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씀 언어예절 높여서 하는 ‘말씀’이 있고 낮추어 하는 ‘말씀’이 있다. 말씀은 이처럼 두 길로 쓰인다. 흔히 ‘옳으신 말씀’이라고 한다. 이는 ‘옳게 하신 말씀’ 정도로 이해하고 넘긴다. ‘지당하신 말씀, 지엄하신 분부, 명쾌하신 지적, 적절하신 코멘트 …’들도 그렇다. ‘옳으신, 명쾌하신 …’을 넣어 말하면 ‘말씀·분부·지적 …’을 높이는 형식이 된다. 겹치기여서 듣기에 따라 낯간지럽고 거추장스럽다. 주체가 아닌 그와 관계되는 사물을 높이는 방식이 있다.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가 아닌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가 적절하다는 얘기다. 곧, ‘말씀’을 사람처럼 높이기는 어려우니까 ‘있다’에 ‘시’를 붙인 ‘있으시겠습니다’를 쓰는데, 이를 ‘간접높임’이라 한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그 사람과 관련된 사물까지 높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형용사에 높임어미 ‘시’를 넣어 사물을 꾸밀 때가 특히 그렇다. ‘옳은 말씀, 지엄한 분부, 명쾌한 지적 …’으로도 충분하다. 한편으로, 말을 끝맺을 때는 자연스럽다. 아름답습니다/아름다우십니다, 좋겠습니다/좋으시겠습니다, 옳습니다/옳으십니다 …처럼 말이다. 하느님이나 옛날의 임금 등 지극히 높은 이라면 그와 관련된 사물도 높여서 말할 수 있을 터이나 이는 예외다. 현대 들어 우리 높임말법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쪽은 이처럼 겹쳐서 높이거나 그로써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주는 쓰임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뽀록나다 외래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거나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그 거짓말로써 전체적인 상황이 더 좋아지거나 또는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될 때 나쁘 잖은 뜻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정도의 거짓말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살면서 자기 잘못을 덮고자 혹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또 남을 괴롭히고자 배우지 않은 방향의 언행을 하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나라나 사회가 건실하게 유지되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이가 얼마나 많고 적으냐일 것이다. 거짓과 연관된 여러 말 가운데 ‘뽀록나다’ 또는 ‘뽀록이 나다’는 ‘감추어둔 비밀이나 이미 했던 거짓말이 드러나다’ 정도의 뜻으로 쓰이는 비속어 부류에 속한다. ‘뽀록’은 고유어처럼 느껴지지만 일본어 ‘보로’(ぼろ[襤褸])에서 왔다는 주장이 강하다. ‘보로’는 ‘넝마’나 ‘누더기’, ‘고물’이라는 뜻으로 출발해서 ‘허술한 점’, ‘결점’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일본어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보로가 데루’(ぼろが で[出]る)는 ‘단점이 드러나다’는 뜻이 되니, 직관적으로 볼 때 그 뜻이 우리의 쓰임새처럼 번질 수도 있어 보이고, ‘뽀록이 나다’라는 표현과 어휘 구성이 대응된다는 점 때문에 일본어 ‘보로’가 ‘뽀록’의 기원이라고 믿는 듯하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바우덕이 사람이름 세조 10년(1464년), ‘김바회’(金把回)를 비롯한 중국사람 스무 명이 야인에게 잡혀갔다가 조선으로 도망쳐 왔다. 이에 통사 장유화를 딸려 보내 요동에 가서 풀어주도록 했다. 중국 사람이름에도 ‘바회’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옛말 바회는 요즘의 ‘바위’와 ‘바퀴’를 더불어 일컬으며 ‘ㅎ’이 꼭 들어 있었다. ‘바회’가 든 이름에 ‘바회·바회덩이·감바회·먹바회·벌바회·연바회’가 있다. 19세기 들어 ‘바회’(巖)는 ‘바위’가 되었다. 남쪽에서 ‘바우’라는 말이 널리 쓰이며, 경상도에서 ‘방우/방구·바구’, 전라 지역에서 ‘바위옷’을 ‘바구옷’이라 하므로 본디 ‘바구’라는 말에서 ‘바회’, 다시 ‘바위’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바위는 고구려 땅이름에서 ‘바의’, 신라 향가에서는 ‘바호/바오’(岩乎)라 했다. 거문도 동쪽 백도에 가면 ‘매바위·병풍바위·서방바위·쌍돛대바위’들이 있다. 어떤 모양을 이룬 바위너설도 ‘바위’, ‘흔들바위’처럼 떨어져 나온 것도 ‘바위/바윗덩이’라 한다. ‘돌’은 암석을 두루 일컫는다. 대한제국 때 ‘김바우덕’(金巖德)은 미모의 꼭두쇠로, ‘어름산이’(어름사니)로 이름을 떨쳤다. 그를 기린 안성의 바우덕이 축제는 ‘안성맞춤’ 축제가 되었다. ‘길산이·울음산이’에 쓰인 이름접미사 ‘산’이 줄타기 명인인 ‘어름산이’에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허망헙디다 고장말 ‘-수다’나 ‘-우다’가 표준어 ‘-습니다’에 대응하는 제주와 북녘말이라면, ‘-습디다’는 ‘-습니다’에 해당하는 말이다. “방죽 바닥에 물괴기가 기양 막 드글두글 헙디다. 시커매요.”(<혼불> 최명희) “내부둣시요. 뜨거우먼 지가 돌아 안 눌랍디여.”(<한국구비문학대계> 전남편) 표준말에도 ‘-습디다’가 있지만, 전라말 ‘-습디다’와는 다르다. 표준말 ‘-습디다’는 예사높임이지만, 전라말 ‘-습디다’는 아주 높이는 말이다. 표준말에서 ‘-습니다’의 의문형은 ‘-습니까’이지만, 전라말에서는 ‘-습디여’다. “음마, 다래가 폴세 익었습디여?”(<태백산맥> 조정래) “일이나 시길라먼 불릉게 그러겄지맹. 이뿌다고 씰어 줄라고 부를랍디여?”(<혼불> 최명희) ‘-습디여’의 또다른 형태는 ‘-읍딩겨/습딩겨’와 ‘-읍딘짜/습딘짜’다. ‘-습딩겨/읍딩겨’는 주로 전남 서부와 전북 서남부 쪽에서, ‘-읍딘짜/습딘짜’는 진도 쪽에서 쓴다. “아, 열 마리 잡어서 저 되는디 말여 한 마리 안 잡어 줬다고 그 안 잡어 줄랍딩겨?”(<한국구비문학대계> 전북편) “편히 주무셨소? 방일랑 안춥습딩겨?”(위 책 전남편) “그 전에 그 영감님을 사과(사귀어) 갖고 배를 한나 쬐깐한 것을 안 샀습딘짜?” 전남 남해안 쪽에서는 ‘-습디꺄’가 쓰이기도 한다. “은제 배 타고 나가라고 꾸물그리쌉디꺄?” “누가 나를 막을랍디꺄?”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원-달러 언어예절 우리는 돈값을 미국돈과 견준다. 원-달러 환율이 얼마라는 식이다. ‘딸라돈’처럼 ‘급전’을 일컫기도 하고 ‘외화’를 달러로 비유하기도 한다. 오래도록 무역 결제 등의 통화로 삼아 온 까닭에 무척 낯익은 말이 되었다. 아예 ‘원’을 제쳐두고 ‘달러’로만 돈 얘기를 하는 때도 있다. 보유 외환이 2000억달러, 수출액이 3000억달러를 넘어섰다거나, 미국이 거덜난 은행들의 빚잔치를 돕느라 7000억달러짜리 구제금융법을 만들었느니, 국내 은행 지급보증에 1000억달러를 쓴다느니 하는 식이다. 외국돈 단위를 쓸 때는 우리돈으로 셈하여 보여주는 게 도리다. 1달러에 1300원으로 쳐 7000억달러면 910조원이니 우리 내년 예산 273조원의 세 곱절이 넘는 액수다. 오래 미국에 살다 왔거나 달러 거래를 자주 하는 사람은 익어서 무심코 달러를 들먹일 터이고, 어떤 이는 일부러 쓰기도 한다. 무심코든 일부러든 그 결과는 무섭다. 우리도 ‘원’을 버리고 ‘달러’를 쓰자는 주장이 그렇다. 환율도 출렁여 헷갈리는데다 이중적인 금융생활을 하느니 그게 낫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도 ‘미국’이 되자는 말과 같다. 사실 우리는 요즘 너무 많은 달러 지식과 정보에 시달리고 있다. 평생 달러로 물건 한번 산 일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 나라에서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익숙함은 점차 제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경계할 일이다. 스스로 버티고 이겨내지 않으면 넘어지고 휩쓸리기 마련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두루미 짐승이름 “천 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난다./ 천 년을 보던 눈이/ 천 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노나.”(학·서정주) 고구려 옛무덤에는 신선들이 학을 타고 다니는 벽화가 있다. 천 년을 살면 흰빛이 푸른빛으로 바뀌어 청학이 되고, 다시 천 년을 살면 검은빛으로 바뀌어 현학(玄鶴)이라 한다. 지리산에 가면 청학동이 있다는데, 그 청학이 산다는 곳이다. 상투를 틀고 전통적인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교육의 터전으로 알려진 현재의 청학동과 세상을 버린 이들의 보금자리이자 예부터 전해오는 이상향으로서의 청학동이 같은 곳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두루미의 옛말은 ‘두로미’(사성통해)였다. 두로미가 두루미로 바뀌어 쓰인다. 일본말로는 ‘쓰루’(鶴)이니 ‘두루-쓰루’가 대응됨을 알겠다. 우리말 ‘두루’가 건너가 ‘쓰루’(turu)로 굳어진 형태일 수 있다. 뚜루루 운다고 또는 두루 멀리 다닌다고 두루미라는 풀이도 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매우 날카롭고 위엄 있게 들릴뿐더러 흰 날개가 두루마기를 걸친 선비 모습과 같아 보인다. 머리는 붉고 검은 벼슬을 한 듯 고고하다. 먼 하늘을 소리와 품새를 두루 갖추고 유유히 날아가니 이를 뭉뚱그린 데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오늘도 두루미들은 하늘 어디쯤서 가을을 비끼어 날고 있을 텐데.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간지 외래어 요 몇 해 젊은 누리꾼들 사이에 ‘간지’라는 생소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주로 다른 말과 붙어 다닌다. ‘간지 나다’, ‘간지 패션’, ‘간지 스타일’ 따위가 몇몇 누리집에서 자동 완성 기능의 대상으로 등장할 정도다. 젊은이들을 주로 상대하는 인터넷 옷가게 중에는 광고 문구에 ‘간지’를 대놓고 쓰는 곳도 보인다. 여기서 ‘간지’는 ‘멋스러움’, ‘특이한 멋이 있음’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간지’는 ‘느낌·기분·감각’ 등을 뜻하는 일본말 ‘간지’(感じ, かんじ)에서 왔다는 설이 강하다.(그런데 정작 일본말에서는 이런 뜻으로 ‘간지’를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런 설 가운데 그럴듯한 하나가 ‘일본풍이다’란 뜻으로 ‘간지필(かんじ+feel)이 있다’ 정도의 표현이 먼저 등장했고, 그 다음에 뜻이 변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말을 꽤 잘 아는 이가 만들어낸 말이 퍼진 것일 테다. 우리가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과 일본말에 대해 지니고 있는 거부감을 고려해 보면, 정작 더욱 큰 문제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많은 이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일본말 기원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순전한 창작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낮지 않을까. ‘멋지다’는 뜻으로 최근에 생긴 젊은이들의 말로 ‘쌔끈하다’가 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폼 나다’라는 말을 썼다. 쓰임새가 많은 말은 자꾸 바뀌나 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