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새 짐승이름 “솔새들이 솔가지에 옹기종기 마주앉아/ 짹짹 짹재글 짹짹 짹재글 노래를 한다.// 솔새들이 숲속에서 다정하게 마주앉아/ 짹짹 짹재글 짹짹 짹재글 이야기 한다.// 아빠 솔새 짹재짹 즐겁게 짹재글/ 노래소리 짹재짹 즐겁게 짹재글// 호수 같은 파란하늘 흰 구름 지나서/ 솔새들의 노래 소리 퍼져간다.”(동시, 이슬기) 소나무숲에 가노라면 짹째글대며 바쁘고 빠르게 솔새들이 날아다닌다. 새 중에서도 작은 새가 솔새다. 어찌 보면 큰 솔방울만 하기도 하다. 솔새들은 즐겁게만 우짖는 것인가. 때로는 먹잇감 걱정에, 아기 솔새가 아파서, 더러는 아빠 엄마 솔새가 아파서, 너무 춥거나 더워서 울겠지. 우리들 눈에는 그저 새들이 노래하는 것으로만 보일 수가 있다. 산솔새는 우리나라 높은 산이나 울창한 숲에 사는 아주 작은 새로 몸길이가 12㎝ 정도다. 솔새붙이 중에서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한 새이자 광릉, 설악산, 함백산 등 높은 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산솔새는 쇠솔새와 함께 깃털 빛이 녹색을 띠며 눈 위에 흰 눈썹이 있는 것이 두드러져 보인다. 하루에 백여 마리 안팎의 벌레를 잡아먹는 까닭에 숲에 이로운 새다. 울긋불긋 크고 아름다운 새들에 묻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거나 잘 기억되지 않으나 솔새라서 솔숲을 찾고 저마다 고운 소리로 온누리를 노래한다.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사파리 외래어 간혹 춥다고 하여도 한겨울의 추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때에 어느덧 이르렀다.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누런 먼지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겨우내 갇혀 지냈던 아이들은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 가자고 부모를 조를 준비가 이미 되어 있을 터이다. 동물원을 겸하는 놀이공원에 가면 대개 사파리가 있다. ‘사파리’(safari)는 원래 아프리카 스와힐리 말에서 ‘여행’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영어로 들어가 아프리카 지역(주로 동부)에서 자동차에 천막·무기·탄약·식량 등 야생 짐승을 잡는 데 필요한 장비들을 싣고 장기간에 걸쳐서 다니는 수렵 여행을 일컫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말의 쓰임을 넓혀서 ‘인도 사파리’(인도 수렵여행), ‘사파리 랠리’(아프리카 장거리 자동차경주) 등으로 썼다. 지금은 ‘사파리 투어’(safari tour)라는 표현도 쓰이므로 ‘사파리’에 원래 있었던 여행이라는 뜻은 영어에서 꽤 약해진 듯하다. 우리는 오늘날 ‘사파리 구경 가자’, ‘사파리에 다녀왔다’라고 말하니 야생 환경처럼 꾸민 너른 공간에 풀어 키우는 여러 짐승들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구경할 수 있도록 꾸민 공원을 일컬어 ‘사파리’라고 주로 부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파리를 하였다’는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으므로 여기에 ‘여행’이라는 뜻은 부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몰로이 사람이름 아비의 묘를 파고 주검을 꺼내어 불사른 일은 사형(참부대시)에 해당한다. 중종 20년(1525년), 온양 사는 ‘몰로이’(毛乙老伊)의 일을 어찌 해야 옳으냐고 임금이 물으니, 중들의 사특한 말을 듣고 그리한 것인데, 풍속을 크게 해칠 일이니 마땅히 법대로 해야 한다고 권균이 아뢰었다. ‘몰로이’에 가까운 이름에 ‘몰로·몰로리’가 있다. 야인 이름 ‘몰오’(毛乙吾) 또한 ‘몰로’에 잇닿은 듯하다. ‘몰로리’를 ‘몰오리’(毛乙乎里)로도 적고 있다. ‘몰로이/몰오’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 알 길이 없다. 비슷한 이름에 ‘모론이·모롱이’도 있다. ‘몰’이 든 이름에 ‘몰개·몰동이’가 있는데, 몰개는 ‘모래’에 해당하고, 고장에 따라 ‘모새’라고 하며, 가는 모래를 이르는 말이다. ‘몰로’ 비슷한 말에 ‘모로’가 이름에 쓰였다. ‘모로덕이·모로동이·모로분이·모로비·모로쇠’에서 확인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햇무리 또는 달무리를 ‘모로’라고도 한다. 비슷한 말 ‘모루’는 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다. ‘모로쇠’는 모루처럼 아마도 머리 모양이 앞짱구·뒤짱구였을 수도 있다. 청문회나 어떤 사건에서 모른다고만 하는 ‘모르쇠’는 본디 짱구였을까? ‘몰로이’ 부친께 ‘몰로이’가 무슨 말인지 함께 여쭙고 싶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가댔수? 고장말 ‘-댔-’은 표준어 ‘-었/았-’에 대응하는 고장말이다. ‘-댔-’은 사건·행위가 과거에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토인데, 주로 평안·황해 지역에서 쓰인다. “인민군대에 나간 외아들이 전사한 뒤 로인 내외가 외롭게 살댔는데 집이 무너져 한지에 나앉게 되여 ….”(<해당화 피는 땅> 김영선·북녘작가) “좀 전에 남옥 동무가 찾댔는데 ….”(<그마음 별빛처럼> 권형운·북녘) ‘-댔-’은 ‘-다고 했-’에서 온 말이다. 그래선지 ‘-댔-’에는 인용 뜻이 담겼다. “아저씬, 내가 98킬로 나갈 때두 예쁘댔던 사람이잖아.”(<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북녘에서 나온 <조선말대사전>에서 ‘-댔-’은 고장말 아닌 문화어로 올랐다. <조선말대사전>에서 ‘-댔-’은 ‘-았댔-’ 혹은 ‘-었댔-’과 같은 꼴로 쓰여 ‘겪었던 사실을 돌이켜 말할 때’ 쓰이는 토로 풀이돼 있다. ‘-댔-’이 ‘-다고 했-’이 줄어든 말이라면, ‘-었댔-’은 ‘-었다고 했-’이 준 말이다. “너희들 오늘 만경봉에 올라갔댔지?”(<조선말대사전>) “동무네는 간밤에 어디 갔댔나? 이기겠다구 무던히 악을 쓰더군.”(<경쟁> 석윤기·북녘) ‘-았댔-’은 강원과 충북 쪽에서도 쓰임을 찾아볼 수 있다. “산이 좀 짚어서 물이 언제든지 떨어지지 않았댔어요.”(<한국구비문학대계> 충북편) “치매를 뒤집어쓰고 거가 빠져 죽었댔어요.”(위 책, 강원편)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일자리 언어예절 우리말 중에 ‘일’은 드물게도 열 가지 넘는 뜻으로 번져 쓰인다. ‘무엇을 만들거나 이루고자 들이는 몸과 마음의 품’이 본디 뜻이다. 일을 한다는 건 사람노릇을 한다는 말이고, 살아가는 방편이면서 권리요 의무며, 사회를 지탱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어떤 쪽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자본주의 나라의 실업자들’이라고 비웃기도 하고, 돈 놓고 돈 먹다 세상을 온통 구렁텅이에 빠뜨리고도 애써 저 단맛을 되살리려는 주의자들이 많다. 어떤 사회나 품을 주고 삯을 받는 일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품을 파는 쪽은 품삯을, 품을 사는 쪽은 그 생산물로 이익을 챙긴다. 경영도 품팔이도 못할 지경이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왔는데, 이런 빚잔치가 얼마나 오래가고 자주 닥칠지 알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이 지경을 부른 데 전혀 무관한 이들이 하릴없이 당하는 것도 억울하려니와 저 잘난 전문가·정치인·선생들은 또 어디서 무얼 하나? 우리가 쓰는 잡탕말 중에 풀이가 필요없는 말이 일자리다. 어느 장관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잡셰어링 사업을 외환위기 당시 금모으기 운동 차원의 국민운동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제 와서 눈물겹게 장롱 속 아이 돌반지를 내놓을 국민도 드물겠지만, 기업 프렌들리, 잡셰어링 따위를 들먹인다고 일자리가 생기나. 일거리나 일감을 나눈다면 몰라도. 일자리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줄이고 늘리고 만드는 것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엘레지 외래어 1950년대 말에 등장해 서민의 애환을 주로 노래하여 사랑을 받은 한 원로 가수가 무대에 선 지 50년이 지났다고 한다. 주로 부른 노래의 서글픈 곡조와 가사 때문에 그분의 별명이 ‘엘레지의 여왕’인데, 이런 별명이 붙고서 같은 제목의 자전적 영화가 만들어져 67년에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같은 제목의 노래가 이 영화의 주제가로 쓰였다. ‘엘레지’는 프랑스말 elegie의 우리식 표기다. 기록을 보면 60년대와 70년대 사이에 이 말을 넣은 가요 제목과 가사가 꽤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표기는 지금과 달리 ‘엘리지’도 쓰였다. 나름대로 영어 elegy에 더욱 가깝게 표기하려고 했던 때문인 듯하다. 그렇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영어 elegy는 발음에 따라 ‘엘러지’라고 적는다. 물론 프랑스말을 받아서 이미 ‘엘레지’라고 쓰고 있으므로 굳이 영어식 ‘엘러지’를 쓸 일은 없어 보인다. 이렇듯 예전과 지금의 표기가 다른 외래어나 외국어가 꽤 많다. ‘엘레지’는 비가(悲歌), 또는 애가(哀歌)로 번역되는데, 원래는 ‘슬픔의 시’, ‘애도의 시’를 뜻하였으나 서양에서 18세기 무렵부터 슬픔을 담아내거나 나타내는 악곡의 제목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헨델의 <이스라엘인의 비가>, 마스네의 <세 여신의 비가>, 포레의 <엘레지> 등이 유명하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먹어시냐 고장말 ‘-어시-’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가 끝났음을 나타내는 제주말로, 표준어 ‘-었-’에 대응한다. “쌀 뒈라도 보내여시민 ….”(<제주어사전>) “익어시냐 점 설어시냐?”(<한국구비문학대계> 제주편) 표준어 ‘-었-’은 어떤 상태가 지속됨을 나타내는 ‘-어 잇다’의 ‘-어 잇-’이 ‘-어 잇>엣>엇>었-’과 같은 변화를 겪은 형태다.(예 니르러셔 머믈어 잇더니·소학언해) 마찬가지로 ‘-어시-’ 또한 ‘-어 시다(있다)’의 ‘-어 시-’가 ‘-어시-’로 굳어진 것이다. ‘-어시-’가 ‘-어 시다’에서 온 말이기에 ‘-어시-’는 ‘-어 있-’의 뜻으로도 쓰인다. “자인 문도에 앚앗저(<아 시저)”(저 아이는 문턱에 앉아 있다) “가인 애기 업엇저(<업어 시저)” 과거를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었-’이 상태의 지속을 나타내는 경우는 다른 지역 고장말에서도 나타난다. “여그다 채리놓고 우리는 그늘 밑이 가서 숨어 앉었자.”(<한국구비문학대계> 전북편) “누었어 봐.”(누워 있어 봐·충남) ‘-어시-’의 또다른 형태는 ‘-아시-’다. ‘-아시’는 ‘ㅏ’나 ‘ㅗ’와 같은 양성모음 뒤에서 쓰인다는 점이 ‘-어시-’와 다르다. “주천강 연해못디 물올랭이 쌍이 앚아시나네.”(주천강 연해못에 물오리 한 쌍이 앉았네) “지금 살아시민 백스믈여섯쯤 났주.”(<한국구비문학대계> 제주편)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말할 자격 언어예절 청렴·결백은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이 큰 덕목으로 삼던 말이다. 탐욕을 부리자면 그럴 수 있는 권력자들이 그러잖고 살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벼슬을 오래 지키려는 방편이었대도 어디 탐관오리에 비기랴. 그러고 보면, 조선 500년에 청백리 218명은 적은 수가 아니다. 부자 되기를 제일로 치는 요즘, 청렴과 실력을 갖춘 공직 후보자를 찾기 어려운 것은 비극이지만, 한편으론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저 부정·불법·비리가 좀 덜하면 봐주는 데까지 이르고, 재산 많고 적음은 뒷전이다. 그만큼 청빈이란 낡은 말이 돼 버렸나? 세상살이에 권장할 큰 덕목을 내세우자면 역시 청빈일 성싶다. 덜 벌고 덜 쓰고 덜 먹는 삶, 그런 사회에 걸맞은 물건을 만들자는 운동과 제도 굳히기가 쉬울 리는 없다. 오래 더불어 살 큰길인데도. 그렇다면 누가 있어 깨끗하게 살라고 말하고 가르치겠는가? 스스로 그래야 남에게도 그리하라고 말할 자격이 생긴다. 그래야 듣는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발이 먹힌다. 하지만 모든 이가 떳떳하기는 어렵다. 아쉽지만 옳은 일이 뭔지 정도만 안다면 그것으로도 최소한 말할 자격은 생기는 것으로 봐야겠다. 부모가 자식한테, 교사가 제자한테, 어른이 아이한테, 선배가 후배한테, 벗이 벗한테 깨끗하고 맑게 살라고 얘기할 수 있으면 장차 그 겨레는 밝을 터이다. 누구든 청렴까지는 몰라도 자신을 돌보는 염치만큼은 각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