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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Mar 30 2023
컴퓨터와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위험성 그리고 문학 - 이해를 돕기 위해 학술용어와 설명은 배제한다. “이렇게 하면 편리하고 간단한데 왜 복잡하고 긴 시간을 일하지?” 라는 질문이 지금의 문명을 가져왔다. 그리고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좋은 현상이라 웃을 일만은 아니다. 동전과 지폐가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신용카드도 스마트폰에 넣고 다닌다. 재래시장도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처리되고 시골 5일 장정도 구경을 가야, 천 원짜리를 볼 수 있다. 초기에 컴퓨터는 덤프트럭 몇 대의 크기였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붙어 일했지만 워낙 느려터지고 고장이 많았다. 왜냐면 그 큰 컴퓨터를 채우는 부품이 많았고 전기가 있어야 했고 진공관 관리도 힘들고 과열되기 쉬워 부품이 타는 등 하나하나 사람 손이 필요했다. 이 큰 컴퓨터를 지금 노트북이 대신하고 그마저 스마트폰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컴퓨터는 0과 1밖에 모른다. 그것이 숫자와 문자를 표기하고 우리가 시험 볼 때 쓰는 OMR카드 그리고 바코드가 등장하고 지금은 편의점만 가도 권총 같은 기계로 스마트폰을 스캔하면 몽땅 처리된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마저 작은 칩으로 몸으로 들어가거나 입는 형태로 나왔다. 스마트폰도 귀찮다는 뜻이다. TV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을 타고 꺼내 펼쳐 신문을 보듯 방송을 본다. 이것도 허공에 TV를 띄우는 홀로그램으로 대체한다. 즉, TV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IT 기술의 끝은 과연 있을까? 영화 같은가? 영화 ‘인터스텔라’는 많은 이슈를 남겼다. 시공간을 다룬 영화 중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 상대성 이론을 정밀히 보여줬고 시간과 중력에 대한 개념을 깊게 심었다. 우주로 갔던 아버지가 지구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그대론데 딸이 많이 늙어 삶을 정리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건 차치하고 영화 도중 로봇이 나온다. 이것이 GPT다.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지능’이다. 여러분은 요즘 관공서나 은행, 보험사 같은 곳에 스마트폰으로 문의할 때 챗봇이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그 챗봇이 멍청해 보이고 원하는 답변이 없기에 아예 처음부터 사람이 받는 ARS를 이용한다. 이 챗봇이 진화를 시작했다. 관공서와 기업에 AS를 담당하던 직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챗GPT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능이다. 그간 인간이 만들어낸 엄청난 양의 정보를 습득했고 대학 졸업논문 따위는 표절을 피해 바로 출력한다.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도 알아듣고 법적 소송도 불사한다. 2035년을 예상한 영화 ‘아이로봇’을 보면 GPT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뒤집힌다. 이젠 생각하는 기계가 현실로 왔다.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 이미 사법고시를 통과했고 의사면허 시험도 통과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인류 탄생 이후 인간이 만든 모든 문서를 가지고 있고 사진을 찍어 들이대면 문서로 해독한다. 프랑스 유명 대학의 물리 문제는 물론 핵융합 과정은 껌이다. 프로그래머들이 쓰는 개발 언어를 모조리 이해한다. 따라서 게임개발업체나 앱개발업체는 돈 들여 프로그래머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이젠 로봇과 AI가 산업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 편리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로봇과 GPT에 세금을 부과해 인류가 편하게 사는 법안이 모색되고 유럽연합에서는 GPT 관련 법안이 통과됐다. 약 120쪽 분량이다. 독일은 공론화 중이고 미국은 AI 법안이 상정 중이다. 주 내용은 GPT가 인간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 AI의 윤리, 저작권 문제 등 인간을 위주로 법안이 상정되고 있다. SF소설의 세계 최대 출판사에서 공모사업을 했는데 2020년대 들어 표절작이 갑자기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미술계도 마찬가지다. 모네 풍으로 나를 그려달라고 하면 정확히 그려준다. 과연 원작자는 누구인가가 화두다. 문제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난도 질문을 해 테스트를 거치는 일이 과학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반에 잘 대답하던 것이 점점 거짓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 파악의 목적은 거짓말은 단순 데이터 입력에 대한 최상의 답변을 낸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인 줄 알면서 한 것인지 판가름하는 일에 달려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GPT의 출현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답변을 피한다. 인간을 속이고 최상의 답변을 내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나 한 국가가 GPT에 의존할 때 파장은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옳은 길만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예 정치를 GPT에 맡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다. 매일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 늘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집권당이 나라를 휘어잡는다. GPT가 전쟁을 일으킬 시 우리나라가 이길 확률을 99%로 내놓는다면 권력자는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은가. 실리콘밸리 은행이 파산했다는 말이 뭐냐고 묻는 게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적 수준이다. 기자에게 포착된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1970년대를 사는 느낌이다. 좋은 것이라 믿고 무작정 각 분야에 이 GPT를 도입하는 일이 바른 일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법안도 없고 로봇에 관한 법률 지정이 시급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역사, 윤리,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 전문가를 불러 모으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 지금 정부를 비롯해 기업들이 GPT를 도입하고 상용화하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당신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당신만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이것이 몸으로 들어간다면 당신은 당신 것이라 확신하는가? “에이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과도한 상상과 걱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과거 상상도 못 한 것들이 출현해 그것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핵폭탄을 만들고 과학자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고 울었다는데 GPT를 만들어내고 후회는 할까? 글 속에 자연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말을 쓰는 건 인공이 아닌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내 지론이다. 그것만이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쉬운 지름길이다. 자연을 우습게 본 결과를 지금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교통수단과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가 들어가 있는 스마트폰을 빼면 고구려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본다. 불편했어도 모든 건 인간이 결정했다. 인간이 읽기 편하고 기분 좋아지는 글을 AI가 써대는데 문인이 필요할까? 인간의 능력은 초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있다. 거짓말도 하잖은가.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특정 분야에 GPT를 폐기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그 편리한 걸 왜 폐기한다고 보는가. 급하면 공중전화 찾기가 바빴지, 전화기를 손에 들고 다닌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나? 우체통마저 사라졌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온다. 문학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을까? 지금 알게 모르게 겪듯이 GPT는 일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억울해서 항의 전화를 해도 GPT가 거절한다면 전화를 끊어야만 한다. 지구의 존속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변이 인간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아직도 GPT가 우스워 보이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2023.03.30 10:21 윤영환
風文  Mar 29 2023
그건 그렇고 50호 : 아파트 주변 ‘그건 그렇고’의 팬들이 생겨난다. 왜냐면 사실대로 쓰니까. 막글의 묘미다. 어쨌든 기분이 좋다. 그냥 끼적임의 형태다. 사는 대로 쓴다. 겁나 편하다. 그건 그렇고 편의점에 갔는데 유치원생들이 올망졸망 떠든다. 이야기인즉슨, 인원이 6명인데 돈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삼각깁밤을 사면 반씩만 먹고 친구에게 주자’하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런데 리더와 달리 다른 친구들 표정이 영~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골든벨을 울렸다. “고르고 싶은 걸 하나씩 골라라” 했더니 난리가 났다. 그런데 6살 여자아이가 “저 아저씨 호빵 아저씨”라고 손가락질한다. 알고 봤더니 올 초 호빵을 사준 적이 있다.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기분이 초급상승하며 기뻤다. 리더인 7살 오빠가 “감사합니다.” 하고 배꼽 인사하고 우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헤벌리고 왔다. 한잔했나? 그건 그렇고 아파트 방송에 하나 걸리는 게 있는데 방송 끝날 때 “행복한 저녁 되세요.” 하는 소리다. 나는 1년 전에 항의했으나 고쳐지지 않는다. 한판 붙자는 건가 그리고 환기를 왜 시키나. 환기가 누군데 시켜? 추우니까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가. 아이들이 국어를 사랑하길 바란다. 그건 그렇고 마스크를 벗는다고 하니 놀이터에 애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애들 주변으로 엄마들이 모인다. 쫑알쫑알 뭔 할말들이 그리 많은지 예전 같으면 문을 닫았겠지만 열어둔다. 사람 사는 것 같다. 건너편 작은 도로 뒤엔 논갈이 밭갈이가 시작됐다. 가을엔 또 황금 논으로 변하겠지. 한참 모가 자랄 시긴가 보다. 농부들이 바쁘다. 언덕을 깎아 만든 아파트라 여기 이름이 언덕마을이다. 수십 년 된 나무들이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다. 바람만 빼면 좋은 환경이다. 만족한다. 엘리베이터 타러 가는 입구 가지치기한 목련 나무에 꽃망울이 수도 없다. 다음 주면 만개하겠지. ‘너는 너의 삶이 있듯이 나도 나를 살아간단다’ 하고 들어왔다. 그건 그렇고 내가 자주 가는 주유소엔 내 주유 전용 카드가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주유소에 건의했는데 보름이 지나도 안 고친다. 주유소를 바꿨다. 그 주유소는 자동세차비를 3천 원으로 내렸단다. 고객유치의 한 방편이다. 예전엔 기름만 넣어도 무료 세차였는데. 셀프 세차장을 알아봤다. 내 맘대로 세차하고 싶어서다. 내 차는 페라리급 엄청 막강한 스포츠카다. 11년 됐고 이름은 모닝이다. 짜식은 늘 씽씽하다. 라디오도 나온다. 빡빡 닦아줬다. 짜아~식! 때 빼고 광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중국집에 갔다. 보통 요리를 잘하는 ‘이가원’에 가는데 짬뽕 전문점인 ‘뽕누리’로 갔다. 친구는 짬봉밥을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짬봉을 먹었다. 친구에게 면을 주고 밥을 뺏어 왔는데 허무하다. 뒤편 밥통 위에 뭐가 쓰여있는 것이다. 밥은 셀프고 무한대이며 밥을 먹지 못하는 가정을 위해 천원부터 기부받는단다. 누적 금액이 3백만 원에 가까워져 있다. 천원의 기적이다. 나는 단골로 지정했다. 소주는 안 먹었다. 별일이다. 그건 그렇고 마트에서 콩나물을 샀는데 이상하다. 봉지는 똑같은데 내용물이 적어졌다. 이것들이 나를 우습게 보나?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다. 지들 맴이지 내맴인가? 치사하다. 꿀꽈배기를 사면 꿀꽈배기는 3분의 1밖에 안 들어있다. 나쁜 놈들. 그럼 봉지를 작게 만들던지. 환경오염은 포장만 줄여도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옆집 아저씨가 요새 안 보인다. 바람났나? 맨날 들락날락하더니 요새 조용하다. 긍정적이시니 별일 없겠지 한다. 하도 노인 고독사가 많아 신경 쓰인다. 요즘 노인 일자리를 연구 중이다. 시청에 건의해 합법적으로 운영하고자 한다. 매일 가지는 못하지만 내가 다니는 협동조합이 주야장천 성공하길 바란다. 그건 그렇고 요즘 글에 매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좀 쉬고 싶다. 소설을 시작하면 대책이 없지 않나 싶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좋다.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은 미워하던 국가가 예뻐지는 시점이다.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곧바로 총살이다. 2023.03.29. 15:33 風文
風文  Mar 28 2023
고령화에 관한 잠시의 생각 - 윤영환 “젊다고 몸을 함부로 놀린 게 다치는 겨.” 이 말은 농사를 짓다가 다친 아들에게 연고를 발라주며 99세 노인이 74세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67세 어르신이 형들이 ‘막내 심부름’ 시켜대서 짜증이나 경로당에 안 간다고 한다. 이게 웃을 일 같지만 남 일이 아니다. 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에 나는 대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군대에 있거나 사회초년생들은 150세를 예상한다. 지금의 노인은 먹고살기 바빴고 자식들 굶기는 문제나 교육에 일생을 들어 바쳤다. 일감을 주면 일은 잘하는데 노는 일을 못 한다. 지금도 노는 데 어색하니 짜장면을 참아가며 손자 용돈을 준비한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고 달리다가 떨어지면 멈춰 선다. 인간도 주어진 에너지를 다 쓰면 멈춘다. 그러나 기계가 농사를 짓고, 드론이 사람을 대신해 농약을 뿌려대고,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에너지가 남아돌며 우린 늙는다. 평균수명은 의료기술의 발달도 있지만 이러한 에너지 고갈이 적어지면서 늘어난다. 게다가 죽을만하면 병원에서 살려낸다. 2~30년 키워 놓고 80년을 자식한테 기대는 삶도 평탄하지 않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말을 명절 때마다 절받으며 듣는다. 이젠 오래 사는 일이 민폐다. 자식보다 더 사는 노인도 있다.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은 누가 책임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바로 자신이다. 노후를 설계하는 방식이 연금도 있고 보험도 있고 다양하다. 그럴 능력이 있는가? 다년간 노인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을 누군가는 해결해 준다는 믿음은 버리길 바란다. 주변 친구도 갈 날만 기다리지, 별 도움도 안 되고 친구조차 없는 사람은 그냥 선택하는 것이다. 사는 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는 무너짐 때문이다. 내 부모도 이 나이에 갔는데 내가 무슨 죄로 이 나이를 넘기고 사는가 하는 한숨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예전엔 60세만 넘어도 백과사전이 걸어 다닌다고 말했다. 그만큼 오래 살았고 배울 점이 많아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인은 다르며 살아온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내가 가끔 찾는 94세 어르신이 있다. 안부도 여쭙고 조언을 듣기 위해서다. 잔소리가 별로 없고 단답형이다. 늘 그분을 뵈며 ‘나도 저렇게 늙었으면’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분이다. 실로 내공이 대단하신 분이다. 나에게 젊은이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이 들수록 시대에 적응하고 깨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변화를 추구해야만 노년이 행복하다. 젊은이로 돌아가 도전하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뭔가를 해주리라 믿는 아둔함은 버려야 하는 시대다. 65세 노령연금이 67세 내지는 70세로 연장하는 법안이 오고 간다. 죽음은 선택이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동물처럼 가죽만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문학을 추천한다. 문학에 골몰하고 뇌를 회전하는 순간 깨어난다. 고스톱을 치면 치매를 예방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새로운 일을 제시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노년의 행복이다. 나도 살맛 나고 후대에 표본이 된다. ‘표본이 된들 무엇하랴!’라고 생각이 들면 끝난 삶이다. 독서가 중요하고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나를 표현하는 일의 근본은 글이다. 나의 가치는 나를 표현하는 것에 달려있고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욕을 먹어도 나를 수행하며 표현하고 늙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도 희망이 없으면 가는 게 도리다. 쓰는 일이 어렵나? 어려우면 동네도서관에 가보자. 어렵지 않다는 걸 바로 안다. 쓰는 일은 에너지를 가장 덜 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동 아닌가? 첫머리에 말한 99세 할머니의 자랑거리는 일기다. 뭔가를 기억해내고 쓴다. 내가 살아 있음을 매일 글로 표현한다. 별다른 의미가 있지 않지만, 기록문화로 값어치가 있다. 모 작가는 성경을 읽고 모 작가는 불경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찾기도 한다. 이 어르신의 일기는 ‘아이디어 집’ 아닌가? 노인이 존경받아야 마땅한 시대에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살아내고 있지 않음에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나머지 시대를 설계하지 않는다. 젊은이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대화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자. “그건 고민도 아니야. 나 때는 말이야...”하고 시작하는 경험이 고정화된 의식구조 때문이다. 마치 훈장이나 되는 듯 고생은 혼자 다 한 듯 지금 이 시대에 고민하는 젊은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은 몇십 년 전에 멈추어 오늘을 적용하니 말이 통하겠나? 나머지 시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는 일이 숙명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60세가 넘으면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100세가 기본이다. 지금 편안하면 그만일까? 노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고 이 시대 산 증인이다. 문인 중에 치매 걸려 벽에 똥칠하는 사람 봤나? 내가 늙었다고 판단 되는 순간은 늦은 일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 많은 연륜에 뭘 주저하나. 바로 표현하라. 그것이 다시 사는 인생이다. 그 시작점이 예술이며 예술의 원천은 문학이다. 임종실을 알아보기 전에 시경을 보라. 내 생각에 하찮은 시라도 그것은 그 시대 그 문학이다. 남기자. 당신 가죽 말고 이 시대를 살다 간 당신의 이름을. 2023.03.28. 04:03 윤영환
風文  Mar 06 2023
얼마 전 장애인 주차구역에 차를 대서 내가 민원을 냈다. 2층에서 빠를 한단다. 강남미녀 어쩌고저쩌고하는 광고지의 출처를 알았다. 어쨌든 나의 신고 덕에 벌금 10만 원을 냈단다. 1층에 서 있는데 길거리에서 따지러 왔다. 왜 그랬냐고. 블랙박스까지 확인하면서 나를 알아낸 것 보면 꽤 억울했던 모양이다. 네 가지를 설명할 테니 들어볼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듣겠단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면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먼 거리 홈플러스에 가서 주차하고 보호자에게 전화해 둘이서 걸어왔다. 멀쩡한 주차장 놔두고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고 아저씨에게 아무 데나 주차할 권한을 누가 줬나. 경찰서에서 형사가 사진을 찍었어도 이렇게 따질 수 있는가? 불편하게 해 미안하다고 말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다음 내게 물을 일이다. 억울하다면 상식을 지켰는가를 생각하길 바란다 . 세상 살면서 대부분 그렇다는 걸 느낀다. 이와 같은 일은 주차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상식이 있다면 그러겠나. 욕질에 인상 쓰고 내려올 것을 알기에 하지 않았다 . 내가 전화해서 차를 빼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든지 웃으며 해결할 수도 있다. 흔한 말로 억울하면 고발하면 된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간당간당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리를 절거나 지적장애가 있어야 장애인은 아니다 ? 그게 정상 아닌가. 군소리 없이 내고 다음부턴 그 구역에 주차하지 않는다. 만 원을 벌금으로 낸 적이 있다10내가 예전에 스포티지를 몰았을 때 장애인주차구역에 차를 대고 .배려는 없고 나 편하면 그만인 세상이다. 말라버렸다. 알아도 사과는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우린 자신이 당한 억울함에 화부터 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