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동안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눈을 뜨고 햇볕아래 나갈 수가 없어 두꺼운 커텐을 치고 어둔 방에 누워 끙끙 앓았습니다. 순간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싫었고, 그대로 누워있는 일도 힘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머리 위로 덤프 트럭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제 신음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고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앓고 있는 사이 제 숙소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현장 사무실이 차려졌고 차량들이 제 집 앞을 지나 그리로 오고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늦은 밤 수경스님께서 전화하셔서 "여긴 지옥이야, 지옥이야" 시며 울먹이시던 생각이 났습니다. 스님께선 이젠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 쪼이며 편안해지셨을까요? 회상 모래벌 식당 아주머니께서 써오신 흰죽에 기운 차려 일어나 서울에 경천대 로드맵을 만들어가자 했던 일이 임박하기에 함께 자리했던 분들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그 사이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 경황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루자는 눈치였지만 우기다시피 해 하자했습니다. 내일이네요. . . 저 역시 이 순간까지 인화된 사진 한 장 없지만 그래도 경천대 거리 사진전에 참여합니다. 준비가 소홀하고 평일 낮 시간이라 많은 분들이 함께하기는 어려울 듯 하지만 일인시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라서요. 혹여해서 경천대 10경 사진 원본 웹에 올려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은 다운 받으셔서 함께 해주세요. 웹하드 leewysu 비밀번호 1234 4대강 폴더 중 경천대 10경 . 경천대 10경 . 위 10경 사진은 제 홈에도 올려놓겠습니다. 지도와 비교하며 살펴보면 더 많은 것을 볼수 있습니다. 제가 경천대 이야기를 놓치 못하는 이유는 이곳이 낙동강 최상류이고 최전선이기 때문입니다. 회상들 아래 사진은 지난 1년 동안 오리섬 하부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제 그 위에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 생태공원을 조성한다고 합니다. 상주 33경 낙동강 100경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기록들을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 . 이제 이 싸움은 막바지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수모임에서 진행하고 있는 333현장 답사는 전문가들의 동행답사라는 점에서 교육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인들의 거리 기도도 계속되고 있으며 4대강 예산 전액 삭감을 위한 범국민 대회도 29일 5시 시청광장에서 진행됩니다. "한발 한발 나아가지 않으면 천리를 갈 수 없고, 작은 시내가 모이지 않으면 큰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하였습니다. 우리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을 소중히 생각할 따름입니다. ▶ 초록의 공명 www.chorok.org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대한문 앞에서 경천대 길을 만듭니다. 함께해 주세요
Board 추천글 2010.11.26 바람의종 R 28588
경천대 시민 사진전 7주일 동안 조계사 나무 겔러리에서 열렸던 제 1회 경천대 시민 사진전을 마쳤습니다.전시를 끝내고 전시를 함께 준비했던 이상엽 사진작가와 장세명님, 사진을 제공해주신 분들이 모여 사진전의 연속작업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 . . 경천대 시민 사진전은 앞으로도 대관이 준비되는 대로 계속 진행 할 예정이며 무엇보다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천대 공사 전 후 사진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이 논의 되었습니다. 경천대 로드맵 . . . 두 번째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대한문에서 출발하여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정동-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 시청- 대한문에 이르기 까지 약 4km의 길에(10리) 경천대 로드맵을 만들기고 참여 작가- 시민들이 각자 자신이 촬영한 경천대 사진을 들고 이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 . . 대한문 앞에서 출발하는 경천대 시민 사진전은 11월 26부터 진행합니다. 이번 한주는 준비, 홍보기간으로 쉬고 11월 26부터 진행하려합니다. 경천대 사진전과 경천대 로드맵은 운하반대 교수모임에서 진행하는 333답사팀과 연동하여 진행합니다. 지난 2년 동안 낙동강의 변화를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이 일은 큰 독에 물을 채우는 일, 혹은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이는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했습니다. 쫏기고 있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 큰 솥 안에서 엉켜 아직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물이 끓는 징조 중의 하나는 분노가 아니라 불의 앞에 무기력해지는 순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닥을 치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다시 일어나는 불길은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에 슬픔을 거두고 강가에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사진전에 동참해주신 분들 , 발걸음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지난밤 조계사 앞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뵈었습니다. 늘 걱정을 끼쳐드렸는데 어제는 외람되이 제가 신부님 걱정을 했습니다. "건강은 어떠셔요?" 5년만에 뵌 신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그 뿐이었습니다. ▶ 어찌 이곳을 흐트리려 합니까http://cafe.daum.net/chorok9 저는 지금 경천대 33경을 좌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낙동강 100경에 대한 정리도 하고있습니다. 정리 되는대로 카폐를 통해 업그레이드 하려합니다. 살펴주세요.
Board 추천글 2010.11.15 바람의종 R 28888
. 여름이 지나가고 마지막 계절이 닥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열매는 익고 나뭇잎은 떨어질 것이며 감추어졌던 것은 나타날 것입니다. . . . 장마철을 지나며 잠시 멈짓햇던 오리섬 강변에 준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열흘 남짓한 공사 기간동안 강은 온통 뒤집혔고 사방은 요란한 굉음 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날마다 강가에 나가 강을 향하는 기도를 멈출수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5차례에 걸쳐 한겨례에 오리섬 공사 현장을 실은 4대강 반대 광고가 나갑니다. 그동안 오마이 블러그를 통해 모인 독자 후원금과 기사고료, 그리고 신문사의 배려입니다. 제가 특히 이곳 상주에 안착하고 광고운동까지 하는 이유는 이곳이 낙동강 최고의 비경이라고 부르는 경천대 부근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기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해서 막연하게 밖에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짐짓 신문의 지면이나 전파매체를 통해 보는 현장은 어쩌면 정부가 보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속 80km의 속도로 현장을 지나갈 때도 우리는 2차원 이상의 풍경을 볼 수는 없습니다. 현장에 있으면 모래 한 알, 돌맹이 하나도 나와 1 : 1 대응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위 사진은 한겨례에 올린 광고사진이며 사진을 클릭하면 동영상으로 옮겨갑니다. 이시점에서 제가 할수 있는 일은 현장의 소식을 전하는 일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날마다 오리섬 공사 현장부근에 나아가 트위터를 통하여 나날의 일지를 올리고 (chorokorg) 나름 블러그와 홈피를 통해서도 소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주위분들은 그런 저를 보고 "참 독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걸 어떻게 매일 보고 있냐고 .... 때로 무기력한 깊은 슬픔이 꿈속에서까지 찾아옵니다.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면 저는 佛家의 게송 한 구절로 마음을 다스립니다. 唯願諸佛 作證明 寧捨身命 終不退 원컨대 모든 부처님이시여 증명하소서.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물러서지 않겠나이다. http://twitter.com : 초록의 공명
Board 추천글 2010.09.06 바람의종 R 32767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37080.html 나라를 더럽히고 고통을 준 원흉이 나였단 말인가 고전 오디세이 ⑬ “너 자신을 알라”를 향한 소포클레스의 도발 ‘오이디푸스 왕’ 고명섭 기자 » 고전 오디세이 인간은 끝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예수는 답을 안 뒤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결단하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었다. 우리는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가 존재의미를 안 뒤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의 아들인 나를 사람들은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과 신 사이에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고. 그러나 베드로는 대답했다. “당신은 메시아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그가 신의 아들이라면, 그래서 모든 것을 아는 신 자체라면 그런 질문이 그에게 굳이 필요했을까? 만약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이 정말로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면, 참으로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신이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인간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확인하며, 회의하고 좌절하며, 또 희망을 찾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다. 예수가 단순히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 질문은 그가 인간조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음을 환히 보여준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겪으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하게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인간조건은 신의 아들인 예수에게 곁들어진 가벼운 액세서리가 아니라, 절박한 실존의 묵직한 조건이었다. 그 조건 속에서 자신이 비록 인간이지만, 동시에 인간들을 위해 처절하게 찢겨져야만 하는 신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 곧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때,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신의 아들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이해되는 예수의 질문과 결단은 옛 그리스의 지혜와도 잘 통한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의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이 말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준다. 자기 주제와 분수를 알지 못하고 날뛰는 사람이 세상에 끼치는 폐해를 생각해보면, 이 말에 담긴 지혜의 깊이와 가치를 잘 헤아릴 수 있다. 문제는 이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에서 생긴다. 그래서 이 지혜는 존경의 대상이 되면서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이 치명적인 역설을 잘 보여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뭔가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지혜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샀고, 독배를 마셔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지혜의 시금석을 지당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던져 볼 만한 질문이 있다.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꼭 알아야만 하는가? 진정 그 앎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부은(oidi-) 발(pous)을 가진 사나이 ‘오이디푸스’다. »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1808년 작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는 테바이의 왕이다.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에는 테바이가 아닌 코린토스의 왕자였다. 그런데 왜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그가 테바이에서 왕 노릇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 오이디푸스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온 기막힌 삶에 잇닿게 된다.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술에 취한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코린토스 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부모님을 찾아가 확인을 요구했다. 왕과 왕비는 그것은 헛소리니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이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고, 또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도성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그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을 찾아 갔다. 그는 물었다. “전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 친부모는 누구입니까?” 신탁의 대답은 뜬금없이 끔찍했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죽이고, 너의 어머니와 몸을 섞을 것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인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그가 향한 곳이 하필 테바이였다. 그곳에서 그는 테바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스핑크스를 예지를 발휘하여 물리쳤고, 테바이 사람들의 구원자로 떠올랐다. 때마침 국왕이던 라이오스가 테바이 외곽 지역에서 도적들에게 살해를 당한 뒤라, 왕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라이오스의 미망인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네 자녀가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테바이에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에게 몰려와 스핑크스를 물리쳤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테바이를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델포이 신전으로부터 오이디푸스에게 전해진 구원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가 들어와 테바이를 더럽혔다. 따라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 처형을 하든가 도성에서 쫓아내야 테바이는 깨끗하게 정화되고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명감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나는 이 살인자가 누구이든,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땅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것처럼 싸워나가겠습니다. 살인자를 찾아 모든 곳을 수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살인범을 찾아가는 데에 몰입할수록, 그가 누구인지가 점점 드러났다. 사실 그는 테바이로 들어오기 전에, 한 노인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그 노인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고, 라이오스를 죽이고 도시를 더럽힌 자가 바로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한때 테바이의 구원자였고, 현재 테바이의 왕이지만, 알고 보니 테바이를 더럽히고 역병을 몰고 온, 고통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그가 장담한 대로 도시를 정화하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처형하거나 추방해야만 했다. 더 끔찍한 일은 그가 죽인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따라서 지금 그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왕비 이오카스테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신탁은 그렇게 실현되었다. 참혹한 사실을 감지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말렸다. “신들께 맹세코, 그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제발 그것을 추적하지 마세요. 난 충분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 아, 불행한 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하기를!” 이오카스테는 오싹했다. 그녀가 수십 년 전 오이디푸스를 임신했을 때, 그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부부는 태어난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뒤꿈치를 쇠로 뚫고 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음의 순간에서 구해졌고, 코린토스의 왕실에 건네졌다. 그의 발이 부은 이유, 그가 그래서 ‘오이디푸스’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오카스테는 험악한 운명을 피하려고 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나, 그 저주스런 운명을 피할 순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치욕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이디푸스 역시 참혹한 운명을 피하려고 코린토스의 부모를 떠났지만, 결국 제 발로 친아버지를 찾아가 죽이고, 친어머니를 범한 꼴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파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끔찍한 운명을 피하려던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 순간, 파멸의 나락으로 한없이 곤두박질쳤다. “너 자신을 알라”는 지혜는 그들 모자에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희망하며 살아간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우리의 건전한 상식을 도발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진리와 우리의 존재의미를 알게 될 때, 혹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허무와 파멸의 끝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냐고.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Board 추천글 2010.08.27 바람의종 R 26747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281 ‘사람의 눈’이 필요한 때입니다 [작가회의 기고]2010년 8월 대한민국 2010년 08월 18일 (수) 14:55:23 오도엽 시인 ( media@mediatoday.co.kr) 계영대 씨 아파트 베란다는 망루입니다. 대형 망원경이 언제 침탈할지 모르는 적을 향하여 스물네 시간 번뜩이는 눈으로 감시합니다. 거실은 야전부대 상황실입니다. 노트북 세 대가 시시각각 변하는 적의 동정을 파악하여 기록합니다. 적에게 고립된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합니다. 안방은 물품 보급창고입니다. 생수와 라면, 그리고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계영대 씨는 비밀 루트를 통하여 끊임없이 물품을 조달받습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노트북만 다섯 대입니다. 계영대 씨는 쌍용자동차 ‘강제’ 희망(?) 퇴직자입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직원들은 공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수십 년간 일해 온 공장에 77일간을 스스로 몸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물이 끊기고, 전기가 끊겼습니다. 산짐승이 되어 공장을 지키던 계영대 씨는 68일째 되는 날, 백기를 들고 공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친형 계영휘 씨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형, 미안해. 먼저 나갈게.’ 자진해서 옥쇄를 풀고나오면 선처를 베풀겠다는 선무방송을 듣고, 계영대 씨는 동료와 친형을 남겨두고 공장을 빠져나왔습니다. 곧바로 손목에 수갑이 채어지고 온몸이 오랏줄로 묶였습니다. 아파트를 망루로 만든 쌍용차 강제 '희망' 퇴직자 계영대 씨가 ‘선처’를 받아 간 곳은 유치장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내가 공장을 그만두기를 희망해서 스스로 사직을 한다’는 ‘퇴직서’를 쓰라는 것입니다. 공장을 다니겠다는, 그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식구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계영대의 진심은 갈기갈기 찢기고 정말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서’를 써야 했습니다. 계영대 씨가 오랏줄과 수갑에서 풀려나서 유치장 너머에서 기다리는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 지난 2009년 8월 5일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공장을 점거중인 노조원들이 인근 건물을 모두 장악한 경찰과 사측 직원들의 공격을 피하며 바리케이트 저지선을 만들고 있다. ⓒ노컷뉴스 그날 이후로 계영대 씨는 자신의 아파트가 공장이 되었습니다. 지키지 못한 공장을 자신의 집에 세우고 다시는 나의 진심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망루를 세우고 상황실을 꾸리고 보급품을 준비했습니다. 계영대 씨의 눈은 망원경 너머 세상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 흘렀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가해진 야만의 77일이 끝난 지. 계영대 씨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습니다. 전투 상황실에서 계영대 씨와 살 수 없었던 아내와 자식은 그 전에 전쟁터를 탈출했습니다. 68일째 공장을 나왔던 계영대 씨. 이번에는 홀로 남더라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건만 포로가 되어 병원에 갇혔습니다. 해고가 옳은지 그른지, 노동자들의 공장 지키기가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말하려고, 기억하기조차 끔직한 일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닙니다. 평택을 고용촉진지구로 지정해 일자리 만들겠다는 정부 정책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건설현장 날일 아니면 대리운전이라는 말도 꺼내기 싫습니다.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이 짐승보다 못한 야만에 시달려 거의 절반 남짓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공장에 있던 600명 가운데 부상자가 290명이었다는 이야기도 이제 그만 하고 싶습니다. 이미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목숨을 버려야 할지 알 수 없다고 호소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대한민국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그냥 묻고 싶습니다. 뜨거운 심장에 묻는 게 아닙니다. 냉철한 이성에 묻는 것도 아닙니다. 2010년 대한민국에게 묻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을 국가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니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대한민국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사람의 눈이 필요할 때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와 지식과 경험이 쌓여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뭔가 앞서가는 사고, 새로운 철학, 뛰어난 이론, 훌륭한 정책을 내놓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찾는 것입니다. 경쟁의 눈, 생존의 눈, 물질의 눈, 야수의 눈, 파괴의 눈, 강자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 냉혈이 아닌 따뜻한 붉은 피가 돌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기쁘면 함께 웃고, 어려움은 나누고, 더디더라도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사람, 그 본연의 눈. 한여름입니다. 이 무더위 언제 지나가나 한숨이 푹푹 나오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추위 언제 지나가나, 봄은 언제 오나, 호들갑떨며 두툼한 외투 깃 올릴 날, 그리 멀지 않았으니. 조용히 귀 기울여 보세요. 스무날 살고 지는 매미 울음 사이로 귀뚜리 울음 들릴 겁니다. 가만히 눈여겨보세요. 창창하게 푸르던 나뭇잎에 가을이 살포시 물들었습니다. 귀 기울이고 눈여겨 이웃을 바라보세요. 아, 그곳에 계영대 씨가 있다고요? 곳곳에 망루가 늘어가고, 망원경이 세상을 향하여 사람을 찾고 있다고요? 일 년 전 쌍용자동차를 떠올리며, 굳이 절망을 되뇌고 싶지 않습니다. 위정자를 꼬집고 싶지도, 사람이 없는 공장에 삿대질하기도 싫습니다. 내 얼굴에 사람의 눈과 귀가 아직 달려 있는지 손으로 매만질 뿐입니다.
Board 추천글 2010.08.25 바람의종 R 28481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019 이 정권엔 목숨 걸고 MB 말릴 사람 없나 [작가회의 릴레이 기고] 광해군에겐 있고 MB에겐 없는 것 이은규(시인) 옛날이야기이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한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최종 33명이 뽑힌다. 이들은 더 이상 탈락하지 않는다. 다만 등수가 결정될 뿐인데,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등수가 가려지는 최종시험이 바로 책문이다. 왕은 절박하게 인재를 원했고, 관건은 시대의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갈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당대의 가장 절박한 물음에 목숨을 걸고 진솔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구했다. 그런 점에서 대책을 진술하는 선비는 스스로를 재상이라고 가정하고, 자기가 만약 재상이라면 왕을 보필해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갈지를 토로했던 것이다. 광해군 3년, 과거의 마지막 관문 책문서 "나라의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냐" 목숨걸고 직언한 임숙영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 ▲ 4대강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환경운동가 3명이 지난 22일 경기도 여주 이포보 공사현장 점거농성에 들어가며 설치한 대형현수막은 그날 오후 현장시공업체(대림산업) 관계자들이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아래부분을 말아버렸다. 3일 후인 지난 25일 오후 농성자 중 한 명인 박평수 고양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이 암벽등반장비를 이용해 보 상판 고공농성장에서 수문 위로 내려와 현수막을 펼친 후 다시 올라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했다. 27일 현재 이포보와 경남 함안보에서 4대강반대를 위한 환경운동가들의 점거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예컨대 1611년, 광해군 3년에 실시된 별시문과 책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당시의 시급한 일을 잘 파악하는 데 있을 뿐이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요령 있게 공적을 이룰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으로 무엇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필시 일찍부터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해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이에 임숙영(1576~1623)이 올린 대책의 요점은 이렇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책문에서 스스로의 실책과 국가의 허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문제를 내지 않으셨으니, 저는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중요한 문제를 애오라지 덮어두기만 하고 의논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저는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전하께서는 자기 수양에 깊이 뜻을 두시되, 자만을 심각하게 경계하십시오.> 위험한 발언과 마주한 광해군. 시험을 주관하는 시관인 심희수가 임숙영의 대책을 장원으로 급제시키려했으나, 다른 시관들이 반대해 병과 합격에 그치고 만다. 광해군은 임숙영의 대책을 읽고 자신의 실정을 극렬하게 비판하는 데 진노하여, 그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하는데 이른바, 삭과(削科) 파동이 그것이다. 분노한 광해군, 직언 선비 이름 삭제 지시…재상들 반대 '삭과 파동' 끝나지 않은 옛날 이야기…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삼사(三司)에서 간쟁을 하고 재야에서도 임숙영의 정정당당한 주장을 지지하여, 삭과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논계(論啓)가 수개월 이어졌다. 이덕형, 이항복 등이 대책을 간절히 변론하자, 광해군은 마지못해 주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차후에는 질문의 요지를 벗어난 대책은 과거에서 선발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결국 심희수는 벼슬을 내놓았고, 권필은 삭과 파동이 빌미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파란이 일단락된 후 임숙영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전과 역사에 밝았던 그는 광해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비판하다가 파직 당하기에 이른다. 1623년 복직되었지만, 그 해 가을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게 된다.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은 어떤 화법을 지니고 있는데, 이렇듯 근원적인 공감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떻게 예언적인 음성이 아닐 수 있겠는가”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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