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밥풀 오래 전에 이현세 만화〈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를 보았을 때, 그런 이름이 정말 있나 싶어서 찾아봤다. 그리고 빨간 꽃잎 위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하얀 밥풀무늬를 보고 적이 놀랐다. 풀꽃이름 중에는 누가 죽어서 그 자리에 난 것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많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제사상에 올릴 메를 짓다가 쌀알 두 톨을 떨어뜨렸다. 흙이 묻은 쌀알로 메를 지으면 불경스러울 것 같고, 그렇다고 쌀을 버리기에는 죄스러워하다 혀에 올려놓는 순간 시어머니가 이를 보고 제사에 올릴 메쌀을 먼저 입에 댔다고 호되게 꾸짖었다. 며느리는 뒷동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맸는데, 그 혀 위에 쌀알 두 톨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빼어문 혀와 밥풀이 연상되는 꽃을 보고 왜 가장 먼저 며느리를 떠올렸을까? 전통 사회에서 며느리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를 드러내는 흔히 보이는 보기로 ‘며느리밑씻개’나 ‘며느리배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며느리밑씻개’는 잎과 줄기에 잔가시가 있어 따끔따끔한 들풀인데, 별로 필요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우니 며느리 밑씻개로나 쓰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며느리배꼽’은 턱잎과 열매가 어우러진 모양이 배꼽처럼 생겼는데, 아들이나 딸 배꼽은 귀엽게 느껴지지만, 며느리 배꼽은 민망하고 하찮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담겼을 터이다. 풀이름 하나에도 옛 어른들의 삶과 얼이 배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사람 차별이 스민 이런 전통은 짚고 넘어가야 할 성싶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말과 글 ‘말’과 ‘글’을 뜻이 아주 다른 낱말로 보아 ‘말글’이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말’은 글을 낳았고 글을 싸잡는 것이기에 이들 둘은 서로 다른 낱말이 아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담아서 주고받는 노릇이다. 마음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 하는데 조물주가 내려준 그릇이 목소리다. 목소리에다 마음을 담아서 주고받는 노릇이 본디 ‘말’이었다. 목소리는 하늘이 내려주어서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그릇이지만 곧장 사라져서 눈앞에 있는 사람밖에는 주고받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 그릇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글자’를 만들어 눈앞에 없는 사람과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글자의 그릇에 마음을 담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며 주고받는 말, 이게 곧 ‘글’이다. 이래서 이제 목소리의 말을 ‘입말’이라 하고, 글자의 말을 ‘글말’이라 한다. 글말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눈앞에 없는 사람과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엄청난 도움이 되었으나 살아 숨쉬는 느낌을 지닌 목소리를 담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오늘에 와서 시간과 공간에 아랑곳도 없고, 살아 숨쉬는 목소리도 놓치지 않고, 게다가 눈앞에 보듯이 모습까지 담아서 주고받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전자’다. 전신·전화·영화·방송을 거쳐 인터넷에 이르는 ‘전자 그릇’에 마음을 담아 주고받는 ‘전자말’이 나타났다. 말이 세 가지로 벌어진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윽박 남을 심하게 을러대고 짓눌러 기를 꺾는 행위를 ‘윽박지르다’ ‘윽박질’ ‘윽박질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말이 ‘윽박’인데, 국어사전에 따로 잡아 올리지 않았다. “… 윽박을 주어 건넌방에 들어앉히고, 초조해 할 모친에게 알리러 자기가 나서기로 하였다.”(염상섭 <취우>) “남의 무남독녀 외딸을 그저 윽박 주고 구박하고 못 살게 굴고, 그래도 좋다는 말이냐?”(박태원 <천변 풍경>) “의사를 묻는 게 아니고 반대하는 놈이 있기만 있으면 때려 죽이겠다는 윽박이었다.”(송기숙 <자랏골의 비가>) “내 윽박에 주춤거리던 계집애는 어깨를 들먹거리다가 다리를 쭉 뻗고 까무러쳐 버렸다.”(신경숙 <겨울 우화>) 여기서 ‘윽박’은 ‘남을 심하게 을러대고 짓눌러 기를 꺾음’의 뜻으로 쓰였다. 비슷한 말로 ‘욱박’과 ‘윽박다’가 있다. ‘욱박’은 ‘억지를 부려서 마음대로 하려는 짓’이고, ‘윽박다’는 ‘을러대어 몹시 억누르다’의 뜻으로 쓰이는 동사다. ‘윽박’이 ‘윽박다’와 상관이 있을 법한데, ‘윽박다’의 ‘윽박-’은 동사의 어간이어서 명사로 쓰이는 ‘윽박’과 관련짓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동사 어간이 어미와 결합되지 않은 채 명사로 쓰이거나 명사가 동사 어간으로 변한 보기는 드물기 때문이다. ‘욱박’과 ‘윽박다’는 거의 쓰이지 않는데도 큰사전에 오른 반면, ‘윽박’은 문헌이나 입말에서 널리 쓰이는데도 수록되지 않았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성별 문법 말소리는 성별 따라 남성은 굵고 탁하며, 여성은 가늘고 맑다. 여자는 상승어조를 많이 낸다. 이는 친밀감·부드러움·공손함을 나타낸다. 말 차이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남자들이 쓰는 낱말과 여자들이 쓰는 낱말이 서로 다른 때일 것이다. 남아프리카 주루족 말에서 남자말 [z] 소리는 여자말에서 규칙적으로 없어진다. 물을 뜻하는 남자말 amanzi에는 [z]가 들었는데, 여자말에는 amandabi처럼 [z]가 사라진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성별에 따라 문법이 달라지기도 한다. 인도의 어떤 말에서는, 여자가 여자에게 말을 할 때 특이한 문법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남자가 남자, 남자가 여자, 여자가 남자에게 말할 때와 대립된다. 주어가 1인칭일 때 그렇다. ‘내가 간다’를 보통 bardan이라 하지만, 여자가 여자에게 말할 때는 baren이라 한다. bardam(우리가 간다)은 여자가 여자에게 말할 때 barem으로, barckan(내가 갔다)은 barcan으로, barckam(우리가 갔다)은 barcam이라 한다. 주어가 2인칭 단수면 더 독특한데, ‘네가 간다’를 보통 때는 barday라 하지만, 여자가 여자에게 말할 때는 bardin, 남자가 여자에게 말할 때는 bardi로 말한다. barckay(네가 갔다)는 barckin(여자가 여자에게), barcki(남자가 여자에게)로 표현한다. 우리말은 이런 구별은 물론, 남·여·중성 따위 성별에 큰 비중이 없는 말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압록강과 마자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 연경(북경)을 거쳐 황제의 행궁이 있었던 열하까지 여행한 기행문이다. 이 책에서 압록강은 ‘마자수’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근원이 말갈의 백산(백두산)으로부터 출발하며, 물빛이 오리의 머리빛깔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압록강은 분명 물빛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런데 압록강을 왜 ‘마자수’(馬紫水)라 불렀던 것일까? 흥미로운 사실은 ‘마자’가 용(龍)을 뜻하는 토박이말 ‘미르’와 관련이 있다는 황윤석의 해석이다. 황윤석은 영조 때의 실학자로〈이제속고〉라는 문집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잡저에는 ‘화음방언자의해’라는 글이 실려 있다. 말 그대로 중국의 한자음이 우리말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여기서 곧 ‘마자’와 ‘미르’는 같은 소리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압록강을 ‘마자수’ 또는 ‘용만’(龍灣)이라 불렀고, 또 압록강 가까이 있는 ‘의주’를 ‘용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땅이름 가운데 미르 ‘용’자가 들어간 곳도 비교적 많다. 유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연변에는 ‘용정’(龍井)이 있고, 서울에서 ‘용산’이 있다. 서울의 용산은 백제 기루왕 때 한강에서 두 마리 용이 나타났던 까닭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처럼 땅이름은 어원보다는 설화 속에서 전승되는 경우가 많지만, ‘마자수’에 ‘미르’가 남아 있듯이 풍요로운 우리말의 창고 구실을 한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
나무노래 초등학생 조카가 읊조리는 ‘나무노래’는 조그만 입술로 옹알대는 모습도 귀엽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유희 수준이 뛰어나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우선 비슷한 소리를 붙인다.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 오다보니 오동나무, 늙었구나 느릅나무, 자빠졌다 잣나무 ….” 낱말풀이도 있다. “십리절반 오리나무, 열의갑절 스무나무, 내편네편 양편나무, 젖먹여라 수유나무, 셈잘한다 계수나무 ….” 말 쓰임이 나오기도 한다. “불밝혀라 등나무, 불에붙여 향나무, 마당쓸어 싸리나무 ….” 모습과 소리가 살아있다. “덜덜떠는 사시나무, 입맞췄다 쪽나무, 오줌싼다 쉬나무 ….” 반대말도 등장한다. “낮에봐도 밤나무, 거짓없어 참나무, 양반동네 상나무, 풀었어도 매자나무 ….” 아이러니는 어떤가. “한치라도 백자나무, 남쪽에 난 동백나무, 푸르러도 단풍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 아예 한 문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앉아 구기자’나무, ‘칼로베어 피’나무, ‘씨름하여 저’나무, ‘하느님께 비자’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 요즘 생태학교에서 “뽕나무가 뽕하고 방구를 뀌니, 대나무가 대끼놈 야단을 치네, 참나무가 참다못해 하는 말, 참아라~”처럼 배운다 하니, 삶과 자연이 하나로 녹아든 모습이다. 나무노래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4·4조 음수율에 운을 맞추고 뜻을 이루는 품새가 절묘하지 않은가.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책임연구원
굴레와 멍에 자유는 사람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람이다. 그러나 온전하고 참된 자유는 하느님 홀로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에 얽힌 굴레와 멍에 탓에 자유를 누리기가 몹시 어렵다. 가끔 굴레를 벗고 멍에를 풀었을 적에 잠깐씩 맛이나 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굴레’는 소나 말의 머리에 씌워 목에다 매어놓는 얼개다. 소는 자라면 코뚜레를 꿴다. 고삐를 코뚜레에 매어 굴레 밑으로 넣은 다음 목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굴레가 고삐를 단단히 붙들어서 소가 부리는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말은, 귀 아래로 내려와 콧등까지 이른 굴레의 양쪽 끝에 고삐를 매어서 굴레 밑으로 넣고 목뒤로 빼내어 뒤에서 사람이 잡고 부린다. 굴레가 고삐를 맬 수 있게 하고 움직이지 않게 하여 말이 부리는 사람의 뜻을 거스를 수 없도록 한다. ‘멍에’는 소나 말에게 수레나 쟁기 같은 도구를 끌게 하려고 목에다 메우는 ㅅ꼴의 막대다. 멍에 양쪽 끝에 멍에 줄을 매어서 소나 말의 목에다 단단히 묶어놓고, 수레나 쟁기 같은 도구 양쪽에 매인 줄을 다시 멍에 양쪽에다 매면 소나 말은 이제 도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사람이 부리는 대로 도구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소든 말이든 굴레는 씌우고 벗겨야 하고, 멍에는 지우고 풀어야 한다. 멍에는 일을 할 적에만 메었다가 일이 끝나면 풀어서 벗어날 수 있지만, 굴레는 한 번 쓰고 나면 죽을 때까지 자나 깨나 쓰고 있어서 더욱 괴로운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물혹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언어는 입말과 글말로 나뉘는데,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목적은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언어 사용 실태를 살펴보면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용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문 영역에서 이러한 예가 많이 나타난다. 법원의 경우 일반인들이 서류 한 장 제대로 작성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병원의 경우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용어를 써서 환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는데,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거나 글을 썼다면 헛수고를 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문 분야의 경계가 많이 사라지면서 일반인들도 전문 용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문 용어에는 한자어나 외래어가 많은데,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순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속 살갗에 주머니처럼 나서 그 안에 단백질이나 지방이 들어 있는 종기’를 가리키는 낱말로 ‘낭종’이 있는데, 의사들은 ‘시스트’(cyst)라고도 한다. 큰사전에는 ‘낭종’만 올라 있고, ‘시스트’는 올라 있지 않다. 그런데 큰사전에는 없지만, 일반인들은 이를 순화한 말로 ‘물혹’이라는 말을 널리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전문 용어를 순화한 것이면서 일반인들이 자주 쓰는 ‘물혹’과 같은 낱말은 큰사전의 올림말로 수록하여 전문가들도 널리 쓰도록 해야 한다. 같은 전문 영역의 전문가들끼리라면 모르되, 일반인과 하는 대화라면 전문 용어를 쉬운 용어로 바꾸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미래시제 어느 나라 말이든 지난적(과거)을 표현하는 방법은 분명하다. 그러나 올적(미래)을 나타내는 방법은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겠-’으로 올적을 표현하지만, ‘-겠-’은 미래뿐만 아니라 의지·추측도 나타낸다. “어제 굉장히 재미있었겠구나”에 쓰인 ‘-겠-’은 지난 일을 추측하는 것이지 결코 미래가 아니다. 또한 ‘-겠-’을 쓸 자리에 ‘-을 것이(다)’를 자주 쓴다. 영어에서도 과거는 어미 ‘-ed’로 표현하지만, 미래를 나타내는 어미는 따로 없다. 그래서 보조동사 ‘will’이나 ‘shall’을 써서 미래를 나타내는데, 역시 의지·추측도 나타낸다. 인도 미슈미말은 지금 시간에서 멀고 가까운 정도에 따라 다양한 어미를 갖췄고, 아프리카 벰바말도 미래를 여러 등급으로 나눠 쓴다. 미슈미말에서 ‘ha tape tha-de’라 하면 내가 금방 밥을 먹을 것이라는 뜻이고, ‘ha tape tha-ne’라 하면 한참 뒤에 내가 밥을 먹을 예정이라는 뜻이다. 벰바말 역시 과거시제처럼 미래도 네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ba-alaa-boomba’라 하면 한 서너 시간 지나서 일할 것이라는 뜻이며, ‘ba-lee-boomba’라 하면 오늘 늦게 일할 것이라는 뜻이고, ‘ba-ka-boomba’라 하면 내일 일할 것이라는 뜻이며, ‘ba-kaa-boomba’라 하면 모레 이후 일할 것을 나타낸다. 언뜻 보면 미래 표현이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구분해 쓴다. 언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여우골과 어린이말 땅이름에는 우리 고유의 정신이 담긴다. 이런 정신은 토박이말 땅이름에 많으며, 작은 땅이름에는 토박이말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더욱이 이러한 땅이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 성질을 갖는데, 이런 성질을 보수성이라 한다. 땅이름의 보수성은 어휘뿐만 아니라 말소리에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여우골’ 발음이다. 강원 영서 지역에서는 이 땅이름이 ‘이윽골’(이때 ‘이’와 ‘으’는 합쳐서 하나의 소리로 내야 한다. 이런 소리는 ‘영감’을 ‘이응감’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와 ‘으’를 합쳐서 소리를 내야 하니, 오늘날의 한글 표기로는 적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표기 방법이 없는 땅이름이 오랫동안 전해지는 까닭은 땅이름이 지닌 보수성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에는 이처럼 표기하기 어려운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 〈훈민정음〉 ‘합자해’에는 아동과 변방의 말에 ‘ㅣ’가 먼저 나고 ‘ㅡ’가 나중 나는 발음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의’는 ‘ㅡ’가 먼저 나고 ‘ㅣ’가 나중 나는 발음이다. 따라서 ‘이으’를 적을 때는 ‘ ’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에서는 이런 소리가 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단지 아동(어린이)과 변방의 말에만 간혹 있다고 하였다. 말은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다. 오늘날 말소리가 가벼워지거나 혀를 굴리는 소리가 많아지는 것은 외국어 교육의 영향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심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여우골’에 남아 있는 〈훈민정음〉의 어린이말은 오랜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셈이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