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돌배기 땅이름 시인 구상의 ‘잡초송’만큼이나 사람이름이나 풀이름을 맛깔스럽게 담고 있는 작품을 글쓴이는 본 적이 없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때도 있지만, 듣기만 해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고,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땅이름에서도 그런 것들이 제법 많다. ‘잔돌배기·장승배기·언덕배기’ 따위의 이름은 어떤 사물이 그 자리에 박혀 있다는 뜻을 갖는다. 잔돌이 많으니 잔돌배기요, 장승이 서 있으니 장승배기다. 언덕진 곳을 일컬어 언덕배기라 하고, 바위가 놓여 있으니 바우배기가 된다. 이런 이치 따라 서낭당이 있으면 서낭당배기요, 돌부처가 놓여 있으면 화주배기(화주는 중생을 교화하는 이라는 뜻에서 붙은 부처의 다른 이름)다. 여기서 ‘배기’는 ‘박히다’의 히읗이 약화된 상태에서 ‘이’ 모음 치닮기가 작용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땅이름에서는 ‘이’ 치닮기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나타난다. 이름은 사람이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지만,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든 이름이 붙으면 그 이름값을 한다. “예부터 일러오기를/ 하늘이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싹틔우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라고 노래한 시인의 말처럼, 빌딩과 아스팔트로 뒤덮인 신촌 네거리에 오늘도 잔돌배기가 살아남아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허재영/단국대 인재개발원 교수
금낭화 풀꽃이름 요즘 주머니는 아주 단순하여 그저 양복주머니, 청바지주머니 등 실용적인 쓸모만 남았는데, 실상 우리 고유의 주머니는 실용적인 것에 아름다움이 더해진 지극히 미적인 물건이다. 특히 한복에는 조끼 말고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다. 예쁜 주머니는 중요한 꾸미개였다. ‘금낭화’(錦囊花)는 주머니 모양으로 생겼다고 붙은 이름이다. 색도 고와 비단주머니꽃이다. 금낭화로 더 많이 이르지만 우리말 ‘며느리주머니·며늘치’도 있다. 새로 시집온 며느리가 차는 예쁜 주머니에서 땄을 법한 이름인데, 며느리밥풀, 며느리밑씻개 등 며느리가 붙은 다른 풀꽃이름은 그야말로 며느리 수난사지만 좋은 뜻이 들어간 며느리주머니는 왜 금낭화에 밀렸는지 안타깝다. 영어로는 ‘블리딩 하트’(bleeding heart)인데, 꽃잎 아래로 희고 붉은 꽃잎이 늘어져 나오는 모습을 ‘피 흘리는 심장’이라고 매우 직설적으로 나타냈다. 달력에서 많이 본 금낭화를 이제 실제로 볼 수 있는 철이 되었다. 산과 들이 아니더라도 꽃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복주머니를 차 본 마지막 세대가 금낭화를 사면서 추억을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자료사진
시거리와 시내 땅이름 땅이름 연구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일석 이희승은 ‘시내’의 어원이 ‘골짜기’를 뜻하는 ‘실’과 ‘내’가 합쳐진 말임을 밝혀낸 바 있다. ‘밤실’이 ‘율곡’으로, ‘돌실’이 ‘석곡’으로 맞옮김되는 것을 고려하면 땅이름에서 ‘실’의 존재는 뚜렷하다. 뿐만아니라 물가나 냇가에서 잘 자라는 수양버들을 ‘실버들’이라 하는 까닭도 ‘시내’와 마찬가지로 ‘골짜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골짜기의 뜻을 갖는 ‘실’은 차츰 마을 이름으로 쓰인다. 특히 경상도나 충청 지역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삼국시대 ‘신라’의 어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부나 북부 지역에서는 이 말이 마을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처럼 땅이름에 쓰이는 말이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고대 국어가 형성될 당시 이질적인 언어가 합쳐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시대 땅이름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삼국의 언어가 달랐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었다. 강화도 교동에는 ‘시거리’와 ‘오래시’라는 땅이름이 쓰이고 있다. 이 말은 모두 ‘실’이 변한 말로 볼 수 있다. 이들 땅이름에서 ‘실’은 다른 말의 앞과 뒤에 모두 올 수 있음을 나타낸다. 땅이름에 쓰이는 말이 지역에 따라 달리 분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의 뿌리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이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가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땅이름의 차이도 살아가는 터와 관련을 맺게 될 것이다. 허재영/단국대 인재개발원 교수
개구리밥 풀꽃이름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을 한 달 남짓 넘어서니 이제 날씨가 덥다. 개구리밥도 물 위로 떠오른다. ‘개구리밥’은 물에서 자라는 아주 작은 풀이다. 개구리가 먹는다고 개구리밥이 아니라, 개구리가 사는 논이나 연못에 자라 개구리가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머리에 풀이 붙은 모습이 개구리가 먹는 것처럼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개구리는 주로 파리나 지렁이 등 곤충을 먹지 채식을 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덕위드’(Duckweed)라는데, 연못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는 개구리이고 영어권 화자는 오리인가 보다. 개구리밥이 있는 물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운치 있게 그려졌다. 그러나 요즘은 수족관을 꾸민답시고 인터넷에서 한 컵에 만원을 주고 사는 개구리밥일 만큼 현대인은 자연도 사고팔 수 있다. 개구리밥은 바람 따라 떠다녀 ‘부평초’(浮萍草)라고도 하는데, 이는 덧없이 떠도는 삶에 대한 대표적인 비유다. 너무 무성해지면 벼나 다른 물풀이 자라지 못한다. 지역 일꾼을 뽑는다는 선거에서 정치적 손익 계산에 따라 갑자기 이사를 하고, 호텔 사우나 대신 동네 목욕탕을 가는 후보자를 보는 일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물 위를 떠도는 개구리밥 같은 분들이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고개인사 북녘말 남북에서 흔히 쓰는 ‘목례’는 남북 두루 ‘눈짓으로 하는 인사’로 풀이하고 있다. 눈짓으로 하는 인사는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 것일까? 고개를 숙이는 정도에 따라 인사를 구분해 보면, ①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것 ②시선을 아래로 하고 머리만 숙이는 것 ③허리까지 숙이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국어사전 풀이에서 ①번이 목례라 하겠는데, 이 인사는 동급의 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할 수는 있지만 윗사람에게 하기는 곤란하다. 설령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예의 바른 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윗사람에게 할 수 있는 공손한 인사 방법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목례는 ②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많아서 혼잡하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②번의 방법으로 인사를 하고, 이를 목례라 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목례와 ‘눈인사’의 뜻이 같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①번 인사를 목례로 본다고 하더라도 ②번 인사를 눈인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번 인사를 목례라고 할 수 있지만, 눈인사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의어로 보기 어렵다. 고개인사는 ②번을 가리키는 북녘말이다. 한편, 북녘말 벙어리인사는 ‘인사말 없이 몸동작만으로 표시하는 인사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남북이 쓰는 ‘묵례’와 뜻이 비슷하지만 ‘놀림조로 이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녘말 ‘겉인사’는 ‘겉치레로 하는 인사’다. 김태훈/겨레말큰사전 자료관리부장
도미진 이야기 땅이름 한강 상류의 팔당은 ‘바다나루’로 불렸던 곳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고, 그 강변에 나루가 형성되었으니 ‘가람’(강)이 ‘바다’처럼 생각되어 붙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는 이 지역을 ‘도미진’이라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목 동쪽 10리 양근내 대탄 용진’의 하류에 있는 나루를 ‘도미진’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탄’은 ‘한여흘’로, <용비어천가>의 한강 지류를 설명한 곳에 나오는데, 남한강의 이포(배애)를 지나 양근군에 이른 나루다. 북한강 줄기는 가평의 안반여흘을 지나 양근의 선돌나루(입석진)를 거쳐 도미진에 이른다. 두 문헌에서 ‘도미진’은 남·북 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나루로 설명했으므로, ‘도미진’은 팔당 근처가 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도미진’의 다른 이름으로 ‘두미진’이 있었음도 기록했는데, 일반적으로 고구려말에서 ‘물’을 뜻하는 차자 표기가 ‘매’(買)였음을 고려한다면, ‘두미진’은 ‘두매’가 변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곧 ‘두물’의 다른 표기인 ‘두매’나 ‘두미’가 ‘두미진’으로 바뀌어 굳어진 형태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체적인 근거는 없으나 백제의 ‘도미 설화’도 도미진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개루왕의 핍박을 피해 도미 부부가 강물 따라 고구려로 갔다는 이야기를 상고하면, 그곳도 한강과 관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양수리’가 있고, ‘두물머리’도 작은 마을 이름으로 쓰이는데, 이는 나루 기능이 약화되고 물길이 변한 데서 까닭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허재영/단국대 인재개발원 교수
분홍바늘꽃 풀꽃이름 삶의 양식이 바뀌어서 그런지 사과를 깎지 못하거나 바느질을 못 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공부에 친 아들딸이라 시키지도 않았고, 세탁소에 가면 되니까 빨래나 바느질을 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들. 한번 확인해 보시라. 으레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못할 때 느끼는 마음이란 …. ‘바늘꽃’은 씨방이 아주 길게 발달해서 바늘을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분홍바늘꽃’은 꽃이 분홍빛이고, 꽃봉오리 모양도 길쭉하고, 꽃이 피었을 때 수술 꽃밥 끝도 바늘귀처럼 생겼다. 물가나 산과 들의 습지에 자라는 그냥 ‘바늘꽃’에 견줘 높고 깊은 산 양달에 자란다고 ‘두메바늘꽃’, 바늘꽃보다 커서 ‘큰바늘꽃’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파이어 위드’(fire weed)라는데, 전체가 펑펑 터지는 불꽃 모양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풀꽃에 ‘골무꽃’이 있는데, 한땀 한땀 꿰매던 바느질은 옛적 할머니 어머니 이야기로 남고, 이제는 골무가 있는 집도 별로 없을 것 같다. ‘패랭이꽃·물레나물·족도리풀’ 이름에서 옛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하고, ‘노루귀·범꼬리·매발톱’ 이름에서 야생동물을 그려보고, ‘광대수염·기생초’ 이름에서 그들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