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 사람이름 1479년(성종 10년) 5월, 유구까지 표류했던 제주 사람 ‘김빌개’(金非乙介)·강무·이정을 배에 태우고, 유구국 사신이 219명의 수행인과 울산 염포에 도착했다. 1477년 2월에는 진상할 홍귤을 비거도선(鼻居刀船)에 싣고 추자도에 닿았을 때 바람을 만나 서쪽으로, 다시 남으로 떠내려갔으며, 함께 탄 이들은 다 빠져 죽고 세 사람만 겨우 살아남아 유구에 이르렀다. ‘빌개’는 ‘非衣’(비의)로도 적었다. ‘빌개’에 가까운 제주도 말에 ‘빌레’가 있다. 非衣는 ‘빌에’를 적은 듯하다. 옛말 ‘비레’는 벼랑, 제주말 ‘빌레’는 ‘너럭바위/암반지대’며, 붉은 흙이 섞인 현무암을 ‘썩은 빌레’로도 부른다. 비슷한 이름에 ‘비라·비력’도 있다. 화산섬 제주에서만 쓰는 지질용어가 적잖다. 기생화산은 ‘오름’(=산)으로 더 알려졌다. 오름은 화산재 말고 ‘분석’(噴石)으로도 이뤄지며 ‘송이’라 한다. 분석구를 ‘송이오름’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구멍이 송송 물에 뜨는 ‘부석’은 ‘속돌’, 뭉우리돌은 ‘머돌’, 자갈은 ‘작지’, 잔자갈이 깔린 바다를 ‘조작지왓’이라 한다. ‘아아 용암’은 굳으면 표면이 거칠거칠하며 다닐 수 없어 자연 숲을 이루는데 이를 ‘곶자왈’이라 부른다. 제주엔 여자·돌·바람이 많다던가? 바다에 남편 앗긴 여인들은 바람이 되어 돌밭을 일구고 물질로 삶을 가멸게 한 모양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집이 갔슴둥? 고장말 ‘-슴둥’은 표준어 ‘-습니까’에 대응하는 말로, 주로 함북 지역과 동포들이 많이 사는 만주 ‘계동·연길·화룡·훈춘’ 등지에서 쓰이는 고장말이다. “어째 아이 먹슴둥?”(<눈물젖은 두만강> 최일홍·재중) “안녕했슴둥?”(<함북방언사전>) ‘-슴둥’의 또다른 형태는 ‘-슴두’다. “아반님, 밤새 알려하심두?”(<동해안 방언 연구> 황대화) ‘-슴둥’과 대응하는 말로는 경상도 ‘-는교’, 제주 ‘-수과’, 전라 ‘-습디여’, 평안·함경 ‘-습네까’, ‘-습데까’ 등을 들 수 있다. ‘-는교’는 ‘-는가요’가 변해 된 말, ‘-수과’는 ‘합쇼체’ 어미 ‘-수-’에 ‘-과’가 결합된 것이다. “누가 똥 묻은 엽전 한 닢이 기럽어서 변소 펄라 카는 줄 아는교?”(<불의 제전> 김원일) “아버지, 그 지게 무사 그디 내비염수과?”(<한국구비문학대계> 제주편) “일이나 시길라먼 불릉게 그러겄지맹. 이뿌다고 씰어 줄라고 부를랍디여?”(<혼불> 최명희) ‘-습네까’는 주로 평안 쪽에서 쓰이는데, 제주에서도 발견된다. “선생님은 어드렇게 해서 그런 보물을 구하섰습네까?(<한국구전설화> 평안편) 특히 ‘-습데까’는 ‘-슴둥’과 함께 주로 북녘에서만 발견되는 고장말로, 회상하며 물을 때 쓴다. “그리 오줌이 메랍데까?”(위 책), “지금 사과를 따고 있습데까?”(<남북한말 비교사전> 조재수)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서로 언어예절 ‘모두’가 ‘어찌·어떻게’로 쓰이는 게 자연스럽듯 ‘서로’도 그렇다. ‘서로’를 풀이하기가 쉽지 않은데, 사전마다 풀이 차이가 난다. 뭉뚱그리면 ‘저마다 또는 두 쪽이 함께’ 정도가 되겠다. ‘서로서로’는 ‘서로’를 겹쳐 힘준 말로서 좀 수다스런 느낌을 준다. 이따금 ‘서로가·서로는·서로의’처럼 토를 붙여 ‘양쪽·두 쪽’을 일컫는데, 본디 쓰임을 깨뜨림으로써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그럴 필요까지 없는 쓰임들을 손질하면 토는 주체를 이루는 말로 옮기거나 아예 떼어 버리는 게 낫다.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 서로(가)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다/ 모두(가) 가슴이 철렁해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에서는 토가 없는 게 깔끔하다. ‘서로’를 명사적으로 쓰는 것보다 ‘상대, 양쪽, 저마다, 각자 …’들로 바꿔 쓰는 게 정확하고 순순해진다. △서로가 서로를→서로 또는 서로서로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그들은 서로(상대의) ~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서로 마음을 ~.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신뢰가 배어나는 통화 내용이었다→서로간에 친밀감과 신뢰가 ~ △서로의 이해가 충돌하는→서로 이해가 ~ △서로가 옳다고 주장한다→서로 옳다고 ~ △서로를 섬기면서→서로 섬기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언제나 힘이 됐다→우리는 언제나 서로 ~ △아픔을 서로에게서 치유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상처를 서로 어루만지고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크레용, 크레파스 외래어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든 요즘 풍경을 ‘잘 그린 수채화와도 같다’고 표현하는 수가 있다. 수채화는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인데, 재료를 다루기 어려워 열 살이 넘어서야 그려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요즘도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은 막대 모양 크레용 또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배운다. 처음 크레파스를 봤을 때의 신비감, 그리고 같은 크레파스인데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나 선생님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들이 있을 터이다. 도화지 한 면을 채우느라 팔이 아프도록, 만만한 하늘색 조각을 문질렀던 추억도 새삼 떠오른다. 우리에게 크레용(crayon)과 크레파스(Cray-Pas, craypas)는 같은 말로 인식돼 있다. 크레용은 프랑스 말로 연필 또는 연필화를 기본 의미로 취하며, 뜻이 넓어져 색연필, 파스텔과 크레파스까지를 아우르는 말이 됐다. 크레파스는 안료에 파라핀이나 목랍(木蠟)을 섞어 녹여 굳혀 만든 그림 재료인테, 1910년대에 일본에서 발명됐다는 기록이 있다. ‘크레용’과 ‘파스텔’(pastel) 앞부분을 따서 만든 상표명이었다가 나중에 일반명사가 됐다. 이것이 우리가 크레용이라고도 하는 ‘크레파스’다. 발명지인 일본어에서는 ‘구레파스’(クレパス)라고 하는 대신에 ‘파스테루구레욘’(パステルクレヨン)이라고도 한다. 영어권에서는 ‘크레파스’가 그대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디 표현은 ‘오일 파스텔’(oil pastel)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모디리 사람이름 조선 문종 1년(1451년), ‘모디리’(毛知里)가 허안석의 아들인지 아닌지 밝혀야 한다고 사헌부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모디리가 허안석의 아내 이씨에게 입적된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재산을 노리는 것이므로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은 일이 비록 명백하다 하더라도 강상에 관한 일을 어찌 채찍을 들어 밝히겠느냐며 자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모디리’는 ‘모딜다’(모질다)에서 비롯되며, 어찌씨로는 ‘모질게’의 뜻도 있다. 문종 임금은 나중에 모디리의 출생을 밝히라 명하였다. “모디리 어미는 바로 이씨 부인의 계집종이니 자식의 소송으로 친어머니에게 해가 미치는 것은 도리어 어미·아들의 관계를 해치므로 죄를 주지 마소서”라고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던 시절, ‘모디리’는 어쩔 수 없이 양인 어머니 소생으로 입적된 모양이었다. ‘모디리’와 비슷한 이름에 ‘모디이’도 있다. ‘모딘/모진’이 밑말로 쓰인 이름에 ‘모딘이/모진이·모딘가/모딘가이/모진개·모진쇠’도 있다. 오도리족 이름에도 ‘모디리·모딘이’가 있다. ‘모디리’는 뒤에 ‘모질이’로 바뀌었다. 요즘 ‘모지리’는 ‘머저리·모조리·매우’의 뜻으로도 쓴다. 본디 모질게 살아남으라는 염원이 깃든 이름인 ‘모디리’와는 매우 동떨어진 말뜻이 그 자리에 따라붙은 셈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으디 갔습메? 고장말 ‘-습메’는 주로 평안과 함경에서, 같은 또래끼리 묻거나 대답할 때 쓰인다. 굳이 표준말로 바꾸면, ‘-네’나 ‘-는가’에 해당한다. “여보시 님제레 송구두 죽디 않구 살아 있습메?”(<한국구전설화> 평안편) “창덕이가 잡헤 갔습메.”(<북간도> 안수길) “일하러 갑메?”(<동해안 방언 연구> 황대화) ‘-습메’는 옛말 ‘-습네이다’의 ‘-이다’가 탈락한 ‘-습네’가 ‘-습네>-습메’와 같이 변해 된 말이다. ‘-습메’의 다른 형태로 ‘-습마’가 있는데, ‘-습마’는 평안 지역에서만 쓰인다. “이제야 골문 거이 터뎄구나, 보구레 고름이 이같이 많이 테데 나오디 않했습마.”(<한국구전설화> 평북편) ‘-습메’와 같이 ‘-습데’가 쓰이기도 하는데, ‘-습데’는 ‘-습메’와 마찬가지로 옛말 ‘-습데이다’의 ‘-이다’가 탈락한 형태다. “우리가 지금 집구석에 들어앉아 물계를 모르니 그렇지 별의별 일이 다 있습데.”(<영원한 미소> 김수범) ‘-습메’와 ‘-습데’ 대응하는 높임말은 ‘-습메다’와 ‘-습데다’다. ‘-습메다’는 ‘-습마’와는 반대로 함경 지역에서만 쓰이는 반면, ‘-습데다’는 평안·함경 두루 쓰인다. “지난밤에 사잇섬에 강 게 앙이라 강 건너에 갔습메다.”(<북간도> 안수길) “몸을 풀고도 미역국은커녕 죽물 한 사발 배불리 먹지 못하구 피덩이 같은 것을 내게 맡기구 갔습데다.”(<송가> 림재성)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모두에게? 언어예절 시절 따라 쓰임이 조금씩 바뀌는 게 말이다. 전통적으로 ‘모두’는 어찌씨 곧 부사로 쓰였고, 국어사전에서도 그렇게 다뤘다.(큰사전·1957) 몇몇 낱말은 현실에서 두드러지게 ‘명사적’으로 쓰였고, 이를 무시할 수 없어 곁들이로 다루게 된다. 그러다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이르면 ‘모두’ 풀이에서 명사를 독립시켜 앞세우고 보깃글을 내보인 뒤 곁들이로 ‘부사’ 갈래를 잡았다. 가끔 수효나 양을 싸잡아 강조하느라 토를 붙여 명사처럼 쓰긴 하지만 뜻으로나 기능에서 사개가 어긋난다. 숨도 거칠고 말이 튄다. 흐름이 순순하냐가 말의 됨됨이를 가리는 기준이 되는데, 이는 말이 제자리를 벗어나거나 꼴을 달리 했을 때 방해를 받게 된다. 모두에게, 모두가, 모두를, 모두는 …으로 쓰는 버릇은 다름아닌 영어나 그 번역문투에서 온 듯하다. 대체로 토를 떼거나 자리를 바꾸거나 딴 말로 손질해야 자연스럽다. 파격이 제격을 내쳐서야. △우리 모두는→우리는 모두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학생과 학부모 두루 ~. △그 부담은 국민 모두의 몫이다→~ 국민의 몫이다. △남북 모두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남북에 두루 큰 ~. △모두에게 행복한 결론은 없다→모든 이에게 행복한 ~. △국민 모두가 자신감을 잃고→국민 모두 자신감을 잃고. △외국에서 들여온 것 모두를 ‘무균실’을 통과하게 만들겠다→ ~ 들여온 것을 모두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뻐꾸기 짐승이름 “낮에 우는 뻐꾸기와 밤에 우는 두견이도 저 아무개와 같이 돌아갈 수 없는 신세여서 저렇게 우짖는가. 아무개가 저승사자를 따라서 수천 리를 가다 보니 커다란 산이 우뚝 길을 막고 서네. 그 산은 바람도 쉬어가고 석가세존도 머리 깎고 쉬어 가던 단발령이라네 ….”(서산 무속신화)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죽은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주려는 산 사람들의 바람을 노래한 것이다. 이 전설은, 뻐꾸기와 두견새는 살기 좋은 곳을 떠돌다가 이땅에 터를 잡고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고 그리 운다는 사연이다. 저승으로 간 이의 영혼이 마치 새들의 신세와 같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뻐꾸기로 환생하여 울음으로써 애달프게 호소한다. 일종의 윤회라고 할까. 때로 뻐꾸기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을 상징하는 파랑새로 등장하기도 한다. “날아가리 내 아가의 곁으로 돌아가리. 뻐꾹새가 많이 날아와 우는 동리”(<뻐국새 우는 마을>·장만영) 옛말에 뻐꾸기는 ‘버곡댱이, 버국새, 버국이, 벅국이, 벅국새’ 등으로 나온다. 고려의 노래 유구곡(維鳩曲)에는 ‘버곡댱이’로 나온다. 한자로 적어 포곡(布穀·역어유해)이라 했으니 풍년에 대한 기원을 드러낸 셈이다. 새들의 이름 가운데는 소리시늉 이름이 많다. 뻐꾹새 또한 우는 소리를 ‘뻐꾹’으로 적고 거기에 접미사 ‘-이’를 붙여 연철한 것으로 보인다.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바바리 외래어 ‘바바리’라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 중절모를 눌러쓰고 남의 눈길을 피하려 애쓰는 스파이, 안갯속을 쓸쓸히 거니는 외로운 중년이나, 아주 드물겠지만 요즘은 소식이 뜸한 ‘바바리맨’을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낭만적인 분위기가 서린 강가에서 낙엽을 밟으며 거니는 한 쌍의 남녀는 예전 영화에서 대개 바바리를 입고 등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인기는 식지 않는 듯하다. 멋스러움과 실용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바바리’는 ‘바바리코트’를 줄여서 달리 이르는 말이다. 봄가을에 입는 긴 외투로서, 이를 만들어 유명해진 영국의 의류 회사 ‘버버리’(Burberry)에서 왔다. 그러나 ‘버버리’ 제품이 아니더라도 그런 외투를 우리는 모두 ‘바바리(코트)’라는 외래어로 이른다. ‘바바리’는 트렌치코트(trench coat)가 발전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참호용 외투’라는 뜻의 트렌치코트란 이름은 군복의 일종이어서 생겼다.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가 참호용으로 입던 옷으로서, 목 아래의 깃은 완전히 덮거나 비스듬히 열어젖힐 수 있고, 옷감과 같은 재질의 천으로 허리띠를 두르는 형태의 일종의 비옷이었다. 천의 종류나 길이, 모양이 조금 바뀌긴 했으나 트렌치코트의 그 기본 형태는 지금도 ‘바바리’에서 유지되고 있는데, 그 멋스러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녀 두루 입게 되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