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북방 개척의 선봉장 김종서 (2/2)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이렇게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들의 통솔을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게 되자, 그는 허술했던 국경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구축한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비교적 남단인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경원부 북쪽의 백안수소(현 행영)로 옮겨 종성군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주변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허약하던 최북단 방어진지인 공주(경흥)지역을 안정시키고 동북쪽 방어지역을 북상시킨 후, 김종서가 다음으로 주목한 곳은 알목하(회령지역)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서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다. 또 그 전해에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여진족인 오도리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을 받아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북쪽지역의 최대 농업지역을 수복하고 이곳에 회령진을 설치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하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완벽하게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군사적 후방이 된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현 경원)로 이동시키고 구 경원부 주둔지인 공주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00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공성현은 세종 19년(1437년)에 경흥읍으로 격상되었다가 세종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고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현 종성)로 더 서진시켜 회령부와의 방어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는 다온평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근 7년 동안 북쪽의 국경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22년(1440년)에 형조판서를 제수받아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25년(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 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경원 북쪽 강가)에서 연대(회령 서쪽지역)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경계를 완전히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1449년)에 영북진의 옛터인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즉,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신라 통일 이후 국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던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사실 세종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국가 경영상 민본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회복한 북방지역으로 이주시켜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주고 국가적으로는 인구의 분산과 균형 있는 국토 개발을 통하여 국력을 증대시킨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고려사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 32년(1450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제찰사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김종서는 그 다음해인 문종 원년(1451년)에는 우의정을 제수받아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문종이 사망할 때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정분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적극 보위하다가 계유년의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그의 중요한 업적 중에 하나인 고려사 개수작업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과 결과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실제 사실을 추적해 보자.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 만에 정도전과 조준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여 태조 4년(1395년) 4월에 총 2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사실이 상당히 왜곡되었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인 조, 종 등의 묘호와 존칭을 사용하였는데도 몽고 침입 이후의 상태에 억지로 전 시대를 끼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 충신들인 정몽주, 김진양 등은 깎아 내리고 별다른 공도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청백리로 칭송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의 고려사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말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세종 6년(1424년)에 유관, 윤회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문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쓴 고려사도 사실 관계는 복원되었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단히 요약되어서 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세종 14년(1432년)에 감춘추관사 신개, 지춘추관사 권제, 동지춘추관사 안지 등에 의하여 보완 개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이 개수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또다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의 조상인 권근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31년(1449년)에 반포를 중지하고 3차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편찬을 관장하는 지춘추관사는 공석이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2차 고려사를 개수할 때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찬성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 편찬 작업에 동참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 호조참판 이선제,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등과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양성지, 최항, 허후, 신석조, 어효당, 김희손 등의 사관들이었다.
3차 개수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년) 8월 25일에 총 139권으로 완성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 만에 완료한 이 고려사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것으로 흔히 정인지의 고려사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의 고려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실록을 편찬한 지 2년 후에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수사관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그러면 이제 단종의 비극을 불러온 계유정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조선 5대 임금인 문종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불과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자 12살밖에 안 된 어린 외아들이 보위에 오르게 되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왕 단종이다. 이때 김종서는 우의정으로 있다가 단종 즉위 후 좌의정으로 승차되어 있었다. 당시는 세종대에 이미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되어 있기도 했지만 병약한 선왕 문종과 어린 임금 단종의 재위로 정사는 대부분의정부의 재상들이 전담해서 처리하였다. 어차피 조선의 정치체제는 다소 굴곡이 있었지만 재상 중심 관료체제로 구상되어 출발했기 때문에 일응 정상 상태로의 복귀처럼 보이지만 자칫 그 운영 상태에 따라서는 왕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질 우려도 있었다. 따라서 태종이나 세조와 같이 강골 성향과 권력 욕구가 강한 군왕은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배경과 힘이 약한 왕들은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결정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의 정치구조였다.
당시에도 의정부 서사제의 복귀아래 병약하고 어린 임금이 연이어 보위에 올라 자연히 재상들과 힘있는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해져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은 황표정사 제도로 극명히 알 수 있다. 즉, 조정의 주요 인사 문제에 대하여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 명단에서 발탁 예정자에게 황색점을 찍어서 올리면 왕은 단지 승인하여 주는 형식적 절차만을 거쳐 결정하는 제도가 그것이다. 결국 단종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 노재상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왕실 세력들은 당연히 불만일 수밖에 없었고, 신진 관료들도 일부 대신들에 대한 권력 집중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로 계유정난 당시에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나 중간 관료들의 대부분이 중립적 자세를 보이거나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어린 임금의 뒤에는 장성한 숙부만도 10명이 넘게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은 야망이 크고 수완도 뛰어난 인물로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암암리에 권력 탈취를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이 한명회와 권람 등 모사가들과 모의를 한 끝에 단종 원년(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 것이 계유정난이다.
정난 주도 세력들은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하고 김종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수양대군이 직접 임운이라는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고 그 뒤를 양정, 유수, 홍달순 등의 장사패가 매복하여 따르기로 하였다.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밤중 방문에 평소 그를 의심하고는 있었지만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무방비로 영접하던 김종서를 수양은 철퇴로 살해하고,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정난의 전 과정이다. 그런데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가 아직 죽지 않고 있다가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아들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새벽에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수양대군이 보낸 이흥상에 의하여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일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해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으며 지금은 그 무덤조차 찾을 수가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이 장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다. 김종서가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 즉위 후 정사를 처리하면서 독단을 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그의 평소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볼 때 자신이 권력을 향유하려 하였다기보다 어린 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권력이란 예측할 수 없는 칼끝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오히려 칼날을 들이대는 속성이 있는 것인지 강력한 권력자인 김종서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강력한 권한 행사로 오해와 불만을 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계획에 최고의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지로 나가면 장수요, 중앙에 들어와서는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위약한 왕을 만나 이를 잘 보위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다. 제승 방략이라는 군사 지휘를 위한 저서를 남기기도 한 그는 영조 22년(1746년)에야 복관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세의 입장에서는 김종서가 남긴 시조 2수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차갑지만
만리변성에 일장검을 짚고 서니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구나.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찌타 나라에 큰공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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