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지난주 전국의 학보사 친구들과 1박 2일 동안 한강과 낙동강 순례에 함께했습니다. 이곳이 몇년 전 혼자 걸었던 여강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참혹한 광경들이었습니다. ... 그동안 우리는 온통 녹색으로 처진 장막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 녹색의 장막안에서는 모래를 준설하고 강바닥을 깨기 위하여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하고 있었고 이 현장의 바로 앞에 "생명이 깨어나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한강"행복의 강"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우리를 조소하듯 서있었습니다. ... 이 현장에 선 학생들은 그동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파괴되고 있는 한강권역을 벗어나 원시적 생태하전의 모습을 간직한 내성천에 도착하자 비로소 그동안 살아 오면서 질문하기를 잊었던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 . ... 지난주 천주교 사제 1100여명이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선언문을 발표했고 지난 목요일에는 주교회의에서 "우리나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선언문을 발표하기 전, 천주교 주교회는 찬반 양론의 전문가들을 불러 양측의 주장을 듣는 시간을 가졌으며 대단히 신중한 논의를 통해 선언문이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설명회 당일 찬성측에서는 차관을 비롯 단장, 부단장 국장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반대측 대표로는 서울대 김정욱 교수님께서 단신으로 가셔서 강의 하셨다고 합니다. 주교회의 성명서에는 이 과정이 "정부 실무진의 설명을 들어보았지만 우리 산하에 회복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대규모 공사를 국민적인 합의 없이, 법과 절차를 우회하며 수많은 굴착기를 동원해 왜 이렇게 급하게 밀어붙여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밝히고 “욕심으로 인한 경솔한 개발의 폐해가 우리 자신과 후손에게 지워질 때, 이 시대의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의 깊은 우려로 나타나 있습니다. 생명의 강을 위한 4대 종단 공동 기도회 어제(3월 15일) 4대 종단의 종교인들은 상주 회상 모래벌에서 생명의 강을 위한 기도회를 봉행했으며 지난 목요일 수경스님께서는 불편하신 몸으로 지팡이를 의지하여 다시 강가로 나가셨습니다. 지금 전국 각처에는 4대강 개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활동하는 단체와 모임들이 있습니다. 지금 작은 실천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재앙은 그리 먼 미래까지 가지 않을 것이며 이 사업의 재앙은 순전히 우리의 몫으로 돌아 올것입니다. 아래 링크되어 있는 영상은 주교회 설명회에 상영되었던 영상입니다. 이 영상물을 공명의 창으로 옮겨 주시고 낙동강 숨결 느끼기 순례 참여도 부탁드립니다. ▶어찌 이곳을 흐트리려 합니까 - 오리섬 이야기 http://cafe.daum.net/chorok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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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08 베토벤 9번 교향곡에 숨은 일본제국의 야욕 1차 대전 당시 독일인 수감자들 ‘우아한’ 생활 군국주의 미화 노려… 프랑스 짝사랑엔 뒤통수 [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18:23:26 크리스티앙 크슬레 info@ilemonde.com 왜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일본이 군사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을까?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어떻게 해서 일본에 제2의 애국가가 되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비화를 파헤쳐보자. 1854년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이끄는 검은색 함대에 의해 강제 개방된 뒤,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페리 제독은 미국 선박뿐만 아니라 영국·프랑스·네덜란드·러시아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일본열도에 최초의 무역조약을 요구했다.(1) 일본은 모욕적인 무력외교를 수락했지만 이를 계기로 국가를 개혁했다. ‘부유한 나라, 강력한 군대’. 메이지유신 때 일본이 내건 구호 가운데 하나다. 그리하여 일본 전역은 뒤처진 부분을 만회하고자 서구의 지식을 모든 부분에 도입하는 등 철저하게 서구를 배워나갔다. 200년 동안의 쇄국을 포기한 일본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식민제국이 되자.’ 메이지유신 시대의 주요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였던 팽창주의 계획은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이미 17세기에 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하고자 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일본은 그 뒤 10년 간격으로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이었다. 특히 러일전쟁은 백인 국가(러시아)를 물리치고 아시아 국가(일본)가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쟁이라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대만, 사할린 남부를 차지한 데 이어, 만주 남부 지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두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17세기부터 시작된 오랜 숙원인 중원 점령을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 <일본 의상의 여인>, 1875-클로드 모네 일본은 중국 산둥반도에서 가까운 칭다오를 차지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지역은 당시 독일에 속해 있었다. 독일은 1898년 이 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하기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에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어떤 적이 침략하든 서로 도와주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1914년 8월 7일 영국은 태평양에 있는 독일 선박을 감시해달라고 일본에 요청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독일에 중국과 일본 바다에서 선박을 물리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이 거절하자 일본은 육지와 바다를 포위 공략해 칭다오를 차지했다. 영국이 주저했음에도 일본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격으로 독일을 제압하고, 상당량의 헌법과 군사 이론을 습득했다. 1914년 12월에 일본이 승리하자 약 5천 명에 달하는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포로들이 일본열도로 이송되어 수용소에 갇혔다. 혼슈 남부 절반과 시코쿠, 규슈에 12곳 이상의 임시 시설이 세워졌다. 1915년 4~5월에 독일 언론의 특파원 드렌크한은 일본 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수용소 시찰을 허락받았다. 드렌크한은 도쿠시마에 있는 포로 200명이 1915년 신문을 창간해 발간하고 있으며 오케스트라도 창설했다고 보도했다. 이곳 포로들의 상당수는 직업군인이 아니라 식민지 영토를 개발하기 위해 칭다오에 파견된 전문가였다. 국제조약에 따라 이 포로들은 어떤 강제 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도쿠시마의 수용소 시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다른 수용소와는 전혀 달랐다. 주일 오스트리아 대사가 베르사유조약 기념일을 맞아 아오노가하라 수용소를 주제 삼아 마련한 전시회가 이를 잘 보여준다. 아오노가하라 수용소는 독일인 포로 250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인 230명을 수용하던 곳이었다. 포로들은 농장과 공장에서 스스로 일하고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려 돼지도 기르고 채소밭을 가꾸기도 했다. 또한 포로들은 주민과 교류하며 대학생들과 축구경기도 하고 콘서트도 열었다. 물론, 포로들이 완전히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낯선 환경에 있어야 하는 포로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사생활의 공간도 없이 함께 살아야 하는 포로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일어나기도 했다. 종전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기에 불안감은 더했다. 독일인 포로와 폴란드인 포로 사이에서 다툼도 많이 일어났다. 독일인 포로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어느 알자스인 포로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1915년 초,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국이던 미국은 독일의 재촉으로 일본 포로수용소를 시찰하는 일을 맡았고 수용소의 위생 상태가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7년부터 일본 정부는 포로들의 불만을 줄여주고자 이들을 6곳의 수용소에 나누어 배치했다. 시코쿠, 마쓰야마, 마루가메, 도쿠시마에 억류된 수천 명의 포로들은 1917년 4월 북쪽에 있는 반도 수용소로 보내졌다. 약 5ha에 이르는 반도 수용소는 과거에 병영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다른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반도 수용소에서도 포로들은 신문을 창간해 약 300부를 발간했다. 신문의 내용은 체육수업, 주민과의 축구, 이웃 상가에서 하게 된 수영, 중국 문명·역사·지질학·사회학에 대한 콘퍼런스, 연극 공연, 콘서트 같은 활동 일지를 담고 있었다. 또한 포로들은 이웃 농장에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방법, 탄산 칵테일 음료인 스프리츠 증류 기술, 치즈 만드는 기술을 보급하고 토마토·감자·배추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포로들로 구성된 남성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했고,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매년 겨울이 되면 일본 대도시에서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새해를 축하할 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다. 미셸 바세르망은 저서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일본 근대화의 신화’를 반영하는 음악이라 볼 수 있다고 썼다.(2)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맞은 1970년, 음악 평론가 히데카즈 요시마는 <아사히신문>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일본에 ‘제2의 애국가’라고 밝히기도 했다.(3) 1919년 6월, 베르사유조약으로 포로들의 생활이 나아졌다. 그 이듬해인 1920년에는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으로 간 포로도 있었고 헤르만 보흐너처럼 일본에 둥지를 틀고 독일에 일본학의 기틀을 마련해준 포로도 있었다. 현재 나루토시는 불가사의한 느낌의 반도 수용소를 역사·관광 유적지로 개발해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곳에는 수용소의 생활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는 센터가 있고 ‘독일 마을’이라는 공원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포로들이 만든 남성 합창단과 베토벤 9번 교향곡의 연주를 느낄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의 우호관계는 여기저기에서 강조되었다. 포로들과 일본 현지 주민, 교도관들과의 따뜻한 우정, 인간적인 감독관이 담당한 수용소의 완벽한 분위기 등. 수용소의 목가적 분위기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역사적인 부분은 교묘하게 가려진다고 바세르만은 강조했다. 완벽한 수용소의 모습이 소개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수용소 문제는 감춰지기 때문이다.(4)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일로는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일본과 프랑스는 1907년부터 금융 조약, 외교 조약을 맺었다. 특히 외교 조약에는 양국이 ‘중국군 분쇄’라는 정책의 이름으로 중국 지역을 서로 소유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은 중국 남부 지방 3곳(광둥·광시·윈난)에 프랑스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프랑스가 갖고 있는 이익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프랑스는 만주 남부 지역과 몽골에서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는 일본과의 외교 조약으로 독일을 고립시킬 수 있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신흥 열강 일본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한 교섭을 시도했다. 일본 군대를 유럽 전선에 파병하는 형태의 지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레몽 푸앵카레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5) 일본에 파견된 대사관 무관이었던 리롱 중령은 르네 비비아니 프랑스 총리에게 일본이 군사를 파견해줄 것이라고 알렸다. 유진 레노 대사는 오쿠마 시게노부 총리와 이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유진 레노 대사는 전보를 통해 비비아니 총리에게 오쿠마 총리가 놀라는 것 같지도 않고 미소를 지었다고 알렸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비비아니 총리는 12월 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각 부처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 군대를 유럽에 불러와야 하고 이를 위해 일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비비아니 총리는 인도차이나반도도 일본이 요구하면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조르주 클레망소는 일기 <자유로운 인간>에서 좀더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프랑스는 일본 군대가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꿈을 꾸는 것 같다.”(6) 이어서 클레망소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30만 명의 일본 군사가 2개월 만에 프랑스를 도우러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신중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는다.” 클레망소는 차라리 일본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를 도우러 온다는 가정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며 일본군이 프랑스를 도우러 온다는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마침내 테오필 델카세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 일본 지도층이 프랑스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며 협상에 어려움이 있다는 발표를 하자 프랑스의 헛된 기대는 한풀 꺾였다.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는 전혀 탐내지 않고 다만 프랑스와 똑같은 조건으로 프랑스 식민지와의 관세가 책정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7) 내각은 델카세 장관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했다.(8) 그러나 아무리 프랑스가 노력을 기울여도 일본 군대는 프랑스에 파병되지 않았다. 일본이 요구했던 관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절로 해결되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일본군이 1941년 5월에 인도차이나반도에 들어오면서 1945년 3월 9일 프랑스 주둔군 수비대를 공격해 프랑스를 몰아낸 것이다. 프랑스가 일본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단순히 순진해서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독일과의 전투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 들자 결국 일본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 전투에 끼어들지 않으면서 기회를 최대로 이용하려 했다. 일본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일본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독일이 소유하던 중국 지역 칭다오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글•크리스티앙 크슬레 Christian Kesseler 역사학자. 도쿄의 프랑스 공립학교에 파견된 교수로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 <각주> (1) <마니에르 드부아>, 105호, 2009년 6~7월 참조. (2) 미셸 바세르망, <겨울의 제전: 베토벤 9번 교향곡, 근대 일본의 신화>, Les Indes Savantes, 파리, 2006. (3) 미셸 바세르망, <겨울의 제전: 베토벤 9번 교향곡, 근대 일본의 신화>. (4) 미셸 바세르망, <겨울의 제전: 베토벤 9번 교향곡, 근대 일본의 신화>. (5)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를 위해서- 9년간의 기억 제5권 ‘침략’>, Plon. (6) <자유로운 인간>, 파리, 1914년 8월 16일. (7) 프랑스와 일본은 상호 최혜국 조약을 이용했으나 인도차이나반도는 여기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8)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를 위해서- 9년간의 기억 제5권 ‘침략’>, Plon.
Board 추천글 2010.03.16 바람의종 R 31094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이해인 수녀의 법정스님 추모글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Board 추천글 2010.03.14 바람의종 R 299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3120213005&code=960206‘명문장가’ 법정 스님 주요 어록 도재기 기자 ㆍ“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적 명문장가로 손꼽힌다. 경전 공부와 스님으로서의 치열한 수행, 방대한 독서 등을 바탕으로 한 스님의 법문은 ‘사자후’에 다름없었다. 산문은 독자들의 정신적 허기를 꽉 채우며 출간될 때마다 큰 관심을 불렀다. 스님의 법문과 산문에서 주요 어록들을 뽑았다. “꽃, 우리 둘레에 피는 이 가슴 벅찬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라. 이건 놀라운 신비다. 꽃의 피어남을 통해서 인간사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맑은 요소를 얼마만큼 꽃피우고 있는가? 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도 되돌아봐야 한다.” “습관적으로 절이나 교회에 다니지 마세요. 왜 절에 가는지, 왜 교회에 가는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삶이 개선되죠. 삶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적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편리해졌지만 우리 내면은 그때보다 훨씬 빈곤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꺼린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코 물질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가 형편없이 전락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순물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자기 형성의 길인 지혜의 길,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의 길인 자비의 길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불교도, 종교도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수행한다면 그것은 반쪽 수행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 동시에 따라야 합니다.”
Board 추천글 2010.03.12 바람의종 R 31448
“육신벗고 눈 덮인 산으로 가셨을 것” 마지막 가는 길 지킨 류시화 시인 “서귀포를 떠나기 전 죽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마 육신을 벗고 맨 먼저 강원도 눈 쌓인 산을 보러 가셨겠지요.” 11일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킨 류시화 시인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www.shivaryu.co.kr)를 통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법정 스님과 ‘산에는 꽃이 피네’ 등의 책을 함께 내기도 한 류 시인은 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아 왔다. 류 시인은 스님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 “강원도 눈 쌓인 산이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 지난해 스님의 폐암이 재발한 이후부터 “이 육체가 거추장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시인은 “스님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11일 오전 의식을 잃고 입적한 사실을 두고 법정 스님과 어울리지 않는 마무리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모습이고 종착점입니다. 어디에서 여행을 마치는가보다 그가 어떤 생의 여정을 거쳐왔는가가 더 중요함을 우리가 알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류 시인은 스님이 입적 며칠 전에 한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는 말을 그대로 스님에게 돌려주며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덜 슬프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김은진 기자
Board 추천글 2010.03.12 바람의종 R 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