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시대를 앞서갔던 외로운 선각자 박지원(1737-1805, 69살, 병사).
연암 박지원은 신문물을 도임하여 낙후된 조선을 개혁시키려고 했던 선각자였다. 그는 '이용후생론'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선진된 문물은 아무리 이민족의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여서 조선 사회의 고유성과 결합시키고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정치적으로 볼 때는 자신의 출신 바탕인 노론의 성리학적 본질주의에서 완전히 비켜나지 않았으며,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실용주의적 견해에 입각하였다. 연암도 당시의 모습과 완전히 변모된 근대사회를 상정하고 이에 접근하려는 체제 변혁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과 동일한 기반에 뿌리를 둔 집안 출신이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한 희생적 사회운동가였다. 또 한편으로 연암은 많은 문학작품을 저술한 문학가이기도 했는데, 18살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연행 이전에 이미 첫 작품인 '광문자전'을 포함하여 9편을 썼고, '열하일기' 속에소 '호질'과 '허생전'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방관 재직시 저술한 '열녀함양박씨전'까지 합하면 모두 12편의 소설을 남겼다. 이 작품들 속에서 일관되게 양반 사회의 위선에 찬 실상을 폭로하고 지도층의 무위무능을 신랄하게 풍자하였으며, 사회 일반에게 실용적인 사고 방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 방식과는 달리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찾는 과정에서 당시에는 내심 오랑캐라고 청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인정하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를 깨고 과감히 배울 것은 배우자고 주장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또, 학문이나 진리의 가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으로 그것의 존재 의미도 현실의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세상의 발전이란 항상 새로운 관점을 통해 변화할 때만 얻을 수 있다는 진보적 자세를 가졌다. 시대적 요청에 남보다 먼저 부응하여 그 누구의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사회를 발전시키려면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진보적 개혁 사상가였던 그는 자신이 믿었던 시대적 당위의 실현에 일생을 건 참된 지식인의 표본이었다. 그의 개방주의는 주체성을 굳건히 지키는 상태에서 신문물만을 수용하자는 자세였기 때문에 민족의 자존이나 원칙이 흔들릴 이유가 없었는데도 당시의 단단한 구각을 완전히 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개방적 사조는 그 후 실학파에 의하여 면면이 이어진 조선 진보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신학문에 몰입하다.
박지원은 조선 21대 왕인 영조 13년(1737년)에 한성 반송방 야동(현 서대문)에서 아버지 박사유와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중미라 하였으며, 호는 한때 피세 은거하였던 금천의 연암협의 지명을 따서 연암이라 하였다. 그의 본관은 반남으로 조선 개국 공신 박은의 13대 손이자 선조의 부마였던 금양위 박미의 5대 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사유는 벼슬길에 나가 보지도 못한 백면 서생으로 지내고 있었고, 조부 필균은 지돈령 부사까지 역임하였으나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서 그의 집안 형편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16살 되던 해에 동갑인 전주 이씨 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에야 비로소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암이 아직 글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을 안 장인이 나서서 직접 '맹자'까지 가르친 후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학문을 계속 배울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었던 것이다. 연암으로서는 장인과 처숙을 스승으로 모신 셈이었다. 이때부터 처남 이재성과 둘도 없는 문우로 지내면서 학문에 몰두한 그는 20살 전후까지 두문불출하며 경서는 물론이고 제반 학문에 관련된 모든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늦은 나이에 장인과 처숙에게 처음 학문을 배운 이후로는 뚜렷한 스승도 없이 독학을 한 연암이었지만 태생적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가지고 있었던지 20대 초반에는 이미 출중한 재능을 드러냈다. 당시 대문장가인 강한 황경원이 연암의 글을 보고는 "장차 나의 자리를 차지할 인물은 이 젊은이 밖에 없다"고 경탄하였다고 하니 연암의 진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청년 시절 연암은 스스로도 자신의 진보에 흡족했던지 천하의 모든 일은 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신만만해 할 정도였다. 기고만장할 정도로 패기에 넘쳤던 연암이 과거에는 원래 뜻이 없었는지, 계속 실패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35살부터는 아예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성균관에 적을 두고 성균관 자체 과시에도 정기적으로 참가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애초부터 과거에 뜻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암은 왜 세속적인 영달의 기회를 포기한 것일까? 이 답을 그의 성격과 당시의 정치적 현실, 그리고 신학문인 북학에 몰입했던 그 무렵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성품상 타협을 모르는 독존적인 성품이었고, 언행 자체도 준격하여 주변의 배척과 질시를 받기 쉬웠다. 또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식인의 일반적 경향처럼 당시 시대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세도가와 권귀들에 대하여 비판의식을 높아서 권력층의 비호는커녕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정조의 외척 정치 관여 방지정책이다. 정조는 즉위하기 전에도 외척인 홍봉한과 김귀주 사이에서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외척 출신은 관직에 가급적 등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데 연암의 집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기피한 일면도 있지만, 집안의 정치적 무게 때문에 여전히 주변의 심한 견제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것만이 그가 과거를 포기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보다 깊은 이유는 그 무렵부터 그가 북학 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담헌 홍대용과의 교류를 통하여 접하게 된 연암은 가족을 아예 처가에 맡겨놓고 전의감동 숙소에 홀로 거처하면서 여러 북학파 사람들과 학문 탐구에만 골몰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견제가 심하기도 했지만 탐탁지 않은 세속적 영달을 포기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주는 신학문에 심취하여 학문 탐구의 길을 인생의 목표로 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통과 핍박의 세월, 그리고 연행
그는 시대에 앞선 식견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에 부응할 수 있는 사상을 개척해 나가는 긍지와 자부심은 있었겠지만, 아무런 경제력의 뒷받침이 없는 그의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시기가 연암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는 개안의 시기이면서 현실에 있어서는 가장 불우한 시기였다. 그의 생활은 남이 보기에도 딱할 지경으로, 그의 제자이자 평생 동지였던 이서구는 연암의 비참한 생활을 목도하고 눈물로 한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폐인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던 연암에게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시기가 다가왔다.
그의 나이 40살 때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하여 왕의 측근으로 홍국영이 득세할 때의 일이다. 홍국영은 권력을 잡자 왕세손 시절 정조를 위해하던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했는데, 연암을 아끼던 홍낙성이 이에 연루되자 그 화가 연암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홍낙성은 홍국영과 같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홍국영의 전횡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홍국영에 의해 제거 대상을 지목되었다. 친구 백영숙으로부터 홍국영이 자신을 옭아넣으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연암은 가족을 데리고 한성을 빠져나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금천의 연암협으로 숨었다. 그곳은 개성으로부터 30리쯤 떨어진 곳으로 봄이면 바위 절벽에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의 '연암'이라고 불리던 협곡이었다. 이 골짜기에서 은거하는 동안에 홍국영이 실각하여 다행히 화는 면할 수 있었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연암은 그곳에서 몸소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험한 일 한 번 해보지 않았던 서생으로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때 친구인 유언호가 개성유수로 재직하며 많은 도움을 주어서 근근히 살아갈 수는 있었다. 연암은 조숙하여 평소 교류하던 친구들이 대부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유언호도 7살 연상으로 둘은 한성에서 같이 학문하며 금강산 유람도 함께 하였던 절친한 사이였다. 세상 인심이 각박해서 이렇듯 곤란한 지경의 연암을 더욱 헐뜯고 비방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를 신학문의 길로 인도하였던 홍대용만은 멀리서나마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태인 현감으로 있던 홍대용도 연암보다는 6살 연상이었다.
2년여 연암에서의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 연암은 평계에 있던 처남 이재성의 집에 한동안 얹혀 살았다. 그즈음 그의 삼종형 되는 영조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이 청 황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사로 선발되어 연암에게 수행원으로 동행할 것을 권하자 이에 응하여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연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정조 4년(1780년)의 이 연행은 생활고와 좌절에 허덕이던 연암으로서는 일종의 돌파구이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 몰두했던 신학문의 중심지와 선진 문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그로서는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살이었는데 너무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머리가 이미 백발이 되어 있었다. 연암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들어갔으나 청의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어서 그곳까지 찾아가야 했다. 연암은 이 여행의 전 과정을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하여 훗날 그의 명저 '열하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열하일기'의 시대적 의의
연행에서 돌아온 지 3년 후쯤 '열하일기'를 총 26권으로 발간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찬반양론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신진 사류들에게는 혁신적 사상과 신선한 문체로 호감을 샀지만, 기존 사대부들에게는 극도의 반감을 얻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청나라의 발달된 여러 문물들을 소개하고 조선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배워야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허구에 찬 양반사회를 특유의 독설로 풍자하였다. 문체 자체도 당시의 고루한 형식이 아니라 시중에서 쓰이는 비어와 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 서술 방법을 택하여 한층 더 충격을 주었다. '열하일기'의 파문의 근원은 당시 선비들의 일반적 사고였던 '조선 중화론'과 '북벌론'의 허위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데 있었다. 그리고 유일한 문명국으로 떠받들던 명나라가 사라졌으니 이제 참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는 '조선 중화주의'가 조선 지도층의 의식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문명국이 오랑캐들에 치욕을 당했으므로 언젠가는 보복을 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명분상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의 일반적 사고의 허구성을 연암이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세상은 바뀌어 가는데 성리학적 이기론에만 매달려 실제 생활의 변화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나라의 수준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데도 청나라에서 발전되고 있는 실용 학문을 오랑캐 문화라고 배척하는 무식견을 통렬하게 공박하였다. 또 '북벌론'이라는 것도 실제적인 힘도, 의지도 없으면서 입으로 떠들기만 하는 한낱 구두선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유명무실한 백일몽일 뿐이라고 거침없이 야유하였다.
더구나 그러한 왜곡된 사회적 현실은 모두 독선적이고 허구에 찬 양반 사대부들의 그릇된 사고와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고 나왔으니 당시로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순된 시대 기반의 정곡을 찔러 버린 셈이었다. 내용도 그토록 파격적이었는 데다 문체마저 당시에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고문체가 아닌 일반적 생활 용어를 사용한 서술체여서 더욱 큰 물의를 일으켰다. 아무튼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오자 그는 일약 사회 명사가 되었다. 젊은 사류들은 그의 파격적인 사상과 문체에 심취하여 그를 본받는 것이 어느덧 일종의 풍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열하일기' 출간 이후 촉발된 실용 문체에 대한 정권적인 반감의 표출로서 '문체반정' 조치가 훗날 일어나게 된다.
뒤늦은 관직 생활
연암은 이러한 명성과 규장각 소속 관리로 포진한 그의 제자들에 힘입어 정조 10년(1786년)에 종9품에 해당하는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음보로 제수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50살로 미관말직이나마 처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규장각은 연암의 문객들에 의하여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서관으로 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은 연암을 학문적 지도자로 떠받든 연암학파의 대표인물이었고, 각신으로는 연암의 제자들인 이서구, 남공철, 김조순 등이 있었고, 초계문신으로 서유구, 이상황, 김매순, 심상규 등이 선발되어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외척과 권신의 발호를 억제하고 학문 정치를 펴나가기 위해 설립한 기구로서 신진 관료들을 국왕의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고 탕평정치를 보좌할 관료들을 키우기 위한 정책적 산실이었다. 외양은 왕실 직속 도서관이었지만, 그 정치적 무게는 실제 이상이었다. 이 규장각이 그 시기쯤 연암학파의 산실이자 온상으로 변해 있었으니, 그 학문의 연원이자 최고 지도자격인 연암을 조정으로 끌어들일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연암은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일찍 포기하였지만, 그가 쌓아 올린 학문적 성과에 의해 우회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된 셈이다. 젊어서부터 세속적 출세를 위한 관직으로의 진출을 스스로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연암이었지만, 이때는 순순히 벼슬을 받아들였다. 계속되는 경제적 고통도 이유였겠지만, 유언호를 위시한 친구들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학문적 이념이 국가 정책에도 반영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 스스로 갈고 닦은 이념을 실제 국가 운영에서 실현해 보고 싶은 욕구도 생겼을 것이다.
관직에 나간 이듬해에는 그에게 시집 와서 평생을 고생만 하던 동갑내기 이씨 부인이 별세하였다. 연암의 부인 이씨는 현실을 초월하여 이상 속에 사는 남편 때문에 가난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여자의 몸으로 가정살림을 책임지면서 훌륭한 내조를 하였던, 연암에게는 더없이 좋은 반려자였다. 연암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관직에 나간 지 반년도 못 되어 자신의 비타협적인 삶의 궤적을 따라 고생하면서도 묵묵히 생활고를 감수하였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내가 사망한 뒤 그는 두 번 다시 재혼하지 않고 일생을 마칠 정도로 이씨 부인에 대한 애모의정이 남달랐었다. 또 상처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처럼 따랐던 15살 손위인 유일한 형 희원이 세상을 떠났으니 연암에게 있어 그 해는 호사 다마라고 할 수 있는 한 해였다.
뒤늦게 관직에 나간 연암은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능령을 거쳐 55살 되던 해에 한성부 판관을 잠시 역임한 후, 그 해 겨울에 안의 현감으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다. 안의현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인접하는 경계 지역으로 이인좌의 난 때 적극 호응했던 전력 때문에 큰 핍박을 받아 연암이 부임할 당시에도 민심이 나빴던 곳이다. 이곳에서 사심 없이 자신의 경륜을 최대한 발휘하여 선정을 베풀어 4년여를 근무하면서 지역살림과 정서를 많이 회복시켜 놓았다. 연암의 선정소식을 들은 정조가 "다스림에 있어 지극히 선량하다"는 치하와 함께 검서관으로 있던 그의 제자 박제가에게 휴가를 주어 외지의 그를 위로하게 할 만큼 큰 인정을 받았다.
연암은 공무 중에도 틈틈이 집필에 정력을 기울여서 미신적인 오행설을 타파하고,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홍범우익서'와 모순된 인습을 공박하는 '열녀함양박씨전'을 저술하였다. '박씨전'은 아전 임술중의 아내가 남편의 3년상을 마치던 날 자결한 사건을 목격하고 그러한 순절을 칭찬하는 사회적 풍습이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하는 여성 해방 사상을 나타낸 글이었다.
문체반정 정책의 대상으로 지목되다.
그런데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다음해(1792년)에 사회 정서의 문란이 경박한 문체를 추종하는 시조 때문이라는 판단 아래 일종의 문풍복고 운동인 '문체반정'정책이 시행되었다. 정조가 주도한 이 정책은 단순한 문예사조의 재정립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다극화되었던 국가 여론을 결집시키고 자신의 탕평정치를 강화하려는 다목적적인 의도가 내재되어 있던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정조는 문풍변질의 책임을 박지원에게 돌려서 기존 고문체에 입각한 일종의 반성문인 '순정지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연암을 격동하는 당시 정치 현실에서 개혁주의자들의 막후 실력자로 인정하여 그를 정조 자신의 정치적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심모원려의 뜻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정조로서는 보수파의 요청을 수용하면서도 그 반대 세력인 개혁 진보파의 실세인 연암을 포섭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책을 구사한 셈이다. 실로 문제에서 해결을 찾고 혼란에서 유리한 돌파구를 구하는 정조 특유의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이 사건은 이동직이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가환을 질투하여 그의 문장과 사조를 문제 삼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 시초가 되었다. 원래 정조는 조선 주체성주의자로서 청나라로 모방하려는 당시 사조가 못마땅하기도 하던 차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써 문풍의 변화는 이가환의 책임이 아니라 근본은 연암에게 있다고 지목하고 나왔던 것이다. 개인을 비난하는 상소를 엉뚱하게 확대시켜 사회변화운동으로 추진하였던 셈인데, 한 쪽의 불만을 아예 선수를 쳐서 강경책으로 채색된 방편으로 무마시키고 다른 편은 자신의 지시를 순응하게 만들어 포용하는 고단수 정치 행위를 보여준 것이다. 정조의 이런 의도를 알아챈 연암은 소위 순정지문으로써 농업관계서인 '진과농소초문'을 지어 바치고, 정조가 이를 가납하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연암으로서도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지만, 몸을 한 번 굽혀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 정조의 정치적 의도에도 부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시기에 와서는 열혈강경하였던 연암도 이처럼 노화한 정치적 감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의 문장 서술 방법은 육경 고문에 의지하여 옛 사람의 글귀를 표절 인용하여 실제 현실 언어와는 동떨어진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소위 문장은 한나라의 경향을, 시는 당나라 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글이란 자기 의사를 표현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여 형식에 얽매이는 종래의 태도를 가치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증좌소산인'이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실대로 쓰는 데에 글의 참맛이 있는 것이지, 하필 먼 옛날에서부터 그 근본을 잡아올 이유가 없다. 한,당은 지금 세상이 아니며 설사 반고나 사마천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하더라도 과거의 자신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진리도 천녀 뒤에는 고대의 것이 되고 마는 법이다.' 이렇게 개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연암이었지만 현실과 타협하여 정조의 치세를 도와주려는 뜻으로 반성문을 제출하고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그 무렵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는 또 한번의 파문이 있었는데, 연암이 청국의 풍물을 흠모한 나머지 오랑캐의 복색을 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 헛소문을 기화로 청나라에 대한 척화파의 후손이던 유한준이 북학의 기치를 높이는 연암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공격을 하고 나왔다. 그러나 곧 사실 무근임이 밝혀져 이때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의 와중에도 지방관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던 연암은 안의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정조 21년(1796년) 7월에 60살의 나이로 면천 군수로 임명되었다.
시대의 회귀에 밀려난 천재의 말년
면천 군수 부임 인사차 입궐하였던 연암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의 '표류기'를 고쳐 쓰라는 왕명을 받고 임지에 부임하기에 앞서 '서 이방익사'로 개작하여 바쳤는데, 이 글에서 그는 중국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였다. 또, 정조 23년(1799년)에 농업 진흥하기 위하여 널리 좋은 농사 방법을 구하자 일찍이 지었던 '과농소초'를 보강하여 찬진하고 사회개혁론인 '한민명전의' 한 편을 추가로 지어 바쳤다. 그 다음해(1800년)에 65살의 나이로 양양부사로 승진하여 나갔지만, 채일년도 되지 않아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직하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양얌부사로 임명되던 해에 그를 신임하던 정조가 갑자기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그 동안의 개혁 조치마저 무시되는 수구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 노론벽파가 정권을 틀어쥐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학을 타파한다는 구실을 붙여서 개혁적 성향의 관료와 학자들을 탄압하였다. 소위 신유사옥이 발생하여 연암의 문도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자신이 관직에 머물러 있을 시대가 아님을 알게 된 연암은 병을 핑계로 스스로 물러나 버린 것이다. 자진해서 사퇴하여 당장에 큰 화는 모면 하였지만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직하고 얼마 후에 연암은 포천에 땅을 구해 부친의 묘를 이장하였다. 사실 연암이 젊었을 때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부친이 사망하자 장지 문제로 그의 집안과 이유라는 사람의 후손들이 송사를 벌인 일이었다. 송사의결과는 연암의 집안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당시 권력층과 연이 닿아 있는 까닭에 연암 집안의 의도대로 처리되었다. 실상은 경제적 능력이 없던 연암의 집안이 분쟁의 소지가 다분한 땅에 장지를 정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권력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있던 연암측이 관의 중재와 도움을 받아 기왕에 쓴 묘지를 인정하기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상대방은 자책 끝에 관직까지 물러나고 말아 연암은 항상 죄스러운 마음으로 있다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인생의 말년에 찜찜한 부분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새로 구입한 땅이 예전에 그를 공격했던 유한준의 선영이었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 말대로 되고 만 것이다. 유한준은 연암이 기왕에 이장한 부친의 묘를 들어내 버리고 자기 종친의 묘를 극구 이장해 버렸다. 연암은 어쩔 수 없이 부친의 묘를 양주에 자리를 구해 다시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암과 유한준의 악연은 그 뒤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묘한 인연으로 화해의 계기를 맞게 된다. 연암의 사상과 정신은 그의 손자인 박규수에 의해 전승되어서 구한 말 김옥균, 유길준 등 개화파에게 계승되었는데, 유길준이 유한준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는 역사가 만들어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평범한 말년을 보내던 연암은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순조 5년(1805년) 10월 20일에 69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인 박제가가 달려와서, "선생님! 어찌 이욱항 이 제자를 내버려두고 가시렵니까?" 하고 통곡하였지만 연암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연암의 사상과 경향
연암은 일찍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이보천이 지적한 대로 재주와 총명이 비범하였지만, 시비선악이 너무 분명하여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뜻이 높고 일정한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였으며, 당시 권력가나 양반들의 속물 근성을 혐오하여 우스개로 희화화하여 비꼬기를 즐겼다. 그러나 마땅치 않은 세상에 대하여 무조건 부딪쳐 나간 것이 아니고 자신의 비타협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을 풍자와 해학으로 완화시켜 세상의 풍파로부터 비껴 가기도 했다. 술을 즐기고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일면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주제에 근검함을 잃어 질탕하고 방종함만을 즐긴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그러한 술자리는 눈에 거슬리는 세상을 이기고 학문하는 동류들과의 토론과 의견 교환의 장으로 활용했던 것뿐이었다.
연암은 예술가의 호방함과 선비의 근엄함을 함께 소유하고 있었으며, 호오가 너무 분명하여 교류하는 대상을 세심하게 가려서 가까이 대하지 않던 사람들과는 너무나 먼 거리를 두고 상대하였다. 이런 결벽스러운 처세 때문에 관직에 나가서도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는 불화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오만한 독불장군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무에 임해서는 기강이 서릿발 같았고 대체를 잘 파악하여 처리하면서도 절도와 분변이 틀림없었다. 강인하고 엄격하면서도 우스개로 분란을 해소하기도 하였으며, 인간적인 일면도 두드러져 매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극히 싫어하였다. 청렴결백한 일면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성품으로 "사대부는 물질로서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평생 지키며 살았다. 또 안의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와 있을 때, 그의 선정을 치하하기 위하여 현민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굳이 나서서 "비문을 세운다면 내가 앞장서 그것을 깨버리고 주모자는 죄주도록 하겠다"고 강경하게 저지했다.
그의 사상적 바탕은 "같다면 벌써 진실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형식주의와 보수 성향을 거부하는 데 있었다. 특히, '까마귀 날개보다 더 검은 것도 없어 보이지만, 빛에 비추어 보면 엷은 황색도 돌고 연한 녹색도 보이며 비취색도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매사에 정해진 일정한 빛깔이 없는데도 사람이 먼저 눈과 마음으로 앞서 정해버리고 만다"고 하며 주관적 독단주의를 비판했다. 그런데 양란 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소위 '조선 중화주의'와 '북벌론'을 도출하여 국민적 단합과 국력의 재축적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것이 전대미문의 전란을 연이어 겪은 조선 사회를 통합시키고 지탱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1세기 정도 세월이 경과하자 그 국수주의적 폐쇄성에 기인하여 조선을 낙후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반면에 오랑캐로 취급하던 청나라는 한족 문화를 적극 수용한 위에 서양의 문물까지 도입하여, 18세기 어간에는 찬란한 건륭 문화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허탄한 '북벌론'에 집착하지 말고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연암 등에 의한 이른바 '북학'사상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정신 구조를 형성하였던 성리학은 이즈음 그 생명력이 다하여 공리공론에만 매달리는 말폐 현상이 노정되고 있어서, 새롭게 대체할 시대 사상이 요구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당시는 사상계가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는데 정조는 성리학을 올바른 학문이라는 뜻으로 정학이라 하면서, 북학은 속되어서 경박하다고 속학으로,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문물을 지칭하는 서학은 바르지 못해 문제라고 사학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이 정학의 수문장으로 자처하면서도 연암으로 대표되는 북학파 인물들과 이가환으로 대표되는 서학파 인물들 모두를 자신의 개혁 세력으로 포용하여 수구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아무튼 당시의 사회적 진보주의 운동으로서 북학 사상이 대두되고 있었고 변화를 필요로 한 시대적 요구가 연암과 같은 선각자의 각성을 촉진하였지만, 자신의 개인적 영달을 희생하면서까지 새로운 사조의 길을 열어간 것은 그의 투철한 신념과 사명감에 기인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연암의 사상 세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소유 관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의 변화는 옛 인간을 밀어낼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남으로써 가능해지고 더욱 촉진된다는 생각이었다. 우선 토지 개혁 방안으로 당시에 사회 문제가 되고 있던 대지주의 토지 겸병 현상을 막기 위하여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였다. 개인의 토지를 국가가 전부 회수하여 골고루 재분배하는 것이 최상이지만 비현실적이므로 차선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한전법이었다. 그가 주장한 한전법은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한도를 넘어선 소유 토지는 타인에게 매매 등의 방법으로 양도하게 하여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균등하게 분배되게끔 유도하자는 방안이다. 또 연암이 상정한 새로운 인간형은 상공법의 발달과 유통 경제의 확대에 따라 이러한 시대 경향에 적응할 수 있는 기업가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형은 비단 양반뿐 아니라 어떤 계층에도 나타날 수 있다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고의 일단을 나타냈다. 이로 인해서 연암은 보수적 인물들로부터 더욱 집중적인 비난과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다만, 그의 출신이 권력층과 연결된 가문이었고, 혈기왕성하여 좌충우돌한 시기에는 재야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견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을 때도 거의 외직이
나 미관말직에 있었던 것은 물론 그때에는 이미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관직의 주요 기반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극도로 험한 경우는 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또 말년에 정조가 죽고 시대 사조가 보수 반동으로 회귀하자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즉시 은퇴하여 얼마 후에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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