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1%의 가능성을 굳게 믿은 부부 - 릭 겔리나스 통닭구이가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 중국속담 나는 아내 린다와 함께 마이애미 플로리다에서 '작은 도토리'라는 자신감 향상 프로그램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어느날 우리는 샌디에고에서 개최되는 교육 회의의 안내문을 받았다. 그것을 다 읽은 후에 우리는 그곳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럴 수 있을지 막막했다. 사업 초창기였기 때문에 우리는 집에서 일했고 저금을 거의 다 써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여비를 비롯한 다른 경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든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나는 샌디에고 회의 주최측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두 장의 무료 참석권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린다에게 회의 참석권이 생겼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잘됐어요! 하지만 우리는 마이애미에 살고, 회의는 샌디에고에서 열리잖아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 우리에게는 비행기 표가 필요했다. 나는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스티브 퀸토 사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마이애미에서 샌디에고까지 비행기표 두 장을 요청했다. 그는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지 그뿐이었다. 즉각적인 승낙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저에게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나는 사람들이 요청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을 위한 최선의 일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 최선의 일이란 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데, 지금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런 기회를 주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얼이 빠진 채 그에게 인사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비행기표가 생겼어." 그녀가 말했다. "잘됐어요. 그런데 어디서 묵지요?" 다음에 나는 마이애미 시내의 홀리데이 인 호텔에 전화를 걸어서 본사의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 홀리데이 인 호텔의 본사가 테네시 멤피스에 있다는 말에 나는 테네시로 전화했다. 그쪽에서는 캘리포니아 지역 홀리데이 인 호텔 전부를 총괄하는 샌프란시스코 담당자를 일러줬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귀사의 호텔에서 사흘 동안 공짜로 묵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샌디에고 시내에 새로 오픈한 호텔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괜찮겠는데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미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호텔은 회의가 개최되는 대학 캠퍼스에서 35마일이나 떨어졌기 때문에 두 분께서 교통수단을 마련하셔야 할 겁니다." "말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교통편을 마련하겠소.'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통화를 마친 다음에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는 회의 입장권과 비행기표와 잘 곳이 있어. 이제 필요한 것은 호텔과 회의장을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그리고 나는 내셔널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고 우리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말했다. "신형 올드 88모델은 어떻겠습니까?"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하루만에 모든 일을 다 처리했다. 우리는 회의 기간 중에 그럭저럭 식사를 때웠지만 결국 가진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나는 회의가 끝나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반 회원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음 말을 덧붙였다. "지금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분들의 신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약 50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두 말할 나위없이 멋진 식사 대접을 받았다.
Board 추천글 2022.08.29 風文 R 1668
국어와 국립국어원 한글날 기념, 따분한 얘기 하나 하자. ‘국어’라는 말은 공용어인 한국어를 뜻하지만, 쓰임새를 보면 밀가루 반죽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국어 실력’이라 할 때 ‘국어’는 ‘어휘력, 표준어, 띄어쓰기, 맞춤법, 어법’을 연상시킨다. ‘국어사전’에서 ‘국어’는 주로 단어들이다. ‘국어국문학과’에서 ‘국어’는 ‘문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국어학 전공을 뜻한다. 국어학자와 국문학자는 소장수와 꽃장수만큼이나 다르다. ‘국문과’라 줄여 말하는 데에는 문학의 주도권이 배어 있다. 반면에 ‘국어 교사’가 가르치는 ‘국어’는 한국어를 매개로 한 말글살이를 모두 아우른다. 수능에서도 ‘국어 영역’은 ‘화법, 작문, 문법, 독서, 문학’을 다 포함한다. 따분한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국어 발전과 국민의 언어생활 향상을 위한 기관인 국립‘국어’원의 기능을 문제 삼기 위해서이다. 국립국어원은 문학과 대칭되는 좁은 ‘국어’, 국어학자들의 ‘국어’에 머물러 있다. 국어기본법에 실린 ‘국어능력’은 ‘국어를 통하여 생각이나 느낌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듣기·말하기·읽기·쓰기 능력’이다. 그야말로 ‘문해력’(리터러시)이다. 말귀를 알아듣는 역량이자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글의 내용에 자신의 경험과 배경지식을 연결시켜 추론하고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문해력을 사회적 과제이자 교육정책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중간지대나 숙려기간 없이 진영과 세대로 갈려 대립하는 소통 환경에서는 문해력 격차 해소와 공공성 확보가 더욱 절실하다. 국립국어원은 문해력 증진 기관이다. 왜 “처음 대답하는 사람이 중요해요. 강○○!” “예.” “아니, ‘예’ 말고 ‘응’이라고 해봐요. 겁내지 말고.” “…… 응.” “잘했어요.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나는 출석을 부를 때 학생들에게 반말로 대답하라고 ‘강요’한다. 괴팍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지만, 잔재미가 있다. 그러다가 스무 명쯤 지나면 강도를 한 단계 높인다. “평소에 엄마 아빠가 부르면 뭐라 했는지 생각해서 대답해 봐요. 자, 용기를 내요. 박○○!” 머뭇거리며 답한다. “왜!!”(내키는 대로 해보라고 하면 가끔 간이 많이 부은 학생이 ‘오냐’라고 해서 응급실에 보내기도 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수업에서 반말로 대답하는 걸 갈고닦아 딴 강의에서 엉겁결에 ‘왜’라고 하여 낭패를 당했다는 미담을 듣는 것입니다. 낄낄낄.” 말은 명령이다. ‘예’와 ‘응’과 ‘왜’를 언제 써야 하는지 가르친다. 어기면 돌을 씹은 듯이 불편해한다. 그래서 ‘반말 놀이’는 규율을 깼다는 짜릿한 해방감도 느끼게 하지만,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명령의 체계(말의 질서) 속에 내가 던져져 있음을 무겁게 확인하게도 한다. 다만 말이 만든 경계선을 놀이처럼 한 번씩 밟고 넘어감으로써 그 질서를 상대화한다. 말은 피할 수 없으니 더욱 의심해야 하는 질서다. 부풀려 말하면 선생에게 ‘왜’라고 답해본 학생들은 시대에도 항의할 수 있다. 그러니 긴장들 하시라. 말에 속지 않고 ‘왜? 왜 그래야 되는데?’라며 달려드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속출할 것이다. 권력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상상력에 뿌리박은 채, 야금야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병에 대하여 문득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낀다. 몇 차례씩이나 근심스러이 손을 머리에 대어 본다. 그렇다면 머리도 좀 더운 것 같다. 드디어 병은 찾아 온 것일까? 한동안 앓지 않았으니 병도 올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억울하기는 하나 조용히 누워 몸을 풀어 버리는 것도 무방하겠지. 진실로 병은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보아도 그럴 리가 없는 데 이 이상은 그러나 어인 까닭이뇨? 하여간 병의 심방이 틀림없음을 우선 확증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므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전의 건강 상태와 현재의 증상을 혼자서 묵묵히 비교하여 보곤 한다. 원래 인생이란 순순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흔히는 괴롭고 또 재미조차 없는 물건인데, 이 위에 병까지 뒤집어쓴다면 어이하나?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가 마음에 결려 실로 걱정이 아닐 수 없으나, 일단 찾음을 받은 병은 일종 불가항력에 속하므로 내 힘만으로 물리칠 도리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병은 여기 찾아왔는지라 백사를 제지하여 관념의 눈을 감고 하여간에 병상에 몸을 이끌어 털썩 누우매 일시에 셀러에 이른바 '형이상학적 경쾌'가 퇴각을 개시함은 물론이요, 또 공동생활에 의하여 연계되었던 이제까지의 사회적 관련으로부터 졸연한 이탈이 강요되는 데서 유래하는 병상의 기묘한 고독과 무력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일종의 향락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병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니, 오슬오슬 오한에 떨리는 몸과 뻐근히 저리는 사지 속에서 잔잔한 세류 비슷이 한 갈래 흘러 오르는 병적 쾌감은 말할 수 없이 유수하고 몽환적인 나라로 병자를 인도하여 간다. 영영 축축, 악착한 이 세상에 초연히 누운 이 통쾌한 묵살, 이 초현실적 안정, 이 풍부한 시간, 장차 어찌 될지 병의 귀추가 물론 적이 걱정이야 걱정이지만 이왕 걸린 병인지라 할 수 없는 일이잖느냐, 불평 불만의 정을 품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므로 오로지 미지의 우인 병 그 자체의 음성에 경청하기로만 결심한다. 병은 실로 한 심방자와도 같으니, 그는 대체 나로부터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일까? 또 병은 한 여행과도 같으니 대체 나는 어디로 향발하여야 될 것일까? 또 병은 무엇을 경고하려는 한 친구와도 같으니 그는 말하는 것이다. '주의를 해야 되네. 이러한 곳에 자네의 결함이 있는 것이니 잘 좀 생각하고 반성해야만 된단 말일세.'라고 우정 찾아와서 병우에게 이 같은 충고를 하며 또 여행의 길로 나서게 하는 한 친구의 정의를 우리는 물리쳐야 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심방을 진심으로 감사하여야 될 것이니, 우리는 다만 여장을 준비하고 조용히 길을 떠나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지가 어디며 거리가 어느 정도이며, 또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모르는 아득한 꿈길의 출발임은 두말할 것이 없으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도자의 뒤만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사람은 병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하여 이 병에 대한 인식, 그 속에 실로 건강시에는 예상하지 못하였던 비극적 생존은 누워 있다. 병이 침입자의 인상을 주며 병자를 문득 습격할 때 모든 근친자의 동정이 또한 무력한 것이니 병실의 문이 닫쳐지는 순간 병자의 고독과 적막을 위무할 방법이라고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적이요, 독자적인 영원한 격투와 고민 속에서 그가 어렴풋이 보는 것은 이 곳에 두 방문자 있음이니, 하나는 본능이란 자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이란 자이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하자고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문득 각성하여 나를 심방한 것일까?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말하자면 병자에 대하여 의사 이상의 역할을 하는 자이니, 그들은 상호 제휴하여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중대한 발언을 하여야 되는 것이요, 병자의 치유를 위하여 일치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유하여야만 되는 것이요, 정신은 영혼을 병으로부터 구출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참된 건강이란 진실로 육체적 건강을 말하는 동시에 영혼도 역시 건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료한다. 원래가 이것은 그러한 것으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니,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치료는 자기 치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의, 어떠한 신약도 이 신비로운 업무를 대행할 수는 없다. 의사와 검제는 결국 본능이 수행하는 치료를 보조하며, 간호하며, 고무함에 불과하고, 무릇 치유 과정은 그 자신의 충동에 의하여 저절로 자발적으로 자연히 성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에 본능은 병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병적 징후에 직접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원시 병세는 합목적적으로 진행하는 법이며, 그 자체가 치유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적 증상은 진행될 데까지 진행되면 자연히 없어진다. 본능의 자기 치료는 그보다는 새로운 구성과 조직 속에 성립되는 것으로 병자와 의사는 이 새로운 구성과 조직을 향하여 가장 신중히 또 가장 완곡히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것이니 새로운 구성과 조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물론 휴양이요, 안정이요, 정력의 절약이요, 공기요, 일광이요, 쾌활한 기분 등이다. 여타지물은 그 후에 비로소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에게 만일에 경청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곧 본능이 전연히 단독으로 병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염원하고 유해한 것을 염기하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니, 대개 병중에 환자의 좋아하는 바가 병에 이로우며, 환자의 싫어하는 것이 병에 독이 되는 이유는 실로 본능에 엄격한 명령, 그 속에서 탐지되어야 한다. 본능은 신뢰를 굳이 의욕한다. 본능이 확호한 자신을 가지고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리하여 그에 대하여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보다 신속히 자기 치료의 효과는 발생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치료 방법의 근본 원리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본능이 육체를 치료함과 같이 정신은 영혼을 치료한다. 여기서도 치료가 자기 치료를 의미함은 물론이니, 다만 여기 있어서는 그 치료의 방향이 '하부에서' 오지 아니하고 '상부로부터' 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중병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경우에라도 불평과 원한과 절망을 품어서는 아니 되고 일종의 철학적 달관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병에는 평온한 영혼, 쾌활한 기분, 부동의 신념이 절대로 필요하다. 병이란 흔히 뻗대는 성질의 것이므로 병의 치유에는 또한 어느 정도로 유장한 시간과 공간(병원, 온천, 요양지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은 병에 대하여 은혜를 끼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중대한 투병의 단계는 이 모든 조건을 구비한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진지한 투병에 있어서 본능과 정신 양자가 병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중대한 발언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평상시에 심신을 잘 조정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요, 또 내가 건강을 하늘이 주신 선물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만 된다는 것이요, 그리하여 건강은 그 자체가 이미 행복과 열락을 의미한다는 것 등이니, 사실 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한 이 인생에 대하여 눈을 감고 무관심하게 지내왔다는 것, 그리하여 애와 선과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안전에 제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탓으로 하여 그대로 간과하여 버리고, 그와는 반대로 내가 이제까지 가장 훌륭한 선물의 낭비자로서만 살아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우리는 병석에 누워 흔히 내일부터는 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니, 병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원시 반평생을, 아니 일평생을 고생으로 산다는 것, 그리하여 사람이 고뇌를 통하여 자각과 청정과 개선에 이를 수 있으며, 모든 고뇌로부터 일편의 참된 혜지를 급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병은 여실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병은 참으로 우리들 사람을 위하여, 다행한 교도자다. 병은 사람의 새로운 육성을 위하여, 휴양을 위하여, 또 그 순화를 위하여 막대한 진력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위에 우리는 장차 병으로부터 해방되어 쾌유의 즐거운 날을 가질 것이 아니랴! 이 위에 더 여하한 위안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병은 흔히 사람을 신경지로 만든다. 환자의 이 애처로운 심리를 우리는 승인하지 못할 바 아니나 이것은 그가 아직도 정신의 그윽한 소리를 듣지 못한 탓이라 할지니, 병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구이함이 없이 병으로부터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대개는 자기 자신에게서 온 이 시련을 감수하여 써 자기를 육성하는 한 좋은 수단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사람은 병에서 크는 것이다. 아이들이 병에 울 때 우리는 보통 '자고 나면 낫는다.'고 말한다. 수면은 병에 있어서 약이다. 수면이 경과의 양불호를 결정하는 신묘한 복선이 되는 것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 사실이다. 수면이라면 병중에 우리를 부단히 습격하는 저 수마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병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은 독서다. 그런데 시력이 쇠하고 팔힘이 부족한데다가 책을 보기만 하면 우리의 정신이 잠들어 버리는 데는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무엇을 생각하다가도 곧 잠드는 것인데, 다시 잠을 깨고 나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병 중에 가장 우울한 시간은 식사 시간이니, 식사래야 미음 아니면 죽 등 속으로 가히 연설할 나위가 못 되거니와 구미가 쓰고 혀는 깔깔하여 그것일망정 약을 먹듯이 먹어야 되고 달게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기 때문이다. 병자는 식전 식후에 누워서 한가함에 맡겨 자기가 일찍이 맛본 진수 성찬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입 위에 가만히 얹어 보는 것이나, 단 한 가지라도 구미에 당기는 것이 없는 데는 삭연한 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병으로 누워서 사람은 더욱이 먹는 재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흔히 병 중에 못 먹은 분량의 음식을 병 후에 결국은 다 찾아 먹고야 만다. 또 병상에 누워 있으면 자기가 일어나서 직접 나아가 볼 수 없는 까닭으로 자기와 완전히 격리된 이 세상은 사실 이상으로 지극히도 멀어 보이는 법이다. 그 먼 세상에서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먼 세상의 소식을 전할 때 병자가 받는 인상은 예상 이상으로 신선하고도 강렬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공동 생활을 떠나서는 하루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말하는 것밖에 없다. 사람이 병에서 크는 것과 동일한 근거에서 사람은 또한 병 때문에 늙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 병을 앓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곧 수긍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번의 병에서 통절히 경험하였다. 하여간 병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는 기술을 체득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병자에 대하여 가장 중대한 생명 철학인 것이다.
한단지몽(邯鄲之夢) -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 《出典》沈旣濟 枕中記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邯鄲 : 河北省 所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 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 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 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 년 후 원죄(寃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 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한단을 떠났다. 【동의어】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 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梁之夢)
Board 고사성어 2022.08.28 風文 R 896
말의 바깥 1일 3교대 노동자는 ‘갑반, 을반, 병반’ 중 하나에 속해 일한다. 갑을은 일하는 순서다. 60갑자에서도 갑을은 시간의 순서이다. 하지만 순서는 쉽게 우열로 바뀐다. 야구에서나 점수 내기 쉬운 3루가 1루보다 낫지만, 그 외에는 1등, 1등석, 1등급이 더 좋다. ‘갑’은 먼저 들어가고 좋은 자리에 앉고 목소리가 높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갑을관계’나 ‘갑질’이란 말은 서열과 위계를 뜻하는 사회학 용어가 되었다. 이럴 때 말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예전에 아파트 주민들과 경비원들이 자신들은 대등한 관계라면서 근로계약서를 ‘동행 계약서’로 바꿨다. ‘동행 조례’나 ‘갑을 명칭 지양 조례’를 제정한 지역도 있다. 헌법 개정안에는 ‘근로’를 ‘노동’으로 수정하여 노동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근로자, 근로기준법, 근로계약서, 공공근로’를 ‘노동자, 노동기준법, 노동계약서, 공공노동’으로 바꿔 부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말을 바꿀 때 말의 바깥을 생각하게 된다.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아야 한다. 근로가 노동이 되고 갑을이 동행이 되어도 현실이 여전히 노동을 배반한다면 실망스럽다. 정치를 한다면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한 공자의 발언은 그저 말을 잘 다듬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에 걸맞게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실천의지의 표명이다.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 달라’는 노동자들 앞에서 ‘갑을’을 ‘동행’으로 바꾸자는 ‘말’은 얼마나 한가한가. 말에 민감할수록 말의 바깥을 봐야 한다. 짓궂게 묻는다면, ‘굴종적인 동행관계’보다 ‘대등한 갑을관계’가 낫다. 말의 아나키즘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가면 ‘밝은누리’라는 대안학교 겸 공동체가 있다. 학교와 집을 손수 짓고 적정기술과 농사를 익히며 삶과 배움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의 ‘말글살이’는 자못 의연하여 생활 용어를 힘껏 바꿔 쓴다. ‘하늘땅살이(농사)’, ‘몸살림(수신)’, ‘고운울림(예술)’이라든가, ‘어울쉼터, 아름드리(생활관)’ 같은 말을 만들었다. 일주일을 ‘달날, 불날, 물날, 나무날, 쇠날, 흙날, 해날’로 부른다. 코로나19는 ‘코로나 돌림병’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말본새도 달라진다. 이들에게 말은 도구가 아니다. 새로운 말의 발명은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이끈다. 삶의 자리에 말을 초대하고, 초대받은 말은 다시 삶을 정돈한다. 고유어로 바꾸려는 강박이 보이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방문객은 ‘쇠날’로 듣고 ‘금요일’이라 ‘번역’한다. 낯설지만 과잉되지 않다. 그들은 삶의 변혁을 추구하지 언어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들을 보며 말의 아나키즘을 상상한다. 아나키즘을 ‘모든 지배의 거부’, ‘제도가 아닌 자발성에 의한 연대’라고 당돌하게 요약해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말의 아나키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한국 사회는 말의 무질서나 오염을 걱정하고, 올바른 말을 병적으로 강요해 왔다. 질서는 인위이고 위계이자 명령이다. 엘리트주의고 전체주의적이다. 그래서 표준어를 참조하지 않는 자유의 영토, 작은 공동체의 자율적 합의로 만드는 언어가 여기저기 꽃피어야 한다. 이게 어찌 그곳 사람들만의 문제겠는가. 말을 법 아래가 아닌 삶의 곁에 서게 할 때 우리는 자유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