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부왕에게 살해 당한 슬픈 영혼 - 소현세자 / 사도세자
소현세자 왕위가 보장되고 있던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피우지 못하고 저 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다름아닌 부왕의 손에 의해서. 그들은 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조선의 임금, 인조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던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죽음이다. 소현이 인조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것은 열세 살. 당시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나라를 후원하였고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함으로써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여진족 누루하치를 추장으로 하여 1610년에 일어난 나라이다. 광해군 때는 중립 외교노선을 취하므로 위험한 전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가 폐출되고 인조가 집권하자 그는 대북파 인사들의 숙청을 단행하고 곧바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3년 뒤 후금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또 그들은 군사 12만을 이끌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5일 만에 항복하고 나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청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24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한편 인질로 잡혀온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 들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오게 했다. 게다가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며, 김자점은 사돈간인 조소용과 결탁하여 그가 잠도역위(왕위쟁탈)을 꾀한다는 모함으로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왕족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며 청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천문대를 찾아보는 등 역법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서양문물에 대해 눈을 뜨고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아들고 1645년 그는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박대하면서 그가 가져온 서양문물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실기한 것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세자는 부왕 앞에서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드렸다.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면서 별안간 벼루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내리쳤다. 에잇 못난 놈! 군부가 차마 못 당할 치욕을 보고 천추에 씻지 못할 국치를 입었거늘, 그따위 벼루를 소청하였으며 되놈의 간특한 수단에 속아 은덕까지 느꼈다니, 그따위 썩어빠진 기상으로 장차 어찌 일국의 왕이 되며 애비의 사무치는 원수를 갚겠느냐. 에잇, 쓸게 빠진 자식! 외마디 소리와 함께 세자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마에서 선혈이 흘렀다. 이 일이 있은 뒤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드러눕게 되었고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려 세 차례 침을 놓았다는데 그는 갑자기 시체로 변했다. 귀국 후 두 달 만의 일이었고 병석에 누운 지는 사흘 만이었다.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그의 이모부 이세완은 말한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다. 대사헌 김광현이 의관 이형익의 실책을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도리어 그를 좌천시켜 버리고 이형익을 옹호했다.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뿐만 아니라 장례식도 평민의 장례에 준하도록 하고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루게 했다. 홍제동에 묘지를 쓰자는 신하들의 중론도 무시한 채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으로 쓰게 했다. 인조는 며느리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으로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이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멀리 귀양을 보내 죽게 하였다. 소현세자의 가족과 주변세력의 완전제거로 보아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동은 독살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봉림대군의 반청주의는 인조를 흡족하게 하였다. 때문에 큰 아들은 죽고 차남인 봉림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니 그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반청이냐 친청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당쟁에 희생된 사도세자 사도란 부왕 영조가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시호이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726년 세자는 휘령전에 나가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즉시 스스로 자진하여라. 영조의 추상 같은 명령과 한쪽에서는 이것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제지가 있었다. 이마를 마루에 부딪쳐 절하는 고두 끝에 세자의 이마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그때 열한 살이던 세손(정조)이 들어와 통곡하며 아뢰었다. 신에게 죄를 주십시오. 영조는 세손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세자에게 칼을 내주며 어서 자결하라고 재촉했다. 만류하던 동궁전 신하들도 모조리 쫓겨났다. 세자는 다시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는 큰 뒤주를 세자 앞에 내놓고 즉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한참 지난 후 할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가자 영조는 친히 뒤주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다시 큰 널판을 대고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숨이 막혔다. 뒤주 안은 풀로 가득차 있었다. 5월 21일, 세자는 갇힌지 일주일 만에 그 안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참변사건 을 재조사하기에 이른다. 이때 다시 기록된 <사도세자행장>의 기록을 보면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정조는 즉위한 지 6개월 만에 외조부 홍봉한을 이 사건에 관련된 죄인으로 탄핵하고, 유배하였다. 이로써 홍씨 가문은 풍지박산을 당한다. 세자가 갇혀 죽게 된 뒤주를 영조에게 권한 사람이 바로 홍봉한 즉 외조부라는 것이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뒤주를 처음 생각해 내신 분은 어디까지나 영조폐하시다 라고 하면서 영조에게 죄를 돌리고 친정의 가문을 위해 변호하는 내용으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40여 년이나 지나 칠십 넘은 혜경궁 홍씨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홍씨는 외도하는 남편을 미워하며 일일이 친정에 고자질을 했다고 한다. 세자가 억울하게 죽은 뒤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졌는데 사도세자의 편을 드는 쪽은 시파였고, 반대하는 쪽은 벽파였다. 벽파의 수령은 바로 홍봉한이었고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정신병자로 까지 몰아붙였던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심한 화증을 앓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그것도 벽파, 즉 노론파들이 몰래 약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녀의 하인이던 최씨로 단 한번 숙종의 은총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 하므로 영조는 언제나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점을 가지고 소론이던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영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또 영조는 왕세자 시절 소론에게 핍박을 많이 당했다. 즉위하여 탕평책을 쓰긴 했지만 소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자연히 노론이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이러한 노론의 독점 현상에 극히 비판적이었고 나아가 부당하게 여기고 있었다. 소론을 위시하여 반대세력들은 이미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세자가 그대로 왕위에 오를 경우 노론의 지위는 크게 흔들릴 게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노론의 입장에서는 사도세자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형조판서이자 노론의 두령급인 윤급이 청지기이던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난행과 비행을 과장하여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홍봉한은 차마 자기 손으로 사위를 고발할 수 없어 수하에 있던 이해중을 시켜 고발하도록 하였다.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왕세자는 창덕궁에서 늙은 개만 보아도 때려 죽인다고 합니다. 또 나라가 바로 되려면 늙은이부터 죽여야 한다 고 하고 있다 하옵니다. 한편 그는 영조의 총애를 받던 총희 문숙원을 시켜 영조에게 세자의 악담을 하게끔 부추겼다. 문숙원의 동생으로서 출세의 길에 올라 있던 문성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전에서 세자를 헐뜯었다. 사도세자는 세 살 때 <효경>을 외웠고, 일곱 살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사옥을 비판했다. 1749년 영조가 병이 들자 세자가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를 무고했다. 그럴 때마다 성격이 과격하고 조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는데 이것을 이유로 세자를 죽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는 부자지간의 이간과 불신. 그것을 부추긴 노론과 소론의 사이에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불운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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