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5적: 정부 관리 언론 기업 학자 [논단] 한글과 우리말을 더럽히고 죽이는 이는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뿐 이대로 오늘날 한국말이 죽을 지경이다. 미국말에 치어 죽을 지경이고, 남의 나라 말투에 찌들어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과 한글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니고 한국의 지배층, 지식인들이다. 학자와 공무원과 기업인과 언론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 말글로 출세하고 돈벌어 먹는 이들이다. 일반 국민이나 많이 배우지 못한 농민이나 어린 학생이나 나이든 할머니가 아니다. 제나라 말글로 된 회사이름, 멀쩡한 이름을 영문으로 바꾼 얼빠진 기업들이 있다. 얼간이 기업들을 자꾸 선전해주는 거 같아서 이름을 들먹이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국가기관이었던 ‘체신부 전화국’, 국민의 세금으로 큰 공기업 ‘한국통신’이 민영화한다면서 ‘KT’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가기관인 전매청이 담배인삼공사가 되더니 KT&G 로 바꿨다. 일제 때에 우리 아버지와 삼촌이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목숨과 피땀을 바친 값으로 받은 한일회담 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포항제철’이 ‘POSCO’로 바꿨다. 돈에 눈이 멀어 제나라의 말글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진짜 민간기업인 SK 나 LG 는 돈만 아는 무리들이라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국가기관이나 국민기업이라 할 수 있는 저들이 앞장서서 미제 창씨개명을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제일 큰 공기업들이 그러니 그게 잘하는 것인 줄 알고 민영화하지도 않은 서울시 산하 공기업인 도시개발공사는 이름을 ‘SH’ 로 바꾸었다. 그리고 서울시는 ‘Hi Seoul’ 이란 영문 구호를 만들어 선전하고 있다. 이게 또 좋은 거로 알고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영문 구호를 지어 가지고 그걸 알리려고 많은 세금을 날리고 있다. 민간기업이나 공기업만 그러는 게 아니다. 정부기관의 직제 명칭도 영문으로 바꾸고 있다. 중앙 정부가 ‘테스크 포스트팀’이라고 하니 지방 정부가 ‘미디어팀’이란 직책 명칭을 쓰고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라 이름과 모든 정부 기관 직제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꾸게 될 지 모른다. 기업이나 상품 명칭이 처음엔 한 둘이 영문이었지만 이제 너무 많이 늘었다. 10년 전만 해도 영문 이름이 적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서 이런 말을 하기도 겁이 난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 자기 회사 이름과 상품, 가게 이름이 영문인 사람들이 내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하기도 한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너는 국수주의자, 배타주의자다. 너는 우물안 개구리다. 너만 애국자요 우리말을 사랑하느냐. 너는 바보, 무식꾼이다. ”등 갖가지로 짓밟고 헐뜯는다. 이제 한국에서 한국말과 한글을 사랑하고 쓰자고 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 사기꾼 소리를 듣는 건 보통 일이 되었다. 영어를 잘하게 하겠다고 어린애 혀 수술을 하고, 미국 시민권 얻겠다고 미국에 가서 애를 낳는 게 보통이니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교육부가 제 할 일을 다 못해서인지 영어 망국병이 들어서인지 모르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영어마을을 만들고 수능시험 방송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정부와 공무원의 우리말 쓰기는 엉망이다. 정부와 공무원들이 내세우는 알림글(선전 구호) 몇 개를 살펴보자. 서울시 하수도사업소에서 단 “차집관거 준설공사를 합니다.”란 펼침막이 있다. ‘차집관거’가 일본 한자말이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막힌 하수관을 뚫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구청에서 “9월은 재산세 납부의 달입니다.”라고 거리에 써 달았다. 이 말도 “ 9월은 재산세 내는 달입니다.”라고 하는 게 좋다. 외국말투인 토씨 ‘의’를 쓰지 않는 게 우리말답다. 시내버스에 “물의 소중함을 생활화합시다.”는 선전문이 있다. 이 말도 일본말투 ‘ - 화’를 쓰지 말고 “물 한 방울도 아껴 씁시다.” 하는 게 우리말답다. 이제 한문이 배우고 쓰기 어렵고 불편하다는 걸 많이 깨달아서 한자를 덜 쓰는 데, 일본 한자말과 외국말투는 많이 쓰고 있다. 한글만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말다운 말글살이를 해야 한다. 학생들 교육을 맡은 정부부처 이름을 일본말투 ‘ - 적’을 넣어 ‘교육인적자원부’라고 지었다. 이러니 우리말이 일본말에 얼마나 찌들었는지 알 수 있다. 공문서나 정부기관에서 쓰는 일본 한자말과 일본말투는 이 밖에도 한 둘이 아니다. 언론이나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국어학자와 국어 선생이 그런 말을 가르치고 써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외국인을 상대할 때 쓸 영문 명칭을 따로 갖는 건 모르지만 제나라 국민을 상대로 하는 이름까지 영문으로 창씨개명 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삼국을 통일하고 관청의 직제와 사람 명칭과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꾼 게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와 학문, 철학과 자주의식을 꽃피지 못하게 한 큰 계기였고 강대국의 문화와 말글을 숭배하는 풍조를 심고 키워서 1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이제 온누리에서 으뜸가는 우리 글자인 한글을 가지고 쓰기 시작해서 우리말글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학문과 우리 철학과 우리 문화가 꽃피려 하는 판이다. 수천 년 동안 말과 글이 다른 불편한 한문 글살이를 할 때엔 백성가운데 2%만 학문과 문화를 누리던 어두운 시대였지만 이제 우리 한글이 모두 밝게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국민 누구나 글을 쓰고 시를 짓고 학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 게 싫은지 남의 말글, 미국말의 노예가 되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수천 년 남의 말글과 문화에 길들었기 때문에 제 말글로 살면 안 되는 거로 아는 거 같다. 오늘날 우리말글살이를 어지럽게 하는 건 얼빠진 지식인들이 쓴 책이고 신문이고 방송 말이다. 또 정부가 내건 알림글이고, 기업이 광고문이고, 학자들이 쓴 글이다. 많이 배웠다는 이들은 외국 말글을 섞어 쓰거나 외국 말투가 아니면 글을 못쓰고 말을 못하는 거 같다. 깨끗한 우리말을 더럽히고 흔들리게 하는 게 이들 배웠다는 사람들, 잘났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 우리말 살리는 일을 하던 이오덕 선생님은 학교를 많이 다니고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거의 자신도 모르고 일본말이나 미국말투에 길들었다면서 학교를 다니지 않은 농민이 하는 말이 가장 우리말답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말인지 일본말인지 구별이 안 될 때는 “시골에 사는 농사꾼이라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안 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래서 농사꾼 입에서 나올 거 같은 말이라면 우리말이 분명하니 마음놓고 쓸 것이고, 농사꾼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말이라면 일본글에서 온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오덕 선생은 ‘우리 글 바로쓰기3(한길사)’ 책에서 “풍요로운 조국에로의 길은 이길뿐”이란 상품 광고문이 버젓하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는 꼴을 보면서 “ ‘에로의’가 도대체 어느 나라말인가? 이런 글로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우리말 학살 죄’로 고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신문기자, 교수,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앞다투어 쓰고 있으니 나라 일이 제대로 풀리겠는가?“라고 한탄하면서 당신이 어렸을 때에 들은 ”미구(천년 묵은 여우가 변해서 된 사람이 된 짐승)가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옛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글자와 중국 글자말을 숭배하는 자들이 백성을 못살게 하고 나라 망칠 ‘미구’라고 했다. 또 이 ‘미구’가 100년 전에는 일본말로 둔갑을 하고, 지금은 미국말로 둔갑을 해서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우리말과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서 이 미구를 몰아내야 우리 말과 겨레가 산다고 외치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 천 년 동안 떠돌아 살았어도 제 겨레말을 잃어버리지 않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지만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지배했어도 제 겨레말을 잃어서 백년 만에 그 민족도 사라졌다. 일제가 강제로 창씨개명 하려 한 것은 우리 겨레를 없애려고 한 것이었다. 통일신라가 강대국 당나라의 말글로 창씨개명한 1300년 전 잘못을 오늘 우리는 되풀이하지 말자. 영문으로 회사 이름과 상품 이름을 짓다보면 조상들이 중국 한문만 쓰는 말글살이를 했듯이 미국말글살이 세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불편과 피해가 온다. 세계 최고 글자를 가졌으니 우리말도 세계 최고 말로 만들어 찬란한 우리 말꽃(문화)을 피워서 어깨를 펴고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자. 내 것은 우습게 여기고 남의 것만 우러러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강대국과 강대국 말에 눌려 사는 종살이를 면할 수 없다. 조금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우리말과 우리 글자로 글을 쓰고 정부와 국민이 함께 힘써서 우리 세대가 우리 겨레말 독립을 해내자. 이 일은 헛된 꿈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먹기 따라서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이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중국 절강성 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Board 추천글 2012.04.20 바람의종 R 29308
http://well.hani.co.kr/84989 꽃 한 송이 피기 위해 영혼이 그렇게 아팠을까 새내기 미대생 된 그의 첫 작품전 제목은 ‘동행 남민영 올리바 수녀와 제자들과 즐거운 한 때 수도자는 떠남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머물던 자리에 미련 두지 않고, 소임지가 바뀌면 언제나 떠나는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소중히 여겼던 일과 살갑게 정을 나누던 이들을 그곳에 두고 수도자는 가야할 곳을 향해 담담히 일어난다. 최소한의 자기 일상품만 들고서 하얀 백지 시험지 한 장을 받아든 마음으로 수도자는 새로운 소임지로 발길을 돌린다. 올리바 수녀는 제주 공항 국내선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다. 오전에 출발하는 김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그녀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넓은 유리문을 통해 도로 양쪽에 서 있는 야자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4년 전, 비행기를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지나 도착한 제주도는 나라 안의 가까운 섬이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만난 저 이국적인 야자수는 그녀 자신이 아주 멀리 떠나왔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리고 살면서 만난 제주의 자연들. 하늘과 별과 달, 바람과 돌담들, 옥빛 바다는 그녀에게 너무 멀리 떠나버린 인간의 그 순수한 본래의 모습을 갈망하게 했다. 올리바 수녀가 가장 좋아했던 제주의 자연은 ‘오름’이었다. 사방 천지에 소똥, 말똥이 널려 있고, 민들레 짝퉁인 개민들레가 자기 세상인 듯 피어있는 오름. 그녀는 가장 낮은 이들에게 이부자리를 깔아주는 둥근 오름의 넓고 편한 마음을 닮고 싶었다. 전광판 시계를 보며 탑승시간을 확인한다. 보안검색을 받고 탑승구(GATE)를 통과하기 위해 승무원에게 표를 내민다. 그녀는 이동가방을 밀며 기내 안으로 들어간다. 그 가방 안에는 수도자가 가지고 떠나는 최소한의 물품,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소영이가 준 그림이 들어있다. 소영이는 그녀의 교직 생활에서 만난, 아픈 꽃 한 송이었다. 올리바 수녀는 어디로 떠나든 아마 소영이의 그림은 늘 가지고 다닐 것이다. 성산포 오름에서 내려다본 모습 조현 “수녀님 저요 제가 무서워요, 저도 모르게 자꾸 면도칼을 들고…” 제주의 바람을 뚫고 아침마다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올리바 수녀의 발걸음은, 마치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냥, 콩당콩당 늘 설레는 나날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 날 소영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서 있었다. 새 학기가 한 달 정도 지난 4월 초. 교무실에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소리쳤다. “수녀님! 소영이가, 소영이가 칼을 들고서……칼을……수녀님, 무서워요. 어떻게 해요.”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은 놀라움. 그러나 올리바 수녀는 뭔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녀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나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복도에 놓인 사물함 근처에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소영이는 왼손에 문구용 칼을 들고서 사물함에 기대어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소영이에게 의지적으로 천천히,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소영이는 키 큰 올리바 수녀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소영이의 등이 몹시 흔들렸다. 그러니까 꼭 한 달 전, 고교 1학년 첫 담임이 되어 첫 수업을 시작한 첫날이었다. 아직 이름도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 중의 한 명인 소영이가 교무실로 담임인 그녀를 찾아왔다. 아이는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수녀님 저요……제 자신이 무서워요. 저도 모르게 자꾸 면도칼을 들고 손목을 그어요. 제가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영이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순간 놀라움으로 막막하기만 한 그녀는 제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무방비 교사였다. 처음으로 그녀는 교사로서의 무능함을 깨우치고 인정해야 했다. 엄마의 스무 살 불장난…이혼…새엄마…우울증 그녀는 먼저 소영이의 가정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다. 엄마의 스무 살 불장난 사랑으로 태어난 소영이는 철 없고 애정 없는 엄마 손에 양육되었다. 결국 부모는 소영이 중3 때 이혼을 했다. 그 후 아이는 또 다른 젊은 새엄마 밑에서 자랐다. 매우 현실적 사고형의 새엄마와 감수성이 예민한 소영이는 서로에게 부딪치는 걸림돌이었다. 그럴수록 소영이는 솟구쳐 올라오는 감정들을 꾹꾹 억누르다 참을 수 없으면 자신의 힘듦을 자해로 보여주었다. 새엄마와 소영이 사이의 감정의 골은 너무 깊어 있었다. 대화가 단절된 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소영이는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올리바 수녀는 소영이를 데리고 상담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 아이의 우울증 정도가 심각하다며 약물복용을 권했다. 그녀는 소영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영아, 약을 먹기는 하되 의지와 함께 극복해 보자, 수녀님도 힘들 때마다 도와 줄게.” 대답 없는 소영이. 그러나 얼굴에는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후 소영이는 수업시간에도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일거나, 땅이 꺼지는 기분이 들 때면 교무실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올리바 수녀는 소영이의 손을 꼭 잡아주고 옆에 의자를 마련하여 앉아 있게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수녀님, 저 오늘부터 수업 안 들어가고 그냥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될까요?” 아예 수녀님이 있는 교무실에 와 있겠다는 뜻이다. 그녀는 두 말 않고 빈 책상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그날부터 소영이는 담임인 올리바 수녀 옆에서 자기 일을 했다. 자유롭게 책을 읽다가 답답하면 운동장을 돌고 오기도 했다. 교실에는 수업이 듣고 싶을 때만 들어가도록 배려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니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한 학생이 아침부터 계속 교무실에 앉아 있을 때의 불편함을 참아준 주변 선생님들이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그분들도 소영이가 스스로 수업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다. “타고난 재능” 한 마디에 “아 이제 소영이가 살 수 있겠구나” 그러던 어느 날 미술 교사가 그녀에게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거 소영이가 그린 건데요. 제가 아이들 그림 실기에 만점을 잘 주지 않거든요? 그런데 소영이 그림에는 만점을 주고 싶어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 그림을 살펴보았다. 계속 이어지는 미술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소영이 작품에는 영혼이 살아있는 게 보여요.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한 줄기 강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제 소영이가 살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었다. 그녀는 당장 소영이를 만났다. “소영아,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니.” “네, 어릴 적부터 혼자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어요.” “그럼 앞으로, 장래 희망을 미술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니?” “ 아니요? 그냥 취미로 그리는 걸 즐길 뿐이에요.” “미술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소영이 그림에서 특별함이 느껴진데. 수녀님 보기에도 네가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열심히 노력해서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더 행복해 질 수 있어. 수녀님은 네가 진지하게 그림에 대해 생각해보고 진로를 찾으면 좋겠는데. 어떠니?” “엄마가 싫어하실 거예요.……그리고 자신도 없구요.” 이 말을 하고 소영이는 시든 풀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올리바 수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소영이의 맥없는 모습과는 달리 아이 눈빛은 이미 열망하고 있음을 보았기에.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건 없어. 그리고 소영이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어. 희망 말이야.” “너 분명히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여기 싸인해라,나중에 얼마나 비싸겠니” 며칠 후 소영이는 중1, 예전 미술 선생님한테 칭찬받은 카드 한 장을 들고 왔다. 카드 속에는 소영이가 다섯 살 꼬마였을 때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끼여 있었다.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제가 어릴 적에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나 봐요.> 그녀는 제자를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먼저 딸에 대한 불만이 많던 새엄마의 마음을 열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 제자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열중하도록 물적 도움을 청하여 소영이를 미술학원에 등록시켰다. 서양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는 그림의 재료를 사느라 평생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았다. 테오는 형의 일생동안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어떤 불평도 없이……. 올리바 수녀는 소영이가 지금부터 그림에 열중하도록 제자의 인생을 힘껏 동반해 주고 싶었다. 반 고흐 동생 테오 처럼. 그날 이후 소영이는 연습장에 스케치를 시작했고 틈틈이 그린 그림을 올리바 수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소영이가 그림을 가져오면 그림 위에 꼭 “싸인”을 하게 했다. “수녀님, 이거 선물이에요.” “와, 멋있다. 자. 여기 싸인 해야지? 분명 너는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그때 이 그림이 얼마나 비싸겠니? 빨리 여기에 싸인해라.” 소영이는 그 선한 웃음을 지으며 기쁘게 싸인을 했다. “이젠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고1을 마치는 종업식 날, 소영이는 또 한 장의 그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도화지 안에는 담임인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소영이가 준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수녀님, 이제 저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수녀님의 기도가 더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 사이 소영이는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며 우울증약도 먹지 않고 자기 의지로 이겨내겠다고 선언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학년이 바뀌어 소영이는 고2가 되어 새로운 담임을 만났다. 교무실 올리바 수녀 책상 옆에 임시로 놓였던 작은 책상과 의자도 사라졌다. 다만 소영이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옛 담임인 그녀를 찾아와, 이번 시험은 정말 꽝 쳤어요, 친구랑 싸웠어요 등등 시시콜콜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 그녀와 소영이는 편안 친구처럼 하하--호호 웃고 떠들다 헤어지곤 했다. 여전히 소영이는 가끔씩 습작을 가지고 왔으며, 그녀 또한 어김없이 싸인을 받아두었다. 그녀는 훗날,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또 다른 제자가 절망에 빠질 때 이 싸인 받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너 그 유명한 화가 김소영씨 알지? 이 그림, 그 화가가 고등학교 때 그린 거야. 수녀님 제자였다니까? 그 화가도 한때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했던 적이 있었어. 그런데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자기 재능을 찾아내어 열심히 노력했기에 오늘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거야.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때가 있어. 너도 할 수 있어. 난 꼭 널 믿어”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녀는 소영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대에 진학하도록 동반해 주었다. 서로에게 옷을 벗고, 길이 되어주는 삶을 가르쳐 준 제주의 자연들 승무원이 상륙을 알리는 기내방송에 이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리바 수녀는 언젠가 제주 토박이 할머니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제주는 사람들이 처음엔 오기 싫엄 울고, 나중엔 가기 싫엄 울엄수다.” 그녀는 비행기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서로에게 옷을 벗고, 길이 되어주는 삶을 가르쳐 준 제주의 자연들을. 겨드랑이 벌리고 바람의 길을 도와주는 제주의 돌담들, 소똥, 말똥, 개민들레를 비롯한 세상의 못난이들의 보금자리, 제주의 오름들, 달과 별들을 위해 더욱 파란 하늘, 그리고 옥빛 바다와 그 하얀 파도를……. 그녀가 제주를 떠난 그 해 가을 날. 새내기 미대생인 소영이의 첫 작품 전시회 팸플릿이 우편으로 도착했다. 올리바 수녀는 봉투를 뜯고 팸플릿을 펼쳤다. 팸플릿 중앙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얼굴을 돌로 조각한 사진이 담겨 있었다. 조소과 1년생 소영이의 작품이었다. 이어서 그녀의 두 눈은 팸플릿 제목 두 글자에 멈추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영이의 첫 작품 전시회 제목은 “동행”이었다. 돈보스코 예방교육 영성 “교육(Educare)”이란 “밖으로 이끌어내다”라는 뜻입니다.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의 영혼 안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 즉 탁월한 능력이나 잠재력, 숨어 있는 재능을 발굴하여 밖으로 이끌어 낸 기술자였습니다.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에게서 하느님이 그들 안에 심어 놓으신 계획,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도록 도왔습니다. 예를 들어, 갈리에로 추기경은 어릴 적부터 돈보스코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워낙 놀기 좋아하고 한군데 가만히 있지 못하는 꼬마 갈리에로는 어느 날 교사의 손에 붙들려 돈보스코 사무실로 보내졌습니다. 원고를 쓰느라 너무너무 시간이 없던 돈보스코는 갈리에로에게 거기 잠깐 가만히 앉아있으라 했습니다. 그런데 꼬마는 어느 새 돈보스코 책상 밑에 들어가 손가락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며 놀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돈보스코는 평소에도 부서진 나무막대를 치며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꼬마 갈리에로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선 그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게 합니다. 그 후 갈리에로는 교회 전례음악의 대가, 그리고 살레시오 수도회 사제에 이어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 됩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들의 내적인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 조성과 성숙한 ‘교육자의 현존(Assistenza)'이 필요합니다. 소영이는 현재 미대 졸업반이 되었으며 올리바 수녀의 가방에는 소영이 싸인이 담긴 그림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Board 추천글 2012.03.03 바람의종 R 33163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독서의 해’에 해야 할 다섯가지 ‘독서의 해’에 해야 할 다섯가지 [토요판] 백원근의 출판풍향계 정부는 올해가 ‘독서의 해’라고 발표했다. 3월 선포식을 시작으로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이 연중 실시될 예정이다. 관건은 독서율, 독서량, 독서시간의 지속적인 감소 추세와 영상물 위주의 다매체화 속에서 수세에 몰린 독서 생태계를 얼마나 개선하고 재구조화할 수 있을까에 있다. 특히 ‘독서의 해’ 시행 취지인 독서인구 확대를 위해서는, 평소 책 읽기를 멀리 하던 사람들이 독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정책 자원이 집중되어야 한다. 일회성 행사나 프로그램들로는 이를 달성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무엇보다 범사회적으로 실천할 일은 하루 10~30분 정도의 ‘독서시간’을 일과 중 필수시간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독서동기나 독서습관의 부재가 근본 원인이다. 가정, 학교, 직장 등 모든 곳에서 지정된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더불어 읽는 체험을 통해 독서 생활화의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공의 독서 인프라인 도서관 서비스를 확장해야 한다. 지난 몇년 사이 공공도서관이 많이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도서관에 대한 국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감은 여전히 멀다. 주민 생활권 안에서 도서의 대출·반납이 손쉽게 가능하도록 공공도서관마다 민간 시설과 연계된 관외 서비스센터를 다수 운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새 학기부터 본격화되는 초중고 주5일제 수업에 따른 가족 단위의 주말 도서관 이용 프로그램 시행도 시급하다. 셋째, 지방자치단체가 독서정책 추진에 뛰어들도록 독려하는 ‘지자체 독서진흥지수’를 도입하는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 5년 전부터 시행중인 ‘독서문화진흥법’과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에 의해 각 지자체는 주민을 위한 독서환경 조성 책무가 있는데도, 조례 제정이나 독서진흥 예산 편성에 실제로 신경을 쓰는 곳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청에 독서진흥 전담팀을 운영하는 군포시 등의 사례가 확산되어야 한다. 넷째, 일상에서 책 읽기를 자극하고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요청된다. 상업주의에 밀려 시들해진 신문·방송의 책·독서 정보 제공을 복원시키고, 인터넷 방송인 ‘온북티브이’의 정규 케이블 채널화 지원, 각 분야 인기 스타들이 참여하는 릴레이 독서 캠페인 전개, 전국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독서 낭송대회 개최, 학급문고 설치와 학교도서관 활성화, 경제단체가 협력해 벌이는 직장도서실 설치 운동, 동네서점을 살리는 향토서점 상품권 발행, ‘독서 마케팅’의 최신 성과를 공유하는 독서 콘퍼런스의 연례 개최 등 독자층을 두텁게 하는 정보·경험·공간의 기반을 최대한 확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독서의 해’이자 ‘선거의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일은 12월에 “책 읽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약하는 대통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일이다. 개인이나 국가 차원에서 책 읽기만큼 확실한 미래 투자는 없고,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독서 친화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리더가 누구인지 검증해야 한다. ‘독서의 해’는 다름 아닌 ‘독자의 해’이기도 하다. 지반 침하가 이어지는 읽기문화의 토양을 단단히 다지고 비옥하게 일굼으로써 삶의 질이 높은 문화 선진국으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책 읽을 권리인 독서권이 지식정보사회의 기본권이며, 독서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임을 인식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소중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Board 추천글 2012.02.28 바람의종 R 31838
일제 창씨개명도 모자라 영어이름인가 [논단] SK. LG, KT등 미국식 창씨개명은 미국식 문화에 눌려살게 돼 이대로 우리 역사가 5천년이거나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면 우리 겨레는 5000년 전이나 그 이전부터 우리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 글자가 없어 중국 한자를 빌려쓰고 한문으로 글살이를 했다. 그런데 한문이 우리 글이 아니라 글과 말이 다르고, 한문이 배우고 쓰기가 너무 힘들어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런 말글살이를 했다. 그래서 우리말을 적기 편리한 우리 글자를 갖는 게 겨레의 꿈이었고 뜻 있는 한아비(조상)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 이두나 향찰, 구결을 쓴 게 그 노력의 시초였다. 배달말 홀로 서기 첫 훼방꾼은 신라 경덕왕 그러나 이두식 글쓰기도 마찬가지 한문을 빌려쓰는 말글살이여서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558년 전 세종대왕이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 글자(한글)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겨레에게 준 값진 선물인 우리 글자를 지난 500년 동안 쓰지 않고 갈고 닦지 않았다. 큰 나라인 중국(명, 청)의 눈치를 보게 되고, 한자와 한문문화를 숭배하는 지배층이 스스로 싫어하고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 100년 동안 많은 국어독립운동가들이 애써서 오늘날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편리한 말글살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문으로 글살이를 하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문을 알고 자유롭게 말글살이를 하는 사람이 지배층인 2%에서 10% 정도였다는데 이제 온 국민이 글자를 알고 마음대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년 한자 멍에를 벗고 한문 고통에서 해당되어 편리한 우리말글살이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온 국민이 편리한 말글살이를 하는 게 배가 아픈지, 한자를 섬기던 버릇이 있어서인지 이제 지배층은 미국말을 섬기고 쓰자고 한다. 이 나라 지배층인 정치인과 경제인, 학자와 언론인이 영어 바람을 부채질해서 많은 국민이 영어에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우리말이 몹시 흔들리고 쓰러져 죽을 판이며 또 돈 없는 서민은 바보가 될 판이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한자와 한문을 쓰게 되었고 그게 우리말글살이와 자주문화 발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한자와 한문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때나, 누가 들여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그 이전에 이 땅에 들어왔고 많이 쓴 거로 알려졌다. 삼국시대 불교 서적이나 중국 문헌을 들여다가 보고 쓰면서 이 땅에 펴진 거로 전한다. 그런데 통일 신라 이전에는 한자나 한문을 쓰더라도 관직이나 제도, 사람과 땅이름은 우리 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고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식으로 바뀐다.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 일이다. 그 때부터 완전히 우리말과 우리 정신과 문화가 당나라(중국)의 속국처럼 된다. 신라 초기엔 임금의 명칭을 우리 식으로 지어 부르다가 중국식으로 바꾼 건 경덕왕보다 앞선 지증왕 때부터 나타나지만 경덕왕 때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신라 초기엔 한자를 쓴 우리 이두식 명칭인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이라 했는데 모두 음차에 의한 이두식 이름이란다. 또 다른 호칭인 '이사금(尼師今)'은 '잇금'이란 신라방언이고 '임금'이란 말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또 '마립간(麻立干)'은 신라방언 '마립(말뚝)'과 우두머리란 뜻을 가진 간(干)이 모아진 말로서 우뚝 선 말뚝 같은 임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왕 명칭도 한자를 썼더라도 우리 식으로 지은 거사간, 이사금, 차차웅, 마립간들이었으나 제22대 지증왕( 재위 500~514) 때부터 중국식인 '왕'이란 명칭을 쓴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文武王, 626~681]이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 힘을 기울여 664년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제30대 성덕왕(재위 661~681)도 공자의 책과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서서히 중국 문화에 물들다가 경덕왕 때 더 심해진다. 경덕왕 때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한다면서 제도, 관직,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완전히 바꾼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면서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인다. 정치와 문화가 중국에 완전히 예속되는 때이다.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나 이 땅에 외세와 중국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고 우리 자주문화를 꽃피지 못하게 한 엄청난 수난이고 재앙이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다. 사람이름도 통일 신라 이전엔 '박혁거세, 을지문덕, 연개소문'처럼 우리 식으로 지었다. 지증왕 이름도 '김지대로(金智大路)'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국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되니 '김유신, 김춘추' 같은 중국식 세 자리 이름이 자리잡는다. 여기서 우리가 당나라의 지배를 받아 세 자리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일본은 '이등박문, 풍신수길'처럼 네 자리인 게 삼국시대 우리식 이름이 그대로 배워다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내려온 게 아닌가 싶다. 1300년 전에 중국식 창씨개명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우리 문화는 중국 문화의 그늘에서 빛을 낼 수가 없게 된다. 미국식 영문 창씨개명은 1300년 전 신라 때 잘못을 되풀이하는 잘못 통일신라 때 당나라의 문화에 물들지 않으려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애쓴 일도 있지만 경덕왕처럼 선진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명목으로 당나라(중국) 식 이름짓기를 정책으로 추진한 건 어리석고 슬픈 일이다. 그 때 정치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늘날 정치인과 지배층이 그 때 외국식 영문 이름짓기를 따라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세계화 바람과 돈벌이에 눈이 멀어 1300년 전 통일신라가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 오늘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일본식 한자혼용 말글살이가 좋은 줄 알고 그걸 본받으려 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본은 섬나라여서 지리상 중국이나 원나라의 지배와 침략을 우리처럼 받지 않아서 제 나라 식 이름짓기와 말글살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제 문화를 창조해 나간 것을 본받으려하지 않고 우리 역사이래 처음으로 우리 식 말글살이를 하고 우리 자주문화를 꽃피울 기회가 온 것을 차버리려 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미국식 창씨개명을 하고 미국말의 노예가 된다면 후손들이 천년동안 미국 문화에 눌려 살 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멀쩡한 우리말 회사이름을 버리고 SK. LG, KT, POSCO 들로 이름을 바꾼 기업과, 미디어팀, 테스크포스트팀 들로 직제 명칭을 바꾼 정부기관과 정당, 언론기관, 미국말 섬기기와 창씨개명에 정신이 없는 정치인과 기업인은 우리말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임을 알라. 이름과 말글을 외국식으로 바꾸면 그 나라의 문화도 철학도 학문도 외국의 곁가지가 되고 제 것이 없게 됨을 지난 수천 년 동안 한문을 쓰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수천 년 길들여진 한문 쓰기를 하루아침에 버리긴 힘들 것이다. 아직 한글만으로 하는 말글살이가 불편하고 미비한 게 많은 것은 사실이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글자인 한글이 못났더라도 쓰려고 애쓰는 게 옳은 태도이고,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글을 살려 쓰려고 힘쓰는 건 잘 하는 일이다. 얼간이 지배층이 미국말이나 일본식 말글살이에 빠진 건 어쩔 수 없다해도 착하고 순진한 국민들까지 그에 놀아나는 게 가슴아프다. 언제나 나라가 어려울 땐 백성이 전투를 하다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지켰지 지배층이 지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Board 추천글 2012.01.14 바람의종 R 29385
일본 말글은 죽어도 한글 못따라 온다 [논단] 세계 언어학자들 ‘한글최고’ 격찬, 일본식 한자섞어쓰기 가장 미개 이대로 1994년 세계에서 이름난 과학잡지 디스커버지 (Discover)지 6월호에 미국의 유명한 생리학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캘리포니아 대학교 재릿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박사가 ‘올바로 적기 (Writing Right)’란 글에서 “한글만 쓰는 북쪽의 말글살이가 가장 편리하고 과학스런 말글살이이고 가나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는 일본의 말글살이가 가장 불편하고 미개한 말글살이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스런 글자다”라고 썼다. 나는 이 과학자를 1995년 서울 세종 호텔에서 가진 국어순화모임 조찬회에서 만나 그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 글 내용을 확인한 일이 있다. 재릿 다이아몬드 박사,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 1994년 우리나라 각 일간신문는 다이아몬드가 디스커버지에 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스런 글자이고 그 한글을 쓰는 한국말이 가장 좋은 말글살이다”라는 기사를 소개한 일이 있다. 그래서 세종 호텔에서 그를 만났을 때 한국이 가장 과학스런 말글살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지 확인하니 “두 가지 글자를 섞어 쓰는 일본의 말글살이가 가장 비과학적인 말글살이이고 그를 따라하는 한국의 말글살이도 마찬가지 불편하다. 한글만 쓰는 북쪽의 말글살이가 가장 편리하고 과학적인 말글살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나라의 지배층인 국무총리와 장관을 지낸 정치인, 서울대학교 총장과 교수였던 사람, 대기업 사장과 조선일보 같은 언론들은 일본처럼 한자를 혼용하는 말글살이가 가장 편리한 말글살이라고 떠들며 한글만 쓰기를 가로막았다. 그런데 그 때 세계에서 이름난 과학자는 그 일본식 한자혼용 말글살이가 가장 미개하고 불편한 말글살이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다른 세계학자들도 인정하는데 우리 지배층만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이 한자를 섞어 세로 쓰던 보수신문들은 일본식 한자혼용이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말글살이란 것은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재럿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글이 영문 로마자보다도 더 좋은 글자라고 자세히 설명하면서 한국은 한자를 혼용함으로써 불편한 말글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 로마자 같은 소리글자가 가장 좋은 글자이고 로마자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데 그 글자보다 한글이 더 과학에 기초를 두고 질서 있게 짜여진 글자라고 말했으니 세계에서 한글이 가장 잘난 글자임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이몬드 글에 반론이나 반박문을 본 일이 없으니 세계가 인정하는 진실이다. 그 때 그가 디스커버지에 쓴 내용을 조금 옮겨본다. “어떤 문자(한글)들은 사람들의 말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반면, 다른 문자들, 예를 들어 영어 따위들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이것은 문자의 진화인가? 아니면 문자에 동등하지 않은 논리가 적용된 것인가? 당신은 영어를 읽고 쓸 줄 아는가? 당신은 대답할 것이다. 물론이지, 재릿 다이아몬드. 당신도 알잖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이 잡지를 읽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문자 영어의 배후에 있는 이치를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해본 적이 있는가? 즉, cede나 ceed, 혹은 sied대신 우리가 하듯이 seed라고 적는 이치는 무엇인가? 또는 sh 소리에 대해, 단지 몇 가지의 경우만을 거론한다 하더라도, (ocean에서와 같이) ce로 적을 수도 있고, (nation에서와 같이) ti로 적을 수도 있으며, (issue에서와 같이) ss로 적을 수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글은 입으로 내는 소리와 적는 기호 완벽하게 일치 이런 류의 셀 수 없이 많은 예는 영어를 적기가 심지어 교육받은 어른들에게조차 끔찍하게 어렵다는 것을 예증한다. 지금 일 학년인 쌍둥이 아들들을 통하여 필자가 거듭 발견한 바와 같이, 영어 맞춤법은 기본 법칙을 (그런 것이 있기나 하다면) 배운 어린이들이 적힌 낱말들 다수를 읽을 수 없거나 들은 낱말들을 적을 수 없을 만큼 일관성이 없다. 덴마크어를 적는 것도 어렵다. 중국말 적기와 남한 말 적기는 더욱 어렵고, 일본말은 가장 어렵다. 그러나 다 그렇진 않다. 프랑스 어린이들은, 들은 낱말들의 철자를 적지 못할 때가 자주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적혀 있는 낱말의 대부분을 읽을 수는 있다. 핀란드와 북한에서는 입으로 내는 소리와 적는 기호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므로 ‘그 말의 맞춤법이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이 사실상 있을 수 없다.” 그는 덧붙여 “세종대왕이 만든 28개 부호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알파벳이며 가장 과학적이고 초이성적(ultrarational)인 문자체계인바,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한눈에 식별할 수 있다. 둘째, 자음부호 형체는 그 소리가 날 때 입술, 입 혀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셋째, 이들 부호는 수평 또는 수직으로 묶어져서 네모 꼴 안에 든 음절 문자가 된다.”며 한글이 최고임을 설명하고 있다. 보통 영어 알파벳이 가장 뛰어난 소리글자요 그 로마자를 쓰는 미국말이 가장 발달된 말로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발음도 여러 글자로 적기도 하고, 같은 낱글자도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발음이 된다는 것이다. 재미동포 박양춘 선생은 “ 로마자 a는 아, 에, ... 들 여덟 가지로, o는 아홉 가지로 소리 나는데 한글 ㅏ는 아 하나로만 소리를 내고, 오우라는 이중모음은 o, au, aw...ow 등 11가지로 표기된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따 만든 표기와 발음체계가 정확하고 과학스러워 로마자보다도 훌륭한 한글을 세계글자로 만들자.”고 외치고 있다. 다이아몬드 말고도 하버드대학 교수인 라이샤워 박사, 네덜란드의 언어학자인 보스 박사, 영국의 언어학자인 샘슨 박사, 미국 매어리랜드 대학교 언어학자인 램지박사,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교수로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삿세 박사, 전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인 우메다 히로유키 박사,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실증을 들어 말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에서는 한글을 인류가 발명하거나 발전시킨 세계적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문맹퇴치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 문맹퇴치상’이라고 지었다. 세계 유명 언어학자들 ‘한글이 최고의 언어’ 극찬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자와 정치인, 대기업주, 신문은 세계에서 가장 잘난 글자를 가지고도 그것을 잘 갈고 닦고 빛내어 세계 으뜸가는 문화를 창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중국 한자만 섬기고, 미국말을 우리 공용어로 하자고 하면서, 가장 비과학스럽고 미개한 일본의 한자혼용 말글살이를 최고라고 생각하니 한심스럽다. 일제 식민지 한자혼용교육에 물든 일제 지식인이 제 편익만 생각하고 일본식 한자혼용을 주장하고, 미국문화 숭배자들이 미국말을 우리 공용어로 하자는 것은 한글 역적행위이고 겨레말과 겨레 얼을 죽이는 민족 반역행위이며 국어독립을 가로막는 죄악이다. 한자 고집은 ‘죽은 아들의 알불 만지는 것’이고, 미국말 섬기기는 ‘남의 떡만 큰 것’으로 알고 하는 못난 짓이다. 한글이 살고 빛나려면 할 일이 너무 많다. 한글만 쓸 거냐, 한자를 섞어 쓸 거냐는 말싸움은 너무 많이 했다. 이제 그런 말싸움에 국력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한문나라인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수십 년 동안 일제 식민지였기에 중국과 일제 한자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한자는 지는 해요 한글은 뜨는 해다. 큰 흐름은 한글세상이니 한글을 빛내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알아듣기 힘들고 혼란스런 한자말을 될 수 있으면 토박이말로 바꾸고, 새로 만들어 쓰자. 요즘 자꾸 늘어나는 미국말도 그렇다. 한국말이 북쪽 말보다 불편한 것은 한자와 미국말을 많이 섞어 쓰기 때문이다. 일제 지식인과 그 제자들은 말할 거 없고, 정부는 멀리 후손과 겨레의 앞날을 생각해 오늘 우리가 좀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한글세상을 만들어 우리 한글 자주문화를 꽃피우고 세계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하자. 지금부터 정부와 학자와 언론과 국민이 함께 한마음으로 한글세상을 만들려고 힘써도 온전한 한글전용, 한국어 독립은 50년에서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수천 년 동안 쓴 한자와 일제가 철저하게 길들인 한자말, 전문용어를 다듬고 고르고 길들이기가 손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쓴 한자말을 그대로 한글로 적으면 많은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한자를 고집하지 말고, 한글세상 터전을 닦아 후손에게 물려주자.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중국 절강성 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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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507200.html 열리지 않은 사회와 코미디의 적들 박상혁의 예능예찬 » 개그맨 최효종 강용석 전 한나라당 의원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개그맨에게 돈 몇 푼 받거나 상처 입은 국회의원의 명예를 되찾으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이 황당한 고소는 자신에게 적용된 집단모욕죄를 무효화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이벤트’다. 개그맨 최효종(사진)이 없었다면 비슷한 개그를 한 다른 개그맨을 고발했을 것이다. ‘이런 분’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에서 코미디를 하기란 참 힘들다. 사회적 강자에 대한 비판은 방송사에 대한 직접적인 압력으로 이어진다. 특정 집단에 대한 풍자는 고발과 소송의 위험이 있다. 말장난이나 신조어는 심의실에서 제재가 뒤따른다. 연예인에 대한 희화화는 팬들의 공격을 부른다. 청소년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도 배려하고 정치적 편향도 조심해야 한다. 다 빼고 나면 결국 ‘몸 개그’만 남는다. 그러나 개그맨들이 넘어지고 때리고 맞고 나면 이번에는 저질이라고 비난한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개그맨의 수보다 개그를 감시하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더 많다. 대세가 된 공개 코미디 형식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들다. 가수들은 지금에 와서야 청중평가단의 냉정한 평가와 서바이벌 형식에 죽는소리를 하고 있지만, 개그맨들은 10년 전부터 매주 방청객들의 평가와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죽고 사는 상황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사실 공개 코미디의 성공은 이전까지의 코미디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전의 코미디는 소수의 스타급 코미디언과 몇몇 글 잘 쓰는 작가들이 만들었다. 신인들은 아이디어가 좋아도 단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공개 코미디 녹화장을 직접 찾은 방청객들은 스타라고 해서 웃어주지 않았다. 신인들이라도 아이디어가 좋으면 곧바로 대박이 터졌다. 노력하지 않는 스타들은 참신하고 열정적인 신인들에게 조금씩 무대를 넘겨야 했다. 방송에 출연하는 개그맨들뿐 아니라 대학로에는 방송사를 목표로 고생하는 수많은 개그맨 지망생이 생겨났다.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의 특성상 남녀의 심리 문제, 대중문화, 게임이나 인터넷 등 젊은 감각의 개그 소재들이 많아졌다. 사회문제에 직격탄을 날릴수록 박수가 터졌고 독설을 쏟아내도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신기하게 일단 객석에서 웃고 나면 이전까지의 금기들은 하나둘 허물어져 갔다. 예전 같으면 기분 나빠 할 사람들도 이미 객석에서 빵 터진 개그에 혼자 역정을 내기에는 좀 애매해졌다. 다시 코미디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개그콘서트>는 매주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다. 새로운 코미디 프로들도 속속 생겨난다. 세상이 엄숙할수록 사람들은 더 큰 웃음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크게 웃을수록 동시에 웃음에 정색하는 사람들도 때맞춰 활동을 개시했다. 이번에 우리를 슬프게 만든 것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분이 자신의 무죄증명을 위해서는 ‘일개 개그맨’ 정도는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대담함이다. 개그맨들은 1주일 동안 죽어라 아이디어를 짜고 다음주에도 살아남으려고 무대에 오른다. 정작 국민들이 냉정하게 탈락시켰으면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불행히도 그들에 대한 평가는 4년에 한번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대한민국 모든 개그맨들. 쫄지 마, 씨바. 에스비에스 <강심장> 피디
Board 추천글 2011.11.26 바람의종 R 30940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11006&cont=2445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발명품이다? - 박은봉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사람이지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는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나누었던 교토 대학의 교수다. 기하라 히토시가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것은 1943년 무렵이요, 그 내용을 「3배체를 이용한 무종자 수박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1947년이며, 우장춘이 한국에 씨 없는 수박을 널리 알린 것은 우장춘이 일본에서 귀국한 뒤인 1953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 하면 우장춘을 떠올릴 만큼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걸까? 우장춘 신화의 탄생 우장춘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1950년 3월, 그의 나이 53세에 한국에 정착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유전학의 한 분야인 육종학育種學이었다. 요즘이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로 유전학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55년 전인 그때만 해도 육종학이란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은 한국인들에게 육종학이 지닌 위력과 실용적 가치를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예로서 기하라 히토시의 씨 없는 수박을 얘기했던 것이다. 1953년에는 우장춘이 직접 씨 없는 수박을 시범재배해 보여주기도 했다.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새로운 채소 종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던 채소 종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의 채소 종자 개발과 보급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때 우장춘은 몇몇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그가 개발한 새 종자는 우장춘의 이름만큼이나 농민들에겐 생소하고 미덥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우장춘의 이름은 물론 새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널리 알릴 계기가 필요했다. 씨 없는 수박만큼 그에 적절한 것은 없었다. 귀국하기 전에 찍은 우장춘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부인 고하루, 넷째 딸 아사코, 큰딸 도모코, 큰아들 모토하루, 우장춘, 둘째 딸 마사코, 차남 스에하루, 셋째 딸 요오코. 1955년 7월 30일자 《영남일보》에는 “육종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우장춘 박사를 환영하고 과학농업의 발전상을 널리 소개하고자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하오니 다수 참석을 앙망하나이다. 지방 독농가의 참석 특히 환영”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우장춘이 속해 있던 연구소의 산하 기관인 한국농업과학협회 주도로 ‘우장춘 박사 환영회 겸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열린 것이다. 시식회의 본래 목적은 연구소에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보급하는 데 있었지만, 씨 없는 수박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연상시키게 하는 데 시식회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은 ‘육종학의 마술사’라는 제목으로 씨 없는 수박과 우장춘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전쟁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우장춘의 씨 없는 수박은 자부심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한 줄기 단비와 같았다. 사람들은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렸다. 우장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며 교과서에까지 그렇게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가 정정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장춘의 업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대상은 유채, 배추, 무 같은 십자화과 작물이었지 수박이 아니었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하는 콜히친이라는 화학물질은 우장춘의 연구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우장춘은 “수박은 검은 씨앗 한두 개를 깨물며 먹는 쪽이 훨씬 맛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우장춘은 1936년 「아부라나Aburana 속屬에 있어서의 게놈 분석-나푸스Napus의 합성과 특수 수정현상」이란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채를 비롯한 배추과 작물의 게놈 분석에 관한 이 논문은 자연의 새로운 종을 교잡실험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세계 최초로 ‘종의 합성’ 이론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미 나팔꽃 연구와 겹꽃 피튜니아 연구로 일본 육종학계에 이름을 알렸던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따지고 보면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과 아무 관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종의 합성’ 이론은 씨 없는 수박의 기초 원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겹꽃 피튜니아 연구는 종자를 대준 사카타坂田 종묘種苗 회사를 돈방석 위에 앉혀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튜니아는 겹꽃끼리 교잡해도 홑꽃이 섞여나오곤 했다. 우장춘은 수많은 실험 끝에 어떤 것과 교잡시켜도 전부 겹꽃만 만들어내는 절대 우성형질을 지닌 완전 겹꽃 피튜니아를 발견했다. 사카타 종묘회사는 우장춘의 피튜니아에 ‘사카다 매직’이란 이름을 붙여 시장에 내놓았고, 세계 피튜니아 시장을 독점했다. 사카다 매직의 값은 보통 피튜니아의 10배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에 대한 신화는 씨 없는 수박 말고 또 있다. 그의 생애를 둘러싼 신화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군인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다. 조선인 훈련대가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명성황후에 의해 해산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훈련대에게 시해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일본 측 음모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설, 적극 가담한 것이라는 설 등등. 게다가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뿌린 당사자로까지 알려져 있다. 아무튼, 사건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에 아내와 딸을 남겨둔 채. 그리고 기타노 이치헤이北野一平라는 일본 이름으로 도쿄에서 살다가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와 결혼했다. 그때 우범선의 나이는 39세, 사카이는 24세였다. 아버지 우범선가 어머니 사카이 나카, 그리고 어린 우장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첫 아이 우장춘을 비롯해 2남 4녀가 태어났다. 그러나 우장춘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우범선은 피살당했다. 살해자는 황국협회 부회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한 고영근과 그 하수인 노윤명이었다. 그 후 고영근은 귀국하여 ‘역적 우범선을 살해한 공적’으로 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을 지내다 세상을 떴다. 남편을 잃은 사카이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글도 읽을 줄 몰랐지만 성심껏 아이들 을 키웠다. 우장춘 형제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았다. 우장춘의 둘째딸 마사코昌子의 증언에 따르면, 양육비와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 주선해준 사람은 우범선과 친분이 있던 박영효였다고 한다. 히로시마 현립 구레吳 중학교를 졸업한 우장춘은 학비를 지원해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대학교육보다는 실업교육을 권장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방침이었으며, 우장춘이 입학한 농학실과 역시 대학 학부가 아닌 전문학교 과정이었다. 우장춘은 1919년 농학실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농림성 소속 농사시험장에 취직해 일하는 한편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에게 박사학위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차별과 농학실과 출신이라는 학력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가 농사시험장에서 받은 월급은 25엔. 당시 일본인 대졸 은행원 초봉이 40엔에서 50엔이었으니 절반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마침내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를 둘러싼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승진도, 원했던 중국 근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국으로 돌아오다 그럼 그는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걸까? 우장춘을 주인공으로 한 위인전에서 묘사하듯,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로 귀국을 결심한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씻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한 걸까? 우장춘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버지에 관해서는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우장춘은 8?15 해방 후 한 달이 채 안된 9월 초, 근무하던 다키이龍井 종묘회사 농장장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1950년 초 귀국할 때까지 5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지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우장춘은 귀국을 망설였다. 일본에는 가족이 있었고, 해방 후 복잡한 한국 상황을 볼 때 자신이 발붙일 자리가 있을지 미덥지도 않았다. 아버지 우범선이 한국에서 ‘국적國賊’으로 낙인찍혀 있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때문에 귀국해서도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받은 적이 있다. 귀국하여 부산 부두에서 환영의 꽃다발을 손에 든 우장춘. 우장춘의 귀국은 그의 역량과 재능을 알아본 몇몇 인사들의 제안과 설득의 결과였다. 우장춘과 함께 다키이 종묘회사에서 일했고 《원예와 육종》이라는 농학잡지 편집장을 지냈으며 우장춘이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이 되자 부소장을 맡았던 김종金鍾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성금을 모으는 한편, 부산 동래에 국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우장춘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장춘은 일본에 아내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2남 4녀를 남겨둔 채 홀몸으로 귀국했다. 해방된 지 5년만인 1950년 3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의 일이다. 그런데 실은 우장춘은 이때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에도 몇 차례 이복누이, 그러니까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남겨둔 딸 우희명禹姬命의 집을 다녀갔다고 우희명의 아들 강우창은 증언하고 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우희명과 자주 만났고, 우장춘의 아내 고하루가 우범선이 망명할 때 두고 온 첫 번째 부인을 ‘당신의 한국인 어머님’이라고 깍듯이 부른 것으로 보아, 우장춘은 해방 전부터 이미 한국의 가족들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장춘의 한국 시절, 그에게는 아내 말고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교육받고 일본어를 잘했던 그녀는 우장춘이 세상을 뜰 때까지 부산 동래에서 함께 살았다. 우장춘의 전기를 쓴 쓰노다 후사코에 따르면, 그녀는 우장춘이 죽은 뒤 그의 무덤이 자리한 수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귀국 후 우장춘은 육종사업과 후진양성 두 가지에 몰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농림부장관 자리를 제안했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평소 그는 제자들에게 관찰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말하곤 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한다’는 말이 있지. 식물을 관찰할 때도 ‘안광이 엽배葉背를 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장춘을 비롯한 농학자들은 수입에 의존하던 종자들을 자체 개발하여 ‘씨앗 독립’을 이루는 데 힘썼다. 한국에서의 우장춘의 연구와 활동은 당시 한국에 절실히 필요했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과학자로서 좀더 수준 높은 연구에 몰두하고픈 내밀한 소망은 조용히 묻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들을 자체 개발하고 재배하게 되어 ‘씨앗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의 재래종 채소들은 우장춘의 손을 거쳐 한층 맛좋고 질 좋은 품종으로 재탄생되어 한국인들의 밥상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 무, 강원도 감자, 제주 감귤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 새벽 3시 10분, 십이지장궤양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한국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상을 받은 우장춘을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Board 추천글 2011.11.24 바람의종 R 34175
광화문 앞 해태는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다? - - 박은봉 광화문 앞에 서 있는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들 한다.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조산朝山에 해당하는 관악산이 화기 넘치는 화산인 까닭에 경복궁에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면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꼭대기에 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고, 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해태를 세웠다는 것이다. 광화문 양쪽에 버티고 앉아 고개를 외로 꼰 채 관악산을 노려보고 있는 해태를 보면 필경 그 말이 맞을 성싶다. 그런데 해태는 원래 광화문 앞에 있지 않았다. 해태의 원래 자리는 지금처럼 광화문 코앞이 아니라 문에서 4,50미터쯤 떨어진, 육조거리의 사헌부 앞이었다. 해태의 원래 자리는 광화문 바로 앞이 아니라 문에서 4,50미터쯤 떨어진 사헌부 앞이었다. 사진은 원래 자리에 서 있는 해태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광화문 앞 쭉 뻗은 대로를 육조거리라 했다. 육조거리에는 이조, 호조, 예조 등 정부의 6개 주요 관청을 비롯해서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 앉아 남면南面할 때를 기준으로 왼쪽, 즉 동편에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있었고, 오른쪽 즉 서편에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자리 잡았다. 그중 사헌부 앞,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앞쯤에 길 양쪽으로 해태는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해태는 사헌부의 상징 육조거리의 여러 관청 중 하필 사헌부 앞에 해태가 자리 잡은 건 그저 우연일까? 해태는 예부터 전해오는 상상 속의 동물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영물이다. 해치라고도 한다. 중국의 《이물지異物志》라는 책에 따르면, 해태는 동북쪽 깊은 산 속에 사는 짐승인데 뿔이 하나 있고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 뿔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순임금 때 법을 담당했던 고요皐陶라는 신하는 옥사를 다스릴 때, 해태로 하여금 죄 있는 사람을 들이받게 했다 한다. 해태는 그래서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한자의 법法이란 글자는 오늘날 삼 ‘수’변에 갈 ‘거’로 쓰이고 있지만, 고대에는 삼 ‘수’변에 해태 ‘치’ 밑에 갈 ‘거’로 쓰였으니 ‘법’이었다. 풀이하면, “물처럼 잔잔한 마음으로 사람의 말을 가려내 죄인을 뿔로 받아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치’는 생략되고 갈 ‘거’만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법’이란 한자를 ‘물 흐르듯 간다’로 풀이하는 건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해태 흉배. 조선시대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이 입는 관보의 흉배에는 해태가 그려져 있었다.이런 해태와,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 탄핵하는 일이 주 업무인 사헌부를 관련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태는 사헌부의 상징이었다. 사헌부는 지금으로 치면 검찰과 같다. 사헌부의 수장, 그러니까 지금의 검찰총장 격인 종2품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는 해태가 그려져 있었다. 다른 문반 관리들의 흉배가 공작, 기러기, 학 같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동물이었던 것과는 딴판이다. 또한 사헌부 관리들은 해태 문양이 장식된 모자를 썼다. 이 모자를 해치의 ‘치’를 따서 치관이라 했다. 사헌부 관리들이 치관을 쓰는 이유는 해태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인조실록》은 밝히고 있다. 사헌부 정문 앞에 앉은 해태는 그 앞을 지나다니는 관리들에게 공직자로서의 바른 태도와 곧은 마음을 촉구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해태의 기능은 하나가 더 있었다. 1900년대 초 육조거리를 찍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태 옆에 조그만 노둣돌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노둣돌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릴 때 발을 딛는 돌이다. 해태는 여기서부터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下馬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7년(1870) 2월 12쿀자를 보면 “해태 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함께 엄히 신칙하라”는 고종의 하교가 실려 있다. 그럼 해태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는 전혀 터무니없는 것일까? 해태가 갖고 있는 여러 상징성 중의 하나가 ‘불을 다스리는 물의 신’이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육조거리에 해태가 들어선 건 경복궁을 처음 세운 조선 초가 아니라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였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은 유난히 화재가 잦았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잿더미가 되기 전에도 몇 차례 크고 작은 화마에 휩싸이곤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복궁은 무려 300여 년 동안이나 폐허 그대로 방치되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였단다.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을 무려 300여 년 동안이나 폐허로 버려둔 건 경복궁이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 그리고 궁궐을 재건하려면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버려졌던 경복궁을 재건하자고 나선 사람이 흥선대원군이었다. 나이 어린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다름 아닌 경복궁 중건이었던 것은 그 사업을 통해 흥선대원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나아가 왕실의 위엄을 곧추세우기 위해서였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육조거리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임진왜란 뒤 그 흔적이 ‘밭 사이에 흩어져 있던’ 의정부 건물을 복설하고, 없어졌던 삼군부를 예조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예조는 한성부 자리로, 한성부는 지금의 태평로로 옮겼다. 이로써 육조거리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해태가 들어선 건 바로 이때였다. 해태를 조각한 사람은 당대의 이름난 석공 이세욱이다. 역사와 함께 굴절된 해태의 의미 그런데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헌부 앞에서 위엄을 떨쳤던 해태는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수난을 겪게 된다. 1923년에 철거되어 한창 공사 중인 조선총독부 건물 서쪽 담장 밑에 거적때기 한 장 깐 채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자 그 앞에 세워져 식민지 지배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를 지켜주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광화문이 1968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될 때, 해태도 현재의 자리에 앉혀졌다. 해태의 운명은 굴곡 많은 우리 근현대사와 궤적을 같이한 셈이다. 사실 광화문이나 경복궁은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번씩 위치가 바뀌고 수많은 변형과 왜곡을 겪었다. 육조거리도 완전히 헐려나갔다. 해태라고 온전히 제자리를 지켰을 리는 만무하다. 시비선악을 가리는 영험스러운 동물로서의 상징성도 보존되기 어려웠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해태가 지닌 본래의 상징성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관악산의 화기를 누를 목적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만 남아 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앞으로 옮겨졌던 해태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광화문을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광화문 바로 앞에 앉혀졌다. 2009년 새로 복원될 광화문. 해태는 어디에 앉게 될까? 사진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3월 16일에 찍은 경복궁 일대. 오늘날 해태는 광화문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중심축인 입법부와 사법부 앞에도 해태가 있다. 뿐인가. 시와 시, 도와 도를 잇는 경계선에도 있다. 국회의사당 앞의 해태는 1975년 의사당 완공과 함께 세워졌다. 당시 국회 사무총장이었던 선우종원의 회고에 따르면, 의사당 앞 해태는 고증 자문위원이었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화재를 예방하려면 조선시대처럼 해태를 세워 화기를 눌러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에 따라 세워졌다고 한다. 관악산 화기론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조선시대 같은 목조 건물도 아닌 의사당 앞에 화기를 막기 위해 세운 해태는 그 본연의 의미 상실을 다시금 확인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공직자의 바른 태도와 마음을 촉구하는 상징으로서의 해태는 영영 사라진 것인가? 의사당 앞 해태 상 건립에 필요한 경비는 해태제과에서 댔다. 그래서 해태상 뒤쪽에는 ‘해태제과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박병규 기증’이라는 글이 새겨졌다. 기단 공사를 마칠 무렵, 사장 박병규는 당시 해태주조에서 출시한 순국산 포도주 ‘노블와인’을 잔뜩 가져와 기념으로 묻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포도주는 ?금도 해태 상 밑에 묻혀 있을 것이다.
Board 추천글 2011.11.21 바람의종 R 30688
. 경천교를 건너며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철이들면서 조금식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법을 설하셨고 저는 연기를 배우는 수행자로 계를 받았습니다 . 그러나 지금 저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참혹한 광경을 밟으며 경천교를 건너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젖줄로 모든 생명을 길러왔던 어머니강을 그 심장부까지 난도질하는 잔혹한 현장을... 파헤쳐지는 금빛 모래는 흐름을 맑히던 정화의 기슭이었고 은빛 물결은 많은 생명들을 키우던 생태계의 자궁이었습니다. '생명 살리기라'는 휘장으로 가려진 장막 안에서 정화의 땅은 파헤쳐진고 생명의 강은 검게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와 기도의 땅이 묻혀져 가는 강변을 바라보며 끝내 이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며 역사속에 우리는 나란히 공범으로 서게 될 것이라고.... 아아, 바라건데 저희를 버리지 마소서. . 지금 저는 경천대 10경, 그리고 낙동강 100경의 전후 모습을 정리하고 있으며 이 사진들을 홈과 트윗을 통해 올리고 이 현장을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 알려 갈 것입니다. 경천대 10경 원본 파일은 웹하드 leewysu / 1234 / 4대강 폴더에 올려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 . . ▶ 초록의 공명 www.chorok.org
Board 추천글 2010.12.19 바람의종 R 30181
. 지난 달 제가 머무는 상주 경천대를 찾아주신 르몽드 Philippe Pons기자님의 인터뷰 기사가 12월 4일 르몽드 지면에 실렸습니다. 한강 패소 판결을 두고 조중동이 다시 천성산 논리를 들이대며 비난을 쏱아붙고 있는 그 싯점에 먼 나라에서 현장까지 찾아와 인터뷰하고 가신 외국인 기자의 기사는 오히려 저를 슬프게합니다. . ...... 아시아에서 띄우는 편지 2010년 12월 4일자 <르몽드> 모래톱 위에 몸을 숙인 채, 그녀는 흐르는 강물에 손을 맡기다, 이내 물길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고운 모래를 한 줌 쥔다. 이곳은 서울 남동쪽에서 200km 떨어진 낙동강. 유유히 장엄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는 크게 굽이쳐 돈다. 강은 흐르다 오른 편에 수풀이 우거진 구릉을 만나고 그 건너편으로는 희디 흰 모래톱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물살이 약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모래톱 섬이 강줄기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그을린 얼굴, 예스러운 밝은 잿빛의 승복을 입은 자그마하고 가냘픈 체구의 지율 스님은 날마다 사진장비를 메고 낙동강과 주변을 살핀다. 그녀는 강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아 한 장 한 장 정리해 강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보여 준다. 태백산에서 처음 샘솟아 남쪽으로 330km를 흘러 부산 부근의 바다로 흘러드는 한국의 가장 긴 강 낙동강의 생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의 나머지 3대 주요 강들과 마찬가지로, 낙동강도 대규모 정비 공사의 대상이다. 환경주의자들과 시민운동단체, 종교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권은 아랑곳 않는다. 지난 5월, 강의 상류 지보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수 스님은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하였다. 한국 불교 역사상 스님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건 자살이 아니고 뭇 생명들에 대한 연민을 상징하는 소신공양입니다. 스님의 시신을 찾았을 때 보니 스님은 손을 합장한 채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라고 한국의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의 지관 스님은 말한다. 지율 스님은 문수 스님의 희생이 일깨우는 의미를 간직한 눈으로 “저는 그 스님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루해가 지는 적막 속에서 저 멀리 아직도 굴착기와 불도저의 소음이 들려온다. 그들은 6m 깊이로 강바닥을 파헤치고 일부 구간에서는 구불구불한 강줄기를 직선으로 만들려고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고 있다. “정부는 녹색성장을 말하면서,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3년간 배상을 받고 말았습니다. 농촌 사람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지율 스님은 말한다. 스님이 논과 감나무 과수원, 누에치기로 삶을 일궈온 이곳 중동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가냘픈 체구에 50줄에 들어섰지만 조용히 결의에 찬 그녀는 ‘성가신’ 존재였다. 그러나 점차 마을은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님은 아무도 살지 않던 낡아 쓰러질 듯한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저녁이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침이면 지붕 기와에 앉아 쉬며 노래하는 새 소리에 잠이 깹니다.” 새벽부터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으로 향한다. 이렇게 은신처에서 나와 즐기며,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한 아이마냥 경탄한다. 강에서 주운 조개껍질, 모래 위에 남은 생명체의 흔적 등, 스님은 책상다리로 앉은 채 이야기하는 동안 연신 이들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발을 담근 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대화는 계속된다. 지율 스님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받자 고개를 젓는다.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이지요”라고 스님은 말한다. 오랜 동안 스님은 어느 암자에서 은둔했었다. 2001년 어느 날 숲 속을 거닐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계가 나무들을 베고 숲을 파헤치는 것을 목격했다. “마치 전쟁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슬픔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고문을 받고 있는 이 나무들과 이 땅의 살려달라는 외침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그녀는 암자를 떠나고 싸움을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진행한 삼보일배, 농성, 단식, 국가에 대한 소송 등 지율 스님은 실천을 확대해 나갔다. “암자를 떠날 때 나는 너무도 순진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법은 약자를 위하지도 않고 이 땅에서 싸움은 헛되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식은? “단식이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의 모든 힘을 다해 뛰어들었습니다.” 마지막 단식은 생명을 잃을 뻔했고, 뒤이어 스님은 산 속의 외진 은신처에서 3년을 보냈다. “자연과 마주하며 함께 한 이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자연 속에서 모든 감각은 더욱 명민해집니다. 바람 속에 하나가 되고 안개 속에서 자연의 정기를 받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로 돌아왔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죽이고 있습니다. 4대강 공사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다가 올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내 눈을 주고 싶습니다. 이 강은 수백 년을 흘러 바닥을 다지고 지금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를 그려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천 년 이어온 자연의 작품을 단 2년 만에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조급한 공사가 어마어마한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건 굳이 과학이 아니어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난 50년 간 우리가 저질러온 일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성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를 이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물질적 발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아픈 아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부모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때 아이가 살아날지 아닐지는 묻지 않습니다. 아픈 아이를 돕기 위해 옆에 있을 뿐입니다.” 글·필립 퐁스 Philippe Pons <르몽드> 도쿄 특파원 *** 위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실에서 번역해주셨습니다. 원문은 초록의 공명 홈 '물길을 걷다' 에 올려져 있습니다. . . 맨발로 경천대 강가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이 푸른눈의 기자님이 지금 이 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면.... 사진 이상엽 우리는 아픈 강가를 떠나지 못합니다 낙동강 제1의 비경 인 경천대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낙동강의 푸른 눈 경천대를 통하여 4대강 사업의 실상을 알립니다. 한사람이 사진을 들고 걷는 간격은 10m정도입니다. 300명이 3km의 길을 걸으면 광화문 광장은 가득차게 됩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대한문 앞에서 시작하는 경천대길 걷기에 함께해주세요. ▶ 초록의 공명 www.chorok.org
Board 추천글 2010.12.19 바람의종 R 31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