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뜨기 어렸을 적 시골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것에 ‘쇠뜨기’라는 풀이 있었다. 뿌리가 너무 깊어 계속 뽑다 보니 새벽닭이 울더라고 농담을 하는 이도, 소꿉놀이 할 때 사금파리에 모래로 밥하고 쇠뜨기를 반찬 삼았다는 이도 있다.‘뱀밥’이라고도 한다. 특히 햇빛이 잘 드는 풀밭이나 둑에서 잘 자라는데, 그런 곳에서 소가 주로 뜯어먹기에 ‘쇠뜨기’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과식은 금물로, 아무리 쇠뜨기라지만 소도 쇠뜨기를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데, 이는 쇠뜨기에 센 이뇨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쇠뜨기의 영어이름이 ‘말꼬리’(horsetail)인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풀이름 하나가 문화를 이렇게 잘 반영할 수가! 우리나라 들판에는 소가 있고, 서양 들판에는 말이 많구나. 그래서 들판에 자라는 같은 풀을 두고서도 한쪽은 ‘소’를, 서양 쪽에서는 ‘말’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인 것 아닌가. 한자말에도 말풀, 곧 ‘마초’(馬草)가 있긴 하나, 실제 영어 쪽에 말과 관련된 말이 많다. 이는 바로 ‘농경’(또는 牛耕) 문화와 ‘유목’ 문화를 대비하기도 한다. 우리 겨레는 본디 유목민이었다고 하나, 원시시대에 유목민 아니었던 겨레가 어디 있으랴. 다만 우리는 일찍 터 잡아 소로 논밭 갈아 농사를 지은 까닭에 소와 관련된 말이 많아진 듯하다. 심지어 소에서 나오는 온갖 부산물도 버리지 않는다. 소와 관련된 나무도 있지만 풀이름으로 소귀나물, 쇠무릎지기, 쇠치기풀 …들이 있다. 임소영/한성대 한국어교육원·책임연구원
그치다와 마치다 ‘그치다’나 ‘마치다’나 모두 이어져 오던 무엇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어져 오던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얽혔고, 사람의 일이거나 자연의 움직임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나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저마다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서로 넘나들 수 없게 하는 잣대는 과녁이다. 과녁을 세워놓고 이어지던 무엇이 과녁을 맞춰서 이어지지 않으면 ‘마치다’를 쓴다. 과녁 없이 저절로 이어지던 무엇은 언제나 이어지기를 멈출 수 있고, 이럴 적에는 ‘그치다’를 쓴다. 자연은 엄청난 일을 쉬지 않고 이루지만 과녁 같은 것은 세우지 않으므로 자연의 모든 일과 흐름에는 ‘그치다’는 있어도 ‘마치다’는 없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그치고 태풍도 그치고 지진도 그친다. 과녁을 세워놓고 이어지는 무엇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나, 사람 일이라고 모두 과녁을 세우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의 일이나 움직임에는 ‘그치다’도 있고 ‘마치다’도 있다. 울던 울음을, 웃던 웃음도, 하던 싸움도 그치지만, 학교 수업을, 군대 복무도 마치고, 가을걷이를 다하면 한 해 농사도 마친다. 이어져 오던 무엇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끝나다’와 ‘끝내다’도 쓴다. 물론 저절로 이어지지 않으면 ‘끝나다’고, 사람이 마음을 먹고 이어지지 않도록 하면 ‘끝내다’다. 이들 두 낱말은 과녁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뜻을 지니고 마음을 먹었느냐 아니냐를 가려서 쓰는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쓸어올리다 ‘머리’와 ‘머리털’과 ‘머리카락’은 본디 뜻이 다르다. ‘머리’는 사람이나 동물의 목 위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얼굴과 머리털이 있는 부분을 아울러 이른다. ‘머리털’은 ‘머리에 난 털’, ‘머리카락’은 ‘머리털의 낱개’를 이른다. 현대어에서 이런 구분이 넘나들면서 ‘머리털’을 가리키는 말로 ‘머리’와 ‘머리카락’도 함께 쓰인다. 최근에는 ‘머리털’보다 ‘머리’와 ‘머리카락’을 더 많이 쓰는 추세다. 곧 ‘머리털 자른다’가 아닌 ‘머리 자른다’, ‘머리카락 자른다’로 쓰는 것이다. ‘머리털’과 더불어 쓰이면서 큰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로 ‘쓸어올리다’가 있다. “두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을 헤살 놓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윤태는 남희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털을 쓸어올려 주었다.”(유주현 〈하오의 연가〉) “습관적인 몸짓인 듯 정하섭은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조정래 〈태백산맥〉) “묘옥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황석영 〈장길산〉) ‘쓸어올리다’는 머리털 따위를 위로 쓸면서 만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용례를 살펴보면 ‘머리털을 쓸어올리다’보다 ‘머리를 쓸어올리다, 머리카락(머리칼)을 쓸어올리다’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나타난다. ‘털’이 비속하게 느껴지는 까닭, 머리카락이 털이 지닌 작은 크기·길이를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일 수도 있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과거시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재·과거·미래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늘 현재를 살면서 지난날을 되살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 문법에도 이런 시간 흐름이 반영된다. 말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지나간 시점의 일을 표현하는 것을 과거시제, 다가올 시점의 일을 표현하는 것을 미래시제, 말하는 시점과 일의 시점이 같은 때는 현재시제라 한다. 언어마다 현재·미래보다 과거를 표시하는 문법적인 방법이 뚜렷하다. 우리말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와 같이 어미 ‘-었-’을 써서 과거를 표시하고, 영어에서 어미 ‘-ed’를 통해 과거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말이나 영어의 경우, 과거시제를 표현하는 것이 한 단계밖에 없다. 곧, 모든 과거는 ‘-었-’이나 ‘-ed’로 표현한다. 그러나 과거시제를 몇 단계로 나눠 표현하는 말이 있어 흥미롭다. 인도 북동부 미슈미말에는 현재로부터 가까운 과거는 ‘so’로, 한참 지난 과거는 ‘liya’로 표현한다. ‘ha tape tha-so’라 하면 조금 전에 내가 밥을 먹었다는 뜻이고, ‘ha tape tha-liya’라 하면 한참 전에 내가 밥을 먹었다는 뜻이다. 벰바말에서는 더 다양하다. 그저께보다 더 과거라면 ‘-ali-’, 어제쯤은 ‘-alee-’, 오늘 아침쯤이면 ‘-aci-’, 서너 시간 전쯤이면 ‘-a-’를 써서 지난적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게 과거를 구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말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예천과 물맛 땅이름은 특정 지역의 환경을 반영하여 만들어질 때가 많다. 그 가운데는 술과 관련된 것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경북에 가면 ‘예천’(醴泉)이란 곳이 있다. 예천의 ‘예’(醴)는 단술을 뜻한다. 예천은 본디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예천군으로 고쳤다. ‘수주현’이나 ‘예천’은 둘 다 ‘술’과 관련이 있다. 땅이름에 ‘술’이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땅이름을 연구했던 김윤학 교수는 이러한 원리를 ‘유연성’에서 찾는다. 유연성을 고려한다면, 술과 관련된 땅이름은 대체로 물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천이라는 땅이름에 단술을 뜻하는 한자 ‘예’를 쓴 것은 이 지역의 물맛이 단술 맛과 같다는 뜻이었다. 흥미로운 점은〈산해경〉에 나오는 ‘봉황 설화’다. 이를 보면 발해 북쪽 땅 한곳에 붉은 동굴이 뚫린 산이 있는데, 그 산 꼭대기에는 금과 옥이 많고 붉은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 이 물은 남쪽 발해로 흘러드는데 그곳에 큰 새가 있으니,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찬란한 새로, 그 이름을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새이니 수컷을 봉이라 하고, 암컷을 황이라 한다. 봉황의 성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경〉기록에, 봉황은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였다. 술맛 같은 예천의 물. 그러나 오늘날은 예천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를 가든 봉황이 마시는 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됐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
열쇠 호주머니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의 하나가 열쇠다. 사람 따라 대문·차·장롱·서랍 열쇠들이 한 움큼이나 된다. ‘열쇠’는 복합어로 ‘자물쇠를 잠그거나 여는 데 쓰는 물건’으로, ‘여는 쇠’를 말한다. ‘자물쇠’는 ‘자물통’이라고도 하며, ‘여닫게 되어 있는 물건을 잠그는 장치’로 ‘잠그는 쇠’를 말한다. 실제 언어 현장에서는 ‘열쇠’와 ‘자물쇠’를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경우도 많다. 열쇠는 지역 따라 유형을 달리하는데, 크게 ‘열쇠, 쇳대, 열대, 개철’로 나눌 수 있다. ‘열쇠’는 15세기 국어에서부터 ‘열쇠’로 쓰는데, 경기와 강원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하고 충청과 경상도에서도 사용한다. 충청도에서는 ‘이을쇠’로 발음하고, 제주에서는 ‘얄쇠’로 소리낸다. ‘열대’는 ‘여는 막대’의 뜻으로 북쪽에서 주로 사용하고 강원, 경기에서도 보인다. ‘쇳대’는 ‘쇠로 된 막대’란 뜻으로 ‘쇠때, 세때, 시때, 쌔때’ 등으로 발음하면서 주로 충북 이남 지역에서 사용한다. 강원도에서는 ‘늘대’가 보이는데, 이는 ‘넣을 대’의 발음인 것 같다. 제주도에서 사용하는 ‘개철’은 열쇠의 한자어에 ‘개금’(開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밑이 ‘개철’(開鐵)이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어떤 뒤얽힌 문제가 있을 때 ‘열쇠를 쥐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말할 때 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을 고칠 열쇠는 도대체 누가 쥐고 있는가?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8-10-14 00:05)
가와 끝 “무슨 팔자인지 밀려오는 일이 끝도 가도 없네!” 이런 푸념을 듣는다. ‘끝’은 무엇이며 ‘가’는 무엇인가? ‘끝’과 ‘가’는 본디 넘나들 수 없도록 속뜻이 다른 말이었으나 요즘은 걷잡지 못할 만큼 넘나든다. 아니 넘나든다기보다 ‘끝’이 ‘가’를 밀어내고 있다.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가로 갖다 두어.” 하던 것을 요즘은 흔히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끝으로 갖다 두어.” 한다. ‘가’는 바닥이나 자리나 바탕 같이 넓이가 있는 공간에서 가운데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를 뜻한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데’가 반드시 얼마간의 너비를 지니고 있는 자리기에 ‘가장자리’라는 말을 함께 쓴다. ‘끝’은 시간을 흐르는 채로 두고 또는 도막으로 잘라서 맨 마지막, 흐르는 시간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나 움직임에서도 맨 마지막, 흐르는 시간처럼 길이가 있는 물건의 맨 마지막을 뜻한다. 나아가 공간도 어느 쪽으로든 마지막을 뜻하지만, 공간의 ‘끝’은 ‘가’와 달리 너비를 지닌 자리가 없어 ‘끄트머리’(끝의 머리)라는 말을 함께 쓴다. 그러니까 ‘가’는 공간에만 쓰고, ‘끝’은 시간에 써야 본바탕이지만 공간까지 넓혀 쓴다. 그만큼 ‘끝’의 뜻넓이가 ‘가’보다 본디 넓어서 조심스레 가려 써 버릇하지 않으니까 힘센 ‘끝’이 힘여린 ‘가’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 광주리를 저쪽 마루 끝으로 밀어 두어.” 하는 말을 제대로 따르면 광주리는 반드시 마루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끝’에는 광주리를 받을 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맞부닥치다 ‘맞-’은 명사나 동사 앞에 붙어 새말을 만드는 앞가지다. 명사 앞에 붙는 ‘맞-’은 ‘맞고소·맞고함·맞담배·맞바둑·맞바라기·맞잡이·맞적수·맞장기·맞줄임·맞트레이드’에서처럼 ‘마주 보면서 하는’, ‘서로 엇비슷한’의 뜻을 더한다. 동사 앞에 붙는 ‘맞-’은 ‘맞들다·맞바꾸다·맞서다’에서처럼 ‘마주, 정면으로, 서로 엇비슷하게’란 뜻을 더한다. ‘맞-’은 부사 ‘마주’의 모음 ‘ㅜ’가 줄어들어 만들어진 말이므로 그 뜻에 ‘마주, 정면으로’란 뜻이 있다. 이런 앞가지 ‘맞-’이 붙은 낱말로 ‘맞부딪다·맞부닥뜨리다’ 같은 말은 큰사전에 올랐으나 ‘맞부닥치다’는 없다. “대불이는 운수 불길하여 … 나졸들과 맞부닥치기라도 한다면 낭패일 듯싶어, 발걸음을 돌렸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그런 것들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새삼스레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괴로움, 나아가 그것들과 맞부닥쳐 평범한 사나이로서의 고달픔과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픈 ….”(이문구 〈장한몽〉) “다만 그것이 맞부닥칠 대상이 눈앞에 선뜻 나서지 않아 밑바닥에 잠재해 있을 뿐이다.”(전광용 〈태백산맥〉) ‘맞부닥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맞닥뜨리다’, 또는 ‘어려운 문제나 반대에 직면하다’란 뜻으로 쓰인다.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하나를 골라 길을 가면서 갖가지 장애물들과 맞부닥치고 다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루스트)을 아쉬워하며 사는 듯하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말높이기 말에는 같은 표현이라도 정중하고 높이는 표현과 친근하고 편하게 말하는 표현이 있다. 상대를 높이는 정도에 따라 아주 높임, 조금 높임, 낮춤과 같이 몇 단계로 나뉘기도 한다. 우리말은 높이는 단계에 따라 ‘합니다-하오-하네-한다’로 나누기도, ‘해요-해’로 구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자바말도 높임의 단계가 엄격히 구분되는 언어로 유명하다. 높임 단계 따라 낱말이 달라진다. ‘밥’이란 말은 [sega]와 [sekul]로,‘먹다’도 두 단계인 [mangan]와 [neda]로 나뉘어 있어, 우리말에서 ‘밥-진지’,‘먹다-잡수시다’를 구별해 쓰는 것과 같다. ‘집’을 가리킬 때 [omah], [grija], [dalem] 셋을 쓰는데, 각각 낮춤말·중간말·높임말이다. ‘가다’도 [arep], [adjeng], [bade]로, ‘지금’이란 말도 [saiki], [saniki], [samenika]처럼 세 단계로 나뉘어 있다. ‘당신’이란 말은 두 단계로 낮춤말은 [kowe], 중간말·높임말은 [sampejan]이다. 그래서 ‘너는 지금 밥을 먹고 있느냐?’는 말은 높이는 정도에 따라 자바말에서는 세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apa kowe arep mangan sega saiki?’(낮춤), ‘napa sampejan adjeng neda sekul saniki?’(중간), ‘menapa sampejan bade neda sekul samenika?’(높임) 이 정도면 우리말 높임 표현보다 더 복잡한 편이 아닐까?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서울 서울은 예부터 수도를 상징하는 토박이말이다. 게다가 서울이라는 땅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다의적이다. ‘그 나라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때의 서울은 ‘수도’를 뜻하는 말이며, ‘서울 600년사’라는 말에서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뜻한다. 그런데 ‘서울’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 말은 본디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과 같이 정치나 행정의 중심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서라벌과 서벌은 ‘동쪽’을 뜻하는 ‘새’( )에 ‘마을’이나 ‘성’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로,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옛이름이었다. 그러기에 양주동은 〈고가연구〉에서 ‘향가’의 옛이름 가운데 하나인 ‘사뇌가’를 ‘동방의 노래’라 풀었던 것이다. 옛말 가운데 ‘서울’과 관련된 지명은 백제에도 있다. 백제의 서울인 ‘부여’의 옛이름이 ‘소부리’(所夫里)다. ‘서라벌’이나 ‘소부리’는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마을을 뜻하는 말로 신라에서는 ‘화’(火: 불)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고, 고구려에서는 ‘홀’(忽)을 붙이는 사례가 많았는데, 백제는 ‘부리’(夫里)를 붙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는 모두 ‘서울’에 해당하는 옛말이었음이 증명된다. 중국에서는 서울을 소리가 비슷한 ‘서우얼’(首爾)로 적기로 했다고 한다. 얼마나 정착될지 궁금하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