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바루기] 차후, 추후 무더위가 시작된 8월의 어느 날, 민규 집에선 가족회의가 한창이다. 안건은 에어컨 교체 문제. 찬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며 툴툴대는 민규와 한 달 뒤면 가을인데 참아 보라는 어머니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일단 수리해 보고 '추후' 이 문제를 재논의하자는 안을 냈다. 하지만 민규는 '차후' 열심히 공부할 테니 에어컨을 바꿔 달라고 떼를 썼다. 민규 가족은 회의 중 '차후'와 '추후'라는 표현을 썼다.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차후(此後)는 '지금부터 이후'를 가리키는 말로 지금이 포함되고, 추후(追後)는 '어떤 일이 지나간 얼마 뒤'를 일컫는 말로 지금이 포함되지 않는다. 막연하게 '나중' '다음'을 뜻하는 '추후'와 달리 '차후'는 기준 시점이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규가 언급한 '차후'는 자신이 말한 시간 이후엔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가 되고, 아버지가 말한 '추후'는 에어컨 수리 이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체 문제를 다시 의논해 보자는 뜻이 된다. 이처럼 '추후'는 시점이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니므로 "장소는 추후에 다시 정하기로 했다" "세부 사항은 추후 결정토록 하자" "날짜는 추후에 알려 주겠다"와 같이 과거.현재.미래 시제의 어느 문장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 '차후'는 "차후에는 그곳에 가면 안 된다" "차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다"처럼 현재부터 앞으로의 의미가 있을 때만 쓰인다.
Board 말글 2012.06.15 바람의종 R 19201
[우리말바루기] 주어와 술어를 가까이 "그런 만큼 ①국민들은 앞으로 제기될 각종 현안에 대해 ②헌재가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③결정을 하는지를 늘 ④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⑤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일간지에 실린 문장이다. 한 문장인데 호흡이 꽤 길고, 주어와 술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문장 안에 또 다른 문장을 안고 있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빨리 와 닿지 않는다. 더구나 이 문장엔 주어가 하나 빠져 있다. 문장의 얼개를 자세히 살펴보자. 주어 ②(헌재가)의 서술어는 ③(결정을 하는지)이 되고, 이 문장(②+③)을 목적어로 하는 주어 ①(국민들은)의 서술어는 ④(지켜보고 있다)가 된다. 그렇다면 술어 ⑤(잊지 말아야)의 주어는 무엇이며 어디 있는가. 없다. ⑤의 주어는 문맥으로 보아 '헌재'가 되어야 하므로 ⑤ 앞에 주어 '헌재는'을 넣어야 한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쓰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그런 만큼 앞으로 제기될 각종 현안에 대해 헌재가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결정을 하는지를 국민들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헌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장이 길어질 경우 주어와 술어를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파악하기가 수월하다. 또는 예문과 같은 복문(複文)일 경우 이해하기 쉬운 몇 개의 단문(單文)으로 나누는 것이 좋다.
Board 말글 2012.06.15 바람의종 R 11798
[우리말바루기] 노력했지마는 / 노력했지만은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은' 이번 시험에서 성적이 좋지 않다." "다른 사람이 모두 떠나도 '나만은' 이곳에 남겠다." 앞의 두 예문에서 첫 문장의 '노력했지만은'은 조사 '만은'을 잘못 표기했다. '마는'이라고 써야 옳다. 둘째 문장에서의 '나만은'은 조사 '만은'이 올바로 쓰였다. 이처럼 '마는'과 '만은'은 혼동하기 쉽다. 특히 '마는'을 써야 할 자리에 '만은'을 쓰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이는 '마는'의 준말로 '만'이 쓰이기 때문인 듯하다. '마는'은 종결어미 '다, 냐, 자, 지' 따위의 뒤에 붙어 앞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문이나 그와 어긋나는 상황 따위를 나타내는 보조사다. "영화를 보고 싶지마는(만) 시간이 안 난다/ 노력은 가상하다마는(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처럼 대부분 '만'으로도 줄여 쓸 수 있다. '만은'은 두 조사 '만'과 '은'이 결합된 형태다. 여기서 '만'은 생략해도 기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열 장의 복권 중에서 하나만은(하나는) 당첨돼야 한다"). 그러나 '은'을 생략하면 안 된다.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는'과 '만은'은 쓰임이 서로 다르다. 특별한 쓰임은 제외하고, 어미 다음에는 '마는'으로 적고, 명사 다음에는 '만은'으로 적는다고만 기억하면 쉽다.
Board 말글 2012.06.14 바람의종 R 9464
[우리말바루기] 중계(中繼)와 중개(仲介) 중계(中繼)와 중개(仲介). 발음도 비슷하지만 '둘 사이를 잇다'는 의미도 비슷해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둘은 의미를 구분해 써야 한다. 중계는 '중간에서 이어주다'는 뜻으로 "산간 지대에서는 사단과 대대, 대대와 중대 사이의 교신이 잘 안 되니까 중계 역할을 하는 곳이 필요하다"와 같이 사용된다. 또 '라디오 중계' '텔레비전 중계' '스포츠 중계'에서처럼 중계방송을 의미할 때도 쓰인다. 중개는 둘을 이어주긴 이어주되 '제삼자로서 두 당사자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부동산 중개' '중개 수수료'에서처럼 '소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사용된다. 경제용어 중에는 '중계무역'과 '중개무역'이 모두 있는데 각각 다르게 쓰인다. '중계무역'은 '다른 나라로부터 사들인 물자를 그대로 제삼국으로 수출하는 형식의 중간(통과) 무역'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중개무역'은 '수출국과 수입국 간의 무역 거래에 제삼국의 무역업자가 개입해 화물을 이동시키고 대금 결제의 당사자가 되는 무역 형태'를 나타낸다. 실제로 한국의 어떤 회사가 중국 회사의 제품을 수입해 미국 회사로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한다면 이는 '중계무역'이 된다. 그러나 직접 계약을 맺지 않고 중국 회사와 미국 회사가 서로 계약하는 것을 돕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다면 '중개무역'이 된다.
Board 말글 2012.06.14 바람의종 R 9394
[우리말바루기] '상(上)' 띄어쓰기 우주에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지 못한다. 컵을 기울여도 물이 입 안으로 쏟아지지 않고 허공에 방울져 떠다닌다. 사실상 컵에 따르는 일조차 힘들다. 총처럼 생긴 도구로 물을 입속에 뿌리거나 빨대로 마실 수밖에 없다. 우주 공간에선 '지구 상'에서와 같은 중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 위'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지구 상'이란 표현을 쓴다. 이때 많은 사람이 '상'을 앞말에 붙여야 할지, 띄어야 할지 망설인다. 어떤 게 맞을까? "호주에는 지구 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생물 수십 종이 산다" "지구 상의 물은 97%가량이 해수로 이뤄져 있다"처럼 '상(上)'이 물체의 위나 위쪽을 뜻하는 말일 때는 앞의 단어와 띄어 쓰는 게 맞다. "주요 도로 상의 통화 품질을 점검하고 있다" "도로 상의 각종 불법행위를 단속한다" 등에서의 '도로 상'도 마찬가지다. '하(下)'와 반대되는 개념이므로 띄어야 한다. 그러나 '상(上)'을 모두 띄어 쓰는 건 아니다. "인터넷상의 선거법 위반 사례" "낙뢰에 따른 통신상의 오류" "전설상의 동물로 알려진 이무기"와 같이 '하(下)'와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 또는 추상적 공간에서 갖는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사로 사용됐을 경우에는 앞말에 붙여 쓴다. '관계상' '미관상' '사실상' '외관상' '절차상' '법률상'처럼 일부 명사 뒤에서 '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사로 사용할 때도 붙여야 한다.
Board 말글 2012.06.13 바람의종 R 10899
[우리말바루기] 가능하느냐 / 가능하냐 "그런 장면을 보면 기쁘느냐"와 "그런 장면을 보면 기쁘냐" 중 어느 것이 옳은가라고 물으면 우리나라에서 자란 사람은 직관적으로 바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어느 쪽이 옳은지 잘 모를 때는 품사를 따져봐야 한다. 다음 예문은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잦은 것들이다. 어떤 것을 써야 할지 골라 보자. "정책 방향은 옳다. 문제는 시기가 적절하느냐/적절하냐다." "이 영어 시험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느냐/가능하냐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왜 그가 그런 소란을 일으켰는지 알겠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저리다는 것이 이 경우에 어울리는 말이다." "보충학습이 너무 모자라다/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코미디언은 예쁘다는 말보다는 웃기다/웃긴다는 말이 더 좋다고 했다." 동사 어간(먹고, 먹는, 먹으니의 '먹-'처럼 활용할 때 변하지 않는 부분) 다음에는 '-느냐'를 쓰고, 형용사 어간 다음에는 '-냐'를 쓴다. '적절하다' '가능하다'는 형용사이므로 '적절하냐' '가능하냐'로 활용하는 게 옳다. 또 현재 사건이나 사실을 서술할 때 형용사에는 '-다'를 쓰고 동사에는 '-ㄴ다'를 쓴다. '저리다'는 형용사이고 '모자라다' '웃기다'는 동사다. 따라서 예문에서는 '저리다' '모자란다' '웃긴다'로 쓰는 게 옳다.
Board 말글 2012.06.01 바람의종 R 10492
[우리말바루기] 후덥지근 / 후텁지근 지난주에 나간 '무더위/불볕더위' 글 가운데 '무더위는 일반적인 더위와 달리 물기가 많아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더위를 가리킨다'는 부분의 '후덥지근하게'는 '후텁지근하게'가 맞는 표현이 아니냐고 독자께서 문의해 오셨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후덥지근하다' '후텁지근하다' 모두 맞는 말이다. 과거에는 '후텁지근하다'만 표준어로 인정했으나 1999년 10월 발행된 표준국어대사전이 '후덥지근하다'도 함께 올려놓음으로써 둘 다 표준어가 됐다. '후덥지근하다'도 널리 쓰이고 있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과거 사전의 기준에 따라 '후덥지근하다'는 '후텁지근하다'의 잘못이라는 자료가 책이나 인터넷 등에도 많기 때문에 아직까지 '후덥지근하다'를 쓰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후덥지근하다'와 '후텁지근하다'는 의미상 크게 차이가 없다. '후텁지근하다'가 좀 더 센말이라 볼 수 있다. '후더분하다' '후터분하다'도 마찬가지다. 이와 비슷한 복수표준어로는 '덥수룩하다'와 '텁수룩하다'가 있다. 이 역시 과거에는 '텁수룩하다'만 맞는 것으로 취급했으나 '덥수룩하다'도 새로이 표준어로 인정했다. 소고기.쇠고기, 고린내.코린내, 구린내.쿠린내, 나부랭이.너부렁이, 고까.꼬까, 꺼림하다.께름하다 등도 복수표준어다.
Board 말글 2012.05.30 바람의종 R 12038
[우리말바루기] 조언과 충고 "소가 도랑에 빠졌다면 일단 건져 내라. 그런 다음 소가 왜 도랑에 빠졌는지 원인을 찾아내 다시는 도랑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라." 제록스의 앤 멀케이 회장은 파산 직전의 회사를 살릴 때도, 인생의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도 한 동료 기업인이 들려줬던 이 얘기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떠올렸던 동료의 말은 '조언'이었을까, '충고'였을까. 어떤 말을 써도 무방할 것 같지만 동료가 건넨 말은 '충고'보다는 '조언'에 가깝다. 허물을 집어 잘 알아듣도록 말해 준다기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에 뭔가 도움이 되도록 일러 주는 것이므로 '조언'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충고(忠告)'는 남의 결함이나 잘못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 '조언(助言)'은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 돕는 것을 이른다. "아이의 거짓말하는 버릇을 고쳐 줄 때는 흥분하지 말고 침착한 태도로 거짓말하는 건 나쁜 행동이란 점을 분명히 충고해 주는 게 좋다" "그는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위기를 넘기기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조언했다"와 같이 쓰인다. 두 단어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충고'는 상대방의 그릇된 점이나 흠을 고치도록 말해 준다는 데, '조언'은 상대가 더 나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필요한 것을 적절히 일깨워 준다는 데 초점이 있다.
Board 말글 2012.05.22 바람의종 R 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