고 미리 생각하셨던지 "달덩이처럼 곱구나"하시며 좋아하셨다. 어쨋든 할머니와 나 사이엔 '마가 끼었다'며 오빠들이 놀려대곤 했다. 출장은 자주 다니셨던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면 가방 속에는 항상 사탕 봉지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그 사탕을 받아서 큰오빠 열 개, 작은 오빠 일곱 개, 나와 동생에게는 다섯 개씩 나누어 주셨고 분배가 끝나고 남음 사탕은 다시 오빠들의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주셨다. 언제나 똑같은 할머니의 사탕 분배는 내게 커다란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였다. 육개월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엄마에게 여기저기 숨겨둔 당신의 비상금을 찾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를 모두 불러 놓고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와 동전들을 모두 꺼내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다." 그리고는 큰 오빠에게 천 오백원을, 작은 오빠에게는 천 원은, 나와 동생에게는 오백원씩 나누어 주셨다. 그것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고 할머니의 마지막 분배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었다. 오빠들과 동생이 없던 그날 오후에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가 아직 이백원이 더 있었네." 이불 밑에 숨겨 두었던 이백원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큰손녀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서 집어 넣으라고 고갯짓을 하시던 할머니, 그 모습이 아짓 눈에 선하다.
Board 삶 속 글 2006.09.23 風磬 R 8145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상교야! 집 거정하지 마고 어둠이 연병장으로 밀려올 때쯤이면 난 어김없이 담배 하나를 물고 고향쪽 하늘을 쳐다본다. '모두들 잘 있는지.....'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상교야! 편지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벌써 고향집에 닿은 것일까. 편지 겉봉엔 익숙한 동생의 글씨가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나는 정신을 어디에 빼앗긴 것처럼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였다. 연세가 칠십육 세나 되신 고령의 아버지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 본일이 없으신 당신께서 손수 글을 적어 보내신 것이다. '상교야! 집 거정하지 마고 건강하게 군생활 열시미 해.....' 글씨를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르시는 아버지는 받침 생략과 띄워 쓰기도 엉망인 그저 소리나는 대로 삐뚤삐뚤 쓰신 편지를 보내셨다. 아버지의 글은 한동안 나의 몸을 마비시키는 듯했고 나는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금방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초등학교 때 어쩌다 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으레 아버지께 오시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고, 또 가을 운동회때는 '아버지와 함께 뛰는' 경기가 있었는데 연세 많은 아버지와 함께 뛰어봤자 꼴찌가 분명할 테고, 남들 앞에 아버지와 함께 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슬그머니 숨어 버리곤 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서글프고 아프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록 한글도 모르는 아버지시지만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굵게 팬 이마의 주름살, 궂은 농사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등이 잘 말해준다.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내 어찌 세상에 발을 붙이고 또 지금 이렇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부끄러운 자식을 위해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 보내시다니..... 나는 힘겹게 글을 쓰시는 아버지의 굽은 등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져 편지를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권상교 님/충북 제천시 고암도
Board 삶 속 글 2006.09.22 風磬 R 7334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아버지의 유품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얼마의 지폐가 든 하얀 동투를 발견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뽇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공장 근무를 일 년 이상 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나는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해가 바뀐 1월 10일, 첫 월급을 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연하다는 득 천원짜리 육십장을 천천히 세어 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였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셧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시고 달랑 천 원짜리 세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 넣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하신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Board 삶 속 글 2006.09.21 風磬 R 7741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눈물 밥 난 아이들에게 늘 자상하고 능력있는 아버지였다. 가난 때문에 겪는 설움을 내 아이들에게는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늘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 학교에 보냈다. 아이들이 워낙 심성이 고운 탓인지 무분별한 내 사랑에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순하게 자랐다. 그렇게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원만하던 나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삼 년 전 일이다. 의류회사의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경기 침체와 자금 압박, 그리고 업친 데 덮친 격으로 공장에 불이나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부자가 망하면 삼 년은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집을 팔아 빚을 갚았는데도 부족해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나이 오십줄에, 이제는 웬만큼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어야 할 시기에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 이곳 저곳을 비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불과 일 년 전이다. 초췌한 몰골로 돌아온 나를 아내와 아이들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아내의 두 눈가엔 깊은 공이 패여 있었고, 두 딸아이와 아들녀석은 꽤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술을 자주 입에 댔고 아이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비로서 참 못 볼 꼴 보여 줬다 싶지만 그때는 내 현실이 너무나 싫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다 싶어 몹시 괴로웠다. 내가 다시 삶의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내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술에 곤죽이 되어 집에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두 딸아이는 아비의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한참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아이였는데..... 또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데 이번엔 작은딸이 아랫목에 겹겹이 덮어 놓은 이불 밑에서 밥 한 그릇을 내 놓았다. 아랫목 이불 밑에 밥을 넣어 두면 식지 않는다는 것을 철부지들이 어떻게 배웠을까. 아리들은 이불 밑에 밥을 넣어 놓고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날 난 눈물 밥을 먹었다. 어린 것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못난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려 주다니..... 지금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동네 아줌마들과 실랑이를 벌일라치면 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난 '눈물 밥'을 떠올리곤 한다. 어찌 생각해 보면 내 불행은 오히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순철 님/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Board 삶 속 글 2006.09.20 風磬 R 700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꽃무늬 블라우스에 얽힌 추억 막내 동생이 딸애의 옷을 사 줄 테니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딸애를 데리고 친정집을 들어서는 순간 엄마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웬 할머니가 "아이고 내 새끼 오냐?"하며 뛰어나오는데, 머리는 흰눈이 내린 듯 하얗게 새어 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왜 그리 많은지..... 나는 속이 상해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요!"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어머니가 내게 주신 보물이 있었다. 그것은 금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값나가는 물건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다 날가 재봉틀로 여기저기 박아 꿰맨 꽃무늬가 잔잔히 수놓은 블라우스이다. 팔 년 전, 아직은 날씨가 쌀쌀햇던 추운 봄날이었다. 생전 처음 집을 나와 낯선 곳에서 직장을 얻어 새 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직장에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서류를 준비해 올라오던 날, 엄마는 막무가내로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셨다. 직장을 다니려면 옷도 필요할 텐데 하시면서 엄마는 시장에서 제일 예쁜 꽃무늬 블라우스와 치마를 집어 드셨다. 나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는 앞서 달렸다. 버스표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엄마가 꾸러미를 들고 나를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엄마의 모습이라니.....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에 헐렁한 몸빼를 입고, 맨발에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제일 슬펐던 건 축 늘어진 엄마의 젖가슴이었다. 그것도 짝짝이로..... 당신은 그런 모습이면서도 자식을 챙기는 엄마가 한없이 고맙고 미안했다. 버스에 올라탄 나는 눈앞이 흐려져 엄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봄비를 맞으며 서 있는 엄마도 울고 계셨다. 아직도 그때 사 주신 블라우스를 보면 엄마의 크나큰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엄마, 사랑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김혜영 님/경남 진해시 풍호동
Board 삶 속 글 2006.09.18 風磬 R 7127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둠을 밝혀 준 목소리 열네 살, 중학교에 막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첫 시험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밤에 친구집에서 함께 공부를 하기로 한 나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주위는 임 컴컴한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걱정이 되신 어머니께서 배웅을 나오셨다. 친구집이 있는 동네 어귀 모퉁이에는 밤이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하나도 안 무서우니 그만 가 보세요."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께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조금만 더 가자며 자꾸만 따라오셨다. 한 고개를 넘자 친구네 집 불빛이 멀리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제 혼자 갈 수 있으니 그만 돌아가시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알았다며 나의 등을 살짝 떠미셧다. 어둠과 적막은 나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고갯길을 내려 산밑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아!" "예?"하고 대답하니 어머니가 다시 말씀하셨다. "어서 가거라." 잠시 뒤 개울을 건너려는데 뒤쪽에서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셨다. 큰소리로 "예"하고 대답하니 어머니는 또 "그래, 어서 가"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언덕길을 내려갈 쯤에도 모퉁이를 돌아설 쯤에도.....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친구네 동네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목이 터져라 큰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고갯마루 어둠 속에 계셨으리라. 내 이름을 끝까지 불러 주신 어머니의 목소리로 나는 무사히 친구 집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친구와 엎드려 공부를 하는데 그 먼길을 홀로 가실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려 공책 위로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어머니는 이미 칠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서 가거라"하시던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 조태훈 님/광주시 북구 운암동
Board 삶 속 글 2006.09.17 風磬 R 6722
행복수첩 지은이: 김용택 출판사: 좋은생각 꽃바구니같은 이야기 내가 근무하는 조그마한 초등학교 운동장엔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봄빛 속에 놀고 있다. 운동장 아래 파란 호수며, 학교 뒷산 솔숲에는 솔잎이 더욱 푸르고, 그 너머 마을에선 농부 들이 한가하게 밭 가는 소리가 들린다. 땅엔 쑥이 파랗게 자라고, 민들레며, 시루 나물이며 나숭개가 벌써 꽃을 피우고 있다. 우리 나라에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봄은 젏게 곱고 화려 하게 우리 곁에 오고 있지만 나라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니 갑자기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러 나 살림이 어려워지며 우리들 살림살이에서 거품이 빠지니 사소한 물질 하나하나가 소중해 지고 마음 씀씀이들이 애틋해지기도 하니 어려움 속에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우리들이 크고 화려한 것들을 추구하며 정신없이 사는 동안 잃어버린 것은 가난한 '사람 의 마음'이다. 옛날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담너머로 넘겨 주고 넘겨 받앗던 것들이 시 래깃국이나 감자 몇 알 같은 작은 것들이었지만 그 국 속에는 주고받는 사람의 따뜻한 정과 이웃간의 믿음이 담겨 있었다. 우린 언제부터인가 그 아름답고 정겨웁던 날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 한 권의 작은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별 볼일 없는'이야기들이 다. 작은 것에 상처받고, 작은 것으로 슬퍼하고, 작은 것으로 괴로워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고 하찮은 것으로 너무너무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결 고운 이야기이다. 이 글속에는 가난 해서, 너무나 가난해서 행복밖에는 없을 것 같은 눈물겨운 사람들의 얼굴들이 밤하늘의 별 빛만큼이나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 1부와 2부는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꾸며졌다. 가난하고 힘들기 때문 에 생기는 갈등들을 화해로 이끌어 나가는 따뜻한 일상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 전체로 흐르고 있는 이야기들이 다 그렇듯이 잘 고 잘살고 세상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큰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그러나 이야기마다 인간적인 사랑이 넘치는, 그리하 여 이들의 삶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힘이 됨을 이 글은 보여준다. 이 어려운 시절을 사는 많은 가족들에게 이 이야기들은 큰 위안과 희망을 줄 것이다. 3부에서는 주로 사제지 간의 정이나 친구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모았다. 4부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어렵고 힘 든 시절,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 눈물 같은 이야기들은 작지만 큰 삶의 밑천이 될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더불어 사는가를 가르쳐 주는 글이다. 이 작은 책의 글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사로운 사람의 정이 풀물같이 묻어나게 할 것이며 포근하고 흐믓한 휴식을 얻게 할 것이다.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혼탁한 우 리 마음의 거울을 닦아 보자. 고통을 함께 견뎌내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정겨운 이웃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당신도, 당신도,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며 거기 당신 옆에 뒤에 앞에 웃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당신의 고운 벗들과 날마다 마주치는 당신 같은 이웃 들과 함께 웃어보라. 이 작은 책 속엔 그런 꽃바구니같은 환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아침 이슬에 씻긴 것 같은 해맑은 이 땅의 얼굴들이.
Board 삶 속 글 2006.09.17 風磬 R 10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