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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文  Apr 30 2023
네 시간 - 윤영환 한가지 계명만 아는 동그란 건반에 피를 담은 호스가 감겨있다 사정없이 찔러대는 두 개의 굵은 바늘이 만드는 동맥과 정맥의 하모니 짜릿한 피의 흐름은 엄지발가락을 돌아 다시 심장으로 올라오고 가끔 하늘을 향해 뻗치는 솜털들과 육신의 경련을 아랑곳하지 않는 저 기계의 냉정함에 몸을 내맡긴다 살아야 하니까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힘겨운 네 시간에 이틀을 살고 이미 벌집이 된 팔을 들고 새벽바람 맞으며 모레도 기계 옆에 누워 네 시간을 온전히 바치겠지 살아야 하니까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이어폰에서 흐르는 맑은 피아도 소리에 눈을 감으면 또르르 눈물이 흐르고 지난날을 후회로 몰아넣는다 자신을 스스로 구속한 무딤에 무너진 나약한 육신 무심히 돌아가는 무정한 저 기계와 유기체로 보내는 네 시간은 억울하다 강제로 들어오는 저 피는 내가 보낸 피 하지만 돌아올 땐 광견병에 걸린 유기견에게 피를 받는 느낌이다 스스로 내어준 위대한 나의 자유는 저 호스를 따라 사정없이 흘러간다 스르르 지쳐 잠이 들 때 저 호스 어느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 구멍을 내준다면 고요히 참 잘 잘 텐데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약속을 누군가라도 해준다면 찰나를 행복으로 비겁하게 장식하며 마저 살리라 2023. 01.03 03:44
風文  Apr 30 2023
정거장 기차역을 향해 도심을 걷고 있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가야만 한다 이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다들 의무인 양 운명인 양 같이 걸어왔다 보도블록 아래로 흐르는 묘한 기운 하나의 생명체로 역사를 쓰며 살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영혼들 어디서 왔는지 모른 체 심장 뛰다 가버린 내겐 의미 없는 박동들 그들의 숨소리에 보도블록 틈새로 흙이 튄다 도로를 모조리 뒤집어 일으켜 세우고 싶다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싶다 지친 사람들은 의자 보란 듯 대기실 바닥에 눕는다 굳은살과 주름들은 순박한 노동의 나날을 노래하고 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옷가지들을 걸치고 있다 낡은 사진 속 학사모 쓴 자식들에게 입 맞추며 우는 할아버지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기실 문을 두리번거리며 애태우는 중년의 남성 도망치려다 묶여와 내동댕이쳐진 아이를 업은 엄마 차례로 화물칸에 올라타며 떠났고 내 앞에서 정원이 차버렸다 다음 열차까지 시간을 벌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차표는 내게 답을 준다 지니고 있던 것은 번호표 내 이름은 없다 나 역시 무명의 영혼으로 가는가 화물열차 사라진 건너편 정거장 같은 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다 열차를 치장한 리본 조각들, 가지런한 가르마의 양복 가슴 금배지, 주변의 환한 미소들의 배웅, 역장은 수기로 실록을 쓰며, 관악대의 웅장한 소리를 뒤로 금속 마찰음도 없이 열차는 미끄러진다 저들을 위해 노동하다 끌려온 번호표들은 다들 의무인 양 운명인 양 화물칸에 올라탄다 이 정거장에 내려오면 그간 떠들었던 종착역을 묻지 않는다 꺼내 보고 싶다 저들의 심장도 붉은지 윤영환風磬 : 20060314 17:40 詩時
風文  Apr 30 2023
風文  Apr 30 2023
주정 (酒酊) - 윤영환 봄을 노래하면 여름을 기다리나보다 합니다 봄을 봤다면 봄을 노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당신의 봄노래를 들어야만 봄인 줄 아는 사람 없거든요 사랑을 노래하면 외로워하나 보다 합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이미 식었거나 떠났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차분히 앉아 사랑을 써 내릴 시간이 없답니다 효도를 말하면 그 사람 측은해 보여요 살아계실 때 섬기지 못했거나 지금 효도한다고 쇼하는 것입니다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울 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효도가 입버릇 돼버렸으니까요 이슬비에 옷 젖어 화내는 사람 없어요 각오하고 걸어왔거든요 소나기 맞고 옷 젖으면 화내죠 비 맞을 각오 안 했거든요 당연한 것들과 남들 다 아는 것을 노래하고 싶지 않아요 침묵 속에 자연스레 흘러야 하는 것들을 들추고 싶지 않거든요 지난해 담근 김장김치 냄새나는 단어들을 찾고 있어요 살아온 경험에 그것이 사는 냄새라고 믿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정한 원고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쉽게 맛을 잃어버리는 겉절이만 불러대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냄새만 맡아도 어떤 김치를 먹었는지 알거든요 주정이 난 참 싫어요 지난해 담근 김장김치랑 겉절이랑 섞어 부르거든요 우길 수 없겠네요 나는 알거든요 술이 들어가야 쓰니까. 2006.04.30 06:38 詩時