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북방 개척의 선봉장 김종서 (1/2)
김종서는 흔히 무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그의 6진 개척을 통한 북방 경영이 워낙 대업이기도 하고 생애 중 가장 부각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관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신장되었거나 국토 확장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고토를 얼마라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더욱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김종서가 문신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아직까지는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이기도 하였고, 도총제 출신인 아버지에게서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김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자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달성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도 "내가 임금이기는 하지만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고 또 김종서가 있더라도 내가 아니면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라고 하며 전폭적으로 신임하였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강직성이 권력 장악 의지가 강한 수양대군과 대립적 위치에 서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하여 비명의 죽임을 당하였다.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로 있던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으로 자는 절재이고 호는 국경이라 하였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대호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붙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정상의 단면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는 강직성과 함께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려는 소박한 일면도 있었다.
6진 개척 후 형조판서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후 너무도 당당한 그의 태도가 큰공을 세운 자의 오만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명재상 황희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수용하였다는 일화는 김종서, 황희 두 사람의 인간 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도 적극 인정하는 대인다운 호방함을 보여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이해나 처신에 능한 신숙주에 대하여도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수양대군에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16살인 태종5년(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때부터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났던 세종15년(1433년)까지 대과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로서는 청,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인데, 김종서가 관료로서 성장하던 시기는 태종대와 세종대 전반부여서 전자의 시기는 아직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큰 직책은 맡지 못하였고, 후자의 시기에 와서야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즉, 세종 원년(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대에는 자연적인 관료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상당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관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서 국경 개척이라는 임무를 맡아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자로서 20여 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세상의 이해 관계에 야합하거나 명리를 탐하지 않은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 직책도 대업을 지시받고 북방의 지방관으로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외직으로의 발령이었고 그 임무 또한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난제였기 때문에 반드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어려운 자리였으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김종서의 나이가 45살이었는데, 30여 년 가까이 공직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
고려 말기에 길주 만호부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만주족들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 이민족을 야인이라고 불렀는데 흔히 여진족으로 알려진 이 무리들은 만주지방에 뿌리를 둔 부복으로서 고려 때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 금이라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였다. 그들은 당시 만주 남부지역에 자리잡고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거주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곤궁기에 생존을 위하여 중국의 동남부지역과 조선의 북부지역에 단속적으로 나타나서 약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고려조 이래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이들과의 분쟁은 끝이 없었고,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의 땅에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은 세종대에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국토 침탈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이 지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일어난 땅이었으므로 국가적 위신상으로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 때 정도전이 공주(경흥 남쪽지역)에 설치한 경원부로서 세종 9년(1409년)에 경성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방어가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지금의 수성) 지역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14년(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을 여진족 주 출몰지인 석막(부령)에 추가 설치하여 방어 목표 지역을 확장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야말로 북쪽으로 향한 세종의 영토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로 기회만 있으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고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15년(1433년)에 여진족 부족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선 조정에 날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그 세력들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조선 조정은 이때를 북방 개척을 위한 결정적 호기로 인식하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서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 15년(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그 지역 민심을 추슬르는 작업부터 시작하였으며, 또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으로 개선시켰다. 군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노고를 치하할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기도 하였는데, 그 씀씀이가 너무도 호방하고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걱정과 비난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의 군사들은 국경을 사수하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을 잡아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그만큼 그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 뚜렷한 목적 아래 행하였던 것이다.
또 당시 그 지역은 영토 확장의 실질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함길도 남부 지방의 빈농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에 이주시켰는데 김종서는 이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이주민 정착에 좋은 성과를 보이는 향리들에게는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로 이 지역에는 삼남지역에서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의 예에 따라 이주민들을 효율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천일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은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 역을 면해 주기도 하였다. 김종서는 국경지역의 지방관으로서 이러한 적극적인 지역 안정책을 진행하면서 군사 조련도 강화하였고, 일사불란함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천성적인 강직함에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은 대담성이 있었던 그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국경지역의 군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는 지휘관으로서 강한 신념과 자세를 의식적으로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국경지역 군사 책임자로서 지키려고 했던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큰잔치를 베풀고 있던 자리에서 김종서 앞으로 느닷없이 화살이 날아와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진중은 급작스런 사건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김종서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술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화살을 쏜 자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상황이 진행되지 않자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김종서의 너무도 태연 자약한 태도가 사람들의 경이로움을 사게 되었다. 그에 대하여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어떻게 군사들이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