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천민 출신 천재 과학자 장영실 (2/2)
기타 분야의 발명과 기여
장영실은 천문 기구 이외에도 각종 실용적인 기구들을 제작해 내어 세종대의 과학 기술 진보에 앞장섰다. 우선 꼽아볼 수 있는 것이 세종 16년(1434년)에 금속 활자 갑인자의 주조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고려 고종 21년(1234년)에 상정예문을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후 큰 발전이 없다가 조선 태종 3년(1403년)에 계미자라는 금속 활자를 다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활자는 크기도 고르지 못하고 인쇄할 때 활자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밀랍을 사용하는 불편 때문에 많은 양의 인쇄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세종 2년(1420년)에 다시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라는 동 활자를 만들어 내어 출판 인쇄에 큰 능률을 올리게 되었다. 이 경자자를 새로 개량한 것이 갑인자로 이천의 총감독 아래 김돈, 김빈, 장영실 등이 보좌하여 주조하였는데 대,소 활자 두 종류로 20여만 자를 만들었다.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 아니라 인쇄 능률도 종전에 비해 두 배나 향상시켜서 수많은 서적들을 출판해 낼 수 있게 되어 세종대의 문화 진흥에 큰몫을 하였다. 이때 만든 갑인자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그것으로 인쇄해 낸 대학연의, 분류보주 이태백 시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중요한 과학 발명품에 측우기가 있다. 조선은 농업 국가로서 당시만 해도 생산 실적이 자연 현상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강우량의 측정이 농사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조사하여 자료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처음에는 눈이 쌓인 것을 재어서 눈이 내린 양을 조사한 것처럼 비가 내린 후에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어서 통계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종 18년(1436년)을 전후하여 잇따른 가뭄과 폭우로 농업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받자 강우량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측정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에 세자를 중심으로 장영실 등이 참가해서 세종 22년(1440년)에 처음으로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세계 기상학 사상 초유의 측우기였던 것이다. 이 측우기는 그 다음해에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4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고 길이 20.6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고, 길이 20.6센티미터의 자인 주척으로 실제 우량을 측정하였다.
그러나 그때 만들었던 측우기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현종 3년(1837년)에 만들어진 금영 측우기가 보물 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그가 고안해 낸, 강우량을 측정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수표가 있는데 이 수표는 한성 한가운데를 흐르던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되었다. 이 수표에 의한 강우량 측정 방법도 현재 세계 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형태 그대로로서 하천 수위를 관찰하는 양수표 관찰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납득되지 않는 역사에서의 퇴장
장영실은 그 동안의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3품 상호군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세종24년(1442년)에 임금 전용 가마를 만드는 일의 총감독을 맡았는데 그가 관장하여 제작된 가마를 어느 날 세종이 사용하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 하루 아침에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파직되고 말았다. 그를 아끼고 칭찬했던 세종은 장 100대의 형벌을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 더 이상 구해주지 않았으며 그는 이때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30년 동안의 찬란한 공적을 뒤로한 채 사라져간 이 천재 과학자는 출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처럼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말년도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승승장구하던 삶이 한순간에 포말처럼 흩어져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원체 혈통의 뿌리가 없는 천민 출신인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파직 이후 곧바로 사망하거나 스스로 완전히 종적을 감추어 버린 것이 아니면 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 말년의 삶이 무시되어 버린 탓일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에서의 그의 돌연한 퇴장에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먼저 수많은 정교한 과학적 발명품을 만들어 온 그가 가마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여 사용 중에 부서지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기록된 사실 그대로라면 그것은 엄청난 그의 신분 상승에 따른 내외적 변화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먼저 그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그가 수직적인 신분 상승에 차츰 정신 자세가 나태해져서 직무를 태만히 하여 가마가 제대로 만들어 지는지 여부에 대한 감독을 충실히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추론은 두 가지 면에서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먼저 그가 바로 전해까지 정교한 과학 기구를 직접 발명해 낸 인물로서 일년 사이에 갑자기 정신적 퇴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 하나, 가마의 실제 제작은 그 분야 전문 기술자들에 의한 것이고, 그는 다만 이 작업의 책임자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가 최고 감독관이자 책임자이므로 사고가 나자 처벌받은 것이지만, 그가 관여하여 제작한 가마만 부실하여 사고가 났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그 동안 전문적으로 그 업에 종사해 왔던 기술자들이 임금이 탈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 리도 없으며, 유독 사고가 난 가마만 공교롭게도 부실했다는 것도 묘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그 사고는 이미 제작된 가마를 누군가 허술하게 만들어 고의로 유발시킨 사고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다만 장영실이 만든 가마가 종래의 것처럼 거창하고 다루기 힘든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완제품으로는 위엄을 갖추도록 하였겠지만 평소에는 간편하게 다룰 수 있는 조립식 형태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상상력일 뿐이지만 그가 만들었다면 무언가 종래의 것과는 달랐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가마에 문제가 없었다면 누군가의 사전 조작 흔적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정만 해볼 뿐이다.
사실 그때까지는 신분제가 후기처럼 경직되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노비에서 정3품 관직까지의 신분 상승은 사대부 세력에게는 고까운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출세가 신분제의 골간을 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력들에 의해서 그가 제거되었을 개연성이 그래도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결론이다. 두 번째로 그토록 그를 아끼고 칭찬했던 세종이 왜 끝까지 그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도 의문이 생긴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즈음 세종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원래 건강하지 못하여 병치레가 잦았는데 사고가 난 그 해에는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역시 병약한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주어 섭정에 임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사고까지 당하였으니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어 건강에 더욱 나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가마를 다룬 자들이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과실이라 해도 군주에게 위해를 끼치는 경우에는 대역죄로 처벌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파직된 것은 세종의 변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결국에는 허무하게 추락해 버렸다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정점까지 치달아 올라간 한 인간의 치열한 성취 과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그가 동래현 소년 관노로 있던 시절의 일화는 그의 사람됨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일을 마친 다음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서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여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 고달픈 노비 생활 중에서 자기 일이 끝나면 편히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그는 스스로 일을 만들어 그것도 완벽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그 후에도 갖가지 부문에서 자신의 과학적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차츰 주변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고, 어느 시점부터는 주위 모두가 그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후원자가 되었다. 이것은 강고한 신분의 벽이 가로막혀 있는 현실에서 애초부터 장래를 위해 취한 계산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자기가 한 일 자체가 좋아서 스스로 찾아가며 해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의 밝은 장래도 찾아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