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우국 충정의 상승장군 이순신 (1/2)
이순신은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맞아 준비 없는 상태에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질곡에서 건져 올리고 전장에서 산화한 참군인의 본보기이다. 육지에서는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하고 파죽지세로 적병에게 밀려서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20여일 만에 수도가 함락되며 전 국토가 유린되고 있었지만 해상에서만은 그의 활약으로 완전히 적을 제압하였다. 이 제해권 장악이야말로 임진년과 정유년 왜란 때에 전쟁의 추이를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해전에서의 승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즉, 이순신의 연승으로 왜군의 신속한 진군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왜군은 국토의 서쪽 해상으로의 진출이 봉쇄되었을 뿐 아니라, 군수의 보급과 병력 이동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순신의 지휘에 의한 조선 수군의 분전으로 왜군은 원래의 전략대로 전쟁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이러한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굴의 용기와 뛰어난 통솔력, 그리고 전술가로서의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지만 그의 전인격적인 삶의 모습에서 더욱 그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가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절절이 묻어날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면서도 남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자세로 평생을 살았다. 또한 불의와는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전투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용장이었으나 강인함보다는 다감하고 섬세한 일면도 많았다. 그리고 미증유의 국가적 대전란을 겪으면서 안온한 삶만을 살 수 없는 공인으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그르치지 않고 반듯하게 찾아갔기 때문에 영웅으로 불리는 데에 하등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에 대하여는 해전사 연구가인 영국의 G.A 발라드 제독이 이렇게 찬양한 바가 있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동격에 둘 수 있는 해군 제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그가 있음으로써 어떤 전투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이 동양의 해군 사령관이야말로 그와 같은 인물이었다."
대기만성형 군인
이순신은 조선 12대 왕인 인종 원년(1545년)에 한성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였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생가인 한성 건천동에서 자랐다. 그보다는 3살이 많았지만 평생을 그의 친구요 후원자 역할을 했던 서애 류성룡도 이 동네 출신이다. 그의 본관은 덕수로서 대대로 문관으로 관직에 나갔던 집안 출신이었으며, 자는 여해이고 시호는 충무다. 그런데 그의 조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변을 당한 후 그의 부친인 이정은 백면서생으로 일생을 보냈다. 말하자면 그의 집안은 그가 태어날 무렵 가세가 완전히 쇠락하여 자식의 출세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순신의 형제는 4명이었는데, 항렬인 신자 돌림에다가 중국의 전설적인 삼황오제에서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따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반 집안 출신이면서도 기질상 무인의 길에 뜻이 있어 22살의 늦은 나이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훈련원 별과에 처음 응시하였으나 불의의 낙마로 고배를 마시고, 32살에야 비로소 식년 무과에서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대기만성형 인물일망정 조숙한 천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죽마고우였던 류성룡이 후일 이순신에 대하여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정아하여 무릇 수양하는 선비의 풍모였으나 내면적으로는 항상 열혈한 무인이었다"라고 갈파한 대목에서도 그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으면서도 남의 힘을 빌려 출세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직분을 빠짐없이 수행하는 진정한 군인이었다. 또한 그는 항상 청렴하고 강직한 자세로 관직 생활에 임했는데 이에 관한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한번은 이조판서로 있던 이율곡이 그를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 판서께서는 나와 동성동본의 웃어른이므로 내가 먼저 찾아뵈어야 도리이지만, 그가 최고 인사권자로 있는 지금 만나는 것은 서로간에 누만 될 뿐이다"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결벽에 가까운 강직성 때문에 그의 군인 생활 초기는 승진도 늦고 주위의 모함과 견제를 많이 받아서 불우한 편이었다. 무과 합격 후 처음 그에게 부여된 직책은 함경북도 동구비보라는 곳의 권관이었다. 당시 함경도 감사 이후백은 엄격하여 각 진을 순회하면서 군무를 점검하고 불비한 자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벌을 주었다. 이 지역 군관으로 감사에게 벌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여서 감사의 순시 자체를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초임 하급장교인 이순신이 하늘 같은 감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업무가 너무 과중하고 형벌도 지나치다"라고 직언을 간하였다. 이후백은 평소 이순신의 신실한 업무 태도를 보고 받은 바도 있고 그 의기가 가상하다고 하여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강직성은 이후백과 같이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해주는 상급자를 만나지 못할 경우 그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의 고단한 관직 생활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순신은 첫 부임지에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선조12년(1579년) 2월에 한 직급 위인 종8품 훈련원 봉사로 임명되었으나 병부랑 서익과의 불화로 8개월만에 충청도 병사의 권관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음해 7월에 발포수군 만호로 좌천되었다. 발포에서 처음으로 수군 경험을 쌓았지만 그로서는 연이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타협 없는 원칙적 자세 때문에 전라감사 손식, 전라 좌수사 성박, 이용 등에게 연이어 미움을 받다가, 선조 14년(1581년) 봄에 이미 관계가 나빴던 서익이 특별 감사관인 군기경 차관으로 내려와서는 군기 정비의 불량을 이유로 이순신을 파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안 돼서 누명을 벗고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여 근무하다가 선조 16년(1583년) 10월에 함경도 진원보 권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함경도 남병사는 이순신이 발포 만호 시절 전라 좌수사로서 그를 미워했던 이용이었는데 변방의 일선지구 사령관이 되자 이순신 같은 군인이 필요하다고 느껴 특별 내신으로 그를 자기 휘하에 데리고 온 것이다. 이후로 두 사람은 옛 감정을 풀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훈련원 참군으로 진급하여 근무하던 중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가 탈상 후 나이 42살에 궁중의 마필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주부로 임명되었으나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발령이 났다. 그 다음해에는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 둔전 수비대장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여진족의 출몰이 심한 지역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수차 수비의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사이던 이일이 번번이 이를 묵살하여서 어쩔 수 없이 적은 병력을 유지하다가 추수기에 여진족의 대대적인 내습을 받게 되었다. 이순신의 분전으로 겨우 이를 격퇴하기는 하였으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일은 병력 증원 요청을 묵살한 것이 문제가 될까봐 이순신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 버렸다. 결국 이순신은 삭탈 관직 후 백의종군 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음해 6월에 겨우 특사를 받고 44살의 나이로 세파에 지친 심심을 휴양하기 위해 귀향하였다. 12년의 군대 생활 동안 갖은 모함과 시련을 겪으면서 불우한 시절을 보내다가아무 공훈도 얻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낙향거사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참군인으로서의 자세는 이미 조정에 인정을 받고 있었던 터라 귀향한 지 얼마 안 되어 전라 순찰사 이광 휘하의 군관으로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조방장과 선전관을 역임하다가 그 해(1589년) 12월에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실로 무과에 급제한 지 13년만에 작은 지방이나마 수령의 자리에 올랐던 것인데, 그때 그의 나이는 벌써 45살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관리로서 이름이 나기 시작하여 한때 태인 현감을 겸직하며 거듭 승진을 하다가 선조 24년(1591년) 2월에 일약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47살에 해군으로서는 최고위직인 지역방위 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이 초기 군대 생활을 주위의 질시 때문에 불우하게 보내다가 후기에 들어 갑자기 고속 진급한 것은 그의 훌륭한 재능과 인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죽마고우 류성룡이 관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를 적극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즉, 이순신이 정읍 현감일 때는 류성룡이 병조판서였으며 그 후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르면서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강력하게 천거하여서 순조로운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에 이순신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후 예하 각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기를 엄정히 세우면서 군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왜란 개전 시점에서 인접한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에는 불과 7척의 전함이 있었던 반면 전라 좌수영에는 40척의 대소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왜란 발발, 임진년 전투에서 전승
왜군은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에 30만 대군이 함대 700척에 분승한 후, 조선 수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오후 5시경 부산포에 들이닥쳤다. 전라 좌수영에 이러한 왜군 침입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이틀 후 저녁이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전투 태세로 비상 소집한 후에 면밀한 정황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경거망동을 삼가고 공격을 위한 출동 준비를 진행시켰다. 좌수영 소속 전 함대를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 총집결시키고 우수영군과 합동으로 5월 2일에 첫 출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4일에 단독으로 출격을 결행하였다. 4일 새벽 밤새 내리던 비도 그치고 첫닭이 울자 전라 좌수영 소속 모든 선단은 조선 수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적선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 적의 함대를 찾아 출항한 지 이틀 후 한산도 부근에서 원균 휘하의 경상 우수영군 6척과 합류한 후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7일 아침에 적선이 정박해 있다는 가덕 방면으로 다시 출항하였다.
정오쯤 되자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드디어 적선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첫번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적군은 그때 옥포만으로 30여 척이 침입하고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하다가 이순신 함대가 나타난 것을 보고 부랴부랴 배에 올라서 대응 태세를 취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올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하고 있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이때 조선 함대는 일렬로 포구를 완전히 봉쇄한 다음 적선을 향하여 일제히 진격하여서 순식간에 왜선 26척을 궤멸시켰다. 이 첫 전투는 대규모 해전은 아니었지만 전승 무드에 빠져 있던 왜군에게 일대 충격을 주었고, 우리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일전이었다. 다음날에는 고성 적진포까지 나아가 이곳에서도 왜선 13척을 궤멸한 후에 아군은 출격 이후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좌수영 본진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이렇게 성공적인 1차 출격을 마무리짓고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던 이순신에게 경상 우수영으로부터 적선이 사천과 곤양 등지까지 진출하였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또다시 우수영과의 계획된 합동작전을 포기하고 5월 29일에 2차 출동을 단독으로 결행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북선을 선두로 23척의 전함이 노량 해역으로 진출하여서 원균의 전함 3척을 만나 합류한 후 왜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직행하였다. 이때 사천에 정박중인 적선은 모두 12척으로 비교적 소수였는데 병력은 역시 육지에 상륙하여 해안 산정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의 왜군은 조선 함선을 보고도 즉시 응전하기 위해 배로 내려오지 않고 위치적으로 유리한 진중에서 웅거하며 대항할 태세를 취하고 이순신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 이 적군을 직접 공격하려 해도 화포의 사정거리 밖이었고, 간조기라서 물이 빠졌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해 있는 적선에 접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유인작전을 펴기로 하고 물이 다시 들어오는 때를 기다려 전 함대를 되돌려 철수하는 척했다. 조선 수군이 뱃머리를 돌리자 왜군들은 일제히 산진에서 뛰어내려와 승선하고는 쫓아오기 시작했다. 유인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순신은 전함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지역까지 나오자 일제히 회선을 명령하여 일시에 적을 포위한 후 집중 공격을 시도하여 일거에 적선 12척을 모두 궤멸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이 왼쪽 어께에 관통상을 입기도 할 만큼 치열한 근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부상을 채 치유하기도 전에 또 다른 왜 선단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정보가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은 6월 2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즉시 당포로 진격하여 사세를 보니 왜선은 대선 9척을 포함하여 21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고 병력은 성 안에서 방화와 약탈에 한창이었다. 조선 수군이 해안으로 접근하자 적군 병력은 일제히 승선하여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양군간의 전투가 시작되자 돌격장 이언량이 선장으로 있던 거북선이 적장이 타고 있는 지휘선으로 돌진하여 그대로 충돌한 후 용구와 전 포구를 통하여 포탄 세례를 퍼붓자 외양이 화려한 누층선인 왜선은 일거에 침몰해 버렸다. 지휘선이 궤멸되자 다른 왜선들은 우와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속히 분파되어버렸다. 당시 당포에 있던 왜군은 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지휘하던 정예부대였는데 이 전투에서 용장으로 이름이 높던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서해안 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일대 타격을 입었고, 조선은 전라도 연해지방을 수호할 수 있게 되었다.
당포 해전 이틀 후 적군 대선단이 거제를 향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고, 이순신 군은 또다시 단독으로 출격하려고 할 때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과 함께 당포에 도착하였다. 1차 출동 당시부터 그토록 고대하던 우수영 군과의 합동작전을 비로소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튿날인 6월 5일에 왜선이 거제에서 당항포로 이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연합 수군은 전선 51처과 수십 척의 중소선으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구성하여 당항포로 향하였다. 출격한 다음날 당항포에 이르러 지형을 관찰하니 외양으로부터 내포까지의 10여리가 폭 2,300미터 정도의 협곡으로 전함이 움직이기 쉽지 않은 형상이었다. 이순신은 먼저 척후선을 띄워 적정을 알아 본 결과 26척의 적선이 정박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적을 찾아 출격한 지 4일만에 마침내 또 한 무리의 적선단을 발견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형상 내만에서의 대함대 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역시 외양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작전을 세우고는 일부 전선을 투입하여 유도 공격에 나섰다. 선발대가 교대로 적선에 접근하여 적당히 싸움을 걸다가 후퇴하자 적의 전선단은 포구를 벗어나 맹렬히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적선이 협곡을 벗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조선 수군의 전 함선이 일시에 포위 공격하여 또 한번의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다음날에는 거제도 부근에서 왜선 7척을 발견하고 격파한 후 며칠 동안 웅천과 가덕 등지의 해안까지 수색하다가 더 이상 왜선을 찾지 못하자 미조항에서 원균, 이억기와 헤어지고 6월 10일에 여수 본진으로 돌아와서 2차 출동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이 2차 출격은 왜선 70여 척을 격파하는 대전과를 거두었고, 가덕도 서쪽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완전 장악하여 전략상 큰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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