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실명의 화가 - 박수근 / 도미에
박수근 [朴壽根] 1914∼1965. 서양화가. - 사진은 창신동 집에서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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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도미에와 1960년대를 살고 간 우리의 토속적 민중화가 박수근은 가난의 어려움을 딛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여 최상의 예술경지를 이룩해 낸 입지론적 인물들이다. 만년에는 불행하게도 두 사람 다 시력장애를 일으켜 실명하는 고통을 당하였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아버지의 광산사업 실패로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대신 혼자서 산과 들로 쏘다니며 연필 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다. 열세 살이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본 박수근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반 고흐도 밀레로부터 자신의 그림을 출발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박수근도 밀레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의 예술은 가난한 서민들의 성실한 삶을 일관되게 주제로 삼고 있다. 그의 작품 <골목> <풍경> <절구> <판자짐> <노상> 등은 쓸쓸한 여운을 끌며 토속적인 분위기를 전해 준다. 절구를 찧거나 맷돌질을 하거나 어린 아이를 업고있는 시골 아낙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인물의 무표정한 단순화와 대담한 생략, 그리고 직선의 기하학적 비율로 구성되는 평면의 특질, 거기에 얽은 마마자국처럼 모래흙이 뒤범벅이 된 것 같은 한국적 질감의 마띠에르. 놀라운 그의 이러한 미술세계는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혼자서 독창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틈만 있으면 그는 땅 위에 담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 연필 대신 뽕나무를 잘라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 썼다. 가난 속에서 밥짓기, 나무하기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신문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미술관계 자료를 꼼꼼히 읽고 기사를 나름대로 스크랩하며 전시회, 미술평론 등 미술정보를 통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안목을 혼자 키워 나갔다. 열아홉 살이 된 이 시골 독학생의 그림 <봄이 오다>가 놀랍게도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 입선되었다. 어린애를 업고 절구질하는 <일하는 여인>이 두 번째 입선. 제16회에서 22회까지 해마다 입선되었고 1953년에는 <집>이 특선, 59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프랑스의 도미에는 마르세이유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소의 사상을 신봉하는 무명의 혁명적 시인이었다. 아버지의 실패로 그는 학업 대신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생활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소년시절을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지낸 탓인지 그의 그림에는 법정, 변호사 등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이 많았다. 시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법률가들을 그는 사악한 위선자로 표현했으며 돈키호테와 산쵸판사, 노래하는 삐에로, 천대받으며 굶주리고 있는 어릿광대, 곡예사들을 즐겨 다루었다. 박수근이 생계를 위해 미 8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렸듯이 그는 발자크의 소설에 삽화와 만화그림을 그려 넣었다. 가난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림 그리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림에 몰두, 스승 없이 독학으로 혼자 수련을 쌓아 나갔다.
도미에 [Daumier, Honore-Victorin] 1808. 2. 20/26 프랑스 마르세유~1879. 2. 11 발몽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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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는 드라크르와에게서 내가 당신 이상으로 존경하고 칭찬한 화가는 없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받았다. 가끔 미술 평론을 쓰던 보드레르에게도 그의 유화는 일찍이 인정을 받은 바 있었다. 예리한 필치로 풍자화를 많이 그렸다. 64세 무렵부터는 시력 장애로 점차 눈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 코로(풍경화가)의 도움에도 그이 만년 생활은 극도의 궁핍과 실명속에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71세로 사망하기까지의 7년 동안은 암울 그 자체였다고 한다. 박수근도 가난과 여러 가지 내면적 고독을 이기려고 거듭된 과음을 하여 신장과 간을 다치고 그로 인해 왼쪽 눈의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진작 치료하지 못했다. 사물의 대상을 마치 촛종이를 통해서 보는 것 같다 고 했다. 눈의 안압이 높아 심한 고통을 겪다가 악화된 후에야 수술을 받았다.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눈을 아주 못보게 되고 말았다. 49세였다. 그 후 오른쪽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게다가 간을 몹시 앓으면서도 제작생활을 감행하여 제13회 국전에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을 일으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 달 뒤 퇴원하여 집에 돌아 온 5월 6일의 새벽 1시였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그는 51세를 일기로 우리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아내 김복순은 이렇게 회고했다. 하루는 저녁에 들어오더니 내가 오늘 버스 안에서 보니까 광주리장수 아주머니들도 다 털속치마를 입었던데 당신만 안입었어. 하며 마음에 걸려 하셨다. 마지막 운명하는 날도 내 걱정을 하며 당신 속치마 라고 하였다. 외출했다가 돌아올 대 먼 발치에서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고 한 박수근의 말을 그의 딸 인숙은 회고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예술을 위해 가정이나 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창작에 몰두하여 해마다 거르지 않고 작품을 제출하는 성실성을 보였다. 통 말이 없어 누가 물으면 아! 그래 그렇게 하지.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한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박수근 말고 또 있다. 호생관 최북, 그림을 얻지 못한 어느 귀인이 그를 협박하자 최북은 대노하여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 하겠다. 고 하며 제 눈 하나를 찔러서 외눈이 되어버렸다. 조선조 말기 오원 장승업은 고종 임금의 설득에 하룻밤에 꼬박 새워 말 떼를 그렸다. 그러나 그 달리는 말에 생동하는 기운이 없다고 하면서 그도 스스로 제 눈 하나를 찌르고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화가의 눈은 혹사가 아니면 이렇게 수난을 당했다. 고갱도 만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수련>의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도 시력을 잃게 되어 늘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양쪽 눈이 백내장으로 거의 실명하다시피 되었다. 드가에 관하여 뽀올발레리는 이렇게 썼다. 눈을 너무 많이 써서 시력을 잃자, 그의 정신은 방심상태와 절망상태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광태의 되풀이가 늘었다. 난 죽음만 생각하고 있어 라는 그의 말. 나이가 들어 그토록 재능있는 사람이 황폐해 가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여성 혐오자로서 발레리나를 즐겨 다룬 드가는 70세에 거의 장님에 가까운 눈으로 파스텔을 칠한 <발레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지 13년이 지나 83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시력의 악화로 유화제작을 진작 포기했으니 그때의 나이는 56세였다. 화가가 눈이 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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