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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Oct 27 2023
친정 97년부터 활동을 했는데 당시 문단은 이미 폐간이 되었고 그나마 아는 문단들이 있어 오래간만에 연락해보니 아직 살아 있는 곳도 있더라고요. 반가웠는데 그래도 친정이 아니잖아요. 어찌어찌 시사문단이 친정이 됐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동료 의식? 공동체? 소속감? 기댈 데라도 있어야 비비지, 없으면 좀 허전하잖아요. 죽어서 가죽만 남길 뻔했는데 이름을 남기잖아요. 파주랑 인사동에 아는 시인들이 있는데 연락처를 잃어 연결할 방법이 없네요. 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그때는 한창때라 왜 그리도 퍼마셨는지…. 이유도 없었지요. 그냥 만나면 부어라 마셔라. 그따위로 글 쓰지 말라 멱살 잡고 싸우고 하여간 열정은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혼자 낑낑대는 것도 매력은 있지만 같은 동료끼리 토론하면 참 좋은 효과가 났었죠. 얼마나들 고집이 센지 당장 굶어 죽어도 쓸건 써댔죠. 2003년 인가 모 신문사에 사설을 몇 개 보냈다가 돈벌이에 미쳤다고 잡아먹으려 듭디다. 평생 욕먹을 거 그때 다 먹었죠. 원고료 몇 푼이나 한다고…. 지금 청년들도 그런 열정이 있나 궁금하네요. 요즘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때 필명이 ‘는개’였답니다. 는개라는 시 한 편을 썼거든요. 여기저기 두들겨 보면 연락처 하나 나오겠지요. 연락이 한 사람만 돼도 쫙~ 인데. 절필하고 삶으로 들어갔는지 아직도 인쇄돼서 작품들이 나오는지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오늘문득 : 2023.10.27. 12:46 風文
風文  Oct 26 2023
그건 그렇고 51호 : 날씨가 흐리다 짬뽕을 한 그릇 먹고 오니 이런 게 집에 와있다. 헐~ 예전에 ‘완장’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완장이나 배지는 어깨에 힘 들어가게 만든다. 예쁘고 좋다. 그건 그렇고 편의점에 들러 몇 가지를 사러 갔는데 허리에도 안 오는 작은 남자 녀석이 만 원을 나한테 준다. 주머니에서 떨어졌다고 하니 헐~ 했다. 겁먹은 표정이길래 볼을 만지며 “감사합니다.”라고 해줬더니 그때야 웃는다. 덩치가 크고 키가 크면 애들이고 어른이고 먼저 경계한다.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본능이다. 난 연약하거늘…. 어쨌든 기분이 좋아 감자 칩 하나 쥐여 주고 계산대에 왔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 편의점 아주머니가 말싸움 중이다. 들어보니 아이들이 담배를 요구한다. 그러고 보니 집 앞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다. 중학생도 안 돼 보인다. 확 쓸어버리려다 후회막심했던 경험이 풍부해 참았다. 되려 아주머니가 호통을 치는데 속이 뻥~ 뚫린다. 역시 사이다. 그건 그렇고 근래 학교 선생님들이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이 귀족 짓거리를 하라고 부모가 부추긴다. 각종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으로 교사를 억누르고 있다. 교사는 운동하던 사람이 아니다. 교대생은 오로지 공부만 하는 사람들만 모인다. 이런 내공으로 저런 학부모를 버티기는 힘들다. 사회학은 가장 먼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가르친다. 사회계층 안에 어느 단계에 내가 서 있고 해야 하는 일을 일러준다. 대통령 밑에 장관들이 있는 건 각 장관의 위치와 역할이 분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게 공동체의 출발점이다. 혼자 산다면 쓸데없는 일이지만 같이 산다면 필요하기도 하다. 우린 뭔 모임이 결성되면 총무부터 뽑잖는가. 그런데 이 지위와 역할이 뒤바뀌는 요즘이다. 자식이 그리 귀하면 학교를 보내지 말고 끼고 살면 되지 않나 싶다. 그건 그렇고 주차하고 내리는데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갈비탕 잘 먹었다며 인사를 건넨다. 그게 초여름이었나? 갈비탕 하나 포장해서 갖다 드린 일이 있다. 그런데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인사를 건네다니 참 고마울 따름이다. 상대는 잊었는데 우린 가끔 특이하게도 그날 그 시각을 기억하고 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하고 싶어 마음에 담고 산다. 반면에 상대보다 먼저 잊는 일도 있다. 별 신경을 안 쓰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고마운 줄 모르고 사는 인간이 많다는 점이다. 혹 주변에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도 방금 카톡을 두통 보냈는데 그분들께는 고맙다는 말을 잃고 산듯하다. 그건 그렇고 아파트 방송이 수정됐다. 잘못된 어법은 아이들이 듣고 배운다. 세 번 찾아가 따졌다. 수정하라고 요청한 지 1년이 지났다. 관리소장이 교체됐나? 잘된 일이다. 이런 오지랖을 떨기 싫다면 국문과 지원을 심사숙고하라. 그건 그렇고 자의든 타의든 짓눌리고 눈치 보고 민생고에 시달리다가 선술집 들어가 취기가 돌면 흔히들 뱉는 말 중 삶에 찌들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찌들어 눌린 눅눅한 솜을 새로 산 솜처럼 바꿔주는 솜틀집처럼, 마음을 솎아내고 털어내고 뽀송뽀송하게 해줄 ‘마음틀집’도 없고, 홀로 버티기엔 힘든 어깨들을 본다. 몸이 쳐지도록 땀 빼고 일해 손에 쥔 몇만 원을 소주병에 털고 나서 뽀드득거리며 눈 덮인 골목을 걷다가 멈춰서 하늘 한 번 본다. 얼굴로 떨어지는 함박눈을 향해 후욱~ 한숨 뱉으면 입김에 별들은 지워지고…. 그렇게 가로등 지나 집 앞까지 오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으면서 내면에선 인생을 뒤틀만한 그 지점으로 가고 싶다. 서 있는 곳 어딘지도 모르겠다 한다. 취기에 비틀거리며 현관문 앞에서 마누라 얼굴 새끼들 얼굴 떠오르면 “술값으로 돼지고기나 사 올 걸.” 한다. 반복되는 일상처럼 느껴지는 하루살이 쳇바퀴도 하수구에서 도는 것과 꽃밭에서 도는 것은 다르다. 쳇바퀴를 부수고 롤러코스터 만들든가, 오늘 태어났다고 잘근잘근 씹어 대든가, 해가 지면 죽는다고 믿든가…. 답답하게도 살아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다. 하루하루 발버둥이다. 그건 그렇고 뭔가 변화를 주고 싶다. 삶이 지겹고 집이 구치소 같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피곤하고 쳐진다. 광부가 막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길을 더 내기도 싫고 그냥 앉아 쉬고 싶다. 그저 산속으로 가고 싶다. 신라의 한 공주가 ‘속세와 이별’하고자 간 곳이 속리산이라 했던가. 누가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답답하고 큐브 속에 갇힌 느낌이다. 인간은 역시 혼자 살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건 그렇고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효도를 잘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공자 왈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아플까 걱정이니라.” 어머니가 보고 싶다. 안산에서 살 때는 요양병원에 계신 모습을 못 참아 나 살던 아래층에 어머니를 모셨다. 툭하면 내려가 6시 내 고향도 보고 전국노래자랑도 보며 맛난 것도 먹고 마시고 놀았다. 하도 안 와서 아내가 따라 내려와 멀쩡한 집 놔두고 어머니랑 자는 날이 많았다. 나도 모자라 며느리 응석까지 다 받아주셨다. 성당에 가려 양복을 입는데 아내가 “안젤로 엄마가 이상해!”하는 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며칠 전부터 쌀이고 반찬이고 모조리 우리 집에 가져다주시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었다. 화장터로 가며 다짐했다. ‘전국노래자랑은 이제 끝났구나.’ 그건 그렇고 요즘 연이어 날이 흐리다. 나는 비가 올 듯한데 오지 않는 날씨가 좋다. (흡혈귄가?) 낮에 떠 있는 달은 태양 때문에 우린 보지 못한다. 있으나 없는 듯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도 안다. 경계에 서 있다. 지구로 떨어질 운석을 24시간 빨아들이고 있는 목성이 잠깐 한눈팔면 지구는 끝장이다. 그 한순간을 나는 기다린다. 예언자처럼 긴장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며칠을 쉬었다. 내일부터는 업무에 복귀하려 한다. 나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봉사는 시작이 어렵지, 시작하면 즐겁다. 며칠 전 매송에 사시는 100세가 다 되어가는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조현병인 딸이 돌보고 있었는데 아들이 요양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에 나는 가슴을 쳤다. 가신지 한 달 만에 떠나셨다. 노래도 곧잘 하시는 예쁜 할머니였다. 왜 우리는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가. 주삿바늘 꼽아대지 말고 가망이 없으면 집으로 모시라. ‘집’이라는 한 글자는 무한한 평화를 준다. 그건 그렇고 소주가 달지도 쓰지도 않다. 기본이 다섯 병이니 두 병 남았다. 내일 병원 가는 날인데 벌써 원장님 잔소리가 들린다. 쏘리. 짱 쏘리. 수간호사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눈에 선하다. 그러나 사나이 윤영환! 마저 퍼마시자. 흐흐흐…. | 2023.10.26 17:12 風文
風文  Aug 03 2023
근래 몸이 매우 좋지 않아 몇 달 동안 움직임조차 힘들었다. 앞으로 심각한 검사가 기다리는데 더욱더 걱정이다. 멀쩡한 사람도 검사하면서 초주검이 되는 걸 봐서 겁이 난다. 주변에선 말리는데 안 할 수도 없고 누군들 고통스러운 걸 하고 싶겠나. 무더위다. 40도는 기본이다. 어쩌다 우리나라가 이리도 더운 나라가 되었나. 시골 어르신들이 걱정이다. 하우스만 안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죽는 사람도 지속해서 느는 걸 보면 보통 더운 게 아닌가 보다. 정말 듣기 싫은 뉴스다. 간만에 꽃 선물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화원에 가서 골라야 하는데 못 갔다. 아주 아름다운 장미와 화분이다. 화분이 여름을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 죽지 말고. 근래 정신이 좀 든다. 할 일이 쌓여있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막막하다. 그럴 땐 가장 급한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서둘러봐야 뒤죽박죽돼버리고 만다. 더 느긋하게 천천히 야무지게 할 일이다. 문학상 소식이 들어온다. 작년부터 뭔 상복이 터졌는지 이 나이에 상 타라고 전화 받는 일들은 참 새로운 일 같다. 미뤄 둔 글도 좀 쓰고, 하고픈 말도 좀 하며 내년 안에 수필집과 시집을 한 권씩 낼 참이다. 빚을 내서라도 낼 생각이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한다면 웃자. 일그러진 표정이나 우울함은 전혀 도움 되지 못한다. 아니면 아예 포기해버리고 하지 말든지. 그게 장수의 비결이다. 한 보름 지나면 찬 바람이 불 것이다. 난 어려서부터 겨울을 좋아했다. 여름은 정말 싫다. 끈적거리고 질퍽거린다. 녹색이 거리에서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난 앙상한 겨울나무를 더 좋아라 한다. 그 가지 위로 눈이 소복 내리면 더 좋아라 한다. 걷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내가 나를 부여잡고 움츠리는 일은 마치 나를 사랑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2023.08.03. 15:06 - 윤영환
風文  May 02 2023
가면 - 윤영환 코로나19 시대를 살아내며 변화된 모습 중 하나가 화법의 변화다. 보다 직설적이고 수사학적 표현이 줄었다는 일이다. 문장이 짧아지고 뭐든 짧게 말하려는 문화가 생겼다. 이 현상을 나는 ‘가면의 공식화’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기 전엔 외모뿐만 아니라, 말도 각종 장식과 꾸밈으로 상대를 대했다. 쉽게 말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참 나를 보이길 꺼렸다. 집이나 목욕탕에선 벗고 있으니 가면이 필요 없지만 나가려 옷을 챙겨 입는 순간 우리는 가면을 집어 든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스크를 권장하며 합법적으로 가면을 쓰게 해주니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말들이 직설화법으로 바뀌고 문자 메시지가 대세가 된 것이다. 이 많은 가면은 늙으며 한두 장씩 사라지고 죽기 며칠 전 완전히 벗는다. 모든 사람은 남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렇게 살고 싶고 인정받으면 행복을 느끼며 자식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남들이 나를 좋게 평가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쉽게 믿는다. 때로는 그것만이 삶의 목표인 양 사는 이도 있다. 이러한 지금의 문화는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정치에서 시작해서 전쟁 대목에서 극을 치달으며 정착된다. 자신을 드러내면 오히려 약점이 되고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어 가면의 적절한 사용법 처세서가 됐고, 벗고 사는 법도 적어 뒀다. 그러나 지금은 벗고 사는 법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가면 제작기법이 대흥행하고 있다. 학생은 없는 돈 털어 취업에 필요한 가면들을 생산하고 성인은 사람 따라 바꿔쓰는 가면들을 제작하고 있다.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상대에게도 거북함이 없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는 나이기 때문에 적절한 가면을 쓰고 단점을 가리며 남을 대한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연극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쟁도 줄고 필요 없는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으며 끝맺음이 매끈하다. 남은 그 가면을 나인 줄 착각하고 좋은 평을 주고 칭찬한다. 그 가면 뒤에서 나는 웃고 만족해한다. 심지어 가면을 쓰고 남을 대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늘 써와서 가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를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한 느낌이 있었는데 바로 꽃이었다. 꽃은 말이 없고 조용히 피어나 남을 행복에 젖게 한 후 침묵으로 그 생명을 뽐내다 시들어 땅으로 간다. 자연스레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어떠한 약품이나 포장 없이 태어날 때 유전자 그대로 삶을 살다 우주 속 원자로 다시 돌아간다. 참으로 진실하게 살다가는 걸 나는 너무도 늦게 알았다. 그렇게 늦게나마 얼마 전부터 나는 나로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서먹해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대했다면 괜찮은데 가면을 벗고 사니 서로 어색한 것이다. 내 의지로 가면을 벗은 나를 보여주기가 매우 힘들고 용기가 필요했다. 그 좋은 이미지를 다 버려야 했고 모난 모습이 있다면 그대로 보여주기가 매우 쑥스러웠다. 사람들은 다시 가면 쓰기를 바랐지만 나는 거부했고 오늘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산다. 흔히 그 가면을 일컬어 예절이라고 말한다. 가면을 벗으면 예절 없는 인간이 돼버린다. 어느 정도 가면을 쓸 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둥그스름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참 나를 보여주는 일이 왜 서먹할까? 미래는 모른다. 단 1초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사실이며 빼도 박도 못한다. 지금 나를 가리고 살면 과거의 나는 가면을 쓴 나로 남게 된다. 그러나 지금 벗으면 나머지 삶은 참 나로 남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만약 가면이 뭔지 모르면 3살 미만의 아이와 대화를 해보는 것을 권한다. 가면이 뭔지 바로 알게 된다. 가면을 쓸 이유가 없는 존재는 가면이란 단어조차 모른다. 아프면 울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우린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적어도 내 경험엔 아파도 참았고, 배고파도 기다렸다가 먹고, 졸려도 참고 일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우린 많은 가면을 소장하고 산다. 살며 많은 학설을 들어왔다. 그 가운데 사회적인 인간과 공동체를 읽어온 이유는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면을 쓰고 같이 살 것인가 아니면 참 나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할 때가 온다.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 수 있다. 선택과 용기다. 어떻게 사는 삶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지 우리는 배워서 알 수 있다. 나를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 가는 책들도 많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권장한다. 아주 쉽고 그 길은 곧 습관이 된다. 이 가면에 관한 기술서가 참 나를 대신해 살아간다. 가면을 벗는 일이 용기다. 아주 어색하며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가게 된다. 외면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진실한 내 모습을 많은 가면이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도 벗고 살기를 권하는데 왜 벗어야 할까? 그 이유는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다. 자연과 가까워져야만 동맥 연결이 가능하다. 최대한 가까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우습게 대하고 별다른 값어치를 느끼지 못하고 산다. 때론 밟고 지나도 별것 아닌 꽃을 보며 ‘저 작은 꽃이 무슨 힘으로 수백 배나 더 큰 사람을 제 앞으로 오게 하는가?’를 생각한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관심이 전혀 없다. 기계나 아스팔트를 보고 감탄하는가?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들, 예를 들자면 비나, 눈, 바람, 꽃, 나무, 동물 같은 것들에 사람은 눈길을 준다. 그리고 자꾸만 그것들과 더불어 쉬려 한다. 요즘엔 아예 그 자연을 벗 삼으려 개발되지 않은 곳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연스러워지고 싶어 하는 본능이다. 자꾸만 포장하려 드는 이유는 뭘까? 주름을 숨기고 보톡스를 주사하는 이유는 뭘까? 습관이 만들어 준 가면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살아왔다. 습관이 돼버렸고 써야만 편하다. 그것이 남을 대하는 예절이라 배웠고, 특히 집 밖으로 나갈 땐 반드시 가면부터 챙긴다. 그 이유는 상대도 가면부터 챙겨 나오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민낯으로 살지 못하는가. 거짓말은 정치인을 꿈꾸면 쉽게 배울 수 있고, 법 테두리 안에서의 사기는 홈쇼핑을 보면 되고, 진실처럼 보이는 교묘한 추악함은 언론을 보면 된다. 사방 천지가 가면이고 참된 인간을 맛보기엔 힘든 세상이다.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종 시골에 계시는 어르신들을 본다. 그분들에겐 가면 따위는 없다. 예쁘면 예쁘다고 말하고 못생겼으면 못생겼다고 말한다. 위에서 예를 든 3살 미만 아이와의 대화 내용과 흡사하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면 서로 끌어안는다. 하나둘 가면이 늘어갈 때 우리 몸은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다. 벗지 못하는 이유는 민낯을 싫어하는 가면들 때문이다. 어차피 그들과 살아야 하는 숙명이 숨구멍을 막아버릴 때가 있다. 그렇다면 그 가면들을 떠날 것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잘못된 전통이나 습관을 바꾸려 온갖 노력을 했다. 개인이 집단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며 절망도 따른다. 우수한 선진국들의 기업을 보면 프로젝트에 실패한 사람을 쉽게 해고하지 못한다. 그 사람만이 왜 실패했는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가면을 벗자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아니라 아예 프로젝트에 실패한 일조차도 숨기고 산다. 진실을 말하면 역적으로 몰아간다. 민낯은 진실을 말할 때 따돌림을 당한다. 속으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가면을 벗을 때 참된 서로를 볼 수 있다. 왜 서로 가면을 쓰고 만나는가. 이젠 때가 됐다. 지식은 열렸고 10살 어린이가 데카르트를 읽고 상대성이론을 공부하는 시대다. 민낯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볼 때가 왔다. 가면을 쓰고 말하는 것을 서로가 뻔히 아는 데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민낯이 가면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가 지금이다. 예절 들먹이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이유는 해보지 않아서다. 흔히 말하는 꼰대질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그 두려움에 벗지를 못하는 것이다. 본인 명함에 전과자처럼 빨간 줄 그어지는 것 같은 모욕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머지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모르고 검지만 뻗어 댐을 웃자.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다리가 쭉 펴지며 불면증도 사라진다. 내가 가면을 벗고 자연과 보다 가까워지며 겪는 다양한 변화 중 추천할 만한 일은 입이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철학자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살기 위한 첫걸음은 가면 벗기에서 시작한다. 2023.01.08. 09:15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